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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차 종의원 총회, 중앙대교당에서 개최제 9차 종의원 총회가 지난 26일 오후 1시 중앙대교당에서 열렸다. 이날 총회에는 윤석산 교령, 김성환 연원회 의장, 김산 연원회 부의장, 이범창 종무원장, 정덕재 감사원장, 신명식 유지재단 이사장, 이미애 교화관장, 정갑선 교무관장, 최인경 사회문화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최흥규 부의장의 집례로 진행되었다. 총회는 점명(성원보고)-개회-청수봉전-심고-주문 3회 병송-인사말에 이어 윤석산 교령, 김성환 연원회 의장의 격려사, 전차회의록 보고, 의안심의 등으로 이어졌다. 선우철수 종의원 의장은 인사말을 통해 “바쁜 와중에도 정기총회에 참석해 주신 종의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희가 오늘 결산에 대한 심의를 마치면 종의원으로서의 의무는 오늘로 마무리가 되는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정성과 예의를 다해서 마지막까지 충실히 결산을 마무리해 주셨는데, 오늘 회의에 잘 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시느라고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밝혔다. 윤석산 교령은 격려사에서 “오늘 종의원 총회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참석해 주신 종의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교단의 살림을 모두 맡아서 해주시는 분들이 오늘 예산 심의를 잘 받아서 유종의 미에 정점을 찍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김성환 연원 회의장은 격려사에서 “우리 종의원은 지난 3년 동안, 어느 때보다도 일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제일 중요한 교헌 개정도 발의하시는 등 일을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 3월 20일이면 우리가. 새로. 교령님을 모셔야 하고 또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훌륭하신 분을 교령님으로 잘 모시도록 여러분께서 많이 노력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도 우리 교단에는 현재 어려운 현안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더 신경 써주시고, 성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제 9차 종의원 총회는 포덕 165년도 천도교중앙총부와 천도교유지재단의 사업 결산안 등을 안건으로 심의하였다. -
윤석산 교령, 민족대표 33인 후손 초청 오찬윤석산 교령은 지난 2월 25일 민족대표 33인 유족과 오찬을 같이하며 3·1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참석한 유족들은 정유헌 민족대표 33인 유족회 대표(의암 손병희 성사 후손), 이기대 민족대표 33인 유족회 부대표(이승훈 선생 후손), 이흥자 전 천도교여성회본부회장(나인협 선생 후손), 홍래준(홍기조 선생 후손), 양쌍승(양한묵 선생 후손), 이상호(이종훈 선생 후손), 최인경 천도교중앙총부 사회문화관장(홍병기 선생, 의암성사 후손) 등 7명이었다. 윤 교령은 “세월이 흘러서 후손 분들도 다들 고령이 되셨는데, 민족대표 33인의 3·1 독립정신을 다음 세대에가 이어갈 수 있도록 마음 보태주시길 당부드린다. 천도교에서도 도울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보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정유헌 유족회 대표는 “금년까지는 종로구청의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으로 3·1운동 기념행사를 하였는데 내년부터는 33인 유족회에서 직접 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천도교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셔서 성역화 사업과 함께 좋은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밝혔다. 또 유족 홍래준씨는 “내 나이가 93세인데, 내가 한 가지 섭섭한 건 유관순이 3·1운동을 주도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왜곡된 역사가 참 안타깝습니다. 유관순 17살 학생인데 어떻게 3·1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사실을 바로잡지 않고 방치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꼭 바로 잡아야 합니다.”라며 천도교가 3·1운동을 주도했음을 세상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해월신사 법설 : 천지이기 p.242 -
[칼럼]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중심으로 탑골공원을 성역화하라3·1절이 다가온다. 몇 해 전에 3·1절 100주년 기념행사를 한 것 같은데 올해가 벌써 106주년이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전국을 뒤덮었고, 중국, 일본, 미국 등 해외까지 넘실댔다. 유구한 역사를 자주민으로 살아온 대한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 자유민으로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것이 3·1운동이다. 이 만세운동의 맨 앞줄에 민족대표 33인이 있었다. 우리 독립운동 사상 최대이며 최고의 성과라고 일컬어지는 3·1운동의 성공에는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선생 없이는 불가능했다. 선생은 천도교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3·1운동에 집중했다. 선생은 3·1운동의 성공을 위해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을 정하고 민족대표를 선정했다. 처음에는 명망있는 구한국 관료를 인물로 민족대표를 구성하려고 했으나 이들이 거부하자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인물을 찾아 기독교와 불교와 연합해 33인의 민족대표를 선정했다. 민족대표에는 전국의 명망있던 천도교 중진 15명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3·1운동의 민족대표 선정,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등이 천도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3백만 교도의 국내 최고의 종단으로 천도교를 성장시켜 3·1운동을 영도한 인물이 선생이었다.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기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만들었고,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승전보를 울렸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지난(至難)한 독립운동 속에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다. 우리의 해방이 연합국의 전리품이었지만, 3·1운동으로 시작한 지난한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의 건설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의 현대사는 3·1운동을 기점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다시 찾은 조국의 땅을 밟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영도한 의암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는 귀국해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도 3·1절을 맞아 여러 차례 선생의 묘소를 참배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게 선생은 자신의 갈 길을 열어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 천도교는 3.1운동 이후에도 국내에서는 어린이 운동으로 대표되는 신문화운동, 6·10만세운동, 신간회 운동, 조국광복회 운동, 멸왜기도 운동 등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국외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만주와 연해주에서 전개된 무장 독립전쟁에도 천도교인들이 동참하였다. 천도교는 일제강점기 국내외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는 의암 선생의 뜻을 잇겠다는 교인들의 결기가 담겨있었다. 해방 이후 천도교단에서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공간인 탑골공원을 독립운동의 성지로 만들려고 했다. 1950년 천도교인들은 탑골공원을 ‘3·1혈쟁발상지(血爭發祥地)’로 명명하고 “독립운동기념비”의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동족 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그러나 천도교에서는 3·1운동이 시작된 탑골공원을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탑골공원이 독립운동의 성지로서의 위상을 되찾은 것은 1966년 5월 19일 의암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면서 이루어졌다.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한 선생의 동상 건립은 당시 국민 성금이 약 450만 원을 모금한 범정부차원의 사업이었다. 이날 동상 제막식에서 당시 문교부장관이 대독한 대통령의 추념사에는 “(손병희 선생) 동상이 공원의 한낮 장식에 그침이 없이 부단한 경각과 격려의 표상으로 남아 자주, 자립, 번영의 새 한국을 세워나가는 우리에게 자신과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을 기원하면서”라며 선생의 업적을 칭송하고 선생의 정신을 대한민국의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자고 강조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거룩한 선생의 정신과 업적은 이후 독립운동의 주도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불굴의 용기와 역량이 대외적으로 널리 인식되어 한국 독립에 있어서 국제적 협조를 얻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라고 선생의 독립운동을 찬양하며 동상 건립의 의미를 되새겼다. 동상 건립 이후 천도교에서는 매년 3·1절 기념식을 갖고 탑골공원을 찾아 시민들과 함께 선생의 동상을 참배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처럼 탑골공원의 상징과 같은 의암 선생의 동상이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탑골공원 성역화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의암 선생의 동상을 옮기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탑골공원이 고려시대 흥복사라는 절이 조선시대 원각사로 바뀌었고 이후 폐사된 절의 10층석탑이 유명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탑골공원이 우리 역사에서 그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106년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진원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3·1운동의 중심에 의암 선생이 있다. 탑골공원의 성역화사업은 필요하다. 우리 민족사의 상징인 이곳 탑골공원이 서울의 랜드마크로도 인식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이다. 성역화사업을 통해 잃어버린 탑골공원의 명성을 복원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탑골공원의 역사적 상징을 지닌 의암 선생 동상을 중심으로한 3·1운동에 대한 시설 확충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탑골공원의 역사적 의미를 가장 잘 살리는 성역화사업이다. 그렇지 않다면 탑골공원은 독립운동의 상징이 아닌 그냥 서울의 흔한 유적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
보훈부장관, 광복 80주년 3·1절 맞아 의암성사 묘소 참례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 3·1절을 앞두고 국민이 함께하는 ‘독립유공자 묘소 참배’ 캠페인을 추진하는 국가보훈부에서는 첫행사로 24일(월) 의암 손병희 성사 묘소를 참례하였다. 이날 오전 11시 강북구 우이동 의암성사 묘소를 참례한 강장관과 육사생도, 학생들은 봉황각 앞 뜰에 모여서 봉황각 건립 유래와 의암손병희 성사의 3·1 독립 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국가보훈부(장관 강정애)는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광복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독립 정신을 기억·계승하기 위해 3·1절을 앞둔 24일(월)부터 오는 28일(금)까지 ‘광복 80, 독립유공자 묘소 참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광복 80주년 3·1절을 맞아 진행되는 독립유공자 묘소 참배를 통해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헌신하셨던 애국선열들의 생애와 독립 정신을 모두가 함께 기억·계승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며 “정부는 독립유공자와 유족분들에 대한 예우에 정성을 다하면서 모든 국민이 함께하는 ‘모두의 보훈’ 문화 확산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독립유공자 묘소 참배는 전국 4개 국립묘지(서울․대전현충원, 제주호국원, 대구신암선열공원)와 국립묘지 외 합동 묘역, 그리고 개별 묘소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유공자를 대상으로 닷새 동안 집중적으로 진행한다. 독립유공자 묘소를 대상으로 한 동시 참배 캠페인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중앙총부에서는 이번 묘소참례에 이범창 종무원장을 비롯하여 사회문화관장, 차장,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여성회 교화부장 등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
저출산 시대, 인연의 가치를 되새기는 ‘한울인연 캠페인’최근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2019년 출생아 수는 30.3만 명으로 급감했으며, 합계출산율도 0.92명까지 떨어지는 등 인구 감소의 속도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2025년에는 노인 인구가 1천만 명을 돌파하며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천도교는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고 긍정적인 결혼관을 형성하기 위한 ‘한울인연 캠페인’을 추진했다. 현대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노동시장의 격차와 불안정한 고용, 교육 경쟁의 심화, 높은 주택 가격 등의 요인으로 인해 젊은 층이 결혼과 출산을 부담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성차별적 노동환경과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거나, 출산 후 노동시장을 떠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문화 확산까지 더해져, 만남의 기회 자체가 줄어들면서 결혼율 감소에 더욱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저출산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와 사회 전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젊은 세대가 결혼과 출산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고용 환경과 주거 지원, 육아 인프라 확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에 천도교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한울인연 캠페인’을 추진했다. 이 캠페인은 긍정적인 결혼관을 확산시키고, 결혼과 출산, 육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천도교는 캠페인 영상을 제작하여 홍보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이번 ‘한울인연 캠페인’ 영상은 결혼과 출산을 단순한 의무가 아닌 삶의 중요한 가치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내용을 담았다. 해월신사님께서는 "나의 부모는 첫 조상으로부터 몇 만대에 이르도록 혈기를 계승하여 나에게 이른 것이며 나의 정신도 후대로 이어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나의 삶이 단순히 개인만의 삶이 아니라, 수많은 조상과 후손이 연결된 공동의 삶임을 의미한다. 한울인연 캠페인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인연의 소중함과 가정을 이루는 의미를 사회에 전하고자 한다. 천도교중앙총부 최인경사회문화관장은 “결혼과 출산이 개인의 선택으로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중요한 요소임을 알리는 것이 이번 캠페인의 핵심”이라며 “한울인연 캠페인을 통해 인연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젊은 세대가 결혼과 출산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와 사회가 더 많은 지원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육아 환경 개선과 정책적 뒷받침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도교 한울인연 캠페인은 단순한 출산 장려 정책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가족 문화 정착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연대 속에서 출산과 양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성세대와 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이번 캠페인은 보건복지부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영상보기 : https://www.youtube.com/watch?v=8xb6B3ZglpA -
생활 속 깨달음의 실천, 인터넷신문에서 만난다인터넷천도교신문에 새로운 코너 ‘일용행사가 도’(道) 코너를 신설한다. 해월신사의 말씀 ‘도는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용행사가 다 도 아님이 없나니’에 따라 이 코너는 천도교인으로서 일상생활에서 느낀 단상과 깨달음,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신앙의 모습을 자유롭게 나누는 공간이다. 교리의 깊이를 탐구하는 글과 함께 일상에서 소소하게 깨달은 작은 이야기나 감동적인 순간을 나누는 글을 공모하여 게재할 예정이다. 인터넷천도교신문 편집부는 "새롭게 신설하는 코너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며 주제의 제한이 없고, 글의 길고 짧음의 제한도 없는 만큼 교인 누구나 쉽게 참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교인들이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 공감하고 격려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밝혔다. * 원고 접수 : 인터넷천도교신문 편집부 이메일 (news@chondogyo.or.kr) ● 문의 : 02-6488-6863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모든 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
다함께 행복한 세상-생각과 가치관의 중요성인간이 온전하고 지속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수련을 통한 '자기 구원'에 더해, 의식주와 안전 등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어떤 공동체 속에서 사느냐가 개인의 행복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공동체를 바람직하게 마련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우주관과 신관, 인간관, 세계관과 가치관 등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는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
중편소설 <하얀 혁명>(7)(지난 호에 이어) 이상한 일이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초막이 보이지 않았다. 경사진 언덕을 삼단으로 깎아 지은 초막 자리엔 갯바람에 흩어진 사구처럼 헐리고 쓸린 집터만이 추비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고향 집에서의 따뜻한 하룻밤을 생각했던 북접군은 폐허로 변해버린 터전 앞에서 망연자실 투레질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눈길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너럭바위 옆에서 오백 년을 견딘 느티나무였다. 고목은 거지꼴로 돌아온 북접군을 나무라듯 잎을 모두 지운 채 된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너럭바위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온통 늑굴(勒掘) 당한 무덤처럼 처연한 형색뿐이었다. 때마침 중늙은이 하나가 짚북데기 비옷을 덮어쓰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가 동학군을 보자 오던 걸음을 되짚어 내려가며 말했다. “이녁들이 떠나고 나서 왜놈이 쳐들어왔어. 여기뿐 아니라 왼 동네를 쑤시고 다니며 불을 싸질렀지. 내가 늘그막에 얻은 애 종자까지 태워 죽였단 말여. 이매망량 악다구니 같은 그놈들이. ” 예리성(曳履聲) 하나 없이 사라지는 노인을 보자 그도 이승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북접군은 경풍(驚風) 맞은 아이처럼 비척거리며 노인이 앞서간 청산 읍내를 향해 뜬 발길을 옮겼다. 청산은 평야가 넓고 토질이 비옥해 예로부터 실속 있는 부자와 자작농이 많이 살던 동네였으나 동학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모두 종적을 감추었다. 북접군은 관원들마저 도망친 동헌과 인적이 사라진 빈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는 동안 관군과 민보군의 닦달에 이리저리 숨어 있던 농민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고 나와 동학군과 어울렸다. 스산한 귀향의 밤, 동학군과 농민은 윤똑똑이 말치레할 무용담도 없이 울음 반 눈물 반으로 화란의 세월을 탓하며 긴 밤을 함께 지새웠다. 하룻밤 사이에도 북접군을 토멸하려는 추격군의 동향이 시시각각 전해져왔다. 이번에 따라붙은 진압군은 용산 전투에서 패배한 지방군과 달리 경군과 일본군이었다. 무장과 전량이 빈약하고 입성도 남루한 북접군이 대적하기엔 벅찬 상대였다. 한시라도 빨리 익숙한 터전으로 자리를 옮겨 방비를 서둘러야 했다. 목적지는 대도소가 있는 보은 장내리. 거기에 가면 북접군이 기거하던 사백여 채의 초막과 대도소 건물이 남아 있을 것이며, 견고히 쌓은 돌담과 무엇보다도 동학군을 지지하는 지역민들이 반겨줄 것이었다. 대열을 둘로 나누어 1대는 원남을 경유하고, 2대는 보청천을 따라 관기 쪽으로 방향을 잡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틀 걸려 장내리에 도착한 북접군을 맞이한 건 처참하게 부서진 잔해뿐이었다. 대도소와 초막은 간데없이 사라졌고, 불에 탄 기둥과 부서진 서까래가 시린 눈밭에 나뒹굴고 있었다. 북접군은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폐허가 된 터전을 둘러보았다. 깨진 장독대엔 말라비틀어진 메줏덩어리가 토사물처럼 뒤엉켜 있었고, 허물어진 돌담 사이로 들바람에 흩날리는 새앙쥐 털이 허옇게 썩어가고 있었다. 공주 전투를 위해 북접군이 자리를 뜬 직후 관군이 쳐들어와 대도소를 폐허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문바위골에 이어 장내리까지 쑥대밭이 된 걸 보자 북접군은 그만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사정이 이러니 수련이 깊지 않은 병졸 몇이 보은 읍내로 달려가 동헌과 관사(官司)를 닥치는 대로 부수고, 민가를 뒤져 식량이 될 만한 것이라면 소, 돼지는 물론 씨오쟁이에 든 강냉이까지 끌어냈다. 수뇌부가 말리고 각 포의 접주가 나서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선 당장 오천 명에 가까운 대군이 숙영할 장소부터 찾아야 했다. 5. 횃불 북접군이 찾은 곳은 말티재를 멀리 끼고 돌아 만나는 북실마을이었다. 북실은 평지가 넓고 골이 깊어 대군이 주둔할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 추격군과의 거리도 멀어 하룻밤 유숙하기에 이만한 적지가 없었다. 마을 초입에 파수꾼을 배치하고 서둘러 숙영 준비에 들어갔다. 본진은 평지인 바깥북실에, 경기포는 야산을 안고 있는 안북실에 자리를 잡았다. 민가는 비어 있었으나 몇 집 되지 않았기에 마른 논바닥에 볏짚을 깔고 볏단과 장작을 날라 화톳불을 피워 늦은 잠자리를 마련했다. 저녁 끼니를 위해 하는 수 없이 읍내에서 끌고 온 소와 돼지를 잡았다. 밤이 되자 눈발이 짙어지기 시작하더니 해가 떨어지면서 이내 목화송이처럼 굵어졌다. 눈이 쌓인 진중(陣中)은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포근해 보였으나 버성긴 입성으로는 눈 호강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도 분분한 눈발 속에 불티가 날아오르자 너른 북실벌이 때아닌 정월대보름 쥐불놀이 한마당같이 정겹게 변했다. 북접군은 계속된 행군과 피로에 지쳐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무 데나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젖은 거적때기를 덮은 위로 두꺼운 눈 이불이 쌓이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고추바람에 흔들리는 화톳불만이 춥고 헐벗은 이들을 시리게 얼비추고 있었다. 북접군은 너무 지쳐 있었다. 척왜양창의의 기치를 내건 혁명군이었지만 군기가 엄한 군대도 아니고, 군 전략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군기가 엄했다면 파괴된 장내리 대도소를 보고 광분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았을 것이고, 냉철한 전략가가 있었다면 아무리 피곤해도 평지에 숙영지를 펴지 않았을 것이다. 광분한 탓에 보은 읍내에서 민폐를 저질러 밀고자가 생겨났고, 개활지에 지은 숙영지는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동태가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눈이 와서 야습이 없으리라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초입에 파수꾼을 두기는 했어도 그들 역시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농민에 불과했다. 시간은 해시(亥時)를 넘어가고 있었다. 북실은 눈 속에 파묻혀 잠들었으나 이곳을 향해 접근해오는 한 무리의 군사가 있었다. 상주 유격장 김석중이 이끄는 민보군 240명과 후비보병 19대대 소속 일본군 37명이었다. 상주 민보군은 대부분 포수 출신으로 화승총을 휴대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유격장 김석중은 병서를 많이 읽어 병법에 능한 유생으로 이번 야습도 그가 주장한 계책이었다. 그런 그들이 일본군 장교의 지휘하에 3개 조로 나누어 숫눈길을 헤치며 접근해온 것이었다. 이걸 알 리 없는 북접군은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 아침에 움직일 요량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추격군은 고양이 걸음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고, 흩날리는 눈발 속에 발자국마저 지워졌다. 추격군 척후병이 호리병 지나는 뱀처럼 움직여 모닥불을 쬐고 있던 최전방 파수병을 낚아채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추격군은 파수병을 심문해 북접군 배치 상황을 파악한 뒤 3개 방향에서 일제사격을 가하며 돌진해 들어왔다. 오천 명의 대군 속으로 삼백 명이 채 안 되는 돌격대가 기습을 시작한 것이다. 화톳불을 쬐고 있던 파수병이 장전할 틈도 없이, 논바닥에서 잠자던 사람이 일어나 눈 이불을 털 사이도 없이, 민가 안에서 잠들어 있던 사람이 문고리 당길 시간도 없이, 빗발치듯 날아드는 총알에 속수무책 쓰러졌다. 깨어 있던 이들도 혼비백산 도망치느라 넋이 나갔다. 민보군은 노루 사냥 나온 포수처럼 화승총을 쏘아댔고, 양총을 든 일본군은 도망치는 무리를 뒤쫓으며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저항하던 대열의 선두가 피를 쏟으며 나뒹굴자 뒤따르는 무리는 도망도 못 치고 오금이 접혀 주저앉았다. 화톳불 장작이 발길에 차이면서 쥐불 통이라도 던진 듯 온 벌판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추격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북접군을 쏘아 쓰러뜨렸다. 눈밭에 꽂히며 사그라든 장작개비에서 피어오른 연기도 북접군의 발목을 잡았다. 매캐한 연기가 눈을 가리고 기침을 터뜨리게 해 추격군 귀에는 ‘나 여깄소’하는 과녁판 소리로 들렸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사냥이었다. 토끼몰이 섶사냥이었다. 바깥북실 들판은 한순간 살육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추격군은 벌통 앞에 도사려 앉은 말벌처럼 북접군을 도륙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논바닥에 흩뿌려진 더운 피가 눈을 녹이며 벼 밑동을 드러냈고, 떨어져 나간 팔다리는 흘린 장작개비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화톳불이 사그라들어 뿌연 눈밭으로 변한 벌판은 흑백 수묵화처럼 희고 검은 핏빛으로 벌바람에 흔들렸다. 눈발이 더욱 굵어져 쓰러진 주검을 하얗게 덮었다. 바깥북실에 숙영하던 북접군의 완벽한 패배였다. 그러나 안북실의 상황은 달랐다. 안북실 야산에 진을 치고 있던 경기포가 반격을 시작했다. 고지를 선점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경기포가 안북실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가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안북실의 주둔 사실을 몰랐던 추격군으로서는 의외의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경기포는 사거리를 좁혀 축차적으로 공격해왔다가 물러나며 사격을 이어갔고, 추격군은 정면과 좌, 우측 세 갈래로 나누어 반격을 시작했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밤새 이어졌다. 경기포는 무기에서는 열세였으나 숫자가 많고 고지를 선점하고 있어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팽팽하던 균형이 깨진 건 시간이 갈수록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탄환 때문이었다. 몇 정 되지도 않는 모젤 소총은 총알이 떨어져 무용지물이 되었고, 화승총은 사거리가 짧아 멀리 있는 적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반면, 추격군의 스나이더 소총은 먼 거리에서 날아와 사정없이 경기포를 두들겨댔다. 고지 위에 엎드려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총에 맞아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병사도 있었다. 경기포의 공격이 지지부진해지자 추격군은 공격 방향을 바꾸어 양쪽 능선으로 산개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기가 없는 경기포는 철창과 환도, 맨주먹으로 맞서 싸웠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바깥북실에서의 살육전이 안북실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산은 시체로 뒤덮였고, 바윗돌에 쌓인 눈이 피에 젖어 녹아내렸다. 추격군의 참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뒷고개로 도망치는 북접군을 쫓아가며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바깥북실, 안북실, 하판리, 백현리 전체가 피의 강으로 흘러넘쳤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동학군을 말살하는 초멸의 대학살, 천살(擅殺)이었다. 이창진 수접주와 한규석이 이끄는 이천포의 한 무리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절골을 넘어 학림리로 도망쳐 들어왔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이웃 동네 북실에서 벌어진 전투 소리에 놀라 황급히 몸을 피했지만, 촌장 김교무를 비롯해 남아 있던 이들이 도망쳐온 이천포군을 마을 뒤편 대밭에 숨겨주었다. 그러나 뒤따라 밀고 들어온 추격군이 북접군을 찾기 위해 지른 불로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어버렸고, 흰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온 마을사람을 북접군으로 오인해 무차별 살상이 벌어졌다. 몇몇 젊은이들이 불붙은 장작개비와 쇠스랑을 치켜들고 대항해보았으나 총을 든 군인에겐 적수가 되지 못했다. 새도록 쏟아지는 눈발 속에 마을은 밤새 불탔고, 총성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규석과 이창진은 대밭에 숨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한규석은 떨어져 나간 한쪽 팔목에서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새벽 한기로 얼어붙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남은 한 손으로 이창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을은 화염에 불타 일렁이고 있었고, 이창진의 얼굴에서는 생의 마지막 그림자가 시취(屍臭)를 풍기며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그의 한쪽 눈이 함몰되어 꾸덕꾸덕 마르면서 그 위로 눈이 내려와 하얗게 덮였다. 한규석은 감각이 사라진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부서져 나간 정강이뼈가 드러나면서 풍화된 규화목처럼 눈발에 시렸다. 한규석은 이창진을 감쌌던 손을 뽑아 속적삼 안에 넣어두었던 전투상보(戰鬪詳報)를 꺼냈다. 전투를 치를 때마다 꼼꼼히 적어왔던 귀 닳은 두루마리가 핏물에 젖어 있었다. 남은 한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검은 미명 속에 깨알같이 적어놓은 글귀들이 하얗게 떠올랐다. 이제는 더이상 쓸 수 없게 된 전쟁의 기록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지난 석 달간의 일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두루마리였다. 한규석은 탄환 없는 혁명의 끝을 반추해 보았다. 한울님의 나라도 떠올려 보았고, 다시 개벽한 후의 세상도 그려보았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씀하신 해월의 음성도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생각의 형체가 잡히지 않았다. 형체는 없고 아련한 형상만이 날리는 눈발 속에 명멸했다. 눈 속 세상은 밝고 환했으나 대숲 속은 어둡고 추웠다. 후회는 없었다. 언제라도 한울님이 부르시면 믿음 하나만으로도 달려 나갈 것만 같았다. 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끊어진 팔목과 다리를 통해 체온이 빠져나가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닫히는 육혈(六穴)을 통해 치받아 들어오는 열기가 몸을 후끈 데웠다. 횃불의 종심에 닿은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다. 불의 떨림이 미처 이루지 못한 혁명의 형상으로 흔들렸다. 횃불 속의 하얀 혁명이었다. 횃불은 민가의 지붕이 타는 불꽃 배경 속에서 자라고, 흔들리고, 커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대숲에 고여 있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대숲을 휘젓고, 횃불을 휘젓고, 전답을 휘젓고, 송림을 휘저으며 퍼져나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어도, 먼 곳에서, 솔가지에 둥지를 튼 백학들이 시리고 지친 다리를 바꿔 딛기 위해 푸드덕 날아올랐다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여명의 붉은 기운이 학림의 대숲에 번지기 시작했다. 먼동이 트는 소리였다. 끝. (연재를 마칩니다.)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
감사원, 165년 결산 감사 실시감사원(원장 부암 정덕재)은 12월 20일(목) 수운회관 907호에서 정기감사 개회식을 하고 3일간의 정기감사를 시작하였다. 개회식에서 정덕재 감사원장은 “3년 동안 감사를 해오면서 여기 계시는 교령님, 종무원장님, 재단 이사장님, 여성회 회장님 또 각 기관장님과 총부에 계시는 동덕들께서 협조해 주신 덕분으로 대신사님 출세 200주년 마무리를 잘 해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헌과 규정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열심히 해 오셨고 또 더군다나 그 혼란한 시점에서 우리 윤석산 교령님과 종무원장님을 비롯한 교역자 모두 합심해서 마무리를 해 왔습니다. 늘 말씀드렸지만, 감사는 교헌과 규정을 잘 지켜서 교단 발전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빠진 게 있나 점검하는 겁니다. 감사기간 중에 건의 사항이나 고쳐야 할 사항이 있거나 교헌과 규정에 애매한 부분이 있으면 중앙 감사들께 말씀을 해 주시고 그 부분에 있어 업무 지침이 마련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도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달이 되면 새 집행부가 구성되는데 차기 집행부를 이어받으실 분들이 교단 발전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알찬 감사가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현암 윤석산 교령은 격려사를 통해 “지난 3년간의 정기감사를 돌아보면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업무 잘 점검하시고 감사원장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더욱 발전적인 감사가 되기를 당부드립니다. 수고들 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