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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제자의 뜻깊은 성금지난 5월 15일 스승의 날, 준암 박인준 교령의 내수도인 숙원당 정숙례 선도사의 제자인 김달현 씨가 중앙총부에 성금 100만 원을 기부하며 훈훈한 감동을 전했다. 김달현 씨는 초등학교 시절 숙원당 정숙례 선도사에게 배움을 받은 인연을 계기로, 스승의 깊은 신앙심과 천도교에 대한 헌신을 존경해왔다. 그는 “평소 스승께서 천도교를 독실하게 신앙하시는 모습을 보며, 천도교가 더 잘되어 세상을 밝혀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기부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달현 씨는 현재 아인병원(구 서울여성병원) 부원장으로 재직 중인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 신생아집중치료실(NICU)의 전담의료진으로 활약하고 있다. 아동 발달과 뇌 발달 분야의 전문가로서 의료 현장에서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육아멘토 닥터 달'을 통해 부모들에게 유익한 육아 정보를 전하고 있기도 하다.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아름다운 실천으로 보여준 김달현 님의 기부는, 천도교의 정신을 되새기고 사회에 따뜻한 울림을 전하는 귀감이 되고 있다. 사진제공 : 교령사 -
천도교, 의암 손병희 성사 순도 · 순국 103주기 묘소참례식 봉행포덕 166년 5월 19일, 천도교중앙총부는 의암 손병희 성사의 순도 · 순국 103주기를 맞아 서울 강북구 소재 의암 손병희 성사 묘소에서 묘소참례식을 엄숙히 봉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진강현 서울북부보훈지청장, 황정희 강북문화원장을 비롯한 주요 인사가 참석하여 성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교인 및 참례객과 함께 신앙의 근본을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참석자들은 성사의 가르침을 기리며 천도교 중흥과 민족 화합, 나아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실천을 다짐했다. 집례는 전명운 교화관장이 맡았으며, 박인준 교령의 인사말, 내빈 인사말 등이 이어졌으며 참석한 참례객들은 헌화를 하며 의암 손병희 성사의 숭고한 뜻을 되새겼다. 이번 묘소참례식은 의암 성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천도교 중흥과 민족 통합을 실현하며 나아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종단으로 거듭나기 위한 결의를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박인준 교령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1905년, 의암 성사님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하신 지 120년이 흐른 오늘, 우리는 다시금 성사님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성사님께서 염원하셨던 천도교의 이상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포덕 52년에 성사님께서는 교역자들을 모시고 이곳에서 2만 8천 평의 토지를 매입하시고, 이듬해 봉황각을 건립하여 수많은 교역자와 지도자를 양성하셨습니다. 그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3.1운동을 이끌었으며, 성사님께서는 천도교 중흥과 국운 회복을 염원하시며 순도하셨습니다. 이곳에 잠들어 계신 성사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후학들은 더욱 정진하여 천도교의 중흥을 이루고, 나아가 민족의 화합과 진정한 통일을 실현하며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종단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성사님을 기억하고 그 유지를 받들고자 함은 우리 모두의 결의를 다지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각 도가에서는 ‘환원 기도식’을 봉행하며, 신앙 실천과 성사의 뜻을 계승하는 경건한 시간을 갖는다. 사진제공 : 문범식 -
궁을행복요양원, 개원식 및 봉고식 성황리에 개최포덕 166년 5월 16일,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궁을행복요양원이 성대한 개원식 및 봉고식을 봉행하였다. 이번 행사는 천도교시천주복지재단의 주관으로 오전 11시부터 네 개의 세션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성충모 상임이사의 집례로 시작된 제1부는 ‘의절의 장’으로 막을 열었다. 김채옥 동두천교구 사회문화부장의 청수봉전에 이어 참석자들은 심고와 주문 병송, 그리고 천덕송 '우리의 길'을 함께 부르며 개원을 기념했다. 제2부 만남의 장에서는 성충모 상임이사의 사회로 개회선언, 내빈소개, 우창수 이사장의 환영사와 박인준 교령의 축사, 김성환 연원회의장 및 전진선 양평군수의 격려사가 이어졌다. 또한 시낭송가 조정숙은 박남준 시인의 시 '떡국 한 그릇'을 낭송하여 참석자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제3부 지혜의 장에서는 우창수 천도교시천주복지재단 이사장이 향후 사업계획을 발표했으며, 성충모 상임이사가 조직구성을 설명했다. 이어 참석자들은 천덕송 '우리 모두 즐기세'를 합창하며 화합을 다졌다. 마지막으로 제4부 화합의 장에서는 궁을식 만찬과 축하공연이 진행됐다. 대한민국파워웃음센터의 백옥례 원장 외 3명이 웃음과 힐링 공연을 선보이며 참석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행사는 이사장의 폐회사를 끝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참석자들은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이날의 소중한 순간을 기록했다. 궁을행복요양원은 교인 및 지역사회의 복지 증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사진제공 권윤호(동학문화해설사) -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성지순례 첫 일정으로 용담정과 대신사태묘 참례한국민족종교협의회는 5월 15일 오후 1시, 130여 명의 회원이 함께한 가운데 성지순례 첫 일정을 진행했다. 첫 방문지는 경북 경주시 현곡면에 위치한 용담성지와 대신사 태묘로, 이곳에서 참례식을 거행하였다. 참례의식 후, 회원들은 용담정과 용담수도원을 방문하였으며, 이곳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일대기에 대한 최상락 용담수도원장의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회원들은 이번 참례식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한국 고유의 종교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깊게 다졌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 관계자는 "이번 성지순례는 한국 민족종교의 뿌리와 정신을 되새기고, 회원들이 하나로 결속할 수 있는 기회"라며 "앞으로도 전통을 지켜가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성지순례는 용담성지 대신사 태묘를 시작으로 다양한 민족종교 성지를 순례하며 민족 종교의 가치와 정신을 체험하는 일정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사진제공 : 신주민 -
용담 성지를 신혼 여행지로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삼천포교구 선우당 김명숙입니다. 지난 4.12~13일 양일간 경주용담 동학교육수련원에서 율암 신명식 도정님의 주재하에 순원포 동덕들의 워크숍을 계기로 영등포, 수원, 성남, 부산시, 대동, 사천, 삼천포교구의 동덕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토론회를 주관한 도암 선도사께서 각자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교단 발전과 연원 발전을 위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시간을 갖자면서 남성 동덕 한 분, 여성동덕 한 분 이런 순으로 발언토록 진행해 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교단의 현실을 걱정하고 후손들이 신앙을 기피하려는 사회 풍조와 맞물려 걱정하면서 어린이 시일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발전방안을 꾸밈없이 제시해 주셨습니다. 저의 차례가 되어 남편(운암 최도수)을 만나게 되면서 천도교 신앙을 하게 되었고 용담으로 신혼여행을 오게된 것을 털어 놓으면서 저의 발언이 길어졌습니다. 저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도 없으며 또한 도력높은 숙덕 어르신들처럼 공부를 많이 하여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나는 신앙생활을 착실히 하고 있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저 평범하게 한울님을 제 마음속에 모시고 생활한다는 확신만은 항상 갖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지요. 이제부터 썩 대단하지도 못한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할아버님을 비롯하여 아버님, 그리고 시아주버님들까지 대대로 뿌리 깊은 천도교 집안 자손인 운암 최도수 동덕을 만났던 38년 전은 벚꽃이 만발하고 온 세상이 꽃 천지였던 봄날이었습니다. 저는 경남 고성이란 작은 지역에서 태어나 여중, 여고를 나왔고 대구대학교를 거쳐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무렵 남편의 고향인 삼천포에 처음으로 종합병원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1987년 여름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온 남편을 만나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만나면서 대화도중 천도교 사상과 1대 2대 3대 교조이신 스승님들의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그때까지 사실 저는 무신론자에 불과했으므로 솔직히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 먼 나라 이야기로만 여겨졌습니다. 3년여 동안 만나오면서 첫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저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밤잠을 설쳤으나 그때 저를 데리고 간 곳이 경주 용담정이었습니다. 조그만 트럭을 타고 몇 시간을 달려 겨우 찾아갔던 그곳, 용담정에서 처음으로 이 사람을 계속 만나고 또 미래를 설계한다면 나는 천도교 집안의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다지 가볍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무게감과 저를 짓누르는 뭔가를 느끼며 고민도 많이 했지만, 어느 순간 천도교인으로 살아가는 방법, 신앙생활의 첫걸음과 어떤 공부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답니다. 그렇게 포덕131년(1990) 10월 28일 수운대신사님 탄신일에 맞추어 지금은 환원하신 현암 최영윤 선도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주례사 내용 중 딱 한 가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념일만 되면 생각나는 쩌렁쩌렁하게 힘주어 말씀하셨던 그 내용! 어머님이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때 세 양동이의 피를 흘릴 만큼 큰 산고 속에서 너희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부모님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는 것 같이 봉양하라시던 그 말씀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결혼식 후 창녕 부곡 하와이로 신혼여행지를 정했다는 애길 듣고 그나마 기대를 했건만 결국 또 저의 신혼여행지는 경주 용담정이 되었습니다. 샛노란 한복을 차려입고 꽃고무신을 신고 비탈진 길을 둘이서 오를 때 쪽 길옆 산에서 반겨준 건 그나마 날다람쥐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딸 아이가 태어나 두 돌이 지날 무렵 화악산이란 곳으로 수련하러 같이 가자는 큰댁 형님이신 박둘덕 봉신당님의 애길 듣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굽 높은 신발까지 신고 성큼 따라나섰습니다. 그때 아마 총부에서 주최하는 여성회 수련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 삼천포교구에서는 윤상선 정미당님을 필두로 다섯 분 정도 참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새벽부터 출발하여 오후 늦게 화악산 밑 민들레 슈퍼 앞에 도착했을 땐 강행군에 이미 지쳐 있을 때였지요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름이라 신발을 벗고 계곡물을 건너서 늦은 저녁이 다 되어야 수도원에 도착했으니까요. 일주일이 일 년처럼 느껴졌던 고행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조언과 아낌없는 격려로 우리 일행을 이끌어 주셨던 정미당 윤상선 내수도님과 봉신당 박둘덕 큰형님의 은덕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첫걸음마를 내딛게 해주신 희생정신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화악산 수도원 수련을 기점으로 살아가면서 삶에 지치고 어려운 난간에 봉착했을 때 경주 용담수도원, 가리산수도원, 명동산 수도원 등으로 저의 마음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올해로 12년째가 되는가 봅니다. 남편의 하던 일마저 큰 어려움 속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저 또한 3교대 근무에 온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딸이 대학교 4학년 1학기 때 뜻을 가지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보겠다는 이야길 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새벽길을 가방 하나만 챙겨서 나섰습니다. 20여 년 전 한 번 가봤던 길을 묻고 물어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쯤에서야 화악산 입구 민들레 슈퍼 앞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 혼자의 몸으로 어둠 속 깊은 산을 오른다는 공포와 무서움이 먼저 앞서더군요. 마음을 다잡고 소리 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간절한 심고를 드리고 주문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깜깜한 밤, 엎어지고 미끄러지면서 오르길 반복했을 무렵,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궁을기가 보였습니다. 저의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그 깃발을 보는 순간 안도의 눈물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그렇게 오르고 또 오르면서 큰 소리로 주문을 외우면 혹시 산짐승이라도 나올까 봐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워가며 도착한 화악산 수도원. 그렇게 반갑고 고마워서 수도원에 계신 분들 앞에서 소리 내 울어 버렸습니다. 당시 영등포교구 소속 여성회에서 수련 오신 몇 분들과 같이 일주일간의 수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련 4일째 되던 날 새벽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도 이젠 떳떳한 천도교인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토록 끝도 없고 수도 없이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쏟아지던 폭포수를 처음 보았으며 온몸과 머릿속이 하얗고 저에게 끊임없이 내려와서 안기던 궁을기와 일심이란 글자를 어떻게 글로 표현을 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심(一心)이란 글자를 흰 종이 위에 수도 없이 썼었던 그때 그 감동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던 숙덕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서 수도원 옆 샘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대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앞날까지 몸살 기운이 있었던 제가 샘물을 다 퍼내고 파랗게 끼 이끼를 씻어내면서 흘렸던 눈물은 분명히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일주일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마지막 날 내려오는 그 산길은 올라갈 때와는 정반대로 뛰어서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울 고시원에서 공부하던 딸의 베개 속에 고이 간직해온 영부 한 장을 정성스럽게 넣어두고 심고를 드린 후 조용히 내려왔고 딸은 첫 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11년 차 시청에 근무 중입니다. 저는 누가 뭐라 해도 분명히 한울님의 은덕이며 조화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현재의 삶이 조금 넉넉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저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한울님이란 든든한 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매년 그러하듯 5월이 왔습니다. 양가 부모님 모두가 환원하셨지만, 그 성령은 항상 저희와 함께하고 계심을 믿기에 5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해드리지 못한 그 흔하디흔한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한울님 스승님 양가 부모님 모두 사랑합니다. 끝으로 지난 겨울 천도교여성회 동계수련에 남편 운암 최도수 동덕과 참가하여 둘이서 용담정을 오르면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운암, 만약 먼 훗날 어느 한쪽이 먼저 육신이 떠나게 된다고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지금처럼 혼자 용담정을 찾아오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그 옆에는 서로가 함께하고 있다고 믿읍시다. 그리고 가능한 지금처럼 함께 손잡고 육신이 떠나는 날까지 오래오래 천도교인으로서 한울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갑시다." 워크숍을 마치면서 동학 교육수련원이 하루속히 우리 천도교에서 운영해야 주문 수련, 새벽기도 등 자유롭게 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있었고 앞으로 동덕들이 꾸밈없이 토론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자주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주신 용담수도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두서없는 글을 올리게 되어 많이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이 또한 한울님의 은덕으로 여기며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나가는 천도교인으로 남겠습니다. 동덕님 사랑합니다. 글, 삼천포교구 선우당 김명숙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
제 104회 어린이날 기념행사 및 어린이 시일식 박인준 교령 축사제104회 어린이날 기념행사 및 어린이 시일식을 맞이하여 박인준 교령이 축사를 하였다. 박 교령은 축사를 통해 천도교가 어린이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강조하였다. 또한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라는 이름을 처음 지었으며, 천도교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설명하였다. 박 교령은 "천도교는 어린이들이 따뜻한 사랑 속에서 올바르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해왔으며, 앞으로도 어린이를 위하고 사랑하는 일에 앞장설 것을 약속합니다. 어린이들이 우리나라의 큰 일꾼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청년회 대학생단의 노고에 감사를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박 교령의 축사는 어린이 존중이라는 천도교의 핵심 가치를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천도교와 동학혁명기념일동학혁명에 대한 교단의 인식 천도교의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은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였다. 동학혁명 직후에는 ‘반역’ 또는 ‘역적’이라는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고향을 등지거나 은신생활을 통해 목숨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동학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갑진개화운동과 3.1운동 등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주제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단에서는 동학혁명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동학혁명과 관련된 가장 앞선 기록은 『천도교회월보』 116호에 게재된 「천도교 61년 연보」의 ‘포덕 35년조’가 아닌가 한다. 당시 이 기록에는 ‘동학란’ 또는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포덕 36년조’에 의하면 ‘전봉준동란(全琫準動亂)’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란’이 가지는 의미는 “폭동, 반란, 전쟁 따위가 일어나 사회가 질서를 잃고 소란해지는 일”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최근까지도 우리의 익숙한 ‘6․25동란’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관리(官吏)의 학정(虐政)을 개혁(改革)하고 생민(生民)의 도탄(塗炭)을 구제(救濟)”로 규정하고 있다. (민영순, 「천도교 61년 연보」, 『천도교회월보』 116호, 1920.4, 28쪽.) 이와 같은 ‘동란’의 인식은 2년 뒤인 1922년 의암성사가 환원하였을 때는 ‘갑오(甲午)의 혁명(革命)’ 또는 ‘갑오혁명(甲午革命)’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앞선 ‘동란’의 인식보다는 상당히 진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계곽청(政界廓淸) 민권옹호(民權擁護)의 기하(旗下)에서 혁명(革命)의 거화(炬火)를 거(擧)하다”라고 하여 혁명으로서의 인식을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성사일대기」, 『천도교회월보』 임시호, 1922년 5, 8-9쪽.) 특히 이때의 ‘갑오혁명’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이후 역사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1924년 황의돈이 『개벽』에 기고한 글에서는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식 또한 ‘민중운동’ 또는 ‘혁명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1920년대 초기의 ‘동란’과 ‘혁명’의 용어는 이후에는 좀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즉 ‘동란(東亂)’, ‘동학란(東學亂)’, ‘혁명(革命)’, ‘갑오동학란(甲午東學亂)’, ‘민중혁명(民衆革命)’, ‘갑오혁명운동(甲午革命運動)’, ‘갑오혁명란(甲午革命亂)’, ‘동학당란(東學黨亂)’ 등으로 다양하게 또 혼용되어 표기되고 있다. 그리고 『천도교창건사』에서는 ‘갑오동란(甲午東亂)’과 ‘갑오동란(甲午動亂)’으로 혼용되고 있다.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1934, 70쪽(제2편).) 이는 전통적 역사인식에서 종교적 의미의 혁명뿐만 아니라 정치투쟁과 계급투쟁이라는 의미에서도 ‘혁명’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동학혁명에 대한 용어는 다양하고 혼용되고 있지만, 그 의미나 인식에 대해서는 ‘혁명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으로 천도교청년당은 1926년 4월 7일 제32회 동학혁명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천도교청년당이 동학혁명 기념식을 갖기로 한 4월 7일은 ‘황토현전투에서 동학군이 승리한 날’이다. 「갑오동학난의 자초지종」에 의하면, 4월 7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4月 7日에 古阜 42里 되는 黃土峴에서 全琫準軍과 接戰하여 死傷 千餘를 남기고 餘地없이 敗退하니 이것이 東學革命運動의 첫 烽火이었다.(일기자, 「갑오동학란의 자치자종」, 『개벽』 68, 1926.4, 39쪽.) 즉 천도교청년당은 동학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처음으로 격파하고 대승한 날을 동학혁명 기념일로 보았고, 이날 기념식을 갖기로 한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교단에서 처음으로 동학혁명 기념식을 봉행하려고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 기념식이 거행되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1926년 5월호 『개벽』에 동학혁명 기념식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이에 비해 4월 5일 천일기념식을 봉행하였다는 기록은 있다. 동학혁명 기념식도 거행되었다면 당연히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학혁명 기념식을 가지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은 두 번 다시 가져보지 못했다. 이는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천도교청년동맹은 원래 ‘동학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던 적이 있었다. 해방 후 첫 동학혁명 기념식 개최 일제강점기 동학혁명 기념식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였던 천도교단은 해방 후 1947년 2월 9일 첫 기념식을 봉행하였다. 당시의 동학혁명 기념식에 관한 언론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54년 전 민주건국을 위하여 빈천한 농민대중을 중심으로 봉건사회를 파타하고 궐기한 역사적 혁명전쟁을 일으킨 동학혁명운동을 기념하고자 천도교청우당중앙위원회에서는 오는 9일 하오 1시에 천도교 강당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되었다 한다.「동학혁명운동의 54주년 기념」, 『대한독립신문』 1947년 2월 7일자. 53년 전 우리 조선의 봉건사회를 타도하고 서민 부녀 하층계급을 타파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봉기한 동학혁명기념일을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기념행사위원회에서는 지난 9일 하오 1시경 시내 천도교당에서 회원 수백 명 참석 아래 거행되었는데, 먼저 이우영 씨 사회로 시작되었고 축사로 본사 사장 최동오 씨의 열변에 박수 열광으로 종막을 지은 다음 동학혁명 당시 당원이었던 오지영 씨의 동학운동 회고담이 있은 후 기념행사 위원이 오지영 씨에게 기념품 기증이 있은 다음 오후 4시 반경 폐회되었다.「조선민주혁명의 선구 동학투쟁 기념식 성대」, 『대동신문』, 1947년 2월 11일자. 이 두 기사에 의하면, 해방 후 첫 동학혁명 기념식은 2월 9일 중앙대교당에서 거행되었다. 기념식 행사를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장관을 역임하였고 대동일보 사장이었던 최동오의 축사와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던 오지영의 회고담이 있었다. 하지만 천도교청우당은 왜 2월 9일에 기념식을 가졌는 지에 대한 해명이 없다. 일반적으로 동학혁명하면 기념일로 고부기포(1월 10일), 백산기포일(3월 21일), 황토현전승일(4월 7일) 등이 연상되는데, 2월 9일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고부기포가 일어난 날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2월 9일경으로 추정된다. 이후 동학혁명과 관련된 기념식이 역시 거행되지 않았다. 다만 동학혁명 기념식에 앞서 1946년 10월 20일 천도교청우당 홍천지부의 주최로 홍천을 비롯하여 춘천, 원주, 정선 등지에서 희생된 동학혁명군을 위령제를 하였다. (「갑오운동 희생자 위령제 거행 준비」, 『대동신문』 1946년 10월 19일자.) 동학혁명 67주년에 사회적 합의로 ‘기념일’ 제정 해방 후 한 차례 동학혁명 기념식을 가진 교단은 1961년 4·19혁명을 계기로 동학혁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기념일 제정을 서둘렀다. 이는 그동안 교단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을 적정한 날을 정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방편적으로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제강점기에는 4월 7일 황토현전승일에, 해방 후에는 2월 9일에 각각 기념식을 거행한 바 있듯이 특정한 날로 기념일로 정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4·19혁명을 계기로 혁명정신이 사회적으로 고양되자 교단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하여 동학사상을 사회적으로 확산하고자 하였다. 즉 “동학사상은 우리 민족의 사상이요 인간평등의 사상이다. 동시에 동학혁명운동은 안으로 부패폭정을 혁신하고 밖으로 외세침략을 반거한 운동이다. 이 혁명사상은 세계혁명사상 어느 것에 비하여도 가장 새로운 것이었다. 이렇게 성스럽고 새로운 혁명운동이 지금으로부터 68년 전에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으로부터 백만 대중이 의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혁명의 의의를 국민 전체의 사상으로 계속 거양하지 못하고 반세기 동안을 지하에 묻힌 옥석과 같이 민중의 머리에는 무관심 몰이해하고 지내왔다” (「동학혁명 67회 기념식」, 『신인간』(속간 19호), 1961.4, 14쪽.)라고 하여, 그동안 동학혁명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를 스스로 자인하였다. 이에 따라 교단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교단은 1961년 3월 동학혁명기념준비위원을 구성하여 혁명의 의의와 약사를 밝히는 한편 동혁혁명 기념일을 제정하여 혁명의 기념을 민중과 더불어 지키고 이를 계승키로 하였다. 이에 교단은 3월 19일 동학혁명기념준비위원을 대표하여 신숙(申肅, 동학당 대표위원), 장기운(張基云, 천도교 교무관장), 오익제(吳益濟) 등 3인과 사계(斯界)를 대표하는 김상기(金庠基, 서울대학교 교수), 장도빈(張道斌, 단국대학교 교수), 최인욱(崔仁旭, 작가), 신일철(申一徹, 고려대학교 강사)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에서 무려 4시간 동안 좌담회를 갖고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였다. 조선일보사는 좌담회를 갖게 된 동기를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에 의의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오늘 (3월) 21일은 민중운동의 전통으로 깊이 새겨야 할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68년 되는 날이다. 민중의 힘이 과시된 이 운동은 당시의 봉건제와 침략주의에 항거해서 봉기했던 것으로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데 그 정신이 있었다. 이를 즈음해서 천도교중앙총부와 본사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인 동 기념행사의 하나로서 사계학자들을 모시고 동학혁명의 뜻을 살피는 좌담회를 다음과 같이 마련했다. 오늘날까지는 이 혁명을 기념할만한 일자 표증이 확실치 못하였던 바, 최근 여러 기록을 수집 분석해본 결과 격문을 발표하고 봉기한 날이 3월 21일이라는데 확인되어 처음으로 기념행사를 갖게 된 것이다. (「좌담회 갑오동학혁명의 의의-그 67주 기념일을 맞아」, 『조선일보』 1961년 3월 20일자.) 이 기사에 따르면, 그동안 동학혁명을 기념할 만한 일자가 제대로 없었는데, 역사적 사료를 분사해본 결과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로 제정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명칭도 ‘동학혁명’이라고 확증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로 제정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오익제) : 기록에 보면 고부에서 처음 농민봉기가 자연발생적으로 갑오년 정월에 일어났다가 이용태가 탄압을 심하게 되자 3월에 만여 명의 동학군이 일제히 궐기된 것으로 되어있더군요. 그런데 최인욱 선생께서는 「草笛」을 쓰고 계신데, 거기에 3월 21일 날 동학혁명이 본격적으로 거사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혹시 고증자료라도.... 최인욱 : 저는 소설을 쓰면서 이 역사를 제 주견 하에서 다 쓸어보았는데요 정월의 고부의 봉기와 3월 동학기포는 단계를 짓는 것이 어떨까 해요. 물론 정월 고부의 봉기가 동학혁명의 전초적 조건 즉 전초전의 역할이 되었지만 정월 고부의 그것은 그 전년에 빈번했던 민란과 성격이 거의 같고 다만 규모가 크다 뿐이지요. 그래서 과거에는 단계를 짓지 않고 정월 고부의 봉기를 그대로 하나의 동학의 내용으로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보면 그 정월의 고부민란이 그대로 수습되지 않았는 데서 점점 그것이 확대되어 가지고 3월에 이르러 드디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 호남의 여려 동학접주들이 격문을 발하고 소위 의식적으로 기포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정월 고부의 봉기는 민란으로서의 성격이었고 동학혁명은 소위 기포형식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또 격문으로 보나 확실히 3월에 와서 전개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헌들을 고증해 볼 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3월 21일로 소설에 쓰게 된 것은 고부민란에서부터 경과를 시간적으로 따져서 추상적으로 인정했는데 지금 여러 군데 기록에서 3월 21일이라는 것이 고증적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것 같은데... 사회 : 기록에 보면 「동도문변」과 또 당시의 일본공사관기록에 3월 21일로 드러나더군요. 최인욱 : 그 시일 문제는 다른 문헌이 나오지 않는 한 대단히 유력시 되고 있습니다. 김상기 : 그런데 그대의 기록은 양력을 표준으로 한 것도 있고 음력을 표준으로 한 것도 있어요. 정월 고부봉기의 중심인물이 역시 전봉준으로 볼 수 있고 이것이 졸창간의 일이 아니라 그 전해 계사년 겨울부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소위 동학의 남접 중진들의 움직임이 있었고요. 그 1월설에 있어서는 저도 30여 년 전에 알아보았습니다만 기록에도 보고 또 그때 난을 겪은 고부지방의 부호들에게 물어보고 특히 전봉준의 처숙이 송희오(宋喜五)인데 그의 손주 손용호라는 분이 정월 14일로 얘기해요. 이렇게 정월에 일어나고 고부에서 조병갑을 쫓은 후 박원명이가 임명되었는데 아주 부드럽게 다스려서 모두 갈아왔다가 이용태가 안핵사로 와가지고 포악한 짓을 하니까 다시 3월에 일어났다고 알려지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좀 더 신중하게 일자를 고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일철 : 김 선생님이 쓰신 책 가운데 『동학과 동학란』을 보면, 1893년 겨울부터 표면화했는데 그 만석보를 파괴한 것이 봄에 하지 않았나요. 봄이면 1월과 3월 사이로 볼 수 있는데... 김상기 : 만석보 문제는 정월 14일로 저는 기억되는데요. 사회 : 그러면 만석보 파괴 일자 문제는 따로 기록에 볼 수 있으니까 별문제가 아닌가요. 정월에 고부에서 봉기한 것도 사실이고 3월에 또한 기포한 것이 사실이고 6월에 집강소 시대로 들어갔다가 9월에 재기포한 것이니까요. 이 기포일자 문제는 이 정도로 그치면 합니다. 최인욱 : 결국 정월에 봉기했다가 백성에게 심한 피해가 오는데서 다시 본격적인 계획적인 조직적인 하나의 기포가 거기서부터 발단된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역사적 관찰에 있어서 기포의 단계를 어디서부터 짖느냐 하는 것은 그 연구하는 분들의 하나의 견해차이가 될 수 있겠습니다. 장도빈 : 그런데 애초부터 고부의 봉기가 전봉준의 지도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봉준은 처음부터 고부봉기를 일으켜 가지고 혁명을 이끌어 나가려는 사상을 가진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조사해보면 이것은 전봉준의 계획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좌담회 갑오동학혁명의 의의-그 67주 기념일을 맞아」, 『조선일보』 1961년 3월 20일자.) 위 좌담회 내용에 의하면, 동학혁명기념일을 3월 21일로 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논점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바로 동학혁명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는 점이다. 최인욱은 3월 기포, 김상기는 신중론, 장도빈은 고부기포에 각각 동학혁명의 기점을 두고 있다. 즉 최인욱은 고부기포를 동학혁명의 전 단계로 인식하였으며, 김상기는 고부기포와 3월기포의 연결과정에서 좀 더 역사적 고증을 통해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장도빈은 전봉준의 역할을 볼 때 고부기포를 동학혁명의 기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혁명기념일은 ‘3월 21일’로 정하는 데는 무난하게 합의를 도출하였다. 당시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천도교단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김상기와 장도빈, 그리고 문학계를 대표하는 최인욱, 신진학자인 신일철 등이 참여하여 확정하였고, 이를 언론계인 『조선일보』가 뒷받침하였다. 동학혁명기념일 제정 후 첫 기념식 이와 같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처음으로 정해졌다는 점에서 기념일 제정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고 가진 첫 기념식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민족저항운동 사상 빛나는 한 전통으로서 기리 새겨야 할 갑오동학혁명 제67주년 기념식이 지난 3월 21일 천도교당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천여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상오 11시 장기운씨 사회로 식이 진행되고 이영복 씨의 개회사와 오익제 씨의 약사보고에 이어 신숙씨의 기념사가 있었으며, 곽상훈 민의원 의장과 조한상 씨(정계 대표) 그리고 장도빈(학계 대표)의 축사가 있었다. 식이 끝난 후에 이항녕 선생과 최인욱 선생 및 신일철 선생 세 분을 모시고 기념강연회가 있었는데 모인 청중이 시종 감격하여 마지않았다. (「갑오동학혁명 기념-스냅」, 『신인간』(속간 19호), 1961.4, 표지 3쪽.) 기념일 제정 이후 첫 기념식은 1961년 3월 21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천도교인과 서울시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천도교단을 대표하여 좌담회에 참석하였던 장기운, 신숙, 오익제 등이 주도하였으며 외부 인사로는 민의원 의장 곽상훈, 정계를 대표한 정한상, 학계를 대표한 장도빈 등이 축사를 하였다. 그리고 기념식 후에는 최인욱, 이항녕, 신일철 등 제씨가 기념강연을 하였다. 첫 기념식은 사회적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계, 학계, 문학계 등에서 대표들이 참석하였던 것이다. 첫 기념식 이후에도 동학혁명 기념식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제정된 동학혁명기념일인 매년 3월 21일에 개최되었다. 제68주년 동학혁명 기념식은 3월 21일 12시 천도교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이지형 국민운동본부 차장이 축사를 하였다. (「동학혁명 68주년 21일 기념식 거행」, 『조선일보』 1962년 3월 21일자.) 69주년 기념식은 3월 21일 오후 1시 국민회당에서 열렸다. (「21일 기념식 동학혁명 69주년」, 『동아일보』 1963년 3월 21일자.) 69주년 동학혁명기념일을 맞아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동학혁명의 의의를 밝힌 바 있다. (3월) 21일은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중혁명으로 우리나라 근대화의 불씨를 던졌던 동학혁명의 제69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조 봉건사회가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병든 내적 모순을 드러내자 뿌리 깊게 얽히었던 민중의 불만이 약 30년간의 ‘민란의 시대’를 연출, 낡은 질서를 깨뜨리고 새 질서,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사회혁명으로 번져 갑오경장이란 역사의 새 물결을 가져온 것이 바로 동학혁명이다. 착취만을 당하던 힘없는 농민들이 동학당을 지도자로 벌떼처럼 일어났던 이 혁명은 하나의 농민전쟁이었고 계급전쟁이었으며 또한 무력적인 사회혁명임이 분명했다. 머리와 허리에 잡색포를 두르고 손에는 칼, 창과 총기를 든 채 황색 깃발을 나리며 전라도로 충청도로 삼남 일대를 장악하고 서울로 강원도로 달려 연 3백만 동학군이 한결같이 부르짖었던 외침은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자’는 것이었다. (「동학혁명 21일은 제69주년」, 『경향신문』 1963년 3월 20일자.) 이와 같은 동학혁명의 의의를 기념하는 동학혁명기념일은 3월 21일을 기해 매년 기념식을 갖고 혁명 정신을 기렸다. 다만 처음에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거국적인 기념식이 되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도교단의 기념식으로 축소되었다. 그렇게 진행되어 오던 동학혁명 기념식은 동학혁명 1백주년을 맞아 1994년 3월 21일 오전 11시 탑골공원에서 전국적인 규모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교단은 동학혁명 기념행사에 보다 적극 나서야 1994년 동학혁명 1백주년을 계기로 일부 동학혁명 관련 단체에서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사회적 합의에 따라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고 기념식을 가져오던 천도교단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또한 천도교단은 이러한 논의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혼란을 거듭하였고 관점에 따라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비롯하여 관련 단체의 추천을 받은 인사들로 ‘동학농민혁명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념일 제정을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견과 논란을 거듭하였다. 천도교단은 어느 동학혁명 관련 단체보다도 먼저 사회적 합의를 거쳐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동학혁명기념일을 사회적으로 확산하지 못함에 따라 오늘날 이와 같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의 논란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제 천도교단은 어느 누구보다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였던 그 역사성을 확고히 지켜내야 한다. 그것만이 동학혁명에서 고귀한 생명을 바친 선열들을 올바르게 기리는 것이며, 그 혁명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글, 성주현(상주선도사) -
5월 천도교 어린이 시일식, 가정의 달 맞아 카네이션 감사패만들기 진행포덕 166년 5월 11일, 가정의 달을 맞아 천도교는 다섯 번째 어린이 시일식을 봉행했다. 이번 시일식은 수원교구에서 김경진 어린이가 집례를, 김지후 어린이가 경전 봉독을 맡았으며, 설교는 도경교구 정민선 동덕이 진행하여 어린이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시일식은 오전 11시부터 11시 30분까지 이어졌으며, 이후 11시 30분부터 12시까지는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청년회와 대학생단이 준비한 이번 활동은 ‘카네이션 감사패 만들기’로, 참가 어린이들은 실시간 화면을 보며 감사패를 직접 조립하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은 짧은 편지를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행사에 필요한 교구와 재료, 간식은 사전에 각 가정으로 배송되어, 참가 어린이들은 집에서도 안전하고 즐겁게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카네이션 감사패를 부모님께 선물하는 흐뭇한 시간을 갖도록 하였다. 사진 및 자료, 천도교청년회 제공 -
수원교구 하루수련 '도심 속 수도원' 및 가정의 달 행사천도교 수원교구(교구장 지암 안춘보)는 지난 5월 10일 교화부 주관으로 ‘도심 속 수도원’ 하루 수련을 진행했다. 이날 수련은 새벽 5시 기도식으로 시작되어 새벽, 오전, 오후로 나뉘어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특히 수련 중에는 대교당 시일설교 영상 중 공암 박돈서 공주교구장님의 ‘깨달음의 노래’, 오암 박길수 동덕의 ‘천년의 꿈’ 등을 시청하었으며, 교인들은 가로쓰기 경전 <동경대전>을 함께 윤독하고 상향배례를 올렸다. 이날 하루 수련의 일정은 오후 5시에 마무리되었다. 이번 수련에는 교인 14명이 참여하여 주문과 수련을 통해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정신을 되새겼다. 특히 영등포교구 정준규 동덕이 동참하여 의미를 더했다. 하루 수련은 5월부터 10월까지 매월 한 차례씩 열릴 예정이다. 한편, 수원교구는 5월 11일 시일식 후 가정의 달을 맞아 교구 숙덕 어르신들을 위한 행사를 진행했다. 행사에서는 ‘천지부모’의 뜻을 되새기며 교인들이 어르신들께 큰 절을 올렸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작은 선물과 ‘어머니의 마음’ 노래를 전달했다. 기사 및 사진, 천도교수원교구 제공 -
5월부터 매주 환급! 디지털 온누리로 취약상권 살린다중소벤처기업부(장관 오영주, 이하 중기부)는 오는 5월 11일(일)부터 9월 30일(화)까지 약 5개월간 전국 전통시장 및 골목형상점가 등 취약상권 대상으로 디지털 온누리상품권 환급행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2025년도 제1회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확보한 예산으로 경기침체로 위축된 취약 상권의 매출 회복과 내수 진작을 목표로 마련됐다. 5월 11일(일)부터 9월 30일(화)까지 약 5개월간 진행되며, 디지털 온누리상품권(모바일·카드형)으로 결제한 소비자에게 회차별 누적 결제금액의 최대 10%를 동일한 디지털상품권으로 환급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총 20회차로 운영되며, 회차별로 1인당 최대 2만원까지 환급받을 수 있다. 최소 1만원 이상 결제시 1천원 단위로 환급이 적용(1천원 미만 절사)되며, 지급은 각 회차 종료 후 약 일주일 뒤부터 ‘선물하기’ 기능을 통해 순차적으로 이뤄진다. < 결제금액별 디지털상품권 환급금액 예시 > 결제금액 10,000원 33,000원 67,000원 100,000원 134,000원 200,000원 이상 환급금액 1,000원 3,000원 6,000원 10,000원 13,000원 20,000원 지급한 날로부터 30일 이내 선물하기 등록을 해야하며, 30일을 넘기면 환급액은 소멸된다. 보유금액이 200만원을 초과할 경우 환급액을 수령할 수 없고, 환급액만큼 사용한 후 선물하기 수령이 가능하다. 이번 행사는 매주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1회차로 정해 운영하며, 회차별 운영 요일을 통일함으로써 소비자 혼선을 줄이고, 지속적 참여를 유도해 전통시장과 상점가의 매출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다. < 회차 운영 일정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