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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주년을 맞이한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의 허채봉 대표를 만났다. 허채봉 대표는 오랫동안 동학을 기반으로 활동해 왔으며, 동학을 주제로 학위과정을 마친 연구자이기도 하다.
열정적인 활동을 이어온 허채봉 대표에게 이 시대 동학, 천도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동학의 가르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허채봉 대표를 만나보자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 창립1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기념사업회를 어떻게 창립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2022년 2월에 동학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이 2023년 1월에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아카이브에 등재되면서 동학 신진연구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그때 우리 천도교단 활동과는 조금 결이 다른 동학을 주제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중에서도 2021년부터 동학 서훈 운동을 했던 분들, 동학혁명 유족회, 그리고 전국의 기념사업회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제가 활동하는 부산에도 동학 기념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작년 6월이었고 동학 신진연구자 모임을 한 이후 7월 8일에 기념사업회를 창립한 것입니다. 그 흐름에 이어 전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전국 워크샵이 열리기도 했고요.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뤄졌습니다.
첫 번째로 연구자로서 논문을 쓴 게 계기가 됐을 거고 동학 신진연구자 워크숍에서 다양한 분들을 가면서 활동의 폭이 넓어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 과정들에는 굉장히 깊은 고민과 또 오랜 성찰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동학을 하기 전에, 오랫동안 택견이라는 무예를 했어요. 택견은 우리 민족 무예로서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76호로 지정돼 있고, 2015년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세계 인류 무형의 유산이면서 수련종목인 택견을 하면서 새롭게 현대의 스포츠로 계승하는 일을 해왔고, 그런 과정들을 한 30년 정도 하다보니 동학을 알게 되고부터는 자연스럽게 내가 무엇을 할 건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모색해왔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동학의 역사를 찾고, 알아가는 과정이 삶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동학을 접하게 된 최초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천도교에 입교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2016년도 가을에 녹색당 농업특별위원회의 농업 먹거리 활동을 했는데 흔히 우리가 ‘녹색농부’라고 말해요. 이분들 중 저력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어느 날 녹색 농부 중 한 선생님께 여쭸어요. 혹시 종교가 있으시냐고요. 그냥 묻고 싶었어요. 그분 종교가 ‘천도교라’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어요. 천도교가 뭔가요? 천리교인가요? 천리교는 일본 종교잖아요. 그게 아니래요. ‘동학’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어요. 동학이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랬더니 맞대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동학농민혁명이 종교란 말이에요? 그렇게 또 물었어요. 그게 종교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진다는 거예요.
나는 민족무예 택견의 지도자로서 몇십 년을 살았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종교였다는 것을 몰랐어요. 뒤통수를 딱 맞는 느낌이었어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동학농민혁명이 그 순간에 있었던 이벤트나 사건이 아니었고 계속 어떤 흐름 속에서 일어난 건가, 그러면 왜 나는 그런 걸 몰랐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한 며칠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며칠 고민을 하다가 천도교중앙총부에 전화를 했어요. 입교 같은 걸 할 수 있냐고요. 전교인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지도 물었어요. 나는 천도교 안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전교인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선생님한테 가서 그랬어요. 천도교에 입교를 하겠다고요. 선생님, 전교인이 되어 주세요. 이렇게 얘기를 했죠. 그때 목암 전희식 선생님이 책 <소농은 혁명이다> 북콘서트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천도교중앙대교당’이라는 곳을 가 봤지요.
그날이 2017년 포덕 158년 4월 9일이었는데, 4월 5일 천일기념일이 있던 주의 시일, 4월 9일이었습니다. 그날 입교를 하게 된 거예요.
그때 입교를 하신 거군요. 그럼 그 전에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전혀 모르셨나봐요. 와보시니 어떻던가요? 압도적인 어떤 기운이 느껴지시던가요?
첫 느낌이 예수상이나 십자가, 부처상과 같은 우상이 없고 궁을기가 보였어요. 대교당 건물이 굉장히 아름다웠고요. 제가 20대 때 길 건너 원서동에 살았거든요. 그런데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몰랐어요. 처음 대교당에서의 모든 느낌이 다 좋았어요. 청수봉전을 보며, 여성이 청수를 봉전해야 그 의식이 시작된다는 게 좀 신기했고 우상이 없는 것도, 성직자 없이 일반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시일을 모시는 것도 참 놀라웠어요. 고정관념을 깨는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고 신선했어요.
입교를 한 이후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 대교당에서 전희식 선생님의 북 콘서트를 보러 갔는데, 일주일 뒤에 전주에서 또 북콘서트를 하신다고 하더군요.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에서요. 그 말씀을 듣는데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에 너무너무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당시 임형진 종학대학원장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해부터 종학대학원 전주 분원과 부산 분원이 만들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부산 분원 개원소식을 기다렸고, 이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종학대학원 부산분원이 열렸습니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천도교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활동하시는 교인분들 한분 한분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고 사회 곳곳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이 시대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가 창립 후 1년 동안 바쁜 걸음으로 달려오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부산은 알다시피 동학의 유적지가 없잖아요.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놓고 보니까 갈 데가 없더군요. 창립을 했는데 기념사업회에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창립하자마자 기념재단에서 동학농민혁명 편람을 보내왔어요. 전국에 있는 동학 유적지를 다 모아놓은 거였어요. 경상도권 전라도권 경기권 충청권 등 전국에 있는 권역별로 쭉 있는데 등급이 A, B, C, D 이렇게 나뉘어 있는데 부산에 딱 두 곳이 있는 거예요. 그것도 B급이더라고요. 1893년, 부산성에 “척왜양창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때는 천도교인이 부산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붙어 있었는지 참 신기하다 이런 식으로 소개가 되어 있고 출처는 없었어요. 그리고 또 두 번째는 일본군 토벌대가 주둔을 했던 곳인데, 그곳이 재단의 자료에서는 '40계단'이라고 나오더군요. 부산 중앙동의 40계단은 유명한 곳이에요. 그곳은 6. 25 동란 때 피란민들이 살던 곳이에요. 그렇게 토벌군들이 있었던 부산 이사청, 그리고 국립강제동원역사관에 있는 나인협 흉상을 세 번째 유적지로 해서 세 군데가 생긴 거예요. 그게 너무 극적으로 느껴졌어요.
기념재단에 감사했어요. 내 논문을 아카이브에 등재해준 것도 감사했지만 부산 지역에 동학유적지를 밝혀준 것이 반가웠거든요.
그래서 우리 대학원에 자랑도 했어요. 동학농민혁명재단 아카이브에 논문 등재됐다고요. 축하도 많이 받았죠. 재단에서 보내왔던 동학농민혁명 편람이 기념사업회에 큰 도움이 됐지요.
동학혁명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부산지역에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자리를 잡아가고 계시는데,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이렇게 1년을 돌이켜보면 꽤 많은 일을 했어요. 저 혼자 한 게 아니고 도와준 분들이 참 많더군요. 감사한 일이죠. 그때그때 나타나서 함께해준 사람들이 반드시 있었어요.
마침 제가 올해 부산시 택견 단체 부회장의 마지막 임기거든요. 올해를 끝으로 활동의 방향을 동학으로 전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버릴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30년 넘게 택견을 하면서 배운 것들이 또 이렇게 쓰이게 될 테니까요. 기쁜 점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동학혁명 서훈 운동을 하면서 천도교를 알려 나가고 천도교의 뿌리가 결국 동학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천도교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 귀를 열고 듣기 시작했다는 거죠.
최근 전국 동학혁명 연대가 봉황각에서 취회를 했어요. 저녁 9시 기도식도 하고 주문 수련을 함께 하시더군요. 대교당에 가서 시일식도 같이 참여했고요. 이럴 때 천도교인들이 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산이 동학의 역사나 유적에 대해서는 불모지라고 생각을 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까 유적지는 유적지대로 갇혀서 과거의 기억 운동에만 집중해서 하는데, 저는 부산이 조금 더 역동성을 가질 수 있는 민주시민교육 운동과 함께 동학과 궤를 같이 하면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아서 보람이 큽니다.
기념사업회가 생기기를 기다려준 것만 같아요.
이렇게 동학에 대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계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택견을 하면서 어떤 소명이라는 거를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은 각자의 소명이 있는데 나의 소명은 이제 오래된 전통의 부활 그러니까 “Rebirth”, 재탄생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낡은 것의 가치를 새롭게 이끌어 내면서 오늘에 맞는 정서나 감성으로 새롭게 콘텐츠로 부활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게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택견을 할 때에도 시나리오를 쓰고 작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동학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어요.
부산기념사업회 1년, 그렇게 딱 한 걸음을 걷는 동안 같이 걷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그만큼 기대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궁금합니다.
부산기념사업회를 만들면서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연구소입니다. 말하자면 부산동학기념사업회를 잘하기 위해서 동학연구소가 있어야 되겠고, 궁극적인 목표는 동학혁명 서훈 국민운동이나 전동연(전국동학연대)을 통해서 동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보를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또 전동연에서 함께 하고 있는 장흥 무명동학군 묘역 성역화나 이런 게 다 맞물려 있잖아요. 이러한 전 국민적인 움직임과 함께 동학이 국민적 필수 인문 과목으로 자리 잡는 것, 그게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운동이 되겠네요. 부산기념사업회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통해서 하는 건데 이제 그런 뜻을 펼쳐나가면서 전 세계 인류의 교양 과목이 되는 게 동학의 포덕 사업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천도교를 해서 참 행복한 사람이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를 할래, 천도교를 할래?" 하면 난 천도교를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범신론자였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우주적인 어떤 질서 속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알 뿐이었어요. 그런데 천도교의 경전을 접하면서 내 마음속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대로 글로 적혀 있어서 참 놀라웠어요. 경전에 모든 게 다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더 천도교에 대해 알고 싶고 천도교의 진리를 깨닫고 싶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기념사업회 일을 하면서 펼쳐 나가고 싶습니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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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브리즈번에 울려퍼지는 시천주 소리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신인간사를 찾아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안녕하십니까. 인터뷰에 참여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먼저 자신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모시고 안녕하세요? 저는 법원포 연원 황화전교실장 제암 장영균입니다. 이민 가시기 전 한국에서도 교직에 계셨는데, 교직 생활을 마치고 이민을 선택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딸과 아들이 호주로 유학을 가서 학교를 졸업하고 전문직을 가지고 브리즈번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모여서 살고 싶었고, 또 함께 살면서 천도교 신앙을 딸, 아들, 손녀에게 전해 주고 싶은 생각에 퇴임 3년 전에 영주권을 신청하였습니다. 정년 퇴임이 2017년 2월 28일이었는데, 한울님의 감응으로 영주 비자가 2016년 5월에 나와서 퇴임 3일을 앞둔 2월 25일까지 호주에 입국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부득이 그 날짜에 맞춰서 이민하게 되었습니다. ※ 브리즈번(Brisbane)은 호주 퀸즐랜드주의 주도이며, 동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멜버른, 시드니에 이어 호주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호주로 이민을 간 지 8년 정도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호주에서의 생활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호주로 이민을 간 첫해는 집 주변 잔디밭을 일구어 텃밭으로 만들고 보도블록, 페인트칠 등 집 관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향수병인지는 모르지만 한국 사람이 그리워 한국인을 만나면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하였고, 한인회 각종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운동을 좋아해서 테니스, 골프 모임에 들어가 운동을 하였고, 바둑을 좋아해서 바둑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또 음악을 좋아해서 한인 합창단에 들어가 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글학교 선생님을 구한다는 교민지 기사를 보고 전화를 하였더니, 교장선생님이 지금 바로 오라고 하셔서 2018년 첫해는 교사로, 2019년은 교사와 교감 겸임으로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2020년부터 교장으로 현재까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호주 한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호주 한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호주 한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호주에서 거주하고 있는 집 앞에 펄럭이는 궁을기 호주 집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 모습 이번에 한국에 오시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요? 건강 검진과 4월 5일 천일기념일 참석, 그리고 대전교구장님 교구장 연임을 축하해 주기 위해 겸사겸사 오게 되었습니다. 천도교 신앙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저는 포덕 123년(1982) 11월 14일에 독립유공자 집안의 천도교 계대교인 지금 제 아내인 정심당 박노분을 만나 천도교 의례로 결혼식을 하면서 천도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호주에서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나요? 아내와 같이 실천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해월신사님 법설』 <대인접물>에 나오는 ‘일용행사가 도(道) 아님이 없느니라’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호주에서도 일관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일이 있으면 이치를 가려서 열심히 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마음공부를 하라는 가르침대로 수련은 물론 오관을 정성을 다해 실행하고 있습니다. 항상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을 받는 천도교 교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주 교민사회에서 느끼는 아쉬움도 많을 것 같은데,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신앙생활이 도움이 되나요? 브리즈번 한글학교에서 봉사하면서 학부모들을 통해 호주 교민사회를 이해하게 되었고 ‘남의 적은 허물을 내 마음에 논란하지 말고 나의 적은 지혜를 사람에게 베풀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학교에 접목 실천하면서 이민사회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이민가기 전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이민가기 전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이민가기 전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앞서 말씀해주신 바와 같이 호주에서 한글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학교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하면서 경험한 지식과 한울님 스승님께서 주신 지혜를 브리즈번 한글학교에 적용하여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초등학교와 같은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을 만들어 어떤 분이 오셔도 학교에 적응하여 근무를 잘할 수 있게 체제를 개선하였습니다. 제가 첫 부임을 하였을 때 전교 학생 수가 180명 정도였다가 코로나 번창할 때는 160여 명으로 줄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350명으로 퀸즐랜드주에서 가장 크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한글학교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려서부터 올바른 생활 습관과 신앙생활의 습관을 갖도록 당부하고 싶습니다."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을 잊지 않고 자라날 수 있도록 뿌리와 줄기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후학들이나 다음 세대 청소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어린이, 학생은 우리의 희망이자 우리 천도교의 미래입니다. 어린이, 학생들에게 바른 생활 습관을 심어주는 것이 공부를 강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은 실력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좋은 품성과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인품, 규칙적인 생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태도는 지식이 아니라 평소 생활 습관을 통해서 다듬어지기 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신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려서부터 올바른 생활 습관과 신앙생활의 습관을 갖도록 당부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어려움에 닥쳤을 때 극복할 수 있도록 마음의 가르침을 준 경전의 말씀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천도교에 입교하여 처음으로 용담수도원에서 1주일 수련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로 강령을 모시면서 『해월신사 법설』에 나오는 “우(愚), 묵(黙), 눌(訥) 세 글자를 용(用)으로 삼으라(以愚黙訥三字爲用)”는 가르침을 받고, 머리를 쇠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실천하기 위해 경전에 나오는 말씀을 족자에 담아 벽에 걸어 놓고 늘 마음에 새기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암 장영균, 정심당 박노분 부부가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방문한 기념으로 사진을 촬영하였다. 아픔도 슬픔도 돌아보면, 다 애틋함으로 남기 마련이다. 장영균, 박노분 동덕 부부는 꿈에 그리던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 눈에 닿는 곳마다 젊은 시절 살아왔던 기억들로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다. 고국으로의 소풍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지구 반대편 호주를 향해 긴 인사를 나누었다. 시천주 주문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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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의 걸음이 역사가 되어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 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님, 천도교신문에서 찾아뵙습니다. 그동안 교단의 여러 행사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를 들려주셨습니다. 합창단 소개 부탁드릴게요. 우리 합창단은 역사가 깊습니다. 예전에 대교당 시일식을 중앙총부에서 직접 집례를 맡아서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일식 집례를 서울교구로 이관하면서, (그게 한 40년 정도 됐을 거예요.) 그때부터는 교구 내에서 시일식 합창단을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서 서울교구 합창단이 만들어졌습니다. 합창단 결성 초기에는 지금처럼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관심 있는 교인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정도였어요. 그때 서영모 교수님 등 몇몇 분들께서 지도를 해주시면서 명맥을 겨우겨우 유지해 왔지요. 그러다가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교단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단 밖에서도 활동하곤 합니다. 고양시에서 속해 있는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주관하는 <남북 평화 합창제>(현 평화합창제)에 참가하게 된 계기로 해마다 참가하고 있습니다. 평화합창제 때 많은 분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무대였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합창제에 참가하시게 되었나요? 평화합창제에는 저희 삼경합창단이 제2회 때부터 참가하게 됩니다. 주최 측인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함께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 주셔서 참가하게 되었는데, 다른 단체들은 모두 합창단 이름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때 우리도 합창단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단원들로부터 공모를 해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저희 합창단이 뜻하는 바는 해월 신사님의 ‘성, 경, 신’ 사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다짐을 해보자는 뜻으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 5회 평화합창제 참가, 공연하는 모습 시일식을 마치고 삼경합창단이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연습하는 모습 이후로 해마다 평화합창제에 참가하셨다고 하시던데, 합창단의 연간 주요 사업으로는 어떤 일이 있나요? 저희가 제2회 평화합창제 때 처음 참가하게 되어 벌써 다섯 번이나 참가했네요. 저희의 활동은 교단 내의 행사와 시일식 등에 노래하는 것이 주요 활동입니다. 이를테면 기념 공연이 있는데, 서울교구 결성 기념일에 하는 경축 공연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외부 행사로써 평화합창제와 KCRP에서 주최하는 평화 음악제와 같은 종교축제에 초청 받아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좀 바빴습니다. 작년에는 특히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받아서 다녀오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연습을 또 별도로 더 해야 하니 바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합창단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지금 저희 삼경합창단에 등록된 단원은 한 30여 명 되고요. 공연에 참여하는 분들이 매번 나오지는 못하지만, 정기 연주회나 평화합창제 같은 때는 좀 더 모이곤 하지요. 각자 개인 생활들이 있어서 한 15명 내외가 나와 대교당 시일식에 함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열심히 활동해 주는 단원들이 있어서 고맙고 또 서로서로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단장님은 언제부터 합창단 활동을 하셨나요? 단원들과의 화합은 잘 이뤄지고 있나요? 제가 중앙총부에서 종무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중앙감사의 임기까지 마치고 나니까 포덕 160년이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합창단의 단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 5~6년 되었는데, 서로가 잘 맞춰가면서 활동하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모두가 좋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지지요. 가장 보람이 된다고 느끼실 때는 언제예요? 매주 시일식에 합창을 하고 요즘은 저희가 엔딩 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시일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저희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시고 박수를 쳐줄 때, 이분들이 이 노래를 함께 들어주고 계시는구나, 그 마음을 느낄 때 가장 보람 있고요. 대외적으로는 우리 삼경 합창단이 천도교를 대표해서 외부로 공연을 나갈 수 있다는 것에서 단원들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참 보람이 있죠. 다른 종단 합창단이나 일반인들이 삼경 합창단이 노래하시는 모습을 보고 반응은 어떻던가요? 노랫말이 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우리도 다른 종단의 노래를 들으면 또 마찬가지잖아요. 그 종단의 특성이 있고 노랫말이 와닿지 않을 때도 많지요. 작품집을 만들긴 하지만 공연장이 어둡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는 가사 전달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같은 경우에는 가사를 화면에 보여주면서 노래를 했는데, 그 부분을 참 좋게들 봐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방식이 합창단의 시각적인 효과를 분산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들이 좀 있었는데, 그 자리는 경쟁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각 종단 간 서로를 알게 되는 면에서는 도움이 됐다는 평이 있더라고요.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에게 가사를 보여줌으로써 노래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팔 절’이라는 대신사님의 말씀을 노래 중간에 낭독하는 형식을 가져보기도 했는데, 관객분들이 집중해서 듣고 또 관심도가 높았어요. 천도교라는 우리 종단이 참 생소한 것처럼 합창단도 마찬가지로 생소하다고들 해요. 그래서 저희가 합창하면 상당히 고무적으로 관심 있어 하고 천도교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점에서 저희가 느끼는 보람, 또 우리가 왜 이걸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기독교나 불교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대상이 내 안의 한울님이라는 점에서 좀 다르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음악에서도 그런 게 확연히 드러날 것 같아요. 저희가 평화합창제에 1회 때부터 참가한 것은 아닌데, 2회 때 참가하면서 분위기가 ‘천도교 합창단에서 이런 노래를 하는구나’하고 관심 있게 봐주시는 걸 느꼈어요. 선곡도 가곡을 선택해서 갔지요. 그런데 그다음 해에 다른 종단에서도 대중적인 노래로 자유곡을 선정해서 부르시더군요. <남북 평화 합창제>라는 주제에 맞게 남북 문제를 놓고 그 주제에 맞는 곡을 갖는다는 게 상당히 어렵잖아요. 정치적으로도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고요. 작년에는 우리가 ‘임진강’이라는 북한 가요를 불렀는데, 의미가 깊은 곡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아쉬운 건 다른 종단들은 그러한 것들을 매머드급 합창단을 구성하는데 우리는 한정된 인원이니까 거기에 다른 종단 합창단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인원이니까, 주최 측에 우리가 좀 더 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좀 아쉽지요. 다른 종단에는 청년합창단도 있지 않나요?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분들도 종단 별로 차이가 좀 있겠어요. 다른 종단의 경우는 청년들도 많은 데다가 단일 교회나 교구에서 나오지 않고 연합으로 나오니까 뭐 한 두세 개 교회만 모여도 한 5~60명이 되죠. 불교 같은 경우도 사찰 두 군데면 한 60명 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도 그 규모를 좀 키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합창제 공연을 했던 아람누리 극장이 1200석인데요. 그중 1층만 사용했는데, 한 7~800석 정도 되는 그 공간이 꽉 찰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또 우리 천도교는 일산에 교구가 없고 그러니까 교인분들이 관람하러 오시기도 어려워요. 올해는 11월 4일 날로 예정이 돼 있는데 많은 분들이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공연 장면 올해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올해도 마찬가지예요. 다음 달에 있을 교구 창립 기념일 날 공연을 앞두고 있고, 11월 4일에 있을 평화합창제 준비도 해야 하고 그 외에는 교단에서 기념일 날 요청이 있는 경우에 저희가 준비된 대로 응하는 것들이 예정돼 있고 지방 교구 행사에도 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합창단 단장으로 활동하시기 전에도 교단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학생회 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던 것 같아요. 학생회 때는 중고등부 부장을 맡았었고 청년회에 와서는 본부에서 부회장을 했고요. 1981년도에 서울교구 청년회를 재창립했어요. 그때 초대 부회장을 했고 지금은 환원한 정학현 동덕이 그때 초대 회장을 하고 그다음에 제가 청년회 서울시지부 회장을 했지요. 교단의 역사와 함께해오셨네요. 교회에 처음 나오던 날 기억하세요? 수운회관 낙성기념식이 있던 날이었어요. 그 옛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지요. 4월 5일 날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손을 잡고 나와서 지금까지 교회에 나오고 있으니까 그때부터 친구들은 여기서 만난 교회 친구들이 다 전부예요. 어릴 때 천도교 집안이라는 건 언제 아셨어요? 우리 집보다는 우리 외갓집이 천도교를 더 먼저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는 천도교라기보다도 천도교청우당 쪽에 계시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고, 신앙보다도 청우당 활동을 하시면서 근근이 경전만 혼자서 읽으셨던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외갓집은 적극적으로 천도교를 했던 집안이고요. 북에서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외숙이 우리 어머니의 오빠 되시는 분인데 어머니 살아생전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이 천도교에서 하는 야학 활동을 하셨고, 우리 어머니도 그 삼촌을 통해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그러더군요. 어머니는 천도교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데 천덕송 교훈가 노래를 알더라고. 그리고 당가를 아셨어요. 송가집에 있는 청우당가 ‘울려라 개벽 소리’ 하는 그 노래도 우리 어머니가 아시더라고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외숙이 청우당 쪽에 계시면서 영향을 준 것 같고 우리 외할머니한테도 나중에 물어보니 외숙이 공부도 잘했대요. 삼촌은 6·25 때 반공 쪽으로 가면서 구월산 유격대 쪽에 합류해서 문산 어디쯤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봤다는 얘기가 고향 분들이 전한 마지막 행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확인해 봤는데 더 나오질 않아요. 예전에 국방부에서 유전자 검사를 하고 등록했는데, 아직 못 찾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천도교에서 시일식을 하던 모습은 기억하세요? 생각이 나죠. 1970년쯤일 거야. 아버지하고 기념일에 나오면 그때는 빵을 줬어요. 근데 할아버지들, 아버지들이 빵 받아서는 당신들이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갑니다. 기념일 날은 이북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서로 얼굴 보는 날이었어요. 그러면 빵 받은 걸 다 나한테 준단 말이야. 내가 어린애였으니까. 그러니 빵을 이만큼 받아서 집으로 가면 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빵 가지고 온다고. 그때도 지금처럼 교회가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교인은 더 많았는데 성미가 지금처럼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돌아보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참 따뜻하고 재미있었어요. 중학교 1학년 소년이 처음 아버지하고 같이 여기 왔을 때의 첫 느낌이 혹시 기억나세요? 그때 우리 선배들이 처음 교회에 나온 친구들에게 일일이 주소를 받더라고요. 전화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죠. 그다음 주 토요일 날인가 집으로 엽서가 왔어요. 난생처음으로 내 앞으로 온 엽서예요. 그런 걸 처음 받아본 거야. 교회 학생회 집회를 알리는 통지문이었어요. 선배들이 전부 손으로 써서 보내준 거야. 그날 처음 온 친구들한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거 보고 나오게 된 거야. 중학교 1학년이 뭘 알았겠어요. 주문도 몰랐지요. 그때 나한테 주문을 가르쳐줬던 선배가 안상숙 선배인데, 지금도 가끔 나오세요. 그때는 시일날 아침에 중고등학생들이 청수를 모셨어요. 지금의 서울교구 여성회 실에서요. 그땐 거기가 다다미방이었어요. 10시부터 10시 50분까지 1시간 정도 주문을 한 105회 묵송을 하고, 경전 한 편을 한 사람이 다 읽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읽어 나가요. 그렇게 해서 용담유사 한 편을 읽고 나면 시일식 보러 들어가죠. 처음 나왔는데 주문을 모르잖아. 남들이 하는 거 마음속으로 따라 읽어요. 그렇게 주문을 배운 거죠. 그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선배들이 많았죠. 학생회가 일도 많았고 일을 참 잘했죠. 학생회 예술제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이끌림, 중학교 1학년이면 어리잖아요. 자기에 대한 존중 이런 것도 좀 느끼셨겠어요? 천도교 청년회의 일원으로, 학생회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람들하고 같이 뭔가를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더 컸겠어요. 그랬죠. 그리고 그때는 포크송이 유행했잖아. 천덕송보다도 선배들이 통기타 가지고 포크송 하니까 그 포크송 배우는 게 재밌잖아. 그래서 토요 집회를 하고 나면은 천덕송 부르지만, 집회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통기타를 중심으로 모여요.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 포크송을 불러요. 그땐 사람도 많았고 교회 나오는 게 참 즐거웠어요. 선생님의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마음에 자리 잡은 그 시기는 언제였나요? 자연스럽게 그런 신앙 생활을 해왔어요. 당시에는 예술제가 있었어요. 예술제가 12월 1일 현도 기념일을 즈음에 하는 행사였는데 그때는 중고등학생들이 예술제를 해요. 대학생 선배들이 도와줬지요. 조명이라든가 음향이라든가 선배들이 도와주는데 그 예술제 준비를 무려 3개월 이상을 하거든요. 그 과정 때문에 막이 내려 나간 다음에는 배우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연스럽게 인일 기념일까지는 그냥 교당에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청년회를 만들면서부터는 이제 그냥 학생하고는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이제 좀 들기 시작했다고 그럴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작은 천덕송 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거를 버스에서 잃어버렸어. 그때 우리 아버지가 아주 호되게 혼을 내셨어요. 정신을 어디에 갖다 팔아먹고 다니냐고. 교회 책을 들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런 걸 잃어버릴 수 있느냐고 혼을 내시는데 눈물이 쏙 빠지더라고. 당신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안 하면서 유독 나한테만 그렇게 강조하셨어요. 우리가 사형제인데도 나만 교회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내 동생들은 한 번도 안 데려왔어요. 동생들은 나 따라서 몇 번 나왔는데, 학생 때 잠깐 하다가 안 나오게 되고. 그런데 말로는 다 천도교인이래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1977년도에 내가 공무원 시험을 봤어요. 1978년도부터 공직 생활을 하다가 2개월 보름 만에 방위 근무를 소집 받아서 18개월을 복무하고 1979년도에 이제 다시 복직하고서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1981년도에 다시 서울로 왔어요. 그때 서울교구 청년회를 만들면서 청년회 활동을 하고 청년회장을 맡고 나니까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아이들도 낳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주말이면 교회 생활을 하니 자연스럽게 학교 동기 동창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제 유일한 친구들이 직장생활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되었고 한 40년 유지되고 있습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만난 김인환 삼경합창단장 모습 교회 나오시면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마음이 편안해요. 어려서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날에 교회에 가면 빵도 나눠주고 그러잖아요. 얻어먹을 때는 좋은데 뭔가 마음이 공허하다고 할까, 사찰에 가도 그랬어요. 천도교는 첫인상이, 선배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각인돼서 그런지 몰라도 푸근해요. 또 가족 같은 분위기였어요. 청년회 때부터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우리 교당은 다른 교회나 절에 가면 있는 예수, 십자가, 부처와 같은 상이 없잖아요. 우리에겐 궁을기 하나밖에 없잖아요. 신앙의 대상도 다른 종교와 차이가 좀 있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 거기서 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한울님이 마음속에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학생회 활동하시면서 마음에 품었던 신앙심이 평생을 이어져 왔다는 말씀이시군요. 우리 학생회 때 어떤 선생님께서 궁을장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한울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하나.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그것이 하얀 바탕의 색이 한울님 마음이고 빨간 색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구도화시킨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옛날에는 대교당에 장식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그런 자료들이 사진조차도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좀 아쉬워요. 삶에서 천도교를 한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사람은 매일매일 잠을 자잖아요. 그냥 단순히 잠을 자는 것과 뭔가를 정리하고 잠을 자는 것은 새로 만난 아침이 다르잖아요. 그렇듯이 천도교 신앙을 하는 것은 일신우일신, 저는 그 뜻이 있다고 봐요. 뭔가 달라져야 해요. 어제처럼 생각하고 어제처럼 행동하고 어제처럼 움직이면서 뭔가 새로움을 기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나를 중심 잡게 해준 것은 경전의 말씀이에요. 해월신사님의 법설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천이 힘듭니다. 믿습니까? 이거는 쉬워요. 그런데 그 믿음을 무엇으로 입증합니까? 뭔가 행동이 있어야 하잖아요. 해월 신사님 법설에 언고행 행고언(言顧行 行顧言)'이라고 하잖아요. 말을 할 때 행할 것을 돌아보라고. 말을 하기에 앞서 내가 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돌아보고 말을 해야 해요. 또 내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해요. 지금 천도교 청년회나 대학생단 후배들 보고 계시면 어떠세요?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실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그런 당부를 할 수 있는 위치인지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열정으로 그리고 나를 닦는 마음으로 순일한 마음으로 활동하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은 우리 아들에게도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러면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리는 바가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요. 오늘은 처음부터 합창단 이야기를 시작으로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합창단 단원들에게 단장님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단장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심부름꾼이지, 좋은 리더가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려운 형편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합창단을 만들어 온 조각 조각들이 참 소중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조각들이 하나라도 없거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역할을 못 한다거나 그 조각이 없어진다면은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때문에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자세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밀알이 된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서로서로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게 진짜 따뜻한 동덕애를 느낄 수 있는 그런 합창단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만난 김인환 삼경합창단장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가 된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교단을 지켜왔듯 합창단 단원들의 화음이 아름다운 선율로 흘러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한울님, 감응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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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식 도훈, 우이동 봉황각 내실 보수공사 성금 기부… 따뜻한 나눔 실천천도교중앙대교당 앞 최창식 도훈 모습 3·1운동 당시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던 연성수련을 봉행하였던 곳, 의암 성사의 정신이 깊게 서려있는 곳,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한 봉황각 내실이 다시금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었다. 이는 교단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나눔을 실천한 최창식 도훈의 따뜻한 손길 덕분이다. 최창식 도훈은 최근 봉황각 내실 건물의 보수공사를 위해 성금을 기부하며 문화유산 보호와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 봉황각은 오랜 세월 동안 교인들의 정신수련의 장으로 상징되어 온 장소이지만, 시설이 낡아 보수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최 도훈은 건물 보수를 위한 지원을 결정하며 “ 성사님의 정신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후세에도 전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우이동 봉황각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이 지역은 예로부터 경치가 빼어나 선비들과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천도교에서는 의암 성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나라의 미래를 고민했던 의미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았던 곳으로,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 따뜻한 나눔, 지역사회에 감동 선사 지역 주민들은 그의 기부 소식에 감사를 표하며, “최창식 도훈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봉황각이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교인들은 “귀한 뜻이 담긴 기부에 깊이 감사드리며, 공사를 통해 더욱 많은 시민들이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최창식 도훈은 평소에도 교단을 위한 나눔과 봉사 활동을 꾸준히 실천해오며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따뜻한 선행이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전해주길 기대해 본다. 우이동 봉황각 내실 지붕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 우이동 봉황각 내실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 우이동 봉황각 내실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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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영상콘텐츠 : 춘천교구 편(2)동학·천도교의 역사와 교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의 결과물이 나왔다.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춘천교구 교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동영상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번 사업은 천도교의 교인들을 통해 민족종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며 보존하는 의미있는 사업으로 그 첫 번째 발걸음을 춘천교구에서 시작했다. 춘천교구는 114년의 역사를 가진 천도교의 주요 교구 중 하나이다. 이번 동영상 콘텐츠를 통하여 천도교를 알지 못했던 대중들에게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번에 제작된 총9편의 영상 콘텐츠는 향후 연구 및 문화 콘텐츠 창작을 위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편집자 주- 명승철 선도사, 천도교 신앙과 함께 걸어온 길 이번 콘텐츠는 춘천교구 명승철 선도사의 인터뷰로 천도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성장한 이야기,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영부의 치유 경험을 통해 신앙의 힘을 체감했음을 알 수 있다. 명승철 선도사는 청소년 시절 천도교 청소년 수련에 참여하며 신앙에 눈을 떴고, 이후 화악산 수도원에서의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군 제대 후 종학대학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천도교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혔다. 이후 춘천교구 순회 강사로 활동하며 교회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화악산 수도원 설립 과정과 장모님, 장인어른과의 특별한 인연을 통해 수도원 건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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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영상콘텐츠 : 춘천교구 편(1)동학·천도교의 역사와 교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의 결과물이 나왔다.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춘천교구 교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동영상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번 사업은 천도교의 교인들을 통해 민족종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며 보존하는 의미있는 사업으로 그 첫 번째 발걸음을 춘천교구에서 시작했다. 춘천교구는 114년의 역사를 가진 천도교의 주요 교구 중 하나이다. 이번 동영상 콘텐츠를 통하여 천도교를 알지 못했던 대중들에게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번에 제작된 총9편의 영상 콘텐츠는 향후 연구 및 문화 콘텐츠 창작을 위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편집자 주- 명승철 선도사, 천도교 신앙과 함께 걸어온 길 이번 콘텐츠는 춘천교구 명승철 선도사의 인터뷰로 천도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성장한 이야기,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영부의 치유 경험을 통해 신앙의 힘을 체감했음을 알 수 있다. 명승철 선도사는 청소년 시절 천도교 청소년 수련에 참여하며 신앙에 눈을 떴고, 이후 화악산 수도원에서의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군 제대 후 종학대학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천도교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혔다. 이후 춘천교구 순회 강사로 활동하며 교회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화악산 수도원 설립 과정과 장모님, 장인어른과의 특별한 인연을 통해 수도원 건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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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브리즈번에 울려퍼지는 시천주 소리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신인간사를 찾아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안녕하십니까. 인터뷰에 참여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먼저 자신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모시고 안녕하세요? 저는 법원포 연원 황화전교실장 제암 장영균입니다. 이민 가시기 전 한국에서도 교직에 계셨는데, 교직 생활을 마치고 이민을 선택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딸과 아들이 호주로 유학을 가서 학교를 졸업하고 전문직을 가지고 브리즈번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모여서 살고 싶었고, 또 함께 살면서 천도교 신앙을 딸, 아들, 손녀에게 전해 주고 싶은 생각에 퇴임 3년 전에 영주권을 신청하였습니다. 정년 퇴임이 2017년 2월 28일이었는데, 한울님의 감응으로 영주 비자가 2016년 5월에 나와서 퇴임 3일을 앞둔 2월 25일까지 호주에 입국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부득이 그 날짜에 맞춰서 이민하게 되었습니다. ※ 브리즈번(Brisbane)은 호주 퀸즐랜드주의 주도이며, 동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멜버른, 시드니에 이어 호주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호주로 이민을 간 지 8년 정도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호주에서의 생활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호주로 이민을 간 첫해는 집 주변 잔디밭을 일구어 텃밭으로 만들고 보도블록, 페인트칠 등 집 관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향수병인지는 모르지만 한국 사람이 그리워 한국인을 만나면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하였고, 한인회 각종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운동을 좋아해서 테니스, 골프 모임에 들어가 운동을 하였고, 바둑을 좋아해서 바둑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또 음악을 좋아해서 한인 합창단에 들어가 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글학교 선생님을 구한다는 교민지 기사를 보고 전화를 하였더니, 교장선생님이 지금 바로 오라고 하셔서 2018년 첫해는 교사로, 2019년은 교사와 교감 겸임으로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2020년부터 교장으로 현재까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호주 한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호주 한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호주 한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호주에서 거주하고 있는 집 앞에 펄럭이는 궁을기 호주 집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 모습 이번에 한국에 오시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요? 건강 검진과 4월 5일 천일기념일 참석, 그리고 대전교구장님 교구장 연임을 축하해 주기 위해 겸사겸사 오게 되었습니다. 천도교 신앙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저는 포덕 123년(1982) 11월 14일에 독립유공자 집안의 천도교 계대교인 지금 제 아내인 정심당 박노분을 만나 천도교 의례로 결혼식을 하면서 천도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호주에서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나요? 아내와 같이 실천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해월신사님 법설』 <대인접물>에 나오는 ‘일용행사가 도(道) 아님이 없느니라’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호주에서도 일관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일이 있으면 이치를 가려서 열심히 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마음공부를 하라는 가르침대로 수련은 물론 오관을 정성을 다해 실행하고 있습니다. 항상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을 받는 천도교 교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주 교민사회에서 느끼는 아쉬움도 많을 것 같은데,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신앙생활이 도움이 되나요? 브리즈번 한글학교에서 봉사하면서 학부모들을 통해 호주 교민사회를 이해하게 되었고 ‘남의 적은 허물을 내 마음에 논란하지 말고 나의 적은 지혜를 사람에게 베풀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학교에 접목 실천하면서 이민사회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이민가기 전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이민가기 전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이민가기 전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앞서 말씀해주신 바와 같이 호주에서 한글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학교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하면서 경험한 지식과 한울님 스승님께서 주신 지혜를 브리즈번 한글학교에 적용하여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초등학교와 같은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을 만들어 어떤 분이 오셔도 학교에 적응하여 근무를 잘할 수 있게 체제를 개선하였습니다. 제가 첫 부임을 하였을 때 전교 학생 수가 180명 정도였다가 코로나 번창할 때는 160여 명으로 줄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350명으로 퀸즐랜드주에서 가장 크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한글학교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려서부터 올바른 생활 습관과 신앙생활의 습관을 갖도록 당부하고 싶습니다."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을 잊지 않고 자라날 수 있도록 뿌리와 줄기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후학들이나 다음 세대 청소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어린이, 학생은 우리의 희망이자 우리 천도교의 미래입니다. 어린이, 학생들에게 바른 생활 습관을 심어주는 것이 공부를 강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은 실력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좋은 품성과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인품, 규칙적인 생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태도는 지식이 아니라 평소 생활 습관을 통해서 다듬어지기 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신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려서부터 올바른 생활 습관과 신앙생활의 습관을 갖도록 당부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어려움에 닥쳤을 때 극복할 수 있도록 마음의 가르침을 준 경전의 말씀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천도교에 입교하여 처음으로 용담수도원에서 1주일 수련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로 강령을 모시면서 『해월신사 법설』에 나오는 “우(愚), 묵(黙), 눌(訥) 세 글자를 용(用)으로 삼으라(以愚黙訥三字爲用)”는 가르침을 받고, 머리를 쇠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실천하기 위해 경전에 나오는 말씀을 족자에 담아 벽에 걸어 놓고 늘 마음에 새기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암 장영균, 정심당 박노분 부부가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방문한 기념으로 사진을 촬영하였다. 아픔도 슬픔도 돌아보면, 다 애틋함으로 남기 마련이다. 장영균, 박노분 동덕 부부는 꿈에 그리던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 눈에 닿는 곳마다 젊은 시절 살아왔던 기억들로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다. 고국으로의 소풍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지구 반대편 호주를 향해 긴 인사를 나누었다. 시천주 주문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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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의 걸음이 역사가 되어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 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님, 천도교신문에서 찾아뵙습니다. 그동안 교단의 여러 행사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를 들려주셨습니다. 합창단 소개 부탁드릴게요. 우리 합창단은 역사가 깊습니다. 예전에 대교당 시일식을 중앙총부에서 직접 집례를 맡아서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일식 집례를 서울교구로 이관하면서, (그게 한 40년 정도 됐을 거예요.) 그때부터는 교구 내에서 시일식 합창단을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서 서울교구 합창단이 만들어졌습니다. 합창단 결성 초기에는 지금처럼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관심 있는 교인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정도였어요. 그때 서영모 교수님 등 몇몇 분들께서 지도를 해주시면서 명맥을 겨우겨우 유지해 왔지요. 그러다가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교단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단 밖에서도 활동하곤 합니다. 고양시에서 속해 있는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주관하는 <남북 평화 합창제>(현 평화합창제)에 참가하게 된 계기로 해마다 참가하고 있습니다. 평화합창제 때 많은 분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무대였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합창제에 참가하시게 되었나요? 평화합창제에는 저희 삼경합창단이 제2회 때부터 참가하게 됩니다. 주최 측인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함께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 주셔서 참가하게 되었는데, 다른 단체들은 모두 합창단 이름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때 우리도 합창단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단원들로부터 공모를 해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저희 합창단이 뜻하는 바는 해월 신사님의 ‘성, 경, 신’ 사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다짐을 해보자는 뜻으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 5회 평화합창제 참가, 공연하는 모습 시일식을 마치고 삼경합창단이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연습하는 모습 이후로 해마다 평화합창제에 참가하셨다고 하시던데, 합창단의 연간 주요 사업으로는 어떤 일이 있나요? 저희가 제2회 평화합창제 때 처음 참가하게 되어 벌써 다섯 번이나 참가했네요. 저희의 활동은 교단 내의 행사와 시일식 등에 노래하는 것이 주요 활동입니다. 이를테면 기념 공연이 있는데, 서울교구 결성 기념일에 하는 경축 공연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외부 행사로써 평화합창제와 KCRP에서 주최하는 평화 음악제와 같은 종교축제에 초청 받아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좀 바빴습니다. 작년에는 특히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받아서 다녀오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연습을 또 별도로 더 해야 하니 바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합창단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지금 저희 삼경합창단에 등록된 단원은 한 30여 명 되고요. 공연에 참여하는 분들이 매번 나오지는 못하지만, 정기 연주회나 평화합창제 같은 때는 좀 더 모이곤 하지요. 각자 개인 생활들이 있어서 한 15명 내외가 나와 대교당 시일식에 함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열심히 활동해 주는 단원들이 있어서 고맙고 또 서로서로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단장님은 언제부터 합창단 활동을 하셨나요? 단원들과의 화합은 잘 이뤄지고 있나요? 제가 중앙총부에서 종무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중앙감사의 임기까지 마치고 나니까 포덕 160년이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합창단의 단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 5~6년 되었는데, 서로가 잘 맞춰가면서 활동하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모두가 좋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지지요. 가장 보람이 된다고 느끼실 때는 언제예요? 매주 시일식에 합창을 하고 요즘은 저희가 엔딩 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시일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저희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시고 박수를 쳐줄 때, 이분들이 이 노래를 함께 들어주고 계시는구나, 그 마음을 느낄 때 가장 보람 있고요. 대외적으로는 우리 삼경 합창단이 천도교를 대표해서 외부로 공연을 나갈 수 있다는 것에서 단원들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참 보람이 있죠. 다른 종단 합창단이나 일반인들이 삼경 합창단이 노래하시는 모습을 보고 반응은 어떻던가요? 노랫말이 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우리도 다른 종단의 노래를 들으면 또 마찬가지잖아요. 그 종단의 특성이 있고 노랫말이 와닿지 않을 때도 많지요. 작품집을 만들긴 하지만 공연장이 어둡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는 가사 전달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같은 경우에는 가사를 화면에 보여주면서 노래를 했는데, 그 부분을 참 좋게들 봐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방식이 합창단의 시각적인 효과를 분산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들이 좀 있었는데, 그 자리는 경쟁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각 종단 간 서로를 알게 되는 면에서는 도움이 됐다는 평이 있더라고요.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에게 가사를 보여줌으로써 노래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팔 절’이라는 대신사님의 말씀을 노래 중간에 낭독하는 형식을 가져보기도 했는데, 관객분들이 집중해서 듣고 또 관심도가 높았어요. 천도교라는 우리 종단이 참 생소한 것처럼 합창단도 마찬가지로 생소하다고들 해요. 그래서 저희가 합창하면 상당히 고무적으로 관심 있어 하고 천도교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점에서 저희가 느끼는 보람, 또 우리가 왜 이걸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기독교나 불교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대상이 내 안의 한울님이라는 점에서 좀 다르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음악에서도 그런 게 확연히 드러날 것 같아요. 저희가 평화합창제에 1회 때부터 참가한 것은 아닌데, 2회 때 참가하면서 분위기가 ‘천도교 합창단에서 이런 노래를 하는구나’하고 관심 있게 봐주시는 걸 느꼈어요. 선곡도 가곡을 선택해서 갔지요. 그런데 그다음 해에 다른 종단에서도 대중적인 노래로 자유곡을 선정해서 부르시더군요. <남북 평화 합창제>라는 주제에 맞게 남북 문제를 놓고 그 주제에 맞는 곡을 갖는다는 게 상당히 어렵잖아요. 정치적으로도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고요. 작년에는 우리가 ‘임진강’이라는 북한 가요를 불렀는데, 의미가 깊은 곡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아쉬운 건 다른 종단들은 그러한 것들을 매머드급 합창단을 구성하는데 우리는 한정된 인원이니까 거기에 다른 종단 합창단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인원이니까, 주최 측에 우리가 좀 더 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좀 아쉽지요. 다른 종단에는 청년합창단도 있지 않나요?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분들도 종단 별로 차이가 좀 있겠어요. 다른 종단의 경우는 청년들도 많은 데다가 단일 교회나 교구에서 나오지 않고 연합으로 나오니까 뭐 한 두세 개 교회만 모여도 한 5~60명이 되죠. 불교 같은 경우도 사찰 두 군데면 한 60명 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도 그 규모를 좀 키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합창제 공연을 했던 아람누리 극장이 1200석인데요. 그중 1층만 사용했는데, 한 7~800석 정도 되는 그 공간이 꽉 찰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또 우리 천도교는 일산에 교구가 없고 그러니까 교인분들이 관람하러 오시기도 어려워요. 올해는 11월 4일 날로 예정이 돼 있는데 많은 분들이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공연 장면 올해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올해도 마찬가지예요. 다음 달에 있을 교구 창립 기념일 날 공연을 앞두고 있고, 11월 4일에 있을 평화합창제 준비도 해야 하고 그 외에는 교단에서 기념일 날 요청이 있는 경우에 저희가 준비된 대로 응하는 것들이 예정돼 있고 지방 교구 행사에도 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합창단 단장으로 활동하시기 전에도 교단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학생회 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던 것 같아요. 학생회 때는 중고등부 부장을 맡았었고 청년회에 와서는 본부에서 부회장을 했고요. 1981년도에 서울교구 청년회를 재창립했어요. 그때 초대 부회장을 했고 지금은 환원한 정학현 동덕이 그때 초대 회장을 하고 그다음에 제가 청년회 서울시지부 회장을 했지요. 교단의 역사와 함께해오셨네요. 교회에 처음 나오던 날 기억하세요? 수운회관 낙성기념식이 있던 날이었어요. 그 옛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지요. 4월 5일 날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손을 잡고 나와서 지금까지 교회에 나오고 있으니까 그때부터 친구들은 여기서 만난 교회 친구들이 다 전부예요. 어릴 때 천도교 집안이라는 건 언제 아셨어요? 우리 집보다는 우리 외갓집이 천도교를 더 먼저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는 천도교라기보다도 천도교청우당 쪽에 계시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고, 신앙보다도 청우당 활동을 하시면서 근근이 경전만 혼자서 읽으셨던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외갓집은 적극적으로 천도교를 했던 집안이고요. 북에서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외숙이 우리 어머니의 오빠 되시는 분인데 어머니 살아생전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이 천도교에서 하는 야학 활동을 하셨고, 우리 어머니도 그 삼촌을 통해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그러더군요. 어머니는 천도교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데 천덕송 교훈가 노래를 알더라고. 그리고 당가를 아셨어요. 송가집에 있는 청우당가 ‘울려라 개벽 소리’ 하는 그 노래도 우리 어머니가 아시더라고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외숙이 청우당 쪽에 계시면서 영향을 준 것 같고 우리 외할머니한테도 나중에 물어보니 외숙이 공부도 잘했대요. 삼촌은 6·25 때 반공 쪽으로 가면서 구월산 유격대 쪽에 합류해서 문산 어디쯤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봤다는 얘기가 고향 분들이 전한 마지막 행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확인해 봤는데 더 나오질 않아요. 예전에 국방부에서 유전자 검사를 하고 등록했는데, 아직 못 찾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천도교에서 시일식을 하던 모습은 기억하세요? 생각이 나죠. 1970년쯤일 거야. 아버지하고 기념일에 나오면 그때는 빵을 줬어요. 근데 할아버지들, 아버지들이 빵 받아서는 당신들이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갑니다. 기념일 날은 이북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서로 얼굴 보는 날이었어요. 그러면 빵 받은 걸 다 나한테 준단 말이야. 내가 어린애였으니까. 그러니 빵을 이만큼 받아서 집으로 가면 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빵 가지고 온다고. 그때도 지금처럼 교회가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교인은 더 많았는데 성미가 지금처럼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돌아보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참 따뜻하고 재미있었어요. 중학교 1학년 소년이 처음 아버지하고 같이 여기 왔을 때의 첫 느낌이 혹시 기억나세요? 그때 우리 선배들이 처음 교회에 나온 친구들에게 일일이 주소를 받더라고요. 전화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죠. 그다음 주 토요일 날인가 집으로 엽서가 왔어요. 난생처음으로 내 앞으로 온 엽서예요. 그런 걸 처음 받아본 거야. 교회 학생회 집회를 알리는 통지문이었어요. 선배들이 전부 손으로 써서 보내준 거야. 그날 처음 온 친구들한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거 보고 나오게 된 거야. 중학교 1학년이 뭘 알았겠어요. 주문도 몰랐지요. 그때 나한테 주문을 가르쳐줬던 선배가 안상숙 선배인데, 지금도 가끔 나오세요. 그때는 시일날 아침에 중고등학생들이 청수를 모셨어요. 지금의 서울교구 여성회 실에서요. 그땐 거기가 다다미방이었어요. 10시부터 10시 50분까지 1시간 정도 주문을 한 105회 묵송을 하고, 경전 한 편을 한 사람이 다 읽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읽어 나가요. 그렇게 해서 용담유사 한 편을 읽고 나면 시일식 보러 들어가죠. 처음 나왔는데 주문을 모르잖아. 남들이 하는 거 마음속으로 따라 읽어요. 그렇게 주문을 배운 거죠. 그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선배들이 많았죠. 학생회가 일도 많았고 일을 참 잘했죠. 학생회 예술제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이끌림, 중학교 1학년이면 어리잖아요. 자기에 대한 존중 이런 것도 좀 느끼셨겠어요? 천도교 청년회의 일원으로, 학생회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람들하고 같이 뭔가를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더 컸겠어요. 그랬죠. 그리고 그때는 포크송이 유행했잖아. 천덕송보다도 선배들이 통기타 가지고 포크송 하니까 그 포크송 배우는 게 재밌잖아. 그래서 토요 집회를 하고 나면은 천덕송 부르지만, 집회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통기타를 중심으로 모여요.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 포크송을 불러요. 그땐 사람도 많았고 교회 나오는 게 참 즐거웠어요. 선생님의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마음에 자리 잡은 그 시기는 언제였나요? 자연스럽게 그런 신앙 생활을 해왔어요. 당시에는 예술제가 있었어요. 예술제가 12월 1일 현도 기념일을 즈음에 하는 행사였는데 그때는 중고등학생들이 예술제를 해요. 대학생 선배들이 도와줬지요. 조명이라든가 음향이라든가 선배들이 도와주는데 그 예술제 준비를 무려 3개월 이상을 하거든요. 그 과정 때문에 막이 내려 나간 다음에는 배우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연스럽게 인일 기념일까지는 그냥 교당에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청년회를 만들면서부터는 이제 그냥 학생하고는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이제 좀 들기 시작했다고 그럴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작은 천덕송 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거를 버스에서 잃어버렸어. 그때 우리 아버지가 아주 호되게 혼을 내셨어요. 정신을 어디에 갖다 팔아먹고 다니냐고. 교회 책을 들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런 걸 잃어버릴 수 있느냐고 혼을 내시는데 눈물이 쏙 빠지더라고. 당신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안 하면서 유독 나한테만 그렇게 강조하셨어요. 우리가 사형제인데도 나만 교회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내 동생들은 한 번도 안 데려왔어요. 동생들은 나 따라서 몇 번 나왔는데, 학생 때 잠깐 하다가 안 나오게 되고. 그런데 말로는 다 천도교인이래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1977년도에 내가 공무원 시험을 봤어요. 1978년도부터 공직 생활을 하다가 2개월 보름 만에 방위 근무를 소집 받아서 18개월을 복무하고 1979년도에 이제 다시 복직하고서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1981년도에 다시 서울로 왔어요. 그때 서울교구 청년회를 만들면서 청년회 활동을 하고 청년회장을 맡고 나니까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아이들도 낳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주말이면 교회 생활을 하니 자연스럽게 학교 동기 동창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제 유일한 친구들이 직장생활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되었고 한 40년 유지되고 있습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만난 김인환 삼경합창단장 모습 교회 나오시면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마음이 편안해요. 어려서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날에 교회에 가면 빵도 나눠주고 그러잖아요. 얻어먹을 때는 좋은데 뭔가 마음이 공허하다고 할까, 사찰에 가도 그랬어요. 천도교는 첫인상이, 선배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각인돼서 그런지 몰라도 푸근해요. 또 가족 같은 분위기였어요. 청년회 때부터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우리 교당은 다른 교회나 절에 가면 있는 예수, 십자가, 부처와 같은 상이 없잖아요. 우리에겐 궁을기 하나밖에 없잖아요. 신앙의 대상도 다른 종교와 차이가 좀 있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 거기서 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한울님이 마음속에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학생회 활동하시면서 마음에 품었던 신앙심이 평생을 이어져 왔다는 말씀이시군요. 우리 학생회 때 어떤 선생님께서 궁을장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한울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하나.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그것이 하얀 바탕의 색이 한울님 마음이고 빨간 색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구도화시킨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옛날에는 대교당에 장식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그런 자료들이 사진조차도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좀 아쉬워요. 삶에서 천도교를 한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사람은 매일매일 잠을 자잖아요. 그냥 단순히 잠을 자는 것과 뭔가를 정리하고 잠을 자는 것은 새로 만난 아침이 다르잖아요. 그렇듯이 천도교 신앙을 하는 것은 일신우일신, 저는 그 뜻이 있다고 봐요. 뭔가 달라져야 해요. 어제처럼 생각하고 어제처럼 행동하고 어제처럼 움직이면서 뭔가 새로움을 기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나를 중심 잡게 해준 것은 경전의 말씀이에요. 해월신사님의 법설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천이 힘듭니다. 믿습니까? 이거는 쉬워요. 그런데 그 믿음을 무엇으로 입증합니까? 뭔가 행동이 있어야 하잖아요. 해월 신사님 법설에 언고행 행고언(言顧行 行顧言)'이라고 하잖아요. 말을 할 때 행할 것을 돌아보라고. 말을 하기에 앞서 내가 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돌아보고 말을 해야 해요. 또 내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해요. 지금 천도교 청년회나 대학생단 후배들 보고 계시면 어떠세요?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실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그런 당부를 할 수 있는 위치인지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열정으로 그리고 나를 닦는 마음으로 순일한 마음으로 활동하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은 우리 아들에게도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러면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리는 바가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요. 오늘은 처음부터 합창단 이야기를 시작으로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합창단 단원들에게 단장님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단장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심부름꾼이지, 좋은 리더가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려운 형편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합창단을 만들어 온 조각 조각들이 참 소중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조각들이 하나라도 없거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역할을 못 한다거나 그 조각이 없어진다면은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때문에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자세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밀알이 된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서로서로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게 진짜 따뜻한 동덕애를 느낄 수 있는 그런 합창단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만난 김인환 삼경합창단장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가 된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교단을 지켜왔듯 합창단 단원들의 화음이 아름다운 선율로 흘러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한울님, 감응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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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식 도훈, 우이동 봉황각 내실 보수공사 성금 기부… 따뜻한 나눔 실천천도교중앙대교당 앞 최창식 도훈 모습 3·1운동 당시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던 연성수련을 봉행하였던 곳, 의암 성사의 정신이 깊게 서려있는 곳,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한 봉황각 내실이 다시금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었다. 이는 교단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나눔을 실천한 최창식 도훈의 따뜻한 손길 덕분이다. 최창식 도훈은 최근 봉황각 내실 건물의 보수공사를 위해 성금을 기부하며 문화유산 보호와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 봉황각은 오랜 세월 동안 교인들의 정신수련의 장으로 상징되어 온 장소이지만, 시설이 낡아 보수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최 도훈은 건물 보수를 위한 지원을 결정하며 “ 성사님의 정신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후세에도 전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우이동 봉황각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이 지역은 예로부터 경치가 빼어나 선비들과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천도교에서는 의암 성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나라의 미래를 고민했던 의미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았던 곳으로,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 따뜻한 나눔, 지역사회에 감동 선사 지역 주민들은 그의 기부 소식에 감사를 표하며, “최창식 도훈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봉황각이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교인들은 “귀한 뜻이 담긴 기부에 깊이 감사드리며, 공사를 통해 더욱 많은 시민들이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최창식 도훈은 평소에도 교단을 위한 나눔과 봉사 활동을 꾸준히 실천해오며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따뜻한 선행이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전해주길 기대해 본다. 우이동 봉황각 내실 지붕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 우이동 봉황각 내실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 우이동 봉황각 내실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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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영상콘텐츠 : 춘천교구 편(2)동학·천도교의 역사와 교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의 결과물이 나왔다.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춘천교구 교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동영상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번 사업은 천도교의 교인들을 통해 민족종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며 보존하는 의미있는 사업으로 그 첫 번째 발걸음을 춘천교구에서 시작했다. 춘천교구는 114년의 역사를 가진 천도교의 주요 교구 중 하나이다. 이번 동영상 콘텐츠를 통하여 천도교를 알지 못했던 대중들에게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번에 제작된 총9편의 영상 콘텐츠는 향후 연구 및 문화 콘텐츠 창작을 위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편집자 주- 명승철 선도사, 천도교 신앙과 함께 걸어온 길 이번 콘텐츠는 춘천교구 명승철 선도사의 인터뷰로 천도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성장한 이야기,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영부의 치유 경험을 통해 신앙의 힘을 체감했음을 알 수 있다. 명승철 선도사는 청소년 시절 천도교 청소년 수련에 참여하며 신앙에 눈을 떴고, 이후 화악산 수도원에서의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군 제대 후 종학대학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천도교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혔다. 이후 춘천교구 순회 강사로 활동하며 교회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화악산 수도원 설립 과정과 장모님, 장인어른과의 특별한 인연을 통해 수도원 건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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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영상콘텐츠 : 춘천교구 편(1)동학·천도교의 역사와 교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의 결과물이 나왔다.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춘천교구 교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동영상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번 사업은 천도교의 교인들을 통해 민족종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며 보존하는 의미있는 사업으로 그 첫 번째 발걸음을 춘천교구에서 시작했다. 춘천교구는 114년의 역사를 가진 천도교의 주요 교구 중 하나이다. 이번 동영상 콘텐츠를 통하여 천도교를 알지 못했던 대중들에게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번에 제작된 총9편의 영상 콘텐츠는 향후 연구 및 문화 콘텐츠 창작을 위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편집자 주- 명승철 선도사, 천도교 신앙과 함께 걸어온 길 이번 콘텐츠는 춘천교구 명승철 선도사의 인터뷰로 천도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성장한 이야기,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영부의 치유 경험을 통해 신앙의 힘을 체감했음을 알 수 있다. 명승철 선도사는 청소년 시절 천도교 청소년 수련에 참여하며 신앙에 눈을 떴고, 이후 화악산 수도원에서의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군 제대 후 종학대학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천도교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혔다. 이후 춘천교구 순회 강사로 활동하며 교회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화악산 수도원 설립 과정과 장모님, 장인어른과의 특별한 인연을 통해 수도원 건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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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브리즈번에 울려퍼지는 시천주 소리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신인간사를 찾아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안녕하십니까. 인터뷰에 참여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먼저 자신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모시고 안녕하세요? 저는 법원포 연원 황화전교실장 제암 장영균입니다. 이민 가시기 전 한국에서도 교직에 계셨는데, 교직 생활을 마치고 이민을 선택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딸과 아들이 호주로 유학을 가서 학교를 졸업하고 전문직을 가지고 브리즈번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모여서 살고 싶었고, 또 함께 살면서 천도교 신앙을 딸, 아들, 손녀에게 전해 주고 싶은 생각에 퇴임 3년 전에 영주권을 신청하였습니다. 정년 퇴임이 2017년 2월 28일이었는데, 한울님의 감응으로 영주 비자가 2016년 5월에 나와서 퇴임 3일을 앞둔 2월 25일까지 호주에 입국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부득이 그 날짜에 맞춰서 이민하게 되었습니다. ※ 브리즈번(Brisbane)은 호주 퀸즐랜드주의 주도이며, 동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멜버른, 시드니에 이어 호주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호주로 이민을 간 지 8년 정도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호주에서의 생활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호주로 이민을 간 첫해는 집 주변 잔디밭을 일구어 텃밭으로 만들고 보도블록, 페인트칠 등 집 관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향수병인지는 모르지만 한국 사람이 그리워 한국인을 만나면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하였고, 한인회 각종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운동을 좋아해서 테니스, 골프 모임에 들어가 운동을 하였고, 바둑을 좋아해서 바둑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또 음악을 좋아해서 한인 합창단에 들어가 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글학교 선생님을 구한다는 교민지 기사를 보고 전화를 하였더니, 교장선생님이 지금 바로 오라고 하셔서 2018년 첫해는 교사로, 2019년은 교사와 교감 겸임으로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2020년부터 교장으로 현재까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호주 한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호주 한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호주 한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호주에서 거주하고 있는 집 앞에 펄럭이는 궁을기 호주 집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 모습 이번에 한국에 오시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요? 건강 검진과 4월 5일 천일기념일 참석, 그리고 대전교구장님 교구장 연임을 축하해 주기 위해 겸사겸사 오게 되었습니다. 천도교 신앙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저는 포덕 123년(1982) 11월 14일에 독립유공자 집안의 천도교 계대교인 지금 제 아내인 정심당 박노분을 만나 천도교 의례로 결혼식을 하면서 천도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호주에서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나요? 아내와 같이 실천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해월신사님 법설』 <대인접물>에 나오는 ‘일용행사가 도(道) 아님이 없느니라’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호주에서도 일관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일이 있으면 이치를 가려서 열심히 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마음공부를 하라는 가르침대로 수련은 물론 오관을 정성을 다해 실행하고 있습니다. 항상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을 받는 천도교 교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주 교민사회에서 느끼는 아쉬움도 많을 것 같은데,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신앙생활이 도움이 되나요? 브리즈번 한글학교에서 봉사하면서 학부모들을 통해 호주 교민사회를 이해하게 되었고 ‘남의 적은 허물을 내 마음에 논란하지 말고 나의 적은 지혜를 사람에게 베풀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학교에 접목 실천하면서 이민사회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이민가기 전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이민가기 전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제암 장영균 선도사가 이민가기 전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하는 모습 앞서 말씀해주신 바와 같이 호주에서 한글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학교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하면서 경험한 지식과 한울님 스승님께서 주신 지혜를 브리즈번 한글학교에 적용하여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초등학교와 같은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을 만들어 어떤 분이 오셔도 학교에 적응하여 근무를 잘할 수 있게 체제를 개선하였습니다. 제가 첫 부임을 하였을 때 전교 학생 수가 180명 정도였다가 코로나 번창할 때는 160여 명으로 줄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350명으로 퀸즐랜드주에서 가장 크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한글학교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려서부터 올바른 생활 습관과 신앙생활의 습관을 갖도록 당부하고 싶습니다."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을 잊지 않고 자라날 수 있도록 뿌리와 줄기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후학들이나 다음 세대 청소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어린이, 학생은 우리의 희망이자 우리 천도교의 미래입니다. 어린이, 학생들에게 바른 생활 습관을 심어주는 것이 공부를 강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은 실력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좋은 품성과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인품, 규칙적인 생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태도는 지식이 아니라 평소 생활 습관을 통해서 다듬어지기 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신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려서부터 올바른 생활 습관과 신앙생활의 습관을 갖도록 당부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어려움에 닥쳤을 때 극복할 수 있도록 마음의 가르침을 준 경전의 말씀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천도교에 입교하여 처음으로 용담수도원에서 1주일 수련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로 강령을 모시면서 『해월신사 법설』에 나오는 “우(愚), 묵(黙), 눌(訥) 세 글자를 용(用)으로 삼으라(以愚黙訥三字爲用)”는 가르침을 받고, 머리를 쇠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실천하기 위해 경전에 나오는 말씀을 족자에 담아 벽에 걸어 놓고 늘 마음에 새기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암 장영균, 정심당 박노분 부부가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방문한 기념으로 사진을 촬영하였다. 아픔도 슬픔도 돌아보면, 다 애틋함으로 남기 마련이다. 장영균, 박노분 동덕 부부는 꿈에 그리던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 눈에 닿는 곳마다 젊은 시절 살아왔던 기억들로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다. 고국으로의 소풍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지구 반대편 호주를 향해 긴 인사를 나누었다. 시천주 주문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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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의 걸음이 역사가 되어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 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님, 천도교신문에서 찾아뵙습니다. 그동안 교단의 여러 행사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를 들려주셨습니다. 합창단 소개 부탁드릴게요. 우리 합창단은 역사가 깊습니다. 예전에 대교당 시일식을 중앙총부에서 직접 집례를 맡아서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일식 집례를 서울교구로 이관하면서, (그게 한 40년 정도 됐을 거예요.) 그때부터는 교구 내에서 시일식 합창단을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서 서울교구 합창단이 만들어졌습니다. 합창단 결성 초기에는 지금처럼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관심 있는 교인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정도였어요. 그때 서영모 교수님 등 몇몇 분들께서 지도를 해주시면서 명맥을 겨우겨우 유지해 왔지요. 그러다가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교단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단 밖에서도 활동하곤 합니다. 고양시에서 속해 있는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주관하는 <남북 평화 합창제>(현 평화합창제)에 참가하게 된 계기로 해마다 참가하고 있습니다. 평화합창제 때 많은 분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무대였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합창제에 참가하시게 되었나요? 평화합창제에는 저희 삼경합창단이 제2회 때부터 참가하게 됩니다. 주최 측인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함께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 주셔서 참가하게 되었는데, 다른 단체들은 모두 합창단 이름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때 우리도 합창단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단원들로부터 공모를 해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저희 합창단이 뜻하는 바는 해월 신사님의 ‘성, 경, 신’ 사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다짐을 해보자는 뜻으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 5회 평화합창제 참가, 공연하는 모습 시일식을 마치고 삼경합창단이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연습하는 모습 이후로 해마다 평화합창제에 참가하셨다고 하시던데, 합창단의 연간 주요 사업으로는 어떤 일이 있나요? 저희가 제2회 평화합창제 때 처음 참가하게 되어 벌써 다섯 번이나 참가했네요. 저희의 활동은 교단 내의 행사와 시일식 등에 노래하는 것이 주요 활동입니다. 이를테면 기념 공연이 있는데, 서울교구 결성 기념일에 하는 경축 공연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외부 행사로써 평화합창제와 KCRP에서 주최하는 평화 음악제와 같은 종교축제에 초청 받아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좀 바빴습니다. 작년에는 특히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받아서 다녀오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연습을 또 별도로 더 해야 하니 바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합창단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지금 저희 삼경합창단에 등록된 단원은 한 30여 명 되고요. 공연에 참여하는 분들이 매번 나오지는 못하지만, 정기 연주회나 평화합창제 같은 때는 좀 더 모이곤 하지요. 각자 개인 생활들이 있어서 한 15명 내외가 나와 대교당 시일식에 함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열심히 활동해 주는 단원들이 있어서 고맙고 또 서로서로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단장님은 언제부터 합창단 활동을 하셨나요? 단원들과의 화합은 잘 이뤄지고 있나요? 제가 중앙총부에서 종무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중앙감사의 임기까지 마치고 나니까 포덕 160년이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합창단의 단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 5~6년 되었는데, 서로가 잘 맞춰가면서 활동하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모두가 좋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지지요. 가장 보람이 된다고 느끼실 때는 언제예요? 매주 시일식에 합창을 하고 요즘은 저희가 엔딩 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시일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저희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시고 박수를 쳐줄 때, 이분들이 이 노래를 함께 들어주고 계시는구나, 그 마음을 느낄 때 가장 보람 있고요. 대외적으로는 우리 삼경 합창단이 천도교를 대표해서 외부로 공연을 나갈 수 있다는 것에서 단원들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참 보람이 있죠. 다른 종단 합창단이나 일반인들이 삼경 합창단이 노래하시는 모습을 보고 반응은 어떻던가요? 노랫말이 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우리도 다른 종단의 노래를 들으면 또 마찬가지잖아요. 그 종단의 특성이 있고 노랫말이 와닿지 않을 때도 많지요. 작품집을 만들긴 하지만 공연장이 어둡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는 가사 전달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같은 경우에는 가사를 화면에 보여주면서 노래를 했는데, 그 부분을 참 좋게들 봐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방식이 합창단의 시각적인 효과를 분산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들이 좀 있었는데, 그 자리는 경쟁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각 종단 간 서로를 알게 되는 면에서는 도움이 됐다는 평이 있더라고요.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에게 가사를 보여줌으로써 노래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팔 절’이라는 대신사님의 말씀을 노래 중간에 낭독하는 형식을 가져보기도 했는데, 관객분들이 집중해서 듣고 또 관심도가 높았어요. 천도교라는 우리 종단이 참 생소한 것처럼 합창단도 마찬가지로 생소하다고들 해요. 그래서 저희가 합창하면 상당히 고무적으로 관심 있어 하고 천도교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점에서 저희가 느끼는 보람, 또 우리가 왜 이걸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기독교나 불교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대상이 내 안의 한울님이라는 점에서 좀 다르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음악에서도 그런 게 확연히 드러날 것 같아요. 저희가 평화합창제에 1회 때부터 참가한 것은 아닌데, 2회 때 참가하면서 분위기가 ‘천도교 합창단에서 이런 노래를 하는구나’하고 관심 있게 봐주시는 걸 느꼈어요. 선곡도 가곡을 선택해서 갔지요. 그런데 그다음 해에 다른 종단에서도 대중적인 노래로 자유곡을 선정해서 부르시더군요. <남북 평화 합창제>라는 주제에 맞게 남북 문제를 놓고 그 주제에 맞는 곡을 갖는다는 게 상당히 어렵잖아요. 정치적으로도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고요. 작년에는 우리가 ‘임진강’이라는 북한 가요를 불렀는데, 의미가 깊은 곡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아쉬운 건 다른 종단들은 그러한 것들을 매머드급 합창단을 구성하는데 우리는 한정된 인원이니까 거기에 다른 종단 합창단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인원이니까, 주최 측에 우리가 좀 더 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좀 아쉽지요. 다른 종단에는 청년합창단도 있지 않나요?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분들도 종단 별로 차이가 좀 있겠어요. 다른 종단의 경우는 청년들도 많은 데다가 단일 교회나 교구에서 나오지 않고 연합으로 나오니까 뭐 한 두세 개 교회만 모여도 한 5~60명이 되죠. 불교 같은 경우도 사찰 두 군데면 한 60명 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도 그 규모를 좀 키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합창제 공연을 했던 아람누리 극장이 1200석인데요. 그중 1층만 사용했는데, 한 7~800석 정도 되는 그 공간이 꽉 찰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또 우리 천도교는 일산에 교구가 없고 그러니까 교인분들이 관람하러 오시기도 어려워요. 올해는 11월 4일 날로 예정이 돼 있는데 많은 분들이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공연 장면 올해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올해도 마찬가지예요. 다음 달에 있을 교구 창립 기념일 날 공연을 앞두고 있고, 11월 4일에 있을 평화합창제 준비도 해야 하고 그 외에는 교단에서 기념일 날 요청이 있는 경우에 저희가 준비된 대로 응하는 것들이 예정돼 있고 지방 교구 행사에도 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합창단 단장으로 활동하시기 전에도 교단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학생회 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던 것 같아요. 학생회 때는 중고등부 부장을 맡았었고 청년회에 와서는 본부에서 부회장을 했고요. 1981년도에 서울교구 청년회를 재창립했어요. 그때 초대 부회장을 했고 지금은 환원한 정학현 동덕이 그때 초대 회장을 하고 그다음에 제가 청년회 서울시지부 회장을 했지요. 교단의 역사와 함께해오셨네요. 교회에 처음 나오던 날 기억하세요? 수운회관 낙성기념식이 있던 날이었어요. 그 옛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지요. 4월 5일 날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손을 잡고 나와서 지금까지 교회에 나오고 있으니까 그때부터 친구들은 여기서 만난 교회 친구들이 다 전부예요. 어릴 때 천도교 집안이라는 건 언제 아셨어요? 우리 집보다는 우리 외갓집이 천도교를 더 먼저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는 천도교라기보다도 천도교청우당 쪽에 계시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고, 신앙보다도 청우당 활동을 하시면서 근근이 경전만 혼자서 읽으셨던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외갓집은 적극적으로 천도교를 했던 집안이고요. 북에서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외숙이 우리 어머니의 오빠 되시는 분인데 어머니 살아생전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이 천도교에서 하는 야학 활동을 하셨고, 우리 어머니도 그 삼촌을 통해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그러더군요. 어머니는 천도교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데 천덕송 교훈가 노래를 알더라고. 그리고 당가를 아셨어요. 송가집에 있는 청우당가 ‘울려라 개벽 소리’ 하는 그 노래도 우리 어머니가 아시더라고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외숙이 청우당 쪽에 계시면서 영향을 준 것 같고 우리 외할머니한테도 나중에 물어보니 외숙이 공부도 잘했대요. 삼촌은 6·25 때 반공 쪽으로 가면서 구월산 유격대 쪽에 합류해서 문산 어디쯤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봤다는 얘기가 고향 분들이 전한 마지막 행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확인해 봤는데 더 나오질 않아요. 예전에 국방부에서 유전자 검사를 하고 등록했는데, 아직 못 찾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천도교에서 시일식을 하던 모습은 기억하세요? 생각이 나죠. 1970년쯤일 거야. 아버지하고 기념일에 나오면 그때는 빵을 줬어요. 근데 할아버지들, 아버지들이 빵 받아서는 당신들이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갑니다. 기념일 날은 이북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서로 얼굴 보는 날이었어요. 그러면 빵 받은 걸 다 나한테 준단 말이야. 내가 어린애였으니까. 그러니 빵을 이만큼 받아서 집으로 가면 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빵 가지고 온다고. 그때도 지금처럼 교회가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교인은 더 많았는데 성미가 지금처럼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돌아보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참 따뜻하고 재미있었어요. 중학교 1학년 소년이 처음 아버지하고 같이 여기 왔을 때의 첫 느낌이 혹시 기억나세요? 그때 우리 선배들이 처음 교회에 나온 친구들에게 일일이 주소를 받더라고요. 전화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죠. 그다음 주 토요일 날인가 집으로 엽서가 왔어요. 난생처음으로 내 앞으로 온 엽서예요. 그런 걸 처음 받아본 거야. 교회 학생회 집회를 알리는 통지문이었어요. 선배들이 전부 손으로 써서 보내준 거야. 그날 처음 온 친구들한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거 보고 나오게 된 거야. 중학교 1학년이 뭘 알았겠어요. 주문도 몰랐지요. 그때 나한테 주문을 가르쳐줬던 선배가 안상숙 선배인데, 지금도 가끔 나오세요. 그때는 시일날 아침에 중고등학생들이 청수를 모셨어요. 지금의 서울교구 여성회 실에서요. 그땐 거기가 다다미방이었어요. 10시부터 10시 50분까지 1시간 정도 주문을 한 105회 묵송을 하고, 경전 한 편을 한 사람이 다 읽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읽어 나가요. 그렇게 해서 용담유사 한 편을 읽고 나면 시일식 보러 들어가죠. 처음 나왔는데 주문을 모르잖아. 남들이 하는 거 마음속으로 따라 읽어요. 그렇게 주문을 배운 거죠. 그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선배들이 많았죠. 학생회가 일도 많았고 일을 참 잘했죠. 학생회 예술제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이끌림, 중학교 1학년이면 어리잖아요. 자기에 대한 존중 이런 것도 좀 느끼셨겠어요? 천도교 청년회의 일원으로, 학생회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람들하고 같이 뭔가를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더 컸겠어요. 그랬죠. 그리고 그때는 포크송이 유행했잖아. 천덕송보다도 선배들이 통기타 가지고 포크송 하니까 그 포크송 배우는 게 재밌잖아. 그래서 토요 집회를 하고 나면은 천덕송 부르지만, 집회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통기타를 중심으로 모여요.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 포크송을 불러요. 그땐 사람도 많았고 교회 나오는 게 참 즐거웠어요. 선생님의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마음에 자리 잡은 그 시기는 언제였나요? 자연스럽게 그런 신앙 생활을 해왔어요. 당시에는 예술제가 있었어요. 예술제가 12월 1일 현도 기념일을 즈음에 하는 행사였는데 그때는 중고등학생들이 예술제를 해요. 대학생 선배들이 도와줬지요. 조명이라든가 음향이라든가 선배들이 도와주는데 그 예술제 준비를 무려 3개월 이상을 하거든요. 그 과정 때문에 막이 내려 나간 다음에는 배우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연스럽게 인일 기념일까지는 그냥 교당에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청년회를 만들면서부터는 이제 그냥 학생하고는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이제 좀 들기 시작했다고 그럴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작은 천덕송 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거를 버스에서 잃어버렸어. 그때 우리 아버지가 아주 호되게 혼을 내셨어요. 정신을 어디에 갖다 팔아먹고 다니냐고. 교회 책을 들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런 걸 잃어버릴 수 있느냐고 혼을 내시는데 눈물이 쏙 빠지더라고. 당신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안 하면서 유독 나한테만 그렇게 강조하셨어요. 우리가 사형제인데도 나만 교회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내 동생들은 한 번도 안 데려왔어요. 동생들은 나 따라서 몇 번 나왔는데, 학생 때 잠깐 하다가 안 나오게 되고. 그런데 말로는 다 천도교인이래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1977년도에 내가 공무원 시험을 봤어요. 1978년도부터 공직 생활을 하다가 2개월 보름 만에 방위 근무를 소집 받아서 18개월을 복무하고 1979년도에 이제 다시 복직하고서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1981년도에 다시 서울로 왔어요. 그때 서울교구 청년회를 만들면서 청년회 활동을 하고 청년회장을 맡고 나니까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아이들도 낳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주말이면 교회 생활을 하니 자연스럽게 학교 동기 동창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제 유일한 친구들이 직장생활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되었고 한 40년 유지되고 있습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만난 김인환 삼경합창단장 모습 교회 나오시면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마음이 편안해요. 어려서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날에 교회에 가면 빵도 나눠주고 그러잖아요. 얻어먹을 때는 좋은데 뭔가 마음이 공허하다고 할까, 사찰에 가도 그랬어요. 천도교는 첫인상이, 선배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각인돼서 그런지 몰라도 푸근해요. 또 가족 같은 분위기였어요. 청년회 때부터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우리 교당은 다른 교회나 절에 가면 있는 예수, 십자가, 부처와 같은 상이 없잖아요. 우리에겐 궁을기 하나밖에 없잖아요. 신앙의 대상도 다른 종교와 차이가 좀 있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 거기서 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한울님이 마음속에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학생회 활동하시면서 마음에 품었던 신앙심이 평생을 이어져 왔다는 말씀이시군요. 우리 학생회 때 어떤 선생님께서 궁을장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한울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하나.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그것이 하얀 바탕의 색이 한울님 마음이고 빨간 색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구도화시킨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옛날에는 대교당에 장식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그런 자료들이 사진조차도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좀 아쉬워요. 삶에서 천도교를 한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사람은 매일매일 잠을 자잖아요. 그냥 단순히 잠을 자는 것과 뭔가를 정리하고 잠을 자는 것은 새로 만난 아침이 다르잖아요. 그렇듯이 천도교 신앙을 하는 것은 일신우일신, 저는 그 뜻이 있다고 봐요. 뭔가 달라져야 해요. 어제처럼 생각하고 어제처럼 행동하고 어제처럼 움직이면서 뭔가 새로움을 기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나를 중심 잡게 해준 것은 경전의 말씀이에요. 해월신사님의 법설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천이 힘듭니다. 믿습니까? 이거는 쉬워요. 그런데 그 믿음을 무엇으로 입증합니까? 뭔가 행동이 있어야 하잖아요. 해월 신사님 법설에 언고행 행고언(言顧行 行顧言)'이라고 하잖아요. 말을 할 때 행할 것을 돌아보라고. 말을 하기에 앞서 내가 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돌아보고 말을 해야 해요. 또 내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해요. 지금 천도교 청년회나 대학생단 후배들 보고 계시면 어떠세요?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실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그런 당부를 할 수 있는 위치인지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열정으로 그리고 나를 닦는 마음으로 순일한 마음으로 활동하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은 우리 아들에게도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러면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리는 바가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요. 오늘은 처음부터 합창단 이야기를 시작으로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합창단 단원들에게 단장님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단장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심부름꾼이지, 좋은 리더가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려운 형편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합창단을 만들어 온 조각 조각들이 참 소중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조각들이 하나라도 없거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역할을 못 한다거나 그 조각이 없어진다면은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때문에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자세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밀알이 된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서로서로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게 진짜 따뜻한 동덕애를 느낄 수 있는 그런 합창단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만난 김인환 삼경합창단장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가 된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교단을 지켜왔듯 합창단 단원들의 화음이 아름다운 선율로 흘러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한울님, 감응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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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식 도훈, 우이동 봉황각 내실 보수공사 성금 기부… 따뜻한 나눔 실천천도교중앙대교당 앞 최창식 도훈 모습 3·1운동 당시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던 연성수련을 봉행하였던 곳, 의암 성사의 정신이 깊게 서려있는 곳,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한 봉황각 내실이 다시금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었다. 이는 교단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나눔을 실천한 최창식 도훈의 따뜻한 손길 덕분이다. 최창식 도훈은 최근 봉황각 내실 건물의 보수공사를 위해 성금을 기부하며 문화유산 보호와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 봉황각은 오랜 세월 동안 교인들의 정신수련의 장으로 상징되어 온 장소이지만, 시설이 낡아 보수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최 도훈은 건물 보수를 위한 지원을 결정하며 “ 성사님의 정신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후세에도 전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우이동 봉황각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이 지역은 예로부터 경치가 빼어나 선비들과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천도교에서는 의암 성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나라의 미래를 고민했던 의미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았던 곳으로,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 따뜻한 나눔, 지역사회에 감동 선사 지역 주민들은 그의 기부 소식에 감사를 표하며, “최창식 도훈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봉황각이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교인들은 “귀한 뜻이 담긴 기부에 깊이 감사드리며, 공사를 통해 더욱 많은 시민들이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최창식 도훈은 평소에도 교단을 위한 나눔과 봉사 활동을 꾸준히 실천해오며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따뜻한 선행이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전해주길 기대해 본다. 우이동 봉황각 내실 지붕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 우이동 봉황각 내실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 우이동 봉황각 내실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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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영상콘텐츠 : 춘천교구 편(2)동학·천도교의 역사와 교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의 결과물이 나왔다.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춘천교구 교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동영상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번 사업은 천도교의 교인들을 통해 민족종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며 보존하는 의미있는 사업으로 그 첫 번째 발걸음을 춘천교구에서 시작했다. 춘천교구는 114년의 역사를 가진 천도교의 주요 교구 중 하나이다. 이번 동영상 콘텐츠를 통하여 천도교를 알지 못했던 대중들에게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번에 제작된 총9편의 영상 콘텐츠는 향후 연구 및 문화 콘텐츠 창작을 위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편집자 주- 명승철 선도사, 천도교 신앙과 함께 걸어온 길 이번 콘텐츠는 춘천교구 명승철 선도사의 인터뷰로 천도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성장한 이야기,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영부의 치유 경험을 통해 신앙의 힘을 체감했음을 알 수 있다. 명승철 선도사는 청소년 시절 천도교 청소년 수련에 참여하며 신앙에 눈을 떴고, 이후 화악산 수도원에서의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군 제대 후 종학대학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천도교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혔다. 이후 춘천교구 순회 강사로 활동하며 교회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화악산 수도원 설립 과정과 장모님, 장인어른과의 특별한 인연을 통해 수도원 건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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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영상콘텐츠 : 춘천교구 편(1)동학·천도교의 역사와 교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의 결과물이 나왔다.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춘천교구 교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동영상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번 사업은 천도교의 교인들을 통해 민족종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며 보존하는 의미있는 사업으로 그 첫 번째 발걸음을 춘천교구에서 시작했다. 춘천교구는 114년의 역사를 가진 천도교의 주요 교구 중 하나이다. 이번 동영상 콘텐츠를 통하여 천도교를 알지 못했던 대중들에게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번에 제작된 총9편의 영상 콘텐츠는 향후 연구 및 문화 콘텐츠 창작을 위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편집자 주- 명승철 선도사, 천도교 신앙과 함께 걸어온 길 이번 콘텐츠는 춘천교구 명승철 선도사의 인터뷰로 천도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성장한 이야기,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영부의 치유 경험을 통해 신앙의 힘을 체감했음을 알 수 있다. 명승철 선도사는 청소년 시절 천도교 청소년 수련에 참여하며 신앙에 눈을 떴고, 이후 화악산 수도원에서의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군 제대 후 종학대학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천도교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혔다. 이후 춘천교구 순회 강사로 활동하며 교회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화악산 수도원 설립 과정과 장모님, 장인어른과의 특별한 인연을 통해 수도원 건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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