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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포 3개 교구 합동 시일 및 선열 위령식, 아산교구 공원묘역에서 봉행통일포 소속 마포교구, 아산교구, 의정부교구는 포덕 166년 5월 11일(양력 2025년 5월 11일), 아산교구 공원묘역에서 합동시일과 선열 어르신들을 기리는 위령식을 함께 봉행하였다. 이번 합동 시일은 세 교구가 뜻을 모아 교구 간 유대를 다지고, 선열들의 은덕을 기리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시일식에 앞서 참석자들은 고(故) 혁암 조기주 종법사님의 묘소와 3.1운동 순국선열이자 국가유공자인 故 서봉국 선생의 묘소, 그리고 아산교구 선열님들의 묘소를 참례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천도교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겼다. 아산교구는 이날 참석한 동덕들을 위해 공원에서 정성껏 점심을 준비해 따뜻한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아산교구 공원묘역은 1세대 어르신들께서 직접 산을 매입해 묘지를 조성한 후, 3대에 걸쳐 꾸준히 정비와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이날 참석한 동덕들은 “이처럼 선열의 뜻을 이어 묘역을 가꾸어 가는 아산교구는 천사님의 은덕을 듬뿍 받은, 참으로 행복한 교구”라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행사는 교구 간의 화합은 물론, 천도교 신앙의 뿌리와 선열의 정신을 계승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으며, 참석자들 모두가 새로운 다짐과 함께 돌아가는 감동의 자리가 되었다. 사진 및 자료제공 천도교마포교구 -
천도교와 3·1운동(4) 성사께서 수련생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는 가도화순에 있는 것이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3회 수련생 중에서 순창에서 참가한 지동섭 교구장과 성사님 사이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 문 : 대신사님께서 다시 출세하신다 하니 사실입니까? 답 : 성령으로 출세하실는지 육신으로 출세하실는지는 말할 수 없으나 다시 출세하실 것만은 분명하니라. 문 : 그러면 누구나 뵈올 수 있습니까? 답 : 정성이 지극하면 뵈올 수 있느니라. 문 : 그때가 언제쯤 되겠습니까? 답 : 이번 49일 기도를 마치는 날쯤이면 출세하실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육신으로 다시 출세하는 것은 천하에 없는 일이니 육신출신이야 바랄 수 있겠느냐마는 설사 육신으로 출세할지라도 그대의 수련이 부족하면 대신사를 뵈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대신사의 출세 여부는 그대들의 수련 독실여부에 있는 것이니라. 제4회 49일 특별수련 기간 : 1913년 4월 6일~ 5월 24일 포덕 54년(1913) 4월 6일 성사 지방두목 49인을 선발하여 봉황각에서 제4회 특별연성을 49일간 실시하였다. 전국 37개 교구에서 대교구장 5명, 교구장 33명, 연원주 2명, 총부임원 5명, 교구임원 4명 등이 참가하였다. 수련생 명단 姜興龍, 全基善, 金命俊, 金福倫, 金泗振, 金成立, 金龍煥, 金義泰, 金重華, 金昌錫, 金處吉, 金處聲, 金春軾, 金顯龜, 羅元經, 羅宗善, 文吉鉉, 文哲模, 朴旺植, 朴瀅錫, 白洛龍, 邊應燦, 宋斗玉, 申相熙, 辛精集, 申泰天, 安國鎭, 安命錫, 嚴鍾晟, 吳基弘, 李圭植, 李大源, 李星九, 李龍吉, 李寅祥, 李楚玉, 林復彦, 全鍾浩, 鄭桂瑾, 鄭履河, 鄭泰僑, 鄭惠南, 羅珽翼, 趙鍾鳳, 車聖翁, 韓祥翊, 韓承祿, 黃河湜. * 1명 확인미상 이때 성사께서 수련생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는 가도화순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사께서 역설하신 것이니 수도의 극치는 부화부순이다. 천하 대사는 다를지언정 가정에서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아무리 성인이라도 죽기 전에는 그 인격과 명예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요 큰 성인은 큰일을 당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인간생활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니 첫째는 사상생활이요, 둘째는 학문생활이요, 셋째는 노동생활이다. 그 중에서 사상생활 하는 사람은 능히 학문생활 하는 사람과 노동생활 하는 사람을 부릴 수 있으나 노동 생활하는 사람은 학문생활 하는 사람과 사상 생활하는 사람을 부릴 수 없는 것이다. 난세에는 이것이 바뀌기 때문에 민생이 도탄에 드는 것이니라” 하셨다. 제 5회 49일 특별수련 수련기간 : 1913년 10월 1일~11월 18일 포덕 54년(1913) 10월 1일 지방두목 105명을 선발하여 제5회 특별연성을 봉황각에서 49일간 실시하였다. 5회 특별수련은 전국 59개 교구에서 대교구장 6명 교구장 53명, 연원주 26명, 교구임원 11명, 총부임원 7명, 기타 2명이 참가하였다. 수련생 명단 姜文雍, 權衡重, 奇 順, 金庚咸, 金光翰, 金基洪, 金吉鵬, 金洛疇, 金斗華, 金斗煥, 金得運, 金得弼, 金明厚, 金命熙, 金炳烈, 金秉俊, 金炳燻, 金奉涉, 金鳳華, 金相鼎, 金泳夏, 金應祿, 金正淡, 金鼎參, 金定鎰, 金鍾黃, 金中祿, 金志濂, 金鎭璇, 金昌德, 金昌道, 金澤瑞, 金學周, 金孝珍, 朴基伯, 朴魯輝, 朴三元, 朴昇敏, 朴昇鄴, 朴容順, 朴仁坤, 朴宗勳, 朴燦洙, 方鎭垣, 裵世昌, 裵龍國, 裵元鶴, 白性淵, 徐相河, 孫應奎, 宋奉元, 申明熙, 安 鍾, 安鳳河, 安承煥, 安永錫, 吳俊泳, 柳炳順, 柳義烈, 柳志觀, 尹基浩,尹泰弘, 尹和守, 李 英, 李達海, 李大秀, 李德善, 李炳基, 李壽榮, 李昇泰, 李洙馹, 李昇夏, 李有祥, 李義達, 李春浩, 李興龍, 林根泰, 朴尙烈, 林承泰, 林寅煥, 張世華, 張信德, 張雲龍, 全奎河, 金時弘, 鄭相悅, 鄭容鎭, 趙東龍, 朱昌鍵, 崔炳勳, 崔承周, 崔安國, 崔致淳, 崔學承, 韓炳順, 韓錫敏, 韓榮泰, 韓五俊, 韓龍浩, 韓仁璜, 韓致雲, 許炳周, 洪命植, 洪淳杰, 黃己㭦 성사께서는 5회 수련에서도 이신환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누누이 이신환성에 대하여 말하였거니와 성령은 불생불멸하므로 기수(氣數)가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거니 진실로 오는 화를 면하고자 하면 성령과 육신을 바꾸어 믿는 데 있느니라. 성령과 육신을 바꾸어 믿는 방법은 육신관념을 끊어야 하나 육신관념을 끊으려면 더욱 어려운 것이니 육신관념을 끊으려고만 생각지 말고 일거일동에 누가 능이 나로 하여금 말을 하고 생각을 하고 움직이게 하는가 하고 이것을 오늘도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면서 적극적인 공부를 계속하면 자연히 성령이 주체가 되고 육신이 객체가 되어 위로는 대신사와 같이 대각이 될 것이요 아래로는 가히 육신의 화를 면할 것이니라.” “또한 오늘의 일은 국가의 일이거나 교회의 일이거나 오늘에 있는 우리들이 해야 될 것이 아닌가. 사람은 큰일을 하려면 먼저 종교적 수련이 있어야 하나니 종교적 수련이 없으면 한울님의 감응을 받기 어려운 것이다. 한울님의 감응을 받으면 만리만사가 무위이화로 되는 것이요 한울님의 감응을 받지 못하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또 오관에 대하여 말씀 하시기를, “오관 중 주문, 청수, 시일, 기도는 정신적 헌성이요 성미는 물질적 헌성이기 때문에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라도 각자 먹는 그대로 매끼 때마다 거짓 없이 떠서 소속교구에 바쳐야 한다. 혹 대가없는 것이라거나 풋곡식이나 초근목피를 받는 것이 여름철에 혹 썩을 경우에는 교구나 전교실에서 심고 드리고 수량만 기입하고 정결한 곳에 묻어도 좋다. 세상 사람들은 대가없는 물건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한울님에 드리는 정성은 같은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손을 부지런히 놀려야 하지만 성미 뜨는 손은 부지런히 놀려서는 안 된다. 성미 뜨는 주부는 꼭 가족 수대로 한술씩 뜨고 반드시 심고 드리고 또 뜨고 또 심고를 정성으로 드려야 한다. 특히 시일기도는 특별헌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청수와 같이 정미 오홉을 모시는 것인데 기도하는 정성은 소·양 천 마리보다 깨끗한 쌀 한홉이 더 나은 것이니라. 그리고 한울님께 심고하는데도 거짓이 있을 수 없으니 정심과 진심으로 고해야 감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미로 본존하였던 쌀은 한울님께 정성드린 쌀이니 꼭꼭 모아두었다가 귀중하게 사용하든지 부득이 팔게 될지라도 도인에게 팔아야 한다. 그 이유는 혹 부정하게 사용할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기도미 제도를 실시하기는 포덕 52년이었지만 54년에 와서야 오관제도가 완성되었으니 나로서 가르칠 것은 이제는 다 가르쳤다. 수인사대천명이라 하였으니 내가 할 인사는 다하고 이제는 그대들이 수인사를 해야 될 것이다. 이후에 만일 기심기천(欺心欺天)하는 교인이 있다면 한울님이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포덕 54년 전에 교인에게 허물이 있다면 그 책임을 전부 나에게 있으나 이제부터는 그 책임이 전부 그대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논학문』에 ‘천지무궁지수(天地無窮之數)와 도지무극지리(道之無極之理)가 게재차서(皆載此書)라 하였거니와 천지무궁수(天地無窮數)를 알려거든 이신환성을 해야 하고 도지무극지리(道之無極之理)를 알려거든 오관실행을 잘 해야 한다.” 제 6회 49일 특별 수련 수련기간 : 1913년 12월 18일~1914년 2월 7일 포덕 54년(1913) 12월 18일 성사께서 지방 두목 105인을 선발하여 제6차 특별연성을 봉황각에서 49일간 실시하였다. 전국 65개 교구에서 대교구장 4명, 교구장 43명, 연원주 30명, 교구임원이 17명, 총부임원 10명, 기타 1명이 참가하였다. 수련생 명단 賈榮魯, 姜極三, 姜丙守, 姜大設, 姜載元, 桂龍彩, 高炳傑, 高龍模, 公禮洙, 具德喜, 具尙周, 權宗國, 金再鎬, 金現龍, 金基秋, 金斗學, 金明鎭, 金文弘, 李秉俊, 金鳳周, 金相設, 金相重, 金演樞, 金永萬, 金永生, 金榮遠, 金應斗, 金應河, 金麟鍾, 金一疇, 金眞善, 金鎭衡, 金致明, 金致松, 金鶴天, 金和日, 魯弘俊, 獨孤煊, 羅柏春, 羅義涉, 明鳳周, 閔泳一, 閔元植, 閔致煥, 朴明斗, 朴禮一, 朴昌烈, 朴弼周, 朴興株, 方振球, 白文選, 白善澤, 白龍承, 白龍繪, 白仁玉, 徐圓朝, 宋繼祚, 宋應株, 申明天, 安斗彪, 梁元魯, 梁元燮, 梁華國, 吳勉秀, 元容乾, 劉信恒, 尹承模, 尹基彦, 尹鶴律, 李啓述, 李德有, 李敏道, 李鳳軫, 李秀屹, 李養培,. 李有楨, 李應華, 李載景, 李載恩, 李正模, 李貞信, 李鎭海, 李學榮, 任東準, 張錫恒, 鄭龍河, 鄭昌國, 鄭學龍, 車洛俊, 崔丹鳳, 崔鳳天, 崔碩燦, 崔承翊, 崔信株, 崔龍基, 崔宗駿, 韓基元, 韓錫均, 韓仁赫, 許奉河, 玄祉誠, 洪 淳, 吳碩恒, 洪淳儀, 黃在國 이때의 법설은 이신환성을 재강조 하였고 아울러 식생활 개선을 역설하시면서 식사할 때 도반기(都飯器)를 사용하여 먹던 음식을 두었다가 먹는 습관을 버리게 하셨다. 제 7회 49일 특별수련 수련기간 : 1914년 4월 16일 ~ 6월 3일 포덕 55년(1914) 4월 16일에 성사께서 지방 두목 105인을 선발하여 봉황각에서 7회 49일특별연성을 실시하였다. 이번 수련에도 전국 58개 교구에서 대교구장 4명, 교구장 33명, 연원주 32명, 교구임원 19명, 총부임원 10명, 기타 7명이 참가하였다. 수련자 명단 姜善汝, 姜極三, 姜元弼, 桂英宣, 高處雲, 孔達斌, 弓尙元, 權思仁, 金光洙, 金德華, 金道俊, 金道鉉, 金孟欽, 金文彦, 金炳建. 金炳麟. 金炳勳, 金鳳德, 金鳳模, 金仕傑, 金泳珣. 金泳柱, 金容文, 金龍雲, 金允河, 金應洙, 金載珍, 金周煥, 金鍾元, 金昌植, 金昶植, 金忠侃, 金致官, 金致郁, 金學斗, 金瀅模, 金興烈, 羅炯泰, 文成實, 文七運, 朴 英, 朴炳協, 朴鳳儀, 朴龍熙, 朴正侃, 朴燦洙, 白龍燮, 邊貞薰, 徐仁和, 孫東七, 申東錫, 申碩浩, 申龍柱, 申仁敬, 安 鎌, 安初炫, 嚴正柱, 吳琯翊, 吳允景, 吳俊得, 吳昌燮, 元明濬, 劉公樂, 柳遠台, 劉宗烈, 劉昌源, 劉化仁, 尹大植, 尹秉贊, 尹雲靑, 尹興華, 李寬述, 李德源, 李東洙, 李秉健, 李炳雲, 李鳳震, 李三甲, 李成敎, 李用甲, 李貞燧, 李禎華, 李鍾現, 李昌俊, 李昌煥, 李泰仁, 李鶴年, 李紈胃, 張啓俊, 張壽憲, 鄭養魯, 趙京淳, 趙德龍, 崔信乙, 崔榮植, 崔宗涉, 崔宗河, 崔宗禧, 崔周洪, 崔贊九, 崔弘善, 卓千鳳, 韓應澤, 許 鍍, 許俊敬, 이상과 같이 포덕 53년(1912) 4월 14일부터 포덕 55년(1914) 3월 25일까지 3년 동안 7차에 걸쳐 전국에 대교구장, 교구장, 연원주 등 중요 교역자를 차례로 49일 독공수련을 실시하였는데 후일 우리 천도교가 기미 3.1운동과 민족독립을 위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봉황각 연성수련이 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교구임원 : 포덕사, 금융원, 순회교사, 공선원, 전교사, 의정원, 의사원 전제원, 강도원, 당 상무 연원관계 : 접주, 수접주, 대접주, 부령, 봉훈, 교훈, 도훈 총부임원 : 도사, 종리사, 종법사, 경도사 무교직 : 교직을 알 수 없거나 평교인 제1회 연성자 21인 포덕53.4.15 - 49일간 (참고서적 정리 요) 1 구창근(具昌根)전주 명암(溟菴) 대교구장 약사, 55,8 2 김병태(金炳泰)강진 농암(農菴 도사,대교구장 창건록 3 라인협 (羅仁恊) 성천 홍암(泓菴) 대접주,대교구장 창건록 40 4 박문화(朴文華)진천본암 교구장 약사, 55,7 5 박용태(朴瑢台)서산涇菴 대교구장 약사 47.12 6 박준승(朴準承)장성沘菴 대교구장 약사 55.7 7 오영창(吳榮昌) 서흥장암 대교구장 약사 47.12 8 이병춘(李炳春)전주풍암 교구장 창건록 583 9 이승우(李承祐) 횡성승암 대교구장, 포덕사 창건록 233 10 이정석(李鼎錫곡산柏菴 교구장 약사 55.7 11 이정점(李貞漸)태천楠菴 대접주 창건록527 12 이종석(李鍾奭)수원동암 대교구장 약사 47.12 13 이채일(李采一)영천휘암 교구장 창건록497 14 임예환(林禮煥)중화淵菴 교령, 교구장 창건록577 15 전희순(全熙淳)진주구암 대교구장 창건록487 16 정계완(鄭桂玩)경성성암 대교구장 약사 47.12 17 최주억(崔周億)상원樂菴 교구장 약사 55.7 18 한태훈(韓泰勳)선천포암 도훈 약사48.1 19 한현태(韓賢泰)선천柱菴 의정원 약사48.1 20 홍기억(洪基億) 용강壽菴 대교구장 창건록381 21 홍기조(洪基兆)용강游庵 대교구장 창건록381 제2회 연성자 49인 포덕 53년 8월 15일 - 10월 2일 1 강봉수(姜琫秀)장흥泰菴교구장 약사 55.7.1 2 길학성(吉學晟)영변得菴대교구장 약사 62.7 3 김명선(金明善)영변敬菴대교구장 창건록 118 4 김병주(金炳柱)평강植菴대교구장 창건록 131 5 김봉년(金奉年)전주權菴대교구장 약사 55.7.1 6 김수옥(金洙玉)평양佛菴대교구장 창건록 455 7 김승주(金承周안악根菴대교구장 약사 55.7 8 김안실(金案實)안주楹菴대교구장 약사 55.7 9 김연구(金煉九)태인徑菴교구장 약사 55.7.1 10 김영언(金泳彦)중화枰菴대교구장 약사 55.7.1 11 김종범(金宗範)벽동一菴교구장 창건록 514 12 김진팔(金鎭八)정주材菴대교구장,대접주 창건록 301 13 박낙양(朴洛陽)광주益菴대교구장 약사 47.12.6 14 박인각(朴麟珏)후창접주 창건록 52 15 박화생(朴花生)임실沁菴교구장.경도사 약사 62.12.12 16 방기창(方基昌)맹산老菴교구장 창건록 323 17 방찬두(方粲斗)송화汕菴대교구장 약사 47.12.6 18 백영노(白永魯)철원厚菴교구장, 교훈 약사 55.7.1 19 신광우(申光雨)성주凌菴대교구장 약사 55.7.1 21 오명운(吳明運)의주重菴교구장 창건록 34 22 우세하(禹世夏)용천근암교구장 약사 63.10 23 유계선(劉啓善)평양길암포덕사.의사원 약사 65.12 24 윤병설(尹炳卨)초산 교구장 25 이군오(李君五)선천 睦菴 대교구장 약사55.7 26 이기완(李岐琓)함흥梧菴교구장 약사 55.8 27 이돈하(李燉夏)성천楟菴대교구장 창건록 407 28 이동구(李東求)횡성 의정원 약사62.7 29 이상우(李祥宇)은진湖菴대교구장 약사 47.12.6 30 이용의(李龍儀)당진 교구장 약사 52.1 31 이유년(李有年)북청삼암대교구장 약사 47.12.6 32 이정화(李晶和)평양起菴수접주 창건록 463 33 이종수(李種秀)구성桄菴대교구장 창건록 243 34 임래규(林來圭)태인洞菴대교구장 약사 47.12.6 35 임영수(林永秀)용천格菴대접주 창건록 75 36 장남선(張南善)익산溱菴대교구장 약사 55.7. 37 장승관(張承官)안동현校菴교구장 창건록 77 38 정도영(鄭道永)수원枃菴대교구장 약사 55.8 39 정승덕(鄭承德)강서侃菴대교구장 창건록 396 40 정용근(鄭瑢根)익산梁菴대접주 창건록 583 41 주덕인(周德仁)가산존암교구장 월보8-73-40 42 진종구(陳鍾九)용인雄菴교구장 창건록 473 44 최석련(崔碩連)의주順菴도사 창건록 40 45 최영곤(崔永坤)철산桓菴교구장 창건록 65 46 한관진(韓寬珍)강동樹菴대교구장 약사 55.7 47 한세교(韓世敎)수원謙菴교구장 약사 55.7 48 홍봉소(洪鳳巢)곽산주암도훈 월보1-7-52 49 황학도(黃學道)평양대교구장 약사.55.7 이하생략.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근대 시기 천도교와 3.1혁명-근대를 관통한 천도교의 ‘독립정신’(2)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지난 호에 이어) 2) 동학농민혁명이 표방한 근대적 평등사상 1864년 최제우가 처형된 후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되었다.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은 최시형에 의해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더욱 진보하였고, 교세는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더욱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사인여천은 말 그대로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고 존중하라는 의미로 시천주 사상보다 더욱 구체적, 적극적으로 인간의 평등을 강조한 사상이다. 종교적 성격이 강한 동학의 평등관이 보다 근대적이고 세속적 의미의 평등관으로 진보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사인여천의 평등관을 공유한 동학교도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었다. 동학사상의 근대적 성격은 전주화약에서 제기되었던 ‘폐정개혁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군이 천명한 폐정개혁안의 조목들이다. 1. 전운소(轉運所)를 폐지할 것 2. 국결(國結)을 하지 말 것 3. 보부상들의 작폐를 금할 것 4. 도내 환전은 옛 감사가 거두어갔으니 다시 징수하지 말 것 5. 대동미 상납 전에 각 포구 잠상의 미곡무역을 금할 것 6. 동포전은 각 집마다 봄, 가을 2냥씩으로 정할 것 7. 탐관오리들을 파면, 축출할 것 8. 임금을 둘러싸고 관직을 팔아 국권을 조롱하는 자들을 모두 내쫓을 것 9. 관장이 된 자는 해당 경내에 입장(入葬)할 수 없으며, .또한 논을 거래하지 말 것 10. 전세는 전례에 따를 것 11. 연호(烟戶)의 잡역을 줄일 것 12. 포구의 어염세를 혁파할 것 13. 보세(洑稅)와 관답(官畓)은 시행하지 말 것 14. 각 고을에 원이 내려와 백성의 산지에 늑표(勒標)하고 윤장(倫葬)하지 말 것 15. 균전어사를 혁파할 것 16. 각 읍 시정 물건들에 대한 분전수세(分錢收稅)와 도가명색(都賈名色)을 모두 혁파할 것 17. 백지 징세와 사전 진결을 거두지 말 것 18. 대원군을 국정에 간여토록 하여 민심이 바라는 대로 할 것 19. 진결(賑結 )을 혁파할 것 20. 전보국이 민간에 대한 피해가 크니 혁파할 것 21. 각 읍 관아에서 필요한 물건은 시가대로 사서 쓸 것 22. 각 읍 아전을 임명할 때 돈을 받고 하지 말고 쓸만한 사람을 택하여 쓸 것 23. 각 읍 이속들이 천금을 축냈으면 그 자만 처형하고 친족에게 징수하지 말 것 24. 묵은 사채를 관장을 끼고 억지로 거두는 일을 금할 것 25. 동학교도를 무고히 살육하지 말며 동학과 관련하여 가둔 이를 모두 신원할 것 26. 京營邸吏料米는 과거의 예에 따라 삭감할 것 27. 포구에서 장사하는 각국 상인들의 동성 시장 출입을 금하고 아무 곳에서나 마음대로 행상하지 못하게 할 것 (1-14조는 「전봉준판결선고서원본」(『동학관련 판결문집』,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1994), 15-27조는 정창열의 「갑오농민전쟁 연구」(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1, 170-171쪽) 참조. 25-27조는 정창열이 다른 폐정개혁안들을 분석하여 추가한 것임. ) 이들 조항은 세제나 탐관오리의 횡포에 대한 개혁을 주된 내용으로 하며, 심지어 국정의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조항에는 보국안민, 축멸양왜 등 농민군이 봉기하면서 내세운 핵심 가치가 온전히 반영되지 않았다. 주로 ‘안민’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확인될 뿐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봉기하였던 2차 봉기의 성격 및 구호가 반영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조항은 정부군과 교전하여 전주화약을 맺을 당시 농민군 지도부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차 봉기 시에는 갑오개혁의 영향과 반일, 반외세에 대한 내용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어야만 한다.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였으므로 이들 폐정개혁안은 농민군의 봉기과정을 따라 점차 완성적인 모양을 갖추어 갔을 것이다. 2차 봉기를 앞둔 상황, 즉 갑오개혁의 영향을 받고, 일제의 침략에 분노하던 시기 동학 집강소의 ‘폐정개혁안’에는 당연히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나 근대적 개혁의 요소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 내용으로 볼 때 오지영의 『동학사』 (오지영, 『동학사』, 민학사, 1975.)에서 기록된 폐정개혁안 12개조는 반외세와 갑오개혁의 내용이 대폭 반영되어 있으므로 2차 봉기 당시 개정된 폐정개혁안일 가능성이 있다. 이 폐정개혁안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인물이 직접 기록한 것이므로 충분히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조항에는 2차 봉기에서 목적으로 천명한 척왜에 대한 태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고, 갑오개혁의 영향을 받은 듯한 신분 개혁 등의 조항도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동학사』의 폐정개혁안 12개조의 내용이다. 1. 도인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배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칠반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은 벗어 버릴 것 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와 간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등이다. (이 12개 조의 폐정개혁안은 오지영이 『동학사』에서 가공적으로 만들어 내 신뢰할 수 없다는 일부 주장이 있으나, 대체로 폐정개혁안 자체는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12개 조는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된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가 집약,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영섭(「『(역사소설) 동학사』의 12개조 폐정개혁안 문제」, 『시대정신』 68, 2015, 136-147쪽), 박종근(「갑오농민전쟁(동학란)에 있어서의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 『역사논평』 1962년 4월호(일본)), 한우근(「동학군의 폐정개혁안검토」(『역사학보』 23, 역사학히, 1964, 55-69쪽) 등이 사료성을 부정하는 연구를 발표하였지만, 12개 조항에는 보국안민, 반외세라는 이들의 봉기 목적에 그대로 부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려가 충분하게 반영되지 못하였다.) 앞서 살펴본 27개조 보다 상당히 정돈이 되었고, 일제에 대한 태도와 갑오개혁의 내용이 일부 반영된 점으로 보아 여러 폐정개혁안 중에서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평등을 일관되게 표방하였던 동학의 핵심사상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이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들 폐정개혁안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혁명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이 목표로 하는 사회가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혁파하고 모든 인간의 평등을 구현하는 근대적 가치의 사회였음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동학혁명은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건의 하나로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과 평등관이 근대적 형식을 갖추고 근대성을 확보하는 결적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의 전통사상 속에는 이미 근대의 핵심 가치인 평등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였고, 수운 최제우는 전통사상 속에서 이러한 평등의 가치를 추출하여 주창함으로써 한국이 가야 할 근대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동학의 평등사상이 전국의 민중들에게 급속하게 전파되는 통로가 되었고, 이러한 평등사상의 전파는 유교적 봉건사회의 낡은 신분질서를 급속하게 해체하고 근대민족으로서 한민족의 출현을 촉진하는 교량 혹은 징검다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한국사회의 근대적 성격은 더욱 심화되었고, 동학혁명이 제시한 근대적 개혁의ㅣ 의제는 이후의 2, 3차 갑오개혁이나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에 반영되면서 한국적 근대를 전망하고, 견인하는 핵심 기준과 요소들로 작용하였다. (계속) 글, 장우순(성균관대학교) -
동학단체들, 남해 마늘밭으로 농활간다‘천지부모 생명살림’의 정신으로 도시와 농촌이 함께하는 뜻깊은 농촌봉사활동이 경남 남해에서 펼쳐진다. 오는 5월 24일부터 25일까지 1박 2일간, '남해농활’이 남해군 일대에서 진행된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이하는 이번 행사는 남해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동학실천시민행동, 동학농민혁명부산기념사업회가 주최 · 주관하며 전국 각지에서 모인 교인 및 일반인 자원봉사자, 남해군민 등이 함께 참여할 예정이다. 참가자들은 1일차 오후부터 2일차 오전까지, 남해 특산물인 마늘 수확을 위한 ‘마늘 뽑기’와 ‘마늘대 자르기’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고령화와 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농촌 일손을 돕는 동시에, 도시와 농촌 간의 건강한 생산과 소비의 연대를 실현하는 자리다. 이번 농활의 참가자들에게는 남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펜션에서의 숙박, 싱싱한 남해 산해진미 식사, 그리고 남해 마늘 1kg이 제공될 예정이다. 준비물로는 편안한 복장, 개인 물, 모자, 수건 등이 권장된다. 남해농활은 매년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도농 상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대표적인 농촌봉사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해마다 남해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동학실천시민행동, 동학농민혁명부산기념사업회 등이 함께 꾸준히 참여해오고 있다. 행사 관계자는 “바쁜 도시의 삶 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사람, 노동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며 “연대의 손길이 농촌에도 큰 힘이 된다”고 밝혔다. 참가신청 문의 : 010-2460-7996 사진 및 자료제공 : 동학농민혁명부산기념사업회 -
청주교구, 의암성사 순국 103주기 및 청주 · 청원 선열 합동위령식 봉행청주교구는 지난 5월 19일 의암성사 순국일을 맞아 ‘의암성사 순도 103주기 및 청주 · 청원 선열 합동위령식’을 봉행하였다. 이번 위령식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뜻깊은 자리로 마련되었다. 위령식은 청원교구 서지원 동덕이 집례를 맡아 봉행하였으며, 경전봉독은 청주교구 박성용 동덕이 하였다. 이어진 위령문 낭독은 청원교구 서민종 동덕이 하여, 순국선열들의 생애와 뜻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참석자들은 차례로 분향하며 숭고한 넋에 경의를 표했다. 위령식을 마친 후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점심식사가 이루어졌으며, 이어 교인들이 가져온 과일과 음료를 나누며 도담을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의암성사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며, 오늘의 우리가 실천해야 할 도리와 사명을 함께 되짚었다. 참석한 교인들은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새기고, 그 뜻을 잇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자리였다”고 소회를 밝혔다. 청주교구는 앞으로도 이와 같은 행사를 통해 선열들의 유산을 기리고, 공동체의 신앙과 실천을 더욱 굳건히 해나갈 계획이다. 자료 및 사진 제공 : 천도교청주교구 -
의암 손병희 성사 기념관, 천도교 · 독립정신 계승의 성지로 거듭나야동학을 계승하여 천도교로 개칭하고 3·1운동을 총괄·기획한 민족의 스승 의암 손병희 성사를 기리는 기념관의 현대화와 확장 건립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시설 확장을 넘어, 성사의 사상과 천도교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지역의 역사 정체성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지난 19일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는 충북 청주시 도시재생허브센터에서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관 건립방안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성사의 순국 103주년을 맞아 유허지 참례와 함께, 현 기념관의 문제점과 새로운 기념관 조성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로 마련되었다. 의암 손병희 성사는 1861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통령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이후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하였으며, 동학의 사상을 널리 펴고, 3·1운동을 총괄·기획하여 민족대표 33인을 이끌며 독립만세운동을 선도하였다. 성사의 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결정적 토대가 되었으며, 조국 광복의 정신적 원류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현재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 위치한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관’은 이러한 역사적 위상에 걸맞지 않은 환경에 처해 있다. 2000년 개관 이후, 2020년 7월 국가보훈부와 LG하우시스의 지원으로 내부 설명 패널, 바닥재, 조명 등이 교체되며 재개관되었으나, 여전히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 지역 내 낮은 인지도, 콘텐츠 현대화 부족, 예산 및 인력의 지속적 부족으로 인한 시설 노후화와 관리 어려움은 방문객 감소로 이어지고 있으며, 규모와 시설 면에서도 타 주요 독립운동가 기념관에 비해 뚜렷이 열악한 실정이다. 의암 손병희 성사는 3·1운동을 총괄하고 대한민국장 건국훈장을 수훈한 대표적 독립운동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유허지에 위치한 기념관은 단순한 유물전시관 수준에 그치고 있다. 타 독립 유공자의 기념관과 비교하면 명칭만 ‘기념관’일 뿐, 그 규모와 상징성, 시설 수준이 크게 뒤처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의암 성사의 사상과 업적에 걸맞는 국가 차원의 기념관 건립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은 “의암의 생애는 동학에서 천도교로, 천도교에서 3·1운동으로 이어진 민족의식의 큰 흐름이다. 이를 21세기적 상징으로 구현한 기념관은 교육과 문화가 함께 숨 쉬는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관, 세미나실, 체험관, 야외공원 등 복합기능을 갖춘 현대적인 기념관 조성의 필요성과 함께, ‘의암의 길은 곧 나라의 길’이라는 역사적 상징을 누구나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성강현 동의대학교 교수는 토론문을 통해 “의암 기념관은 무엇보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독립운동사적 공헌을 중심에 두고 그 비전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기념관 건립과 더불어 의암 사상의 체계적 연구 방안이 병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기념사업회를 어떻게 구성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지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좌장을 맡은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는 “충북권은 역사적 인물 기념사업이 부족한 편이다. 이번 기념관 건립이 충북의 정체성을 되살리고, 역사교육의 중심지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두영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 상임이사는 “3·1운동이 대중화 전략을 통해 성공했듯이, 이번 기념관 건립도 국민 참여형 모금운동을 통해 추진할 수 있다”며 “의암 선생의 평화, 자주, 인류공영 정신은 지금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밝혔다. 오택균 이사장은 “의암 손병희 선생은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여 천도교를 창건하고, 민족독립의 횃불을 밝혀준 지도자”라며 “기념관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정부와 민간의 지속적인 지원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계승회는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103주년을 맞아 기념관 건립에 대한 공론화를 본격화하고, 지역과 국민 모두의 힘으로 의암 선생의 위상에 걸맞는 기념관을 적극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다가오는 6.3 대선을 앞두고 충북지역 공약으로 ‘의암 손병희 기념관 건립’이 제안된 가운데, 향후 국가적 관심과 실질적 지원이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 및 자료 제공 :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 -
천도교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천도교중앙총부 신임 집행부가 출범한 지 한 달, 천도교 종무원의 실무를 이끌어갈 중책을 맡은 강병로 종무원장을 만나, 신앙 여정과 교단 운영에 대한 비전을 들어보았다. 신앙의 뿌리,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도교 집안에서 자라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정에서는 언제부터 천도교를 믿기 시작하셨는지요? 어린 시절부터의 신앙 경험이나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시면 들려주세요. 제가 계대교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 위치한 영산교구에 형님과 저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시일식을 보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시일식이 끝나면 교당안에서 도시락을 꺼내 먹었고, 교당 앞마당에서 뛰어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는 어려서 천도교가 뭔지도 모르고 놀러 간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할아버지는 충암(忠庵) 강용이님이시고, 천도교 인명사전에는 종의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께서는 종종 서울 중앙총부로 출장을 다녀오셨고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부모님과 숙부님, 고모님들은 천도교를 계속하지 않으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랜 기간 천도교를 하시면서, 가족들에게, 특히 어머니께 천도교 신앙을 이어가라고 당부하셨지만 아쉽게도 할아버지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저도 천도교와 멀어졌고, 친척들은 천도교를 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오래전부터 전혀 왕래가 없어서 제가 천도교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중학교 1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 가면서 도시 생활에 익숙해져 천도교를 잊고 지냈습니다. 다시 찾은 신앙의 길 어릴 때 교당에 나가셨던 기억, 그리고 교사가 되어 동천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다시 천도교의 신앙을 이어가셨는데요, 그럼 평소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오셨는지요? 먼저 제가 동천고등학교 교사 임용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면접관이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는데 다른 답변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지만 천도교에 대해 아느냐는 질문에 어릴 때 이야기를 들려드렸더니 그분이 깜짝 놀라면서 반가워하셨습니다. 아마 제가 천도교인의 소개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서 천도교를 알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셨겠지요. 이후 안관성 종법사님께서 최종 면담하실 때도 제가 어릴 때 천도교를 했다(천도교를 했다기 보다 교구에 놀러 간 것이지만)는 말씀 듣고 굉장히 반가워하셨습니다. 그러나 교사 초기에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젊은 나이라 당시에는 지적 호기심이 많았고 교사로서 성장하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또한 학교 일로 바빠서 정작 신앙에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20년 전 하계수련회에 참여했을 때입니다. 일반적으로 교직원들은 여름, 겨울 방학 때마다 용담정이나 화악산 수도원에서 수련했는데, 당시는 용담에서 수련했고 수도원장은 법암 김근오 종법사님이었습니다. 종법사님께서 양천주에 대해 설법하셨고, 그 내용은 단순하고 평범한 말씀이었지만 제게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한울을 양한 사람에게 한울이 있고, 양치 않는 사람에게는 한울이 없나니, 보지 않느냐, 종자를 심지 않는 자 누가 곡식을 얻는다고 하더냐."는 말씀이 제 마음을 크게 움직였습니다.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한울사람이라고 할 수 없구나. 천도교를 한다는 것은 한울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훅하고 들어 왔습니다. 이 순간이 천도교를 진심으로 대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또한 학생들을 위한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천도교의 매력을 깊게 느꼈습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위해서 설교 전 약 일주일은 사적인 만남이나 불필요한 대화를 피하고 심고와 경전읽기, 천도교 관련 책읽기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문득문득 스승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갑자기 뇌리를 스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설교 준비 과정은 제가 천도교인으로 성장하고 천도교 사상을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훌륭한 동덕이 있어서 이들에게서 많이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환원하신 학암 김학봉 선생님, 덕암 성강현 도훈님, 중암 김대석 동천 교구장님은 소중한 친구이자 직장 동료들이었습니다. 저보다 천도교 공부가 깊으신 분들이라 틈날 때마다 도담을 나누곤 했는데 이분들과의 2, 30년 간의 우정은 저의 천도교 공부가 더 공고해지는 바탕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시는 점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교인이라면 누구나 스승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때문에 제가 소박하게나마 잘 실천하는 것을 말씀드리자면 우선 가족들이 서로 배려하고 존중합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기, 화내지 않기, 절약하기, 작은 액수라도 기부하기, 잠자기 전 “편안히 주무십시오”라며 서로를 향해 절하기 등입니다. 일상에서 누구나 하는 일이라서 언급하기가 민망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생활 속에서 경외지심의 태도를 견지하려고 합니다. 경외지심은 특별한 행동이나 말로 하기보다는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기 때문에 저 스스로 천도교 신앙의 잣대로 삼고 있습니다. 천도교는 삶의 방식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특히 마음에 깊이 와닿았던 경전 말씀이나 구절이 있으신가요? 그 말씀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대인접물(待人接物)에 보면 “겸양은 덕을 세우는 근본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씀으로 성인지덕화(聖人之德化)에도 “성인의 덕화는 자기를 버리어 사람에게 덕이 되게 하고...”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결국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의암성사께서도 개벽을 말씀하실 때 스스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모실 시자로 개벽하라는 말씀을 하시잖아요. 이 말씀도 겸양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와닿는 경전 구절은 많지만 제게는 항상 겸양과 겸손의 말씀이 가장 크게 와닿았습니다. 교직 생활 중의 기억 동천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천도교 신앙과 교육자의 역할이 어떻게 연결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어려운 질문인데요. 교육자로서 돌이켜보면,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교사로서 부족한 사람이지만, 가르치면서 저 자신도 성장합니다. 십 대 중, 후반의 학생들은 누구나 성장통을 겪습니다. 진로, 이성 교제, 부모님과의 갈등, 친구와의 갈등 등 성인 못지않게 심적으로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결국 상담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함께 대화하며 고민하며 내 일처럼 진심을 다하면 그런 제 모습을 보고 학생들은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관심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갈등도 무난히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별한 경우도 있었죠. 제가 교감으로 재직할 때 2015년 개정 교육 과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기 전이었는데, 교육 과정을 전면 개편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과 상담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학생들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어떤 학습 환경을 원하는지, 어떤 프로그램을 원하는지 등 직접 대화하면서 교육 과정, 토론대회, 봉사활동, 진학 문제까지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학습하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학교풍토를 바꾸었습니다. 또한 학교를 홍보하고 학생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고자 <도전 골든벨> 방송도 적극적으로 추진했지요. <도전 골든벨>에서 1학년 학생이 골든벨을 울린 것도 큰 화제가 되었지만, 학생회장이 학교를 소개하는 시간을 통해 동천고등학교가 인내천 사상으로 세운 학교라는 것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참으로 흐뭇한 순간이었습니다. 미래를 위한 천도교, 천도교 문화를 더 풍요롭게 가꾸기. 종무원장으로서의 포부와 계획 교직에 계실 때의 기억이 참 행복하셨는지 말씀하시는 내내 밝은 미소로 말씀하고 계시네요. 이번 집행부에 종무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으셨는데, 앞으로 3년간 종무행정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실 계획인가요?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사업이나 방향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우선, 미래지향적인 천도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남북 평화 통일과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천도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교단 차원에서 평화 통일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고 시의적절하게 선언서를 발표해야 하고, 전쟁과 난민, 기후 재난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때에 맞춰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천도교에서 입장을 발표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교단 내부에서도 개선해야 할 점이 많이 있지만, 젊은 세대로 갈수록 교인 수가 급감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청년회와 중고등학생들이 천도교단으로 찾아오도록 다양한 포덕 방법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교리 공부를 위한 새로운 체계와 수련을 위한 새로운 방법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상 콘텐츠를 확보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학생, 젊은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천도교 유튜브 방송, 홈페이지, 천도교신문, 수도원, 동학혁명기념관 등에서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경전을 주요 언어로 번역하고 외국인 학자들이 연구도 하고 교류를 하는 방법도 추진할 계획입니다. 또 우리 천도교 특유의 용어가 많은데, 교단의 번역원이 수립되면, 그런 용어들을 통일하는 작업도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교인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 한마음으로 교인 한 분 한 분이 자기 자리에서 정심수도하며 천도교의 향기를 퍼뜨리고, 천도교인다운 삶을 잘 살아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랜 세월 학교에서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의 우주로 키워낸 경험으로 천도교의 종무를 꾸려갈 강병로 종무원장의 포부를 들어보았다. 곧게 곧게 살아온, 그래서 더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들이 걸음걸음 보였다. -
포덕 166년 5월 11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공경은 어떻게 하는가"이 설교는 천도교의 핵심 덕목인 공경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룬다. 중암 라명재 송탄교구장은 천(하늘), 인(사람), 물(사물)에 대한 공경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설명하며, 특히 물건에 대한 공경의 의미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공경은 단순히 대상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 나와 대상이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임을 강조한다. 또한, 공경의 반대 개념인 차별과 혐오를 극복하고, 모든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설교는 일상생활에서 공경을 실천함으로써 개인의 삶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
포덕 166년 5월 18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천도교의 신앙법"금암 이종민 선도사는 설교를 통해 천도교의 독특한 영성 철학과 신앙 실천을 기독교, 불교 등 다른 종교 전통과 비교하며 탐구하였다. 본 설교는 많은 종교들이 신성을 인간 외부, 즉 외적인 신이나 추상적인 우주 원리에 두는 반면, 천도교는 ‘한울님’이라 불리는 신성이 인간 내면에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천도교 안에서 자신의 신앙 여정과 이해를 풀어내었다. 특히 수운 대신사와 의암 성사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신(神, Spirit)’은 인간을 통해 발현되는 본질적인 생명력이며, ‘영(靈)’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고유한 영적 생명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였다. 아울러 ‘우주’란 단순한 외적 공간 개념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신령의 살아 있는 표현임을 강조하였다. 금암 이종민 선도사는 이러한 관점을 통해, 천도교의 참된 신앙은 외적인 의례나 외부의 신에 대한 열망적 투사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에 대한 깊은 자각과 헌신에서 비롯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
6월 2일, 제127주기 해월 최시형 신사 순도일, 묘소참례식 봉행“사람이 바로 한울이요 한울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사람이 없다 (人是天天是人 人外無天 天外無人)” - 해월신사 - 천도교중앙총부는 해월 최시형 신사의 순도 127주기를 맞아, 오는 6월 2일(월) 오전 11시,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천덕산에 위치한 해월신사 묘소에서 참례식을 봉행한다. 참례식(參禮式)은 해월신사의 순도일을 기리기 위한 행사로, 교인은 물론 일반 시민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해월 최시형 신사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뜻을 받들어 교단을 이끌며, 수운대신사의 시천주(侍天主)의 새로운 진리를 계승하고 교세를 확장하였다. 조선 말기 격심한 탄압 속에 36년간 도피생활을 하시는 와중에도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였니다. 해월신사는 민중의 스승이자 동학 정신의 실천적 구현자로 평가받고 있다. 해월신사는 1898년 4월 5일, 강원도 원주에서 천일기념일을 맞이하여 참례식을 마친 후 관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해월신사는 광화문 인근 경무청(현 정부서울청사 별관 자리)을 거쳐 서소문 감옥에 수감되었고, 수차례 재판을 받은 끝에 6월 2일, 서울 좌포청에서 교수형으로 순도하였다. 시신은 3일간 효시된 뒤 광희문 시구문 밖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 해월신사의 옥바라지를 하던 정암 이종훈(훗날의 민족대표 33인)선생이 시신을 수습해 송파 나루 건너 한 교인의 집 뒷산에 매장하였다가, 1900년 춘암 박인호 상사가 송파에서 여주 천덕산까지 직접 시신을 운구해 현재의 묘소 자리에 안장하였다. 이후 매년 순도일에는 이곳에서 참례가 이어져 오고 있다. 한편, 해월신사의 묘소는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을 인정받아 2021년 5월, 경기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경기도 기념물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묘역에는 해월신사의 부인 손시화 여사, 아들 독립운동가 최동희 선생과 며느리 홍동화 여사, 손자 최익환 종법사와 부인 홍창섭 여사의 묘도 함께 자리하고 있어 동학과 천도교,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가족 묘역이다. 같은 날 저녁 9시에는 전국 각지의 교인들이 재가기도 형식으로 ‘해월신사 순도 및 환원 기도식’을 봉행할 예정이다. 기도식은 전통 의례 절차에 따라 ▲개식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경전 봉독(성령출세설) ▲환원기도가(천덕송 합창) ▲심고 ▲폐식 순으로 진행된다. 이번 묘소참례식과 재가 기도식은 해월신사의 정신을 다시 새기고, 동학의 사회적 · 인간적 실천을 되돌아보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