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중편소설 <하얀 혁명>(4)(지난 호에 이어) 보은 충경포 수접주 윤경신은 눈자위와 상체가 헌헌한 중년의 남자였다. 청수잔을 올려 한울님께 심고하는 것으로 상견례를 대신한 후, 신재길은 구해온 총을 더 살펴보겠다며 일행을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윤경신이 두루마기를 벗어 횃대에 걸고는 나달나달해진 짚신을 잔솔가지로 털어 한쪽에 밀어놓았다. 사려 깊음이 몸에 밴 사람처럼 보였다. “경기도에서 예까지 오시느라 여독도 안 풀리셨을 텐데 이리 찾아주심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작년 보은 취회 이래 전국 각지에서 솔병해 모여드는 도인들을 치르시느라 되레 노고가 많으실 듯하옵니다. 이곳 보은 사정은 어떠하온지요?” “동학군을 돕는데 너나가 따로 없지요. 보은 땅에서 동학군에 반대하는 민보군이 조직되었다는 말은 아직 들은 바 없습니다.” “과연 보은이야말로 대도소가 들어서기에 손색이 없는 고장이로군요.” “하지만 워낙 농촌이다 보니 전량과 무기를 마련하는 데 애로가 많습니다. 곧 겨울이 닥칠 것이기에 월동 준비만으로도 벅찹니다. 이번에 나갔다 온 연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지요.” “성과는 있었는지요?” “삼 년 가뭄 뒤끝이라 몇몇 부농과 지주들의 성의만으로는 신통치가 않습니다.” “하오면?” 셋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향리 도처를 뒤져보면 고부 민란을 초래케 한 조병갑 같은 탐관이나, 납속(納粟)하여 얻은 관직으로 늑봉(勒捧)을 일삼는 무리가 상당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옥천포, 영동포의 접주와 함께 영동에 행차하여 이용직을 만나고 왔습니다.” “이용직이라 하오면?” “백만 냥을 상납하고 경상감사를 제수받았던 인물인데 지금은 파직되어 영동에 살고 있습지요. 그자를 닦달해 겨울옷 일천 벌을 받기로 약속했습니다.” “큰일을 하셨군요. 순순히 내놓지는 않았겠지요?” “목숨은 하나인지라 면전에서야 협조했지만 돌아서서는 우릴 화적 취급했을 겁니다.” 보은 수접주가 이 말을 하고는 망나니 칼처럼 손날을 넓게 펴서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이천 수접주가 모처럼 피어난 웃음기를 만면에 가득 담으며 말했다. “허허, 수접주님의 배포가 참으로 호협하십니다그려. 그나저나 해월선생의 기포령이 너무 늦은 건 아닌지요? 하루가 다르게 날이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기포령을 내리시던 날도 그런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가을걷이를 마친 후에 일어나자는 것이 중론이었습지요.” “기포령을 내리던 날 수접주께서도 그 자리에 함께 계셨단 말씀입니까?” “그러하옵니다.” “그날의 얘기를 듣기 청합니다. 해월선생께서 뭐라 하셨는지요?” 이창진과 한규석이 입을 모아 간청했다. “어허, 낭패로고. 내 어찌 한울님의 천어(天語)를 들으신 해월의 말씀을 감히 옮긴단 말이오. 당치 않소.” “해월선생께서 기포령을 발하실 때는 다 그만한 연유가 있었을 것이고, 신교(神敎)도 함께 전하셨을 터, 간곡히 듣기를 청합니다.” 이번에는 수접주까지 나서서 간청하자 보은 수접주가 더는 물리치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제 부족한 언변을 탓하지 않는다면 몇 말씀 사뢰어보리다. 해월선생께서 청산에 모인 접주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보은 수접주가 옷에 풀 먹이듯 적삼 깃을 정갈히 훑어내려 반듯이 펴고는 헛기침으로 목을 고른 후 그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토머리에 얼음 풀리듯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난달 보름에서 하루가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해월선생으로부터 접주들만 은밀히 청산 대도소로 모이라는 전갈이 당도했습니다. 당시는 해월께서 관군의 눈을 피해 그곳에 계시던 때였지요. 각 고을 접주에게 황급히 연통을 넣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나섰습니다. 가는 도중에 보니 큰 고을은 물론이고, 작은 마을도 출진을 준비하는 동학군으로 가득했고, 군량과 무기를 실은 우마차가 길을 막아 동학군 세상이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민초들 모두 가만히 팔 개고 있다가는 왜놈의 손에 나라가 넘어가겠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청산에 도착해 안내된 곳은 허름하게 위장한 초가였습니다. 거기서 하루를 유하고 이튿날 문바위골로 향했지요. 문바위골은 계곡이 깊어 사람이 은거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고, 청산 평야는 바다처럼 넓어 대군을 먹이기에 충분한 터전이었습니다. 게다가 앞은 탁 트이고 뒤는 막혀 있어 인마의 움직임은 물론, 작은 기척도 울림통 속처럼 크게 들려 외적의 방비가 능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보은 수접주가 음성을 낮추어 깔았어도 기실은 말주변이 상당해 당시의 정황을 그림 그리듯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문바위는 형상이 마치 사람이 드나드는 문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로 가보면 대단한 영험이 깃들어 있다 느끼실 겁니다. 그 문을 들어서면 속세와는 다른 신령스러운 땅에 들어섰다는 느낌, 지금껏 품어왔던 생각을 온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다가설 수 없는 다시 개벽의 세상, 천 년의 웅지를 펼 도량에 들어섰다는 감동이 절로 솟아날 것입니다. 문바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또한 속리 정이품이 환생한 듯 자태가 엽엽하고, 길가에 늘어선 빨간 남천 열매에 눈을 빼앗겨 한 마장쯤 걷다 보면 이번에는 수령이 족히 오백 년은 됨직한 느티나무가 나옵니다. 나무가 어찌나 실하고 울창한지 초열(焦熱)의 폭염에도 가을의 너와집 같고, 세 가지로 나눠 뻗은 줄기 한가운데는 장정 서넛이 둘러앉을 만하고, 나무 아래의 너럭바위 또한 선방 서너 개는 꾸밀 만큼 넓습니다. 이 너럭바위에 누워 하늘을 보면 온 세상이 평평해지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고도 합니다. 동학이 꿈꾸는 세상처럼 말이지요.” 수접주가 없는 정경을 부러 꾸며 말할 리는 없겠으나 곧이듣기에는 너무도 출중한 지세인지라 셋은 언젠가 문바위골에 꼭 가봐야겠다며 속마음을 다졌다. 듣는 이의 수굿한 귀 기울임에 신명이 났던지 수접주가 연달아 말을 이었다. “삼면에 휘장을 친 너럭바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레방석처럼 너른 훈련장에는 무예를 다듬느라 여념 없는 군사들이 그득했고, 산비탈을 다듬어 지은 초막에서는 숯불 태워 밥 짓는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잠시 있자니 흰 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해월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접주들이 일제히 일어나 복배(伏拜)로 예를 갖추자 해월은 우리보다 더 깊숙이 허리를 숙여 답례하고는 좌정하셨지요. 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접주의 말투가 일순 해월의 목소리인 양 중저음으로 깔리면서 너른 호수처럼 벙벙해졌다. 수접주는 그날의 해월을 상기하려는 듯 청산 쪽으로 머리를 돌려 버성긴 수염을 한 차례 쓸어내린 후 해월선생의 말씀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았소이다. 접주들을 뵈러 내가 직접 보은으로 가야 마땅하나 그곳은 이미 관군이 우리 동학군의 주둔 사실을 아는 고로 거사를 앞두고 혹여 일을 그르칠까 싶어 이리로 모신 것이니 크게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운대선생님께서 무극대도를 받아 동학을 창도하신 이래 올해로 꼭 삼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나는 이 나라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 그 본성에 인내천(人乃天) 한울님이 있음을 알게 하였고, 만민 모두가 골고루 평등하다는 시천주의 가르침, 사람을 한울님같이 대하고 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을 실천하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오늘 접주님들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이런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하고자 함입니다. 무릇 모든 생명은 스스로 존귀한 가치를 지니며, 우주 만물과 더불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시 개벽의 세상, 즉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주 만상이 다 한울님이고, 어린이나 아녀자, 관노나 사노, 하다못해 들판에 나는 새 한 마리, 풀 한 포기조차 한울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오나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일본이나 청 제국이 서로 취당(聚黨)하여 조선을 겁박하고, 탐학한 관리나 토호들이 반상, 적서, 남녀의 차별에, 토색질, 분탕질까지 저질러 선한 백성 한울님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소외와 핍박을 천형(天刑)으로 알고 사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며, 그릇됨을 알고도 모른 채 묵과하고 굴종하는 건 다시 개벽의 뚜껑을 닫는 일입니다. 묵묵히 참기만 하고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 건 자기 안에 갇힌 기망(欺罔)일 뿐이며,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묘책이 없다고 자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혁명이란 무엇입니까? 원악(元惡)에게 머리 조아리지 않고, 내 믿음을 철석같이 믿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모든 혁명은 분노에서 비롯하며, 인내가 끝나는 곳에서 열리는 새로운 개벽 하늘입니다. 백성의 궁핍과 치욕이 하늘을 찌르고, 외적의 침탈로 나라가 쇠멸하는 이 마당에 마냥 팔 괴고 앉아 상제님의 강림만을 기다린다면 어찌 우리가 축원하는 세상, 혁명의 하늘이 열리겠습니까? 자고로 민심은 천심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창의하는 것은 곧 온 나라 백성이 창의하는 것이며, 한울님이 도모하는 천운의 기회가 도래함이니, 오늘의 기포를 통해 수운 스승님의 무고함을 바로잡고, 외군(外軍)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 조선의 대원(大願)을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생명은 한울님이 주신 것이고 죽어도 한울님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니 성령으로 장생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호랑이가 들어오면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싸워야 하는 것처럼, 이제 나는 우리 동학도 모두가 함께 떨쳐 일어나 죽기를 다해 싸우자는 창의(倡義)의 기포령(起包令)을 발하는 바입니다. 이를 계기로 풍전등화처럼 스러져가는 조선을 되살리고, 한울님의 목숨을 호기롭게 일으켜 세우는 단초가 되기를 앙축(仰祝)하옵니다. 이것으로 내 말은 줄이고 여러 접주님 모두에게 천지신명의 보살피심과 한울님의 가호가 창대하기를 축수하옵니다. 충경포 수접주 윤경신, 한울님의 천어(天語)에 기대어 해월선생의 말씀 대신 전해 드렸습니다.” 보은 수접주가 밭은 숨을 다독여 해월선생의 기포령을 전하고 말문을 닫았다. 수접주가 들려준 해월의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생생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특히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혁명이며, 스스로 분노하여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의 시작이라는 말에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일본군이 쏘아대는 총소리 앞에 썩 나서며 울려대는 동학군의 철성 소리였으며, 그들의 화력에 기죽어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한울님이 목소리이기도 했다. 셋은 숙연한 심정으로 해월선생이 창의하며 품었던 늠연한 기상과 기포령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장내리 대도소를 나섰다. 보청천 강물에 드리워진 윤슬이 길게 이어졌다. 일행은 이천접이 야영하고 있는 숙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단정학, 왜가리 들의 귀소가 강을 따라 잔잔히 너울져 함께 흘렀다. 3. 전투 이틀 후, 보은 장내리 대도소에서 출정을 위한 치성식이 열렸다. 전날 밤 은밀히 당도한 해월선생이 의암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전수하는 것으로 치성식이 끝나고 출정이 시작되었다. 통령으로 임명된 의암 대접주가 각 포를 사열한 뒤 3만 대군을 원정군과 수비군으로 나누어 2만의 원정군은 논산으로 이동해 전봉준의 호남동학군과 합류토록 하고, 1만의 수비군은 장내리 대도소, 문바위골 대도소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을 방비케 했다. 이동 편의성을 위해 원정군을 다시 둘로 나누어 1대인 영동과 옥천포는 회덕을 거쳐 공주 장기의 대교(大橋)로 이동했고, 2대는 경기포를 주축으로, 강원, 충청, 경상포와 연합해 심천과 진산을 거쳐 논산으로 향했다. 2대의 주력은 괴산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이천포가 맡았다. 황색기를 든 손병희 통령의 중군을 중심으로 청색기의 선봉, 백색기의 좌익, 흑색기의 우익, 홍색기의 후군이 논산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색 깃발을 치켜든 2만 대군이 진군해 나가자 연도의 산과 들녘은 온통 흰옷 입은 동학군으로 넘쳐났고, 군량과 무기를 실은 우마차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수접주로 승진한 이창진과 전량도감이 된 한규석은 충경포의 신재길 접주와 함께 후군에 편성되어 보무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행군 도중 간혹 만나는 소읍의 관군은 대군의 이동에 혼비백산해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일쑤였고, 그 덕에 적으나마 신무기와 탄약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중 회선포 두 대를 노획한 것은 동학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총신이 돌아가면서 총알이 나가도록 고안된 회선포는 기왕에 가지고 있던 한 대와 합쳐져 대열의 선두를 이끌었다. 논산에서 2만의 호남동학군과 만난 경기동학군은 도합 4만의 대군으로 진용을 갖춰 공주를 향해 짓쳐나가기 시작했다. 노성을 지나면서부터는 공주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둘로 나누었다. 손병희 통령이 지휘하는 경기동학군은 좌측의 이인(利仁) 쪽으로 향했고, 전봉준 장군이 지휘하는 호남동학군은 우측으로 돌아 경천을 지나 우금치와 효포(孝浦) 방면으로 이동했다. 한편, 공주의 동쪽으로 진군해 들어간 영동과 옥천포는 금강의 북쪽 강안인 대교에 진을 치고 주력인 호남동학군의 공주 공격 개시 파발이 당도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세 방면에서의 일제 공격을 위해 무장의 고삐를 바짝 틀어쥐었다. 이인에 당도한 경기동학군은 회선포 3대를 돌출된 형태로 앞세운 뒤 논배미를 두둑하게 쌓아 총안을 만들었고, 너른 이인 평야에 볏짚을 깔아 진지를 구축했다. 호남동학군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만든 임시 전진기지인 셈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날은 점점 추워지는데 전봉준의 호남동학군으로부터 개전을 알리는 파발이 나흘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인의 평야 진지는 금방 이동할 것으로 예상해 임시방편으로 구축한 것이라 허허벌판의 추위와 칼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화톳불을 피웠다. 그 탓으로 낮에는 매캐한 연기가 종일 진지를 맴돌았고, 밤에는 멀리서 보아도 대군이 주둔해 있는 게 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불빛 속에 환했다. 손병희 통령은 출진이 미뤄지는 것에 조바심이 일어 접주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통문을 돌렸다. 갑주(甲冑)를 떨쳐입은 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전이 임박했습니다. 공주는 천혜의 군사 요충지인바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승리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직 호남동학군으로부터 개전 파발이 당도치 않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으나, 언제 공격이 시작될지 모르니 무기와 군량을 세세히 점검하고 출진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조만간 있을 공격을 앞두고 접주들의 의견을 수렴코자 하니 기탄없이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통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맨 앞줄의 젊은 접주 하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호남동학군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가 먼저 쳐들어가 성문을 깨부숩시다.” 여기저기서 ‘그럽시다’라는 호기로운 목소리가 울흥하게 일었다. 신중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독불장군이 나서면 백전필패란 걸 모르시오? 원래의 계획대로 동, 서, 남 삼면에서 동시에 공격하면 수성군이 도망칠 곳은 금강뿐이라 독 안에 든 쥐 격입니다. 서둘러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 다른 의견도 나왔다. “우리는 타지에서 이동해 왔기에 이인이나 공주의 지세를 잘 알지 못합니다. 무릇 병서에 이르길 지장(智將)은 지세와 산세, 수세를 우선 살핀다 했습니다. 먼저 동리 사람을 불러 지세를 소상히 들어본 후 움직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근동의 지리를 잘 아는 접주가 있어 그가 자진해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도스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보다시피 이인은 땅이 넓어 사방이 트여 있습니다만, 이인부터 공주까지는 산과 능선만이 즐비합니다. 비록 산은 높지 않으나 봉우리가 무수히 많고 산록은 가파르며, 반대로 골이 깊어 대군이 지나가기 쉽지 않습니다. 우마가 다닐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며, 고개를 대여섯 개 연이어 넘어야 공주성에 당도하는 오르막 험로입니다.” 접주의 이 말에 앞으로의 전투가 쉽지 않을 거라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돌멩이 하나를 굴려도 아래보다는 위가 나을 텐데 공주성 공격은 아래에서 위로 치받는 방식이라 쉽지 않겠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의견도 나왔다. 말한 이는 충경포의 신재길 접주였다. “지금 당장 진지를 옮겨야 합니다. 보다시피 우리 진지는 평야에 포진하여 사방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가진 화승총은 사정거리가 짧아 멀리 있는 적을 맞추기 어렵고, 바람막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인 까닭에 화승에 불을 붙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속히 산봉우리로 진지를 옮기고 몸을 숨겨야 합니다.” 다들 동의했지만 금방이라도 호남동학군의 파발이 당도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당장 애써 만든 진지를 버리고 새로운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 눈치들이었다. 신재길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나이 지긋한 접주 하나가 허리부터 세우고 일어나 추임새를 넣었다. “무릇 정병(精兵)이라 함은 전투를 잘하는 병사가 아니라 방비를 잘하는 병사를 말합니다. 오늘의 수고가 내일의 승리를 약속한다는데 무얼 주저합니까? 군사의 숫자만 믿고 지세가 불리한 평지에 머물렀다가는 화를 키우는 꼴이 될 것입니다. 속히 서둘러야 합니다.”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깨고 또 한 사람이 일어나 조심스레 말했다. “어제 해 질 녘, 좌측방의 초봉리 산마루에서 원조경(遠眺鏡)으로 주위를 살피는 자가 있었습니다. 멀어서 확실하진 않았으나 그 시간에 산야를 누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필시 관군이나 일본군이 우리를 염탐하러 보낸 세작이 아닐는지요?” 이 말이 떨어지자 좌중에 술렁임이 일었다. 당장 진지를 옮기자는 의견과 어차피 하루 이틀 후면 진격할 터이니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할 필요가 뭐 있겠냐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손병희 통령이 양측의 의견을 다 듣고 난 후 무겁게 입을 뗐다. “진퇴양난이란 필시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합니다.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기병하여 하루를 진군한 뒤 적당한 봉우리를 물색해 진을 치도록 합시다. 오늘은 급한 대로 선봉군인 안성포에서 전방에 보이는 옥녀봉에 척후를 보내 경계초소를 마련하고 적병의 기습을 살피는 것이 어떻겠소?” 타협안이 그럴듯했다. 진지를 옮기자는 의견과 산봉우리에 진을 치자는 의견 모두를 수렴했을뿐더러 옥녀봉은 이인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충인지라 통령의 중재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참에 이창진과 한규석, 신재길은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포로 총총걸음을 옮겼다. “동학군의 수가 많다 하나 병법을 아는 이가 드무니 걱정이오. 당장 오늘 밤에 야습이 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백수의 왕 호랑이도 여우에게 꽁무니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소. 적이 허를 찌르고 달려든다면 낭패가 될 터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불침번을 갑절로 세워 방비를 튼튼히 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밤이 무사히 지나길 바랄 뿐입니다.” 걱정을 여러 겹 쌓는다고 하여 행운이 찾아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고작 하루를 더 넘기지 못하고 그날 밤 평야에 주둔해 있던 경기동학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었다. 야습은 엉뚱하게도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비롯되었다. 서둘러 옥녀봉에 경계초소를 마련한 안성포 군이 전방과 측방의 방비는 튼튼히 했지만, 후방에서 접근하는 적을 예상치 못했다. 인근 야산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적병이 동학군이 피운 시초(柴草) 더미 불기운이 사그라드는 새벽 시간을 노려 일시에 총을 쏘며 달려든 것이었다. 선잠에서 깨어난 동학군 진영은 화승에 불붙일 새도 없이 혼비백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포진해둔 회선포의 방향을 돌려 응사하기도 전에 진지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불침번을 선 경비병이 화승총으로 응사했지만, 벌판을 건너온 새벽 된바람에 총은 불땀을 잃고 헛방을 놓기 일쑤였다. 전방에 나가 있던 안성포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적병이 후방 근거리에 매복해 있다가 일시에 달려드는 통에 병장기를 추슬러 구원하러 달려올 틈도 없이 한 식경 가량 이어진 전투에서 동학군은 궤산(潰散)에 궤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날이 희뿌옇게 밝아 주변 형상이 드러나면서부터 논바닥에 엎드려 있던 동학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섰다. 전방에 나가 있던 안성포 군이 도착하는 발소리가 요란해지자 적병은 홀연히 미명의 운무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매복과 기습으로 동학군을 타격하고는 귀신병처럼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날이 밝아 전장을 살펴본 결과 심대한 타격을 입은 전투였음이 드러났다. 관군과 일본군의 시체는 별로 없고, 무더기로 쓰러져 죽은 동학군 시신 사이로 부상자의 비명만이 낭자할 뿐이었다. 인원과 무기, 전량을 점고한 결과는 더욱 참담했다. 시신의 숫자는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였고, 함부로 쏘아댄 회선포 탄환은 초반에 동나버렸으며, 쌓아두었던 군량미에 불기운이 옮겨붙어 홧홧한 열기와 연기가 자욱하게 맴돌았다. 한순간의 방심이 부른 패전치고는 육단(肉袒)으로 옷을 벗고 땅을 칠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적군은 인근 야산으로 퇴각했다가 총탄을 보충해 재차 공격해 들어왔다. 반면에 동학군은 불땀이 일지 않는 화승총을 붙잡고 엎드려 헛헛한 입김만을 부싯깃에 불어넣고 있었다. 완벽한 무기의 열세였다. 적군의 공격은 해그림자가 짧아질 때가 되어서야 칠점사의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
[칼럼] 주문(呪文)에서 바라본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본뜻강령주문(降靈呪文)「지기금지원위대 강(至氣今至願爲大 降)」 본주문(本呪文)「시 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 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는 논학문(論學文) 즉 동학론(東學論)에서 "··· 내 또한 거의 한 해를 닦고 헤아려 본즉, 또한 자연의 이치가 없지 아니하므로 한편으로는 주문(呪文)을 짓고 한편으로는 강령(降靈)의 법을 짓고 한편으로는 잊지 않는 글(본주문)을 지으니, 절차와 도법이 오직 이십일 자로 될 따름이라.···"하여, 주문(呪文) 낱글자를 하나둘 해의하여 제자들과 후학들에게 털끝만치도 잘못 해석함을 경계하였다. 여기서는 주문 전체의 해석을 살펴보는 게 아니라, 본 주문 두 번째 「주(主)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父母)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수운 대신사의 주문(呪文)에서 사인여천(事人如天)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있다. 바로 ‘주(主)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이다. 동학 천도교에서 강조하는 실천윤리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하라’이다. 수운 선생은 주문 풀이에서 주(主, 천주) 즉 한울님을 섬긴다는 것은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럼 사인여천(事人如天) 본뜻의 출발은 사람 섬기기를 부모님 섬기듯 하라는 의미로 본다. 수운 선생은 한울님을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어버이로 여겼으며, 사람 또한 한울님을 모신 한울님과 같은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은 단순한 존중과 평등에 입각한 서로 인사 잘하고 존댓말 사용하고 하는 형식적인 실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시 말씀드려 사람은 서로 간에 성경신(誠敬信) 즉 정성과 공경, 믿음에 바탕 한 실생활에 도덕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본다. 다시 강조하면, ‘사람을 부모님 공경하고 섬기듯, 한울님 공경하고 섬기듯 실천’하는 것이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본뜻이라고 생각한다. 사인여천(事人如天)은 단순한 예로 이웃이 굶고 있으면 부모님이 굶고 있는 것처럼 음식을 대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천하는 것은 예의범절과 도덕적인 의미도 있지만 실제로는 같이 공존하고 일하고 먹고 나누는 공동체적인 대동세상을 뜻한다고 본다. 그래서 사인여천(事人如天)은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도덕이자 나눔의 본질이니, 말과 글로 끝내는 그런 사상이 아니다.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세상이 온다면 그건 바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세상일 것이다.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지상천국의 세상은 요원한 것일까? 과연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天國)과 같은 세상은 있는 것일까? 천도교에서 말하는 지상천국은 기독교적인 천상천국과 비교하면 답이 없다. 그럼 어디에 비교해야 하는 것일까. 수운 대신사님은 주문수행을 열심히 하고 동학사상을 실천하면 지상신선(地上神仙)과 같다고 말씀했다. 지상천국은 천도교 4대 목적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중 하나이다. 그러니까 천도교의 지상천국은 바로 지상신선의 세계와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지상신선(地上神仙)은 인간으로서 주문수행을 통해 신(神)과 같은 존재를 꿈꾸는 것이요, 지상천국(地上天國)은 지상신선과 같은 인간들이 사인여천을 실천하는 세상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다시 말씀드려 성경신(誠敬信) 즉 정성과 공경, 믿음에 의한 도덕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사람을 부모님 공경하고 섬기듯, 한울님 공경하고 섬기듯 실천’하는 것이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본뜻이라고 생각한다. 글 송암 이윤영(동학혁명기념관장/천도교연원회직접도훈) -
천도교 정신 되새기며 의미 있는 겨울 방학지난 12월 21일부터 22일까지 천도교 부산시교구와 대동교구에서 제70회 겨울 한울학교를 개최했다. 이번 한울학교는 방학을 앞두고 무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됐으며, 천도교 대동교구 성수당 김성희 동덕과 부산시교구 선진당 조희경 동덕이 공동으로 기획하고 진행하였다. 21일 오전, 부산시교구에서 개강식을 시작으로 한울학교의 막이 올랐다. 참가자들은 개강식과 기도식을 하고 대신사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을 관람하며 천도교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겼다. 이어서 주문 공부를 통해 주문의 뜻을 되새기며 수련하는 법을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이날 빙상장 체험 현장에서는 작은 화재가 발생해 모든 참가자가 안전하게 대피하는 등 아찔한 상황이 이어지기도 했으나,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모두 무사히 대피했으며 참가자들은 이를 통해 안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22일에는 인일기념식에 참석하며 의암성사의 도통전수를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저학년과 고학년을 나누어 체험 활동이 진행되었다. 저학년 학생들은 미로 체험을 통해 협동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웠고, 고학년 학생들은 방탈출 체험을 통해 창의성과 사고력을 발휘했다. 다양한 활동 속에서 참가자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이번 제70회 겨울 한울학교는 참가자들에게 천도교의 가르침을 몸소 체험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의미 있는 행사였다. 김성희 동덕은 “다들 바쁜 시간 속에서 함께 하려고 마음을 내어주시는 동덕들께 깊이 감사드리고 더 많은 인원이 함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조희경 동덕 또한 “참여해준 동덕님들,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해주시는 숙던 어르신들께 감사하고, 특별히 간섭해 주시는 한울님ㆍ스승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제70회를 맞이한 이번 한울학교는 참가자들에게 천도교 정신을 되새기며 의미 있는 겨울 방학의 시작을 선사했다. 앞으로도 천도교가 주최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많은 사람에게 영감과 배움의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
마음공부 - 일기쓰기한울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경외지심'(한울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수심정기'(한울님 마음과 기운을 내 마음과 기운으로 삼는 것)를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게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한 아주 좋은 방법으로, 마음공부(心學) 일기쓰기를 소개한다. -
포덕 166년 1월 5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 새해의 서원설교 : 현암 윤석산 교령 -
중앙총부, 포덕 166년 시무식 개최, 새해 맞이 다짐과 결의포덕 166년 새해를 맞이하여 중앙총부는 시무식을 열고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알렸다. 이날 시무식에는 각 기관 및 부서 임직원들이 모여 새해의 목표와 비전을 공유하고, 결의를 다졌다. 정갑선 교무관장의 집례로 개식-청수봉전-주문 3회 병송-시무사(종무원장) 등으로 이어진 시무식은 축하와 다짐의 시간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이범창 종무원장은 “새해를 맞이하며 업무를 진행함에 있어, 계획에 따라 다음 집행부가 잘 이어받아 잘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각 부서에서 적극적 지원과 협조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 동귀일체로 업무를 추진해 나갈 때 광제창생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올해도 열심히 맡은 바에 임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포덕 166년 시무식은 새해를 시작하며 각 기관의 방향성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자리였으며, 참석한 교역자들은 새해의 도전과 기회를 맞이하는 결의를 다졌다. -
[특별기고] 포덕천하, 광제창생지난 여름의 폭염과 올겨울 첫눈의 폭설은 모두 기록적인 기상재해였습니다.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이런 기상재해는 해마다 기록을 경신해 갈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로 인해 인류가 받는 고통은 그 도를 더 해 갈 것입니다. 인류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 대책도 없이 우리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지금 지구촌에서는 두 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꽃다운 어린이들이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나라 안으로 눈을 돌리면 더욱 한심한 꼴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합니다. 분노와 증오가 나라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이 모든 것은 인간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빚어진 일들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우리 천도교인들이 나서서 깨우쳐야 하지 않을까요? 일찍이 해월 스승님께서는 “장래 물질문명이 그 극에 달하고, 인심을 인도하는 선천도덕(先天道德)은 때에 순응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울의 신령한 변화 중 일대 개벽의 운이 회복될 것이니, 우리 도의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은 한울의 명하신 바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이 지금 하나하나 현실화 되고 있습니다. 일대 개벽의 운도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는 한울의 신령한 변화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준행하여야 하는 신앙인으로서 인류의 종말적 미래가 그대로 진행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희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한울이 명하신 바 그대로 포덕천하! 광제창생! 입니다. 천도교인에게 명령하신 이 시대적 사명은 실로 준열할 뿐 아니라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지구를 구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완수해야 합니다. 첫째로 포덕천하는 천도교인에게 지워진 지상명령입니다.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의 위대한 사상을 온 인류에게 알려 삶의 지침으로 삼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인간계에 최초로 창안된 대종지선(大宗至善)의 이 가르침을 어찌 널리 널리 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천도교인들은 모두 떨쳐 일어나 포덕의 대열에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포덕천하의 그 날을 완수해야 합니다. 이 길만이 지구촌을 구하고 인류를 구제할 오직 단 하나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광제창생은 우리 도의 종국적 목적에 해당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합니다. 한울이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한울인, 우리의 이웃과 지구촌 식구들을 어찌 구제하지 않고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한 사람의 눈물이라도 한 짐승의 고통이라도 덜어 주어야 합니다. 위대한 사상은 위대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 천도교인들이 분발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경하는 동덕 여러분, 사람뿐만 아니라 지구촌의 모든 생명을 구할 위대하고도 숭고한 사명을 띠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포덕 166년에는 더욱 신앙심을 돈독히 하여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대열에 힘차게 나갑시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암 이범창 종무원장 -
중편소설 <하얀 혁명>(3)(지난 호에 이어) 2. 혁명 괴산전투가 끝난 후, 동학군은 큰물 들어오듯 척양척왜의 깃발과 지역별 포접을 알리는 깃발을 앞세워 보은을 향해 진군해 나아갔다. 워낙 많은 숫자의 이동이라 정해진 길은 따로 없었다. 이천포는 청안, 미원을 지나 보은의 지경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행군 도중 여장을 푼 숙영지마다 흰옷 입은 동학군이 밀려들어 수천 마리 백로가 날아든 듯 가을 들판을 뒤덮었고, 밥때를 알리는 호군장(犒軍將)의 징소리가 가마솥이 풍기는 밥 냄새와 어우러져 산야로 퍼져나갔다. 보은 장내리 대도소에 도착하기 하루 전, 이천포는 마지막 숙영지로 보은군 산외면과 내북면 사잇길로 접어들어 학림리(鶴林里)라는 작은 마을에 당도했다. 학림이라는 이름처럼 마을 뒤편 소나무 군락지에는 보청천을 먹이터 삼아 둥지를 튼 백학과 왜가리 떼가 평화롭게 새끼를 키우고 있었다. 여기서 장내리까지는 반나절 거리였다. 이천포 대열이 마을에 당도하자 동네사람들이 밥 짓던 연기를 부지깽이로 다스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대군의 기세에 눌려 썩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 집이나 헛기침 없이 들어간다 해도 막아설 사람은 없겠으나 이창진과 한규석은 민폐를 염려해 촌장 집을 물어 찾았다. 마을 안쪽 솟을지붕으로 대문을 얹은 기와집이었다. 탕건을 쓴 주인이 나왔다. 초면이었으나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합장의 예를 갖추어 인사하자 주인이 손님을 사랑채로 안내했다. “우리는 경기도 이천에서 기포한 동학군이오. 마침 길이 저물어 이 마을에서 하룻밤 유숙을 청하오니 무례를 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창진이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여 유숙을 청하자 주인이 같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무례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몇 날을 유하여도 하등 신세 될 것 없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떠한 민폐도 끼치지 않을 것임을 약속드리옵니다.” “그것도 너무 괘념치 마시오. 사람이 살다보면 피차 신세를 지기도 하고 갚기도 하는 것, 더욱이 침식(寢食)의 신세는 항차 큰 인연으로 이어진다고도 하더이다.” 주인의 손님맞이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만일 유숙을 거절하면 억지로라도 밀어붙일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이창진의 낯빛이 무뎌졌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생은 경기도 이천에 사는 이창진이라 하옵고, 이녁은 한규석이라 하옵니다.” “경주김가 김교무라 부릅니다. 가난한 유생의 처지라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한규석의 눈에 안쪽 벽에 걸린 족자가 들어왔다. 예서체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족자의 글귀와 말미에 찍힌 낙관을 눈여겨보면서 물었다. “이 마을이 경주김씨 세거지인 듯하오만?” “그렇습니다. 보은에는 본시 경주김가 터전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마을 역시 경주김가의 오랜 세거지로 속리산 한 자락을 늘여 펴서 누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지요. 타성바지는 스무 집 남짓합니다. 보은을 잘 아시는지요?” “주인장 얼굴을 뵈니 초면이 아닌 듯하여 묻습니다.” “대처에 나가본 바가 드물어 경기도 이천은 낯선 곳입니다.” 이창진도 주인의 얼굴이 낯익은 듯 미간을 좁혀 말했다. “하오면 우리가 보은에 왔을 때 뵈었다는 것일 터.” “보은에 온 적이 있다는 말입니까?” “작년 3월 보은 취회 때 장내리에서 한 달을 유하다 간 적이 있습니다.” “옳거니. 그렇다면 거기서 만났을 겝니다. 소생도 거기에 간 적이 있으니까요.” 김교무가 작년에 있었던 기억을 냉큼 끌어와 화답했다. “어쩐지 낯이 익는다 싶었는데 내 눈이 틀림없군요. 입도는 하셨는지요?” “동학도를 말씀하시는 게지요?” “그러하오.” “입도는 하지 않았으나 만민은 평등하고 사람을 하늘같이 여기라는 시천주, 사인여천의 동학도 교리는 익히 들은 바 있습니다.” “입도하지 않았다면 우리 취회에 오실 일이 없었을 터인데?” “외월(猥越)스럽지만 제 집안에서 누대로 살아온 가솔 서넛을 면천(免賤)해 주었다 하여 동학 교주 해월선생께 초빙되어 문안드린 바 있습니다.” 이창진과 한규석은 그제야 주인의 얼굴이 기억났다. 이 댁의 주인인 김교무가 솔선해 양반 가문인 경주김씨 집안에서 대대로 종살이하던 노비들의 면천에 앞장섰기에 해월선생이 광제창생의 모범이라 하여 그를 취회에 모셔온 적이 있었다. 그의 진력으로 노비문서가 소각되고 면천된 자가 부지기수였던바 교주의 칭송이 자자했던 일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런 인연이 있었습니다그려. 다시 한번 면천을 베풀어주심에 감읍하옵니다.” “부끄럽습니다.” 둘이 한사코 만류하는데도 김교무가 안채에 기별을 넣어 저녁상을 보도록 일렀다. “누옥(陋屋)에 소찬(素饌)이라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불청객을 이리도 환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직 보은 땅에 민보군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은 없으니 야습 걱정은 않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하룻밤이라도 편안히 객고를 푸시기 바랍니다.” “거듭 감읍할 따름입니다. 기왕 말씀 나온 김에 한 가지 묻습니다. 우리는 보은이 객지인지라 이곳 사정에 밝지 못합니다. 혹여 꼭 알아두어야 할 인물이나 관군의 동태에 대해 알고 계신 바가 있으면 듣기를 청합니다.” “제 말씀보다는 보은에서 기포한 충경포(忠慶包)의 도인 한 사람을 알고 있으니 그를 만나 물으심이 빠를 듯합니다. 장내리에 당도하여 대도소에 연통을 넣으시면 쉬 만나실 수 있을 겝니다. 호협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름은 신재길이라 합니다.” 때마침 밥상이 들어왔다. 기름 찬 없는 푸성귀 밥상이었으나 방짜 며느리가 지은 듯 찰지고 오달진 저녁상이었다. 둘은 주인이 일러주는 이름을 새기며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삐뚜름하게 뜬 상현달이 조족등(照足燈) 되어 밤길을 비춰주었다. 사흘 후면 보름이다. 군사들은 벌써 객지에서의 곤궁함도 잊은 채 서둘러 저녁을 마친 후 탈곡한 볏단을 보료 삼아 논바닥에 펴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이천포 군은 보은 읍내를 멀리 돌아 장내리로 향했다. 장내리에는 동학군의 총 지휘소 역할을 하는 대도소가 마을 뒤 옥녀봉을 배경으로 서 있었고, 그 앞의 너른 공터에는 초막 사백여 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무리 터전이 넓다 해도 그곳에는 이미 충청, 경상, 강원도에서 온 동학군들로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천포는 급한 대로 청산 쪽으로 향하는 보천강 변의 논배미 몇 군데를 정해 야영지를 마련하는 한편, 그길로 이창진과 한규석은 수접주를 모시고 해월선생을 만나기 위해 대도소를 찾았다. 그러나 해월은 거기에 없었고, 접사나 서기, 집사 등의 직분을 맡은 교도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규석이 바쁜 일손을 막아 세워 신재길의 거동을 묻자 떠꺼머리 도동(道童) 하나가 길 안내를 자청하고 나섰다. “접주님을 만나시려면 저를 따라오시어요.” “신재길이라는 사람이 접주이신가?” “그렇사옵니다.” 아이를 따라간 곳은 대도소 뒤꼍의 싸리나무 사립문을 단 야트막한 초막이었다. 삼베적삼에 청색 전대(戰帶)를 두른 남자가 손에 쥔 총을 기름종이로 닦다 말고 일행이 들어서자 돌아섰다. 못 보던 총이었다. “소생이 신재길이오만 뉘신지요?” “초면에 실례가 많소이다. 이분은 경기도 이천의 수접주 어른이시고, 저희는 이천접의 접주와 접사의 직분을 맡고 있는 도인입니다.” 한규석이 같이 온 일행을 소개했다. 신재길이 황망히 총을 치우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 길 오셨습니다. 인사 여쭙니다. 보은 사는 신재길이라 하옵니다. 괴산에서 이천접의 전공이 눈부셨다 들었습니다.” “한울님이 도우셨지요.” “하온데 소생의 이름은 어찌 아셨는지요?” “오던 길에 학림리에서 유숙하였던 바 김교무라는 선비에게서 접주님의 고명을 들었습니다.” “고명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김교무 어르신이라면 제가 잘 압지요. 덕망이 높아 보은 땅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저를 면천해주신 분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한규석은 신재길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비를 면천해준 김교무도 대단하지만, 그런 신분의 사람을 접주로 임명한 해월선생의 파격적 인사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신분제를 타파하고 평등한 세상을 열고자 하는 그의 ‘다시 개벽’ 정신을 일깨워주는 산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예전에 노비였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재길 바로 이 사람이었다. 제 입으로 면천되었다고 밝히기 쉽지 않을 텐데 그는 거침없이 자기 신분을 말했다. 놀라기는 수접주도 마찬가지였는지 기름을 만져 손이 더럽다며 한사코 물러나는 신재길의 손을 붙잡고 마냥 흔들어댔다. 수접주가 신재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해월도 대단하고, 김교무도 대단하고, 신접주 당신도 대단하오.” 수접주의 칭송에 신재길이 눈 둘 곳을 몰라 뚜렷거리며 말했다. “혹여 제가 무슨 도울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초면에 너무 경황이 없었구려. 우선 해월선생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자 하는데 어디 가면 뵈올 수 있을까요?” 수접주의 말에 신접주가 잠시 대꾸를 미루다가 입을 뗐다. “저희도 선생님 종적은 모릅니다. 워낙 조심성이 많은 분이라 행차 말씀을 하지 않으시지요. 하오나 모레 이곳에서 출정을 위한 치성식(致誠式)이 열릴 예정이오니 아마 그때 뵈올 수 있을 겝니다.” “이틀이야 못 기다리겠소. 하오면 충경포의 수접주 어른은 뵈올 수 있는지요?” “마침 출타 중인데 곧 오신다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오시면 뵈올 수 있도록 말해놓겠습니다.” “감사하기 이를 데 없군요. 그런데 아까부터 손에 든 그것은 무엇이오?” 신접주가 기름종이에 싼 물건을 풀어 보여줬다. “이건 일본군이 메고 다니는 스나이더 소총입니다. 제가 소싯적부터 방포 놓는 것을 좋아해 화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속리산에 들어가 포수 노릇도 좀 했었구요. 이 총도 그래서 구한 것입니다. 그간 모아둔 병장기가 좀 있는데 구경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신접주가 몸을 돌려 초막 안을 가리켰다. 셋이 흔쾌히 그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에는 여러 겹 단을 쌓은 선반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많은 화포가 진열되어 있었다. 신접주가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주었다. “이것은 포의 일종으로 극려백포(克慮伯砲), 회선포(回旋砲), 불낭기포(佛狼機砲,) 대완기(大碗器), 천황포(天黃砲)라 부르는 대포이며, 저쪽은 궁시(弓矢)와 시석(矢石) 같은 활이나 화살, 죽창, 마름쇠입니다. 이 앞에 모아둔 것은 화승총이라 부르는 천보총과 조총입니다.” 셋은 생전 처음 보는 화포에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이만한 무기라면 천하라도 얻을 수 있겠습니다그려.” 수접주의 말에 수집품을 자랑할 겸 수긍할 법도 한데 신접주의 대답은 의외였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겉보기엔 대단해 보여도 대포는 무게가 무거워 기동이 불편하고, 화승총 역시 신식 양총에 비한다면 목총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동학군이 갖춘 무장이라고 해봐야 화승총이나 활과 창이 고작인데, 관군이나 일본군이 가진 총은 독일제 모젤 총, 영국에서 만든 스나이더 총, 최근에 일본에서 개발한 무라다 총입니다. 화승총과는 성능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차이가 나길래 그리 말씀하십니까?” 이창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한마디로 하늘과 땅 차이입지요. 토총(土銃)인 화승총은 유효사거리가 고작 일백 보 남짓인데 이런 양총(洋銃)은 일천 보가 넘고, 화승총은 비바람이 불면 심지에 불이 붙지 않아 쏠 수 없지만, 이 총은 총알을 뒤에서 집어넣어 쏘는 후장식(後裝式)이라 하등 날씨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파괴력도 출중해 황소의 대퇴골도 흔적 없이 부숴버릴 수 있다 하옵니다. 한마디로 토총 백으로 양총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다 합니다.” 수접주가 기가 막혀 물었다. “지금 들고 있는 총이 바로 그 양총이란 말이지요?” “저도 양총의 성능이 믿기지 않아 어렵게 한 자루를 구해 살펴보는 중입니다. 다른 것은 대충 알겠는데 이것 한 가지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습니다.” 신접주가 들고 있던 총을 세워 총구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수접주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재우쳐 물었다. “뭐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이 총구 안을 자세히 보십시오. 나선형으로 홈이 파인 것이 보이지요? 도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화승총은 전혀 이런 모양이 아닌데 말입니다.” 셋이 돌아가며 총구 안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총구 안에는 나선형의 줄이 여러 겹 새겨져 있어 오래 보고 있자니 눈알이 뱅글뱅글 돌았다. 아무리 궁리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신접주가 총을 선반에 얹으며 말했다. “나선형 줄을 새겼다는 것은 총알이 돌아나가도록 만들었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했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 총에 맞는 탄환이 있다면 한번 쏴보고 싶지만 그게 없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넷은 무거운 마음으로 초막을 나섰다. “접주의 말이 정 그렇다면 지난번 괴산전투에서는 어찌하여 우리 이천포가 양총을 든 일본군과 관군을 이겼다 생각하시오?” 이창진이 은근히 치밀어 올라오는 부아를 눅이며 묻자 신접주가 진작부터 속에 쟁여둔 생각인 듯 쉽게 대답했다. “일본군의 숫자에 비해 동학군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는 게 첫째 이유일 것이고, 둘째는 꽹과리와 징을 치며 달려드는 소리에 겁먹은 비루한 관군이 황급히 성을 비운 탓이겠지요.” 신접주는 속리산을 누비던 포수답게 앞서 말했던 이천포 군의 괴산전투 승리가 말치레 공치사였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창진이 괴산전투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던 동학군을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어찌 총을 당할 수 있겠소? 그렇다면 정녕 일본군을 이길 수 있는 방도는 없는 것이오?” “물론 방도야 있겠지요. 기습이나 매복으로 양총을 탈취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겠고, 산세를 이용해 불붙은 장태를 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오. 동학군은 지역 실정을 잘 아니까 천문지리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고. 하지만 문제는 총이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설령 총을 구한다 해도 탄환까지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이오. 화승총에 들어가는 납탄이야 저 같은 포수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이런 후장식 총의 탄환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셋은 신접주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막힌 속이 더욱 답답해짐을 느꼈다. 무기의 열세를 절감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도동이 달려와 보은 수접주의 도착 소식을 알렸다. 신접주가 뒤따르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레 있을 치성식에 오시는 해월선생께서 큰 비방을 내놓으실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천지신명이 돕고 한울님이 보살필 것입니다.” 넷은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보은 수접주를 만나기 위해 대도소로 향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
마포교구, 역촌동 어려운 이웃을 위해 라면 100상자 기부지난 12월 27일, 마포교구에서는 연말을 맞이하여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눔 캠페인을 펼쳤다. 이번 캠페인으로 나눔의 손길을 전하며 따뜻한 온정을 나누었다. 천도교 마포교구는 이날 11시 마포교구가 위치한 역촌동 주민센터 등 지역 사회의 여러 단체와 주민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겨울철 추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다. 특히, 라면은 간편하게 끓여 먹을 수 있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선물로, 이웃들에게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마포교구는 연말연시를 맞아 지역 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기 위해 이러한 캠페인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나눔의 실천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번 캠페인에 참여한 마포교구 교인들은 "작은 나눔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나눔 활동은 사람을 한울님처럼 존중하는 천도교의 정신을 넓게 펼치고 지역 사회와의 연대감을 높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데 힘을 보탰다. 라면 선물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나눔의 실천은 연말을 맞아 더욱 뜻깊은 시간을 선사하며, 앞으로도 지역 주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이번 캠페인에는 김산 도정, 장용덕 선도사, 김진순 마포교구장, 김정호 교화부장, 이정녀 여성회장, 이미희 경리부장 등이 함께했다. 지난해에는 쌀 50포를 전달하였으며 올해는 마포교구 교인들의 커피 성금과 연말을 맞이하여 모금한 성금을 전달했다. 김진순 마포교구장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하며, 직접 차로 이동하고 짐을 들고 나르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은 김 산 도정님과 이미희 경리부장님께 특별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마포교구가 지역사회에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방정환어린이도서관 ‘다시 열리는 한마당’ 잔치 열려지난 24일, 제127주년 인일기념식과 함께 수운회관 5층 천도교중앙도서관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려 대교당을 찾는 교인들에게 눈길을 끌었다. 이날 ‘방정환어린이도서관’ 재개관 홍보를 위한 '다시 열리는 한마당 잔치'는 <천도교인명대사전에서 ‘방정환’ 찾기>, <천도교 서울교구 작품 전시>, <천도교경전 한 구절로 서양 동화 읽기> 등으로 구성된 기념 전시와 도반과 함께 나누는 다과와 도담 등으로 이어졌다. 참가자들에게는 기념품으로 ‘방정환 친환경 물병’ 등을 증정하였다. 준비한 기념품은 조기에 소진될 정도로 많은 참가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는 후문이다. 이 행사에서 남연호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은 “천도교중앙도서관과 방정환어린이도서관을 역사적으로 소중한 동학∙천도교 자료 보존의 본분에 충실하며, 이를 바탕으로 스승님들의 위대한 가르침을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하는 한 방편으로 방정환어린이도서관을 집안의 ‘거실’이나 동네 ‘카페’처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개방하고자 한다.”고 설명하였다. 아울러 남연호 도서관장은 방정환어린이도서관에서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순수한 본성을 찾아 가꾸면서 양천주(養天主)를 실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날 참가한 일반시민 중 김순필 씨(서울)는 ‘동학 공부를 위해 앞으로 이곳을 많이 이용하겠다.’고 말하면서, ‘컴퓨터와 프린트기 등도 사용할 수 있어서 참으로 편리하겠다.’고 전망하였다. 한편 주영선 동덕(한강교구)은 도서관이 작지만 예쁜 북-카페라며, 앞으로 천도교인들이 마치 사랑방처럼 이용할 수 있는 마음 편한 장소라며 고무적으로 평가하였다. 한편, 도서관 사서로 재직 중인 강선녀 동덕은 ‘이날 행사를 통해 드러난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일반 시민이나 교인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앞으로 천도교중앙도서관은 어린이를 위한 교육, 경전 공부, 문화∙교양 프로그램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아울러 전문 연구자들을 위한 특별 연구실 개방∙운영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