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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어린이 시일식 봉행포덕 166년 1월 12일 온라인 어린이 시일식이 봉행되었다. 기존의 온라인 어린이 시일식은 낙안회에서 진행하였으나, 이번 온라인 시일식부터는 천도교 청년회에서 총괄을 맡아 진행하게 되었다. 이번 온라인 어린이시일식 집례는 서울교구의 김현용 어린이가 진행하였으며 경전봉독은 서울교구 김준용 어린이가 해월신사법설 <천지부모>를 봉독하였다. 네트워크 연결이 정확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두 어린이 모두 씩씩하고 바른 목소리로 집례와 경전봉독을 해냈다. 이후 설교는 청년회의 이재선 청년회장이 앞서 낭독한 천지부모에 이어, ‘천지부모를 통해 생각하는 어린이 마음’이라는 주제로 진행하였다. 온라인 시일식은 11시부터 11시 30분까지 봉행하였으며, 11시 30분부터 12시까지는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이 진행되었다. 이번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시간에는 천도교 대학생단 박현서 동덕이 <태양과 지구의 공전 모형 만들기>를 진행하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태양과 지구, 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한 설명에 이어, 어린이들이 직접 모형을 쉽게 만들 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모든 어린이들이 진중한 자세로 만들기에 참여하여, 과학 지식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이번 온라인 어린이 시일식은 천도교 어린이들이 신앙의 의미를 되새기고,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행사를 통해 어린이들이 천도교의 가르침을 배우고, 미래 세대로서의 역할을 다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진 및 기사제공 천도교대학생회) -
마포교구, 12월 22일 합동위령식 봉행마포교구는 지난해 12월 22일 합동위령식을 봉행하였다. 이날 시일식 후 봉행한 위령식에는 마포교구 교인들을 비롯한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이번 위령식은 환원하신 선대 어르신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덕신당 김진순 마포교구장은 "어려서부터 교당에서 아버님이신 창암 김창업 종법사님과 훌륭한 선열들 만나던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고 뵙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라고 소감을 밝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한편 이번 합동위령식에는 눈과 추위로 많은 분이 참석이 어려워 성금으로 마음을 표하였다. -
[칼럼] 세 번째 을사년 무엇을 해야 할까?포덕166년, 금년은 천도교가 이 땅에 태어난 지 세 번째 맞이하는 을사년이다. 금년의 을사년은 푸른 뱀의 해로 알려져 있고 지혜와 새로운 변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첫 번째 을사년(포덕 46년 1905년)과 두 번째 을사년(포덕106년 1965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자. 창도 후 첫 번째 을사년인 포덕46년(1905년)은 을사늑약이 있었던 해로서 한국사에서 매우 아프고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의해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는 시기이다. 을사늑약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면서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조정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무력과 협박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었다. 일본의 갖은 공작으로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천도교 교단 역시 이용구를 포함한 진보회의 친일성향으로 교단의 어려움이 매우 컸으나 이들을 출교시키고 포덕 46년(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하였다. 따라서 동학은 은도(隱道)의 시대를 벗어나 현도(顯道)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의암성사님은 국권회복을 위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여 기미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두 번째 을사년인 포덕106년(1965년)은 국가적으로 중흥을 하기 위하여 정부는 국가경제개발에 온 힘을 쏟아부은 때이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전격 체결되면서 논란도 많았다. 당시 100만 이상의 신도를 가진 천도교 중앙총부에서는 1965년 7월 13일 자 동아일보에서 '전국천도교인에게 고함'이라는 기사를 통하여 국가의 중요 사안인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입장을 내놓았다. 그 내용 일부를 보면 "앞으로 대일 자세에 있어 민족적 자립정신과 주체의식을 환기 함양함에 우리 천도교인이 국민의 선두에 서서 솔선수범하여 국민의 사표가 되자고 하였다". 또한, 모든 교인은 일심동체로 은인자중하여 초연한 자세로 이 난국을 타개하자고 호소하였다. 유일한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이 새 인간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격월간 발행을 시작하고 탑골공원 의암성사 동상 건립 기공식이 있었다. 묵암 신용구 교령님의 영도 아래 민족 종교로서의 자부심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필자가 청소년기에 성장한 남해는 천도교 왕국이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마을마다 가가호호 궁을기가 펄럭이고 주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두 번째 을사년으로부터 60년이 되는 오늘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권학가에서 “시운을 의논해도 일성일쇠 아닐런가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만은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라고 하였다.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온다는 대신사님 말씀대로 우리 교단도 동귀일체하여 성운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한 가지씩 해나가야 한다. 별다른 도리가 없다. 어려울 때일수록 미래를 위한 일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교단의 중의를 모아서 꼭 필요하고 실행 가능한 것부터 선택과 집중으로 한 가지씩 풀어나가자. 첫 번째와 두 번째 을사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두 번의 을사년 모두 일본과 관련되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던 해이다. 우리 경전 안심가에 “개 같은 왜적 놈”이라고 수운대신사님이 말씀하신 것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동학혁명 때 일본군은 우리 동학군을 얼마나 많이 학살 하였는가 일제 강점기 시절 얼마나 많이 천도교를 억압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잊지 말고 두 차례의 을사년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은 과학기술 패권 경쟁의 시대에 디지털 대전환, 기후 위기에 따른 에너지 대전환 및 예측 불허의 AI(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와 과학이 서로 마주보면서 세상 문제를 풀어나가고 삶의 질을 높여야 하는 데 천도교는 얼마만큼 이 분야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포덕의 문제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해법을 찾아보자. 해월신사님의 용시용활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 올해는 교단의 새로운 지도부가 탄생하는 해이니만큼 교인들의 기대 역시 크다. 이러한 막중한 일을 헤쳐나갈 수 있는 덕망 있는 분이 교단의 수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 울산시교구 이암 정의필(울산대 명예교수) -
천도교부산시교구여성회, 초량3동에 사랑의 성품 전달지난 16일 2025년도 설명절을 맞아 천도교 부산시교구(교구장 박차귀)와 천도교부산시교구여성회(회장 강선순)는 부산 동구(구청장 김진홍) 초량3동 관내 저소득층을 위한 양곡 10kg 40포(환가액 1,080천원)를 기탁했다고 밝혔다. 천도교부산시교구는 매해 명절마다 지역 내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지속적으로 성품을 지원해왔으며, 이번 기탁 역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박차귀 천도교부산시교구장은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라며 “앞으로도 어려운 이웃을 위한 지원을 꾸준히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초량3동 관계자는 “천도교부산시교구와 여성회의 변함없는 나눔 덕분에 관내 저소득층 주민들이 따뜻한 명절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며 “지역사회의 따뜻한 손길이 더 많은 이웃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기탁받은 성품은 관내 저소득 가정 등 어려운 주민들에게 신속히 전달하여 훈훈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기사 및 사진 제공 : 천도교부산시교구) -
포덕 166년 1월 19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불효자는 웁니다(선도사 준암 박인준) -
포덕 166년 1월 12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불망기본(선도사 정암 주선원) -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 춘암 박인호 상사 뜻 되새겨지난 1월 18일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제117주년 도일기념식을 봉행하였다. 이날 행사는 개식과 함께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경전 봉독(신앙통일과 규모일치), 천덕송 합창(제 13장 기념송, 제 31장 도일기념가), 기념사 등의 식순으로 이어졌으며 전국 각 교구에서도 같은 시각 일제히 기념식이 봉행되었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춘암 상사께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감내하면서 동학혁명 이후 해월신사와 의암성사를 도와 천도교 재건에 성심을 다했으며, 삼일운동 이후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교단의 극한상황 속에서 교인들에게 신앙심을 일깨우려 노력했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린이날을 제정했고,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펼칩니다. 이렇듯 춘암상사 시절 천도교는 현실 도피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개벽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우리는 실천궁행으로 대도를 수호하고 실천하신 춘암상사의 뜻을 잘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기념사에 이어 문화행사는 천도교대학생단 조영은 단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천도교 연합합창단 <샘>,의 '별', '아름다운 나라', 천도교대학생단의 '걱정말아요 그대', '나에게 난, 너에게 난', 삼경합창단의 '청산에 살리라', '참됨의 길'의 노래공연으로 뜻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춘암상사는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아 천도교의 제 4세 대도주가 되었다. 춘암상사는 동학혁명 당시 덕의대접주로 활약하였으며 의암성사의 지시로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으로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 동덕여학교(동덕여자대학교) 등 전국의 36여 개의 학교를 운영 및 지원하였다. 3.1독립운동 때는 48인 중 1인으로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을 지원하였고 특히 일제 말 멸왜기도를 실시하도록 밀명을 내렸다. 이처럼 항일 독립투쟁 의지를 불태우다 1940년 4월 3일 향년 86세로 환원하였다. 춘암 박인호 상사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기 념 사 국내외 동덕님,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가 되신지 117주년을 맞이하는 도일기념일입니다. 포덕49(1908)년 1월 18일 오전 11시, 의암성사께서는 천도교중앙총부 대도주실에서 이종훈·홍병기·오세창·권동진·오영창·양한묵 등을 비롯한 많은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심법을 춘암에게 전한다’는 <선수문>과 함께 대도주 종통 「선수식」을 거행했습니다. 또한, 승통 10주년이 되는 1918년에는 기념식을 마친 후 ‘이 대도주의 위통은 한울님이 대신사에게 전수하시던 동일한 심법이니 여러분은 그것을 믿으라’는 내용으로 <천도교월보> 2월호에 특필하도록 하는 한편, 삼일운동 전날에는 춘암상사에게 천도교 앞날을 당부하는 <유시문>을 내리십니다. 이처럼 의암성사께서는 춘암상사의 종통을 3회에 걸쳐 재차 확인하는 등 천도교 앞날에 대한 절실함이 춘암상사에게 있음을 확실히 하십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 전 5년(1855) 2월 1일 충남 덕산군 가야산 남쪽에 있는 막동리(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부친 박명구와 모친 온양 방씨 사이에서 탄생하십니다. 상사께서는 10세에 한학에 입문하시고, 후에 지가서와 의서를 공부하다가 중지하고 농사에 전념하시다가 동학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상사께서는 동학을 믿으면 ‘차별과 착취가 없는 평등한 세상에서 질병에 걸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9세 되던 포덕24(1883)년 3월 18일 목천에서 동경대전 간행을 준비하고 계시던 해월신사를 찾아가 입도하십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25(1884)년 8월 중순 해월신사의 명으로 의암성사와 함께 공주 가섭암에서 49일 기도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의관을 정제하고 어육주초를 끊고는 정성으로 수련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습니다. 독공하는 동안에는 잠이 깊이 들까 염려하여 낫자루를 베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서 주문 외우기를 10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하셨습니다. 상사께서는 독공 중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해월신사께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포덕에도 정성을 다하여 내포 지방에 입도하는 도인이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34(1893)년 2월 광화문복합상소에 의암성사를 비롯한 강시원 손천민 등과 함께 상경하여 봉소하시고, 3월 보은 장내리 취회에는 덕의대접주에 임명되어 내포 지역 동학도인들을 이끌고 <덕의포>라고 쓴 중기와 오색기 그리고 <척양척왜>라고 쓴 기치를 앞세우고 참가하십니다. 동학 교단은 1892년 삼례집회, 1893년 광화문복합상소·공주취회·보은취회 등 집회 횟수를 거듭하면서 2만여 명의 동학도인이 참여하는 등 분위기가 성숙해지자,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을 통해 안으로는 학정과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으며, 밖으로는 일제에 맞서는 등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춘암상사는 「천불변 도역불변(天不變 道亦不變)」이라는 깃발과 「척양척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깃발을 세우는 한편, 대장기에는 <덕의대접주 박인호>라고 쓰고 지휘하자 수만의 동학군이 외우는 시천주 주문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습니다. 포덕39(1898)년 1월 3일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와 함께 해월신사께 신년 문후를 드릴 때의 일입니다. 신사께서 흰 꿩 한 마리로 의암성사와 겸상을 차려 주면서 서로 일치(一致) 하라는 묵교(黙敎)를 내립니다. 묵교를 알아차린 상사께서는 식사를 마치고 바로 의관 정제하고 의암성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배례를 합니다. 그날 이후 의암성사 앞에서는 절대로 담배도 피우지 않고 평소에 농을 하던 말투도 높임말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포덕40(1899)년 3월 10일 의암성사께서 춘암(春菴)이란 도호를 주십니다. 이는 의암성사가 내린 첫 번째 도호이고, 교단 전체로는 삼암(三菴)에 이은 네 번째입니다. 그리고 포덕73(1932)년 교회에서 존호를 ‘상사(上師)’로 봉정했습니다. 포덕60(1919)년 삼일운동으로 의암성사와 춘암상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피체된 천도교인이 1,300여 명에 달했으며, 일경의 감시가 한층 심해지고 모든 부동산과 동산 사용을 금지당하는 등 교회 활동이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포덕61(1920)년 10월 31일 춘암상사께서 출옥하신 후 어려운 교회 상황 속에서도 다음 해 2월 28일 삼일운동 자금조달에 큰 역할을 하였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준공했습니다. 그해 12월에는 교회제도가 대헌에서 종헌으로 변경됨에 따라 대도주가 교주로 변경되어 포덕63(1922)년 1월 18일에 교주 취임식을 거행합니다. 같은 해 5월 19일 의암성사께서 순국하자 춘암상사는 주상으로 장례를 주관했습니다. 포덕77(1936)년 교회제도가 대헌으로 회복됨에 따라 교주에서 대도주로 복구된 다음 해인 포덕78(1937)년 12월 초 어느 날 밤 상사께서 비몽사몽간에 왜병들이 군화를 끌고 울면서 압록강을 건너 돌아오는 것을 보고 생각하시길 “조선이 독립할 징조로다. 급히 서둘러야 되겠구나”하고는 전국 교인들에게 멸왜기도운동을 밀명으로 내려 실시케 합니다. 그러나 멸왜기도운동이 황해도에서 발각되어 천도교인들 3백여 명이 검거되었고 춘암상사께서도 병상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81(1940)년 4월 3일 분열되었던 교회가 합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수동 자택에서 향년 86세로 환원했습니다. 4월 7일 오전 11시 대교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상여는 교당을 출발하여 오후 2시에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 묘지에 도착했습니다. 오후 3시에 하관을 했는데, 이때 「천도교제4세교주법종춘암상사박인호지묘」라고 최린이 친필로 쓴 지석(誌石)을 함께 묻었습니다. 이날 대교당을 출발하여 장지에 이를 때까지 유족들과 장의위원들을 포함한 1천여 명에 달하는 조문 행렬이 이어지며 성의(盛儀)의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대로 밀고 나가 완성을 보았다고 합니다. 특히, 의암성사의 명이 있으면 즉시 총부에서 실행하도록 했으며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의암성사께서는 평소 춘암상사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장벽을 향해서 말한 비밀은 새 나가도 춘암에게 말한 비밀은 새지 않는다” “춘암 대도주는 생각하는 것은 나만 못하지만 대도를 지키는 데는 내가 춘암만 못하다” “춘암은 밤에 만져 보아도 도(道) 덩어리이다” “내가 한강을 그대로 건너 걸어가라 하면 춘암 대도주는 서슴없이 걸어 들어간다”라고 할 정도로 의암성사의 춘암상사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의암성사와 춘암상사의 관계는 축성과 수성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축성이 아무리 잘 되어도 수성을 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동학혁명 이후 수십만 명의 희생을 내고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진 교단을 수습하여 천도교로 다시금 축성한 것이 의암성사라면, 이 축성된 교단을 성장시키고 수성한 것은 바로 춘암상사라고 하겠습니다. 포덕61(1920)년 이후 교회가 분열되었을 때도 누가 신파 구파에 대한 말을 하면 “자기의 주장과 다르다고 남을 비방하면 되겠는가! 그 시간이 있으면 주문을 더 생각하라”고 하며 어떤 경우에도 남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감내하면서 동학혁명 이후 해월신사와 의암성사를 도와 천도교 재건에 성심을 다했으며, 삼일운동 이후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교단의 극한상황 속에서 교인들에게 신앙심을 일깨우려 노력했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린이날을 제정했고,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펼칩니다. 이렇듯 춘암상사 시절 천도교는 현실 도피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개벽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우리는 실천궁행으로 대도를 수호하고 실천하신 춘암상사의 뜻을 잘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춘암상사께서 말씀하신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는 말씀은 인간사로만 생각할 수 있으나 천지운행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참을 지키면 한울님이 사랑하고 거짓되면 한울님이 미워하여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스승님을 숭배할지라도 스승님께 의뢰하지 말아야 하며, 앞으로 천도교가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우리는 참으로 도를 잘 닦아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지금 세계는 극도로 발달한 과학을 서로 화합하는 쪽으로 쓰기보다는 정쟁(政爭)의 도구로 사용하는가 하면, 아직도 전쟁을 일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거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무기 전쟁뿐만 아니라 무병지란(無兵之亂)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고 도덕은 사람 살리는 기틀입니다. 해월신사께서는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는 수도에 더욱더 힘써서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대신사께서는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라고 했습니다. 이는 때만 기다리기보다는 동귀일체로 하나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국내외 동덕님 여러분,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따라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 되었을 때, 천도교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목적인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진실로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루빨리 천심을 회복하여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 만들기를 심고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166(2025)년 1월 18일 천도교 교령 현암 윤석산 심고 -
포덕 166(2025)년 천도교여성회 합동 동계수련천도교여성회본부(회장 박징재)는 포덕 166년 1월 3일(금)~9일(목)까지 용담수도원에서 “일념재자(一念在玆)라야 만사여의(萬事如意)하리라”라는 주제로 전국여성 합동수련을 개최하는 것을 시작으로 새해를 맞았다. 서울인근 참가자들은 총부의 포덕버스를 빌려 타고, 남녘의 참가자 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경주 용담으로 모였다. 첫날은 반가운 인사로 한동안 유쾌한 소란에 이어 절도 있는 개강식과 짧은 일정을 마쳤다. 다음날은 새벽 수련 후 여명도 밝기 전 용담정에 올라 더듬더듬 돌길을 밟아 떠온 청수를 봉전하며 수운 대신사 영정에 다 같이 참례하였다. 혁암 김혁태 선도사의 이틀간의 강의가 수련의 불을 지폈다. 셋째 날은 특별히 태묘를 찾아 참례하고 대신사 생가를 다녀왔다. 넷째 날 현암 윤석산 교령이 방문하여 수련생들을 격려하고 특강을 하였다. 다섯, 여섯째 날은 무암 김종운 전 용담수도원장의 강의로 수련의 깊이를 더했다. 많은 숙덕어르신이 수련에 참가하였으며, 수도원 생활은 규칙과 질서가 잘 이루어지고 원활하며 여유가 있었다. 이번 수련은 9일 오전 6시 폐강식을 하고 모든 일정을 마쳤다. 수련생과 방문자 총 52명이 함께하였다. 수련생 대표 서울교구 자명당 방자명 동덕은 폐회식 답사에서 “우리 앞에 있는 선배님 자리를 이어가는 것이 우리 세대가 할 일인데 변화가 많은 이 시기에 ‘다시개벽’을 다짐하면서 을사년 올해도 여성회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 다짐한다.”라고 말하였다. -
1월 18일 제 117주년 도일기념일, 중앙대교당 및 전국교구 기념식오는 1월 18일은 춘암상사가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로 취임한 지 117주년이 되는 도일기념일이다. 춘암 박인호 상사(1855~1940)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덕산대접주로 승전곡전투와 신례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상해 임시정부 독립자금 지원, 갑진개화혁신운동 주도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어린이날 제정, 청년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지원한다. 정부는 1990년, 춘암 상사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08년 1월 18일, 의암성사는 천도교중앙총부 대도주실에서 이종훈, 홍병기, 오세창, 권동진 등 다수의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심법을 춘암에게 전한다’는 <선수문>과 함께 대도주 종통 <선수식>을 거행하여 춘암상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춘암상사는 포덕 전 5년(1855년) 충남 덕산군 막동리에서 출생하여, 1883년 해월신사를 찾아 동학에 입도한다. 이후 의암성사와 함께 공주 가섭암에서 49일 기도를 마친 후, 농사와 수련에 전념하며 동학 교리를 깊이 체득하였다. 춘암 상사는 해월신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내포 지방에 수천 명의 도인을 입도시키는 등 포덕에 힘썼다. 춘암상사는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 “천불변 도역불변”, “척양척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깃발 아래 수많은 동학군을 이끌었다. 동학혁명 후 교단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춘암 상사는 의암성사를 스승으로 모시며 교단 발전에 헌신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춘암 상사와 천도교 교인들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으며, 결국 독립자금모집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춘암상사는 출옥 후에도 6.10만세운동, 멸왜기도운동을 주도하고, 전국 천도교 교구를 중심으로 신간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등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춘암상사는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며, 신앙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 깊은 교훈을 남긴다. 오늘날 세계는 전쟁과 갈등, 무병지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 춘암상사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적, 정신적 기반으로써 실천궁행의 자세로 대도를 수호하며, 참된 신앙의 길을 걷게 한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기념식을 앞두고 “오늘날 세계는 전쟁과 갈등, 무병지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춘암상사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천심을 회복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라고 강조하며 교인들과 국민들의 동참을 독려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한마음 한뜻으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천심을 회복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해 주시기를 기원한다.”라고 밝혔다. 한편 포덕 166(2025)년 1월 18일(토) 11시 제117주년 도일기념일 기념식은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교구에서 일제히 봉행된다. 기념식은 ▲청수봉전▲주문3회병송▲경전봉독▲천덕송▲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기념식에 이어 도일기념 문화공연도 개최될 예정이다. -
십무천을 생각하며, 마음을 닦는 시간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처럼 하라는 ‘사인여천’이라는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야죠. 그런 믿음으로 나도, 상대방도 한울님이니까 그에 맞게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갔으면 합니다. 회장님 반갑습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첫 번째로 찾아뵙습니다. 포덕 163년 4월 1일부터 166년 3월 30일까지, 이렇게 3년 동안의 임기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회장님 임기 중에 여성회가 창립 100년 맞이를 하기도 했지요. 맡은 바 임무를 막중하게 느끼셨을 것 같아요. 여성회본부 회장을 맡으시면서는 소감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얼떨결에 회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 열흘 고심하다가 이 일은 한울님이 시키신 일인가 보다 하고 일을 맡기는 했는데, '여성회 100년'을 맞이한다는 책임감이 크게 밀려왔지요. 그러나 저는 실무진들을 믿었습니다. 우리 실무진들이 참 훌륭한 분들이라, 함께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모여서 100주년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어요. 저는 그저 선배님들이 지난 100년 동안 하신 역사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천도교여성회 100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기념사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어떤 일에 중점을 두고 하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 행사들이 있었지만, 천도교여성회 100년사 책을 출간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100년사 책을 내면서 여성회 각 지부사도 같이 작업을 했는데, 우선 100년사 책이 먼저 나왔어요. 말하자면, 우리 여성회가 걸어온 길을 책으로 써서 세상에 내놓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난관도 많았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심고를 드렸어요. 한울님이 다 도와주시더라고요. 우리 실무진들과 출판위원님의 도움으로 3월 25일, 우리 여성회 창립 기념일에 100년사 책을 배포했을 때 그때가 제일 뿌듯했죠. 책을 받아들고는 한울님 감사합니다, 그 말 밖에 안 나왔어요. 출판위원회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에서 애써주신 덕에 출판을 할 수 있었지요.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큽니다. 100년간 걸어온 길을 담아낸 귀중한 자료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100년이 지난 뒤에야 200년사 책으로 세상에 나오겠지요. 그 막중함을 가지고 작년 한 해 일해오셨어요. 그런데 100년사 출간하는 일 외에도 천도교여성회에서 주관하는 여러 사업들도 있잖아요. 기억에 남는 일이 몇 가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100년을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자체적인 세미나도 열었고, 또 그와 동시에 대신사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중앙총부와 함께 기념행사를 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신사, 대사모님 숭모비를 세운 일입니다. 수운 대신사님은 우리의 큰 스승님이신데, 사모님에 대한 공적도 후세에 남겨야겠죠. 대사모님께서 얼마나 고생 많이 하셨을까요?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를 세우자고 했을 때, 그때는 제가 회장을 맡은 첫해였어요. 추진위원회와 함께 숭모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중앙총부에서 협조해주신 덕에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숭모비로 쓸 돌을 찾으러 쫓아다닌 과정도 떠오르네요. 그 돌을 처음 보았을 때, 참 놀라웠어요. 그 돌은 어느 여신상이 환생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색깔도 참 아름답더라고요.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대신사님으로 인해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더 새롭게 세워졌고 그렇게 하신 업적에는 모든 일을 일생을 함께하신 사모님에 대한 공덕도 함께 인정해 드려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들이 아직은 좀 더딘 것 같이 느껴집니다. 특히나 여성회에서는 지난 100년간 여성의 인권 신장에 기여하는 종교의 역할을 해왔잖아요.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앞으로 천도교여성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AI 시대이고, 급변하는 시대잖아요. 제가 회장을 맡으면서 우리 실무진한테 진취적인 방법으로 소통과 믿음으로써 단합해서 지금까지 왔고 앞으로의 100년을 내다본다면, 급변하는 이 시대에 젊은 인재들이 많이 들어오셔서 여성회를 이끌어주면서 활성화해줄 것을 당부하고 싶어요. 우리 기성세대는 기계를 다루는 데 서툰 사람들도 많고 그런 것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들 잘하잖아요. 회의도 줌으로 진행하고요. 여성회에 젊은 세대가 들어오면 많은 변화를 가져오더군요. 그런 변화들이 지금의 여성회를 만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시대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성의 인권 신장에 있어서는 오히려 과거의 천도교여성회가 했던 역할들이 시대를 앞서가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선배님들이 그 어려운 시절에 정말 큰 일들을 하셨죠? 주옥경 사모님을 비롯한 우리 선배님들은 그 시대에 상상도 못 할 만큼 앞장서 나갔잖아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천도교가, 그리고 천도교여성회가 사회 전반적으로 해온 역할들이 있고 앞장서 나갔는데, 그 시절에는 그만한 인력이 됐었어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인력이 안 돼요. 사람이 없어요. 일을 할 사람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맞게 자기 일 하느라 바쁘고 교회 일을 우선적으로 할 수 없는 게 조금 아쉽더라고요. 회장님께서는 결혼하시면서 천도교에 입교하신 건가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오셨는지도 궁금해집니다. 결혼하면서는 교인이 되었지요. 결혼해서 처음에는 저도 시부모 모시고 애들 키워야 하니까 그 뒷바라지가 우선이었죠. 그리고 천도교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한 것은 우리 시아버님 환원하시면서였어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죠. 천도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이렇게 마음에 와닿으셨어요? 우리 친정집이 불교 집안인데 나는 천도교 집안으로 시집을 왔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아침, 저녁으로 청수를 모시고 그때는 촛불을 켜셨어요. 그게 무어라고는 말씀도 안 해주시고 혼자 방에서 하시길래 저게 뭔가, 그냥 어른이 하시는가 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시일마다 시부모님께서 우리 애들을 데리고 천도교에 다녀오시고, 그러시면서 제게는 교당에 나오라는 말씀은 한마디도 안 하셨어요. 내가 이 집 장남에게 시집을 왔고 이 집의 뼈대가 있는데, 맏며느리로서 뭔가 붙잡고 가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천도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렇게 천도교에 들어왔는데, 누가 끌어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한 6개월 그냥 남편 따라서 왔다 갔다만 했지요. 그러다가 내가 안 나가겠다고 했어요. 누가 아는 체도 안 하고 그냥 혼자 왔다 갔다 6개월을 하다 보니까 안 되겠다 싶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동덕님 한 분이 종학대학원에 다니지 않겠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나는 종학대학원이 천도교의 교리를 알아야만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들어가서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아무것도 모르고 와도 된다는 거예요. 열심히만 다니면 된다고요. 그렇게 2년 동안 참 열심히 다녔습니다. 한 1년은 도대체 저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수련을 가봐도 뭐가 뭔지 몰랐는데 그러다가 천도교가 이런 곳이구나, 수련이 이런 것이구나 깨우치게 되었어요. 나 혼자 이제 터득하고 느끼면서 다니다 보니까 어느덧 졸업을 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천도교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지만, 그저 나 나름대로 혼자서 알아간 것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마음에 남는 것은 수련하면서 제가 느낀 이치와 진리였습니다. 동경대전에 보면 ‘십무천’이라고 있지요? 한울님을 속이지 말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스승님의 가르침 열 가지가 딱 나와 있습니다. 처음엔 천도교의 교리가 참 쉽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의 오산인 걸 알았어요. 내가 몸이 몹시 괴롭고 안 좋았을 때 21일 수련하러 처음으로 법원수도원으로 들어갔어요. 시집와서 처음, 내 생전 처음으로 집 밖에서 생활해 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련 중에 ‘십무천’이라는 큰 글자를 보여주셨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여러 번 생각하고 책을 폈는데, 거기 그 가르침이 다 있는 거예요. 그때 나의 마음은, 내가 한울님을 참 우습게 생각했구나, 정말 잘못했다고, 죄송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내가 내 생활 속에서 한울님을 잘 모셔야겠다는 그 이념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여기에 조금 조심스러운 질문 하나 더 드리고 싶습니다. 결혼하시고 보니까 춘암 상사님의 집안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춘암 상사님의 후손으로서 바라볼 때, 춘암 상사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춘암 상사님은 일제강점기 때, ‘개 같은 왜적 놈’이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저에게 가장 크게 와닿는 말씀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 가르침입니다. 춘암 상사님은 참 과묵한 분이셨다고 해요. 시어머님이 가끔 춘암 상사님에 대해서 얘기해 주셨어요.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춘암 상사님은 참 과묵하시면서 집안을 포용하신 분이셨다고 해요. 그때는 참 어렵게 사셨잖아요. 집안의 온 가족을 다 포용하셨다는 말씀만 기억에 남네요. 춘암 상사님께서 살아오신 삶을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고요. 또 과묵함 속의 포용으로 직접 보여주신 것들이 대대손손으로 내려가는 유산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회장님께서는 손주분들한테는 어떤 걸 남겨주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남겨준다기보다는 내가 살아있는 한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 애들 키울 때 제가 애들한테 절대 거짓말하면 안 된다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우리 집 애들이 착해서 정말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그래서인지 우리 손주들도 보면 다 반듯합니다. 스승님 집안의 사람으로서 며느리로서 살아오셨고, 여성회본부 회장님으로서 활동하시는 데에 부담도 굉장히 크셨을 것 같아요. 제 마음은 항상 똑같았어요. 한결같이 내 마음만 순수하면 모든 게 통하지 않겠나, 또 동덕님들이 진심을 받아들이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했는데 그 마음을 알아줄 때는 참 기쁘죠. 이제 임기가 석 달 정도 남았는데요. 올해 여성회에서 계획하고 계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작년 3월 25일에 여성회 100년사 책을 발간했지만, 지부 100년사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올해는 각 지부사(史) 책이 완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해 총회 때는 출간될 예정입니다. 물론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큰 지부는 그래도 활성화돼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부들도 많고, 어르신들께서도 많이 환원하셨고요. 그 점에서 저의 바람은 우리 동덕님들께서 가정 포덕을 우선으로 신앙생활을 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1년에 네 번, 4대 스승님 기념식 날이라도 자녀들과 시일식에 함께하는 것부터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회장님께서 마음이 힘들 때 마음에 품으셨던 스승님 말씀을 소개해 주신다면, 어떤 말씀이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항상 십무천을 생각하면서 나 말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먼저 해보자 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런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큰 가르침이 될 것 같습니다. 삶의 우여곡절에 스승님 말씀에 기대어 의지할 수 있어서 든든한 마음입니다. 어렵지 않지만 행하기 힘든 것을 마음에 품고 행하려고 하는 게 종교인의 마음 자세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새해, 새 마음, 새 걸음 새해가 밝았다. 천도교 여성회가 지난 100년간 세상을 밝혀온 것은 한 사람, 열 사람, 천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걸어온 세월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중 한 사람, 박징재 여성회장의 소회를 들어보았다. 박징재 여성회장을 통해 100년을 끌고 온 사람들, ‘멋진 언니들’을 상상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