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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삼일절 기념식 열려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3월 1일 제 106주년 삼일절 기념식을 봉행한다. 삼일절을 맞아 1919년 민족의 독립을 위한 의지와 희생을 기억하고 모든 국민이 다시 한 번 나라의 독립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날 기념식은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교구에서 봉행된다. 개식-국민의례-청수봉전-심고-주문3회병송-독립선언서 낭독-천덕송 합창-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기념식 후 거리행진 및 의암성사 동상 참례(중앙대교당-탑골공원)가 이어진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삼일절 기념식을 앞두고 보도자료를 통해 “‘3·1대혁명’으로 순도순국(殉道殉國)하신 선열들의 영령 앞에 고개 숙여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선열들이 성령출세(性靈出世)하여 세계 평화와 국가 발전을 도와주시고, 교단의 앞길을 밝게 인도하여 주시기를 심고(心告)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3·1대혁명’의 위대한 정신을 올곧이 계승하여 분열과 혼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합과 상생발전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는 이번 삼일절 기념식을 통해 1919년 의암 손병희 성사님께서 이끄셨던 삼일운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기억하고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 엄혹한 일제탄압시기에 우리 민족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친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봉행하오니, 많은 분들이 참석하시어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교인 및 일반인들이 삼일절을 맞아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삼일절 기념식에 함께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서울교구, 포덕 166년 동계특별기도서울교구에서는 2월 10일부터 16일까지 '생활 속의 수도'를 목적으로 동계특별기도를 봉행한다. 이번 특별기도는 온, 오프라인으로 봉행하며 '서울교구 삼경방'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2월 10일부터 16일까지 '생활 속의 수도'를 목적으로 동계특별기도를 봉행한다. 온라인 기도식과 함께 서울교구 성화실에서도 특별기도를 봉행한다. 2월 10일(월)-14일(금) 오후 7시-8시 50분, 9시 저녁 기도식을 봉행하며, 2월 15일(토)-16일(시일) 오후 3시-5시에도 특별기도를 봉행한다. 많은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한다. -
해월신사 법설 : 천지이기 p.241 -
중편소설 <하얀 혁명>(6)(지난 호에 이어) 4. 후퇴 남접군과 북접군이 후퇴하여 집결한 곳은 논산이었다. 동학군은 우금치와 봉황산 전투에서 퇴각해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패인은 물론 무기의 열세였지만, 무리하게 고지 공격을 시도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수뇌부 회의 끝에 군사적 요충지가 될 만한 봉우리를 선점해 방어전을 펴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전략을 변경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공주 전투 이후 동학군의 약점을 파악한 관군과 일본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섰고,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가 논산으로 향했다는 첩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19대대는 오로지 동학군 궤멸만을 목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파견한 최정예부대로, 현역과 예비역 7년간의 병역을 마치고 다시 소집된 3개 중대 663명의 백전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식 소총에, 최신 군사정보와 작전지도는 물론, 군량과 탄환을 보급하는 병참대까지 대동하고 있었으며, 근대식 훈련과 숙련된 지휘관, 상명하복의 엄격한 군율로 다져진 부대였다. 이런 부대가 동학군을 섬멸하기 위해 3개 지대로 나누어 서울에서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학군이 19대대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건다는 건 자멸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다행히 공주 전투에서 다수의 양총과 탄환을 노획한 것이 있고, 군사 요충 고지를 선점해 양총 부대를 전면에 배치하여 방어한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동학군은 정예병 위주로 부대를 재편성해 연산평야와 논산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황산성(黃山城)에 진을 쳤다. 연산(連山)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져 있어 많은 수의 동학군이 포진하기 적당했고, 전방 개활지가 넓어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도 용이했다. 신식 양총으로 무장하고 고지를 선점한 동학군의 투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기와 군량의 부족에 더해 점점 추워지는 날씨였다. 두 달 넘게 외지로 다니며 전투를 벌여온 동학군의 입성은 처음 출진할 때 입었던 홑옷 차림 그대로였다. 두꺼운 방한복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겨울 날씨에 바람이 숭숭 새어드는 석새삼베 홑옷을 입고 전투를 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시련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천포는 한규석의 지휘 아래 화목을 장만하고, 대나무를 쪼개 엮은 발에 가랑잎과 마른 솔잎을 채워 넣은 장태를 만들었다. 화공(火攻)을 위한 준비였다. 장태 공격은 고지를 점령한 부대가 장태에 불을 붙여 산 아래로 굴리는 방식의 전통적 화공법이다. 투석전을 위해서도 바위를 깨뜨려 산더미처럼 돌멩이를 쌓았다. 진영도 백병전을 고려해 1열은 양총 부대, 2열은 화승총 부대, 3열은 장태와 투석전 부대로 재편성하고 기동훈련도 마쳤다. 드디어 관군과 일본군의 선공으로 연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창진 수접주는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데도 전날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가 왔다며 힘차게 독전기를 흔들었다. 본진의 신호가 떨어지자 이에 응답하는 깃발의 펄럭임과 함성이 연산 일대의 산과 들녘에 울려 퍼지며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쳤다. 적군은 동학군의 기세와 저지대의 불리함을 간파했는지 정면을 버리고 측면과 후사면으로 파고들었다. 뜻하지 않은 전선의 변경에 따라 접전 면적이 넓어졌으나 부족한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전선을 이동하지 않고 선점한 고지를 고수한 채 적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였다. 눈이 와서 미끄러우면 고지를 점령한 동학군에게는 문제가 없으나 산을 타고 올라야 하는 적군에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차츰 굵어지는 눈발 속에 양 진영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치를 이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눈이 그치지 않자 다급해진 쪽은 관군과 일본군이었다. 먼 거리를 우회해 돌아오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했고, 강설을 핑계로 총 한 방 못 쏴보고 후퇴한다는 것은 백전노장 후비보병 19대대의 위신을 깎는 일이었다. 이윽고 산정을 향해 올라오는 움직임이 보였다. 적병의 복장이 확연히 구별되는 거리까지 좁혀졌다. 자세히 보니 관군과 일본군이 별개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군 지휘관 뒤에 색동옷을 입은 관군 여럿이 따르는 형국이었다. 일본군이 지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조선 관군은 지휘권도 빼앗긴 채 일본군 꽁무니나 따르며 제 나라 백성인 동학군을 죽이러 다가오는 것이었다. 대열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1열 양총 부대의 사격을 시작으로 2열의 화승총 부대가 번갈아가며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동학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적군의 대열이 횡으로 움직이며 넓게 퍼지는 게 보였다. 대열이 흩어짐에 따라 화망도 넓어졌다. 동학군의 집중사격 효과를 반감시키고 허투루 쏘는 실탄의 사용량을 늘리려는 계략이었다. 적군이 굵은 나무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서서히 반격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인 적설이 유탄에 맞아 흩어지며 동학군을 향해 조여오기 시작했다. 똑같은 빈도의 사격이라도 동학군은 언 발에 오줌 누기였고, 한 번을 쏴도 연발로 긁어대는 적군의 총격은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맹렬했다. 실탄 보유량의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전황은 동학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열의 양총부대 사격이 끝나고 2열의 화승총 부대가 사격을 준비하는 동안 일본군 지휘관이 외치는 돌격 명령 소리는 총성 못지않게 매섭고 날카로웠다. 일본군은 화승총을 겁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날리는 눈발에 심지가 꺼지면서 격발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접전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고, 양측의 거리는 더욱 좁혀졌다. 동학군의 실탄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창진 수접주가 승부수를 띄웠다. “장태에 불을 붙여라.” 한규석이 지휘하는 장태꾼이 일제히 달려들어 불붙은 나무막대를 장태에 찔러넣었다. “장태를 굴려라.” 장태가 불살을 튕기며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때아닌 화공에 놀라 도망치는 적군을 향해 남은 총알 전부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장태는 한번 구르고 지나가면 그만이었고, 총알이 다한 총은 헌 나무막대기에 불과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돌멩이를 던지고 바위를 굴렸다. 그것도 곧 바닥이 드러났다. 무기가 동나자 관군과 일본군이 물밀듯 들이닥쳤다. 사생결단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낫과 창을 든 동학군과 소총과 기관총을 든 일본군과의 비대칭 전투가 연산 일대의 산봉우리에서 피를 튀겼다. 싸움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낳았다. 동학군은 살기 위해 싸웠고, 관군과 일본군은 죽이기 위해 싸웠다. 전장은 차츰 흰 눈과 붉은 피로 칠갑한 무간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장태로 불붙은 연꽃 산봉우리는 희고 붉은 반점을 뿌린 선계(仙界)처럼 영롱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총 맞아 죽어가는 동학군의 비명과 피눈물이 범벅된 연옥(煉獄)의 불구덩이였다. 연산의 산맥이 무너지고 피바다의 해일이 밀려왔다. 공수의 위치가 바뀌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동학군은 산 아래로 떠밀려 내려갔다. 무기가 동나서 고지를 지킬 수도 없었지만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한규석은 한사코 후퇴하지 않겠다는 이창진의 독전기를 빼앗아 짚고 그를 업은 채 산에서 내려왔다. 반 이상 줄어든 패잔의 대열은 피투성이 옷을 육단처럼 걸쳐 입고 눈보라 속 밤길을 걸어 논산으로 향했다. 연산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동학군은 논산에 재집결했으나 다시 기병치 못하고 추격을 피해 전라도 지경으로 후퇴해 내려갔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삼례를 지나 전주, 원평, 태인까지 내려갔다가 북접군은 정읍에서 남접군과 헤어져 장성, 담양, 순창을 지나 충청도로 방향을 틀었다. 낯선 전라도보다는 보은 대도소가 있는 충청도로 가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추위에 지치고 길은 험해도 타향에서 낙오되면 끝장이란 생각에 북접군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여 임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만났다. 해월은 청산 기포령 이후 북접군과 동행하지 않고 충청도에 남아 있다가 관군의 추적을 피해 전라도 임실에 은거하고 있었다. 동학교의 정신적 지주인 해월을 만나자 북접군은 사지에서 손오공을 만난 듯 기뻐했다. “내가 불민하여 통령을 이토록 고생시켰소.” 해월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북접군을 이끌고 나타난 손병희를 보자 칠순을 바라보는 노구임에도 눈물을 흩뿌렸다. “친명(親命)을 완수치 못하고 살아 있음이 수치일 따름입니다.” “솔병에 익숙한 영장(營將)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승전만을 바라겠소?” “스승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꿈만 같습니다. 한울님이 우릴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손병희 통령이 해월에게 청수를 봉전하고, 그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전한 후 곤궁한 상황을 고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의복이옵니다. 동장군의 횡포 앞에 동사하는 군사가 부지기수이옵니다.”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도 예사롭지 않다 들었소.” “다행히 일본 후비보병은 남접군을 뒤쫓아 광주와 나주로 내려갔고, 관군인 장위영 병대와 경리청군 역시 남원으로 직행해 들어가 우리가 임실로 향한 것은 모르는 듯하옵니다.” “앞으로의 방향은 어찌 정하였소?” “일본군은 물론이고, 당장 관군과 조우하게 되면 패전은 불 보듯 뻔합니다. 일단은 종적을 숨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허면?” “무진장(茂朱, 鎭安, 長水) 쪽으로 은밀히 움직여 영동으로 가려 하옵니다.” “그곳은 천하의 험지가 아니오?” “허를 찌르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런 험로를 택하리라곤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여기서 장수까지는 멀지 않으니 그곳 관아를 기습하고 장터를 점거하면 다소간 행렬을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민폐는 없어야 하오. 우리가 기포한 이유가 만백성을 한울님으로 모시고자 함이거늘 민가를 핍박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도인들을 단단히 타일러 스승님의 심려를 덜겠습니다.” “군사 중에 무뢰배 부랑자도 다수 끼어 있다 들었소. 그런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 장차 동학군 전부를 죽이는 화근이 될 것이오.” “난민(亂民)이 전혀 없지는 않사오나 군율로 엄히 다스려 낭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수도(修道)가 얕으면 정병(精兵)으로 거듭나기 어려운 법.”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북접군은 해월을 만나자 그동안 겪었던 풍찬노숙도 잊은 채 무진장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줄기를 넘어 장수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예상은 적중했다. 장수는 동학군의 위세가 강성했을 당시 남접의 김개남 군이 지나갔던 곳으로 이곳 관원들은 그때의 여얼(餘孼)을 다시 입을까 두려워 북접군이 나타나자 한두 합 만에 영관, 교졸 할 것 없이 무기를 팽개치고 줄행랑치기 바빴다. 영읍(營邑)이 크지 않아 물산이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향리와 포교로 조직된 민보군까지 패퇴시켜 얻은 무장과, 관아에 쌓아둔 대동목, 전세목(田稅木)을 수습해 추위로 얼어붙은 손발을 동여매고 다음 목적지인 무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충천했다. 교주인 해월이 앞장서니 동학의 부적만 몸에 지녀도 총알이 피해간다는 속설이 꼭 들어맞는다며 자청해 입도하는 농민들이 늘어나 군세는 배로 불어났다. 전투 경험이 쌓이자 행군 도중 길목을 막아서는 민보군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전진을 이어갔다. 북접군은 무주 초입의 설천(雪川)과 월전(月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전라도 땅을 벗어나 충청도 땅 영동으로 짓쳐 들어갔다. 충청도에 들어서자 고향에 돌아온 듯 마음이 푸근해졌다. 살을 에는 추위가 연일 엄습했어도 들리는 사투리가 익숙하고 정겨워 누구를 만나도 고향 친구인 듯 반가웠다. 더욱이 영동은 동학도가 태반인 곳으로 이들이 전해주는 첩보를 통해 일본군이나 관군과 조우하지 않고도 적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영동의 사정도 그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민보군이 조직되어 북접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민보군은 주로 양반 사족이나 향리, 지방 수령을 중심으로 지주나 마름, 소작인을 모아 조직한 민병대이다. 이들은 원래 지금은 동학군이 된 농민과 한 동리에 살던 이웃이었으나, 전래적으로 누려왔던 기득권을 빼앗길 거라는 위기감 때문에 동학군과 맞서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전에 동복 천 벌을 내놓은 영동의 이용직이었다. 그가 민보군을 조직해 전에 당했던 치욕을 갚으려 벼르고 있었다. 민보군의 전투력은 대단치 않았어도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위험의 소지는 충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어제의 이웃이 오늘은 원수가 되어 싸운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싸움의 결과는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이 나라 백성 모두가 공멸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뜻했다. 게다가 동학군이 상대해야 할 적이 일본군, 관군에 이어 민보군까지 가세해 셋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정녕 처음 기포할 당시 우려했던 일들이 미상불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북접군은 영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황간(黃澗) 관아를 기습해 무기와 광목, 공전(公錢)을 전취하고 용산(龍山) 장터에 진을 쳤다. 기포령 이후 처음으로 사람 냄새 풍기는 마을에서의 주둔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방에서 몰려드는 관군과 민보군의 도착 소식에 북접군은 장터 뒷산인 용산으로 들어가 산마루에 진을 쳤다. 용산은 두 마리 용이 맞대어 엎드려 물을 마시는 형상으로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골짜기가 깊어 수비하기에 용이한 지형이었다. 그간의 전투를 통해 산정을 점령하는 것이 승리의 첩경임을 잘 아는 북접군으로서는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능선 너머 천관산 밤재를 지나면 동학군의 은거지인 청산 문바위골이 자리하고 있어 용산은 고향마을 앞산처럼 포근하고 아늑했다. 북접군은 본진을 산정에 두고 산 아래로 매복을 보내 연산 전투에서의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었다. 만일 일본군이 관군과 합류해 있다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정면을 피해 측면이나 후방에서 공격해올 것이기에 사방의 경계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적군은 골안개가 자욱한 새벽, 북접군이 포진하고 있는 산정을 향해 정면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무리 북접군의 무장이 빈약하다 해도 지세가 불리한 정면을 치고 올라올 리는 없었다. 전략에 익숙한 일본군이 합세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확실했다. 북접군은 산 중턱에 매복병을 은신시켜 두었다가 골짜기 깊숙이 전진해 들어온 적군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고 쏘아대는 적군의 총소리가 어지러웠으나 북접군은 매복과 기습을 반복하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안개가 걷히자 과연 누런 옷의 일본군은 보이지 않았고, 청황색의 관복을 입은 관군과 구구 각색 복장의 민보군뿐이었다. 매복병의 공격이 뜸해지자 적군이 우세한 무기를 믿고 빠르게 전진해 들어왔다. 매복병이 골짜기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매복이 사라지자 적군은 진영을 남북으로 나누어 산정을 향해 협공해 들어왔다. 그러나 황간 전투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고 산정에서 내리쏘는 북접군의 반격 앞에 적군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른 북접군이 철성을 치며 청산 방향으로 패주하는 적군을 쫓아 북상을 서둘렀다. 북접군은 오랜만에 맛보는 승전의 통쾌함에 취해 천관산 밤재를 한달음에 치달아 올라 문바위골로 진격해 들어갔다. 밤재를 넘어 길게 내리뻗은 골짜기에 들어섰으나 적군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터럭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 굽이를 돌아서자 멀리 동학군이 은거하며 정병 훈련에 여념 없었던 훈련장이 나타났고, 맞은편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 만든 초막이 보였다. 북접군은 오랜 타향살이에서 돌아와 고향 들머리에 서서 살던 집을 내려다보는 감회에 젖었다. 기포령이 발한 지 실로 삼 개월여 만에 찾은 한겨울의 귀소였다. 마침내 훈련장에 당도했다. 눈 쌓인 훈련장에는 토끼와 고라니, 살쾡이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골바람이 해찰하는 학승(學僧)처럼 언 눈밭을 비질하고 있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
[칼럼] 환하고 맑은 의식 일깨우기오늘 <깨어남의 새벽> 수련 때였다. 늘 하듯이 ‘몸 깨우기’를 10여 분 동안 했다. 잠시 숨 명상을 하고 나서 마음 깨우기를 해 보자고 했다. 수련생 한 분께 마음 깨우는 말씀 한마디를 부탁했다. 그분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딱 한 줄의 명언을 소개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이는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가 한 말로 그의 대표작인 《대낮의 악마》에 나온다. 주체적인 삶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삶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운명을 창조해 나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좋은 말이지만 그렇게 살기가 쉽지는 않다. 번뇌의 실타래로 엉겨드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둘려 사는 때가 많다. 다른 수련생에게 물었다. “오늘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살아가시렵니까”라고. 그 수련생 역시 오래 걸리지 않고 대답했다. “밝고 맑고 향기 나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밝고 맑고 향기로운 생각.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산다는 건 아름답다. 우리의 생각과 의식은 환경과 존재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반대로 환경과 조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 과정은 개인의 습관이나 집단 내 관습에 따라 이뤄질 때가 많다. 습관과 관습의 엄청난 힘! 그래서다. 하루를 밝고, 맑고, 향기롭게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 역시 쉽지는 않다. 또 다른 수련생에게 의견을 구했다. “어떻게 하면 매 순간을 밝고 맑고 향기롭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알려 주세요”라고. 그분은 말했다. “모든 것에 대해 ‘고맙습니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한 적이 있는데 그랬더니 맑아지고 환해지는 걸 알았습니다.”라고. 우리는 모두 온라인 영상으로 명상 음악을 공유하며 오늘 하루 예정된 일정을 한 시간 단위로 나누어 가며 시간대별로 주변 환경과 대상을 떠올리며 “감사합니다”를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작은 소리로 합송하는 시간도 가졌다. 나뿐 아니라 소통하는 모든 대상과 밝고 맑고 향기로운 기운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 내가 10년 이상 모으고 있는 공공장소에서의 표어와 안내방송을 몇 개 살펴보자. 알게 모르게 사람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들이라 모아보는 중이다. 대전 어느 식당에서다. 들어서는 입구 신발장에 “신발 분실 시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붉은 글씨가 큰 아크릴판에 새겨져 있었다. 당신 신발은 당신이 책임지라는 것으로 읽힌다. 그 글씨를 보니 신발을 신발장에 넣는 거로는 안심할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신발을 벗어들고 들어가라는 것인지 판단이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밥을 다 먹고 나오면서 주인께 말했다. “신발은 신발장에 잘 챙겨두세요” 정도로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주인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쓴 거 아니다. 업체에서 갖다주는 거 붙였다”라고. 경북 구미 근처 철도 건널목에서 본 표어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당신도 언젠가는 건널목 사고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였다. 군부대 철망에서나 보는 “접근하면 발포한다” 수준이다. 작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포고문 5항에 ‘의료 현장을 이탈하는 전공의를 처단한다’라는 위협에 버금간다. 서울 지하철을 탈 때는 다른 지역 지하철과 달리 노인 우대 무료 표를 받으려면 신분증을 넣고 보증금 500원을 넣어야 한다. 지하철을 나올 때는 반환기에 표를 넣어 500원을 돌려받는다. 다른 지역은 모두 신분만 확인하면 보증금 수납 없이 탈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고 서울 지하철 무료 표 발급기의 안내말에 대해서다. 노인 우대 화면을 누르면 “신분증을 투입해 주세요”, “확인되었으니 수거해 주세요” 등의 안내말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에 굳어진 관용어들이다. 한자어와 지시어에 익숙한 관료사회의 오랜 관습이 묻어난다. 서울 시내버스 안에서 본 ‘안전사고 예방 수칙’은 이렇다. <1. 버스가 완전히 정차하기 전에는 자리에 착석 해 있거나 이동하지 말 것. 2. 버스 안에서 서 있거나 버스 승·하차 시 휴대전화 사용 중지>. 명령 분위기의 안내문이다. 맞춤법도 많이 틀렸다. 외래어를 함부로 쓰는 것에 대해 다시 말하기는 부질없어 보인다. 공공언론에서 심하고 전파력이 높다. 노록 악수(딴청 악수-엉뚱한데 보면서 악수를 건성으로 하기), 리질리언스(회복력), 플로티 건물(다리발 건물), 블랙 컨슈머(악성 고객) 등 사전을 뒤져야 겨우 아는 신종 외래어가 판을 친다. 알게 모르게 사대주의와 외국(미국) 숭배 의식을 부추긴다. 코로나 시대에는 “마스크 착용 후 승차 요망”이라는 표어가 버스 타는 곳 입구에 붙어 있기도 했다. “마스크 쓰고 타세요”라고 하면 좋았을 것이다. 역시 코로나 때 식당에서 본 안내문이었다. “식사 전후 마스크 착용. 식사 시 대화 자제”였는데 “말을 조심하시고 밥 안 드실 때는 마스크를 써 주세요”라고 하면 밥맛도 좋지 않겠는가. 유명한 전기밥솥 안내말도 “취사가 종료되었습니다”로 하기보다 “밥이 다 됐네요. 맛있게 드세요”라고 하면 어떨까? 시외버스나 고속버스가 출발할 때 안내말도 그렇다.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세요”라 아니라 “안전띠를 매 주세요”라고 말이다. 나는 틈틈이 해당 기관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거나 전화로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반응은 대부분 “내 소관이 아니다”라거나 “검토하겠다”라는 자동응답기 같은 답이 대부분이다. 봄에 산 입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표어가 있다. “불법 입목벌채 임산물의 굴취·채취는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74조 제1호 규정에 의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함”이라는 경고문이다. 작년에 어느 산 입구에서 반가운 표어를 보았다. “주인의 동의 없이는 산나물이나 산 약초를 캐 가면 안 됩니다. 허락 없이 산채, 약초, 녹비, 나무 열매, 버섯, 덩굴류 등을 따거나 캐서 가져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였다. 아래 표어는 호남고속도로 상행선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봤다. “깨끗해서 참 좋죠? 쓰레기 되가져 가니까”였다. 생각은 느낌과 감정에서 싹을 틔운다. 생각은 행동의 뿌리다. 서울 지하철 어느 역에서였다. 대부분 “우측보행”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오른쪽 걷기”라고 되어 있었다. 반가웠다. 고마웠다. 기분이 밝고 환해졌다. 밝고 맑고 향기 나는 느낌이었다. <깨어남의 새벽>수련을 마치면서 “아이구우 좋아라....하하하하”라고 했다. 오늘 하루를 꾸려가는 환하고 밝은 느낌을 듬뿍 만들었다. 글 목암 전희식('마음치유 농장’대표) -
마음공부 - 수련의 최종 목적마음공부 즉, 수련의 최종 목적을 각 개인이 모신 한울님과 하나되어 영원한 행복을 얻는 개인적 목적과, 이를 기반으로 모든 사람이 서로 한울님으로 대하면서, 한울님 이치와 본성에 맞는 정치.경제 제도를 마련하여 다함께 행복한 세상을 실현하는 사회적 목적의 2가지로 구분하여 차분히 정리한다 -
포덕 166년 2월 9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동귀일체 회장 원암 김창석 "물의 덕"설교 : 물의 덕(동귀일체 회장 원암 김창석) -
한글서체 <수운용담체>, 전통과 현대의 만남으로 탄생하다2월 2일 천도교 동두천교구는 첫 시일식에서 그동안 논의해 왔던 수운용담체 만들기를 공식화했다. '수운용담체 만들기'는 천도교경전인 『용담유사』의 글씨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용담유사 서체'를 새롭게 개발하는 것이다. 동두천교구의 연암 강정환교구장은 2024년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사업 중 기념 전시회에서 공개된 순우리말로 된 용담유사 1883년 목판본을 직관하고, 그 담백한 아름다움을 널리 알려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때마침 수운회관과 천도교중앙대교당 현판 글씨를 교체하며 새로운 현판의 글자를 용담유사에서 집자하여 만든 것을 보고 이러한 프로젝트에 박자를 기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소파방정환 색동도서관”(대표 연암 강정환)에서 주최하며 천도교 대동교구, 동두천 교구의 후원, 천도교 지방교구 및 교인, 일반 시민의 성금으로 제작되어 2025년 4월 5일 천일기념식에 천도교중앙총부로 기증할 계획이다. 이번 <수운용담체>는 전통 서체를 디지털화하여 현대적인 감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전망이다. 『용담유사』는 동학의 제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한글로 기록한 경전으로, 조선 후기의 한글 서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디지털화가 되어 있지 않아 활용이 어려웠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용담유사』에서 보이는 독창적인 서체의 특징을 분석하고, 현대적 디자인 요소를 가미하여 가독성을 높인 디지털 폰트로 제작할 예정이다. 강정환 동두천교구장은 “142년 전 용담유사 목판본 순우리말 한글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아름다운 한글을 살릴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최근 지방자치단체나 대기업에서 자비로 한글 서체를 만들어 홍보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결국 우리 천도교도 한글전용 서체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스승님의 가르침이 담긴 용담유사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중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용담유사 서체는 출판, 디자인, 웹, 모바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되며,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이번 개발이 전통 한글 서체의 현대적 활용 가능성을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강교구장은 “최종결과물로는 <수운용담본체>, <수운용담각체>, <수운용담영문체> 등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자연스럽게 수운 최제우 대신사와 동학, 천도교를 알 수 있도록 이해를 돕고 한글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들도 동학과 천도교를 쉽게 만날 수 있게 하고자 한다.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많은 교인들의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사진 및 자료 제공 : 천도교동두천교구 -
한강교구, 새해 첫 시일에 입교식 봉행포덕 166년 1월 5일 한강교구(교구장 주용수)에서는 시일식 후 단암 이문상 사회문화부장의 집례로 신입교인 임완영, 조진학 동덕의 입교식을 봉행하였다. 임완영 동덕은 오랜 교직 생활을 후 은퇴하였고, 조진학 동덕은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평소 천도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정암 주선원 선도사의 포덕으로 입교하였다. 신입교인들은 한울님의 뜻과 스승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참된 교인이 되기로 다짐하였고, 한강교구 교인들은 새해 첫 시일을 맞이하며 입교한 동덕을 축하하며 교구와 교단 발전의 밝은 앞날을 기대하였다. (글,사진 한강교구 주영선 제공) -
[칼럼] 대신사의 민중이 역사를 만든다12.3 내란 사태는 수괴의 구속으로 어느 정도 정리되고 있지만, 아직도 그를 추종하고 이용하려는 극우 세력에 의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긴 역사의 안목으로 볼 때 금번 내란사태의 최종적인 결론은 시간문제일 뿐 곧 해결되고 다시금 출발하는 희망의 대한민국 사회가 열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그 해결 과정에서 엄격한 법 적용으로 시시비비를 가려 반드시 그 책임자들을 경중에 따라 엄벌함으로써 다시는 이 땅에서 문민통치가 훼손되는 일은 없게 하여야 한다. 여하튼 이번 사태를 보면서 드는 감회가 천도교인으로서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2024년 12월 3일 한밤중의 거짓말 같은 비상계엄이 발동되자 시민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갔다. 불법적이고 부당한 계엄 선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국가 기구는 오직 국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국회 앞에는 사람들이 모였고 국회의원의 입장을 막는 군과 경찰을 질타했다. 역사 앞에서 죄인이 되지 말라고. 심지어 어떤 용감한 시민은 돌진하는 군 장갑차 앞을 막아섰다. 마치 1989년의 중국 천안문 사태에서 탱크 앞을 홀로 막아선 이름 없는 대학생처럼. 달려온 일반 시민들 덕분에 2시간 48분 만에 국회 의결로 비상계엄은 해제되었다. 귀대하는 어느 군인은 시민들에게 죄송하다며 인사를 하고 떠나기도 했다. 12월 22일은 남태령에서 서울 시내로 향하던 농민들은 경찰 차벽에 막혔다. 농민들만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저곡가 정책에 대한 항의였고 그들이 붙인 이름은 ‘전봉준 투쟁단’이었다.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 농민의 절규가 이 시대에도 여전함을 상징하는 호칭 같아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러나 이들 앞을 막아선 경찰은 연신 돌아가라고 경고했고 농민들 앞에는 물대포 등 진압 장비가 쌓여 있었다. 예년처럼 힘없는 농민들은 진압 직전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여의도에 모여 대통령 탄핵을 외치던 응원봉 부대(?)가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민주화 운동에 젊은 시절을 바쳤던 부모세대의 고마움을 느낀 평범한 대학생과 시민들이었다. 삽시간에 남태령 고개는 인파로 넘쳤고, 거리 때문에 또는 다음날 출근 때문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핫팩에서부터 따듯한 커피에 어묵 그리고 김밥까지를 선결제해 주었다. 감동적인 모습은 난방버스의 등장이었다. 동짓달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라며 함께 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버스를 통째로 임대해 보내준 것이다, 결국 밤을 새운 농민들에게 다음날 경찰은 차벽을 물리고 시내 진입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30년 만의 서울로 진입한 농민들이었다. 이를 일러 우리는 남태령 대첩이라고 명명했다. 윤석열을 체포하라는 한남동의 시위에도 어김없이 시민들이 등장했다. 체포 찬반 시민들의 시위였지만, 반대파의 시민들은 이미 참여 수에서도 그리고 시위 수준과 진정성, 구호와 청결 등 도덕성에서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연일 강추위에 눈까지 내렸지만, 찬성 시위대는 밤새길 수일 째였다. 눈 내린 새벽에 은박 담요를 뒤집어쓰고 버텨낸 시민의 모습을 보고 언론은 은박지에 싸인 작은 초콜릿 ‘키세스’에 비유해 ‘키세스단’이라고 불러 주었다.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름다운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누구인가? 국가로부터 단 한 푼도 받지 않았고 아니 받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세금 내서 국가를 지켜온 평범한 국민이다. 그들은 빽도, 힘도 없고 남을 괴롭힐 줄도 모르는 선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민중이 바로 이들이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민중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이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체이자 증인이라고 규정한 이가 바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이다. 200년 전에 출세하신 대신사는 오랜 고행 끝에 역사의 주인공이 바로 자기 자신이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이고 주변에 있는 모든 인물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세상에 우리 학문인 동학으로 펼치셨다. 모든 사람은 하늘을 모시고 있는 위대한 존재라는 자각은 도탄에 빠지고 출구 없는 길에 놓여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자기 집의 여종 두 명을 해방시키고 그중 나이가 든 여종은 며느리로, 어린 여종은 수양딸로 삼는 실천에 감동한 수많은 사람이 그를 뵙고자 모여들었다. 이에 죽임을 예감하고 서둘러 깨달은 바를 정리하기 위해 남원으로 피신해 위대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저술한 대신사는 경주로 귀향한 뒤 체포되어 처형당했지만, 그가 남긴 동학은 한국 근대를 열었다. 저 유명한 동학혁명과 3.1혁명 그리고 일제하의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까지 그 연원은 동학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한국 고유의 문화와 사고를 바탕으로 창도된 동학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의 대표적 사상이자 정신이었고 그 중심에는 민중들이 있었다. 대신사의 위대함은 앞선 세대의 지식인이었던 실학자들이 개혁을 주장했지만, 책상물림에 머무른 데 비해 그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들고 그대로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대상은 언제나 억압과 탄압의 대상이었던 민중이었다. 그들 가슴 속에 위대한 자각을 심어주어 스스로 나서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이상적 지상천국 건설의 주역이 될 것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근현대사가 언제나 민중이 주체이고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연원은 동학이었다. 서구의 사상가 루소(J. J. Rousseau)도 민중의 시대를 예견해 그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일반의지(General will)에 의해 통치되는 이상사회를 구상했었다. 그동안의 역사는 소수의 엘리트가 장악해 그들의 의도대로 진행됐을지라도 이제 근대의 주역은 이런 평범한 민중들이다. 이들은 역사의 순간순간마다 최전선에 서 있었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었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제발 나라를 제대로 운영해 달라는 부탁뿐이다. 이번의 내란사태처럼 그것이 올바르게 진행되지 않는다면 다시금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대신사가 자각시킨 민중이 만든다는 것이다. 글 년암 임형진(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