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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빛, 통일의 길을 밝히다통일부와 교육부는 5월 19일(월)부터 25일(일)까지 “광복의 빛, 통일의 길을 밝히다”라는 슬로건으로 제13회 통일교육주간*을 개최한다. * 국민의 통일의지를 높이기 위해 ’13년부터 매년 5월 넷째 주를 통일교육주간으로 지정 통일부는 올해 처음으로 통일교육주간 슬로건 공모전(3.6.~3.21.)을 실시했다. 1,271명이 2,342건을 응모했으며, 그 중에 1등을 한 “광복의 빛, 통일의 길을 밝히다”가 제13회 통일교육주간 슬로건으로 채택되었다. 이 슬로건은 80년 전 역사의 어둠을 뚫고 빛을 되찾은 광복의 그날처럼 온 국민이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통일의 길을 밝혀가자는 의지를 담고 있다. 통일부는 통일교육주간을 계기로 5월 19일(월) 국립통일교육원을 최초로 전면 개방한다. 지금까지는 원내 행사 참여를 사전에 신청해야만 국립통일교육원에 입장할 수 있었는데, 이번 행사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방문할 수 있다. 통일교육주간 개막식(오후 2:00~3:00)과 어린이 통일골든벨(오후 3:30~4:30)이 원내 잔디마당(실제 베를린 장벽 전시)에서 진행되며, 이 외에도 지역주민, 특히 어린이들이 놀면서 배울 수 있는 놀이체험 행사가 오후 1:00~6:00까지 운영된다. AI 로봇 ‘바라미’와 대화할 수 있고, 광복 80년 기념 「통일 마카롱」 및 「통일빵」도 받을 수 있다. 탈북민 쉐프 6명이 즉석에서 요리한 따끈따끈한 북한 고급요리(녹두지짐, 떡만두, 아바이순대)도 제공한다. 한편, 정부가 청년들에게 먼저 다가간다는 의미에서 젊은층 유동인구가 많은 신촌 스타광장과 홍대 레드로드 R4에서 ‘2030 팝업 부스 행사’가 운영된다. 행사는 5월 20일(화)과 5월 21일(수)에는 신촌 스타광장에서, 5월 23일(금)에는 홍대 레드로드 R4 퍼포먼스존에서 진행된다. 그 외 통일부는 통일교육연구센터 학술회의, 통일부 어린이·중학생 기자단 발대식, 50초 통일 숏츠 영화제 시상식, 글로벌 통일체험 발대식 등을 진행하며, 전국 각급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이뤄지는 각종 통일교육 활동을 지원한다. 5월 21일(수)에는 국립통일교육원 내 통일교육연구센터가 「국제질서 변화와 글로벌 통일교육」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5월 22일(목)에 어린이·중학생 기자단 발대식을, 5월 23일(금)에는 50초 통일 숏츠 영화제 시상식을 개최한다. 5월 23일(금)~24일(토), 1박 2일에 걸쳐 글로벌 통일체험 참가자 등을 대상으로 글로벌 통일체험 발대식을 진행한다. 전국 각 지역에 위치한 지역통일교육센터와 지역통일관에서도 통일교육주간을 계기로 지역별 특성에 맞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지역통일교육센터는 △통일교육 홍보부스를 운영(서울센터)하고 △안양시 청소년 축제에 참여(경인센터)하며 △음악회, 토크콘서트 등을 개최한다. 지역통일관은 ‘가정의 달’과 연계하여 가족과 같이 참여할 수 있는 통일교육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제13회 통일교육주간 누리집(www.uniweek2025.com)에는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각종 학습자료가 제공되며, 통일교육주간 7일 동안에는 집중적으로 온라인 이벤트가 실시된다. 통일부 장관은 “통일교육주간을 통해 미래세대 등 전 국민이 통일과 광복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고 통일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근대 시기 천도교와 3.1혁명-근대를 관통한 천도교의 ‘독립정신’(1)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1. 문제의 제기 한국 근대의 시작점을 무엇으로, 혹은 어느 시기로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제다. 근대를 어떤 기준으로 이해하는지에 따라 당시 한국사회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게 인식될 수밖에 없고, 인과적 결과물인 오늘날의 사회적 성격 역시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구자에 따라 근대라는 사회의 질적 변화를 내부의 주체적 동력이나 주관적 요소에서 찾을 수도 있고, 서구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나 정치제도 등 타율적으로 강제되거나 이식된 외부적 요소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본고는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는 주체적인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으면 한국의 근대와 그 성격을 올바르게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한국의 근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한국의 근대, 한국적 근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서구에 대한 내적 대응이 사상적으로 정리되고, 운동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1860년대에 주목해야만 한다. 기존의 주류사학이 근대의 기점으로 보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은 개항과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지만,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외부의 기계적 작용과 계기만을 주목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근대를 설명하는 것으로 한국의 근대는 절대 설명될 수 없다. 반드시 내재적이고 주체적인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하고, 그 변화가 내부를 질적으로 바꾸는 질적인 변화라는 것이 명징하게 설명되어야만 홖도한 근대의 시작점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한국의 연구자 다수가 1876년에 주목한 것은 서구사회를 모델로 제시한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론’을 교조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동양 및 한국사회에 적용한 결과다. 단지 일본과 체결한 조약 하나가 한국사회 내부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인식은 역사적 사실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교조적 인식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강화도조약’ 때문에 조선에 갑자기 서구의 자본주의가 들어오지 않았고, 조선의 신분질서가 무너지지 않았으며, 정치, 사회제도 등의 급격한 변화가 찾아오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무엇보다 ‘강화도조약’ 자체가 조선 민중의 의식이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구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세계질서는 1876년 개항 이전에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을 통해 이미 1860년대에 조선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고, 이 충격파는 중국이 이미 서구의 식민지로 몰락해가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공포와 함께 배가되었다. 한국사회 내부는 이 충격파로 인해 근본적인 성격의 변화, 즉 변증법이 설명하는 사회의 질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본고는 이 질적 변화를 따라 한국의 근대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특히, 지나치게 과소평가된 동학의 근대적 의미와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사회 근대 초기의 궤적을 쫓아가 보고자 한다. 동학이 주도한 이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동학의 자주·평등사상의 전파로 한국의 근대가 시작되었고, 이 자주·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한반도 최초의 근대 혁명인 동학혁명이 폭발하여 조선 민중의 의식을 근대로 견인하였으며, 이 근대의 흐름이 대동단결과 평등·평화라는 한국적 근대의 가치를 표방하며 근대민족으로서 한민족이 탄생한 3.1혁명으로 귀결되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동학이 주도한 한국적 근대의 여정 1) 한국적 근대의 태동-동학의 창시 1860년대 조선은 본격적인 충돌의 방식으로 서구와 대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사회가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서구 열강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정해진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단지 시기가 문제였을 뿐이다. 조선의 성리학적 신분질서와 정치제도, 특히 60여 년 지속된 세도정치는 조선의 근간인 농민들의 삶을 근본까지 파괴하고 있었고, 기득권에 집착하던 집권세력과 양반, 유생들은 성릭학적 질서를 유지하자는 위정척사론의 선동에 경도되어 혁명적 내적 변화와 개혁에 쓰여야 할 귀중하고 긴박한 시간을 허송세월로 낭비하고 있었다. 1860년대 서구의 충격파에 대한 조선사회의 내적 대응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양반, 유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위정척사론의 논의와 그것을 실천하는 사회적 운동으로서 위정척사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평등을 지향하는 종교 사상이자 혁명 사상인 동학이 창시되어 민중들에게 급속히 전파되면서 한국사회에 강력한 파장을 미치기 시작하였고, 점차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위정척사론은 풍양조씨 일가가 서구세력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공격함으로써 집권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활용한 정치적 전술이었다. 집권세력이 된 풍양조씨 가문의 선동에 호응한 유생들은 이미 1930년대부터 위정척사사상에 강하게 경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노사학파’를 이끌며 위정척사 논의를 주도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1839년에 두 편의 시를 통해 서구를 배척하고 춘추대의를 밝혀야 한다고 노래하였다. (「乙亥冬以洋胡邪說肆行 命致祭儒賢諸院 金平澤在晉執事華陽斐然有述 遙步原韻二首」.) 기정진은 서구의 문물과 종교는 성리학자가 지켜야 할 춘추대의를 훼손하는 사악한 것으로 마땅히 파괴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에게 성리학적 가치는 세상의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가치였고, 조선 사회 유생 대다수가 이러한 가치관에 경도되어 있었다. 기정진은 천주교뿐 아니라 불교와 노장사상 역시 이단으로 배척하였다는 점에서 단지 서구나 외세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과 학문을 배척하는 유교 원리주의자이자, 중화적 가치에 함몰된 광신도였다. 조선의 성리학이 ‘존화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정척사사상이 자주적이거나 반 외세을 표방한 사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위정척사사상은 단지 집권세력인 풍양조씨나 대원군 등이 유생들과 함께 부당한 권력과 성리학적 신분질서가 가져다주는 이익을 나누기 위해 결합한 이익공동체였을 뿐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첫째, 외부적으로 서구열강의 침략을 막아내고, 둘째, 내부적으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혁파하고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천지가 개벽할만한 개혁을 수행해야만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일어난 일본의 메이지쿠데타 * 이 사건을 ‘메이지 유신’으로 부르는 것은 옳은 관점이라 할 수 없다. 초슈와 사쓰만의 하급무사들에 의해 발생한 이 사건은 당시 일왕이던 고메이(孝明)은 근왕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들 하급무사들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에도 막부를 무력으로 전복시켰으므로 쿠데타로 보는 것이 정확한 관점이다. 이들 하급 무사들은 집권 이후에도 군벌로서 세력을 유지하였고, 이 세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장우순의 「근대국가 일본의 형성과정과 그 구조 - 전통에서 소환한 근대 -」(『동아시아고대학』 53, 동아시아고대학회, 2019.)를 참조). 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가 내부의 혁명적 변화 없이 서구에 맞설 역량을 키운다는 것 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혁명적 개혁 없이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지 못할 것이고,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한다면 식민지로 전락하여 혁명적 개혁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두 과제는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과제이면서 상호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는 거대한 하나의 전략적 과제였다. 위정척사사상 역시 이러한 과제에 대한 조선사회 내부의 대응이었다. 위정척사사상을 기반으로 한 위정척사운동은 1866년 기정진이 ‘병인소’를 올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기정진은 이 시기 지속적으로 관직을 제수받으며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유림을 회유하고 대원군의 정책을 지원할 것을 요구받았다. 병인양요를 경과하면서 ‘병인소’는 당시의 많은 유생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화서학파 *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의 유생들을 일컫는다.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 역시 화서학파의 문인이었다. 의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당시 유생들의 위정척사은 서양을 과소평가하였을 뿐 아니라 서양의 영향으로 급변하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현실 역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협소한 시각이었지만,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 아래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이 보여줄 수 있는 당연한 인식으로 신분질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척왜양이(斥倭攘夷)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역량이 필요했지만, 조선의 역사가 줄곧 그러했듯이 유생들은 중국마저 저버린 중화의 가치에 목숨을 건 채 입으로만 어양(禦洋)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양을 위해서는 민력과 국력을 급속하게 신장시키는 혁명적 개혁이 필요했다. 일본을 능가하는 혁명적인 개혁을 통해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할 책무가 있었던 조선의 여론 선도층 유생이 개혁에 앞장서기보다 개혁을 저지하고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위정척사론을 주창한 것은 나라와 민중을 멸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중대한 시대적 착오였다. 위정척사운동은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1873년 이후 사실상 지속될 동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유생들에게 위정척사사상은 매우 광범위하고 깊은 영향을 미쳤고, 유생들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대응하여 일으킨 을미의병, 을사조약, 정미7조약에 대응하여 일으킨 1905년의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 등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의병의 활동과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을미의병(전기의병)→을사의병(중기의병)→정미의병(후기의병)으로 변모하면서 초기에 매우 강력하게 표방되었던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지키기 위한 ‘기득권 수호’라는 집단이기적인 성격이 점차 옅어지고, 점차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성격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이 ‘보국안민’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일제에 결사 항전하였던 정신으로부터 일부나마 영향을 받은 결과로 실제로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에는 평민 출신의 의병장들이 활동하였고, 의병조직에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던 농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860년 서구의 침략에 대해 양반, 유생들이 위정척사사상에 근거하여 운동을 전개하였다면, 평민들 사이에서는 천지개벽에 가까운 혁명적 사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시천주(侍天主)사상’과 한울님을 경배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종교사상이었지만, 그 자체로 조선사회의 신분질서를 거부하는 혁명적, 사회적 사상이었고,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여 ‘보국안민’을 우선한 실천적 구국 사상이기도 하였다. 시천주(侍天主)는 모든 사람이 그 내부에 이미 천주를 모시고 있음을 천명한 사상으로 이후 2대 교주인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하면서 한국적 근대의 전략적 가치인 평등 평화의 이념으로 정착하였고, 최종적으로 3.1혁명을 통해 한민족의 근대적 가치와 전망인 ‘독립정신’으로 체계화되었다. 시천주 사상이 근대적 평등을 지향한 혁명사상이라는 사실은 조선의 전통사상인 유교와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理)와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습인 기(氣)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학문적 정진을 통해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해야만 했고, 때문에 학업을 업으로 삼은 양반, 유생 외에는 이러한 이기론에 접근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유교가 출세와 권력이 보장된 집단의 전유물인 이상 평민과 천민, 여성들은 절대로 평등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었고, 차별과 불평등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마디로 유교와 성리학은 반상, 남녀, 노소의 차별을 근간으로 성립된 차별의 사상이자 학문이었던 것이다. 반면, 동학의 시천주 사상은 평민뿐 아니라 천민이나 여성들까지 누구라도 입교하여 수행하면 도인(道人)이 될 수 있었고. 이러한 수월성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민중들의 근대적 자각으로 매우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최제우는 「포덕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10년을 공부해서 道成道立 되게되면 속성이라 하지마는 무극한 이내 도는 3년 불성이면 그아니 헛말인가.……입도한 세상 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 아닌가.” * 신일철, 「최수운의 동학사상」, 『사상』 9, 사회과학원, 1991, 267쪽에서 재인용. 누구라도 입도한 후 3년 이내에 도를 이룰 수 있고,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양반들이 누려온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관점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선언과 진배없는 이러한 발언은 급속하게 민중들에게 확산, 수용되었고, 조정과 양반층에는 커다란 경각심과 위기의식을 조성하였다. 조정이 1860년에 창시하고 1861년부터 포교를 시작한 동학에 깜짝 놀라 1863년 최제우를 체포하고, 1864년에 처형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동학은 짧은 포교 시간에도 불구하고 매우 급속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확산은 동학이 당시 민중의 근대를 향한 요구와 이해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최제우는 ‘보국안민’을 시대적 방책으로 제시하였고, 선천시대가 가고 봉건적 신분질서로부터 해방된 모든 인간이 평등한 후천개벽의 호시절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동학이 조선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든 인간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개창하기 위해 창시된 혁명적 세계관을 가진 사상임을 천명한 것이다. 조선의 근대는 수운 최제우가 ‘시천주 사상’을 통해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고, 이러한 사상에 반응한 민중들에 의해 근대 의식으로서 평등의 이념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내적 변화는 서구의 근대와 그 결과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하는 혁명적이고, 질적인 수준의 변화였고, 이러한 질적 변화는 한국적 근대가 동학사상을 통해 이미 1860년대에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리학적 봉건질서의 수호 획책하며 역사의 퇴행을 기도한 수구적이며 반동적인 사장인 위정척사사상 역시 동학과 동학혁명의 영향, 그리고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을 통해 점차 한국적 근대의 가치 안으로 수렴될 수 있었다. 서구에서 자본의 이익과 승리를 위해 발명된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 내부의 선언적 평등을 주장하며 성립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수미균평’의 전통적 평등개념이 이미 존재하였고, * “……又神誌祕詞曰如秤錘極器秤幹扶踈樑錘者五德地極器百牙岡朝降七十國賴德護神精首尾均平位興邦保太平…”, 「金謂磾傳條」, 『高麗史』 卷 一二二. 삼균주의를 정립하여 임시정부의 이념을 선도한 조소항은 그가 제창한 평등사상의 근원에 이러한 한민족 전통의 평등사상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평등사상은 서구에서 발명된 ‘민족’의 제한적이고 선언적인 평등개념을 초월하는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평등를 지향하였다. 최제우는 이러한 전통에서 추출한 근본적, 절대적 평등사상을 제창함으로써 한국적 근대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였고, 봉건질서를 뒤집는 후천개벽의 혁명사상으로 전파시켰다. 따라서 최제우는 한국적 근대의 창시자로, 최초로 한국적 ‘민족’의 개념을 제시한 사상가였다. (계속) 글, 장우순(성균관대학교) -
제103주기 의암 손병희 성사 순도 · 순국일 맞아 묘소참례 봉행… 성사의 뜻 기리며오는 포덕 166년 5월 19일(월), 제103주기 의암 손병희 성사 순도 · 순국일을 맞이하여 천도교중앙총부는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소재 의암성사 묘소에서 묘소참례식을 오전 11시에 봉행한다. 이번 행사는 의암성사의 숭고한 가르침과 헌신을 기리고, 교인들이 신앙의 근본을 다시금 되새기며 실천을 다짐하는 소중한 자리가 될 예정이다. 이번 묘소참례식에는 진강현 서울북부보훈지청장, 황정희 강북문화원장 등의 내빈이 참석한다. 각 가정에서는 재가기도로 저녁 9시에 ‘환원 기도식’을 봉행할 예정이다. 환원기도식 식순은 개식/청수봉전/심고/주문3회병송/경전봉독(성령출세설)/천덕송합창(환원기도가)/심고/폐식이다. 의암성사는 포덕 2년(1861) 4월 8일 청주에서 태어나 포덕 23년에 입도하였다. 성사는 해월신사의 명을 받아 교조 신원운동을 전개했고 광화문복합상소(1893)에도 참여했다. 동학혁명(1894) 때에는 북접 통령으로 이인전투, 우금티전투, 태인 성황산전투, 보은전투 등을 치루며 척왜 구국전선에 나섰다. 의암성사는 포덕 46년(1905)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하였고,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의암성사는 거족적인 3·1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3·1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일제에 의하여 구금되어 징역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고문으로 전신마비의 병환을 얻게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포덕 63년(1922) 동대문 밖 상춘원에서 향년 62세로 순도 · 순국하였다. -
‘세계 식물건강의 날’ 식물검역이 지키는 미래농림축산검역본부(본부장 김정희, 이하 검역본부)는 5월 9일(금) 고양국제꽃박람회장에서 주한 케냐 대사, 식량농업기구(FAO) 한국협회장, 유관기관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025 세계 식물건강의 날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유엔(UN)은 식물건강에 대한 국제적 인식 제고와 각국의 협력 촉구를 위해 2022년 제76차 총회에서 매년 5월 12일을 ‘세계 식물건강의 날’로 지정·선포하였다. 검역본부는 국제사회의 이러한 노력에 동참하여 매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기념식은 “원헬스(One Health)* 시대, 식물검역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축사, 식물건강 유공자 표창, 어린이 포스터 공모전 시상, 기념 세리머니 등 다채로운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한 사전 행사로 어린이 포스터 공모전에서 입상한 어린이들과의 인터뷰도 진행해 활기를 더했다. * 사람, 동물, 식물, 환경 등의 건강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각각의 건강을 통합·관리해야 한다는 개념 김정희 검역본부장은 “이번 기념식을 통해 식물건강과 식물검역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길 바란다”라고 하면서, “검역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식물병해충에 대한 선제적 연구도 강화하는 등 철저한 검역을 통해 식물 건강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한농대, 청년 농업기술 교육 추진한국농수산대학교(총장 이주명, 이하 한농대) 평생교육원은 청년농업인의 영농 정착 지원 및 농업역량 제고를 위해 6월부터 9월까지「2025년 청년 영농 아카데미」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이번에 개설되는 한농대의「2025년 청년 영농 아카데미」교육과정에서는 25명의 청년 농업인들을 선발하여 한우 개별 품종 정밀사양 맞춤형 기술과 한우 사육 노하우 등에 대해 이론과 실습 교육을 실시한다. 한농대의「2025년 청년 영농 아카데미」교육생 모집공고는 5월 12일부터 5월 23일까지 진행된다. 만 45세 미만의 한우를 사육하는 청년 농업인이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며, 신청서는 한농대 평생교육원 누리집(www.af.ac.kr)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한농대에서는 서류 심사를 거쳐서 교육생을 선발하며, 지원자는 신청서를 메일(ch2776@af.ac.kr)이나 팩스(063-238-9729)로 제출하면 된다. 참고로, 한농대 평생교육원에서는 현장의 교육수요를 반영하여 22년부터 24년까지 식량작물 및 채소 품목 대상으로 청년 영농아카데미를 운영하였으며, 올해에는 한우를 대상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이주명 총장은 “청년 농업인들이 한우산업 분야의 최신 기술을 습득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관심 있는 청년 농업인들의 참여를 기대한다.”라고 하면서, “한농대에서는 앞으로도 청년농업인 역량 제고를 위해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제공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출처 : 대한민국정책브리핑 -
독립기념관, 광복 80주년 기념 미시간 독립운동 역사축제 지원독립기념관(관장 김형석)은 오는 5월 3일(토), 광복 80주년을 맞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리는 재미한국학교 미시간협의회(회장 김선미) 주최 '독립운동 역사축제'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독립기념관은 2017년도부터 재외동포 청소년 정체성 함양과 한민족 자긍심 고취를 위해 역사 교육자료가 부족한 해외 한글학교로 역사교육 콘텐츠를 개발·보급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168,611명에게 콘텐츠를 지원하였다. 금년도에도 북미, 유럽, 러시아 등으로 콘텐츠를 보급할 계획이다. 교육자료 지원과 더불어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재미한국학교 미시간협의회가 주최하는 ‘독립운동 역사축제’를 지원한다. 이번 행사는 독립기념관이 현지 한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주제의 역사축제에 직접 참여해 교육과 전시가 통합된 콘텐츠를 지원하는 첫 사례이다. 독립기념관은 미시간 지역 한글학교 교사, 학부모, 청소년 등 재외 한인들이 한국 독립운동사를 생생하게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 전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국가상징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 ‘태극기’ 주제 체험교육과 AR(증강현실)로 만나는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와 국난극복의 역사 인물로 ‘이순신’에 대한 체험교육이 진행된다. 더불어 국권 수호 운동부터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무장, 외교, 문화, 학생 여성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전시를 구성하고, 현장 해설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한다. 이러한 교육과 전시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소속 학예연구사 2명을 파견한다. 독립기념관은 “참가자들이 다양한 체험교육과 전시 관람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의미와 역사를 쉽게 배우고, 광복 80주년의 뜻깊은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며 “특히 재외동포 청소년들에게는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배우고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앞으로도 한글학교 교육콘텐츠 보급과 더불어 재외동포 한민족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교육 프로그램을 적극 발굴하고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출처 : 독립기념관 -
천도교소년회 사무소 터, 독립기념관 독립운동 사적지 됐다독립기념관(관장 김형석)은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강점기 소년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소년회사무소 터를 5월의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로 선정하였다고 8일 밝혔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기, 조선의 민족정신을 지키고 계몽을 통한 사회 변화를 꿈꾸던 세력 중 하나로 천도교가 있었다. 특히 천도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년운동을 주도하며,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 교육과 민족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천도교, 일제강점기 소년운동의 주역으로 자리매김 : 소년운동의 배경 천도교는 동학에서 출발한 민족 종교로,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은 천도교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미래의 주역으로 여기며 교육을 통한 계몽을 중시하게 된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통치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할 필요성을 절감한 천도교는 소년운동을 통해 미래 세대를 양성하고자 했다. 소년운동의 전개 천도교는 1920년대 초반부터 소년운동을 본격화했다. 1922년 창간된 『어린이』는 천도교 소년회가 발행한 것으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자주성을 심어주는 중요한 매체로 자리 잡았다. 또한 천도교는 각지에 소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날 제정을 주도하며, 청소년 교육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천도교 소년회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민족 역사와 문화, 도덕적 가치관을 교육했다. 특히 놀이와 학습을 결합한 방식으로 어린이들의 흥미를 유발하며 자연스럽게 민족 의식을 심어주었다. 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4월 17일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 등 소년운동단체와 연대하기 위해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고 같은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다시 정했다. 그리고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거행된 어린이날 기념식에서 ‘어린이인권선언’의 효시라 할 ‘소년운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103회 어린이날은 1923년 5월 1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일제의 탄압과 천도교의 저항 천도교의 소년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갈 수 없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자주성을 강조하는 활동은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어린이』 잡지도 검열과 폐간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천도교는 이를 통해 더더욱 민족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소년운동을 지속했다.천도교소년회 사무소는 서울 종로구 경운동 중앙종리원에 있었다. 중앙종리원은 천도교의 사무소로 천도교청년당을 비롯해 천도교소년회ㆍ학생회ㆍ사월회ㆍ내수단ㆍ조선농민사 등 천도교 사회운동 단체의 본부와 개벽사가 입주해 있었다. 중앙종리원은 1969년 우이동으로 이전하였고 현재 수운회관이 들어서 있다. 한편,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세계 최초로 ‘어린이 날’을 만들고, 이듬해인 1923년에는 세계 최초로 ‘어린이 인권 선언’을 주도했다. 천도교소년회는 1921년 5월 1일 어린이의 인격옹호, 정서 함양, 건전한 사회성 함양을 목적으로 소춘 김기전, 소파 방정환, 현파 박래홍 등의 천도교 청년들이 중심이 돼 만든 천도교청년회 산하단체다. 소파 방정환은 천도교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성사의 사위로서 천도교청년회에서 교역자로 활동하며, 천도교 소년회와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날을 제정, 천도교의 인내천 정신을 어린이 사랑의 실천으로 사회에 구현했다. 2025년 5월 국내 독립운동사적지의 자세한 내용은 국내 독립운동ㆍ국가수호 사적지 홈페이지(sajeok.i815.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독립기념관 -
천도교, 11일 제131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탑에서 기념식 봉행준암 박인준 천도교 교령은 11일 갑오동학혁명기념탑에서 천도교 의례에 따른 기념식에 참석하여 기념사를 하였다. 이번 기념식은 오전 10시 각 지역 교인 및 전동연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봉행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하였으며, 각 지역에도 차량을 지원하여 많은 교인 및 연구자, 시민들이 행사가 열리는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탑으로 모여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날 기념식은 서소연 교무관장의 집례에 따라 청수봉전-심고-주문 3회 병송-준암 박인준 교령 기념사-심고-기념촬영 등의 순서로 봉행하였으며 준암 박인준 교령은 기념사를 통해 "동학혁명은 민족자주 의식과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고, 자유, 평등, 평화의 정신을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주었습니다. 동학혁명 정신은 역사 속에만 갇혀 있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천도교가 주도한 3·1운동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 정신으로 계승된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특히 동학혁명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부활되었고, 오늘날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불굴의 시대정신으로 승화되었습니다. "라고 밝혔다. 박 교령은 기념사에서 “동학농민혁명 131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는 동학혁명의 그 역사적 의의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합니다. 동학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지만, 여전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수많은 동학선열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아직도 완전한 서훈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프랑스혁명은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동학혁명은 아직도 나라 안에서조차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루빨리 동학혁명이 진정한 혁명으로서 세계사에 자리매김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천도교단은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주도적으로 이 혁명정신을 선양해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교령은 또한 “이제 우리는 동학혁명정신을 계승하여 구시대의 봉건적 사고를 과감히 청산하고, 외세에 의존하고자 하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동학혁명 정신이야말로 혼란한 이 시대를 제도할 수 있는 진정한 시대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새시대에는 이 정신으로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정의로운 복지사회가 건설되며,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실현되기를 염원합니다. 이러한 통일된 조국에서 우리는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사람 사람이 주인이 되어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동학농민혁명 131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 시대적 과제를 동학의 후예들이 앞장서 실현할 것을 다짐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열린 제131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 참석해 헌화하고, 유족과 기념재단에 감사를 전하며 선열들의 뜻을 기렸다. 이날 기념식에는 준암 박인준 교령을 비롯하여 노암 강병로 종무원장, 지암당 서소연 교무관장, 눌암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을 비롯한 천도교 교역자 및 정탄진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 장미란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신순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고재국 전국동학농민연대 대표, 김혜경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배우자, 김관영 전북특별자치도 도지사, 강기정 광주광역시 시장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국회에서는 윤준병·이원택·정을호·백승아 의원, 박태서 공보수석비서관 등이 함께했다. 다음은 준암 박인준 교령의 기념사 전문이다. 기 념 사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동학농민혁명 131주년을 맞이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 바친 동학혁명군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면서 새로운 각오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곳 황토현은 동학혁명군이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역사의 공간입니다. 탐관 고부근수 조병갑의 폭정과 오리들의 부조리하고 악랄한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동학의 깃발을 들고 이곳 황토현에서 봉기하여, 무자비한 관군을 죽창으로 물리치고 승리한 날이 130년 전 오늘입니다. 이날을 맞아 우리는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나아가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고 희망찬 미래가 펼쳐질 수 있기를, 동학의 후예로서 소망합니다. 우리 민족 오천 년의 역사 가운데 선열들이 이루어 놓은 수많은 업적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길이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것은 동학과 동학혁명이라고 자부합니다. 동학혁명정신은 경상도 경주 수운 최제우 대신사에 의해 탄생한 ‘모든 사람이 한울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의 만민평등정신을 바탕에 깔고, 나쁜 정치를 퇴치하고 제폭구민, 척양척왜를 통해 자주와 보국안민을 실현하고자 하는 혁명으로 나타나,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습니다. 이 혁명의 기포를 허락한 분은 바로 천도교 2세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님이셨습니다. 동학혁명은 안으로는 당시 몰락해 가는 봉건적 사회 질서를 혁신하고, 밖으로는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국가 침략에 맞서 싸운 반봉건·반침략·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운 실천적 행동이었습니다. 이곳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혁명은 황토현, 황룡촌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접수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동학혁명군은 출정할 때 반드시 청수를 모시고 주문을 외우며 진군하였습니다. 동도대장 전봉준 접주는 염주를 목에 걸고 동학혁명군을 지휘하였습니다. 이는 동학의 후손인 천도교인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깊이 새기고 바르게 인식해야 할 역사이며 사실입니다. 고부에서 관군을 물리친 동학혁명군은 우리나라 최초로 호남 일대에서 민정을 실시하면서 모순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동학혁명군의 민정은 오늘날 풀뿌리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시원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능한 조선 정부는 사회개혁보다는 외세에 의지하여 청국에 출병을 요청하였고, 일본도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청일전쟁의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침략 의지를 드러내자, 동학혁명군은 국권을 지키기 위해 항일전쟁을 전개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 세력에 의해 수많은 희생을 당하는 결과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결코 실패한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동학혁명은 민족자주 의식과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고, 자유, 평등, 평화의 정신을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주었습니다. 동학혁명 정신은 역사 속에만 갇혀 있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천도교가 주도한 3·1운동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 정신으로 계승된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특히 동학혁명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부활되었고, 오늘날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불굴의 시대정신으로 승화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131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는 동학혁명의 그 역사적 의의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합니다. 동학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지만, 여전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수많은 동학선열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아직도 완전한 서훈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프랑스혁명은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동학혁명은 아직도 나라 안에서조차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루빨리 동학혁명이 진정한 혁명으로서 세계사에 자리매김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천도교단은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주도적으로 이 혁명정신을 선양해 나가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동학혁명정신을 계승하여 구시대의 봉건적 사고를 과감히 청산하고, 외세에 의존하고자 하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동학혁명 정신이야말로 혼란한 이 시대를 제도할 수 있는 진정한 시대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새시대에는 이 정신으로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정의로운 복지사회가 건설되며,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실현되기를 염원합니다. 이러한 통일된 조국에서 우리는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사람 사람이 주인이 되어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동학농민혁명 131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 시대적 과제를 동학의 후예들이 앞장서 실현할 것을 다짐합니다. 오늘 이 행사를 위해 새벽같이 먼 길을 달려오신 동덕님들과, 특히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여러분들의 노고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다시 한번 동학농민혁명 131주년을 기억하면서, 전국의 동학 후예들과, 오늘 기념식에 참석한 모든 분들께 한울님의 감응이 늘 함께 하시기를 심고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포덕 166년 5월 11일 천도교교령 박 인 준 심고 -
다함께 행복한 세상(5)바람직한 공동체 모색을 위해 기반이 되는 가치관과 사상 중 새로운 인간관을 동학.천도교의 시천주(侍天主).인내천(人乃天) 이치에 기반하여 살펴본다. 주요 특징과 핵심 내용은 자유와 평등의 조화, 개인과 전체의 조화, 성령(性靈)과 육신의 조화이다 -
천지이기p.2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