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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7)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독립만세운동"『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9. 지하 독립신문의 발행 천도교는 3․1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영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지하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니 얼마나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과거 『제국신문(帝國新聞)』을 발행했던 언론인으로 신문의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곧 전개될 3·1독립운동의 취지와 운동의 전개 상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춘암상사와 상의하여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발행하기로 하고 보성학교 교장인 윤익선(尹益善)을 발행인으로 정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한 이종일은 3월 1일 만세운동이 터지면 자신이 구금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전 2월 28일『천도교회월보』발행인 이종린(李鍾麟)으로 하여금 독립신문의 창간호 원고를 집필토록 하여 보성사에서 발행하도록 했다. 이에 보성사의 김홍규 감독은 3월 1일 오전에 독립신문 1만 5천 부를 인쇄하여 당일에 배부하였다. 이렇게 해서『조선독립신문』제1호가 간행되자 일경은 이날 오후 6시에 윤익선을 체포했다. 이에 창간 실무를 담당했던 이종린은 이날 밤 경성 서적조합 서기 장종건(張倧鍵)과 논의하여 독립신문을 프린트 판으로 계속 발행하기로 하고 3월 2일 간행비 20원을 장종건에게 전했다. 그래서 이종린은 관훈동 서적조합에서 독립신문 제2호, 제3호, 제4호까지 발행하였으나 역시 일경에 발각되어 3월 10일 원고와 등사기구 일체를 압수당하고 자신도 체포되고 말았다. 『독립신문』의 내용을 보면, 제1호는 주로 민족대표들의 거사에 임하는 순국 결사의 결의를 담고 있다. 제2호는 3월 1일 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 관련 기사와 탑동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였다. 특히 가정부(假政府), 즉 임시정부의 조직계획을 예고하는 기사가 주목을 끈다. 제3호는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상황을 계속 보도하고 있으며, 제4호는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던 문서에 대해 보도하였다. 그 후 『독립신문』은 천도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장종건의 주도 아래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계속 비밀리에 발행되었으며, 3월 25일 장종건 등이 체포된 후에도 사람과 장소를 바꾸어가며 6월 22일 제36호와 8월 29일 국치기념호(國恥記念號)까지 간헐적으로 발행되었다. 『독립신문』발행 후 경향 각지에는 이에 고무되어『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조선민보(朝鮮民報)』,『국민신보(國民新報)』,『혁신공보(革新公報)』등이 연달아 간행되어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독립운동의 길잡이가 되었다. 10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독립만세운동 탑동공원에서 학생들과 합류한 수만 명의 시민들은 어느덧 서울 시내를 누비며 독립만세의 시위행진으로 돌변하였다. 탑동공원에서 시작된 수십만 군중의 시위행진은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온 시가는 철시하고 시위군중의 대열이 물결치는 가운데 일제는 전 경찰력과 보병 3개 중대, 기병 1개 소대를 시내 요소에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시위대열의 수에 압도당한 일제는 처음에는 방관하는 듯하였으나 해질 무렵부터 시위군중을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적수공권으로 독립을 외치는 시위행렬은 점차 일제의 저지선에 부딪혀 주모자급이 속속 구속되었으나 독립만세의 함성은 전시내로 번져가면서 밤에는 횃불이 등장하고 태극기가 곳곳에 꽂혀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의 함성은 삽시간에 전국에 퍼져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나갔다. 3월 1일 만세시위가 시작된 것은 서울만이 아니었다. 개성, 수원·평양·진남포·안주·선천·의주·대구·부산,원산·홍원등 11개 시·군에서 서울의 거사와 때를 같이 했다. 다음날에는 해주·연안·황주·중화·강서·대동에서 일어났으며, 5일까지는 경기 이북지역에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5일에는 군산·벽동·맹산·영변, 10일에는 철원·광주에서 궐기하였고, 점차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회조직이 있는 곳부터 터져 나온 독립만세의 시위행진은 요원의 불길처럼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우리나라 최남단인 제주에서는 3월 20일에, 최북단인 은성에서는 4월 4일에 각기 봉기하였다. 이러한 만세시위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3월 6일에는 서간도에서 7,200여명이 시위하였고, 13일에는 용정에서도 독립선언대회가 개최되었다. 비폭력 군중의 평화적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전투태세를 갖춘 2개 사단의 정규군과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헌병 2만명, 이밖에도 경찰과 한인 헌병보조원 수만 명을 분산 배치하였다. 일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군중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시위 군중에 대한 발포는 물론 이들을 집단학살한 예가 허다하였으며, 특히 평북의 정주, 평남의 맹산·양덕, 황해도 수안, 그리고 수원 제암리 등지에서는 수십 명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또한 구속된 시위자에 대한 고문 역시 잔인무도하였다. 수많은 시위자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생명을 잃거나 불구자가 되기도 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집계된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의 시위운동에 참가한 인원과 그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집회 건수 1,542 회 집회 인원 2,023,098 명 사 망 자 7,509 명 부 상 자 15,961 명 구금자 수. 46,948 명 소실된 교회 47 동 소실된 학교 2 동 소실된 민가 715 동 이와 같이 기미 3·1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학살과 무자비한 탄압으로 독립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일제에 대해 경종을 울리게 함으로써 그 후 일제가 야만적인 무단통치를 바꾸어 소위 문화정치라는 통치방법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11. 민족대표들에 대한 공판의 진행 남산 경무총감부에 구속된 민족대표 29명은 그날 밤부터 일제히 개별적인 취조가 시작되었다. 의암성사와 권동진·오세창·최린 4인은 청사 정문 안의 숙직실에 수감된 후 개별적으로 불려 나가 거사에 대한 간단한 취조를 받기 시작하였다. 3월 1일 밤중에 전원에 대한 제1차 취조가 끝났는데, 그 결과 선언서에 서명치 않은 인사들 중에서도 독립운동의 모의와 추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사들이 많이 관련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일경은 즉시 관련자 체포에 나서 다음날부터 박인호·최남선·노헌용·김홍규·김도태·함태영·송진우·현상윤·임규·안세항·이경섭·김세환·김지환·강기덕·김원벽·정노제 등 16인을 체포하였다. 32명의 민족대표와 추후 구속된 16명 등 48명은 내란죄 피의자로 다루어 연일 심문을 진행시켜 독립운동의 주모자급에 대한 취조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3월 중순까지 검찰조서가 작성되고 4월 상순에는 경성지방법원 예심을 받기에 이르렀다. 성사에 대한 경찰조서는 3월 1일 밤중으로 작성되어 검찰에 송치하고 5일경에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거사의 동기와 경위, 그리고 독립운동의 규모에 대하여 심문하던 취조관이 집요하게 추궁한 것은 이번에 독립운동이 자주적 민족운동이 아니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현혹되어 일부 불순분자들이 배후에서 선동하여 일으킨 소요사건으로 몰고 가려는 술책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거사의 의도와 자금의 출처, 분배,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 전달 발송 경위 등을 추궁했으나 민족대표들은 처음부터 사실 그대로 숨김없이 답변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한편 독립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민족대표들의 심문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손병희 선생 취조서 문 : 피고 등이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다는 것을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었는가. (3,운동비사 78면) 답 : 우리들은 전에 미리 학생들에 통지한 일이 없고 3월 1일 동지가 왔을 때 학생들이 파고다공원에 모여 있을 것이라 하므로 나는 학생들이 오늘 일을 알고 있다고 들었으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른다. 문 : 피고들은 어째서 명월관 지점으로 모였는가. 답 : 그것은 우리들이 파고다공원에 가서 선언서를 발표하고 그곳에서 체포되면 많은 학생들이 무슨 일을 할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명월관 지점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문 : 어떠한 뜻으로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하려고 하였는가. 답 : 그것은 선언서의 인쇄가 그때까지는 될 것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날로 정하였지 다른 이유는 없다. (비사 78면) 문 : 피의자는 조선의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답 : 그렇다. 될 줄로 생각한다. (비사 81면) 문 : 어째서 된다고 생각하는가. 답 : 그것은 목하 파리에서 개최 중인 강화회의에 일본은 5대국의 일원으로 동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동 회의는 민족 평화 등의 권리를 줄 것을 의제로 하고 있는데 그 회의에 참석 중인 일본은 조선의 안녕질서를 보지하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또 지금 영국에서는 애란을 독립시키는 것을 신문으로 보았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일본은 당연히 조선독립을 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 : 그런데 선언서를 본즉 조선민족에 대하여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고 했는데, 이것을 본즉 어디까지나 독립의 의사를 발표할 것을 권하고 민족 전체의 분기를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선언서는 그렇게 되었다. 조선민족은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어디까지나 독립의 의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문 : 요컨대 이 취지에 의하면 최후의 일인까지 어디까지나 반항하라는 것이니 이런 선언서를 피고 등의 명의로 발표하면 보는 사람은 어떠한 태도로 나올까 하는 것을 피고는 예상하고 있었는가. 답 : 지금 지방법원 예심결정서를 보면 우리들이 선언서를 발표하기 때문에 각처에서 폭동이 일러났다고 써 있으나 나는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예기치 않았다. (비사 102면) 문 : 천도교는 본년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회를 열 것을 각 교도에게 시달하고 시행한 일이 있는가. (비사 86면) 답 : 나는 해마다 기도를 올리는데 천도교에서는 협의상 1월부터 2월까지 49일간 기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문 : 이 기도는 어느 때부터 조선독립을 성취할 시기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비사 86면) 문 : 피고는 금년 2월 25일경 김상규에게 천도교 보관금 중 6만 원을 대여한 일이 있는가. (비사 99면) 답 : 그렇다. 3만 원씩 2회에 6만 원을 대여하였다.…… 안동현에서 좁쌀을 매매하면 이익이 있다 하므로 만주 좁쌀을 조선으로 수입하여 궁민을 구제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김상규에게 융통하였는데, 그 일은 천도교 사업으로 하였다. 문 : 그 6만 원은 독립운동에 사용할 목적으로 상해 임시정부 수립자금과 이강공의 해외에 갈 준비금으로 썼는가. 답 : 그렇지 않다. 문 : 천도교의 교도는 전부 얼마나 되는가. (비사 101면) 답 : 천도교는 교도의 교안이 있는데 그 수는 약 300만에 달하고 있으나 실제 의무를 다하고 있는 교인이 200만 가량이 되나 정확한 숫자는 나도 모른다. 문 : 피의자는 장래나 미래도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가. (비사 81면) 답 :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하려는 나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2) 최린 선생 취조서 문 : 피고는 이번 여러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이 틀림없는가. (비사 579면) 답 : 그렇다. 틀림이 없다. 문 : 그러면 그 전말을 말하라. 답 : 내가 독립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첫째, 조선 민족의 생존권을 확장하는 것, 둘째, 일본정부에 대하여 조선에 대한 정책을 회오케 하는 것. 셋째, 목하 강 화회의에서 세계평화를 제창함에 재하여 이때 조선민중에 대한 열국의 동정을 일으킬 생각에서였다. 따라서 그 목적을 달하는 데는 조선도 민족자결 즉 조선독립을 기도하여야 되겠다는 의도에서 이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문 : 그 독립운동의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그 발기인은 몇 사람이었는가. 답 : 그 시발은 작년 음력 12월 말에 손병희가 나와 권동진 오세창을 자택으로 초청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세우자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었다. 그것이 근원이 되어 동지들을 모아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비사 577면) 문 : 이 선언서는 누가 기안하였는가. (비사 576면) 답 : 그 선언서는 지금 경성부 내 수하정에 있는 최남선에게 말하였던바 동인이 문장을 쓴다 하므로 의뢰하였으며, 그 선언서의 골자는 내가 동인에게 말하였다. 문 : 그 후 피고는 선언서와 청원서 등의 기초에 있어서 누차 최남선과 회합하였는가. (비사 589면) 답 : 그렇다. 최남선이 누차 나에게 와서 기초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문 : 천도교 및 야소교의 거물들이 회합하여 선언서의 취지를 협의한 일이 있는가 (비사 590면) 답 : 그러한 협의를 한 일은 없다. 선언의 대체의 취지서는 손병희·권동진·오세창과 나 4인이 협의하여 정하고 야소교파에는 선언서의 초고를 만든 후에 보이고 합의케 한 것이다. 문 : 그 서면에는 어느 때 어디서 조인하였는가. (비사 593면) 답 : 함태영이가 2월 27일 나에게 야소교 측 사람의 인장을 가져와서 조인하였고 천도교 측 사람들의 것도 동일 조인하였다. 문 : 피고는 검사에 대하여 끝까지 자기는 독립운동을 그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지금도 아직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는가. (비사 596면) 답 : 그렇다. 어디까지나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다. 문 : 그대들은 학생을 파고다공원에 모아가지고 선언서를 배포한 일이 있는가. (비사 577면) 답 : 처음에 우리들은 파고다공원에 모이기로 하였던 것인데 어제 밤 오후 8시경 우리 동지들이 손병희씨 집에 회합하였을 때 그 석상에서 박희도가 말하기를 학생들이 우리가 파고다공원에 모이는 것을 알고 학생들도 파고다공원에 모이기로 했다고 하는데 만일 학생들이 집합하면 위험하다고 하였으므로 명월관 지점으로 변경하였던 것이지 결코 학생을 모아놓고 선언서를 배포한 것은 아니다. 문 : 3월 1일 당일 학생들이 소란하였는데 그것은 피고들이 소란케 한 것이 아닌가. (비사 583면) 답 : 그렇지는 않다. 학생들은 장래의 인물이므로 정치운동을 할 시기가 아니다. 나는 학생들에게는 결코 그와 같은 일을 시키지 않는다. 문 : 그러면 파고다고원에 피고들이 모여 선언서를 배포하는 것을 학생들은 어떻게 하여 알았는가. 답 : 그것은 모른다. 문 : 그러면 학생들은 운동과 관계없는가. 답 : 그렇다. (비사 583면)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포덕 166년 6월 22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신앙의 기준과 목적"천도교 동귀일체 원암 김창석 회장은 지난 6월 22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설교에서 천도교 신앙의 본질과 실천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며, 교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이번 설교에서 원암 김창석 회장은 천도교 신앙의 기준과 목적을 되새기며, 올바른 신앙의 길은 무엇보다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자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시는 마음이야말로, 신앙생활의 기준이자 방향이어야 한다”며, 신앙이 삶과 분리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실천적 태도임을 밝혔다. 원암 김창석 회장은 자신이 겪은 개인적인 일화와 신앙적 고민을 진솔하게 나누며, 자기 성찰과 참회를 통한 내면의 변화가 신앙 실천의 핵심임을 전했다. 그는 “신앙은 남을 판단하기 이전에 나를 돌아보고, 잘못을 뉘우치는 데서 시작된다”며, 교인들에게 각자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돌아볼 것을 권유했다. 이어 천도교 신앙의 궁극적 목표를 천인합일(天人合一)과 보국안민(輔國安民)으로 제시했다. 한울님과 하나 되는 삶, 그리고 민중과 나라를 이롭게 하는 실천이야말로 천도교인의 존재 이유라고 설파했다. 이를 위해서는 “바른 기준과 뚜렷한 목적을 지닌 신앙인”이 되어야 하며, 이는 곧 “스승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증명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이번 설교는 많은 교인들에게 신앙의 근본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인내천 사상과 신앙 실천의 현대적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
감정의 흔적감정의 찌꺼기 가볍게 보지 마라 살아온 세월만큼 얼굴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온 삶을 흔들고 왔다 우리는 매일 몸으로, 눈과 귀, 코와 혀로 감정을 먹고 또 먹는다 희노애락 애오욕의 감정들이 붓을 들어 붉은 분노, 푸른 슬픔, 노란 기쁨을 색칠한 뒤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 간다 찌꺼기 없는 사람 누가 있겠는가 한평생 가슴 깊이 쌓이고 쌓인 흔적의 덩어리, 무거운 마음, 강렬한 햇볕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 먹은 감정만 온전하게 다스리자 하늘에 대한 사랑가만 부르자 그 노래가 봄바람 되어 찌꺼기를 녹이고 하늘을 맑게 하며, 우리를 환히 웃게 한다. 천도교 동귀일체 고문 오제운 -
천도교중앙총부, 한국전쟁 발발 75주년 맞아 평화 성명 발표천도교중앙총부는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아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한반도 및 전 세계의 평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의 비극을 상기시키며,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된 참상을 되새겼다. 이어 “우리는 깊은 고통과 분단의 상처를 안은 채 오늘날까지 살아왔다”며, 전쟁이 남긴 아픔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했다. 천도교는 인류 공동체가 직면한 또 다른 갈등 상황에도 주목했다. 우크라이나의 장기화된 전쟁, 중동 지역의 군사적 충돌 등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폭력과 무력행사를 언급하며,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바탕으로, 생명 존중과 평화 지향의 실천을 천명했다. 전쟁은 생명을 앗아가고 인간 존엄을 짓밟는 반생명적 행위라는 인식 아래, 천도교는 전쟁의 재발을 막고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갈 것을 촉구했다. 성명서에서 천도교는 “한국전쟁으로 순도·순국한 이들의 희생을 깊이 추모하고 유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기억한다. 남북이 갈등을 넘어 화해와 공존의 길로 나아가기를 촉구한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과 무력 충돌의 즉각적인 중단을 요구하고, 생명과 평화를 위한 인류 연대를 염원한다.”라고 입장을 발표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앞으로도 인내천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며, “다시는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번 성명은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넘어,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새롭게 환기시키는 종교계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기를 기대한다. 아래는 이번에 발표한 성명서의 전문이다. ▪ 한국전쟁 발발 75주년 성명서 ▪ 전쟁의 비극을 넘어,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향하여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천도교는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아, 전쟁으로 희생하신 모든 분들의 넋을 경건히 추모하며, 다시는 이 땅과 세계 곳곳에 전쟁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성명을 발표합니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는 동족 간의 총칼이 부딪히는 비극의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스러지고,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되었으며,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깊은 고통과 분단의 상처를 안은 채 오늘날까지 살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기억함과 동시에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군사적 충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장기화된 전쟁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중동에서는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이어지며 더 큰 재앙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전쟁은 생명을 앗아가고 인간의 존엄을 짓밟으며, 공동체의 미래를 파괴할 뿐입니다.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임을 선언합니다.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는 오늘, 천도교는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순도, 순국하신 모든 이들의 희생을 깊이 추모하며, 남겨진 유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기억합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가 정착되기를 바라며 남과 북이 갈등과 대립을 넘어 화해와 공존의 길로 나아가기를 촉구합니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무력 충돌의 즉각적인 중단과 인류 공동체가 생명과 평화를 중심으로 연대할 것을 염원합니다. 천도교는 앞으로도 인내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이 존중받고 전쟁 없는 세상을 향한 실천에 함께할 것입니다. 전쟁을 넘어서, 다시는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 166년(2025년) 6월 25일 천도교중앙총부 -
천도교한울연대, “가덕도 신공항과 환경영향평가” 온라인 공부모임 개최천도교한울연대는 오는 6월 26일(목) 저녁 7시 30분부터 ‘가덕도 신공항과 환경영향평가’를 주제로 온라인 공부모임을 개최한다. 이번 모임은 천도교한울연대가 매월 네 번째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열고 있는 온라인 공부모임의 일환으로, 회원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날 강연은 김현욱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이 맡는다. 김 위원장은 가덕도 신공항 추진 과정에서의 환경 파괴와 그에 대한 시민사회의 대응, 그리고 정부의 환경영향평가 제도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이다. 또한, 도요필름의 강원중 감독이 제작한 가덕도 신공항 관련 미니 다큐멘터리 영상이 상영되어, 시청각 자료를 통해 현장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할 계획이다. 이번 모임은 **줌(Zoom)**을 통해 온라인으로 진행되며, 아래 링크를 통해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으며, 자세한 안내는 다음과 같다. 일시: 2025년 6월 26일(목) 저녁 7시 30분 ~ 9시 Zoom 링크: https://us06web.zoom.us/j/89083881750?pwd=YUtSbnBiSE5YMXFzSWdBUFRhZjJCQT09 회의 ID: 890 8388 1750 암호: 3721 천도교한울연대는 “가덕도 신공항 문제는 단지 지역 개발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 환경, 기후위기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며, “많은 시민들이 함께 배우고 토론하는 자리에 참여해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
천지이기 p.247 -
생활 속 자전거 이용 활성화를 위한 사진·영상 공모전 개최행정안전부는 ‘탄소를 줄이고 건강을 지키는 유익한 습관, 자전거와 함께!’라는 주제로 생활 속 자전거 이용 활성화를 위한 사진·영상 공모전을 개최한다. 지난 2011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15회째를 맞이한 이번 공모전은 자전거를 이용해 친환경 교통문화를 확산하고, 탄소배출 저감에 기여하기 위해 열리고 있다. 공모전 작품은 6월 30일(월)부터 8월 18일(월)까지 ‘자전거 행복나눔 누리집(www.bike.go.kr)’에서 접수할 수 있다. 공모 분야는 사진과 영상(숏폼) 2개 부문이며, 일상 속 자전거 이용을 홍보하거나 자전거 5대 안전수칙* 준수 등을 주제로 일반인 누구나 개인 또는 단체(3인 이내)로 응모할 수 있다. * ① 안전모 쓰기 ② 과속하지 않기 ③ 휴대전화 · 이어폰 사용하지 않기 ④ 야간 전조등 켜기 ⑤ 음주 운전하지 않기 제출 작품은 관계 전문가가 주제 부합성, 작품성, 활용 가능성 등을 1차 심사하고, 대국민 공개검증(소통24 누리집)을 거쳐 최종 선정된다. 분야별 입상자에게는 11월 중 행정안전부 장관상과 소정의 상품권이 주어질 예정이다. 기타 상세한 내용은 ‘자전거 행복나눔 누리집(www.bike.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상작은 ‘2026년도 자전거의 날’ 관련 행사 등에 각종 홍보물로 제작되며, 자전거 이용 문화 확산을 위해 공공기관 홍보, 교육, 전시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지난해 공모전에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 호수공원에서 아빠와 아들이 자전거와 함께하는 가을 풍경을 담은 작품인 ‘가을의 향기 속으로 아들과 떠나는 힐링여행’이 사진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기존 공모전 수상작은 행정안전부 누리집(www.mois.go.kr)과 자전거 행복나눔 누리집이나 앱에서 확인 가능하다. 조영진 지방행정국장은 “탄소중립 교통수단으로 건강과 환경을 동시에 지키면서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자전거 타기 문화에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라며, “이번 공모전에 접수된 우수한 작품들을 다양하게 활용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국민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뉴스출처:행정안전부 -
안심상속 서비스 기준일, 실종선고일로 개정해 실종자 유족 아픔 던다ㄱ씨의 남편은 7년 전 실종되었으나, 최근에서야 법원에서 실종선고를 받았다. 안심상속 서비스를 신청하려던 ㄱ씨는 안심상속 서비스를 받으려면 사망일(사망 간주일, 실종일로부터 5년 경과일) 1년 이내에만 신청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았다. 오래전 실종된 남편의 빚이나 재산을 많은 금융기관 등에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막막함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실종선고일로부터 1년 이내에도 안심상속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도록 안심상속 서비스 신청 기준을 ‘사망 간주일’이 아닌, ‘실종선고일’로 개선해 실종자 유족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되었다. 행정안전부는 6월 23일(월)부터 실종자의 유족이 ‘안심상속 원스톱서비스’를 제도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 신청 기준을 개선했다고 밝혔다. ‘안심상속 원스톱 서비스’는 사망자의 예금, 보험, 증권, 토지, 건축물, 국세, 지방세, 연금 등 20종의 재산 정보를 사망 후 1년 이내 통합 조회 신청할 수 있는 대국민 서비스다. 실종의 경우에는 법원에서 실종기간 만료일(사망 간주일)을 결정하는 실종선고를 받아 사망신고(실종선고 신고)와 동시에 안심상속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실종기간 만료와 동시에 실종선고 청구를 하더라도, 통상 실종선고를 받기까지 1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어 실종선고를 받고 사망신고를 하면 이미 사망 간주일이 1년이 지나 안심상속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실종일이 2017년 5월 1일인 경우, 유족이 2025년 5월 1일에 법원에 실종선고 청구를 하더라도 법원은 실종일부터 5년이 경과된 2022년 5월 1일을 실종기간 만료일(사망 간주일)로 선고한다. 이 경우, 2022년 5월 1일부터 이미 1년이 도과되어 안심상속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다. 실종기간 만료일에 즉시 신청해도 통상 법원의 심리기간이 소요되어 안심상속서비스 신청기한인 1년을 경과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행정안전부는 실종자는 사망일이 아닌 실종선고일을 기준으로 1년 이내 안심상속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도록 예규를 개정했다. 이번 제도 개선으로 실종선고를 받은 유족은 기존 신청 기한 제한으로 안심상속 서비스를 활용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해소하고, 실종선고일 이후에도 상속 재산 조회 신청이 가능해지게 된다. 안심상속서비스는 사망신고 또는 실종선고와 동시에 접수하거나 1년 이내 신청 가능하며, 이후에는 금융감독원이나 지방자치단체 등 개별 기관에 각각 재산을 조회해야 한다. 가까운 읍면동 주민센터를 직접 방문하거나 ‘정부24 누리집(www.gov.kr)’에서 온라인으로 신청 가능하다. 안심상속서비스는 2015년 6월 도입된 이후 2025년 5월까지 누적 약 191만 명이 이용했다. 2024년 기준 사망신고 36만 건 중 약 79%에 해당하는 28만 5천여 건이 서비스를 신청했다. 이용석 디지털정부혁신실장은 “앞으로 실종자 가족도 어려움 없이 안심상속서비스로 상속 절차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도 제도 사각지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맞춤형 서비스를 선제적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뉴스출처:행정안전부 -
「한국 대학원생 벤처투자 경진대회」 참가대학 모집중소벤처기업부(장관 오영주, 이하 중기부)와 한국벤처캐피탈협회(회장 김학균, 이하 VC협회)는 6월 23일(월)부터 ‘한국 대학원생 벤처투자 경진대회’ 참가대학을 모집한다고 밝혔다. 한국 대학원생 벤처투자 경진대회는 예비 벤처투자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2024년 신설되어 올해 두 번째로 개최하는 대회로, 단순한 이론 교육을 넘어 실제 벤처투자사(캐피탈) 투자과정을 모의 체험할 수 있는 실전형 대학원생 벤처투자 경진대회이다. 참가팀은 국내·외 벤처투자 생태계를 반영한 체계적인 교육과정(커리큘럼)과 현직 전문가의 전문상담(멘토링)을 통해 실제 벤처투자자(벤처캐피탈리스트)의 기업분석과 투자 프로세스를 배우고 경험할 수 있다. 이번 모집을 통해 선발되는 총 10개 내외의 대학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경진대회에 참여할 벤처투자팀(5~6명)을 구성하게 되고, 벤처기업협회(VC협회)와 한국과학기술원(이하 KAIST)이 이들을 대상으로 벤처투자자 특별교육을 진행한다. 이후 모의 대회(10월)를 진행하여 국내대회에 진출할 6개팀을 선정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2026년 1월 ‘한국 대학원생 벤처투자 경진대회’를 개최한다. 1위 수상팀에게는 세계적(글로벌) 벤처투자 특별교육, 벤처투자사 인턴 기회를 제공하고, 2026년 4월 개최 예정인 ‘국제 벤처투자 경진대회(VCIC)*’ 참가자격이 주어진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은 전세계 청년 투자자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전세계(글로벌) 벤처투자시장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 Venture Capital Investment Competition (美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98~) 김봉덕 벤처정책관은 “고도화되고 있는 창업기업(스타트업)의 기술력에 맞춰 벤처투자 인력도 높은 수준의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분야별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벤처투자시장에 많이 유입되고 벤처생태계의 저변을 넓힐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한국 대학원생 벤처투자 경진대회 참가대학 모집기간은 6월 23일(월)부터 7월 18일(금) 16시까지이며, KAIST 기업가정신연구센터(cse.kaist.ac.kr)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오는 7월 1일(화) 13시 온라인을 통해 해당 사업 설명회를 진행할 예정이며, 이와 관련한 상세 내용은 추후 벤처기업협회(VC협회) 및 KAIST 기업가정신연구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중소벤처기업부 -
천도교와 3 · 1운동(6) "민족대표의 서명과 의암성사의 유시문"『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7. 민족대표의 서명과 의암성사의 유시문 독립선언서에 대한 민족대표의 서명은 2월 27일 밤 재동 최린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대표해서 이승훈·이필주·함태영이, 그리고 불교 측 대표로 한용운이 참석했다. 천도교에서는 대표들이 김상규 집에 모여 도장을 모아 최린에게 보내왔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청원서 등에 기명날인하려 하였으나 선언서 외의 여타 문서가 미비되어 별지에 서명하고 그 밑에 날인토록 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서명자의 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연령순이나 가나다순으로 하자고 제의하였다. 3교단 중에 종교적으로 기독교가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뜻이다. 천도교 측을 대표한 최린은 이를 그대로 찬성할 수 없었다. 가나다순이나 연령순으로 서명하게 되면 선생보다 제자가 먼저 기명할 수 있기 때문에 천도교의 체제상 곤란하다고 완곡히 설명하였으나 양측 주장이 맞서서 쉽게 타협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최린은 “그러면 이 순간까지 서로 노력해온 일은 파기할 수밖에 없다”고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이때 최남선은 “인물로 보아서나 거사의 동기로 보아서도 손병희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첫 번째로 서명하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고 기독교 측에 양보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이승훈의 제의에 따라 두 번째는 장로교를 대표해서 길선주 목사가 서명하고, 세 번째는 감리교를 대표해서 이필주 목사를, 그리고 불교를 대표해서 백용성이 서명한 후 그 다음은 가나다 이름순으로 서명하기로 의견이 일치되어 기명날인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탑동공원으로 결정하고 2월 28일 밤 가회동 성사님 댁에서 대표자 전원이 회동하여 거사를 위한 마지막 모임을 갖도록 약속하였다. 28일 오후 5시 가회동 성사님 댁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성사님은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인사 말씀을 하였다. “이번에 우리의 의거는 조선의 신성유업을 계승하고 아래로 자손만대의 복리를 작흥하는 민족적 위업입니다. 이 성스러운 과업은 제현의 충의에 의지하여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이 자리에서 박희도는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면 다수의 학생이 동원되어 모일 것이니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논의 결과 탑동공원에 많은 학생과 군중이 모이게 되면 군중심리에 의해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고 이로 인해 일본군경에게 악독한 탄압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민족대표들은 그 근처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장소를 변경하기로 하였다. 이에 앞서 의암 성사는 이번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됨에 따라 이날 박인호 대도주에게 다음과 같은 유시문을 보내어 차후 교단을 책임 운영하도록 유시하였다. 諭 示 文 不侫이 吾敎의 敎務를 座下에게 專委함은 己爲十數年이라 更說할 必要가 無하거니와 今日 世界種族 平等의 大氣運下에 我東洋 同族의 共同幸福과 平和를 爲하여 終始 一言을 黙히 不能하므로 玆에 政治方面에 一時 進參케 되었기 如是 一言을 伸託하노니 惟 座下는 幹部諸人과 共히 敎務에 對하여 益益 勉勵하여 小勿妄動하고 我 五萬年 大宗敎의 重責을 善護進行할지어다. 己未 2月 28日 義菴 孫 秉 熙 * 불영(의암성사가 본인을 낮추어 지칭함)이 우리 교회의 교무를 춘암에게 맡긴 지도 벌써 십 수 년이 되었습니다. 더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오늘날 세계적으로 모든 인종이 평등하다는 큰 흐름 속에서, 우리 동양의 같은 민족들이 함께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 잠시 정치적인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말을 전하니 잘 새겨 듣기 바랍니다. 춘암은 교회 간부들과 함께 교무에 더욱 힘쓰고 정진해서 조금도 망녕되게 움직이지 말고 우리 오만 년의 위대한 종교의 중책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희암 성주현 해의) 기미년 2월 28일 의암 손병희 8.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3월 1일, 민족적 거사가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왜경에게 발각되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최린은 이날 아침에 대문 안에 독립선언서 두 장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서울시내에 배포되었음을 확인한 후 서둘러 성사 댁으로 가서 시중의 동향을 보고하고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성사를 모시고 12시경 인력거로 약속장소인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 도착했다. 최린은 주인 안순환에게 30여명분의 점심을 부탁하고 별실에 일동은 자리를 잡았다. 민족대표들은 오후 1시가 넘자 대부분 모였다. 탁자 위에는 나용환이 가져온 100여매의 독립선언서가 놓여 있었다. 일동은 감격에 떨리는 손으로 각기 선언서를 들고 묵묵히 읽어 내려갔다. 1시 반이 넘어서자 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 4명이 불참하고 전원이 모였다. 이에 성사께서 이종일에게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했으니 크게 낭독하라고 지시하여 이종일은 인쇄된 독립선언서의 오자를 고치고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의암성사는 최린에게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이 사실을 통보하도록 지시하고 일동에게 민족대표로서 당당히 행동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때 탑골공원에 모인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선언 장소가 변경된 것을 뒤늦게 알고 학생대표 강기덕·김원벽·한위건 등 10여 명이 태화관으로 달려와 민족 대표에게 장소변경을 항의하고 탑골공원으로 갈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권동진과 최린이 장소변경의 사유를 말하고 간곡히 타일러 돌려보냈다. 식탁이 열리자 한용운은 자진해서 일장 연설을 하였다. 국제정세의 추위는 바야흐로 조선민족에게 독립을 허용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동안 우리 민족은 간악한 일제의 쇠사슬을 풀고 자유천지를 향해 궐기하기 위한 힘을 구축하였다는 점, 따라서 우리들의 이 모임은 민족독립의 성사를 뒷받침하는 의미 깊은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요지였다. 일동은 기립하여 조선독립 만세를 삼창하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 탑동공원에 모인 군중의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 들려왔다. 오후 3시가 지나자 정복경찰 7~80명이 몰려와 태화관을 포위하고 일인 경부가 최린을 불러 경시총감부로 연행한다고 하자 차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30분 후에 차 한 대가 도착해서 첫차에 의암성사를 비롯해서 한 차에 세 분씩 연행하였다. 5시가 지나서야 최종으로 최린과 한용운이 연행되었는데, 그때 시내는 일본군이 배치되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한편 전부터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중등 이상 각 학교 학생들은 전날의 지시에 따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1시쯤부터는 속속 탑동공원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2시쯤에 이르러서는 이들 학생의 수는 4, 5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그때 경신학교 졸업생인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선언서가 낭독되자 흥분과 감격에 상기된 군중들은 일시에 숙연해졌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날 무렵 감격에 넘친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獨 立 宣 言 書 吾等은 玆에 我朝鮮이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에 權威를 仗하여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여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여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 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並進하기 爲하여 此를 提起함이니, 是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며 全人類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 何物이던지 此를 沮止 抑制치 못한지니라. 舊時代의 遺物인 侵略主義 强權主義의 犧牲을 作하야 有史以來 累千年에 처음으로 異民族 箝制의 痛苦를 嘗한지 今에 十年을 過한지라 我生存權의 剝喪됨이 무릇 幾何며, 心靈上 發展이 障碍됨이 무릇 幾何며, 民族的 尊榮의 毁損됨이 무릇 幾何며 新銳와 獨創으로써 世界文化의 大潮流에 其餘補裨할 機緣을 遺失함이 무릇 幾何뇨. 噫라, 舊來의 抑鬱을 宣暢하려하면, 時下의 苦痛을 擺脫하려하면, 將來의 脅威를 芟除하려하면, 民族的 良心과 國家的 廉義의 壓縮銷殘을 興奮伸張하려하면, 各個 人格의 正堂한 發達을 遂하려하면 可憐한 子弟에게 苦耻的 財産을 遺與치 아니하려하면, 子子孫孫의 永久 完全한 慶福을 導迎하려하면, 最大急務가 民族的 獨立을 確實케 함이니, 二千萬 各個가 人마다 方寸의 刃을 懷하고 人類通性과 時代良心이 正義의軍과 人道의 干戈로서 護援하는 今日 吾人은 進하야 取함에 何强을 挫치 못하랴. 退하야 作함에 何志를 展치 못하랴. 丙子修護條約 以來 時時種種의 金石盟約을 食하였다하야 日本의 無信을 罪하려 아니하노라. 學者는 講堂에서 政治家는 實際에서 我 祖宗世業을 植民地視하고 我 文化民族을 土昧人遇하야 한갓 征服者의 快를 貪할뿐이요, 我의 久遠한 社會基礎와 卓犖한 民族心理를 無視한다하여 日本의 少義함을 責하려 아니하노라. 自己를 策勵하기에 急한 吾人은 他의 怨尤를 暇치 못하노라. 現在를 綢繆하기에 急한 吾人은 宿昔의 懲辯을 暇치 못하노라. 今日 吾人의 所任은 다만 自己의 建設이 有할 뿐이요 決코 他에 破壞에 在치 아니하도다. 嚴肅한 良心의 命令으로써 自家의 新運命을 開拓함이요 決코 舊怨과 一時的 感情으로써 他를 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 舊思想 舊勢力에 覊縻된 日本 爲政家의 功名的 犧牲이 된 不自然 又 不合理한 錯誤狀態를 改善匡正하야 自然 又 合理한 正經大原으로 歸還케 함이로다. 當初의 民族的 要求로서 出치아니한 兩國合倂의 結果가 畢竟 姑息的 危壓과 差別的 不平과 統計數字上 虛飾의 下에서 利害相反한 兩民族間에 永遠히 和同할 수 없는 怨溝를 去益深造하는 今來實績을 觀하라 勇明果敢으로써 舊誤를 廓正하고 眞正한 理解와 同情에 基本한 友好的 新局面을 打開함이 彼此間 遠禍召福하는 捷徑임을 明知할 것이 아닌가. 또 二千萬 含憤蓄怨의 民을 威力으로서 拘束함은 다만 東洋의 永久한 平和를 保障하는 所以가 아닐뿐 아니라 此로 因하여 東洋安危의 主軸인 四億萬支那人의 日本에 對한 危懼와 猜疑를 갈수록 濃厚케 하야 그 結果로 東洋全局이 共倒同亡의 悲運을 招致할것이 明하니 今日 吾人의 朝鮮獨立은 朝鮮人으로 하여금 正堂한 生榮을 遂케 하는 同時에 日本으로 하여금 邪路로써 出하야 東洋支持者인 重責을 全케 하는 것이며, 支那로 하여금 夢寐에도 免치못하는 不安恐怖로서 脫出게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로 重要한 一部를 삼는 世界平和 人類幸福에 必要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한 感情上 問題리요.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에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過去 前世紀에 鍊磨長養된 人道的 精神이 바야흐로 新文明의 曙光을 人類의 歷史에 投射하기 始하도다. 新春이 世界에 來하야 萬物의 回蘇를 催促하는도다. 凍氷寒雪에 呼吸을 閉蟄한 것이 彼一時의 勢라하면 和風暖陽에 氣脈을 振舒함은 此一時의 勢니 天地의 復運에 際하고 世界의 變潮를 乘한 吾人은 아모 躊躇할 것이 업스며 아모 忌憚할 것 업도다. 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이며, 我의 自足한 獨創力을 發揮하야 春滿한 大界에 民族的 精華를 結紐할지로다. 吾等이 茲에 奮起하도다. 良心이 我와 同存하며 眞理가 我와 倂進하도다. 男女老少 업시 陰鬱한 古巢로서 活潑히 起來하야 萬彙群象으로 더부러 欣快한 復活을 成遂하게 되도다. 千百世 祖靈이 吾等을 陰佑하며 全世界 氣運이 吾等을 外護하나니, 着手가 곳 成功이라. 다만 前頭의 光明으로 驀進할 따름인저. 公 約 三 章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직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요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하여금 어데 까지든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建國 四千二百五十二年 三月 一日 朝鮮民族代表 孫秉熙 吉善宙 李弼柱 白龍城 金完圭 金秉祚 金昌俊 權東鎭 權秉悳 羅龍煥 羅仁協 梁甸伯 梁漢黙 劉如大 李甲成 李明龍 李昇薰 李鍾勳 李鍾一 林禮煥 朴準承 朴熙道 朴東完 申洪植 申錫九 吳世昌 吳華英 鄭春洙 崔聖模 崔 麟 韓龍雲 洪秉箕 洪基兆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