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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 천도교 입교천도교서울교구는 지난 6월 29일 시일식 후 성화실에서 유수현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의 입교식을 봉행했다. 입교식은 전 교령이신 현암 윤석산 선도사의 전교로 진행되었으며, 유 이사장은 천도교의 진리를 따르며 무극대도의 길을 함께 걷기로 서원했다. 유수현 이사장은 오랜 시간 한국 고전문화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일에 헌신해왔으며, 이날 입교를 통해 천도교 신앙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입교를 축하하며 참석자들은 “한울님을 모시는 길에 함께 하게 되어 기쁘다”며 환영의 인사를 전했다. 정윤택 서울교구장은 "유 이사장의 입교를 축하드리며 함께 무극대도를 닦아나가게 되어 기쁩니다. 교화와 문화 활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사진제공 : 천도교서울교구 -
천도교와 3 · 1운동(8) "민족대표를 내란죄로 기소"『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3) 권동진 선생 취조서 문 : 선언서를 배부하는 것과 3월 1일에 군중이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시내로 시위운동을 하는 일을 박희도와 이승훈이가 담당하고 있어 최초부터 학생 측과 연결하지는 않았는가. (비사 195면) 답 : 그런 일은 없고 선언서를 발표할 장소를 파고다공원으로부터 명월관 지점으로 옮긴 것은 그 관계로 변경하였다. 2월 28일 손병희 사저에 회합할 때 이갑성이가 학생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할 뜻을 누설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유해무익한 일이며 선언서를 발표하는데 그러한 원조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반대하였고,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서 회합할 때 학생 3명이 와서 왜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을 발표하지 않고 이곳으로 왔느냐고 위협을 하였으나 우리는 알아듣도록 사정을 말하여 보냈다. 우리들은 결코 학생들과 서로 연합하여 이 운동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또한 학생과 일을 같이 할 것을 피하였다. 야소교측에서는 여하한 일을 하는지 나는 모르고 있다. 문 : 천도교 측에서는 각 지방의 신도에 대하여 3월 1일 독립선언을 하였으니 각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운동을 하라고 한 일이 있는가. 답 : 천도교 신도는 교주를 믿고 있기 때문에 교주가 계획하고 있으므로 신도들은 그 일을 찬성할 줄로 생각하고 있으니, 신도가 그러한 호응이나 경성으로 모이거나 혹은 각 지방에서 소동을 일르킨다고 독립이 곧 되는 것도 아니고 독립선언서의 일을 신도에게 원조하라고 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원조를 구하려 하지도 않았다. (비사 196면) 4) 오세창 선생 취조서 문 : 파고다공원에서는 어떠한 방법에 의하여 선언서를 발표할 작정이었는가. (비사 511면) 답 : 그것은 사람이 모이고 모이지 않는 것에 관계없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발표하기로 하였는데, 공원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기로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명월관 지점으로 변경한 것이다. (비사 511면) 문 : 피고들은 이번 독립운동을 하는데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지 않았는가. 답 : 우리들은 하등 학생들과 관계가 없다. (비사 511면) 5) 이승훈 선생 취조서 문 : 최린을 방문한 것은 언제인가. (비사 343면) 답 : 2월 13일경 오후 7, 8시 경이라고 기억된다. 문 : 최린을 만나서 어떠한 말을 하였는가. 답 : 최린을 만났을 때 동인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합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여론을 환기하는 것이 좋다고 하므로 나도 동감이라 대답하면서 서로 함께 행동할 것을 약속하고 작별하였다. 그 이튿날 오후 8시경 박희도가 나를 부르므로 가니까 정춘추·오화영·신홍식 등이 회합하였는데 동인들과 협의한 바 지방에 연락을 하여 빨리 상경하라고 말할 것을 협의하고 그 뜻을 다음날 최린에게 전하고 최린과 협의한 것은 나와 서로 연락하자고 하였다. 문 : 최린으로부터 5000원을 운동비로 받은 일이 있는가. (비사 343면) 답 : 2월 25일경 오후 4시 나의 숙소인 김승희 집으로 와서 운동비라고 5000원을 주었다. 문 : 선언서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하라. (비사 344면) 답 : 나는 함태영과 같이 그날 저녁에 최린의 집으로 가서 최린에게서 받은 돈을 곧 박희도에게 주면서 그 용처를 적당히 하라고 하였다는 것을 말한 후 함 태영과 최린을 소개하고 같이 국사를 의론할 때 최린이가 선언서의 원고를 나와 함태영에게 보이므로 우리는 그 문장이 잘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3·1운동비사 344면) 문 : 그 이튿날 피고는 최린을 찾았는가. (비사 362면) 답 : 그렇다. 최남선이가 와서 그와 같이 오후 3시경 최린에게 갔었다. 문 : 그때 최린과 여하한 일을 협의하였는가. 답 : 그때 최린은 나에게 천도교 측에서는 독립선언을 발표하고자 하여 이미 그 선언서도 되고 있으나 이것은 야소교 측과 합동하여 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야소교 측의 의견을 어떠하냐고 물으므로 그날 밤 박희도집에 가서 그 일에 대하여 협의하고는 천도교 측과 합동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이 운동에 대하여서는 약 3000원의 운동비를 요하는데 천도교에서 조달하여 줄 수가 있는가 하고 물으니 최린은 그것은 나 개인으로는 할 수 없으나 의론하여 보겠다고 하므로 나는 천도교와 야소교가 합동하여 운동할 것을 말하고 돌아왔다. 6. 최남선 선생 취조서 문 : 피고는 금번 다수의 동지와 같이 조선독립운동을 하려고 한 일이 틀림없나. (비사 658면) 답 : 그렇다. 틀림없다. 문 : 그러면 그 운동의 전말을 자세히 말하라. 답 : (전략, 658쪽 후면) 그때 동인은(최린)금번 천도교와 야소교가 중심이 되어서 민족자결의 의사를 표명하려고 하니 그대도 가입하라고 하므로 나는 나의 주의로서 찬성하나 이에 가입하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 그대 등이 독립을 희망하면 그대들만이 하라고 하였더니 동인은 그러면 좋다고 하면서 그러나 민족자결의 의사를 표명하자면 그 방법으로써 선언서를 발표 아니할 수 없고 선언서를 발표하려면 문장이 필요하니 그대가 그 선언서를 담당하여 달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을 인수하였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인수하면서 표면 상 그대가 썼다고 할 것이며 만일 관헌이 발각하는 경우라도 내가 썼다는 것은 결단코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하니 동인도 이것을 서약하였다. 나는 이외는 일절 관계하지 않았으며 문장의 기안은 2월 초부터 중순까지 하였는데 기재사항을 타협하기 위하여 최린은 여러 번 왕복하였다. (후략) 문 : 피고는 이승훈을 불러오라고 김도태를 시킨 일이 있나. (비사 661면) 답 : 오산학교 일로 경성에 오라고 김도태를 보낸 일이 있다. 문 : 독립선언서는 어떤 재료에 의하여 기초한 것인가. (비사 661면) 답, 별다른 재료는 없고 최린이 말하는 취지와 나의 생각을 서로 논의해서 기초한 것인데, 동경유학생이 발표한 선언서는 일본을 배척하는 문귀가 있으나 나는 세계대세가 조선의 독립을 재촉하므로 조선은 일본을 배척하기 위하여 독립하는 것이 아니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기초한 것이다. 7) 한용운 선생 취조서 문 : 선언서 문면은 누가 지었는가. (비사 603면) 답 : 누가 제작하였는지 모르나 최린이가 담당하였다. 문 : 어느 곳에서 인쇄하였는가. 답 : 나는 확실히 알지 못하나 보성사에서 인쇄한줄로 생각한다. 문 : 3월 1일 선언서를 발표하려고 한 것은 무슨 뜻으로 동일을 정하였는가. (비사 610면) 답 : 그것은 선언서가 되는 차제(次第)로 곧 하기로 하여 동일로 정하였다. 문 : 최린과는 어느 때부터 알았는가. (비사 612면) 답 : 동경 유학할 때 알았고 조선에 돌아온 후에도 교제하고 있었다. 문 : 그 후 손병희와도 알고 있었는가. 답 : 그런 것이 아니고 금번 사건으로 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다. 8) 이종일 선생 취조서 문 : 선언서는 얼마나 인쇄하였는가. 답 : 2만 1천매를 인쇄하였고 인쇄비는 받지 않았는데 그 자본금은 천도교로부터 출자하였기 때문이다. 문 : 그 선언서는 언제 인쇄하였는가. 답 : 2월 27일 밤에 인쇄하였다. 9) 함태영 선생 취조서 문 : 피고는 이번 다수의 동지와 같이 조선독립운동을 한 것이 상위 없는가. 답 : 그렇다. 문 : 그러면 그 사실을 자세히 말하라. 답 : (전략, 3.1운동비사 647면) 그 이튿날 나는 이승훈과 같이 최린의 집에 갔는데 그것이 동월 21~2일 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최린의 집에 가서 동인에 대하여 운동 방법을 물으니 그 방법은 일본 정부에 대하여 조선의 독립을 허하여 줄 청원서를 제출하고 또 동일한 문서를 조선총독부와 의회 정당수령에게 보내며 한편 파리 강화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여 주기를 희망하는 뜻에 탄원서를 송부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인민에게는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기로 하였다고 하므로 나는 그때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인민에게 배부할 생각은 없다는 뜻을 말하였다. 최린은 정부에 청원하는 것은 당사자에 대하여 의견을 진술할 따름이므로 그런 것은 민족자결의 의사표시가 될 수 없으니 그대들이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의 방법과 상이하니 그대들과 합동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그러면 독립선언서를 먼저 배부하는가, 또는 정부에 대한 청원서를 먼저 제출하느냐고 물은즉 독립선언서 발표 당일 총독부와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한다고 하였다. 나는 독립선언서를 배부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의견과 다르니 다시 한번 협의한 뒤 통지하겠다 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 우리 집인가 그 장소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안세항·이승훈·박희도와 내가 집합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일에 동의하는 것이 어떠하냐는 것을 물은즉 일동은 우리는 원래 독립선언서를 배부할 의사가 없었으므로 천도교파와 분리하여 별도로 청원만 하기로 하였던 것이지만 이 주장을 포기하고 천도교파의 주장대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동시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자 하였다. 나는 그 일을 최린에게 통고하였다. (3,1운동비사 647면 뒤로부터 3번째 줄) 그 후 동월 27일 정동예배당 내 이필주집에 이승훈·박희도·이갑성·신홍식·최성모·박동완·신석구·김창준 등과 나와 집합하였으나 그때 이필주는 있지 않았다. 그때 집합한 것은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한번 보기 위하여 집합한 것이므로 나는 그날 최린에게 가서 그 문면 전부의 초안을 빌려왔다. 일동이 그 문면을 본 뒤 찬성하고 그 선언서와 청원서류에 민족대표를 열거하게 되었으므로 그 연서할 것도 승낙하였다. 그 후 이승훈과 나는 최린에게 가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일자를 의논하였는데 그것은 2월 26, 7일경이라고 생각된다. 그때 나는 이태왕전하의 국장이나 지난 후 3월 4일에 발표하는 것이 좋다고 한즉 최린이가 국장 뒤에 발표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마는 만일 국장 당일에 폭동이 일어나면 우리의 계획은 와해가 될지도 모르므로 어쨌든지 국장 전에 하지 않을 수 없는 바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하기로 하고 선언의 방법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선언서를 배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3.1운동비사 648면) 12. 민족대표를 내란죄로 기소 일제가 48인의 민족 대표에게 가장 날카롭게 추궁한 것은 독립운동 전개의 방법이었다. 즉 독립운동 전개의 방법을 무력이나 폭동에 호소하여 공공의 안녕질서를 파괴하고 국권을 전복시키려 한 것이 아닌가, 추궁하는 것이었다. 독립선언서의 문맥으로 보아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전개하도록 전 민족에게 호소하였음을 인지하면서도 일제는 이 운동을 어디까지나 내란죄 또는 그 선동죄로 올가미를 씌워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을 엄단하려고 가진 방법으로 추궁하였다. 이 대목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내란죄나 그 교사죄에 적용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보안법이나 출판법 위반으로 처리할 것인지 중대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당시 일반 여론으로는 일제가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을 내란죄로 몰아 사형 또는 무기형에 처하지 않을까 근심하고 있었다. 지방법원의 예심은 3개월간에 걸쳐 1919년 8월 1일 종결하여 우선 선언서 서명자 32명과 최남선 이하 16명, 합계 48명을 내란죄로 규정하여 일건 서류와 함께 고등법원으로 송치하였고, 고법에서 3개월간 예심을 진행한 후 이듬해인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는 예심에서 심리한 결과 본건이 내란죄에 해당되지 않고 단순한 보안법과 출판법에 위반된다하여 다시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반송하였다. 지방법원으로 반송된 사건은 이해 7월 중순에 공판이 개정될 것이라고 발표되어 사건 발생 후 1년 5개월만인 1920년 7월에 다시 공판이 시작되었다. 성사께서는 고법 특별형사부의 예심조서를 약 3개월에 걸쳐 두 번이나 받고 그 해 11월 28일 뇌출혈을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었다. 병보석을 위해 온갖 노력을 하였으나 허사로 돌아가고 운신조차 자유롭지 못한 채 말도 못하게 되자 이후 공판장 출두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건이 복심법원에 넘어간 뒤에도 담당 변호인들은 성사님에 대한 보석허가 신청을 법원에 제출하였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1920년 6월 12일 성사께서는 뇌출혈이 재발되어 혼수상태에 빠지는 동시에 이번에는 전신불수와 늑막염까지 겹쳐서 실로 재기불능의 중태에 빠졌다. 가족과 교회에서는 누차 병보석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제는 끝끝내 이를 허락 지 않았으니 일제의 잔인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1920년 7월 복심법원으로 넘어온 독립운동사건은 24일까지 사실심리를 일단 종결하고 25일부터 증거조사에 들어갔다. 변호사와 검사 간에 신랄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시간 이상의 검사의 논고 끝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고자 하는 것은 민족자결주의인데 전승국 일본은 그 영토 내에 있는 다른 민족의 자결을 결코 허용치 않을 것이며 민족자결론의 제창국이나 찬동국의 산하 약소민족들은 이로 말미암아 사분오열된 것이다. 그리고 피고들의 행위가 신의명령이요 정의와 인도에 입각한 행위이므로 하등 처벌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나 일본제국의 법률이 존재하는 이상 이에 상응되는 행위는 처벌받아야 한다. 끝으로 피고들은 온화한 방법으로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하나 결과는 이로 말미암아 민심을 동요케 하여 망동과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이러한 경거망동에 대하여 경고하는 뜻에서도 원판결을 취소하고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진술하였다. 1시간 이상에 걸친 검사의 논고에 대하여 변호인단도 “본건은 실로 세계적 대심판이니 재판관의 책임 또한 중대하다. 따라서 재판의 결과를 조선통치 상에 영향하는바 크므로 법률의 참정신에 비추어 그적용을 그릇됨이 없게 심중히 심의하기 바란다. 본건 기록을 관찰할 때 거기에 일관하는 것은, 첫째 : 피고는 모두 종교적 신앙심의 소유자이며 둘째 :피고는 각 종파에서 상당한 지위와 식견을 구비하고 연령도 대부분이 40세 이상이며 셋째 : 독립운동은 민족심리의 자연적 본능의 발로이며 넷째 : 본 운동 수행에는 힘써 폭력수단은 배제하였으며 다섯째 : 피고는 모두 자신의 행위를 자백하여 추호도 그 책임과 행위를 회피치 않은 것 등을 들어 변론을 구체적으로 전개하였다. 변호사와 검사 간에 신랄한 논쟁이 벌어지고 담당 판사들의 심문조서 검토 끝에 복심법원의 판결은 공판개시 40일 만인 10월 30일 내려지게 되었다. 민족지도자들이 구속된 지 만 1년 8개월 만에, 그리고 허다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는 날이다. 그동안 사건은 내란죄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지법에서 고법으로, 고법에서 다시 지법으로 내려온 후 공소불수리라는 덫에 걸려 심리도 다 종결하지 못한 채 다시 복심법원으로 올라와 이제 매듭을 짓게 된 것이다. 온갖 곤욕 속에 영어의 민족지도자들은 봄, 여름, 가을을 두 번씩이나 보냈고. 양한묵 선생은 그 사이 이미 옥중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오전 10시 복심법원에서 민족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이 형량이 언도되었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서울교구 김병휘 작가, 고창서 개인전 ‘빛으로 물든 시간’ 개최신앙을 바탕으로 예술적 영감을 펼쳐온 김병휘 작가의 개인전 ‘빛으로 물든 시간’이 전북특별자치도 고창 문화의 전당 전시실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는 (사)한국미술협회 고창지부(지부장 권애란)가 주관하고 고창군이 후원하는 ‘고창 미술작가 창작전시회’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김 작가는 유년 시절의 서정과 추억이 서린 고향 고창의 자연과 풍경을, 따스한 빛과 색채를 통해 표현하며 삶의 평온한 순간들을 화폭에 담았다. 김병휘 작가는 천도교 신앙의 정신을 작품 세계에 녹여내며, 일상 속에 깃든 하늘의 이치를 시각적으로 풀어내고 있으며, 국제 뉴 프렌드전 창작예술상, 대한민국 창작미술대전 우수상, 대한민국 교원미술대전 입선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을 지닌 중견 작가로, 한국 미술의 저변 확대와 후진 양성에도 힘써왔다. 권애란 지부장은 “빛과 색채의 감정이 어우러져 마음 깊은 울림을 주는 따뜻한 전시”라며 “김 작가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 화려한 결실로 맺어지기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이번 전시가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널리 알리고, 고창 지역 문화예술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천지이기 p.247-248 -
포덕 166년6월 29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진리탐구는 실천을 위한 시작"천도교중앙총부 전명운 교화관장은 지난 6월 29일 시일설교에서 ‘진리란 단순히 암기하는 지식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여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관장은 설교에서 현대 사회에서 진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지를 다각도로 성찰하며,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본 설교는 총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1. 진리 탐구와 소통의 중요성 진리는 혼자 깨닫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더 깊어지고 확장된다. 영상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곧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풍성하게 만들며, 이는 곧 공동체 속 실천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2. 진리와 형식의 차이 이해 영상은 종종 진리 그 자체보다 형식에 얽매이는 사회적 경향을 비판하며, 외형적 틀보다는 내면의 본질을 바라볼 줄 아는 통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리는 관념이 아닌 삶의 자세로 이어져야 함을 일깨운다. 3. 현대 사회의 변화와 진리의 중요성 급속하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의 가치’가 존재한다. 영상은 이러한 가치를 개인이 어떻게 자기 삶에 녹여내고 지속적으로 재해석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4. 인공지능 시대와 도구로서의 역할 인공지능의 발달로 정보 습득은 더욱 쉬워졌지만, 진정한 진리는 여전히 인간의 판단과 실천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AI는 도구일 뿐, 진리의 주체는 결국 인간 자신임을 환기한다. 5. 진리 탐구는 실천을 위한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영상은 진리를 아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그것을 살아내는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진리는 일상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구체화된다. 전명운 관장은 설교를 통해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앎과 삶의 간극을 좁히려는 교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
“미국의 이란 공격을 강력히 규탄한다”2025년 6월 23일, 한국의 212개 시민사회단체가 미국의 이란 핵시설 폭격을 강력히 규탄하며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주한미국대사관 인근 세종대왕상 뒤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는 참여연대, 민주노총, 민변, 진보당, 민주노동당, 보건의료단체연합 등 다양한 단체가 함께하며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행동 중단과 외교적 해법 복귀를 촉구했다. 참석자들은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에 이은 미국의 이란 핵시설 폭격은 국제법과 유엔헌장을 정면으로 위반한 침략행위이며, 중동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특히 이란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이지만, 이스라엘은 NPT 미가입이자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미국과 공조하여 폭격을 자행한 점에서 국제 핵비확산체제를 근본부터 흔드는 행위로 규정되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전쟁없는세상의 오리 활동가는 “군사적 해법은 없다. 외교와 협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강조했으며, 발언에 나선 이영아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팀장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협상 시한을 선언한 지 이틀 만에 폭격을 개시했다”며 “지금 세계는 미국의 일방주의와 이중기준 앞에서 핵전쟁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윤복남 회장은 “이번 공격은 명백한 유엔헌장 2조 4항 및 51조 위반”이라며, 자위권의 요건도 충족하지 못한 불법적인 선제공격임을 분명히 했다. 이어 “방사능 누출 위험을 동반한 핵시설 공격은 국제인도법에도 반하는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덧붙였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전진한 정책국장은 “핵시설 공격은 체르노빌 사태와 같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며, “미국과 이스라엘은 생명과 평화가 아닌 패권을 위해 비극을 자초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중행동 김재하 상임대표는 “팔레스타인, 이란, 우크라이나 등 전 세계 전쟁의 실질적인 배후는 미국”이라며, “이란 침공은 한국 국민의 삶과도 직결된 문제”라고 강조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대표는 “이것은 분쟁이 아니라 미국의 침략행위”라고 단언하며, “트럼프는 전쟁을 게임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진보당 신미연 자주평화통일위원장은 “트럼프의 협상 방식은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이라며, “한국도 미국의 강압적 요구에 굴복하지 말고 평화와 주권을 지키기 위한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행동을 즉각 중단하고, 대화와 협상이라는 외교적 해법으로 돌아올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마무리했다. -
천도교부산시교구, UN군 전몰장병 합동 위령의식 참석 “평화와 생명 위한 기도”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천도교부산시교구는 6월 23일 부산 UN기념공원에서 열린 ‘2025 UN군 전몰장병 및 호국영령 합동위령의식’에 참여하여, 나라와 민족, 인류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추모하고 천도교의 생명존중과 평화사상을 다시금 다짐하였다. 이날 위령의식은 부산종교인평화회의(BCRP, 대표회장 정산 스님) 주관으로 유엔기념공원 내 유엔추모관과 위령탑 앞에서 엄숙하게 봉행되었다. 천도교에서는 박차귀 부산시교구장이 참석해 헌화와 묵념, 종교별 추도식에 함께했다. 이 자리에는 불교, 천주교, 개신교(NCCB), 원불교, 유교 등 부산지역 6대 종단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이 함께하여, 국경을 넘어 이 땅에 생명을 바친 전몰장병 11개국 2,300여 명의 넋을 기렸다. 합동 위령의식은 헌화와 참배를 시작으로, 국민의례, 묵념, 내빈소개, 추도사, 종교별 추도식, 추모의 노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각 종단은 각자의 방식으로 평화의 뜻을 기원했다. 부산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 정산 스님은 추도사에서 “UN군 전몰용사들의 용기와 투혼을 기억하며, 우리 후손들이 보다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밝혔다. 천도교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은 “한울님의 도를 따르는 천도교인들은 언제나 생명과 평화, 인류 보편의 진리를 지향해왔다”며 “동학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의 이 자리가 하늘과 사람을 하나로 잇는 진실한 추모와 다짐의 자리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부산종교인평화회의는 종교 간의 교류와 협력을 바탕으로 부산 지역사회의 화합과 발전, 나아가 지구촌의 평화와 인권, 생태와 복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천도교부산시교구는 이러한 노력에 함께하며, 생명과 평화의 종교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다. 자료제공 천도교부산시교구 -
제4기 동학 7일 학교 <강원도편>, 해월의 여정 따라 인권·생태·평등 되새긴다오는 2025년 8월 9일(토)부터 15일(금)까지, 6박 7일간 진행되는 제4기 동학 7일 학교 <강원도편>이 강원도 인제, 홍천, 고성, 여주 등지에서 열린다. 이번 프로그램의 주제는 ‘해월 한울아이’로,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의 생애와 사상을 어린이와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체험하고 토론하는 교육 여정이다. 동학 7일 학교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전국 참가자 15명이 전 일정에 참여하며, 지도교사와 일부 학부모도 동행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강원도편은 해월신사의 역사적 여정을 따라 이동하며, 동학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강원도의 역사적 배경과 현장을 몸소 체험하는 데 중점을 둔다. 주최 측은 “사람을 한울처럼 섬긴다(事人如天)는 해월의 사상은 오늘날 인권, 평등, 생태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며 “아이들이 해월의 삶을 체험하고 함께 발표·토의함으로써 동학의 핵심정신을 오늘의 가치로 이어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정개요는 다음과 같다. 1일차(여주–인제): ‘해월의 꿈, 다시 일어나다’ 여주 해월 묘소를 참배한 후 인제로 이동하며 해월의 사상적 출발을 되새긴다. 2일차(인제): ‘스승을 지키다’ 인제 귀둔리의 동경대전 간행처와 비밀의 정원, 곤충박물관, 자동차 박물관 등을 방문하며 해월의 활동 무대를 탐방한다. 3일차(홍천): ‘여름 숲 도서관’ 갯골휴양림과 산촌박물관, 기적의 도서관을 방문해 생태와 지식의 의미를 되새긴다. 4일차(홍천): ‘우리는 동학소년회’ 아침가리 계곡에서 물놀이 활동을 통해 공동체성과 자연의 소중함을 체험한다. 5일차(고성):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전망대와 국립산악박물관 고산체험을 통해 분단과 평화의 가치를 교육한다. 6일차(고성): ‘바다와 나라를 지키는 자’ 낙산해수욕장 체험과 군부대 방문(섭외 중)을 통해 공동체와 국가의 의미를 탐색한다. 7일차(홍천–여주): ‘강원의 첫 횃불, 동학농민혁명’ 내촌면 물걸리, 동창 3·1운동 기념탑, 서석면 풍암리의 동학농민군 위령탑을 찾아, 동학의 항쟁 정신과 독립운동을 되새긴다. 이번 동학 7일 학교는 오늘의 사회 문제를 ‘동학’의 언어로 다시 질문하고 해석하는 창의적 인문교육 현장이다. 주최 측은 “해월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 위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작은 한울님’으로 자라나길 바란다”고 전했다. -
동학농민혁명, 학술과 예술로 되살아나다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최한 ‘2025년 동학농민혁명 연구·창작자 워크숍’이 지난 6월 26일부터 27일까지 전북 정읍의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일원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번 워크숍은 기존의 ‘신진연구자 워크숍’에서 학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예술 전반으로 범위를 확대하여, ‘연구·창작자 워크숍’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학자뿐 아니라 화가, 음악인, 방송 관계자 등 다양한 분야의 참여자 80여 명이 모이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이번 행사는 1박 2일 동안 세미나와 유적지 탐방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세미나에서는 중견·신진 연구자의 발표와 예술 창작 발표가 함께 어우러지며 혁명의 정신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중견 연구자로는 ▲고석규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교수가 ‘동학농민혁명과 대립하는 두 개의 기억’을,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이 ‘동학 접주 임명장 현황과 특징’을 주제로 발표했다. ▲박홍규 화백은 ‘그림으로 보는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동학정신의 예술적 구현을 소개했으며, 신진연구자인 ▲송진현(경북대 사학과 박사수료)과 ▲장영진(원광대 사학과 석사과정)은 각각 ‘19세기 말 상주 사족 사회의 동향—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을 중심으로’, ‘고부 군수 조병갑의 관계망과 정치·사회적 기반 분석’을 발표했다. 이번 워크숍은 202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동학농민혁명이 등재된 것을 계기로 새롭게 추진되고 있는 학술·문화 교류의 흐름 속에 있다. 2023년 6월, 동학농민혁명연구소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6월 29~30일에는 신진 동학연구자들과 기성 학자들, 동학농민혁명 관련 지자체 행정 담당자 등 30여 명이 모여 제1회 워크숍을 개최하며 그 첫걸음을 뗐다. 필자는 2022년 2월 「항일운동으로 본, 동학혁명과 3.1운동의 연관성」이라는 석사학위논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사료아카이브에 등재되었으며, 천도교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해당 워크숍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2024년과 2025년까지 3년 연속 참가하며, 천도교의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그 현대적 계승에 대한 논의에 지속적으로 함께하고 있다. 김양식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은 “이번 워크숍은 학술과 예술이 어우러진 자리로, 동학농민혁명이 기록유산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로도 대중과 만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천도교는 동학농민혁명의 뿌리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근원으로서, 이러한 학술·문화적 흐름을 적극 지지하며 동학의 정신이 민중 속에 살아 있는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길 염원한다. -
'후천을 열며' 시를 읽고후천을 열며 하나 - 현암 윤석산 눈 뜨며, 나의 젊음은 이내 금속의 퍼어런 칼날이 된다. 적막이 온 몸으로 기어와 숨통을 조이는 시간. 숨결의 돌기마다 숨어 스스로 푸른 인광燐光의 눈, 치켜뜨는 내 스무 살의 새벽. (임금은 임금이 아니고 신하는 신하가 아니고 아비는 아비가 아니고 자식은 자식이 아닌.) 죽어버린 시간 헤집으며 나는 5만 년, 도도한 물살을 거스른다. * 현암 윤석산 : 전 천도교교령, 한양대 명예교수 이 시는 수운 대신사, 20대 젊은 시절의 치열한 개벽의식, 봉건적 시대의 억압 속에서 깨어나는 자의식을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금속의 퍼런 칼날' 은 선천 5만 년의 유교의 봉건적 문화를 타파하려는 개혁의지를 시각적 촉각적 이미지로 표현했고, 적막과 숨통을 조이는 시간은 탐관오리와 양반들의 공포와 억압 속에서 제대로 숨도 못쉬며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아가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돌기처럼 튀어나오는 뾰족한 감정- 개벽의지-를 한 밤중에 쏘아보는 인광燐光이란 눈빛으로 표현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수운 대신사의 모습은 생기가 넘치고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강한 의지가 넘치는 모습이였을 것이며, 괄호 안에 나타난 문장은 유교의 윤리질서가 무너진 상황에 대한 절규이며 낡은 문명을 타파하려는 의지를 표현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죽어버린 시간'은 선천 오만년의 역사, '물살을 거스른다'는 그 낡은 문명에 대한 저항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의 주제는 억압된 조선의 봉건적 현실 속에서 후천 개벽의 문을 여는 20대 젊은 수운 대신사의 각성과 결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글, 오제운 (문학박사, 천도교 동귀일체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