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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17) "1918년 12월 1일 경운동 현 교당 기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3·1운동의 준비 포덕 60년(1919) 당시의 교구장은 이종수(李種秀)였다. 구성교구는 태천교구와 합하여 구성대교구로 되어 있었다. 대교구장은 태천의 이정점 어른이었으나 구성교구장은 이종수 어른이 맡았다. 교구의 중요 직책은 전제원(典制員)에 백응구, 공선원(共宣員)에 전중록, 금융원(金融員)에 박응준, 서기에 원명준이었다. 각 전교실의 전교사는 모두 20명이었으며 다음과 같다.(포덕 60년) 구성면 김정상, 동산면 김관화, 오봉면 김상련, 방현면 임찬흡, 이현면 강만영, 노동면 배윤직, 운계동 허희경, 깅상동 이치언, 서산면 최봉호, 백운동 김낙용, 송수동 이천길, 대성동 최광한, 신음동 전학수, 관서면 이대화, 사기면 윤태화, 왕당동 김용연, 조악동 이시영, 이 밖에도 중방동·청용동 였다, 장동 전교실이 있었는데 전교사는 정기환·노인화 였다. 교회건물은 구성면 우부동에 4동(38間), 서산면 남평동에 2동(6間), 백운동에 1동(4間), 동산면 덕화동에 2동(9間), 방현면 하단동에 1동(5間), 청룡면에 2동(8間), 처나면 탑동에 2동(7間), 사기면 송백동에 1동(3間), 신시에 1동(5間)이 있었다. 연원은 이종수·백웅구 계통과 원치영·김정삼 계통이 주가 되었고 선천의 김상열(月鳳 金商悅) 계통이 약간 있었다. 3·1운동 준비는 연원계통으로부터 착수되었다. 제1차 준비사업은 자금조달이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3·1운동 거사자금으로 포덕 59년(1918) 11월부터 본격적인 모금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의 문헌인 ‘천도교일반’이란 글에 보면 “동년 12월 28일 이미 약 9만원의 건축비를 신도로부터 연사(捐捨)케 하고 그 중에는 전혀 신도의 임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므로 반환해주도록 명한 바…”라고 하였다. 총독부는 천도교가 교당건축비라는 명목으로 모종의 자금을 모은데 대해 의심을 갖고 강제로 반환조치토록 하였던 것이다. 각 교구는 11월 초부터 모금에 착수, 1인당 5원 내지 10원씩을 목표로 약 50만 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구성에서도 약 1천호 정도가 모금에 응했으므로 그 금액은 5천 원이 넘는다. 포덕 52년(1911) 1년간에 납부한 월성미 총액이 8백9십7원(포덕 52년도 금융관 금전출납표)이었으므로 6배에 가까운 자금을 모아 올렸던 것이다. 다른 군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상한 각오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다는 절실한 심정으로 논밭을 팔고 소도 팔아 바쳤던 것이다. 이 자금 각출을 간과하고 3·1운동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일제 총독이 강제로 돌려주라고 하여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돌려준 것처럼 영수증만 발행하였다. 이런 사실이 후일에 발각되어 강계교구에서는 간부들이 기소되어 처벌받은 사실도 있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1918년 12월 1일 경운동 현 교당 기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모금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어 1월 말에 목표 액수가 완료되었다. 한편 총부는 정신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즉 중앙총부는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에 걸쳐 매일 하오 9시에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염원하는 기도를 봉행토록 하였다. 중앙총부는 이 기도를 각별히 진행시키기 위해 경성·해주·의주·길주·원주·경주·서산·전주·평강 등 9개 처에 대표기도소를 특설하고 주요간부를 파견하여 지도하였다. 각군 교구에서도 주요 간부들이 날마다 교당에 모여 기도식을 봉행하면서 장차 어떤 큰 일을 치르기 위한 마음다짐을 굳혀나갔다. 3·1만세운동의 본격적인 준비는 선천의 김상열(勉菴 金商悅)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전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월봉 선생은 선천에서 사기면으로 독립선언서를 보냈으며 이것을 다시 구성군에 비밀히 송달했다”고 사기면 허철 )선생이 증언하고 있다. 구성군교구에서는 선언서를 등사기로 비밀리에 더 많이 복사하여 각 면에 배포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운동 전개 연원과 지역관계로 운동은 3개소에서 각각 추진되었다. 즉 영북지방(사기면·천마면·관서면)은 신시(사기면 소재지)에서, 영남지방은 구성읍과 남시(방현면 소재지)에서 추진되었다. 구성읍은 구성면·서산면·동산면 등 3개면이 합쳐 준비하였고, 남시에서는 방현면·노동면·이현면 일부, 오봉면 등 4개면이 합쳐 준비하였다. 일본 총독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3월 10일(확인 곤란함)과 3월 11일에 구성읍과 남시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있었다고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한국독립운동사 1』에는 다음과 같이 일제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五) 철산·구성군 : …다음 구성군내의 운동은 읍내와 신시에서 주목을 끌 운동이 일어났다. 읍내운동은 3월 11일에 발생하여 3월 20일과 4월 1일에 각기 1천명 내지 3천명의 군중이 회집, 일 군경의 발포제지를 무릅쓰고 몇 차례씩 시위를 전개하였다. 신시에서는 3월 31일과 4월 1일의 양일간에 걸쳐서 약 1천 명 내지 1천 5백 명의 군중이 회집, 시위를 벌였으며 양일 다 살상자가 적지 아니 발생하였다.” (360면) (3월 10일과 20일의 시위운동은 확인하기 어려움) 평북도 장관이 정무총감에게 3월 31일자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四) 구성군 관내 : 동군 방현면 남시에서는 3월 11일 오후 2시 폭민 약 3백명이 일단이 되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고창하여 특히 헌병주재소에 쇄도코자 하였으나 미리 경계중인 구성 분견 소장이 해산시키고 주모자 15명을 체포하였음.”(760면) 三. 구성군 관내 : “3월 18일 오후 2시 사기면 신시의 장날에 편승, 야소교도 등을 중심으로 하는 폭민 약 3백 명이 독립기를 날리며 만세를 고창하고 헌병주재소에 밀려왔으나 즉시 퇴산시켰으며 주모자 10명을 검거하였음.”(762면) “본일(3월 11일) 삭주군 읍내에서 약 2천명, 구성군 읍내에서 약 3백...의 군중이 소요하여...”(764면) “三, 구성군 관내 : 읍내에서 31일 약 3백 명이 폭동을 일으켜 일단 해산되었으나 재기하여 수(遂)히 사상(死傷) 3명을 내었으며 의하여 파병을 하였음. 동군 남시에서도 동일(3월 31일) 폭민 5천명 이상이 집합하고 주재소를 파괴하였음. 또한 동군 신시에서도 동일 폭동이 일어났으므로 선주수비대에서 15명의 파병을 하였음.”(766면) “二. 구성군 관내 : 4월 1일 약 3천명의 폭민이 읍내에 습래(襲來), 사방의 문에서 진입코자 함을 발포 해산시켰으나 계속 불응하여 평양에서 소위이하 병정 4명의 응원을 받아 엄중 경계중임.”(769면) 이상의 평북 도지사가 총독부 정무총감 앞으로 보고된 보고서에 의하면 구성군 읍내에서 두 번(31일, 4월 1일), 방현면 남시에서 두 번(3월 11일, 31일), 사기면 신시에서 세 번(3월 18일, 31일, 4월 1일)씩 모두 7차례의 시위가 있었다.(3월 10일의 만세시위는 확인이 안됨). 이밖에 자료로써 주목할 만한 것은 이병헌(李炳憲)의『3·1운동비사』가 있고, 이용락(李龍洛)의 『3·1운동실록』이 있으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3·1운동)』가 있다. 세 가지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 (十二) 구성군 의거 : 3월 11일 오후 2시 경에 천도교 주동으로 남시에서 약 4백명이 회합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헌병의 총칼에 사상자 3명을 내고 주모자 15명이 체포되었고, 그 후 3월 30일에는 읍내와 남시에서 다수의 군중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해산을 당하였는데, 적의 총칼에 사상자가 10명이나 되었다. (3월 30일은 31일의 잘못인 것 같음) 이용락의 『3·1운동실록』 구성 : 3월 11일 오후 2시경 남시에서 약 4백 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사상자 3인을 내고 해산을 당하였다.“3월 30일 읍내와 남시에 2만 여명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해산을 당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10여인이 총살을 당하였고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3월 30일은 31일의 오기인 것 같음) 『독립운동사』 제9절 구성군 : 3월 11일 하오 2시경 군내 남시에서 군중 4백여 명이 시위투쟁을 벌여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로 몰려들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피검자 15명을 내었다. 3월 30일(31일의 오기인 것 같음)에는 오전과 정오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3백 여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벌여 읍내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헌병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다. 여기서 군중은 경찰과 충돌, 사상자 수명을 내고 해산했다. 3월 31일은 남시 장날이었다. 이날 정오를 기하여 5천여 명의 군중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일본 기록에는 이날 군중은 낫과 도끼를 들고 헌병주재소를 포위, 헌병들에게 폭행하였다고 했으나 이는 자기네들 발포의 구실을 삼기 위한 과장 보고이려니와 이날의 투쟁이 심상치 않았던 양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 7명과 피검자 5명을 내었다. 같은 날 31일에 신시에서도 일어났다. 즉 이날 정오에 1천여 명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벌였다가 헌병주재소로 몰려드니 헌병이 발포하여 부상자 1명을 내었다. 4월 1일에는 읍내와 남시와 신시 세 곳에서 일어났다. 읍내에서는 이날 상오 10시경 9백 명 가량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일본측은 헌병과 군대가 연합하여 이를 제지 해산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들은 끈덕지게 투쟁을 계속, 하오 5시에 이르러서야 부상자 3명을 내고 해산하였다. 남시에서는 전날의 투쟁을 이날에 재개하였다가 강제 해산되었으며, 신시에서는 이날 상오 10시경에 전날보다도 더 많은 1천 5백명 이상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재개하였다가 경찰의 발포로 군중측에 부상자 5명, 피검자 30명과 일본 측 부상자 4명을 내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확실한 것만 추려보면 구성군에서의 3·1만세시위는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즉 3월 11일에는 남시에서, 3월 18일에는 신시에서, 3월 31일에는 읍내와 남시 및 신시 등 세 곳에서, 4월 1일은 읍내와 신시에서 시위운동이 벌어졌다고 여겨진다.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On Propagating Truth, No.3In ancient China, there were five virtuous kings, who made wise laws and ruled the people with compassion and justice. Thereafter sages were born and they determined the movements of the sun, moon, and stars, and they made a calendar and a book of astronomy. Then, they determined the unchanging nature of the Heavenly Way.⁴ They taught that the mind and actions of humankind as well as all the changes of the universe depended on the Will of Heaven.⁵ The sages had reverence for the Will of Heaven and followed the Principle of Heaven.⁶ This passage is excerpted from the English edition of Donggyeong Daejeon, translated by Professors Suk San Yoon and Yong Kim. The verse is from On Propagating Truth, Number Three, in Donggyeong Daejeon. -
천도교 연구소, 연구위원 공개 모집 …교단 미래 전략 모색천도교중앙총부 산하 천도교 연구소가 교단의 장기적 과제 해결과 미래 발전 전략 수립을 위해 연구위원을 공개 모집한다. 이번 모집은 천도교가 당면한 교단 내부의 변화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환경 변화 속에서 종교의 역할을 새롭게 모색하려는 취지로 추진된다. 연구 분야는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전 분야로 열려 있으며, 지원 자격은 만 65세 이하이면서 박사과정 수료 이상의 학력을 갖춘 이들이다. 지원을 위한 별도의 신청서는 없으며, 연구 의지가 있는 학자와 전문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모집 기간은 포덕 166(2025)년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다. 천도교 연구소 운영 방향은 오는 10월 중순 열릴 예정인 차기 모임에서 구체화될 예정이다. 연구위원으로 활동할 이들은 향후 교단의 학문적 기반을 강화하고,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천도교의 역할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연락 및 문의는 천도교 현기사 성주현 상주선도사(010-3020-4893, heeamllo@chondogyo.or.kr)에게 할 수 있다. -
동두천교구, 우이동 의창수도원에서 야외 시일식 봉행천도교 동두천교구는 지난 8월 31일, 매 시일 교당에서 봉행해 오던 시일식을 우이동 의창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겨 봉행했다. 이날 시일식에는 교구 소속 교인 15명이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먼저 의암성사의 묘소에 참배하며 성사의 뜻을 기렸다. 이어 의창수도원에서 진행된 시일식에서 교인들은 3.1혁명을 주도한 의암성사의 정신과 ‘이신환성(以身換性)’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지상천국 건설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이날 시일식 설교는 서종환 의창수도원장이 맡아 더욱 깊은 교화의 시간이 되었다. 교인들은 교당이 아닌 성지에서 봉행한 특별한 시일식이 더욱 신심을 깊게 해주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강정환 동두천교구장은 “앞으로 한 달에 시일이 다섯 번 있는 경우, 네 번은 교당에서, 한 번은 의창수도원에서 봉행하자”는 방안을 제안했으며, 교인들은 이에 뜻을 모았다. 의암성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의창수도원의 역사적 의미를 재확인하는 이번 시일식 후 동두천교구 교인들은 앞으로도 교당과 수도원을 오가며 신앙과 수련의 터전을 함께 가꾸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2일○ 기원전 31년, 로마의 옥타비아누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맞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로마와 로마 영토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을 확고히 하게 했다. ○ 1879년, 항일 독립투사 안중근(1879~1910) 출생.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목에서 태어나 일제의 침탈이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에 나서,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초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하는 의거를 단행했다. ○ 1919년, 천도교청년회교리강연부 창립. 1920년 천도교청년회로 명칭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도교청년회는 같은 해 개벽사를 설립하고 종합잡지 『개벽』을 창간하고 계속해서 『부인』 『어린이』 『신여성』 『조선농민』 『별건곤』 『학생』 『농민』 『혜성』 『당성』 『제일선』 『신경제』 『당우』 등을 이어서 발행함. ○ 1923년, 일제, 간토 대지진을 빌미로 조선인들 학살. 9월 1일 일본 간토 지역에서 발생한 대지진 직후, 일본 사회 일부에서 조선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확대되었고, 조선인 거주지에서 집단 학살 발생. 일본 정부와 치안 당국, 자경단(민간 자율방범대)은 학살을 방조하거나 주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음. ○ 1945년, 연합군 사령부,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 발표. 일본의 패망과 연합국의 신속한 통치 필요성,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와 냉전의 시작, 한반도의 분단 고착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 1945년, 일본, 도쿄만에 정박해 있는 미 해군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호 갑판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연이어 떨어진 후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것은 8월 15일이지만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사인한 것은 이날이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1일○ 1983년,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이 일어나다. 뉴욕에서 서울로 향하던 여객기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되어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사건으로, 복잡한 국제 관계와 군사적 긴장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 1918년, 만해 한용운, 불교 잡지 『유심』 창간. 『유심』 창간호에는 국판 64쪽에 한용운의 시와 평론을 비롯해 최린, 최남선, 이능화의 논문이 실렸다. 1918년 12월 1일 통권 3호로 종간되었다. ○ 1939년, 독일,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1일부터 10월 6일까지 약 한 달 동안 폴란드와 나치 독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 개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사건이다. -
동학 정신과 3.1혁명 발자취 되새긴 임실 탐방포덕 166(2025)년 8월 26일, 중앙총부 강병로 종무원장과 전명운 교화관장은 독립운동가 삼혁당 김영원 선생의 순국 106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임실을 찾았다. 추모식을 마친 후, 윤철현 임실교구장의 안내로 임실군 청웅면 일대에 남아 있는 천도교 유적지를 탐방하며 동학과 3·1혁명의 발자취를 되새겼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자암 박준승 선생의 생가였다. 박준승 선생은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을 역임하며 교단의 교세 확장에 힘썼다. 1919년 3월 1일에는 의암 손병희 성사와 함께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그 공훈으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복원된 생가와 기념광장에서 일행은 선생의 굳건한 신앙과 항일 정신을 기리며, 오늘날 천도교인의 길과 사명을 다시금 마음에 새겼다. 이어 방문한 해월신사 설법 터는 임실 지역에 처음으로 동학 교리가 전파된 곳으로, 해월신사가 1873년 35일간 설법을 펼치며 교단의 뿌리를 내린 자리다.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 재봉기 시기, 해월신사가 머물며 교단과 민족의 장래를 깊이 고심했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해월신사 설법 터 표지석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전북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1137번지 해월신사 동학교리 설법장소 임실군에 동학이 처음 포교된 것은 1873년(표지석에 1878년으로 쓰여 있는 것은 오류) 3월이다. 동학의 2세 교주 해월 최시형 성생이 장수교인 김신종을 데리고 주치리 새목티 허선의 집에서 35일간 설법을 시작하신 것이 처음이며 강진면에서 15일간 설법을 하였다. 해월신사 은둔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1894년 9월 동학농민혁명 재봉기 이후 우금치 전투 등 격전이 벌어지는 시기의 대부분을 여기서 머물며 상황을 주시하였던 곳이다. 11월 25일 김제 원평에서 전봉준과 함께 손병희 동학군이 후퇴하여 갈담을 거쳐 찾아온 손병희(3세 교주)를 만나 12월 초 충청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해월신사가 머물던 은둔지는 지금은 고요한 산자락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교단과 민족의 앞날을 깊이 고민했던 해월신사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탐방단은 표지석 앞에 서서 옛 자취를 더듬으며, 천도교가 걸어온 길을 오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갈지를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
소박하나 굳건한 시천주의 발걸음, 임실교구 하계 기도회임실교구(교구장 윤철현)는 포덕 166(2025)년 8월 22일(금)부터 24일(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임실교당에서 하계 기도회를 열었다. 임실교구 교당은 지난 포덕 164(2023)년 11월 국가등록문화재 제799호로 지정되어 예전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복원을 기념하여 봉고식도 치른 바 있다. 현재 임실교구 교인 가운데 8명이 봉고식 이후 새로 입교한 교인들이다. 첫날인 22일 오후 5시 임실교당에 모인 교인들은 개회에 앞서 교당과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마음을 모았다. 이어 기도회 일정 안내와 더불어 ‘천도와 유불선’에 대한 강의와 토론이 진행되었다. 저녁 9시에는 기도식에 이어 자유토론을 진행하며 기도회 첫날을 차분히 마무리하였다. 23일 새벽 4시 30분, 교인들은 기상과 동시에 5시 기도식에 참여하며 하루를 열었다. 이어 주문 수도와 아침 식사, 식사 후 주문 수도, ‘주문에 담긴 생명 사상’을 주제로 하는 강의와 토론이 마련되었다. 점심 식사 후에는 박희숙 선도사의 지도로 천덕송 함께 부르기 프로그램이 이어졌고, 주문 수도와 ‘명명기덕 염념불망’, ‘천도교 수도법’에 대한 강의와 토론이 저녁 식사 이후까지 이어졌다. 첫날에 이어 둘째 날에도 자유토론 시간을 두고 교단과 교구 발전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다. 셋째 날인 24일에는 5시 기도식과 주문 수도를 마친 후 임실교구 발전 방안 논의에 집중하였다. 이어 시일식을 봉행하고 점심 식사 후 유적지 순례를 끝으로 3일간의 기도회를 마쳤다. 임실교구는 동학농민혁명과 3·1혁명의 중심지로서, 지역사와 교단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겨왔으며, 이번 하계 기도회는 그 역사적 정신을 오늘에 이어가고, 미래 교단의 활로를 모색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 -
제115주년 국치일 맞아 대한민국 독립선열 합동 추모대전 개최제115주년 국치일을 맞아 대한민국 독립선열 합동 추모대전이 포덕 166(2025)년 8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이번 행사는 (사)독립유공자유족회가 주최하고 (사)한국민족사회단체협의회가 후원했으며, 박인준 교령을 비롯해 각계 사회단체 대표와 관계자, 청년, 시민들이 참석해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뜻을 되새겼다. 행사는 국민의례와 독립운동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되었으며, 이어 이날 행사의 의의를 담은 동영상을 다 함께 시청했다.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국치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치욕의 날이며, 독립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계승해 민족정기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윤경로 한국민족사회단체협의회 상임대표는 경과보고에서 국치일 추모행사의 역사와 의미를 설명하며, 민족사의 교훈을 후세에 올바로 전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독립유공자유족회 박석무 상임고문은 1945년 12월 23일 순국선열 추념대회에서 김구(金九)가 낭독한 추념문 일부를 현대어로 옮겨 낭독했다. 이날 행사에 종교계 수장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한 박인준 교령은 “1910년 8월 29일은 우리 민족이 국권을 빼앗긴 치욕의 국치일로, 국론 분열과 국권 상실의 아픔을 남긴 역사적 교훈의 날”이라고 밝히고 “광복 80년이 되었음에도 일본의 침략 야욕은 끝나지 않았으며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천도교는 동학혁명과 3·1독립혁명, 6・10만세운동, 멸왜기도운동, 민족운동, 민주화운동에 가진 것을 다 바쳐 헌신하였으며, 앞으로도 이 정신을 되살려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정신으로 성력을 다 바쳐 나아갈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비상시국회의 김상근 상임고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자주통일평화연대 이홍정 상임대표의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부영 이사장,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 등도 추념사에 나서 민족적 단결과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연세대학교 정예슬 총학생회장이 결의문을 낭독하며, “청년 세대가 독립선열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정의롭고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국치일은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치욕의 날로, 이후 독립운동은 3·1독립혁명, 무장 독립투쟁 등으로 이어지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어냈다. 이번 행사는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다시는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다짐 속에 막을 내렸다. -
오늘의 소사(小史) ○ 8월 31일○ 1957년, 말레이시아 연방,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 말레이시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8월 31일을 ‘메르데카 데이’라 부르며 기념하며, 매년 8월을 ‘메르데카 먼스’로 지정해 한 달 내내 축제 분위기를 이어간다. ○ 1997년,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 20살에 왕세자비가 된 후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숱한 이야깃거리를 안고 살아온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가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지 1년 만에 36살로 생을 마감했다. ○ 2002년, 태풍 ‘루사’ 전국 강타. 8월 31일 오후 6시경 전남 고흥군에 상륙한 태풍 루사는 9월 1일 오후 3시 강원도 속초 지역을 지나기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며 전국적으로 사상 초유의 피해를 주었다. 인명피해 321명, 재산피해 5조 1,479억 원이 발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