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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1운동(1)머리말 3·1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 5000년 역사를 통하여 민족의 정기를 대내외에 천명한 가장 고귀한 역사적 유산이다. 3·1 운동으로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법통을 이어받아 오늘의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에도 3·1 운동의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거나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1 독립운동은 일제에 맞서 7,500여 명이 학살되고 16,000여 명의 부상자와 47,000여 명이 구속·수감되는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6월 말까지 끈질기게 투쟁했던 운동이었다. 그런데도 3·1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우리의 선열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준비 과정은 생략한 채, 아직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운동처럼 폄훼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되면 자괴감을 감출 수 없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기 10년 전인 1910년 8월,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이 발표되자 천도교 중앙총부 조회 석상에서 “오늘 왜놈에게 빼앗긴 주권 회복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독립운동의 선두에 나설 것을 천명하였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교회의 조직을 강화하고 정신적으로 무장된 독립투사를 양성하여 후일에 대비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부터 우이동에 수련도장인 봉황각을 마련하고, 장차 독립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교역자를 소집하여 종교적 수련을 통하여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는 한편, 독립운동에 소요되는 막대한 운동 자금을 조성하였다.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이듬해인 1919년 1월 불란서 파리에서 세계 정상들이 모여 대독 강화조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접한 의암 손병희 선생께서는 이를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즉시 전국 교구에 1919년 1월 5일부터 보국안민을 위한 49일 특별수련을 지시하는 한편,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3인을 불러 독립운동의 3대 원칙을 제시하고 독립운동에 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천도교는 지역 조직인 교구제와 동학 시대부터 유래된 인맥을 중심으로 한 연원제의 2중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에 37개의 대교구와 산하에 190여 개 교구, 그리고 300만의 교인을 가진 우리나라 최대의 종단이었다. 특히 의암 손병희 선생의 명령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거대한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3·1 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과 포용력, 그리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대교당 건축을 추진한 것도, 기독교와의 연합을 위해 운동 자금 지원을 결단한 것도,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유지해 온 것도 의암 손병희 선생이었다. 제1장 3·1 운동의 준비 1. 경술국치 1904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탈취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우리나라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 3월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했다. 1907년 7월 20일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병약한 순종 황제를 새로 즉위시킨 후, 8월 24일에는 입법·사법권에 관리 임용권까지 모든 분야에 통감의 승인을 받도록 한 7개 항목의 굴욕적인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고 8월 1일에는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1904년부터 1905년에 걸쳐 진행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일본도 20개월의 전쟁 기간 중 동원 병력이 100만을 넘었고 전사상자도 30만에 달했으며, 전쟁 비용도 국가 세입의 3배 반이나 되는 17억 2천만 원이라는 거액이 투입되었다. 더욱이 이 중 14억이 영국·미국 금융시장에서 공채로 빌려온 외채였다. 비록 전쟁에는 승리했으나 전쟁 수행 능력이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일본 정부는 그해 8월 서둘러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일본 국민들의 여론은 전쟁 배상금으로 30억 원의 거액을 러시아로부터 받기를 원했으나, 강화 회의 결과는 만주와 한반도의 독점 지배권과 사할린섬의 남반부를 할양받았을 뿐, 배상금은 단 1불도 받지 못하였다. 이 소식이 일본 국내에 알려지자 9월 5일, 흥분한 시민이 폭동을 일으켜 수상 이하 장관들의 관저와 경찰서·파출소·전차 등 닥치는 대로 투석, 파괴, 방화하여 그 결과 시민 측의 사상자 558명, 경찰 사상자 471명, 경찰서·파출소 등 364개소가 파괴 혹은 소각당하여 동경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여기에 일본 정부는 과열 발광 상태인 시민을 진정시키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반도에서 약탈·착취해 낼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여 서두른 끝에 1905년 11월 17일 보호라는 미명 아래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했다. 그리고 1907년 6월, 한국이 을사조약의 무효를 세계 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병약한 순종 황제를 새로 즉위시킨 후, 동년 8월 22일에는 입법·사법권에 관리 임용권까지 통감의 승인을 받도록 한 7개 항목의 굴욕적인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고, 8월 1일에는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공포된 7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휘를 받을 것. 2)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3) 한국의 사법 사무는 보통 행정 사무와 이를 구별할 것. 4) 한국의 고등 관리의 임명·면직은 통감의 동의를 얻을 것. 5)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것. 6)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관리로 등용하지 못함. 7) 1904년 8월 22일에 조인한 한일 외국인 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은 폐지할 것. 조약에 명시된 조항은 실제로 이미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정무 일체를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명문화하고 권한을 다소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 1909년 10월 26일, 북만 하얼빈 역 앞에서 안중근 의사가 국권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2월 2일에는 매국노 이완용이 애국청년 이재명에게 단도로 저격당하여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편, 일진회의 계속된 친일 행위로 의암 성사로부터 출교 처분을 당한 이용구는 시천교를 별립하고 일본군의 비호 아래 1909년 12월 4일 일진회 명의로 일본 정부와 총독부에 국권 침탈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결국 일제는 1910년 6월 먼저 경찰을 해산하고 대신 헌병이 치안 경찰 임무까지 겸직하도록 하는 한편, 동년 7월에 현역 육군 대장인 사내정의(寺內正毅)가 제3대 주한 통감으로 부임하여 8월에 국권 침탈을 단행하고 초대 조선 총독으로 눌러앉았다. (계속) 저자소개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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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구, 의암 손병희 성사 생가 탐방 및 야외시일식 봉행천도교한강교구는 지난 4월 6일(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에 위치한 의암 손병희 성사 생가를 탐방하고, 야외시일식을 봉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강교구 교인 20여 명이 참석해 성사의 뜻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야외시일식은 의암 성사의 생가 앞에서 엄숙히 봉행되었으며, 이후 참석자들은 생가 경내에 자리한 의암 성사 사당을 참례하고, 성사의 동상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교인들은 이어 인근에 위치한 의암기념관을 방문해 손병희 성사의 생애와 사상을 되새기고, 독립운동과 천도교 혁신운동에 헌신한 성사의 업적을 살펴보았다. 기념관 내 전시된 유물과 자료들은 참석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청주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도 함께 관람할 수 있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천도교한강교구 교역자는 “이번 탐방은 의암 성사님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역사 교육과 현장 탐방을 통해 교인들의 정체성과 신앙심을 더욱 고양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및 자료 제공 : 천도교 한강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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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단편소설 '거룩한 이의 죽음'을 듣고춘원 이광수가 대신사님의 순도를 개벽지에 단편소설로 게재한 것만 보아도 천도교를 보통사람뿐만 아니라, 학자나, 지식인, 저명인사까지도 믿거나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소설이라, 역사적 사실이 허구적으로 서술된 점이 매우 아쉽습니다. 소설 속에는 수운 대신사(水雲 大神師)님이 경주 서면 박대여와 부인 김씨 집에서 머물다 해월신사님이 찾아뵌 후, 관원에게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 갇혀 경상감사 서헌순에게 네 차례 고문을 받아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도교약사(천도교중앙총부 출판부. 2006)에는 '임술년 1862년 12월 10일 새벽에 선전관 정운구가 용담정을 급습하여 대신사, 박씨부인, 큰아들 세정, 그리고 제자들을 포함해서 23명을 체포, 대구 감영에 가두고 해월선생님께서 현풍도인 곽덕원의 고용인으로 변장, 옥리에게 재물을 주어 대신사님에게 사재밥을 드리며 뵙자, 대신사께서 담뱃대를 하나 주었는데, 그 속에는 '등불이 물 위에 밝았으니 틈새가 없고 기둥이 마른것 같으나 힘은 남아 있도다(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라는 시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를 '기둥은 말랐으나 힘은 남아 있다', '기둥은 말라버린 모습이지만, 여전히 힘은 남아 있다'. 즉 당신은 죽어가지만, 동학은 살아 여전히 이어간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약사에는 '나는 순히 천명을 받을 것이니 너는 멀리 달아나라(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되어 있는데,(천도교약사 42~44쪽 참조) 소설 속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유튜브 '책 읽어주는 여자'를 통해 해월 선생님의 용시용활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포덕의 방법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시, 소설, 수필 같은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 예술을 인터넷이나 유투브를 통해 천도교의 시천주 신앙을 널리 알리는 방법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유튜브 '책을 읽어주는 여자'를 통해 수운 대신사(거룩한 이의 죽음)의 순도를 5년 동안 이십육만 명이 들었다는 것은 과히 충격적입니다. 이처럼 포덕의 매체도 중요하지만, 포덕의 내용, 컨텐츠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내용을 만드는 전문가가 절실하다고 여깁니다. 신태인 교구장 운암 오제운 심고 ※ 『천도교약사』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일용행사가 도> 코너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와 체험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쓴 수기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개인의 주관적 견해와 체험이 담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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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총부 신임 집행부 봉고식 봉행4월 8일(금) 낮 12시 경주 용담정에서 준암 박인준 교령을 비롯한 중앙총부 신임 집행부 교역자들이 봉고식을 봉행하였다. 전명운 교화관장의 집례로 진행된 이번 봉고식은 개식-청수봉전/심고-주문 3회 병송-천덕송(우리의 길 1절)-심고/폐식의 순서로 봉행하였다. 봉고식 후에는 용담수도원장(최상락), 동학혁명기념관장(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 전시실장(신순재), 용담수도원 관리인(김명숙)의 도첩수여식이 있었다. 준암 박인준 신임 교령은 봉고문을 통해 “스승님께서 경신년 4월 5일에 한울님의 특별하신 감응으로 이곳 용담정에서 득도하시고 저희들에게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의 대업을 과제로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직책을 천명으로 여기며 오로지 정성과 공경과 믿음으로 소임을 다하며, 우리 앞에 닥쳐오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정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시천주의 진리가 이 땅에 널리 널리 퍼져나가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봉고식에는 박인준 교령을 비롯하여 김성환 연원회 의장, 신명식 연원회 부의장, 명승철 연원회 부의장, 강병로 종무원장, 정정숙 종의원 의장, 변종제 종의원부의장, 이국진 감사원장, 김 산 유지재단이사장, 성주현 상주선도사, 전명운 교화관장, 서소연 교무관장, 이동희 경리관장, 최인경 사회문화관장, 문범식 전서실장, 김혁태 종학대학원장, 최상락 용담수도원장, 서종환 의창수도원장, 남연호 중앙도서관장, 김명덕 여성회장, 신인간사 박해용 관리국장,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 신순재 동학혁명기념관 전시실장, 김명숙 용담수도원관리인, 최진영 사회문화관 차장 등 20여명의 교역자가 참석하였다. 한편 준암 박인준 교령을 비롯한 임원진은 봉고식을 봉행한 후 대신사 유허지와 태묘를 방문하여 참례를 마치고 경주시청을 방문하여 주낙영 경주시장과 면담을 하였다. 주시장과의 면담에서는 APEC 정상회담 행사 중 각국 대표 용담정 방문 추진, 용담성지를 천도교에서 위탁 경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대신사 태묘 진입로 등 확장 공사 건, 대신사 태묘일대 정비 요청 건, 해월 신사 생가 복원 사업과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사업 협조 건에 대해 논의하였다. 아래는 봉고문의 전문이다. 한울님 스승님 감응하옵소서. 오늘 대신사님께서 무극대도를 창명하신 용담성지를 찾아 불초 도생이 지난 3월 20일 제42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교령으로 선출되었음을 한울님과 스승님 앞에 삼가 받들어 고합니다. 오늘 봉고식에는 교령인 저를 비롯하여 김성환 연원회의장, 신명식 연원회부의장, 명승철 연원회부의장, 강병로 종무원장, 정정숙 종의원의장, 이국진 감사원장, 김산 재단이사장, 성주현 상주선도사, 변종제 종의원부의장, 전명운 교화관장, 서소연 교무관장, 최인경 사회문화관장, 이동희 경리관장, 문범식 전서실장 최상락 용담수도원장, 서종환 의창수도원장, 김혁태 종학대학원장, 남연호 중앙도서관장,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 김명덕 여성회장, 등 교역자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곳 성스러운 용담성지에서 스승님의 거룩한 뜻을 되새기면서 대도중흥을 위하여 성력을 다할 것을 한울님과 스승님께 굳게 맹세합니다. 스승님께서 경신년 4월 5일에 한울님의 특별하신 감응으로 이곳 용담정에서 득도하시고 저희들에게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의 대업을 과제로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직책을 천명으로 여기며 오로지 정성과 공경과 믿음으로 소임을 다하며, 우리 앞에 닥쳐오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정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시천주의 진리가 이 땅에 널리 널리 퍼져나가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고, 세상이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변화하도록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또한 천도교인들이 순일한 정성을 태산같이 쌓아 그 힘으로 민족 통일을 이룩하고 나아가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이 자리에 참석한 교역자들이 솔선수범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용담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을 이루고 이곳 구미산에 봄이 와서 온 세상이 무극대도의 꽃으로 다시 피어날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저희 새로운 집행부 교역자들은 대도중흥을 바라는 전체 교인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천도 정신으로 똘똘 뭉쳐 일할 것을 봉고하오니 한울님 감응하옵시고 스승님 감응하옵소서. 포덕 166년 4월 8일 교령 박 인 준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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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인간장학회, 후진 양성을 위한 장학증서 전달천도교 부산시교구 산하 새인간장학회는 포덕 124년 2월, 교인들의 폐품 수집 기금과 독지가 교인들의 특성금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본 장학회는 인내천(人乃天) 종지와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천도교의 4대 강령을 실천할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42년간 이어온 신앙 기반 장학사업 장학회는 설립 이래 42년간 지속되어, 수많은 중·고·대학생들에게 학업의 동기부여와 희망의 밑거름이 되어 왔다. 부산시교구를 대표하는 모범적 신앙 기반 장학회로 자리 잡은 새인간장학회는 초기 조성금 100만 원(폐품수집 40만 원, 동원포 연원회 10만 원, 故 김현철 주관도정 30만 원, 박정원 도정 특성금 20만 원)으로 시작되었다. 장학생 선발은 당시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각 1인을 선발해 20만 원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장학회 운영에 동참한 다수의 출연 이사들로 인해 기금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으며, 장학생 수도 함께 늘어났다. 수혜자 191명, 누적 지급액 3,307만 원 장학회는 포덕 138년부터 불우이웃에게도 장학금을 확대 지급하였고, 포덕 160년에는 천도교 종학대학원 입학생에게 입학금과 등록금까지 지원하는 등 대상과 범위를 넓혀왔다. 포덕 166년까지 누적 장학생은 총 191명, 총 지급액은 3,307만 원에 달한다. 특히 올해부터는 이사회 결의를 통해 장학금액을 인상하여 ▲중학생 20만 원 ▲고등학생 30만 원 ▲대학생 50만 원을 지급하게 되었다. 올해의 장학생: 김태현(해운대고), 장시현(부산대) 2025년(포덕 166년) 장학생으로는 해운대고등학교 1학년 김태현 군과 부산대학교 1학년 장시현 군이 선발되었다. 두 학생은 천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성실히 학업에 임하고 있어, 향후 교단과 사회에 기여할 인재로 기대를 모은다. 故 청암 김현철 도정의 뜻을 이어 새인간장학회 이사장인 정신당 박차귀 부산시교구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랫동안 장학회 이사장직을 맡아온 故 청암 김현철 전 동원포 도정의 후진 양성을 위한 큰 뜻을 잊지 않고 이어가겠습니다. 또한, 장학회 설립과 운영에 물심양면으로 힘써 주신 출연 이사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동덕님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사진 및 자료 제공 : 천도교부산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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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선생 탄신제, 충북 청원군 유허지에서 봉행지난 4월 8일 오전 11시 의암 손병희 성사의 탄신 164주년을 맞아 성사의 탄신제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 위치한 성사의 유허지에서 엄숙하게 거행됐다. 이날 행사는 의암 손병희선생 탄신제 봉향회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가 후원하였으며 행사에는 교인 및 지역 인사, 시민단체 관계자, 주민 등이 참석해 성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며 헌화와 분향을 올렸다. 참석자들은 성사의 생애와 업적을 되새기며 조국 독립을 향한 희생과 헌신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의암 손병희 성사는 동학 제3대 교조이자 3·1운동을 이끈 지도자로서, 비폭력과 평화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행사 관계자는 “의암 성사 유허지는 성사께서 남긴 사상과 정신이 깃든 의미 있는 장소로, 매년 탄신제를 통해 그 뜻을 기리고 있다”며, “우리 모두가 성사의 정신을 계승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의암 손병희 성사 유허지는 문화재적 가치와 함께 교육적 의미도 커, 매년 학생들과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역사의 현장이다. 사진제공 : 천도교청주교구 대덕당 주선자 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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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핀 벚꽃처럼 우리네 마음도상주해수욕장 가는 길목에 활짝 핀 벚꽃입니다. 아래 사진엔 상주전교실 입간판이 선명한데 그 옛날에는 전교실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활짝 핀 벚꽃처럼 밝고 아름답게 천도교 운수가 밝아지기를 기원해봅니다. 만개한 벚꽃처럼 우리네 마음도 밝고 화사한 봄같이 화해나기를 기원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글 時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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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이기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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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6년 천일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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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여성회 창립 101주년 기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