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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 11일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봉행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이 포덕 166년(2025) 12월 11일 오후 2시, 울산광역시 중구 여시바윗골 동학관 앞마당에서 130여 명의 교인과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되었다. 여시바윗골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10여 년의 주유천하를 마치고 정착하여 명상과 수련에 전념하던 곳으로, 1997년부터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어 유허비와 초가가 복원되었고, 오늘날에도 천도교(동학)의 뿌리를 전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번 봉고식은 중앙총부 서소연 교무관장의 집례로 진행되었으며, 청수봉전(울산시교구 덕인당 최정숙), 심고, 주문 3회 병송,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경과보고 및 약력보고(강병로 종무원장), 식사(박인준 교령), 축사(김산 유지재단 이사장), 헌화(수정당 김명덕 여성회장), 부산시연합 '한울합창단'의 천덕송 합창(제13장 기념송 1~3절), 심고, 폐식 순으로 봉행되었다. 강병로 종무원장은 경과보고를 통해 출세 200년이었던 포덕 165년(2024)을 기점으로 추진된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사업에 대해 대신사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학술·출판, 문화·공연, 성역화·기념물 건립 등 다각적인 분야에서 진행되었음을 밝혔다. 경과보고에 따르면, 학술·출판 분야에서 2024년 10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기념 컨퍼런스를 열어 동학·천도교의 역사와 미래 과제를 논의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읽기 쉬운 동경대전·용담유사』와 『수운 최제우 대신사 자료집』을 출간해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널리 알렸다. 문화 분야에서는 창작 뮤지컬 〈용담 가는 길〉 공연과 출세 200년 기념식, 동학·천도교 초기 유물 전시회가 이어졌고, 전국 수운대신사의 유적지를 따라 걷는 동학 답사 퍼포먼스를 통해 대신사의 피체 노정을 체험하는 기록 사업도 진행됐다. 아울러 성역화 사업으로 수운대신사 태묘 일대 정비를 완료했으며, 유물전시회 당시 제작된 흉상을 청동 흉상으로 완성해 오늘 울산 여시바윗골 유허지에 제막함으로써 출세 200년 기념사업의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 이번 흉상 제막은 대신사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개벽과 시천주의 가르침을 미래 세대에 전하는 상징적 결실로 평가된다. 박인준 교령은 식사를 통해 여시바윗골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와 대신사의 구도 행적을 짚으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대신사께서는 20세에 제세안민과 구도의 큰 뜻을 품고 이곳 처가에 의탁한 채 명산대천을 두루 살피며 인심과 풍속을 살피는 주유천하의 길에 나서셨습니다. 그러나 10여 년에 걸친 주유에도 구도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새로운 구도의 길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다시 여시바윗골로 돌아오셨습니다. 포덕 전 6년인 1854년 초옥을 짓고 농사와 수행을 병행하며 정진하던 중, 포덕 전 5년 1855년 3월 어느 날 한 이인이 나타나 건네준 책, 곧 『을묘천서』를 받는 첫 신비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여시바윗골은 창도 이전 가장 근원적인 성지로서, 적멸굴과 함께 한울님과 소통하기 위한 정신세계의 발원지가 되는 곳입니다. 『을묘천서』의 수득은 천도교 창명 과정의 중대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곳은 동학 천도를 여는 여정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봉고식 이후 참석자들은 준비된 차와 음료, 다과를 나누며 담소의 시간을 가졌다. 천도교 창도의 정신이 깃든 여시바윗골에서 열린 이번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은 대신사의 구도 행적을 기리고, 동학·천도교의 정체성과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새기는 자리로 평가되었다. -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 봉행천도교중앙총부는 포덕 166년(2025) 12월 11일(목) 오후 2시, 울산시 중구 원유곡로에 위치한 수운 최제우 유허지 동학관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을 봉행한다. 이번 봉고식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숭고한 정신과 대신사의 크신 행적을 기리는 동시에, 동학이 제시한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과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지니는 의미를 다시금 환기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특히 천도교 성지인 울산 여시바윗골 유허지에 흉상을 봉안하고 제막식을 진행함으로써, 동학 창도 정신을 시대에 맞게 계승하고자 하는 천도교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이다. 중앙총부는 이번 제막 봉고식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정신이 한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뿌리내리고 확장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천도교중앙총부 서소연교무관장은 “수운대신사님의 가르침은 시대를 넘어 인간 존엄과 공동선의 가치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정신적 유산”이라며 “뜻깊은 자리에 많은 분들이 함께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하고 천도교중앙총부 교무관이 주관하는 가운데, 울산 여시바윗골 유허지 보존회가 후원하여 진행된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은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하며, 관련 문의는 02-6488-6825로 하면 된다. -
수운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 참가 신청 안내중앙총부는 포덕 166년(2025) 12월 11일(목) 오후 2시, 울산 중구 원유곡길 106-1에 위치한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수운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을 봉행한다. 이번 봉고식은 수운 대신사의 성상(聖像)을 모시는 뜻깊은 자리로, 교단과 교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역사적 행사다. 참가를 희망하는 교인은 안내 포스터에 기재된 방법을 따라 신청하면 되며, 선착순 100명을 대상으로 접수를 진행한다. 중앙총부는 행사 원활한 준비를 위해 개별적으로 참석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신청서를 작성하여 인원 파악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번 행사에는 별도의 교통편이 제공되지 않는다. 다만 서울 수운회관 출발 참석자는 오전 7시~8시 사이에 출발할 예정이며, 서울·경기·수도권 신청자는 12월 3일 신청 취합 후 개별 안내가 이뤄질 예정이다. 문의_중앙총부 교무관 02)6488-6825, 6488-6826 -
김준혁 의원, 김재원 의원, 천도교 예방… 동학 · 천도교 역사 복원과 국가적 지원 논의민주당 김준혁 의원과 조국혁신당 김재원 의원은 지난 5월 20일 천도교중앙총부를 예방해 박인준 교령 등 교단 관계자들과 면담하며 동학·천도교의 역사적 가치와 국가 차원의 지원 필요성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했다. 준암 박인준 교령은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한울님으로부터 다시개벽의 무극대도를 받아 창도한 자생적 민족사상으로, ‘보국안민’과 ‘만민평등’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의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이 사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 잡았습니다."고 밝히며, "천도교는 3.1운동 당시 개신교·불교계와 연합해 민중혁명의 중심에 섰고, 이후 교육·출판·여성·농민·어린이 운동을 통해 민족계몽운동에 기여했으며 임시정부와 협력해 항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교령을 비롯한 교역자들은 김준혁 의원, 김재원 의원과의 만남에서 경주 용담정과 서울 봉황각 성역화, 동학역사문화공원 조성 및 동학교육수련원 수탁 경영, 천도교 방송 설립과 콘텐츠 개발, 의암 손병희 묘소 인근 3.1기념관 건립(보훈처·광복회 협조), 어린이날 행사 국가적 특별지원, 동학사상 학술 연구기관 설립과 동경대전·용담유사 현대화, 동학 순례길 조성, 교과서 내 동학농민혁명·3.1운동 서술 보강 및 혁명 참여자 서훈 재심, 3.1절 기념식 정례화 등을 건의했다. 또한 2023년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후 누락된 동학 관련 간행물, 문서 등의 추가 등재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해월 최시형 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아 세계학술대회 개최, 단성사 앞 해월신사 동상 건립, 해월기념관 건립 등의 기념사업 추진도 제안했다. 특히 동학 시대 이래 만들어진 출판물들이 한국 근현대사의 소중한 기록임을 강조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한 ‘동학아카이브(가칭)’ 구축 및 동학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 지원도 시급하다는 점을 요청했다. 아울러 동학이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크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동학 용어, 인물, 사건 등에 관한 사전 작업이 미흡하다며 ‘동학사전’ 편찬 작업에 대한 지원도 함께 건의했다. 김준혁 의원과 김재원 의원은 "동학 사상을 계승하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에도 큰 공헌을 한 천도교가 앞으로 새로운 정부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조명 받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말하며, “천도교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족정신을 이끌어온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며 “그 역사적 위상 회복과 정신 유산 계승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미래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사진 : 교령사 -
한강교구, 의암 손병희 성사 생가 탐방 및 야외시일식 봉행천도교한강교구는 지난 4월 6일(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에 위치한 의암 손병희 성사 생가를 탐방하고, 야외시일식을 봉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강교구 교인 20여 명이 참석해 성사의 뜻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야외시일식은 의암 성사의 생가 앞에서 엄숙히 봉행되었으며, 이후 참석자들은 생가 경내에 자리한 의암 성사 사당을 참례하고, 성사의 동상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교인들은 이어 인근에 위치한 의암기념관을 방문해 손병희 성사의 생애와 사상을 되새기고, 독립운동과 천도교 혁신운동에 헌신한 성사의 업적을 살펴보았다. 기념관 내 전시된 유물과 자료들은 참석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청주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도 함께 관람할 수 있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천도교한강교구 교역자는 “이번 탐방은 의암 성사님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역사 교육과 현장 탐방을 통해 교인들의 정체성과 신앙심을 더욱 고양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및 자료 제공 : 천도교 한강교구 -
3·1정신은 기록·기억·기념되어야 할 시대적 유산 “역사 왜곡이 웬 말인가요?”3·1정신은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며 기념해야 할 시대적 유산이다. 1905년 을사늑약 후 일본에게 조선이 강제로 합병되었던 1910년, 우리는 나라 잃은 설움과 핍박과 압박의 고통으로 하루하루가 인격이 무시되고 차별과 불평등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용감하고 끈질긴 우리 민족은 1919년 3·1만세 운동으로 그 찬란한 힘을 발휘하였고 전 세계는 이에 놀랐다. 위대한 3·1정신은 민족의 유산으로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기록하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역사는 한순간에 왜곡되기 때문이다. 역사왜곡으로 문제가 되어서 불편한 외교관계가 왕왕 있어 왔다.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불편한 관계를 가져 왔었다. 특히 3월이 되면 일본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한다. 일본은 1982년 7월에 일본의 초, 중,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한국의 고대사, 근대사, 현대사 등을 왜곡 기술하면서 특히 현대사 부분을 심각하게 왜곡하여 기술하였다. 한국 “침략”을 “진출”로, “외교권 박탈과 내정 장악”을 “접수”로, “토지약탈”을 “토지소유권확인 관유지로의 접수”로, “독립운동 탄압”을 “치안유지 도모”로, “조선어말살정책”을“조선어와 일본어 공용어 사용”으로, “신사참배강요”를 “신사참배장려” 등으로 왜곡 기술하였다. 이에 국내언론과 일본언론에서는 일본 정부의 처사를 강력히 비판하고 시정을 촉구하였으며 국내에서는 대대적인 반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정부로부터 1982년 8월 26일 문제된 부분에 대해서 시정하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만족할만한 역사 왜곡 부분이 시정되지 않은 채 문제로 남아 있다. 역사 왜곡은 이렇게 다른 나라에 의해서 왜곡될 뿐만 아니라 국내 학자에 의해서 혹은 정부에 의해서, 그리고 요즈음 대세인 유튜버들에 의해서 왜곡되기도 한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인터넷의 발달로 한 사람의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인해 발언한 잘못된 역사가 일파만파로 아주 쉽게 대중들에게 전파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칭 역사 강사라는 사람이 정치적 이념 논리에 휩싸여 학생들을 혹은 국민들을 잘못된 역사의 길로 선동하고 있으니 너무나 마음 아픈 현실이다. 2023년 육군사관학교 교내에 설치한 독립군 및 광복군 영웅 흉상 철거 논란과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공동 청사에 설치된 홍범도장군의 흉상 철거 논란에 관한 일이며, 최근에는 김구 선생이 중국인이라는 왜곡된 해석 등이 그 분들의 독립운동 정신과 활동에까지 누를 끼치게 된 점은 3·1절을 맞아 머리숙여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무뢰함이 선을 넘어 서고 있는 현실에서 역사 올바로 세우기는 요원한 시대정신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2024년 외교부 홈페이지에서는 2023 일본개항 부분에 “일본의 과거사 반성”, “역사왜곡” 언급이 통째로 빠져버렸다. 우리가 국제외교상 양보를 하더라도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지켜야 하는데 그 마지노선이 무너져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친일청산이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일어 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친일청산은 우리의 과제이며 친일청산이 깨끗하게 이루어 지는 날이 공명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 역사가 바로 서는 사회가 될 것이다. 제106주년 3·1절과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3월에 남남갈등이 극에 치닫는 시점에서 3·1정신의 비폭력 평화의 대통합 정신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3·1정신을 선양하고 교육할 수 있는 성역화 사업이 무척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정정숙 (천도교선도사, 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천도교 소장 유물 전시회천도교중앙총부는 11월 4일 오전 11시,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이하며 천도교 소장 유물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전시 오픈식에 앞선 천도교 의례는 정갑선 교무관장이 집례를 맡아 심고-청수봉전-주문 3회 병송을 봉행하였다. 윤석산 교령은 환영사에서 "동학의 시대에서 천도교 시대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진 동학 천도교의 스승님들과 선열들께서 남긴 소중한 자료를 살피며, 그 역사와 정성의 숨결을 함께 느끼시기를 심고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전시 오픈식은 배우 황 건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오프닝 공연으로 아코디어니스트 정태호의 공연이 있었다. 이어 윤경로 근현대사기념관장의 축사, 주요 내빈들의 테이프 커팅 등으로 개막행사가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전시작품 라운딩을 마치고 리셉션을 갖고 폐식 후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번 전시는 '다시 개벽'이라는 주제로 열리며 경전, 법설 및 교서, 서적, 도첩, 문서, 의암성사유물, 수의당 주옥경 종법사 유물, 낙관, 해월신사, 의암성사 존영, 거북구 등으로 구성된다. 제 1전시실에는 동경대전 계미중하판(목판본, 176mm X 268mm), 용담유사 계미중추판(목판본, 200mm X 300mm), 관군보고서 및 무장동학포고문(1,800mm X 220mm), 한일교섭사(필사본), 미도인표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2전시실에는 낙관, 해월신사, 의암성사 존영, 거북 구, 의암성사 건국공로 훈장증, 수의당 주옥경 종법사의 유물인 난초, 대나무, 매화 등의 작품과 옥비녀, 의암성사 건국공로 훈장, 성(聖) 옥돌함(장 130mm X 폭 100mm X 고60mm)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기록물에 등재된 무장기포 포고문 등의 유물 9점, 의암 손병희 성사의 유물 및 사진자료까지 선보인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출세 200년을 맞아 시대와 세대를 넘어 전해져 온 천도교의 정신과 가치가 담긴 특별한 유물들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기념전시는 4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오는 17일(일)까지 열린다. 많은 교인 및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 -
‘진주소년회 104주년 기념식’ 교육지원청서 열려진주소년회 104주년 기념식이 지난 10일 진주시 중안동 진주교육지원청 앞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동학소년회 주최, ㈔동학소년회 경남본부 주관, 천도교 진주교구 후원으로 열렸다. 행사에는 진주 지역 어린이, 청소년, 교사, 천도교인, 일반 시민 등 40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기념식은 기념사와 동학소년회 선언문 낭독, 독립 만세 퍼포먼스 등으로 꾸려졌다. 정의적 천도교 진주교구장은 기념사를 통해 “100년 전 거침없이 나아가 일어난 진주소년회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이어져 멋진 세상을 만드는 주인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동학소년회는 내년 소파극단 공연 ‘방정환과 소년회 이야기’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진주소년회 관계자는 "1920년 진주소년들의 뜨거운 나라 사랑을 오늘 우리 동학소년회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100여년 전 거침없이 나아가 일어난 진주소년회 정신은 우리에게 이어져 더욱 강하고 멋진 세상을 만드는 주인이 되길 바랍니다. 더운 날씨에 함께 해주신 무지개 소년단과 관련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라고 밝혔다. -
부산 동학의 힘, 힘차게 달려온 1년창립 1주년을 맞이한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의 허채봉 대표를 만났다. 허채봉 대표는 오랫동안 동학을 기반으로 활동해 왔으며, 동학을 주제로 학위과정을 마친 연구자이기도 하다. 열정적인 활동을 이어온 허채봉 대표에게 이 시대 동학, 천도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동학의 가르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허채봉 대표를 만나보자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 창립1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기념사업회를 어떻게 창립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2022년 2월에 동학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이 2023년 1월에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아카이브에 등재되면서 동학 신진연구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그때 우리 천도교단 활동과는 조금 결이 다른 동학을 주제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중에서도 2021년부터 동학 서훈 운동을 했던 분들, 동학혁명 유족회, 그리고 전국의 기념사업회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제가 활동하는 부산에도 동학 기념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작년 6월이었고 동학 신진연구자 모임을 한 이후 7월 8일에 기념사업회를 창립한 것입니다. 그 흐름에 이어 전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전국 워크샵이 열리기도 했고요.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뤄졌습니다. 첫 번째로 연구자로서 논문을 쓴 게 계기가 됐을 거고 동학 신진연구자 워크숍에서 다양한 분들을 가면서 활동의 폭이 넓어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 과정들에는 굉장히 깊은 고민과 또 오랜 성찰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동학을 하기 전에, 오랫동안 택견이라는 무예를 했어요. 택견은 우리 민족 무예로서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76호로 지정돼 있고, 2015년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세계 인류 무형의 유산이면서 수련종목인 택견을 하면서 새롭게 현대의 스포츠로 계승하는 일을 해왔고, 그런 과정들을 한 30년 정도 하다보니 동학을 알게 되고부터는 자연스럽게 내가 무엇을 할 건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모색해왔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동학의 역사를 찾고, 알아가는 과정이 삶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동학을 접하게 된 최초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천도교에 입교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2016년도 가을에 녹색당 농업특별위원회의 농업 먹거리 활동을 했는데 흔히 우리가 ‘녹색농부’라고 말해요. 이분들 중 저력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어느 날 녹색 농부 중 한 선생님께 여쭸어요. 혹시 종교가 있으시냐고요. 그냥 묻고 싶었어요. 그분 종교가 ‘천도교라’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어요. 천도교가 뭔가요? 천리교인가요? 천리교는 일본 종교잖아요. 그게 아니래요. ‘동학’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어요. 동학이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랬더니 맞대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동학농민혁명이 종교란 말이에요? 그렇게 또 물었어요. 그게 종교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진다는 거예요. 나는 민족무예 택견의 지도자로서 몇십 년을 살았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종교였다는 것을 몰랐어요. 뒤통수를 딱 맞는 느낌이었어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동학농민혁명이 그 순간에 있었던 이벤트나 사건이 아니었고 계속 어떤 흐름 속에서 일어난 건가, 그러면 왜 나는 그런 걸 몰랐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한 며칠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며칠 고민을 하다가 천도교중앙총부에 전화를 했어요. 입교 같은 걸 할 수 있냐고요. 전교인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지도 물었어요. 나는 천도교 안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전교인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선생님한테 가서 그랬어요. 천도교에 입교를 하겠다고요. 선생님, 전교인이 되어 주세요. 이렇게 얘기를 했죠. 그때 목암 전희식 선생님이 책 <소농은 혁명이다> 북콘서트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천도교중앙대교당’이라는 곳을 가 봤지요. 그날이 2017년 포덕 158년 4월 9일이었는데, 4월 5일 천일기념일이 있던 주의 시일, 4월 9일이었습니다. 그날 입교를 하게 된 거예요. 그때 입교를 하신 거군요. 그럼 그 전에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전혀 모르셨나봐요. 와보시니 어떻던가요? 압도적인 어떤 기운이 느껴지시던가요? 첫 느낌이 예수상이나 십자가, 부처상과 같은 우상이 없고 궁을기가 보였어요. 대교당 건물이 굉장히 아름다웠고요. 제가 20대 때 길 건너 원서동에 살았거든요. 그런데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몰랐어요. 처음 대교당에서의 모든 느낌이 다 좋았어요. 청수봉전을 보며, 여성이 청수를 봉전해야 그 의식이 시작된다는 게 좀 신기했고 우상이 없는 것도, 성직자 없이 일반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시일을 모시는 것도 참 놀라웠어요. 고정관념을 깨는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고 신선했어요. 입교를 한 이후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 대교당에서 전희식 선생님의 북 콘서트를 보러 갔는데, 일주일 뒤에 전주에서 또 북콘서트를 하신다고 하더군요.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에서요. 그 말씀을 듣는데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에 너무너무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당시 임형진 종학대학원장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해부터 종학대학원 전주 분원과 부산 분원이 만들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부산 분원 개원소식을 기다렸고, 이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종학대학원 부산분원이 열렸습니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천도교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활동하시는 교인분들 한분 한분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고 사회 곳곳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이 시대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가 창립 후 1년 동안 바쁜 걸음으로 달려오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부산은 알다시피 동학의 유적지가 없잖아요.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놓고 보니까 갈 데가 없더군요. 창립을 했는데 기념사업회에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창립하자마자 기념재단에서 동학농민혁명 편람을 보내왔어요. 전국에 있는 동학 유적지를 다 모아놓은 거였어요. 경상도권 전라도권 경기권 충청권 등 전국에 있는 권역별로 쭉 있는데 등급이 A, B, C, D 이렇게 나뉘어 있는데 부산에 딱 두 곳이 있는 거예요. 그것도 B급이더라고요. 1893년, 부산성에 “척왜양창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때는 천도교인이 부산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붙어 있었는지 참 신기하다 이런 식으로 소개가 되어 있고 출처는 없었어요. 그리고 또 두 번째는 일본군 토벌대가 주둔을 했던 곳인데, 그곳이 재단의 자료에서는 '40계단'이라고 나오더군요. 부산 중앙동의 40계단은 유명한 곳이에요. 그곳은 6. 25 동란 때 피란민들이 살던 곳이에요. 그렇게 토벌군들이 있었던 부산 이사청, 그리고 국립강제동원역사관에 있는 나인협 흉상을 세 번째 유적지로 해서 세 군데가 생긴 거예요. 그게 너무 극적으로 느껴졌어요. 기념재단에 감사했어요. 내 논문을 아카이브에 등재해준 것도 감사했지만 부산 지역에 동학유적지를 밝혀준 것이 반가웠거든요. 그래서 우리 대학원에 자랑도 했어요. 동학농민혁명재단 아카이브에 논문 등재됐다고요. 축하도 많이 받았죠. 재단에서 보내왔던 동학농민혁명 편람이 기념사업회에 큰 도움이 됐지요. 동학혁명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부산지역에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자리를 잡아가고 계시는데,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이렇게 1년을 돌이켜보면 꽤 많은 일을 했어요. 저 혼자 한 게 아니고 도와준 분들이 참 많더군요. 감사한 일이죠. 그때그때 나타나서 함께해준 사람들이 반드시 있었어요. 마침 제가 올해 부산시 택견 단체 부회장의 마지막 임기거든요. 올해를 끝으로 활동의 방향을 동학으로 전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버릴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30년 넘게 택견을 하면서 배운 것들이 또 이렇게 쓰이게 될 테니까요. 기쁜 점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동학혁명 서훈 운동을 하면서 천도교를 알려 나가고 천도교의 뿌리가 결국 동학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천도교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 귀를 열고 듣기 시작했다는 거죠. 최근 전국 동학혁명 연대가 봉황각에서 취회를 했어요. 저녁 9시 기도식도 하고 주문 수련을 함께 하시더군요. 대교당에 가서 시일식도 같이 참여했고요. 이럴 때 천도교인들이 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산이 동학의 역사나 유적에 대해서는 불모지라고 생각을 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까 유적지는 유적지대로 갇혀서 과거의 기억 운동에만 집중해서 하는데, 저는 부산이 조금 더 역동성을 가질 수 있는 민주시민교육 운동과 함께 동학과 궤를 같이 하면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아서 보람이 큽니다. 기념사업회가 생기기를 기다려준 것만 같아요. 이렇게 동학에 대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계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택견을 하면서 어떤 소명이라는 거를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은 각자의 소명이 있는데 나의 소명은 이제 오래된 전통의 부활 그러니까 “Rebirth”, 재탄생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낡은 것의 가치를 새롭게 이끌어 내면서 오늘에 맞는 정서나 감성으로 새롭게 콘텐츠로 부활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게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택견을 할 때에도 시나리오를 쓰고 작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동학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어요. 부산기념사업회 1년, 그렇게 딱 한 걸음을 걷는 동안 같이 걷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그만큼 기대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궁금합니다. 부산기념사업회를 만들면서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연구소입니다. 말하자면 부산동학기념사업회를 잘하기 위해서 동학연구소가 있어야 되겠고, 궁극적인 목표는 동학혁명 서훈 국민운동이나 전동연(전국동학연대)을 통해서 동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보를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또 전동연에서 함께 하고 있는 장흥 무명동학군 묘역 성역화나 이런 게 다 맞물려 있잖아요. 이러한 전 국민적인 움직임과 함께 동학이 국민적 필수 인문 과목으로 자리 잡는 것, 그게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운동이 되겠네요. 부산기념사업회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통해서 하는 건데 이제 그런 뜻을 펼쳐나가면서 전 세계 인류의 교양 과목이 되는 게 동학의 포덕 사업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천도교를 해서 참 행복한 사람이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를 할래, 천도교를 할래?" 하면 난 천도교를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범신론자였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우주적인 어떤 질서 속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알 뿐이었어요. 그런데 천도교의 경전을 접하면서 내 마음속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대로 글로 적혀 있어서 참 놀라웠어요. 경전에 모든 게 다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더 천도교에 대해 알고 싶고 천도교의 진리를 깨닫고 싶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기념사업회 일을 하면서 펼쳐 나가고 싶습니다. -
한울님의 은덕으로“나는 천도교를 안 한다고 했는데, 우리 고모부가 나를 포덕 시키기 위해 대구에서 부산까지 오셨어요. 저를 포덕 시켜야 집안이 다 포덕이 된다고요. 새벽에 5시 기도식을 하시는데, 가만히 혼자서 생각하니 아, 이거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고모부가 나 때문에 이렇게 오셨는데 안 되겠다. 벌떡 일어나서 고모부, 저 입교하겠습니다, 말씀드리고 입교를 했습니다.” 대동교구에서 만난 유재원 선도사는 입교 후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랜 신앙의 역사를 이어온 집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를 이어 지극한 정성으로 살아온 삶의 궤적이 느껴졌다. 천도교를 하시면서 어떤 점이 큰 힘이 되었는지 말씀해주세요. 한울님 잘 모시고 항상 우리가 수시로 뭔 일 있으면 아이고 한울님, 아이고 우리 스승님 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건강합니다. 크게 걱정 안 하고 사는 것, 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제 형제들이 7남매인데 거의 다 천도교를 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6.25가 끝나고 그 이후에 이북 평양사람인 우리 고모부가 거제 수용소에 계시다가 나오면서 우리 집 주소를 갖게 되셨죠. 거기 계시다가 나오시니 갈 곳이 없으니까 우리 집을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집이 고모부의 처갓집이죠. 우리 집에 계시게 되면서 우리 집안이 천도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옛날부터 천도교를 신앙을 좀 하신 분이니, 고모부가 집에 오시면서 우리 집안이 전부 다 천도교 집안을 만드신 거죠. 저는 천도교를 젊을 때는 안 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천도교를 하게 되었고요. 집안 어르신들이 천도교를 하셨으면, 어릴 때 어르신들이 어떻게 신앙생활 하셨는지 혹시 기억나시는 거 있으세요? 선대에서부터 천도교를 열심히 하셨어요. 내가 한 예닐곱 살 됐을 때 시골 동네에 자라면서 우리 외갓집 외할아버지가 저녁이 되면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밥 먹는 걸 좋아하셨어요. 외할아버지가 21자 주문을 자꾸 외우면 병도 안 오고 건강해지고 똑똑해진다고, 무서움도 없고 귀신도 없다고 하시면서 가르쳐주셔서 제가 팔을 흔들며, "지기금지 원위대강.."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면서 주문을 외웠던 기억이 나요. 천도교 신앙을 하게 되면서, 외할아버님 말씀처럼 21자 주문이 두려움을 없애주기도 하던가요? 저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제가 교통사고도 세 번이나 크게 당했습니다. 차가 완전히 다 부서져 버렸는데 몸에는 조그만 털끝 하나 다친 곳이 없어요. 급발진 사고였는데, 한올님이 돌보지 않으셨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보고 대동교구 일 잘 하고 인재를 양성시키라고 살려준 것 같아요. 죽음의 고비를 세 번, 네 번 겪으면서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정말 기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요. 항상 한울님이 돌보고 계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님께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그 덕에 우리들이나 또 우리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고 또 그 덕에 다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홍암 나인협 선생의 흉상을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세우다 유재원 선도사는 현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조성된 나인협 선생의 흉상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과거 대연교구 시절 직접 화단을 정비하다가 비석을 발견하는데, 바로 나인협 선생의 묘비였던 것. 그때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듯했다. 나인협 선생을 기리고 선생의 업적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그 일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때부터 지자체와 협력하여 흉상을 세우는 일에 힘썼다. 그리고 부산시 남구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으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선생의 흉상이 조성된 것이다. 나라를 잃고 땅을 빼앗긴 식민지 시기, 천도교신앙이 보국안민의 실천으로 이어진 것처럼 유재원 선도사의 신앙이 실천으로 이어지기까지 한울님의 은덕이 모든 순간마다 운명처럼 펼쳐졌다고 말하며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인협 선생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서, 1872년 10월 8일 평남 성천에서 태어나 포덕 47년(1906) 11월 30일 의암성사로부터 홍암(泓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19세인 1892년 동학에 들어 동학혁명에도 참여하였다. 나인협은 의암성사를 비롯하여 권병덕, 나용환, 박준승, 이종훈, 임예한, 홍기조, 홍병기와 함께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동학혁명에도 참여한 9명 중 한 사람이다. 해방 후 평남 성천에 머무르면서 교회 원로로서 활동하다가 1.4후퇴 때 월남하여 부산 피난민촌에서 살다가 포덕 93년(1952) 환원하였으며 빈소는 천도교부산시교구에 마련되었다. 부산 대연동 산 중턱에 안장되어 있던 선생의 유해는 포덕 114년(1973) 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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