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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세계화를 위한 천도교 문화예술 만들기(2)지난 10월 칼럼에서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아 포덕168(2027)년에는 천도교 세계화를 선언하자고 제안했다. 앞으로는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갖기 위해서는 문화예술로 포덕 교화방향을 정립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교단 차원에서 준비해야 할 내용들로 11월 칼럼을 대신하겠다. 1. 천도교 글로벌 TFT 조직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열광하는 전 세계 젊은이들을 향해 K-donghak이 대한민국의 정신(K-spirit)이라는 것을 전세계에 알릴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단차원의 천도교 글로벌 TFT를 조직하여 분야별로 준비를 해 나가야 한다. 먼저 10여개의 TFT를 조직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능력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사람이 없다고 하지 말고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책임을 맡기자. 교인과 일반 전문가를 섞어서 TFT를 만들면 더 효과적이다. 아래에는 천도교 세계화를 위한 나름대로 필요한 조직들을 제안해 본다. <TFT분야> ① 경전 외국어 번역분야 :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교리와 외국어,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들로 구성, 번역은 전문 번역사에게 의뢰 ② 교리연구분야 : 동학 천도교 교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세계와 사회, 전 지구적 문제와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교리를 전달할 수 있는 연구진들로 구성 ③ AI 분야 : 젊은이들은 AI를 많이 활용한다. AI에게 동학 천도교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잘못된 내용을 교정해 주고 새로운 내용을 업데이트해 줄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 외국어 업데이트 필수 ④ 예술분야 (그림) : 동학 천도교를 알릴 수 있는 역사화, 기록화 또는 경전 내용의 상상화, 창작화 등이 필요, 전문 작가를 섭외하여 회화, 조각, 공예, 서예 등의 미술작품을 제작하여 용담정, 봉황각, 중앙대교당, 울산여시바윗골, 대신사생가 등에 전시하여 방문객들에게 작품으로 울림을 줄 수 있도록 전시 ⑤ 예술분야 (음악) :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오케스트라, 앙상블 연주 가능한 곡으로 천덕송, 송가 편곡 및 창작, 음악제를 개최하여 편곡, 창작곡 발표, 발표시 홍보에 적합한 전문 성악가, 가수 초청 ⑥ 예술분야 (뮤지컬, 연극) : 뮤지컬에 관심 있는 교인과 전문가들로 구성, 창작극, 혹은 기존의 뮤지컬 연장, 순회공연 방법도 좋음. ⑦ 예술분야 (영화,드라마,다큐) : 영상제작 기술 전문가와 교리 교사에 해박한 교인들로 구성 ⑧ 홍보분야(SNS, 유튜브, 홈페이지 등) : 동학 천도교를 알리기 위한 어린이, 학생, 대학생층과 성인층으로 나누어 구성, 신인간사가 주도적으로 홍보 역할 담당 ⑨ 문화분야 : 천도교 인사, 제례, 상례, 혼례, 기도식, 수련 문화 등을 정리하고, 천도교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과 관심있는 사람들로 구성 ⑩ 대외협력 : 기업, 정부, 지자체 등에서 기부금을 모을 수 있는 대외관계가 원만하고 발이 넓은 사람들로 구성 ⑪ 국제부 : 국제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조직 2. 홍보와 국제네트워크 구축 아무리 좋은 보석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동학 천도교의 보석같은 진리를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홍보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오늘날은 대한민국의 소식을 3초 이내에 전 세계에서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IT강국이다. 우리는 IT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 동학 천도교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젊은이들은 인스타그램을 많이 이용한다. 그리고 중년층은 페이스북, 트위스터 등을 많이 활용하며 유튜브는 어린아이부터 장년층까지 두루두루 사용하고 있다. 너튜브로 유명세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네트워크 시스템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얼마 전에 결혼해서 프랑스에 거주하는 젊은 한국인이 천도교를 찾아와서 입교하고 젊은 층을 향해서 천도교를 알리겠다는 포부를 말하였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현재는 프랑스에서 유튜브를 통해서 천덕송 등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편곡한 천덕송과 함께 유튜브에 소개하였다. 우리의 천덕송이 편곡되어 외국어로 노래되는 것을 들으니 그 얼마나 장엄한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요즈음은 음악을 편곡해 주는 앱뿐만 아니라 AI를 통해서 작사 작곡까지 해주는 세상이니 컴퓨터를 조금만 더 잘 알고 다루게 된다면 그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해외에 있는 천도교 교당은 일본이 유일하다. 미국에는 오랫동안 매년 기념일이면 교포신문에 축하광고를 내었던 원로교인이 한분 계셨는데 그 분이 환원하셨다. 그 뒤를 이어 누가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의 또 다른 곳으로 젊은 층의 교인 한 분이 이민 가서 살고 있다. 호주에도 가족이 모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교인이 있다. 프랑스에도 앞에서 언급했던 젊은 교인이 활동중이다. 쿠바에는 독립운동하셨던 임천택 교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벌써 일본, 미국, 프랑스, 쿠바 등에는 우리가 조금만 더 정성을 드린다면 연결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교인 외에도 전국에 있는 교인들 대상으로 해외에 있는 친, 인척, 지인들의 근황을 조사한다면 해외에 거주하는 교인들이 더 나올 수도 있다. 이참에 해외 거주 교인 조사를 실시하여 그분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자. 그분들이 주축이 되어 국내의 우리와 손을 잡고 한걸음 한걸음 나간다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으로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 환경단체, 평화단체, 인권단체, 생명단체 등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네트워크를 구축하자. 우리에게는 스승님들께서 가르쳐 주신 현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있지 아니한가! 그들과 국제학술심포지엄을 통해서 연결되어도 좋고, 온라인을 통한 학술모임을 하여도 좋다. 우리의 진리가 담긴 책들을 해외에 보내는 작업을 하여도 좋다. 특히, 국제 환경실천모임과 연결지으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바야흐로 포덕 교화는 문화예술과 인터넷망을 통하여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대세는 흐르고 있다. 2027년(포덕168년)에는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아 천도교 세계화를 위해서 큰 항해가 시작되기를 두손 모아 간절히 심고 드린다. “꿈은 꾸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 글, 정정숙(종의원 의장) -
[칼럼] 세계화를 위한 천도교 문화예술 만들기(1)전 세계적으로 K-POP, K-FOOD, K-DRAMA, K-MOVIE, K-BEAUTY가 세계인들에게 환호를 받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글 배우기가 붐을 타고 있다. 우리 민족의 감성과 놀이문화가 세계화가 되고 있는 21세기이다. 또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계엄을 해제시킨 시민들에 의한 K-민주주의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한 K-민주주의의 뿌리에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있으며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후세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그 가치를 인정받아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2023년 5월 18일 유네스코 세계기록물에 등재되었다. 이것은 동학정신이 세계화를 이루는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손병희 의암성사께서는 법설 「천도교와 신종교」편에서 “천도교는 천도교인의 사유물이 아니요, 세계인류의 공유물이니라. 천도교는 문호적 종교가 아니요 개방적 종교이니라,~~천도교는 구역적 종교가 아니요 세계적 종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천도교가 세계인류의 공유물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들이 있으며 또 이것은 우리 후학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천도교 세계화를 위하여 우리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 인간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희노애락의 연속이다. 즐겁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일은 바로 인간의 생활에서 비롯된 인간의 감정이다. 그 감정에 다가가서 공감대를 형성할 때 인간은 비로소 감정이 표출되며 공감이 형성된다. 인간의 감성과 소통하는 천도교 동학문화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K-컬처처럼 K-동학컬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만들어 가야 할까? 문화<CULTURE>는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 양식이나 상징 체계를 말한다. 다시 말을 하자면 천도교 문화란 종교행사, 의절, 일상생할에서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문화에 포함된다. 예를 들자면 밥 먹을 때의 식고, 나가고 들어갈 때, 무슨 일을 할 때 하는 심고,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인사말 등과 제례, 상례, 입교식, 시일식 등 종교에 관련된 모든 것이 문화속에 포함된다. 따라서 문화란 너무 광범위하므로 하나하나 나누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본고에서는 예술분야 특히 천도교의 음악, 뮤지컬, 무용, 미술, 영화분야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자 한다. 음악을 먼저 알아 보자, 노래는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기가 참 좋다. 조용필 가수가 북한에서 노래를 하니까 공연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흐리고 공감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본 적이 있다. 이처럼 노래는 사람을 울리고 웃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천도교 음악에는 천덕송과 송가가 있다. 천덕송 32편, 송가 26편, 합 58편의 노래가 있다. 그렇다면 천도교 세계화를 위하여 이 곡들이 사람들의 정서와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곡들인지 생각해 보자. 또한 케네디홀에서 연주 혹은 공연할 수 있는 곡들인지, 오케스트라, 앙상블 연주가 가능한 곡들인지, 아니면 K-POP처럼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대중화 할 수 있는 곡들인지 생각해 보자. 부족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전문 작곡가에게 의뢰하여 다양한 곡들이 탄생해야 한다고 본다. 클래식과 대중성 있는 음악, 때로는 장엄하면서도 함께 부를 수 있는 곡, 음악으로 감동받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곡들이 필요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권호성 감독의 ‘들풀’, ‘만고풍상 겪은 손’ 등 몇 편의 뮤지컬이 제작되어 국내에서 공연되었다. 이러한 공연은 국내에서만 공연되어질 것이 아니라 해외로 진출하도록 교단차원에서도 지원과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1994년도에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연극, 뮤지컬, 무용계에도 동학바람이 크게 불었다. 서울시립무용단이 선보인 <녹두꽃이 떨어지면>은 출연진이 110여명, 1시간 10분짜리 대작이었다. (안무: 한상근, 주옥녀, 홍경희, 연출: 황두진) 그리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주최로 민족춤제전에서 동학관련 작품이 2개나 선보였다. 춤누리, 춤세상, 한두레 등이 공동 창작한 <검결-칼노래 칼춤> 과 춤사랑 해오름 무용단의 현대무용 <백년전 백년후> 역시 동학혁명을 통해 암울한 시대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농민들의 의지를 간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현대에 올수록 동학관련 무용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연극 등에서 동학을 주제로 무용이 제작되기를 바라며 그 공연을 지원하고 장려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에 미술 분야를 한번 살펴보자. 천도교 미술인회가 올해까지 35회째 활동하고 있다. 어린이, 대학생, 성인들을 포함한 그림, 조각, 서예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여 전시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작품 내용과 전시 분야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어야 할 것이다. 천도교인 작가뿐만 아니라 천도교 동학 작품에 관심 있는 전업 작가들을 초청 또는 섭외하여 천도교미술계가 더 전문화되고 깊이 있게 확장되면 좋겠다. 아마츄어와 전문가를 분리하여 외연 확대와 깊이 있는 활동을 나누어서 한편으로는 대중화와 또 한편으로는 깊이 있는 그림, 조각 작품 등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로마의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의 건축물에 그려진 성화작품에서 받는 감동을 천도교 성지인 용담정, 봉황각, 중앙대교당에서도 받았으면 좋겠다. 그림, 조각, 서예, 공예 등 미술작품을 통해서 천도교를 찾는 방문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를 원한다. 동학 관련 영화를 살펴보자. 이현정 감독의 “삼례(2015)”, 박영철 감독의 “동학, 수운 최제우(2011)”, 임권택 감독의 “개벽(1991)”, 최훈 감독의 “동학난(1962)” 이 있다. 총 4편의 영화, 그것도 교단이 주최가 되어 만든 작품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잘 만든 영화 한편으로 국내외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영화를 우리는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예산이 문제라면 영화를 만들기 위한 성금 모금과 클라우딩 펀드 등 방법을 모색하면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작가, 감독, 주인공 등 최고의 전문가를 섭외하여 영화가 흥행하면 투자금을 회수하고도 수익이 발생한다. 예를 들자면 170억 투자로 2시간 20여분 상영시간인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 없다” 영화는 2025년 9월 24일 개봉하여 3주차 관객 수 2,206,429명, 누적 매출액 21,663,542,930원으로 대한민국 박스 오피스 영화 1위를 차지하였다. 물론 주연배우로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등 걸출한 배우들이 나온 것도 한몫했지만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베니스 국제영화제, 토론토 국제영화제, 부산 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되어 상영되었다. 미국작가인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작가의 소설 액스 (The Ax)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해고된 한 남성이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이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를 제거하면서 벌어지는 과정을 블랙코미디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21세기 현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사회에서의 취업난, 극도의 이기주의, 인간성 상실, 무너져 가는 도덕성, 상위10%의 부의 향유, 로봇이 대신하는 AI시대, 방향을 잘못 잡는 수사력 등등... 박찬욱 감독이 시사해주는 질문은 영화가 끝나도 관객들이 자리를 떠날 줄 모르게 하였다. 이처럼 영화가 주는 힘은 대단하다. 이 영화에서 던지는 문제를 동학으로 풀어내면 풀릴지 않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동학이라는 엄청난 원석을 가지고 있다. 인간존엄, 생명, 평화, 생태, 우주, 자연, 어린이, 여성, 노동자, 평등 등 우리가 갈고 닦아서 보석으로 만들 원석들이 거대한 산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원석들을 잘 갈고 닦아서 문화 예술로 꽃 피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후학들의 책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2027년은 해월신사 탄신200년이 되는 해이다. 해월신사 탄신200년을 기해 천도교의 세계화를 선포하고 음악, 미술, 뮤지컬, 무용, 영화가 동학 주제로 제작되어 세계인들에게 선보인다면 이 또한 얼마나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글, 정정숙 (종의원 의장) -
서울교구 어린이들, 봉황각에서 청소년 시일식 및 환경정화 활동 펼쳐서울교구 어린이들이 봉황각을 찾아 내실 마당과 담장을 깨끗하게 청소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이날 행사는 봉황각에서 열린 어린이·청소년 시일식으로 시작되었다. 시일식 후에는 의창수도원에서 정성껏 준비한 김밥, 떡볶이, 과일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함께 나누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청소 활동에서는 돌담 기와 위에 자라 있던 이끼와 잡초를 제거하고, 텃밭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모두 뽑았다. 작업 도중 모기가 많았고, 공벌레와 지렁이, 지네 등 다양한 벌레도 등장했지만, 아이들은 꿋꿋이 활동을 이어갔다. 아이들은 힘든 가운데서도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하며,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봉황각을 찾아 텃밭 가꾸기, 잡초 뽑기, 청소 등 환경정화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이번 활동은 어린이들이 스스로 봉황각을 돌보고 가꾸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 의식과 봉사의 기쁨을 느끼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
한울인성캠프, 청소년 인성 함양과 공동체 가치 확산의 장지난 9월 6일~7일까지 부산 금련산청소년수련원에서 천도교 청년회가 주관하는 ‘한울인성캠프’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1박 2일간 진행됐다. 이번 캠프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생명존중 사상과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인권 운동 정신을 계승해 미래세대가 건강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됐다. 시천주와 인내천 사상으로 배우는 공동체 정신 한울인성캠프는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고 자존감을 높이며,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배우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단순한 체험 활동을 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들이 꿈과 희망을 키우고 장차 지역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천도교청년회는 전국에서 참가자를 모집하고, 과거 캠프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는 대학생들이 스태프로 참여해 후배 세대를 돕는 ‘세대 잇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를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는 인성 교육의 장을 마련했다. 천도교 청년회는 “이번 캠프를 통해 참가자들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지역사회가 모두 함께 존중받아야 할 공동체임을 깨닫기를 바란다”며, “특히 학교폭력, 따돌림 등 현실적인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극복하는 힘을 기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청소년 성장의 무대, 자발적 참여와 체험 중심 운영 이번 캠프는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공동체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첫날은 아이스브레이킹 활동으로 서로의 어색함을 풀고 친밀감을 형성한 뒤, 본격적인 진로 특강으로 이어졌다. 진로특강 <하늘 같은 나, 하늘 같은 너> 진로특강은 저학년과 고학년 두 팀으로 나눠어 진행되었다. 첫 번째 시간은 ‘하늘 같은 나, 하늘 같은 너 – 나와 너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주제로 임우남 부산남부교구장이 강연을 진행했다. 임 교구장은 “나는 한울님”이라는 주제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주었다. 먼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유전자의 의미와 역사를 이야기하며, “나”라는 존재가 수많은 세대와 인류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우리는 직접 만나지 못한 조상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그 생명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곧 한울님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시각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종이를 찢고 태우는 활동을 통해, 비록 형태는 사라져도 그 흔적과 기운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 안에 무한한 가능성과 힘이 깃들어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또한 젖소 ‘로자’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전했으며, 꽃밭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이미 소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강의는 “내 속에는 수많은 한울님이 살아 계시며,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삶이 곧 한울님을 드러내는 길”이라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진로특강 <인내천 사상과 인간 존중의 삶> 고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는 김대석 동천교구장이 ‘인내천 사상 기반 인간존중 이야기 –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주제로 강연을 이어갔다. 김 교구장은 “우리 모두는 하늘과 같은 존귀한 존재”라며, 청소년들에게 인내천 사상의 핵심 가치를 소개하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스스로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며, 올바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인생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또한, 친구와 이웃, 사회를 존중하며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 속의 나’를 강조했다.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으로 배움 확장 강연 외에도 청소년들이 직접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천연염색 체험을 통해 자연과 환경의 소중함을 배우고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했으며, 실내 암벽등반과 피구 경기를 통해 도전정신과 협동심을 키웠다. 또한, 마술 공연으로 웃음과 감동을 함께 나누었으며, 마지막 날에는 참가자들이 직접 촬영·편집한 숏폼 영상 상영회가 열려 캠프의 추억을 함께 나눴다. 청소년들의 변화와 다짐 캠프를 마친 청소년들은 자신과 타인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며 공동체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은 “함께 웃고, 배우고, 도전하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느낄 수 있었다”며, “앞으로 친구와 가족,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천도교 청년회는 앞으로도 한울인성캠프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청소년들이 인내천 정신을 체득하고, 미래세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또한 청소년 인성 교육의 확산을 통해 건강한 사회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천도교대학생단 조화정 단장은 "이번 <한울나눔터-한울인성캠프>에서는 무엇보다 아이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습니다. 각 지역에서 부산까지 기차와 버스로 이동하느라 아이들에게는 조금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재미있고 알차게 뛰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한울인성캠프는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해가는 성장의 무대가 되었다. 한울인성캠프에 함께한 한울님들의 한마디 김민경 :이번 캠프에서 기도식 경전봉독을 해서 참 뿌듯했어요. 저는 이번에 마술 공연이 참 재미있었어요. 너무 신기했어요. 여기서 만난 언니들과 보낸 시간도 좋았어요. 또 이런 캠프가 있으면 좋겠어요. 박민성 : 천도교에서 하는 캠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서울로 3박 4일 하늘 캠프 할 때 가보았어요. 캠프에서는 형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봉황각에서 손병희 선생님이 3.1 운동을 계획하신 역사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랑스러웠어요. 이번 캠프에는 암벽등반 체험 프로그램이 있어서 너무너무 신나요 조우혁, 강기윤, 김상휘 : 동천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시일식이 낯설지 않았어요. 매주 시일식을 하거든요. 고등학교 진학을 동천고등학교로 하게 되면서 철학,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수련회에는 처음 와보았는데, 천도교 수련을 체험하면서 더 느껴보고 싶어요. 천도교가 주는 연대감과 소속감에서 위안을 얻기도 한 것 같아요. 참 신기하고 신비로워요. 천도교를 알게 되면서 천도교인들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보았는데,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어서 조금 더 가깝게 느껴져요. 저희 학교는 산 밑에 있어서 조용하고 공부하기에는 참 좋아요. 벌레도 많고 학교에 올라가는 길이 좀 힘들지만요(웃음) 이번 수련회에서 천도교가 어떤 종교인지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학교 안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경험하게 되었어요. 박김한울 : KTX타고 오는 길이 좀 멀어서 힘들었지만 친구들이 간다고 해서 함께하는 시간은 참 즐거워요. 천도교에 대해 친구들에게 알려주는 일은 약간 사주면 먹고, 안 사주면 안 먹는 민트초코 같은 느낌이에요. 물어보면 알려주는데, 안 물어보면 굳이 알려주지 않는 그런 느낌요. 그런데 천도교를 해서 좋은 점은 대교당에 나가면 짜장면을 자주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웃음) 그리고 저희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신 춘암 박인호 상사님이신데 정말 멋진 분이신 것 같아요. 정수민 : 제가 대교당에서 했던 어린이날 행사 때 한복을 입고 '양천주'를 읽었어요. 그리고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천도교인이신데요. 가끔 따라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친구들에게는 천도교를 설명하기가 좀 어려워요. 이번에 한울인성캠프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너무 좋아요. 여기서 알게 된 언니랑도 친해졌어요. 김교영 :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마술쇼도 재미있었어요. 어린이 시일식 할 때보다 훨씬 좋았어요.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놀았던 것도 너무 신났고요. 피자랑 치킨을 먹을 수 있어서도 좋았어요. 천연염색 수건 만들기 체험을 했는데 할머니 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아요. 신지아 : 저는 아기 때부터 천도교에 다녔어요. 엄마, 아빠, 할머니 따라서요. 오늘 이 캠프에 와서 친구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어서 너무 좋았어요. 이번 캠프를 마치고 돌아가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자랑할 거예요. 이지후 : 저는 부산에서 왔어요. 13살입니다. 부산시교구에 나가고 있어요. 천도교에 다니면서 천도교에서는 사람과 생물, 사물 모든 것을 한울님으로 모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번 캠프에서 친구들 만나서 좋고 이 친구들은 또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될 것 같아요. 김경진, 김하윤, 김지후 : 조금 멀어서 오는 게 힘들었지만 참 기대가 컸어요. 마술 공연도 그렇고 체험프로그램도 재미있었어요. 암벽등반 체험이랑 숏폼 만드는 것도요. 여기는 숙제도 없고 너무 좋아요. 피자랑 치킨을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친구들이 생긴 것도 좋고요. -
전성환 경청통합수석, 중앙총부 교령사 예방포덕 166(2025)년 9월 3일, 대통령실 전성환 경청통합수석이 천도교중앙총부 교령사를 예방해 박인준 교령을 비롯한 중앙총부 교역자들과 환담을 나누고 종교 정책의 형평성과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사업, 경주 용담 성지 육성 등 교단 현안을 폭넓게 논의했다. 이날 만남에는 강병로 종무원장, 전명운 교화관장, 서소연 교무관장, 최인경 사회문화관장, 이철호 경청통합수석실 행정관 등이 배석했다. 전성환 수석은 교령사를 예방한 자리에서 천도교의 역사적 공헌과 오늘의 과제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었고, 제기된 사안들에 대해 “살펴보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박인준 교령은 국가 지원사업의 자부담 규정이 규모가 작은 종단에 과도한 부담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10억 지원에 1억 자부담”과 같은 일률적 기준이 교단 현실과 맞지 않아 필수 사업이 추진되지 못하거나 회계 운영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박 교령은 “천도교는 3.1혁명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헌신을 한 전통을 지닌 종단”이라며, 종교 간 상생을 위해 실효성 있는 차등, 완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 수석은 “여러 시민, 종교 단체가 같은 조건 속에 있지만 제안을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박인준 교령은 포덕 168(2027)년 해월 최시형 신사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중앙총부에서 계획하고 있는 다큐 영화 제작, 국제학술심포지엄, 성지 정비 등 주요 사업을 제시했다.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은 해월신사 다큐 영화는 “한 종단 지도자의 전기”가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으로 기획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독립유공자 예우와도 연결되는 공적 기억 회복을 도모하겠다는 취지다. 박 교령은 국제학술심포지엄은 동학 사상의 보편가치를 세계 지성들과 함께 논의해 ‘K-동학’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고, 천도교인의 신앙과 실천이 오늘의 인류사회에 기여할 길을 모색하는 자리라고 설명하고, 해월신사가 참형 당한 단성사 앞 역사 현장에 기념 동상(좌상)을 조성해 시민들이 기억을 체험적으로 만나는 장으로 삼고자 한다는 제안을 밝혔다. 지하 구조 등 현실 조건을 고려해 안전한 좌상 형태로 검토 중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에 더해 경주 용담 성지와 경주동학수련원 일대를 국가 차원에서 동학역사문화공원으로 육성할 것을 건의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도를 받은 천도교 제1의 성지 용담을 체계적으로 정비해 신앙과 교육, 문화가 어우러진 시민 교육의 장으로 삼자는 구상이다. 천도교가 지닌 역사교육 자산을 공공과 협력해 확장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박 교령은 의암 손병희 성사가 우이동 봉황각에서 481명의 지도자를 길러냈고, 그 인재들이 3.1운동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3.1운동기념관 조성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또한 방정환 선생이 의암성사의 사위이며 ‘어린이날’의 창시자라는 역사성을 바탕으로, 국내외 아동 인권, 문화 행사를 연계한 프로그램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이날 전성환 경청통합수석과의 환담 자리에서 박인준 교령을 비롯한 중앙총부 교역자들은 동학 천도교 166년의 헌신과 희생이 국가 발전에 기여한 바를 분명히 하며, 정책 결정권자의 인식 개선과 종교정책의 공정성을 거듭 요청했다. 전 수석은 현장의 목소리를 대통령실에 충실히 전달하겠다고 하였고, 교단은 관련 자료를 추가로 정리해 정부 부처와의 협의도 병행할 계획이다. -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를 중심으로 본 천도교의 3·1운동 준비과정(2)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지난 호에 이어) 이상으로 대표적인 지역 일부의 사례를 통해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가한 인물들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이들은 각 해당 지역에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천도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군중, 나아가 기독교 등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이들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19년 3월 1일부터 전개된 3·1운동은 이해 6월까지 전국적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사례는 <표 2>와 같다. <표 2>에 의하면, 천도교인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사례는 136개 교구에 이른다. 그런데 이들 만세운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지역 교구에서 전달받았으며, 이를 관내 지역 교구에 다시 배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주대교구의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주교구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1일로, 비교적 일찍 전달되었다. 그렇다면 전주에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전주를 포함한 호남지역은 인종익이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인종익은 신문조서에서 호남지역 독립선언서 전달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월 28일 오전 7시경 보성사의 출판계장 이종일이 나에게 손병희 이하 33명의 조선민족을 대표한 독립선언서를 전주와 청주의 2개소에 가지고 가라고 말하고 (『인종익 및 신문조서』(1919년 3월 11일)) 2월 28일 오전 11시 남대문발 남행 혼합열차를 타고 대전에 이르러 그곳에서 호남선 연결상의 형편으로 1박하였으며, 다음 3월 1일 오전 6시 대전발 호남선 제1번 차에 탑승하여 이리에 이르러, 오전 11시 그 역에서 전주행 경편철도를 갈아타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였으며 (『인종익 신문조서(제1회)』(1919년 3월 4일)) 인종익은 2월 28일 오전 7시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전주교구에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립선언서 2천 매를 받은 인종익은 오전 11시 남대문을 출발하여 대전에서 하루를 묵은 후 3월 1일 새벽 6시 호남선을 열차를 타고 이리에서 오전 11시 경편철도를 이용하여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였다. 인종익은 전주 도착 즉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기 위해 전주역 앞 고사정(현 고사동)에 있는 천도교 전주대교구 인종익의 신문조서에 의하면, 천도교 전주교구는 당시 전주역으로부터 전주읍 입구에 있다고 진술하였다. 로 갔다. 사전에 연락을 받은 교구장 김봉년(2회 참가)이 자리를 비움에 따라 금융원 김진옥에게 독립선언서 1천 8백 매 인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진옥은 2천 매가 아닌 3천 매였다고 하였다.(『김진옥 신문조서』) 를 전달하였다.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김진옥은 신문조서에서 2월 27일 오후 3시경에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인종익은 독립선언서를 3월 2일까지 배포하고 3월 3일까지는 골고루 보급하라고 전달하였다. 『인종익 및 신문조서』(1919년 3월 11일); 『인종익 신문조서(제2회)』(1919년 3월 6일) 인종익이 손병희 외 32명 연명의 조선독립선언서 약 3천 매를 가지고 와서 3월 2일 밤까지 전주교구 관할 하 각 교구에 나누어 보내 3월 2일 밤에 사람 통행이 많은 거리에 살포하라고 하므로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이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전주대교구는 대교구 관할 구역인 임실을 비롯하여 진안, 장수, 김제, 고산 등지의 천도교 교구에 전달하였다. 교구장 김봉년은 인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기로 하였지만, 고종 국장 참가와 서울에서 전개되는 만세시위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 출타 중이었다. 이에 앞서 김봉년은 부득이 자리를 비웠지만 구창근(1차 참가), 김진옥과 독립선언서 배포와 관련한 사전 협의하였고, (「인종익 심문조서(제2회)」(1919년 3월 6일)) 김진옥은 이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관할 교구에 다시 배포하였다. 김진옥은 독립선언서 2백 매를 휴대하고 천도교 임실교구로 가서 교구장 한영태에게 전달하고, 3월 2일 밤중에 배포하라고 인종익의 지시 사항을 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측에도 전달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 삼일운동사 하편』,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494쪽.) 전주대교구가 관할하고 있는 각 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후 전주교구는 전주 시내와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받았던 김진옥은 민영진, 조성덕, 김성문, 김영홍 등에게 3월 2일 밤중까지는 배포할 것을 당부하였다.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전주교구는 시내뿐만 아니라 상관면, 소양면 등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계획을 세우고 지역별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민영진은 3월 2일 12시 서호순에게 독립선언서 4매를 주고 상관면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서호순은 진영섭에게 1매를 전달하고 구장 이경운, 최년태, 박인숙의 문가에 살포하였다. 『서호순 판결문』. 판결문 중 제2회 신문조서에는 “상관면 신리주재소 부근에 산포하였다”고 진술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서호순은 4매보다 많은 독립선언서를 받았다고 불 수 있다. 민영진으로부터 9매의 독립선언서를 받은 김태경은 우선 3월 2일 저녁 7시 유원에게 4매를 교부하였고, 나머지 5매는 김태경이 한광진, 정문명, 채춘만, 유선일 등에게 배포하고 “다수 공동으로 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선동하였다. (『김태경 판결문』.) 유원은 소양면 신교리의 이달수, 유명선, 양영화, 그리고 용진면 공덕리 이완옥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유원 판결문』.) 유선태 역시 민영진으로부터 독립선언서 5매를 받아 시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배포하였다. (『유선태 판결문』.) 이상에서 살펴본 천도교 전주교구에 전달된 독립선언서의 전주지역 배포 상황을 정리하면 하면 다음 <표 3>과 같다. 이처럼 독립선언서가 전주대교구에 전달되자, 전주대교구는 관할하는 관내 교구에 이를 전달하는 한편 전주 시내와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한편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 결과 3월 2일 늦은 밤을 이용하여 전주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일제 측에서 수집한 정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3월 3 일 오전 시중에서 독립선언서 1매를 발견하고 수사 중” (김정명,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原書房, 1967, 316쪽.)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지방의 3·1운동을 확산하는 데 있어서 우이동 봉황각 특별기도 참여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이상으로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이동 봉황각과 3․1운동과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이동 봉황각의 건립은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민족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천도교와 함께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의암 손병희는 삼각산의 정기가 살아있는 우이동 일대를 매입한 것은 ‘종교적 감화’를 위한 수련 도장을 건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장차 민족의 동량을 양성하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둘째, 우이동 봉황각은 천도교의 민족운동 지도자를 양성한 특별교육장이었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 강점 이후 독립이라는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종교적 수련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면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지방의 중요 교역자를 불러 49일 특별기도를 통해 민족의식을 강화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의암 손병희는 ‘이신환성’의 법설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셋째,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인물들이 지방의 3·1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일곱 차례에 걸쳐 특별수련에 483명이 참여한 이들은 3·1운동의 민족대표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는 비록 3·1운동 이전에 실시되었지만, 참여자들은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교구’라는 조직을 충실하게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이동 봉황각 49일 기도 중 의암 손병희의 ‘이신환성’이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끝> 글, 성주현(상주선도사) -
천도교와 3 · 1운동(15) "교인들은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민족독립을 위한 모금에 참여했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고주리의 학살사건 고주리의 보복만행은 4월 15일 제암리 집단학살 후에 자행되었다. 이날 오후 수비대는 조희창을 선두로 6명의 수비병과 함께 팔탄면 고주리로 향했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부락이다. 이때 고주리 주민 대부분은 제암리의 참변을 목격하고 거의 모두 산속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김흥열(전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 가족만은 ‘그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죄없는 사람들을 저희 마음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하는 생각에서 온 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안에 있었다. 조희창은 수비대들을 이끌고 김흥열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조희창은 수비대를 시켜 김흥열을 비롯한 김성열·김세열·김주업·김주나·김흥복 등 한 가족 6명을 방에서 끌어내어 포박을 지어 집 뒤 언덕으로 끌고 올라갔다. 이때 김성열 · 김세열 · 김주남 · 김흥복 등은 고문의 여독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끌려갔다. 조희창은 칼을 뽑아들고 김흥열에게 백낙렬이 숨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으면 전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김흥열이 모른다고 하자 조희창은 이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동했으면서 모른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하면서 칼등으로 김흥열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나 김흥열은 “내가 안다 해도 네 놈에게 그 분이 계신 곳을 말할 수 없다. 조국과 민족을 파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네놈에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냐? 현상금 200원이 그리도 탐이 난단 말이냐! 삼괴지역과 발안 만세운동도 나와 이정근이 주동했다. 마음대로 하여라.” 하며 조희창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조희창은 군도를 뽑아들고 사정없이 김흥열의 목을 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수비대들이 일제히 군도를 휘둘러 차례차례 6인의 목을 치자 붉은 피를 뿜으며 목이 사방에서 펄펄 뛰었다. 그래도 모자랐던지 사방에 나딩구는 몸체에 난도질을 가해 여섯 토막을 냈다. 팔다리가 잘리어 사방에서 펄펄 뛰었고 언덕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수비대들은 6명의 시체를 걷어 모아놓고 짚가리의 짚을 날라다 쌓아 놓은 후 불을 질렀다. 당시 김주업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참살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때 김세열의 아들 김원기가 밖으로 뛰어나와 이 광경을 보고 “나만 살면 뭘 해, 같이 죽여라!”하며 수비대에게 덤벼들자 수비대들의 구둣발에 채여 울타리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김주업의 처 한씨는 이 집안이 유일한 혈손인 김원기를 끌어당겨 치마폭에 숨겨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한씨 부인은 너무나 잔인한 참살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그날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다가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하니 김흥열 일가는 한꺼번에 7명이 몰살되고 만 것이다.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남양교구 관내의 3·1운동은 서울보다 한 달 정도 늦은 4월에 일어났으나 관내 전 교인과 주민들, 그리고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가장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화수리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인해 일본군에 의해 가장 잔학한 보복만행을 당했다. 특히 수촌리와 제암리·고주리의 집단학살은 가장 비참했다. 제암리와 고주리가 다른 마을보다 더 혹독하게 보복을 받게 된 것은 이 마을 주민들의 항일 의식이 다른 마을보다 더 높았던데 원인이 있다. 이 마을에는 거의 전부가 천도교인과 감리교 신자들이 살았다. 아시다시피 천도교는 보국안민을 표방, 당시 3·1운동의 주도적 핵심세력이었다. 조선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내놓은 천도교개론 서문에 의하면 “일본은 천도교를 박멸하거나 조선을 내놓거나 그 어느 것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 하나만 보아도 당시 전국에서 성미실적 1등을 기록한 천도교 남양교구 산하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시각은 좋을 리가 없었다. 또한 천도교인과 함께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감리교 신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6. 양덕군교구의 3·1운동 머리말 양덕군은 평안남도 북동쪽 끝에 위치하여 함경남도 고원군·영흥군·문천군 등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군 남동쪽으로는 황해도 곡산군과 접경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산간지대로 1907년 이후 의병활동이 유명했던 곳이다. 다행히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는 국도가 군 중앙을 통과하여 비교적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군민의 문화수준은 매우 높다. 특히 온천이 유명하여 외래 방문객도 많아 사상면에서도 다른 산간지역보다 훨씬 높다. 의병활동의 근거지가 되다시피 하여 애국심이 강하고 민중들의 저항의식이 높음에 따라 어느 지역보다 민족의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로 말미암아 3·1독립운동도 격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은 일찍이 갑오동학혁명 후인 1895년부터 동학이 들어와 민중의식을 고취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진보회 운동을 통한 개혁운동이 있었고 뒤이어 의병운동을 거치면서 반제·반봉건적인 사상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격렬한 3·1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경무총감부와 헌병대사령관의 보고서(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인 ‘소요사건 경과 개람표’에 의하면 양덕군에서는 3월 5일 3백명이 3·1만세시위운동을 전개, 헌병대를 습격했으므로 일본군 16명이 출동하여 발포, 40명이 살상되었으며, 일본인도 1명 사망했다고 하였다. 양덕군민회가 펴낸 『양덕군지』에 의하면 사망자는 15명이었고 중경상자는 70여명이었으며 체포된 사람도 70여명이었으며 그 중 옥고를 치룬 분이 4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희생을 치룬 3·1운동 중의 하나였다. 이 운동은 누가 주도했으며 어떤 조직력이 동원되어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천도교도들이었으며 동학 이래 다져진 민중적인 조직력과 사상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양덕군의 천도교세 1938년 천도교의 총 교호 수는 8천 2백 5십 7호였다. 1919년 당시 양덕군의 천도교 호수는 약 7백호이다. 천도교가 양덕지방에 최초로 들어온 것은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포덕34년(1893)이었다. 당시는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포덕 37년부터 점점 퍼지기 시작하여 하나의 연원을 갖게 되었다. 대구면(지금은 성천군이지만 그때는 양덕군이었음) 천동리에 있는 윤효순(1862년생)을 비롯하여 구룡면 봉계리의 손태룡(1873년생, 처음에는 유주(流呪)로 동학을 하다가 포덕 38년에 정식 입도함)은 포덕 34년 11월 23일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수덕리의 김성호는 포덕 38년에, 온천면 상신리의 이상화는 포덕 38년에, 상국리의 심성원(1870년생)은 포덕 36년에, 화촌면 평암리의 박봉상은 포덕 34년에, 상웅면 중리의 김기섭은 포덕 39년에, 같은 마을의 정추언도 포덕 39년에, 대륜면 통동리의 이양순은 포덕 39년에, 사기리의 손병서는 포덕 38년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손태룡은 김영석(어디 분인지 미상)어른으로부터 입도하였으며 그 후 김병술·박봉각과 같은 우수한 지도자에게 포교하여 많은 포덕을 내었다. 그리하여 양덕군에서는 유일한 대접주가 되었다. 당시 대접주가 되려면 적어도 천여호의 교호수를 가져야 한다. 포덕 69년(1828)에 작성된『손태룡 연원록』에 의하면 양덕군뿐만 아니라 강동·성천·곡산군까지 포덕하였음을 볼 수 있으므로 1천호는 넘었을 것이다, 양덕군 동학교단이 최초로 사회운동을 전개한 것은 포덕 55년(1904)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 8월 그믐을 기해 진보회 운동을 한 것이 시초다. 갑진개화운동이라 하는 진보회운동은 러일전쟁으로 우리나라는 그 승전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 확실해지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정부가 승자의 편에 들어 발언권을 얻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 정부를 개혁하여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진보회란 명칭을 내세운 것은 일반적으로 동학이라면 관의 탄압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를 피해보자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손태룡 대접주는 당시 의암손병희 성사의 지시에 따라 수백 명의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운동에 나섰다. 양력 9월 28일자 『대한매일신문』 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진보회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순천군수 이승주 씨의 내부로 한 보고를 보면 동학당 천여 명이 둔취하여 기에는 보국안민 넉자로 쓰고 회장은 문관일이라 하는데 경도회(京都會)의 지휘위를 기다린다 하며 맹산, 양덕, 등지의 각 인민 7~8백인이 보국안민한다 칭하고 소요 막심하므로 효유하여도 듣지 아니한다 하더라.” 또한 『황성신문』 11월 3일자에 보면 평남관찰사가 “근일 관하 각 군에 민중을 선동하여 칭하기를 진보회라고 읍읍 취회하기에 백방 효유하나 종불청종(終不聽從)하고 일익 회집하는데...” 라는 보고가 있었다. 양덕에서도 동학교도들이 몇 백 명씩 모여 진보회를 개최하고 머리(상투)를 자르며 검은 옷을 물들여 입는 일대 정치적 시위가 있었다. 『천도교창건사』에 의하면 양덕에서 집회하는데 그치지 않고 삼등으로 가서 여러 군의 동학교도와 더불어 일대 시위를 벌이는 한편 평양으로까지 진출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 개혁운동을 통해서 양덕의 동학 교세는 더울 늘어났다. 그러나 이용구 일파가 앞잡이가 되어 을사늑약을 지지하는 매국행위가 자행되자 크게 실망했다. 포덕 46년(1905) 12월 1일 일본에 망명 중이던 의암성사는 사태가 다급함을 알고 동학을 천도교라 선포하고 이듬해인 포덕 47년 2월에 서울 상다동에 천도교중앙총부 간판을 걸면서 일진회와 완전히 구별하게 되었다. 양덕군에서도 상부지시대로 재빨리 탈퇴하였다. 일진회의 이용구도 1907년에 이르자 정치단체가 해산되게 되자 12월 13일에 시천교라는 종교단체로 떨어져 나갔다. 이때 많은 교인들이 교단을 떠나 시천교로 갔다. 1907년 의병활동이 치열해지자 천도교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거나 일제의 동태를 살펴 알려주는 등 간접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천도교로 새 출발한 후 포덕 51년에 이르러 일본제국주의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하자 한때 교단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들어 교세는 포덕 52년 현재 5백호가 넘었다. 포덕사업과 교육사업 양덕군에 천도교 교구를 세운 것은 포덕 48년(1907)이었으며 초대 교구장은 김처성(金處聲, 대구면 신장리)이었다. 이 당시 포덕사업이 활발하여 포덕 51년 10월에 이영화와 오인규가 중앙총부로부터 ‘신포덕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전교사를 임명하였다. 포덕 52년 3월부터 손용호(하룡면 창리)가 새로 교구장이 되고 초대 교구장이었던 김처성은 공선원이란 직책을 맡았다. 그리고 6명의 전교사를 임명하는 한편 교세가 늘어나 이영화를 금융원으로 임명하였다. 포덕 53년에 접어들면서 전교실마다 초등교육을 위한 1년간의 강습소를 개설하여 교육에 열을 올렸다. 14개 강습소가 운영되었는데 제일 활발했던 곳은 제 262 강습소였다. 소장은 이병모였고, 소감은 최기훈·조정화가 맡았으며, 건물은 이명환이 제공, 희사했다. 졸업자 중에는 이학근·최두옥·이은조와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포덕 53년 1월에는 교구장에 지기철·전제원에 박종기를 선출했으며 포덕 54년 1월에는 교구장에 손태룡·공선원에 한충흡, 금융원에 이하경으로 바뀌고, 포덕 55년 1월에는 교구장에 한충흡·전제원에 손용점, 공선원에 이봉화, 금융원에 이하경으로 경질되었다. 포덕 55년 7월 1일에는 대교 구제가 창설되어 양덕군은 순천군과 성천군이 합쳐 하나의 대교구를 만들어 <성천대교구>라 부르게 되었다. 대교구장에는 성천교구장인 이돈하가 겸임하였다. 양덕교구장은 손태룡으로 바꾸고 전제원은 박만관이 잠시 맡았다가 8월 19일에는 교구장에 김택서가, 금융원에는 이봉화, 9월에는 공선원을 최정항으로 바꾸었다. 아울러 이해 10월에는 강도원과 전교사를 많이 임명하여 포덕교화에 힘썼다. 당시 교직자는 다음과 같다. 강도원: 이봉화·한충흡(2명) 전교사 : 손기현·조이균·이춘화·조경운·김홍화·신태성·최운화·양달화·조열화·유기화. 손권화·오경화·민석화·김용화·서윤화·김병술·우영화·이춘성·김윤실·손양모·이경근·민치선·한충빈·노병헌·김기운·박명두(26명) 포덕 57년 2월에는 손태룡을 다시 교구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전제원에 정명옥, 공선원에 신용주를 선출했다. 포덕 58년 2월에는 총부에서 육도사(나용환·오영창·홍기억·홍기조·나인협·임예환)를 순회케 하여 양덕군에는 나용환과 나인협 도사가 내려와 강연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한바 있다. 이 강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교인들에게 사기를 높여주었다. 이후 강연회의 필요성을 느끼어 양덕군 교구 내 순회교사를 더욱 늘리게 되었다. 즉, 김태섭·박윤겸·김태주 등 3명의 순회교사를 새로 임명, 강도회에 힘쓰게 하였다. 이듬해인 포덕 59년 6월에는 서기에 김병술을 임명하여 교구진영을 강화하였다. 포덕 59년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힘쓴 한해였다. 중앙대교당 신축성금 조성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게 되어 교구업무도 폭주했다. 양덕군 교구의 교당신축성금은 약 3백호가 각출에 참가, 2천원 정도를 마련하여 상납하였다. 이때 일반교인들은 이번 모금은 민족독립을 위한 것임을 알고 참여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5원 내지 10원씩을 각출했다고 한다. 포덕 60년이 되자 중앙에서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소원하는 49일기도를 봉행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에 걸쳐 각 면 전교실에서는 지방 핵심지도자들이 모여 특별기도를 봉행하였다. 이번 기도는 신앙적으로 어떤 중대사를 대비하여 다짐을 하는 기도였다. 1월에 교구임원을 개편하여 교구장에 이영화를 선출하였으며 공선원은 박명두, 전제원은 정명옥, 금융원은 이봉화, 서기는 김병술을 선출하였다. 이때의 교세는 약 8백호였다. 3·1운동의 전개과정 앞으로 전개될 독립운동에 대비하여 1912년 4월부터 실시한 봉황각 수련에 양덕교구에서도 4기에 손대용, 5기에 김봉섭, 6기에 박명두·한기원·김진선, 7기에 공달빈·신용주 등 7명이 참가했다. 이 지역의 3·1운동은 3월 5일에 이루어졌는데, 그 준비는 3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독립선언서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서는 성천으로부터 보내졌다는 설과 평양에 교구장이 가서 직접 받아왔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병헌 편저 『3·1운동비사』에 의하면 “양덕군은 교통이 불편한 산간벽지인 관계로 당시 독립선언서가 양덕군 대구면에 거주하는 김병술 선생이 성천군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가지고 그때 천도교 교구장인 양덕군 온천면 이영화씨 댁에 3월 1일에야 도착하였다”고 했다. 또한 독립운동사편찬위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 제4장 제5절 양덕군란에는 “당시 천도교 양덕군 교구장이던 이영화는 온천면 상청리에 살고 있었는데, 1919년 2월 하순 평양에서 열린 대교구장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서울서 보내온 독립선언서 1백여 장을 받아가지고 3월 1일에 평양을 출발, 양덕군 대구면과 상룡면, 하룡면 등지에 들러 천도교 독신 교우들을 찾아 숙의했다”고 하였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볼 때 이병헌의 기록이 신빙성이 짙다. 왜냐하면 당시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배포되었으므로 회의를 통해 배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교구장회의는 지역별이나 도 별로 개최한 사실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당시 독립선언서는 김상열(선천)이 평안도를 책임지고 2천매를 할당받아 평양을 거쳐 선천으로 간 것은 사실이다. 김상열은 서울서 28일에 떠나 평양에 들렀다가 다음날 새벽 평양을 출발, 선천에 하오 1시에 도착했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가군으로 사람을 보내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는데 직접 보낼 인편이 없을 때에는 인근 교구로 보내 거기에서 다시 전달하도록 했다. 양덕군의 경우는 성천군교구로 보낸 독립선언서를 가장 가까운 대구면 광산리 김병술에게 보냈던 것이다. 깁병술은 다름 아닌 교구 서기를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병술은 곧 교구장이 살고 있던 온천면 상청리까지 가야 했으므로 빨라야 3월 2일 저녁에 도착했다고 보아야 한다. 독립선언서를 받은 이영화 교구장은 3월 3일 8십리 길을 달려가 양덕면 용계리에 있는 손태룡 어른을 찾아가 의논한 후 10여 명의 중진 교역자와 연락하여 협의한 결과 거사일을 3월 5일로 정하고 구읍인 동양 상석리 소목다리 교구실로 모이도록 했다. 한편 거사 방법과 전략을 짜기 위해 3월 4일 중진 간부들은 소목다리에 있는 교구에 모여 비밀회의를 진행하였고 여러 가지 인원 동원에 따르는 준비를 진행하였다. 태극기를 그린다든지, 식사 준비를 한다든지, 준비할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사전에 탐지되어 준비사업에 착수하기도 전에 헌병대가 출동하여 12시경에 10여 명을 예비 검속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검토하고 넘어갈 것은 거사일이 3월 4일이냐 아니면 3월 5일이냐 하는 점이다. 『3·1운동비사』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사『에는 분명 3월 4일 장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보고에 의하면 “양덕에서는 3월 5일과 6일 및 동 8일의 3일간 각기 당지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운동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록 중 어느 것을 취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조선총독부 보고가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현지 헌병대의 보고를 토대로 작성한 문헌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4일과 5일의 착각이 생겼는가. 증인들은 4일이라고 하며 그날이 장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양력 3월 5일은 바로 음력 2월 4일이며 장날이었다. 이 양력과 음력의 차이가 착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 3월 4일은 장날이며 양력으로 치면 3월 5일이 된다. 따라서 양력으로 3월 5일에 거사한 것이 맞는 것 같다. 또한 『3·1운동비사』에는 “10여인은 3월 3일(4일)에 동군 천도교구실에서 회의하기로 하였는데 그날 12시경에 헌병대로부터 예비검속을 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다른 회의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므로 식사준비와 같은 사전준비를 하기 위해 모였던 것 같고 이를 의심스럽게 여겨 예비 검속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가리산수도원 개원 43주년… 한울님의 가르침 되새기며 미래를 다짐하다지난 8월 20일, 강원도 홍천군 두천면 천현2리에 자리한 가리산수도원에서 개원 43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가 원장으로 있는 가리산수도원이 걸어온 43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수도원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하며 미래의 발전을 다짐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박인준 교령, 김명덕 여성회본부 회장, 명승철 연원회 부의장, 석영기 춘천교구장, 성충모 강남교구장, 서종환 의창수도원장, 임형진 동학학회장을 비롯한 40여 명의 교인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는 기념사에서 “모시고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기쁩니다. 저는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을 내 형제, 내 아들·딸, 내 손자라고 부릅니다. 여기 모이신 내 자식들이 항상 걱정해 주고, 위로해 주고, 염려해 주신 덕분에 제가 오늘까지 100살의 나이에도 죽지 않고 이 자리에 나와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내 나이 57세에 개원해서 지금 100세가 되었습니다. 작년 8월 20일에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한울님이 한 번 더 만나게 해 주셔서 오늘이 더욱 기쁩니다.”라며 후학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 “주문을 많이 외우시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셔야 합니다. 남을 미워하지 말고, 내 배가 고파도 더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허리를 졸라 그 사람을 먹이려는 덕을 피우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내년 8월 20일에 또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섭섭해하지 마시고, 정성과 공경으로 후학에게 잘 이어가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당부했다. 인사말과 함께 <탄 도유심급>, <내수도문> 등 스승님의 말씀을 품고 실천하는 삶을 강조했다. 박인준 교령은 축사에서 “오늘 가리산 수도원 개원 43주년을 맞아 이렇게 축사를 드리게 되어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방금 종법사님 말씀을 들으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경전의 구절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체화하고 실천하신 그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그 진심이 바로 종법사님의 정신이고, 또 가리산 수도원의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며, "저는 그 정신을 ‘인내천 아리랑가’에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시천주, 불사약, 남북통일, 그리고 세계 포덕의 꿈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천도교의 길이며, 민족이 하나 되는 동귀일체의 정신이라 느꼈습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아 함께 애써주신 혁암 김혁태 종학대학원장님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천도교가 미래로 나아가려면 무엇보다 도력을 키워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수련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고, 완성된 삶을 세상과 남을 위해 희생하며 쓰는 것이 도의 참된 길입니다. 그런 인물을 길러내는 곳이 바로 이 수도원이며, 천도교의 미래가 수도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돌아보면 의암 성사께서 3.1혁명을 준비하며 봉황각에서 수련으로 수많은 지도자를 길러내셨듯, 오늘의 수도원 역시 그 사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가리산 수도원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종법사님의 피와 땀, 그리고 모든 수도 가족들의 정성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그 공덕이 차곡차곡 쌓여 더 큰 결실을 맺으리라 믿습니다."라고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종법사님과 혁암장님, 그리고 수도원 가족 여러분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리며, 늘 건강과 평안을 한울님께 간절히 심고드립니다. 오늘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도 행복과 기쁨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명승철 연원회 부의장은 이날 축사를 통해 "오늘 가리산 수도원 창립 43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은성당 종법사님의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개원기념일에 많은 분들께서 참석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계실 거라고 우리는 믿고 또 힘들 때 어머님 품이 생각나듯 항상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은성당 종법사님께서 건강하셔서 우리들 마음의 고향으로 오래 남아 계시면 참 고맙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서종환 의창수도원장은 축사에서 “가리산수도원 개원 43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에게 이곳은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저 자신까지 수도와 수련을 통해 도를 닦아온 고향 같은 곳이며, 종법사님은 제 어머니 같은 분이라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모두가 수도원의 발길과 주문을 이어가 천도교의 도를 완성하고, 종법사님과 수도원이 오래도록 건강하고 발전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김명덕 천도교여성회본부 회장은 “오늘은 원장님께서 피와 땀으로 여성들의 힘을 일깨워 주신 가리산수도원 개원 43주년 되는 날입니다. 해월신사님 말씀처럼 여성 수도의 길을 몸소 실천해 오신 종법사님은 100세를 맞으신 오늘까지 수많은 수도생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건강하시어 우리 여성들의 믿음과 정진에 큰 힘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리산수도원 43주년을 맞이하며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함께해주신 여러분들과 교단을 지켜 발전해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가리산수도원이 개원 이래 43년 동안 걸어온 역사를 함께 되돌아보며, 교인들은 그 시간 속에 쌓인 정성과 신심을 마음 깊이 새기고, 무엇보다도 한울님의 가르침을 다시금 확인하고 실천을 다짐하는 매우 뜻깊고 감동적인 자리가 되었다. -
청소년 역사소설 『3·1만세운동의 연출자 손병희』 출판기념회 성황동두천교구 신동명 교무부장이 집필한 청소년 역사소설 『3·1만세운동의 연출자 손병희』 출판기념회가 포덕 166(2025)년 8월 16일, 수운회관 807호에서 열렸다. 이 책은 의암 손병희 성사의 신심(信心)과 결단, 3·1혁명의 진실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풀어낸 역사소설이다. 행사에는 교인과 지인 등 70여 명이 참석해 의암성사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 책이 갖는 의미를 공유했다. 축사와 덕담이 이어진 제1부 행사에서는 중앙총부 강병로 종무원장, 김춘성 선도사, 서종환 의창수도원장, 서은용 경원포 도정, 강정환 동두천교구장 등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신동명 작가의 집필 의지와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남연호 천도교도서관장은 의암성사가 봉황각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며 교재로 사용했던 『동경연의』 등을 언급하며 이번 책의 역사적 맥락을 강조했다. 제2부는 저자와의 만남으로 꾸려졌다. 신동명 작가는 집필 동기와 과정을 설명하며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을 낭독했고, 참석자들과 함께 「상록수」를 합창하며 출판의 의미를 나눴다. 신 작가는 “민족정신의 뿌리를 탐구하다 천도교에 입교했고, 청소년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전하고자 이번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시인이자 교육학 박사로서 청소년 교육과 토론문화 연구에 헌신해온 신동명 작가는 포덕 164(2023)년 천도교에 입교한 바 있으며, 차기작으로 해월 최시형 신사를 주제로 한 소설을 준비 중이다. 『3·1만세운동의 연출자 손병희』에 관한 자세한 책 소개는 아래 기사를 참고하면 된다.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881 -
박인준 교령,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특별전시 개막식에서 축사 및 테이프 커팅서울 강북구는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8월 1일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특별전시 「무너미에 깃든 독립운동가의 숨결」 개막식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강북구의 독립운동 관련 역사와 인물을 집중 조명하며, 지역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개막식에는 박인준 교령, 이순희 강북구청장, 윤경로 근현대사기념관 관장을 비롯해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지역 인사, 시민들이 참석해 광복 80주년의 뜻을 함께 나누었다. 이순희 구청장은 환영사에서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하고, 그들의 기록과 유물을 통해 잊힌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전시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축사에 나선 박인준 교령은 강북구가 가진 특별한 역사성을 강조했다. 또한 “봉황각과 의암 손병희 성사 묘소 등 천도교 성지가 자리한 강북구는 3.1혁명과 민족 독립운동의 성지와도 같다”며, 앞으로 국가 차원의 의암 손병희 성사 기념관과 3.1혁명 기념관 건립이 필요함을 제안했다. 박 교령은 또 “광복 80주년을 맞아 후손들이 독립운동의 정신을 삶 속에서 되새기고, 세계 평화와 인류 공동체적 가치를 이어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테이프 커팅 후에는 전시 해설이 진행되었고, 참석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사진과 자료, 당시 사용되었던 유물들을 관람했다. 또한 실감 영상 시사회를 통해 당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독립운동의 숨결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특별전시는 8월 한 달 동안 진행되며, 학술회의와 어린이·청소년 체험 프로그램, 시민 강좌 등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도 함께 마련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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