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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 선생 58주기 추도식 봉행지난 11월 22일 서울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 인근 묘역에서 독립운동가 신숙(申淑, 1888~1966) 선생 58주기 추도식이 봉행됐다. 이날 추도식에는 유족과 천도교 관계자, 광복회 및 독립운동 관련 단체 후손 등 2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순국정신을 기렸다. 지난 해보다 조화가 늘어난 모습은 오랜 세월 잊혀져온 독립운동가의 삶을 사회가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처럼 다가왔다. 참석자들은 한 사람의 이름 앞에서 묵상하며, 소리 없이 시대를 건너온 신념의 무게를 되새겼다. 독립운동 전선의 거의 모든 길을 걸은 투사 신숙 선생의 생애는 한 문장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치열한 여정이었다. 1903년 동학(천도교)에 입교한 뒤, 교육·조직활동·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의 전선 곳곳에 몸을 던졌다. 서울 문창학교 설립으로 민족교육의 불씨를 지폈고,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인쇄 및 배포에 참여했다. 이후 만주와 상해로 이어지는 망명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고, 한국독립당 창립에 동참했다. 특히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독립전쟁 전략 수립의 중추 역할을 맡았으며, 해방 직전에는 재만동지회를 조직해 한인 교포 보호와 귀국 지원에 힘썼다. 선생의 독립운동은 내내 '사람을 위한 독립’이라는 분명한 방향을 향해 있었다. 그 공로를 국가가 뒤늦게 증명한 것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이다. “스스로 등불이 되고자 했던 영혼” 추도식은 선생의 증손녀이자 서울교육대학교 재학 중인 신민재 씨의 생애 소개로 시작됐다. 이어 이희정 북부보훈지청장은 추모사에서 “신숙 선생의 독립은 사상이나 전략 이전에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기렸다. 또한 천도교를 대표해 참석한 광복회 전 이사 이승봉 선생은 “선생의 걸음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자 했던 한 영혼의 기록” 이라며 숭고한 뜻을 되새겼다. 유족대표 신현종 선생은 “후손들의 삶이 선친의 길을 잇는 작은 답례가 되길 바란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역사 앞에 선 현재의 발걸음 이날 추도식에는 천도교 측에서 노태구 전 동민회 상임의장, 박남문 종의원, 이재선 종무위원 등이 함께했으며, 광복회 관계자 및 여러 지회장들도 자리했다. 참석자들의 단단한 연대는 독립운동의 정신이 오늘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증언했다. 추도식이 끝난 뒤에도 묘역에는 한동안 발걸음이 이어졌다. “선생의 삶은 오늘 우리의 자유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라는 한 참석자의 말처럼, 그 가르침은 오늘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잊지 않는 일, 그것이 추모의 시작 독립운동을 기억한다는 것은 거창한 행위가 아닐지 모른다.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그 삶을 통해 오늘을 성찰하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최대의 책임이다. 11월의 찬 공기 속에서 신숙 선생의 이름은 다시금 우리에게 말했다. “자유는 누군가의 삶을 건 발걸음 위에 서 있다.” -
천도교와 3 · 1운동(22)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 성사에 의해 이루어졌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3.1운동의 정식명칭 3.1독립운동 90주년을 맞는 올해(2009년, 편집자)를 맞아 3.1운동의 이름이 제대로 되어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일본교과서에 3.1운동을 폭동이라 기술하였다하여 그 시정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 요구를 받아들여 폭동이란 이름을 버리고 3.1독립운동이라 고쳤다. 그러나 우리 교과서에는 아직도 3.1운동이라 하면서 '독립' 두 글자를 넣지 않고 있다. 남들에게는 독립운동이라 부르라 해놓고 자기는 독립운동이라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3.1운동은 우리 역사에 있어 무궁화 꽃이다. 3.1운동은 또 우리 민족사에 구심점으로서 그 어떤 다른 역사보다도 자랑스러운 거사로 믿고 있다. 우리 근대사에 3.1운동만큼 의미심장한 역사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역사에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않았다면 타고르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어떤 이는 3.1운동을 우리 역사의 여러 강줄기가 모여드는 커다란 호수라고 한다. 마치 백두산 천지 같은 깊은 물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운동의 결과 태어난 나라라고 명기하고 있다. 독립선언서를 잘 읽어보면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모든 나라의 복지와 평화를 위해 투쟁한 역사라 하겠다. 우리는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해 독립, 즉 자유를 외친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외친 것이다. 일본은 물론 중국 영국 미국 어떤 나라도 한국의 주권을 빼앗을 수 없으며, 빼앗는 날 세계평화는 깨지고 만다고 엄중히 선언한 것이다. 서울 종로 2가에는 3.1운동이 일어난 성지 탑골공원이 있다. 그러나 그 밖에 유적지는 사라지고 없다. 왜 서울시 당국은 길을 넓히고 빌딩을 짓는 데만 정신이 팔리고 동방의 등불을 밝히는 데는 관심이 없는가? 3.1운동 90주년을 맞이하면서 해가 갈수록 빛이 바래가고 있는 서울의 역사정신이 아쉽기만 하다. 3.1운동이 평양에서 1시간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3.1운동의 영광을 버리려하는가 잊지 말고 서서히 반성하라. 3. 맺는 말 3·1독립운동은 일제의 10년간의 가혹한 무단통치로 인한 압제와 경제적 착취는 물론 민족의 자존심마저 유린한 극한적인 상황에서 이천만 민족의 분노가 폭발한 일대 항일운동이었다. 이에 전국적인 강력한 조직망과 300만의 교인을 포용한 천도교가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청사에 빛나는 민족사를 창출하였다. 이 3·1독립운동은 시종일관 이 운동을 영도하신 의암손병희 선생이 중심에 계셨기에 가능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은 천도교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 특히 3·1독립운동의 초기단계에서의 천도교의 역할은 이 운동을 결정짓는 절대적 계기가 되었다. 우선 운동의 3대 기본방침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과 운동을 통일화·일원화 시키는 일,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 거의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미 10년 전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한 것이 천도교요, 독립운동 자금의 공급처도 천도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비롯한 40여개소의 지방 교구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중요 교역자가 구속되고, 일백 수십만 원의 예금을 압수당하였다. 결국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선생의 탁월한 지도력과 포용력, 그리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대교당 건축을 추진한 것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위해 운동자금 지원을 결단한 것도,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해마다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유지해온 것도 의암손병희 선생의 결단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3·1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거나 심지어 천도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마저 있음을 보게 되면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생명과 재산을 바쳐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면서 깊이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연재를 마칩니다. 끝.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칼럼] 정치와 종교, 그 적정(適正)한 거리근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통일교의 정교유착(政敎癒着) 의혹은 앞으로 점점 그 실체가 드러나겠지만 종교계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사례라고 생각된다. 이를 계기로 정치와 종교의 적정한 거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를 위해 먼저 정치와 종교 간의 관계 유형을 분류해 보고,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나타난 정교유착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 후에 동학·천도교 역사를 정교 관계의 시각에서 개관(槪觀)해 보고 천도교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모색해 보고자 한다. 정치와 종교는 인류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 하나는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을 책임지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이 둘은 각자의 영역에서 조화롭게 기능할 때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이 둘의 관계가 늘 이상적이지는 않았음을 증명한다. 정치권력이 종교의 신성함을 이용하거나, 종교가 정치적 야심을 드러낼 때, 그 위험한 동거는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정교일치(政敎一致)’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고, 종교 지도자가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이다. 중세 유럽의 교황청이나 이슬람 신정국가가 대표적인 예다. 둘째,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정치와 종교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여 서로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셋째, ‘정교유착(政敎癒着)’은 공식적으로는 정교분리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정치 권력이 종교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특정 종교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바로 이 세 번째 유형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라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정치와 종교가 긴밀하게 얽히고설킨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는 식민 통치의 안정화를 위해 종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11년 제정된 사찰령은 조선 불교를 통제하고 일본 불교의 영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제는 사찰의 주지 임명권을 갖는 등 불교계를 식민 통치의 하위 조직으로 편입시켰고, 일부 불교계는 이에 동조하여 친일 행각을 벌였다. 기독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신사참배 강요는 민족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지만, 일부 기독교 교단과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용인하거나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는 종교의 신념을 버리고 정치 권력에 굴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후 한국 기독교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대일항전기(對日抗戰期)에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가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교단 조직은 비밀 연락망이 되고, 종교 지도자들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처럼 종교가 민족의 아픔과 함께하며 저항의 목소리를 낸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해방 이후, 특히 군부 독재 시절에는 ‘정치권력과 종교의 위험한 유착’이 본격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운동과 같은 체제 동원 사업에 종교계를 적극 활용했다. 교회와 사찰은 정권의 정책을 홍보하고 국민의 정신 무장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1970년대 유신 체제 하에서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유신 헌법을 '하늘의 뜻'이라며 찬양하는 등 정치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동시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개신교 민주화 운동 세력 등은 독재에 맞서 저항하며 종교의 사회 참여적 역할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정치와 종교의 유착이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일해재단 설립 과정에서 전경련과 함께 종교계가 막대한 기부금을 강요받았으며, 이것은 군부 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금을 모으는 데 종교가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경유착(政經癒着)과 함께 ‘정교유착(政敎癒着)’의 전형이 되었다. 또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침묵하거나 심지어 학살을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며 종교의 윤리적 역할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1980년대 ‘오대양(五大洋) 사건’이나 ‘용산 참사’와 같은 종교 관련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정치 권력은 종교 단체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된 수사나 해결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종교는 단순히 정치에 동원되는 것을 넘어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특정 대형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의 집권 초기부터 '소망교회 인맥'이 주요 공직에 대거 등용되면서 정교유착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특정 종교에 편향된 정책을 추진하고, 불교계는 이에 반발하여 '종교 편향' 문제를 제기하는 등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최순실 게이트'는 무속 신앙과 유사한 종교적 요소가 국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낳았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이 창시한 영생교와 관련된 논란은 한국의 종교와 정치 유착이 단순한 제도적 관계를 넘어 개인적 신념과 사적 관계로까지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준 충격적인 사례였다. 이 사건은 정치와 종교의 건강한 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요즘에도 특정 종교 단체는 선거 때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며 ‘조직적 표몰이’에 나섰고,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특정 종교 시설을 찾아가거나 종교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종교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정치의 공정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정치와 종교 간 적정 거리는 과연 얼마일까? 단순히 “종교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사회 정의와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야 할 사회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적정한 거리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첫째,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종교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적 행위를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평화·정의를 위해 사회적 발언을 해야 한다. 촛불집회와 같이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외침에 종교계가 함께하는 것은 정의로운 행동이지만, 특정 정당의 선거 운동을 돕는 것은 종교의 순수한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다. 둘째, ‘종교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특정 종교 지도자만을 만나거나 특정 종교 행사만을 참석할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공정하게 대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역대 정부에서 최고지도자의 행보가 특정 종교에 치우쳐서 비판 받은 사례를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에 입각하여 공정한 종교정책을 펴는 것은 종교 간 갈등을 예방하고, 모든 시민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기본이다. 셋째, ‘비판적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종교는 권력과 단순히 유착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연대하여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종교의 본연적 역할이자 사회적 양심으로서의 의무이다. 종교는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 혹은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조화롭게 상생(相生)해야 한다. 정치는 특정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기보다, 모든 시민의 삶을 공정하게 보살피는 ‘보편적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종교는 정치적 권력을 탐하기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윤리적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지향하는 정교분리는 단순히 정치와 종교를 물리적으로 떼어놓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고유한 가치와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위험한 동거의 유혹을 경계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동학·천도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교정일치(敎政一致)’라는 독특한 형태를 보여왔다. 동학·천도교인의 정치적 행위는 창명된 초기에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했으나, 시대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저항, 독립운동, 그리고 생존을 위한 협력 등으로 변화해 왔다. 동학농민혁명기 (1894) : 혁명과 탄압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東學)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거대한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왜와 서양 오랑캐를 배척하여 정의를 내세움)'를 외치며 사회 개혁을 요구한 종교적 혁명이자 정치적 투쟁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동학을 반체제적인 '좌도(左道)'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시기의 관계는 '정교유착'이라기보다는 종교 조직에 기반한 정치적 항쟁과 국가 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의 양상으로 보아야 한다. 대일항전기 (1910-1945) : 독립운동의 구심점 대일항전기, 천도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치 행보를 보였다. 1919년 3.1 혁명 당시, 천도교의 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는 종교가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시기 천도교의 정치 참여는 권력과의 유착이 아닌,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의 유착 사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해방과 남북 분단 이후 (1945-현재) : 극단적 운명 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제3의 길(중도)을 걸은 천도교의 운명은 다음과 같이 남북한에서 극과 극으로 갈렸다. #북한에서의 '정치적 위장' : 천도교의 교세는 전통적으로 북한 지역에서 강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종교를 탄압하면서도 정치적 명분을 위해 1946년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이라는 정당을 허용했다. 이 정당은 실제로는 조선노동당의 하부 조직으로, 북한 정권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다당제 국가'라는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위장(파사드facade)에 불과했다. 이는 종교가 생존을 위해 독재 정권에 종속된, '생존형 유착'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남한에서의 '정치적 소외' : 남한에서는 정권과 유착된 기독교와 불교가 세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천도교는 교세가 급격히 위축되며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 정치인들의 선거 활동에서 천도교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고, 천도교인들의 정치적 활동은 주로 남북통일 관련 학술대회나 시민단체 활동 등에 한정되었다. 이는 정치 권력과의 관계 형성을 위한 기반이 매우 취약하게 된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천도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정권에 대한 저항(동학농민혁명), 민족 운동의 리더십(3.1 혁명), 그리고 체제에 의한 흡수(북한 천도교청우당의 경우)와 소외(남한 천도교)라는 독특하고 극적인 과정을 거치며 정치와 얽혔다. 이는 권력과 상호 이익을 추구한 다른 종교의 유착과는 다른, 역사적 운명에 따라 형성된 특수한 정교 관계라 할 수 있겠다. 천도교는 교정일치를 지향하지만 용시용활(用時用活)하여 시대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현시대는 교정분리(敎政分離)가 대세이므로 이에 부응(副應)하면서 ‘개벽세(開闢世)’의 시운(時運)을 타고 최적의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시점에서는 정치계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천도교의 4대 목적(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 달성을 위해 중도(中道) 실용주의적으로 지혜롭게 처변(處變)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공암 박돈서(선도사) -
천도교와 3 · 1운동(21)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2. 잊혀져 가는 3.1운동 우상화로 왜곡된 3.1정신 (참고 박성수 자료) 우리에게 자장 중요한 사실은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당시의 연합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이 같은 국제승인이 있건 없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단지 우리민족의 요구와 선언만으로 수립된 것이다. 굳이 연합국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독립이 미국의 독립선언만으로 가능했듯이 우리의 독립도 우리 민족의 자결만으로 독립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을 잊지 말자 올해로 3.1운동 90주년을 맞는다. 당연히 축하해야 하지만 반성할 것도 많다 3.1운동이 일어난 해는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한지 10년이 되기 직전 인 9년차였다. 우리민족이 돌연 세계를 향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독립선언을 하기까지 민족대표 33인, 그중에서도 손병희 선생의 노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3.1운동이 아무 준비도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어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 까지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 3.1운동이 성공한 것인데 그런 것이 제대로 기술되지 않았다. 준비과정이 모두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발각될 뻔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나고 보면 그런 일들은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세월의 물결에 씻겨 가지와 잎이 떨어져 태백산 정상의 주목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었다는 사실, 선언서를 인쇄한 사람이 천도교 보성사의 이종일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를 손병희 선생이 했다는 사실은 확실한데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낭독한 사실만 교과서에 뚜렷이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학생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으나 모두가 거짓이다. 일이 잘되면 자신이 했다며 공을 내세우지만 일이 잘못되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뒤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가면서 많은 사람이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품에 감추고 혹은 걸어서 고향을 찾아갔다. 유관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관순 이전에 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매국노 이완용까지도 민족대표의 한사람이 될 뻔했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나라가 독립되면 나는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절한다고 말했으나 만세운동 준비를 일본경찰에 알리지는 않았다. 3.1운동 앞에 매국노의 양심이 무릎을 끓은 것이다. 3.1때처럼 모두가 한 몸 한마음이 되어 애국심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세계화 운운하는 바람에 애국심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개인주의만 꽃피는 요즈음 배워야할 역사의 교훈이다. 북한의 3.1운동 왜곡 최근 몇 년 사이 3.1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학생이 많아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건망증은 본래 노인들의 지병으로 알고 있는데 요즈음 젊은이들도 건망증에 걸린다는 것이니 세태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심지어 젊은 학자들도 3.1운동이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니 용서받을 일이 아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3.1운동의 나라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 한 사실은 유명하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 그대 한국이여 네가 다시 한번 불을 켜는 날엔 한국아 너는 동방의 빛이 되리라.” 이 시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던 1929년 4월 2일 동아일보에 실려서 지금도 우리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3.1운동의 비폭력 정신은 인도의 간디와 네루까지도 고개를 숙였다는데 우리는 왜 3.1운동을 잊어만 가는가? 역사는 기억해야 역사라고 한다. 잊으면 역사는 영원히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고 무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망각보다 더 무서운 범죄는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다. 한번 왜곡된 역사는 다시 살리기 어렵다. 3.1운동을 가장 심하게 왜곡하고 있는 나라가 북한이다. 북한의 역사왜곡은 날조라 할 정도다. 폐쇄된 공간 북한은 우리 근대사를 온통 김일성 위주의 역사로 개악하였다. 철창 속에 갇힌 북한 인민민주주의 인민들은 독립운동을 김일성 혼자 한 것처럼 꾸민, 아니 날조한 연극을 보고 박수치라고 강요받고 있다. 1911년을 김일성이 태어난 해라하여 주체 원년으로 삼고 조금 있으면 대대적인 주체 100년 축제를 할 모양이니 이쯤 되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다. 북한에서는 3.1운동 때 여덟 살 난 김일성이 시위대를 이끌고 평양 대동문까지 갔다는 거짓말을 믿어야한다. 거기에 더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서울의 민족대표보다 먼저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믿어야한다. 북한에서는 이 거짓말을 믿지 않으면 강제수용소에 가야한다. 한편 남한에서도 3.1운동에 대한 역사인식이 불완전하다. 3.1운동은 학생들이 먼저 일으킨 학생들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만일 민족지도자들의 독립선언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학생과 군중들의 무질서한 시위운동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그야말로 일제가 바라고 바라던 폭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지도자들은 미리 못을 박고 당부하기를 질서를 지키고 비폭력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3.1운동은 훌륭한 독립운동으로 네루와 간디 그리고 타고르까지도 부러워했던 독립운동으로 기억된 것이다. 민족자결로 충분하였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당시의 연합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 이 같은 국제승인이 있건 없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단지 우리민족의 요구와 선언만으로 수립된 것이다. 굳이 연합국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독립이 미국의 독립선언만으로 가능했듯이 우리의 독립도 우리민족의 자결만으로 독립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자칫하면 이 같은 대원칙을 우리는 잊는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민족의 자율적인 의사결정으로 독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독립을 선언하고 1910년의 국권침탈조약을 무효화시킨 것이 3.1독립운동이었다. 우리는 1965년 한일양국 간에 기본조약을 맺어 오랫동안 끊어졌던 국교를 정상화 하였다. 만일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가 없었다면 기본조약 제 2조 “1910년 8월 22일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과 그 이전의 모든 조약은 무효”라는 조문을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국민은 그때 한일회담을 반대하였고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였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3.1독립정신에 입각하여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를 무효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외쳤던 독립만세의 함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을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명문화한 것이니 어찌 우리가 3.1운동을 잊었다 할 수 있는가.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김현성, 동학을 노래하다…경전에서 길어 올린 신작으로 문화운동의 새 물꼬가을밤, 천도교중앙대교당 앞마당이 노래와 이야기로 환해졌다. 9월 25일 오후 7시, 「이등병의 편지」와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싱어송라이터 김현성이 ‘자유와 독립을 향한 동학혁명의 이야기와 노래’를 주제로 단독 콘서트를 열고, 동학 천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신작들을 처음 공개했다. 공연은 1부 ‘민족 시인의 노래·독립군의 노래’, 2부 ‘동학, 아름다운 사람들’로 나뉘어 진행됐다. 관람석에는 박인준 교령과 강병로 종무원장, 서소연 교무관장, 최인경 사회문화관장, 남연호 도서관장을 비롯해 100여 명의 관객이 자리해 기타 선율과 서사에 귀를 기울였다. 서막은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 이어 이육사의 「청포도」, 윤동주의 「별 헤는 밤」,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이 잔잔하면서도 힘 있는 편곡으로 무대에 올랐다. 「나는 자랑스런 의병이에요」와 신곡 「홍범도의 묘비」는 청중의 호흡을 낮추며 독립군의 마음을 불러냈고, 「이등병의 편지」와 「술 한잔」이 1부의 여운을 길게 남겼다. 무대 양옆 대형 스크린의 자막과 영상은 곡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했다. 2부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해월신사법설』에서 가사를 뽑아 쓴 신곡으로 채워졌다. 2부 공연 시작에 앞서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이 초대 손님으로 나와 동학 천도교가 3‧1혁명에서 촛불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의 심장부에 서 있었음을 환기시켰다. 최 관장은 “작은 문화운동이 국민의 마음에 스며들도록 전국 순회 프로그램으로 이어가겠다”고 밝히면서 대중을 향한 천도교 문화운동의 지향점을 명확히 했다. 김현성 역시 “음악은 시대를 기록하고 메시지를 건네는 유용한 통로”라며, 전국 소극장 투어와 음악극·뮤지컬 등으로의 확장을 예고했다. “동학은 미지로 보일지 몰라도, 여기서 길어낼 에너지는 엄청나다”는 그의 기대가 덧붙었다. 이어진 「해월 선생 내게 물으시네」는 「대인접물」의 문장을 경쾌하게 풀어 천도교 교리를 자연스레 각인시켰고, 「탄 도유심급」은 바른 마음을 다잡는 경구를 리듬으로 새겼다. 『용담유사』 「흥비가」 구절을 인용한 「아름드리나무」의 흥겹고 포근한 결이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배우 김진휘의 ‘일하는 한울님’ 낭독이 이어지며 서소문 옥중 해월 최시형 신사의 육성이 현재의 시간 위로 포개졌다. 뒤이은 「해월, 작별의 인사」와 「세상에서 참 기쁜 일」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를 만난 기쁨과 해월의 결연한 마음을 절제된 선율로 그려 깊은 공명을 만들었다. 김현성은 “(이 노래들은) 경전의 문장을 노랫말로 발췌해서 처음 들려드리는 것”이라고 창작 배경을 전했고, 무대는 「주먹밥」, 「기미독립선언을 노래함」으로 이어졌다. 앵콜로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관객과 함께 합창하며 밤하늘의 여운을 길게 남겼다. 내내 공연을 지켜본 20대의 비(非)교인 정소라(가명) 씨는 “자막과 영상 덕분에 노랫말과 맥락이 또렷했다”며, 신앙 배경이 없어도 동학과 천도교의 핵심을 따라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비(非)천도교인에게도 열린 입구가 마련됐다는 평가다. 서울교구 송영기 동덕은 “중앙대교당 앞마당이 공연장으로 변한 순간, 교당이 ‘문화의 마당’이 될 수 있음을 체감했다”며 유연한 공간 활용의 가능성을 짚었다. 맑은 날씨와 어울린 선곡이 현장을 하나로 묶었다는 소감도 전했다. 강병로 종무원장은 “동학은 이런 식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 오늘 콘서트에 크게 감동했다. 동학이 음악, 미술, 운동으로까지 이처럼 확장되는 방식이야말로 동학이 사회 속으로 퍼지는 길”이라고 강조해, 중앙총부가 지향하는 K-동학의 좌표를 다시 확인케 했다. 권윤호 동덕은 배우 김진휘의 낭독을 언급하며 “해월 신사께서 하셨을 말씀이 자막과 함께 흐르자 울컥해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음악과 서사의 결합이 만든 집중력, 신작에 맞춘 자막 운영의 효과가 눈에 띄이는 부분이다. 주선원 동학민족통일연구회 상임의장은 “매우 독특한 기획을 해줘서 오늘만큼은 정말 기쁘다. 경전 말씀이 오늘의 노래로 울릴 때 너무 좋았다”고 평했고, 서울교구 양윤석 선도사는 “최근 중앙총부가 추진한 행사 중 가장 빛나고 가장 탄탄한 기획”이라며 제작진의 열의와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 ‘김현성의 아름다운 사람들’은 노래로 만난 동학 천도교의 현재형 기록이었다. 수운 대신사와 해월 신사의 가르침을 오늘의 언어와 선율로 되살린 무대, 그리고 그 무대를 발판으로 전국을 잇는 순회 문화운동의 약속이 한데 포개졌다. 문화로 스며드는 교화, 생활 속에서 자라는 신앙. 중앙총부가 열어갈 다음 장을 기대하게 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
천도교와 3 · 1운동(20) "천도교의 결정적인 역할"『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제 5 장 3.1운동 관련 논문 1, 3.1운동과 천도교 (참고 표영삼 자료) 머리말 포덕 60년(1919) 3월 1일 일어났던 3.1운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나와 있다. 긍정적인 평가도 나와 있거니와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부정적인 평가이든 긍정적인 평가이든 제각기 보는 입장이 있어 일리가 있다. 역사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 교단으로서는 3.1운동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 3.1운동과 교단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 근년에 이르러 일부 진보적 사학자 중에는 천도교의 역할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동학혁명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눈으로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번 3.1절을 맞아 교단의 입장에서 몇 가지를 추려 그 의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천도교의 선도적 역할 누가 무어라고 해도 3.1운동의 역사적 규명은 천도교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특히 3.1운동의 초기단계에서의 천도교 역할은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준비단계에서는 천도교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운동방침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과 운동을 통일화, 대중화 시키는 일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 거의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첫째, 3.1운동의 기본 방침을 천도교에서 1월 하순경에 결정했다. 모든 사회운동에는 그 운동 원칙을 정하고 전개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기본원칙은 바로 운동주체가 정하게 마련이다. 당시 의암성사 밑에서 참모로 주역을 담당했던 여암(如菴 崔麟)의 수기에 의하면 기본원칙은 천도교에서 단독으로 결정했다. 여암이 의암성사를 찾아갔을 때 의암성사는 “장차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우리들이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무위무능하게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이미 정한바 있으니 제군은 십분 분발하여 대사를 그르침이 없이하라” 고 부탁했다 한다. 의암성사의 이 말씀은 3.1운동의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 때는 기미년 1월하순경인 듯 하여 대단히 고민한 끝에 다음과 같은 3대 운동 원칙을 세웠다. 1) 독립운동은 대중화하여야 할 것. 2) 독립운동은 일원화 하여야 할 것. 3) 독립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 이 3대 원칙의 결정은 물론 의암성사와 권동진·오세창과 같이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3.1운동은 천도교가 단독으로 정한 원칙에 의해 전개되었던 것이다. 둘째,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은 전체 천도교인 단독으로 마련했으며 또한 지출되었다. 3.1운동 1년 전인 포덕 59년(1918) 4월에 부구(部區) 총회를 열고 신 교당을 건축키로 경정하였다. 모금운동은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천도교인들은 단순히 대 교당을 짓는다하여 성금을 각출한 것이 아니라 성사께서 어떤 중대한 일을 거사하게 될 것이므로 앞장서서 자금을 마련해야겠다는 애국애교의 심정에서 각출했던 것이다. 천도교인들은 가난한 농민들이었으므로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논밭과 소를 팔았던 것이다. 즉 생활 수단을 팔아 나라위한 큰일에 바쳤던 것이다. 기미년 1월에 각출한 성금은 상당액에 이르렀다, 이 때 일제 총독부 당국이 이 사실을 알고 돌려주라는 압력이 있었다, 할 수 없이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방교구장들과 상의한 결과 각 교구는 되돌려 받은 것처럼 영수증만 쓰고 당초 목적한 대로 운동자금으로 사용키로 하였다. 이때 약 500만 원 가까이 모금되었는데 대교당 건축과 중앙총부 사무실 건축에 필요한 27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운동자금으로 쓰게 되었다. 은행에 약 6만 원 예치했다가 당국에 의해 동결되었고 그 나머지는 수시로 비밀히 사용할 수 있게끔 춘암상사에게 맡겨놓았다. 이 자금으로 준비단계의 각종 비용을 충당했으며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에 필요한 여비 등에도 사용했다. 심지어 기독교 측의 요청으로 5000원을 주었으며 독립선언서 인쇄 사실이 탄로 나자 종로경찰소 신형사의 입을 막기 위해 역시 5000원의 거금을 주기도 했다. 어떤 운동을 막론하고 운동자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천도교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금을 주도적으로 마련 차질 없이 진행하게 하였다. 이런 자금마련은 운동주체로서의 천도교가 해야 할일을 완수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즉 운동의 주체자로서 전체 교인이 참여하여 논밭팔고 소 팔고 심지어 여자들의 머리치장에 필요한 다리까지 팔아 마련한 것이다. 셋째,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시종 천도교에서 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쇄와 배포도 천도교가 주관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육당 최남선이 집필하였다. 그를 선정하였던 것이 바로 천도교였으며 2월 15일에 초안이 완성되어 가져왔던 것을 검토하고 보관 한 것도 천도교였다. 그리고 인쇄에 있어서도 천도교에서 전적으로 맡아 하였다, 조판기술 관계로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에서 판을 짜가지고 2월 27일에 넘겨받아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인쇄하였다. 인쇄 총책임자는 33인의 한 분이었던 천도교 간부(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었다. 독립선언서의 배포 책임도 천도교에서 전담하였는데 이종일의 책임하에 인쇄를 마친 후 신 교당 건축 장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가 배포했다. 서울지역의 배포는 학생들이 담당하였고 지방에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자기 종교 계통에 따라 배포하였다. 천도교는 독립선언서의 작성에서부터 인쇄 배포에 이르기 까지 준비단계에서 거의 단독으로 담당하였다. 운동의 일원화에 앞장서다 넷째, 3.1운동을 일원화 하는데 있어서도 천도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기독교 측의 노력도 높이 평가하지만 전민족의 운동이 되게 하기 위해 천도교 측의 노력이 대단했다. 여암 자서전의 일부를 보면 처음에는 윤용구·한규설·박영효 윤치호 등과 접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으로 기독교 측과 불교 측을 만나 공동으로 운동을 벌이자고 합의하였다. 윤용구·한규설·박영효·윤치호 등 4인이었다. 윤용구는 구한말 대신으로 국변 후에 일본의 작위를 고사하였고 그 성품이 고결한 사람이었으며 한규설은 을사늑약 때 참정대신 즉 총리대신으로 그 조약을 한사코 반대한 사람이었고 박영효는 소위 개화당 영수로서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여 일인의 침략을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귀양살이까지 한 저명한 귀족 혁명가이다. 윤치호는 과거 광무년 간에 독립협회장으로서 특히 미국인 간에 신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규설만이 일이 중대하니 심중히 고려해 보자는 약속이었고 그 밖에 박영효·윤용구·윤치호는 모두 회피하여 면회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미 노후한 인물들이다. 독립운동은 민족적 제전이다. 신성한 제수에는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좋다 차라리 깨끗한 우리가 제물이 되면 어떠냐, 구시대의 인물들과의 제휴가 실패되자 다음에는 기독교와 불교 유교 측에 교섭해 보기로 하였다. 이승훈은 그간 자기가 경과한 모든 사유를 말하고 다음에 작일 기독교 측 여러 사람이 회합한 내용을 “기독교 측에서 독자적으로 운동을 진행할 방침”이란 것을 말하였다. 도대체 일국의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대사업이다. 독립운동이 만일 분산적으로 된다면 그것은 독립운동에 대한 민족적 불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니 절대로 통일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승훈은 곧 이어서 말하기를 “작일 회의에서 가장 곤란한 문제는 비용에 관한 문제였는데 분담해서 변통해 보자고 하였으나 시기가 급박한즉 천도교에서 우선 5000원만 돌려주었으면 만사여의할 듯싶다. 만일 5000원이 못된다면 3000원가량이라도 우선 급한 비용이 될듯하니 기어이 돌려주기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동대문 밖 상춘원에 가서 의암성사를 뵙고 그동안 경과 사항을 보고하고 이승훈이 청구한 금액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선생님 말씀이 5000원 청구하였으니 그 액수대로 융통해주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다음날 22일에 5000원을 가지고 소격동 이승훈 숙소에 가서 직접 교부하였다. 결국 5000원을 마련해줌으로써 기독교 측과 제휴는 성공하였다. 다음은 불교 측과 제휴하는 일이 남았다. 24일 밤에 평소부터 친교가 있는 강원도 양양군 통천면 신흥사 승려 한용운(韓龍雲)을 생각하고 그의 주택 재동 43번지를 탐방하였다. 나는 그의 의사를 간파하고 그간의 경과 사실을 피력하였더니 불교 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널리 통지하지 못한 채 한용운 백용성 2인만 참가하였으나 그들은 족히 불교를 대표할만한 인물이었다. 결국 천도교 기독교(장로교, 감리교) 불교 등 세 종교 단체가 하나가 되었으며 또한 학생들이 가담되어 운동을 거족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유감스러운 점은 유교 측 대표와 천주교 대표가 빠졌다는 점이다. 끝으로 남은 일은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는 일이다. 2월 27일에 이승훈·이필주·함태영·한용운·최남선 등이 모여 의론한 결과 의암성사를 첫머리에 쓰고 감리교, 불교 순으로 대표자의 이름을 쓰고 나머지 29명은 가나다순으로 정했다. 육당이 중간에 서서 인물로 보나 거사동기로 보나 손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수위를 쓰는 것이 어떠냐고 기독교 측에 권고했다. 이승훈은 그러면 두 번째로 기독교를 대표하여 길선주 목사를 쓰자고 타협론을 제출했다. 그러나 길선주는 장로교파로서 기독교 전체를 대표할 수 없은즉 감리교를 대표하여 이필주 목사를 세 번째로 쓰자고 했다, 그 말에 따라 한용운은 제 4위는 백용성을 쓰는 것이 옳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의암성사를 첫머리에 쓴 것은 천도교대표자로 기명한 것이 아니라 육당이 “손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수위에 쓰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는 점과 이 육당의 제안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의암성사는 영도자로서 수위에 기록한 것이며 당시 일반 사회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대표 중에 대표가 된 것이다. 교단의 3.1운동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라도 역사를 보는 눈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면 그 이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3.1운동을 남다르게 보는 대표적인 사례는 북한의 3.1운동관이다. 그들은 첫째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 중에서 러시아 혁명을 개입시키고 있다. 러시아 혁명에 자극되어 3.1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둘째, 3.1운동의 주체는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33인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타협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관으로 보면 사회 구조는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체제로 바뀌게 마련이므로 그 동기는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에 뿌리를 대지 않을 수 없으며, 3.1운동의 주체는, 특히 선봉적 역할은 노동자로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데 자극받아 일어났다고 하면 그들의 이론에 맞지 않을뿐더러 사회사적으로 분수령을 형성하는 3.1운동에서 소외되게 될 것이다. 그들의 3.1운동관은 종교 단체의 역할을 철저히 배격하고 자기들의 역사관에 부합되는 이론으로 재해석하려는데 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정연한 설명이 가능하더라도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져서는 이론 자체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천도교에서는 다른 역사관이 어떻게 평가하든지 즉 부정적으로 평가하든지간에 우리 나름대로의 역사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3.1운동은 낡은 문화가 물러가고 새 문화가 다시 개벽되는 종교적 역사관에 입각한 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사에서 전 근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구별을 신분제도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듯이 낡은 문화와 새 문화의 차이는 인간의 존엄성에서 벗어나는 질서와 향상시키는 질서의 차이로 구분된다. 전근대적인 사회체제는 신분제도를 근간으로 한다면 근대적 사회체제는 신분제도가 타파되고 평등성을 확보하는 사회체제의 차이에 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낡은 문화 (병든 문화)는 인간존엄성을 무시한 문화라면 새 문화(다시 개벽)는 인간존엄성을 향상시키는 문화이다. 대신사는 그 분기점을 스스로의 세계관에 대한 해답의 체계(無極大道)를 얻은 포덕 원년(1860)을 분기점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우리의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향상시키는 역사로 흘러왔다는 것이다. 동학혁명운동도 3.1운동도 정치 경제제도의 현상들을 제거하면 이런 쪽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이 천도교의 종교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추상적일 수 있으나 종교적인 역사관이므로 그런 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존엄성의 실험을 위한 역사적 과제로 제기한 것이 다름 아닌 보국안민이다. 보국은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배제하고 국제간에 정의를 확립하고 민주적 완전자주독립을 확립하자는 것이요, 안민은 자유 평등 정의 민주 번영의 가치들이 실현되는 인간존엄성을 토대로 한 사회제도를 확립 물질적 정신적으로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3.1운동을 천도교의 역사관으로 볼 때 새 문화 창조 과정에서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국제적 모순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보다 나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보국안민운동의 하나였다라고 할 수 있다. 둘째 3.1운동은 천도교라는 이념집단이 선도하여 국제적 모순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도교는 교정일치(敎政一致)라는 설명체제로 역사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사회변동은 인간의 의식(敎)이 변해야 사회구조를 개혁할 수 있다. 동시에 사회구조는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상호 교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변동에는 그를 주도할 수 있는 이념체계와 집단이 중요하다. 아무리 사회적 모순이 성숙되었다하더라도 그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이념체제가 있어야 하고 그 이념체제를 실천하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자연발생적으로 폭발 저항할 수도 있으나 이념집단이 형성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저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이념집단이 형성되면 기층민중이 그 조직에 직결 저력을 발휘 사회적 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조직적으로 사회운동을 지속시킬 수 있다.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운동의 경우를 들어보면 동학이란 이념체제를 가진 집단이 없었으면 혁명운동은 불가능 했다. 농민문제가 아무리 모순관계를 가졌더라도 이를 이끌고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이 없으면 안 된다. 이념집단이 없어도 혁명운동이 가능하다고 하면 1894년에 동학 아닌 다른 집단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났어야 한다. 그 당시 실학 계통이나 그리스도 계통의 사상적 종교적 집단이 있었으나 그 곳에는 기층민중들이 모여들지 않았으며 혁명을 주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학에 대해서 기층민중은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었으며 그 힘으로 혁명을 집행했다. 이것은 동학이 갖는 이념체제가 기층민중의 이해와 일치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화할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운동은 동학이란 이념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학·천도교는 바로 새 문화 창조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이념집단이며 동학혁명과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3.1운동은 일시적으로 일본제국주의 통치에 항거한 운동이 아니라 자유 평등 민주 번영을 실현시키기 위한 이념운동이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가을밤 물들일 ‘동학, 아름다운 사람들’ 콘서트 25일 열려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25일, ‘2025 인내천수운문화제’ 공연 행사로 ‘수운의 뜨락1-동학, 아름다운 사람들’(부제: 자유와 독립을 향한 동학혁명 이야기와 노래) 콘서트를 연다. ‘이등병의 편지’,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싱어송라이터 김현성의 새노래 ‘동학혁명의 노래’들을 처음 세상에 발표하는 공연 무대다. 김현성이 작사작곡한 노래들을 레퍼토리로 천도교중앙대교당 앞마당 특설무대에서 열리는 공연은 1부 ‘민족시인의 노래’와 ‘독립군의 노래’, 2부 ‘동학, 아름다운 사람들’을 주제로 진행된다. 1부에서 김현성은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등 민족시인들의 시에 노랫말을 붙인 ‘청포도’, ‘별 헤는 밤’, ‘ 나룻배와 행인’ 등에 이어 홍범도 장군의 활약상을 주제로 한 신곡 ‘나는 자랑스런 의병이에요’와 ‘홍범도의 묘비’ 등을 선보인다. 대표곡 ‘이등병의 편지’와 ‘술 한잔’(정호승 시, 김현성 곡)도 귀에 익은 멜로디로, 1부의 마무리를 장식한다. 2부 ‘동학 아름다운 사람들’ 공연은 모두 새로운 ‘동학의 노래’들로 채워진다. ‘아름드리 나무’, ‘해월 선생 내게 물으시네’, ‘탄 도유심급’(동경대전의 구절), ‘해월, 작별의 인사’, ‘세상에서 참 기쁜 일’, ‘주먹밥’(김남주 시, 김현성 곡) 등 여섯 곡 모두 김현성의 최신곡이다. 특별한 이야기 손님으로 초대된 최인경 천도교중앙총부 사회문화관 관장은 ‘동학과 해월 최시형 이야기’로 함께 한다. 최인경 관장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직계 현손이다. 2부에서는 배우 김진휘의 ‘일하는 한울님’ 낭독 공연도 곁들여지며, 다함께 부르는 ‘별 헤는 밤’(윤동주 시, 김현성 곡)에 이어 기미독립선언문 일부를 노랫말 삼아 곡을 붙인 김현성 곡 ‘기미독립선언을 노래함’으로 문을 닫는다. (기미독립선언문을 노랫말 삼아 곡을 붙인 작곡가는 김현성이 처음이다.) 이 공연을 기획한 박성현PD는 지난 2일,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했던 ‘we, The K-우리 안의 위대함을 밝히는 시간’ 전시를 기획한 데에 이어 이번 공연을 선보이며 “1894년의 ‘동학 혁명’과 130년 뒤 2024년 겨울, ‘빛의 혁명’이 민족사의 자장 안에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노래 공연”이라면서 “동학에 푹 빠져 노래를 만든 시노래 장인이자 독보적인 뮤지션 김현성을 재발견하는 공연은 11월 포항시 투어를 비롯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싱어송라이터 김현성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가르침이 깃든 동학에 대해 깊이 공부하면서 곡을 만드는 내내 ‘동학, 아름다운 사람들’ 공연이 지난 겨울 광장 시위의 불꽃을 꺼지지 않게 하는 기름이 되기를 소망했다.”고 말했다. 공연 일시는 2025년 9월 25일 목요일 19;00, 장소는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천도교중앙대교당 앞 특설무대이다. 공연 문의: 02-6488-6831, 010-9154-4112. 전석 무료. -
관동대지진 속 천도교의 구호와 진상 규명, 민족운동의 한 축을 이루다(지난 호에 이어) 천도교 도쿄종리원 박사직이 귀국할 때 동료의 송사에서 “대지진! 대지진!! 일본 수도의 대지진 당시에 말도 모르는 백의동포가 좌로도 우로도 피할 곳이 없이 가진 발광을 다부림녀서 혀를 빼어 물고 눈알이 꿰어지는 뭇(衆) 죽음을 당할 때에 선생의 환장된 가슴에 쓸쓸한 암흑 속에서 희미한 등불을 손에 들고 동포의 뼈를 한 토막, 두 토막 주워 모으며 돌아가던 그때가 이제에 생각하면 눈물이시겠지요”라고 한 바 있다. 이는 당시 이재동포위문반에 참여한 바 있는 박사직의 반응이 아닐까 한다. - 동학지광 8호(1928.8)에 수록된 내용 (해설 성주현 상주선도사)- 동경당부는 포덕 68년 11월 1일에 기관지 「동학지광 (東學之光)」을 창간하여 포덕 74년 11월호까지 모두 18호를 발행하였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은 순식간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재난이었다. 그러나 이 재난은 자연재해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학살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청년들과 동포들은 극심한 공포 속에 흩어졌고, 이들을 지키고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천도교의 조직적 대응이 본격화되었다. 도쿄(東京)종리원의 보존과 위문반 임시 사무소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東京) 대부분의 건물이 붕괴와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천도교 도쿄(東京)종리원 건물은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했다. 이 건물은 이후 조선인 구호와 학살 피해 조사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재조선동포위문반(罹災朝鮮同胞慰問班)’의 임시 사무소로 사용되었다. 위문반은 이곳에서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구호 활동을 전개했으며, 희생자들의 장례와 위령 의식을 주관했다.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결성과 활동 지진 직후 일본 전역에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며, 조선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이에 맞서 천도교 도쿄(東京)종리원과 종리원장 박사직을 중심으로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이 결성되었다. 천도교 청년회원 이근무,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YMCA 등도 함께하며 범동포적 연대가 형성되었다. 1970년에 발간된 『극웅필경』에는 당시 YMCA 총무 최승만의 회고가 실려 있다. 그는 천도교 청년회 박사직 등과 함께 ‘이재동포위문반’을 조직하고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음을 기록했다. 이 조사는 1970년 3월 『신동아』에 「일본 관동진재시 우리 동포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이후 『극웅필경』에는 재수록되었다. 위문반은 일본 당국의 방해와 탄압 속에서도 두 달간 피해 조사를 진행하며 진상 규명에 매진했다. 1923년 12월 25일 열린 ‘재동경조선인대회’에서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으며, 보고에 따르면 학살 희생자는 총 6,661명에 달했다. 또한 해외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虐殺(학살)’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제작해 배포했다. 1924년 9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관동대지진 1주기 추도식을 개최하여 희생자들을 기렸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모 행사를 이어왔다. 2023년에는 100주기를 맞아 추모문화제를 열어 당시 사건과 천도교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조선 내 추모 활동과 일제의 통제 식민지 조선에서는 총독부의 언론 통제와 유학생에 대한 감시로 학살 소식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이는 4년 전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족운동이 재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대규모 운동이 어려웠지만,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구제활동과 추도회가 이어졌다. 특히 포덕 65년(1924) 9월 1일, 신흥청년동맹과 서울청년회가 주도하여 중앙대교당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주기 추도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공식적으로 열린 유일한 대규모 추도회였다. 한편, 도쿄청년회는 일본 내에서 해마다 추도회를 열어 학살의 기억을 이어갔다. 포덕 65년(1924) 9월 13일, 흑우회·기독교청년회·조선노동동맹회 등과 연합으로 1주기 추도회를 열었고, 포덕 66년(1925)에는 도쿄종리원에서 2주기 추도회를 개최하며 조난동포들을 기렸다.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계승 관동대지진 속에서 천도교가 보여준 활동은 단순한 구호를 넘어 민족운동의 한 축이었다. 천도교는 재난 속에서 조선인의 생명을 지키고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행동했으며, 일본 내 조선인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일본 내 조선인 인권운동과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천도교의 이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재난과 인권 문제에 대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천도교가 보여준 연대와 실천의 정신은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세대를 넘어 계승되어야 할 소중한 자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
천도교와 3 · 1운동(19) "와전・왜곡・과장・날조 등으로 인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2.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잘못된 설(說)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하나는 3・1운동 당시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만해 한용운이 낭독하였다는 설이다. 그런데 이 역시 두 가지 설이 모두 와전된 것이며 진실이 아님을 밝혀둔다. 우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왜 모였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3・1운동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게 된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민족대표들은 결코 최후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러한 주장은 민족대표들의 심문조서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언급이 없는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맹점을 이용해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만해가 낭독하였다고 무책임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주장보다 한술 더 뜬 진실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왜곡 사실에 대한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묵암비망록(黙菴備忘錄)『에 확연히 그 진실이 드러나 있다. 『묵암비망록』은 천도교 측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묵암 이종일(黙菴 李鍾一)이 작성한 것이다. 묵암은 어느 누구보다 독립의지가 강하고 성격이 매우 강직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된 당일의 『묵암비망록』 내용을 여기에 소개한다. “12시 전까지 집에 남겨두었던 선언서는 거의 다 배포하였다. 식사도 거의 못하고 서둘러 태화관(泰和館)으로 갔다. 4명이 불참한 가운데 오후 2시경 긴장 속에 독립선언서를 다시 (민족대표들에게-필자 주) 배포해주었다. 의암(義菴)이 나에게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하였으니 크게 낭독하라기에 오자(誤字)를 고치고 그렇게 따랐다.”(묵암비망록, 1919년 3월 1일자) 이것이 위의 두 낭설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다. 민족대표들은 전날 독립선언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장소를 바꾼 것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면 흥분된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로 인해 일본경찰에게 무자비한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래서 태화관에서는 오후 2시 기독교 측 민족대표 4명이 불참한 가운데 묵암이 참석한 민족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의암성사의 지시에 따라 선언서를 낭독했던 것이다. 다만 그 자리에서 만해는 일동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하였다고 『묵암비망록』은 밝히고 있다. 사실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특정인물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불경(不敬)이 될 뿐 아니라 민족대표 전체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유관순과 3・1운동 3・1운동에서의 유관순의 활동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3・1운동 당시 유관순의 역할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논할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3・1운동이 마치 유관순의 주도로 이루진 것과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광경이지마는 청소년들에게 “3・1운동을 누가 했는가” 하고 물으면 열 사람에 7, 8명은 “유관순이 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청소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지성인라는 사람조차 맹목적으로 그렇게 추종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작년 3・1절에 MBC TV는 ‘아우내 장터의 3・1운동’ 재현행사를 중계하면서 “1919년 3월 1일 유관순 열사가 이끌며 전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운운하면서 마치 기미년 3・1운동이 유관순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처럼 방송했다. 그래서 올해 3・1절에도 이런 잘못된 방송이 나갈 우려가 있어서 지난 2월 9일 중앙총부의 종무원장과 교화관장, 그리고 33인유족회 라영의 회장이 MBC를 방문하여 작년의 왜곡보도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고 이에 대한 정정보도와 함께 재발방지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가장 정확하고 공정해야 할 방송에서조차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니 일반 민중들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물론 MBC가 고의로 그런 방송을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중계방송하는 아나운서조차도 유관순의 만세운동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얻어들은 풍월을 가지고 방송에 임한데서 이런 착오가 빚어졌다고 생각된다. 바로 여기에서 3・1운동에 대한 국민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유관순의 유관단체에서 의도적으로 과대 선전하는데도 하나의 원인이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참고적으로 3・1운동 당시 유관순의 역할에 대해 간략히 기술해보기로 하겠다. 유관순은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는데,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에 가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도 참여했다가 유관순과 학생들이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요구로 학생들은 풀려났다. 그 후 3월 10일을 기해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유관순은 병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니며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거사일 하루 전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리는 것을 신호로 인근 여러 산에서 불길이 솟아올랐고, 드디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쳐 총격을 가해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결국 유관순은 재판에 회부되어 3년 징역 언도를 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 된 후에도 계속 항거하자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악화되어 1920년 17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유관순이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4월 1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유관순이 처음부터 3・1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와전됨으로써 특히 청소년들에게 3・1운동의 진실이 왜곡 전파되어 잘못 인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청소년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한 객관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3・1운동과 관련하여 와전・왜곡・과장・날조 등으로 인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이 허다하다. 이러한 일은 3・1운동이 극비리에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도 일단의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자파이기주의에 치우쳐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곡필(曲筆)에 더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사초(史草)를 기술함에 있어서 선열과 후세에 부끄러움이 없는 집필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11일○ 1898년, 고종 황제와 황태자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다. 함경도 출신인 김홍륙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역관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궁중요리사를 매수해 고종이 즐겨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었다. 고종은 이내 맛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금방 뱉었으나 황태자는 단숨에 마셔 평생 건강에 지장을 받았다. ○ 1906년,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1869~1948),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시작하다. 간디는 당시 머물고 있던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이 지문을 등록하고 증명서를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차별법에 반대해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 불리는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훗날 인도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계기로 경술국치와 그로 인한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 주도와 민주공화국 설립을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4월 11일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결성했으며, 9월 11일에는 이승만을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추대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 1994년, 노태우 대통령,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발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 남북평의회, 공동사무처 등이 포함된 남북연합 구성을 그 내용으로 한다. 남북연합은 남북 간 개방과 교류협력을 실현하고 통합의 기반을 조성하는 최고의결기구가 된다. 이후 북측이 남북대화에 호응하면서 양측은 총리급 수석 대표 간 고위급 회담을 개최한 바 있다. ○ 2001년, 미국 뉴욕에서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하다.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 알카에다가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 D.C.의 펜타곤을 겨냥한 동시다발적 항공기 테러를 감행했다. 이 사건으로 약 3천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6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 현재까지도 가장 큰 인명피해를 유발한 테러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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