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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 106주년 기획전 ‘1919.4.15, 빛을 향한 시간들’ 개막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11월 5일(수) 오후 3시 30분,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의 기억과 추모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 〈1919.4.15, 빛을 향한 시간들〉의 개막식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일제의 잔혹한 학살로 희생된 제암리·고주리 주민 29명의 넋을 기리고, 유족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비극을 넘어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마련되었다. 학살의 현장에서 피어난 기억과 빛 1919년 4월 15일,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군은 제암리와 고주리 주민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29명을 무참히 학살했다.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고, 참혹한 현장은 전 세계에 알려져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번 전시는 ▲‘그해 봄, 그 기억들’ ▲‘어둠을 넘어 빛으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삼일운동비사』, 《천도교월보》, 상해판 《독립신문》, 학살 현장 사진 등 역사 자료와 함께, 생존자 김금화의 증언과 영상 기록을 통해 그날의 비극을 되살린다. 2부는 1945년 이후 유족들의 추모와 복원 노력, 제암교회 재건, 기념비 건립 등 평화와 화해를 향한 행보를 담았다. “김금화의 눈으로 본 비극의 현장” 한동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은 “이번 전시는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의 최대 피해자 김금화의 눈으로 본 참혹한 순간을 조명하고, 진실 규명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유족들의 노력을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어 “유족들의 증언, 영상, 사진 등을 통해 우리는 함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며 “특히 이번 전시를 위해 자리를 제공해주신 천도교 강병로 종무원장, 제암교회 최영훈 목사, 자료를 제공한 김덕룡 순국소년의 후손 김명기 님, 안경순·안상용 순국사 후손 안용욱 님, 유영수 님, 그리고 ‘1945년 제암동 학살 희생자 추도의 제’를 최초로 전시 공개한 박현철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 미래를 여는 길 이날 개막식에 참석한 천도교 중앙총부 강병로 종무원장은 축사에서 “화성시는 전국에서도 가장 치열한 독립운동의 현장이며, 이곳에서 벌어진 제암리·고주리 학살은 민족의 아픔이자 정의의 불씨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씀하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경구처럼, 역사의 기록보다 기억이 더 중요하다”며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인내천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다음 세대에 계승하기 위한 이번 전시의 의미가 매우 깊다”고 말했다. 또한 “특히 3·1운동 당시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흥열 선도사님의 후학으로서, 선도사 일가의 희생을 추모하며 그 나라사랑 정신을 잇는 이 전시가 매우 뜻깊다”며, “이 땅에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전시의 메시지가 시민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는 비극의 어둠을 넘어 평화의 빛으로 나아가는 시간여행이다. 제암리와 고주리의 아픔을 기억하고,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이번 전시는 우리 모두에게 기억의 책임과 평화의 다짐을 일깨운다. ■ 전시 개요 전시명: 〈1919.4.15, 빛을 향한 시간들〉 기간: 2025년 11월 5일(수)부터 상설전시실 특별전시관 장소: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관람시간: 10:00~18:00 (입장마감 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당일 문의: 031-5189-1950 주소: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고주로 34 -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를 중심으로 본 천도교의 3·1운동 준비과정(2)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지난 호에 이어) 이상으로 대표적인 지역 일부의 사례를 통해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가한 인물들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이들은 각 해당 지역에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천도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군중, 나아가 기독교 등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이들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19년 3월 1일부터 전개된 3·1운동은 이해 6월까지 전국적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사례는 <표 2>와 같다. <표 2>에 의하면, 천도교인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사례는 136개 교구에 이른다. 그런데 이들 만세운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지역 교구에서 전달받았으며, 이를 관내 지역 교구에 다시 배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주대교구의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주교구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1일로, 비교적 일찍 전달되었다. 그렇다면 전주에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전주를 포함한 호남지역은 인종익이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인종익은 신문조서에서 호남지역 독립선언서 전달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월 28일 오전 7시경 보성사의 출판계장 이종일이 나에게 손병희 이하 33명의 조선민족을 대표한 독립선언서를 전주와 청주의 2개소에 가지고 가라고 말하고 (『인종익 및 신문조서』(1919년 3월 11일)) 2월 28일 오전 11시 남대문발 남행 혼합열차를 타고 대전에 이르러 그곳에서 호남선 연결상의 형편으로 1박하였으며, 다음 3월 1일 오전 6시 대전발 호남선 제1번 차에 탑승하여 이리에 이르러, 오전 11시 그 역에서 전주행 경편철도를 갈아타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였으며 (『인종익 신문조서(제1회)』(1919년 3월 4일)) 인종익은 2월 28일 오전 7시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전주교구에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립선언서 2천 매를 받은 인종익은 오전 11시 남대문을 출발하여 대전에서 하루를 묵은 후 3월 1일 새벽 6시 호남선을 열차를 타고 이리에서 오전 11시 경편철도를 이용하여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였다. 인종익은 전주 도착 즉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기 위해 전주역 앞 고사정(현 고사동)에 있는 천도교 전주대교구 인종익의 신문조서에 의하면, 천도교 전주교구는 당시 전주역으로부터 전주읍 입구에 있다고 진술하였다. 로 갔다. 사전에 연락을 받은 교구장 김봉년(2회 참가)이 자리를 비움에 따라 금융원 김진옥에게 독립선언서 1천 8백 매 인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진옥은 2천 매가 아닌 3천 매였다고 하였다.(『김진옥 신문조서』) 를 전달하였다.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김진옥은 신문조서에서 2월 27일 오후 3시경에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인종익은 독립선언서를 3월 2일까지 배포하고 3월 3일까지는 골고루 보급하라고 전달하였다. 『인종익 및 신문조서』(1919년 3월 11일); 『인종익 신문조서(제2회)』(1919년 3월 6일) 인종익이 손병희 외 32명 연명의 조선독립선언서 약 3천 매를 가지고 와서 3월 2일 밤까지 전주교구 관할 하 각 교구에 나누어 보내 3월 2일 밤에 사람 통행이 많은 거리에 살포하라고 하므로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이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전주대교구는 대교구 관할 구역인 임실을 비롯하여 진안, 장수, 김제, 고산 등지의 천도교 교구에 전달하였다. 교구장 김봉년은 인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기로 하였지만, 고종 국장 참가와 서울에서 전개되는 만세시위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 출타 중이었다. 이에 앞서 김봉년은 부득이 자리를 비웠지만 구창근(1차 참가), 김진옥과 독립선언서 배포와 관련한 사전 협의하였고, (「인종익 심문조서(제2회)」(1919년 3월 6일)) 김진옥은 이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관할 교구에 다시 배포하였다. 김진옥은 독립선언서 2백 매를 휴대하고 천도교 임실교구로 가서 교구장 한영태에게 전달하고, 3월 2일 밤중에 배포하라고 인종익의 지시 사항을 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측에도 전달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 삼일운동사 하편』,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494쪽.) 전주대교구가 관할하고 있는 각 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후 전주교구는 전주 시내와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받았던 김진옥은 민영진, 조성덕, 김성문, 김영홍 등에게 3월 2일 밤중까지는 배포할 것을 당부하였다.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전주교구는 시내뿐만 아니라 상관면, 소양면 등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계획을 세우고 지역별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민영진은 3월 2일 12시 서호순에게 독립선언서 4매를 주고 상관면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서호순은 진영섭에게 1매를 전달하고 구장 이경운, 최년태, 박인숙의 문가에 살포하였다. 『서호순 판결문』. 판결문 중 제2회 신문조서에는 “상관면 신리주재소 부근에 산포하였다”고 진술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서호순은 4매보다 많은 독립선언서를 받았다고 불 수 있다. 민영진으로부터 9매의 독립선언서를 받은 김태경은 우선 3월 2일 저녁 7시 유원에게 4매를 교부하였고, 나머지 5매는 김태경이 한광진, 정문명, 채춘만, 유선일 등에게 배포하고 “다수 공동으로 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선동하였다. (『김태경 판결문』.) 유원은 소양면 신교리의 이달수, 유명선, 양영화, 그리고 용진면 공덕리 이완옥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유원 판결문』.) 유선태 역시 민영진으로부터 독립선언서 5매를 받아 시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배포하였다. (『유선태 판결문』.) 이상에서 살펴본 천도교 전주교구에 전달된 독립선언서의 전주지역 배포 상황을 정리하면 하면 다음 <표 3>과 같다. 이처럼 독립선언서가 전주대교구에 전달되자, 전주대교구는 관할하는 관내 교구에 이를 전달하는 한편 전주 시내와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한편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 결과 3월 2일 늦은 밤을 이용하여 전주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일제 측에서 수집한 정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3월 3 일 오전 시중에서 독립선언서 1매를 발견하고 수사 중” (김정명,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原書房, 1967, 316쪽.)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지방의 3·1운동을 확산하는 데 있어서 우이동 봉황각 특별기도 참여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이상으로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이동 봉황각과 3․1운동과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이동 봉황각의 건립은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민족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천도교와 함께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의암 손병희는 삼각산의 정기가 살아있는 우이동 일대를 매입한 것은 ‘종교적 감화’를 위한 수련 도장을 건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장차 민족의 동량을 양성하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둘째, 우이동 봉황각은 천도교의 민족운동 지도자를 양성한 특별교육장이었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 강점 이후 독립이라는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종교적 수련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면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지방의 중요 교역자를 불러 49일 특별기도를 통해 민족의식을 강화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의암 손병희는 ‘이신환성’의 법설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셋째,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인물들이 지방의 3·1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일곱 차례에 걸쳐 특별수련에 483명이 참여한 이들은 3·1운동의 민족대표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는 비록 3·1운동 이전에 실시되었지만, 참여자들은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교구’라는 조직을 충실하게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이동 봉황각 49일 기도 중 의암 손병희의 ‘이신환성’이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끝> 글, 성주현(상주선도사) -
[칼럼] 이제는 K-동학이다K-동학,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인다. 왜 그럴까? K-팝, K-드라마 등 한류문화가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무슨 원류가 있어서 그럴까? 향후 무엇을 해야 할까? 인공지능 쳇GPT에 “K-동학은 어떤가?”하고 물어보았다. 필자는 그 내용들을 편집하고 아이디어를 추가하였다. "K-동학"이라는 개념은 "하늘이 곧 사람이다"라는 동학 정신을 바탕으로 K-동학을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한국형 대문명전환 프로젝트로 확장시키는 청사진이다. K-동학이 필요한 이유는 역사적 자긍심과 정체성 회복, 서구 중심 세계관에 대한 대안으로 생명 중시의 문명 패러다임 제시, 현대 한국 사회 문제에 대한 통합적 해법, 새로운 세대와 연결되는 한국적 세계 시민 의식, 문화적/정신적 주체성 확립이다. BTS, K-드라마, 한류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정신적 기반이나 철학은 부족한 상황으로서 K-동학은 이러한 흐름에 정신적 근간을 제공할 수 있는 한국형 인문 가치 철학이다. "K-동학"에 기반한 교육, 정치, 사회 실천, 문화, 기술, 국제협력, 실천운동 모델을 제안한다면 다음의 7가지로 요약된다. 가장 먼저 선행적인 동학사상의 현대적 해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인내천(모든 인간의 존엄과 평등), 사인여천(상호존중과 공동체 중심)에 대한 현 시대적 해석이 요구된다. 1. 교육 모델: "K-동학 인성·민주시민 교육" ‘인간 존엄과 동귀일체를 기초로 한 전인교육, 민주 시민 양성, 「인내천과 나」,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는 법」, 「동학사상과 현대사회」’, ‘시천주와 수심정기에 기반한 마음 공부(주문)’, ‘성경신의 교육모델 개발’, ‘개벽과 무위이화 사상’으로 인성∙민주 시민교육을 선도한다. 2. 정치 모델: "동학적 시민 정치" ‘동학헌장 제정운동: 인간존엄, 자주, 연대를 헌법 정신에 반영하는 시민운동’, ‘삼전론(도전, 언전, 재전)에 입각한 사회 조직 혁신’을 하여 동학적 시민 정치에 선도적 역할을 한다. 3. 사회 실천 모델: "인내천 공동체 구축“∙ ‘동학혁명∙삼일운동 정신 계승 모델 개발’, ‘인간 중심, 생명 존중, 상생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재건’, ‘삼경사상(경천, 경인, 경물)에 기반한 생태∙환경 보전’, ‘사람을 위한 경제 강조, 동학정신을 운영원리로 내세운 인내천 마을 조성’, ‘사람 중심 복지 실현: 취약계층 대상 사람 존엄 케어 시스템’으로 인내천 공동체 구축을 한다. 4. 문화 모델: "동학적 감성 르네상스" ‘동학의 세계관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창조하여 대중문화, 예술,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게 함’, ‘K-동학 스토리텔링 콘텐츠', '드라마, 웹툰', '게임에서 동학 세계관 재해석' (예: SF와 결합한 ‘미래의 인내천 사회’)‘, ’동학적 미학 운동으로 ‘하늘과 사람, 자연의 조화’ 시각 예술 운동 (전시, 건축, 디자인), ’동학의 의례에서 착안한 공동체 축제, 향아설위, 생명예절, 인내천 선언의 날 기념제‘, ’서로 존중하는 큰 절하는 날‘로 동학 르네상스 시대를 구현한다. 5. 기술 모델: "사람 중심 디지털 전환" ‘첨단기술이 인간과 공동체의 존엄을 중심으로 작동하도록 설계’, ‘인내천형 AI 윤리 원칙 수립: 인간 존엄과 공정성, 상호존중을 내재화한 AI 알고리즘 기준 마련’, ‘K-동학 알고리즘 윤리 헌장 제정’으로 사람 중심의 디지털 사회를 구현한다. 6. 국제 협력 모델: "K-동학 글로벌 연대" ‘동학의 평등·생명·연대 사상을 글로벌 공동체 구성의 철학으로 확장’, ‘글로벌 시민사회와 철학자, 운동가들이 동학사상을 바탕으로 대화하는 인내천 포럼’, ‘인도의 간디즘, 티벳 불교, 기타 세계적 사상과 연계한 가치동맹 결성’, ‘동학 유스 리더십 프로그램으로 세계 청년 대상 ‘동학 인턴십’, 평화 마을 탐방, 연대 프로젝트 지원‘ 하는 국제협력을 지원한다. 7. 실천운동 모델: "K-동학 생활운동 네트워크“ ‘사계명, 임사실천십개조, 십무천 중심 생활 실천’, ‘내칙 내수도문 ∙ 부화부순 가정생활 실천’,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람 중심의 생활철학’, ‘하루에 한 사람을 존중하는 구체적 실천 공유, 상호존중 인사하기, 경청하기, 대화모임 등 소통 중심의 공동체 재건’, ‘인내천 마크 인증 제품’, ‘동학 기반 기업 ESG 모델’을 위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향후 "K-동학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대한민국이 세계에 내놓을 정신 자산으로 포스트자본주의 시대의 대안적 공동체 윤리로 발전시킬 수 있다. 또한 교육과 기술, 정치와 문화 전반에서 '사람 우선'이라는 근본적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 수 있으며, ‘인간-기술-자연의 조화’라는 21세기 윤리모델을 형성할 수 있다. K-동학의 기대효과는 무엇인가? K-동학이 성공적으로 구현된다면 인간 존엄, 공동체 연대, 생명 중심 가치를 기반으로 한 사회 전반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지며, 이는 한국 사회의 혁신뿐 아니라 세계적 대안 문명 담론에도 기여할 수 있다. K-동학의 주체는 누구인가? K-동학의 성공적인 실현을 위해서는 특정 개인이나 조직에 의존하기보다는, 다양한 사회 주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다중 주체적 연대가 필요하다. 천도교를 비롯한 동학관련 단체가 주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교육계, 시민사회, 청년 세대, 지자체 및 지방의회, 국가 및 중앙정부가 큰 그림 속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래 동안 K-동학을 기다려 왔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머뭇거려서 K-동학을 선점 당하지 않도록 착실한 준비와 마스트플랜이 조속히 필요하다. K-동학이 성공하면 항상 교인들의 가슴 속에 품고있는 포덕천하(한울님의 덕을 온세상에 폄),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광제창생(수많은 백성을 널리 구제함), 지상천국 건설(한울님의 뜻대로 지구상의 이상적인 사회, 평화롭고 조화로운 사회 건설)이 현실화 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글 이암 정의필(남정포 도정, 울산대 명예교수)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칼럼] 탑골공원 성역화사업의 주체가 되자금년은 기미년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난지 106주년이 되는 해이다. 필자는 “서울 탑골공원의 재정비와 삼일운동 기록물 추가 설치를 제안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포덕158년(2017년 9월 7일) 종로구청 민원실에 아래와 같은 글을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탑골공원에 가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삼일운동이 탑골공원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어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탑골공원 담벼락에 기록되어 있는 삼일 운동 장소는 불과 9개 지역(서울, 함흥, 평양, 해주, 철원, 수원, 천안, 진주, 남원)의 기록만 간략히 적혀 있습니다.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삼일운동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며, 현재의 기록만으로는 일부지역에 국한되어 있어 전국지역에서 일어난 삼일운동을 알리기에는 매우 부족하다고 봅니다. 전국적인 삼일운동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여 탑골공원 전체 벽면에 기록함으로서 살아있는 역사 현장의 교과서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으면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교육하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은 자료가 어디 있겠습니까? 현재 공원의 관리 상태 부실로 그나마 기록되어 있는 것 들 조차도 읽어 보기기가 힘듭니다. 삼일운동 100주년이 1년 반 후로 다가오고 있는 이때 민족정신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탑골공원을 민족정신의 성소로 더욱 잘 가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비폭력, 일원화, 대중화의 3대 원칙을 지킨 삼일정신의 현 시대 구현이야 말로 현 시대의 사회적 갈등, 학교폭력, 통일 문제 등을 해결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봅니다. 삼일운동을 지도하신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주위에도 울타리 또는 경계라인을 설치하여 선생을 경배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탑골공원을 새롭게 단장하시고 민족정신 함양 및 교육에 더욱 힘써 주시기를 부탁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종로구청은 2017년 9월 12일에 필자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안녕하십니까? 우선 구정 발전을 위하여 좋은 의견을 주신 정ㅇㅇ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탑골공원 재정비 및 3.1운동 기록물 추가설치 제안에 대하여 답변 드립니다. 우리 구는 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조성 및 운영이 필요하다는 선생님의 의견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현재 공원에는 3.1운동과 관련된 안내판, 비, 부조 등이 있으나 추가 설치 등 확대하는 사항은 전문가 자문, 관련단체(자) 의견 수렴, 역사적 자료의 고증, 사업 예산의 확보 등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사항으로 단 기간 내 추진이 어려움을 선생님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향후 탑골공원 재정비사업이 추진될 경우 선생님의 의견을 참고하여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소중한 의견을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문의사항은 종로구 공원녹지과로 연락주시면 성심껏 답변 드리겠습니다.” 민원신청번호는 1AA-1709-060816 이며, 민원답변번호는 2AA-1709-072387이다. 그 후 7년이 지났지만 필자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2023년, 재작년에 탑골공원 성역화와 관련된 학술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는 사실을 최근에 와서야 알았다. 얼마 전 필자는 서울시 종로구청 문화유산과(김ㅇㅇ 담당주무관)와의 통화에서 종로구청에서 진행 중인 “서울 탑골공원 개선사업”에 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사업내용은 1) 담장정비 및 내부 조경, 편의시설 개선, 2)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호각 개선, 3) 3.1 만세운동 기념관 건립이며, 사업기관은 2023년 1월 1일부터 2029년 12월 31일까지이다. “3.1만세운동 기념관 건립”내용은 3.1만세운동의 근원지인 탑골공원의 역사를 전시 교육하기 위한 기념관을 인근 국공유지 내에 건립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7년 전의 종로구청민원 내용의 요지를 다시 설명하고 개선 사업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천도교 경전에 있는 「안심가」에는 최제우선생의 예언적 경고로서 일본이라는 존재가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부정적 대상으로 보고 강한 적대감을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시켰다. 이러한 시대 인식은 동학을 중심으로 한 당시 농민 세력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펼칠 수 있었던 사상적 힘이었고, 천도교 교단이 1919년 3.1운동을 주동한 종교적 동력이었다. 이처럼 동학·천도교는 당시에 광범위한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탑골공원은 그 여건이 공원이라는 조건 때문에 기념비나 동상이 세워져 있을 뿐 전국각지에 산재된 이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알아보고 정신을 기릴 흔적이 거의 없으며, 탑골공원 3.1운동 관련 유적 보존의 시급성을 지적하여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3.1운동의 요람 탑골공원 주변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후세들에게 탑골공원에서부터 숭고한 교훈을 보여줘야 한다”라는 제안이 독립운동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1900년 이후 제일의 사적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탑골공원이라고 답해도 될 것이다. 3.1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그 정신이 행동으로써 전국에 퍼지게 되었던 근원지가 바로 이 곳 탑골공원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리에게는 현대사의 성지인 셈이다. 한편, 1894년 동학혁명과 1919년 3.1운동이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는데, 손병희선생과 함께 동학혁명과 3·1운동, 두 거사에 함께 참여했던 동학천도교인이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에 이르고, 그 중 9명은 동학혁명에도 참여했던 동학 조직의 대접주들로서 전국 각처에서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동력이 되었다. 2017년 종로구청의 민원 제안내용에 추가를 한다면 탑골공원부터 삼일대로와 북촌거리를 잇는 독립운동 만세거리 성역화를 조성하여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삼일 독립 운동의 중심지라는 자존심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천도교단은 탑골공원의 성역화 사업에 지속적인 협의와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천도교단이 성지를 챙기는 노력들이 결실을 보일 때 잃어버린 3.1운동 주체로서의 역할을 되찾게 될 것이다. 글 이암 정의필(울산대 명예교수, 울산시교구, 도정) -
포덕 166년 3월 1일 제 106주년 3.1절 기념식삼일절을 맞아 지난 3월 1일 오전 11시 제 106주년 삼일절 기념식이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봉행되었다. 이날 기념식은 개식-국민의례-청수봉전-심고-주문3회병송-독립선언서 낭독-천덕송 합창-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기념식 후 거리행진 및 의암성사 동상 참례(중앙대교당-탑골공원)로 이어졌다. 기념식에서 이재선 청년회장은 독립선언서 낭독을 하였으며 이범창 종무원장은 기념사 대독을 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이번 행사를 통해 삼일운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후세에 전하고 1919년 삼일운동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 성사를 비롯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3·1절 106주년 기념식 "3·1대혁명, 모든 독립운동의 원천"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의암 손병희 성사 -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독립만세의 함성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던 3·1혁명’이 올해로 106주년을 맞는다. 천도교는 오늘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제106주년 기념식을 봉행하였다. 이번 기념식은 전국 각 교구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개식, 국민의례,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독립선언서 낭독, 천덕송 합창(제17장 공락가), 기념사, 삼일절 노래 합창, 만세삼창 등의 순서로 진행된 가운데 천도교중앙대교당 기념식 이후에는 중앙대교당에서 탑골공원까지 거리행진과 의암성사 동상 참례가 이어졌다. 이번 행사를 통해 삼일운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후세에 전하고 1919년 삼일운동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 성사를 비롯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가 되었다. 이재선 청년회장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통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는 순간, 참가자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한마음으로 그 의미를 되새겼다. 독립을 외쳤던 그 날의 함성이 다시금 울려 퍼진 이 순간, 우리는 다시 한번 민족의 뿌리를 되새기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을 다짐했다. 이어 이범창 종무원장은 기념사 대독을 통해 “‘3·1대혁명’으로 순도순국(殉道殉國)하신 선열들의 영령 앞에 고개 숙여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선열들이 성령출세(性靈出世)하여 세계 평화와 국가 발전을 도와주시고, 교단의 앞길을 밝게 인도하여 주시기를 심고(心告)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3·1대혁명’의 위대한 정신을 올곧이 계승하여 분열과 혼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합과 상생발전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또 “천도교를 주축으로 기독교·불교 지도자를 포함하여 민족대표 33인을 정하고, 포덕 60년(1919년) 3월 1일을 기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과 해외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3·1대혁명’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3·1대혁명’은 국내외에서 전개된 모든 독립운동의 원천이 되었습니다.”라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새봄과 함께 찾아온 제106주년 3·1절을 맞아 우리 모두 의암성사님의 거룩한 순도순국 정신을 계승하여, 국가 번영과 교단 중흥을 위해 정성을 모아 나가자는 말씀을 드리면서 기념사를 마치겠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삼일절 노래 합창과 만세삼창으로 이어진 행사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대교당을 찾은 교인과 참례객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삼일절 노래를 부르며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기렸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대교당을 뜨겁게 달궜다. 이 순간은 마치 그날의 함성이 되살아난 듯한 감동을 선사했다. 탑골공원 거리행진, 역사적 의미 더해 기념식을 마치고 자리에 참석한 교인 및 참례객들은 태극기와 궁을기를 들고 의암 손병희 성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탑골공원을 향해 거리행진을 하였다. 이날 행진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교인 및 참례객이 참여했다. 천도교서울교구 풍물패가 앞장서서 행진대열을 이끌었으며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두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1919년 삼일운동 당시의 열정을 되살렸다. 행사에 참여한 한 교인은 "조상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우리가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라며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가족과 함께 행진에 나섰다"라고 말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탑골공원에서는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3.1운동이 시작된 역사적 성지인 이곳 탑골공원이 최근 정부와 지자체가 공원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탑골공원 성역화 추진과 역사적 논란 서울시는 공원 재정비를 추진하고 있으며, 3.1운동의 정신을 기릴 수 있는 기념관 건립과 문화유산 복원 등을 포함한 성역화 사업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와 시민단체들은 성역화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기존 시설물의 변형 또는 철거로 인해 원래의 역사적 공간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으며 새로운 기념물 설치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과 다른 해석이 개입될 우려 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탑골공원의 성역화는 3.1운동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고 후대에 정확한 역사를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전문가와 시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고,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다. 성역화 사업이 단순한 공원 미화가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이뤄낸 독립운동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독립의 외침, 그 중심에 천도교가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탑골공원에서는 이를 실천에 옮겼다. 현장에 모인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특히, 천도교 측은 조직적인 인력을 동원해 전국 각지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청년과 학생들은 주도적인 만세운동을 펼치며 3.1운동을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시켰다. 해마다 삼일절이면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지도자들의 재조명이 잇따르고 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개신교, 불교계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도 천도교 측 인사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오늘날 3.1운동의 역사 속에서 개신교와 불교계 인사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진 반면, 천도교 지도자들의 역할은 충분히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천도교 측 민족대표 15인 다음은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계열 지도자 15인의 명단이다. 손병희(孫秉熙, 1861-1922) : 동학 3대 교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3·1운동 주도 김완규(金完圭, 1876-1949) : 천도교회월보 발행인 권동진(權東鎭, 1861-1947) : 천도교 초기 핵심 인물 권병덕(權秉悳, 1868-1944) : 중앙학교 교장 나용환(羅龍煥, 1864-1936) : 15대 교구장 나인협(羅仁協, 1872-1951) : 14대 교구장 양한묵(梁漢默, 1862-1919) : 법도사. 옥중 고문 순국 이종훈(李鍾勳, 1858-1932) : 천도교 초기 핵심 인물 이종일(李種一, 1858-1925) : 보성사 인쇄소 사장. 독립선언서 인쇄 임예환(林禮煥, 1864-1949) : 25대 교구장 박준승(朴準承, 1866-1927) : 임실, 장성 교구장 오세창(吳世昌, 1864-1953) : 서예가, 서화가 최린(崔麟, 1878-1958) : 보성학교 교장 홍병기(洪秉箕, 1869-1949) : 천도교 도사. 후에 만주 고려혁명당 창당 멤버 홍기조(洪基兆, 1865-1938) : 천도교 도사, 장로 천도교의 3.1운동 기여와 역사적 평가 천도교는 3.1운동 당시 조직력과 자금을 제공하며 운동의 기획·실행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의암 손병희 성사를 중심으로 운동을 조직하고, 이종일 선생이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 전국적인 독립운동 확산을 위해 천도교 신도(교인)들을 동원하는 등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에 천도교 지도자들의 공헌이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3.1운동은 종교를 초월한 민족적 항쟁이었으나, 운동의 실질적 주체였던 천도교의 역할이 역사적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천도교 지도자들이 3.1운동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하며,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점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독립운동의 모든 주역들이 제대로 평가될 때, 3.1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며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전국 교구에서 일제히 봉행한 이번 삼일절 기념식은 전국적으로 펼쳐진 삼일혁명의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 각 지역마다 많은 교인 및 참례객들이 기념행사를 개최하여 큰 의미를 더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일이 다양한 형식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
3월 1일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삼일절 기념식 봉행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3월 1일 제 106주년 삼일절 기념식을 봉행한다. 삼일절을 맞아 1919년 민족의 독립을 위한 의지와 희생을 기억하고 모든 국민이 다시 한 번 나라의 독립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날 기념식은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교구에서 봉행된다. 개식-국민의례-청수봉전-심고-주문3회병송-독립선언서 낭독-천덕송 합창-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기념식 후 거리행진 및 의암성사 동상 참례(중앙대교당-탑골공원)가 이어진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삼일절 기념식을 앞두고 보도자료를 통해 “‘3·1대혁명’으로 순도순국(殉道殉國)하신 선열들의 영령 앞에 고개 숙여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선열들이 성령출세(性靈出世)하여 세계 평화와 국가 발전을 도와주시고, 교단의 앞길을 밝게 인도하여 주시기를 심고(心告)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3·1대혁명’의 위대한 정신을 올곧이 계승하여 분열과 혼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합과 상생발전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는 이번 삼일절 기념식을 통해 1919년 의암 손병희 성사님께서 이끄셨던 삼일운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기억하고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 엄혹한 일제탄압시기에 우리 민족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친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봉행하오니, 많은 분들이 참석하시어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교인 및 일반인들이 삼일절을 맞아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삼일절 기념식에 함께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3월 1일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삼일절 기념식 열려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3월 1일 제 106주년 삼일절 기념식을 봉행한다. 삼일절을 맞아 1919년 민족의 독립을 위한 의지와 희생을 기억하고 모든 국민이 다시 한 번 나라의 독립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날 기념식은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교구에서 봉행된다. 개식-국민의례-청수봉전-심고-주문3회병송-독립선언서 낭독-천덕송 합창-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기념식 후 거리행진 및 의암성사 동상 참례(중앙대교당-탑골공원)가 이어진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삼일절 기념식을 앞두고 보도자료를 통해 “‘3·1대혁명’으로 순도순국(殉道殉國)하신 선열들의 영령 앞에 고개 숙여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선열들이 성령출세(性靈出世)하여 세계 평화와 국가 발전을 도와주시고, 교단의 앞길을 밝게 인도하여 주시기를 심고(心告)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3·1대혁명’의 위대한 정신을 올곧이 계승하여 분열과 혼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합과 상생발전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는 이번 삼일절 기념식을 통해 1919년 의암 손병희 성사님께서 이끄셨던 삼일운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기억하고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 엄혹한 일제탄압시기에 우리 민족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친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봉행하오니, 많은 분들이 참석하시어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교인 및 일반인들이 삼일절을 맞아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삼일절 기념식에 함께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 춘암 박인호 상사 뜻 되새겨지난 1월 18일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제117주년 도일기념식을 봉행하였다. 이날 행사는 개식과 함께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경전 봉독(신앙통일과 규모일치), 천덕송 합창(제 13장 기념송, 제 31장 도일기념가), 기념사 등의 식순으로 이어졌으며 전국 각 교구에서도 같은 시각 일제히 기념식이 봉행되었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춘암 상사께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감내하면서 동학혁명 이후 해월신사와 의암성사를 도와 천도교 재건에 성심을 다했으며, 삼일운동 이후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교단의 극한상황 속에서 교인들에게 신앙심을 일깨우려 노력했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린이날을 제정했고,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펼칩니다. 이렇듯 춘암상사 시절 천도교는 현실 도피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개벽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우리는 실천궁행으로 대도를 수호하고 실천하신 춘암상사의 뜻을 잘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기념사에 이어 문화행사는 천도교대학생단 조영은 단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천도교 연합합창단 <샘>,의 '별', '아름다운 나라', 천도교대학생단의 '걱정말아요 그대', '나에게 난, 너에게 난', 삼경합창단의 '청산에 살리라', '참됨의 길'의 노래공연으로 뜻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춘암상사는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아 천도교의 제 4세 대도주가 되었다. 춘암상사는 동학혁명 당시 덕의대접주로 활약하였으며 의암성사의 지시로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으로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 동덕여학교(동덕여자대학교) 등 전국의 36여 개의 학교를 운영 및 지원하였다. 3.1독립운동 때는 48인 중 1인으로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을 지원하였고 특히 일제 말 멸왜기도를 실시하도록 밀명을 내렸다. 이처럼 항일 독립투쟁 의지를 불태우다 1940년 4월 3일 향년 86세로 환원하였다. 춘암 박인호 상사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기 념 사 국내외 동덕님,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가 되신지 117주년을 맞이하는 도일기념일입니다. 포덕49(1908)년 1월 18일 오전 11시, 의암성사께서는 천도교중앙총부 대도주실에서 이종훈·홍병기·오세창·권동진·오영창·양한묵 등을 비롯한 많은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심법을 춘암에게 전한다’는 <선수문>과 함께 대도주 종통 「선수식」을 거행했습니다. 또한, 승통 10주년이 되는 1918년에는 기념식을 마친 후 ‘이 대도주의 위통은 한울님이 대신사에게 전수하시던 동일한 심법이니 여러분은 그것을 믿으라’는 내용으로 <천도교월보> 2월호에 특필하도록 하는 한편, 삼일운동 전날에는 춘암상사에게 천도교 앞날을 당부하는 <유시문>을 내리십니다. 이처럼 의암성사께서는 춘암상사의 종통을 3회에 걸쳐 재차 확인하는 등 천도교 앞날에 대한 절실함이 춘암상사에게 있음을 확실히 하십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 전 5년(1855) 2월 1일 충남 덕산군 가야산 남쪽에 있는 막동리(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부친 박명구와 모친 온양 방씨 사이에서 탄생하십니다. 상사께서는 10세에 한학에 입문하시고, 후에 지가서와 의서를 공부하다가 중지하고 농사에 전념하시다가 동학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상사께서는 동학을 믿으면 ‘차별과 착취가 없는 평등한 세상에서 질병에 걸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9세 되던 포덕24(1883)년 3월 18일 목천에서 동경대전 간행을 준비하고 계시던 해월신사를 찾아가 입도하십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25(1884)년 8월 중순 해월신사의 명으로 의암성사와 함께 공주 가섭암에서 49일 기도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의관을 정제하고 어육주초를 끊고는 정성으로 수련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습니다. 독공하는 동안에는 잠이 깊이 들까 염려하여 낫자루를 베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서 주문 외우기를 10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하셨습니다. 상사께서는 독공 중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해월신사께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포덕에도 정성을 다하여 내포 지방에 입도하는 도인이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34(1893)년 2월 광화문복합상소에 의암성사를 비롯한 강시원 손천민 등과 함께 상경하여 봉소하시고, 3월 보은 장내리 취회에는 덕의대접주에 임명되어 내포 지역 동학도인들을 이끌고 <덕의포>라고 쓴 중기와 오색기 그리고 <척양척왜>라고 쓴 기치를 앞세우고 참가하십니다. 동학 교단은 1892년 삼례집회, 1893년 광화문복합상소·공주취회·보은취회 등 집회 횟수를 거듭하면서 2만여 명의 동학도인이 참여하는 등 분위기가 성숙해지자,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을 통해 안으로는 학정과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으며, 밖으로는 일제에 맞서는 등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춘암상사는 「천불변 도역불변(天不變 道亦不變)」이라는 깃발과 「척양척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깃발을 세우는 한편, 대장기에는 <덕의대접주 박인호>라고 쓰고 지휘하자 수만의 동학군이 외우는 시천주 주문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습니다. 포덕39(1898)년 1월 3일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와 함께 해월신사께 신년 문후를 드릴 때의 일입니다. 신사께서 흰 꿩 한 마리로 의암성사와 겸상을 차려 주면서 서로 일치(一致) 하라는 묵교(黙敎)를 내립니다. 묵교를 알아차린 상사께서는 식사를 마치고 바로 의관 정제하고 의암성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배례를 합니다. 그날 이후 의암성사 앞에서는 절대로 담배도 피우지 않고 평소에 농을 하던 말투도 높임말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포덕40(1899)년 3월 10일 의암성사께서 춘암(春菴)이란 도호를 주십니다. 이는 의암성사가 내린 첫 번째 도호이고, 교단 전체로는 삼암(三菴)에 이은 네 번째입니다. 그리고 포덕73(1932)년 교회에서 존호를 ‘상사(上師)’로 봉정했습니다. 포덕60(1919)년 삼일운동으로 의암성사와 춘암상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피체된 천도교인이 1,300여 명에 달했으며, 일경의 감시가 한층 심해지고 모든 부동산과 동산 사용을 금지당하는 등 교회 활동이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포덕61(1920)년 10월 31일 춘암상사께서 출옥하신 후 어려운 교회 상황 속에서도 다음 해 2월 28일 삼일운동 자금조달에 큰 역할을 하였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준공했습니다. 그해 12월에는 교회제도가 대헌에서 종헌으로 변경됨에 따라 대도주가 교주로 변경되어 포덕63(1922)년 1월 18일에 교주 취임식을 거행합니다. 같은 해 5월 19일 의암성사께서 순국하자 춘암상사는 주상으로 장례를 주관했습니다. 포덕77(1936)년 교회제도가 대헌으로 회복됨에 따라 교주에서 대도주로 복구된 다음 해인 포덕78(1937)년 12월 초 어느 날 밤 상사께서 비몽사몽간에 왜병들이 군화를 끌고 울면서 압록강을 건너 돌아오는 것을 보고 생각하시길 “조선이 독립할 징조로다. 급히 서둘러야 되겠구나”하고는 전국 교인들에게 멸왜기도운동을 밀명으로 내려 실시케 합니다. 그러나 멸왜기도운동이 황해도에서 발각되어 천도교인들 3백여 명이 검거되었고 춘암상사께서도 병상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81(1940)년 4월 3일 분열되었던 교회가 합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수동 자택에서 향년 86세로 환원했습니다. 4월 7일 오전 11시 대교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상여는 교당을 출발하여 오후 2시에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 묘지에 도착했습니다. 오후 3시에 하관을 했는데, 이때 「천도교제4세교주법종춘암상사박인호지묘」라고 최린이 친필로 쓴 지석(誌石)을 함께 묻었습니다. 이날 대교당을 출발하여 장지에 이를 때까지 유족들과 장의위원들을 포함한 1천여 명에 달하는 조문 행렬이 이어지며 성의(盛儀)의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대로 밀고 나가 완성을 보았다고 합니다. 특히, 의암성사의 명이 있으면 즉시 총부에서 실행하도록 했으며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의암성사께서는 평소 춘암상사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장벽을 향해서 말한 비밀은 새 나가도 춘암에게 말한 비밀은 새지 않는다” “춘암 대도주는 생각하는 것은 나만 못하지만 대도를 지키는 데는 내가 춘암만 못하다” “춘암은 밤에 만져 보아도 도(道) 덩어리이다” “내가 한강을 그대로 건너 걸어가라 하면 춘암 대도주는 서슴없이 걸어 들어간다”라고 할 정도로 의암성사의 춘암상사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의암성사와 춘암상사의 관계는 축성과 수성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축성이 아무리 잘 되어도 수성을 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동학혁명 이후 수십만 명의 희생을 내고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진 교단을 수습하여 천도교로 다시금 축성한 것이 의암성사라면, 이 축성된 교단을 성장시키고 수성한 것은 바로 춘암상사라고 하겠습니다. 포덕61(1920)년 이후 교회가 분열되었을 때도 누가 신파 구파에 대한 말을 하면 “자기의 주장과 다르다고 남을 비방하면 되겠는가! 그 시간이 있으면 주문을 더 생각하라”고 하며 어떤 경우에도 남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감내하면서 동학혁명 이후 해월신사와 의암성사를 도와 천도교 재건에 성심을 다했으며, 삼일운동 이후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교단의 극한상황 속에서 교인들에게 신앙심을 일깨우려 노력했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린이날을 제정했고,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펼칩니다. 이렇듯 춘암상사 시절 천도교는 현실 도피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개벽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우리는 실천궁행으로 대도를 수호하고 실천하신 춘암상사의 뜻을 잘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춘암상사께서 말씀하신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는 말씀은 인간사로만 생각할 수 있으나 천지운행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참을 지키면 한울님이 사랑하고 거짓되면 한울님이 미워하여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스승님을 숭배할지라도 스승님께 의뢰하지 말아야 하며, 앞으로 천도교가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우리는 참으로 도를 잘 닦아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지금 세계는 극도로 발달한 과학을 서로 화합하는 쪽으로 쓰기보다는 정쟁(政爭)의 도구로 사용하는가 하면, 아직도 전쟁을 일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거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무기 전쟁뿐만 아니라 무병지란(無兵之亂)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고 도덕은 사람 살리는 기틀입니다. 해월신사께서는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는 수도에 더욱더 힘써서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대신사께서는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라고 했습니다. 이는 때만 기다리기보다는 동귀일체로 하나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국내외 동덕님 여러분,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따라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 되었을 때, 천도교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목적인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진실로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루빨리 천심을 회복하여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 만들기를 심고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166(2025)년 1월 18일 천도교 교령 현암 윤석산 심고 -
1월 18일 제 117주년 도일기념일, 중앙대교당 및 전국교구 기념식오는 1월 18일은 춘암상사가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로 취임한 지 117주년이 되는 도일기념일이다. 춘암 박인호 상사(1855~1940)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덕산대접주로 승전곡전투와 신례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상해 임시정부 독립자금 지원, 갑진개화혁신운동 주도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어린이날 제정, 청년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지원한다. 정부는 1990년, 춘암 상사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08년 1월 18일, 의암성사는 천도교중앙총부 대도주실에서 이종훈, 홍병기, 오세창, 권동진 등 다수의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심법을 춘암에게 전한다’는 <선수문>과 함께 대도주 종통 <선수식>을 거행하여 춘암상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춘암상사는 포덕 전 5년(1855년) 충남 덕산군 막동리에서 출생하여, 1883년 해월신사를 찾아 동학에 입도한다. 이후 의암성사와 함께 공주 가섭암에서 49일 기도를 마친 후, 농사와 수련에 전념하며 동학 교리를 깊이 체득하였다. 춘암 상사는 해월신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내포 지방에 수천 명의 도인을 입도시키는 등 포덕에 힘썼다. 춘암상사는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 “천불변 도역불변”, “척양척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깃발 아래 수많은 동학군을 이끌었다. 동학혁명 후 교단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춘암 상사는 의암성사를 스승으로 모시며 교단 발전에 헌신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춘암 상사와 천도교 교인들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으며, 결국 독립자금모집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춘암상사는 출옥 후에도 6.10만세운동, 멸왜기도운동을 주도하고, 전국 천도교 교구를 중심으로 신간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등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춘암상사는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며, 신앙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 깊은 교훈을 남긴다. 오늘날 세계는 전쟁과 갈등, 무병지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 춘암상사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적, 정신적 기반으로써 실천궁행의 자세로 대도를 수호하며, 참된 신앙의 길을 걷게 한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기념식을 앞두고 “오늘날 세계는 전쟁과 갈등, 무병지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춘암상사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천심을 회복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라고 강조하며 교인들과 국민들의 동참을 독려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한마음 한뜻으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천심을 회복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해 주시기를 기원한다.”라고 밝혔다. 한편 포덕 166(2025)년 1월 18일(토) 11시 제117주년 도일기념일 기념식은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교구에서 일제히 봉행된다. 기념식은 ▲청수봉전▲주문3회병송▲경전봉독▲천덕송▲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기념식에 이어 도일기념 문화공연도 개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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