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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22)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 성사에 의해 이루어졌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3.1운동의 정식명칭 3.1독립운동 90주년을 맞는 올해(2009년, 편집자)를 맞아 3.1운동의 이름이 제대로 되어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일본교과서에 3.1운동을 폭동이라 기술하였다하여 그 시정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 요구를 받아들여 폭동이란 이름을 버리고 3.1독립운동이라 고쳤다. 그러나 우리 교과서에는 아직도 3.1운동이라 하면서 '독립' 두 글자를 넣지 않고 있다. 남들에게는 독립운동이라 부르라 해놓고 자기는 독립운동이라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3.1운동은 우리 역사에 있어 무궁화 꽃이다. 3.1운동은 또 우리 민족사에 구심점으로서 그 어떤 다른 역사보다도 자랑스러운 거사로 믿고 있다. 우리 근대사에 3.1운동만큼 의미심장한 역사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역사에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않았다면 타고르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어떤 이는 3.1운동을 우리 역사의 여러 강줄기가 모여드는 커다란 호수라고 한다. 마치 백두산 천지 같은 깊은 물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운동의 결과 태어난 나라라고 명기하고 있다. 독립선언서를 잘 읽어보면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모든 나라의 복지와 평화를 위해 투쟁한 역사라 하겠다. 우리는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해 독립, 즉 자유를 외친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외친 것이다. 일본은 물론 중국 영국 미국 어떤 나라도 한국의 주권을 빼앗을 수 없으며, 빼앗는 날 세계평화는 깨지고 만다고 엄중히 선언한 것이다. 서울 종로 2가에는 3.1운동이 일어난 성지 탑골공원이 있다. 그러나 그 밖에 유적지는 사라지고 없다. 왜 서울시 당국은 길을 넓히고 빌딩을 짓는 데만 정신이 팔리고 동방의 등불을 밝히는 데는 관심이 없는가? 3.1운동 90주년을 맞이하면서 해가 갈수록 빛이 바래가고 있는 서울의 역사정신이 아쉽기만 하다. 3.1운동이 평양에서 1시간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3.1운동의 영광을 버리려하는가 잊지 말고 서서히 반성하라. 3. 맺는 말 3·1독립운동은 일제의 10년간의 가혹한 무단통치로 인한 압제와 경제적 착취는 물론 민족의 자존심마저 유린한 극한적인 상황에서 이천만 민족의 분노가 폭발한 일대 항일운동이었다. 이에 전국적인 강력한 조직망과 300만의 교인을 포용한 천도교가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청사에 빛나는 민족사를 창출하였다. 이 3·1독립운동은 시종일관 이 운동을 영도하신 의암손병희 선생이 중심에 계셨기에 가능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은 천도교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 특히 3·1독립운동의 초기단계에서의 천도교의 역할은 이 운동을 결정짓는 절대적 계기가 되었다. 우선 운동의 3대 기본방침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과 운동을 통일화·일원화 시키는 일,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 거의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미 10년 전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한 것이 천도교요, 독립운동 자금의 공급처도 천도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비롯한 40여개소의 지방 교구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중요 교역자가 구속되고, 일백 수십만 원의 예금을 압수당하였다. 결국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선생의 탁월한 지도력과 포용력, 그리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대교당 건축을 추진한 것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위해 운동자금 지원을 결단한 것도,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해마다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유지해온 것도 의암손병희 선생의 결단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3·1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거나 심지어 천도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마저 있음을 보게 되면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생명과 재산을 바쳐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면서 깊이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연재를 마칩니다. 끝.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21)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2. 잊혀져 가는 3.1운동 우상화로 왜곡된 3.1정신 (참고 박성수 자료) 우리에게 자장 중요한 사실은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당시의 연합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이 같은 국제승인이 있건 없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단지 우리민족의 요구와 선언만으로 수립된 것이다. 굳이 연합국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독립이 미국의 독립선언만으로 가능했듯이 우리의 독립도 우리 민족의 자결만으로 독립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을 잊지 말자 올해로 3.1운동 90주년을 맞는다. 당연히 축하해야 하지만 반성할 것도 많다 3.1운동이 일어난 해는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한지 10년이 되기 직전 인 9년차였다. 우리민족이 돌연 세계를 향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독립선언을 하기까지 민족대표 33인, 그중에서도 손병희 선생의 노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3.1운동이 아무 준비도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어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 까지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 3.1운동이 성공한 것인데 그런 것이 제대로 기술되지 않았다. 준비과정이 모두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발각될 뻔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나고 보면 그런 일들은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세월의 물결에 씻겨 가지와 잎이 떨어져 태백산 정상의 주목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었다는 사실, 선언서를 인쇄한 사람이 천도교 보성사의 이종일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를 손병희 선생이 했다는 사실은 확실한데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낭독한 사실만 교과서에 뚜렷이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학생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으나 모두가 거짓이다. 일이 잘되면 자신이 했다며 공을 내세우지만 일이 잘못되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뒤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가면서 많은 사람이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품에 감추고 혹은 걸어서 고향을 찾아갔다. 유관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관순 이전에 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매국노 이완용까지도 민족대표의 한사람이 될 뻔했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나라가 독립되면 나는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절한다고 말했으나 만세운동 준비를 일본경찰에 알리지는 않았다. 3.1운동 앞에 매국노의 양심이 무릎을 끓은 것이다. 3.1때처럼 모두가 한 몸 한마음이 되어 애국심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세계화 운운하는 바람에 애국심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개인주의만 꽃피는 요즈음 배워야할 역사의 교훈이다. 북한의 3.1운동 왜곡 최근 몇 년 사이 3.1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학생이 많아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건망증은 본래 노인들의 지병으로 알고 있는데 요즈음 젊은이들도 건망증에 걸린다는 것이니 세태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심지어 젊은 학자들도 3.1운동이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니 용서받을 일이 아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3.1운동의 나라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 한 사실은 유명하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 그대 한국이여 네가 다시 한번 불을 켜는 날엔 한국아 너는 동방의 빛이 되리라.” 이 시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던 1929년 4월 2일 동아일보에 실려서 지금도 우리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3.1운동의 비폭력 정신은 인도의 간디와 네루까지도 고개를 숙였다는데 우리는 왜 3.1운동을 잊어만 가는가? 역사는 기억해야 역사라고 한다. 잊으면 역사는 영원히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고 무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망각보다 더 무서운 범죄는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다. 한번 왜곡된 역사는 다시 살리기 어렵다. 3.1운동을 가장 심하게 왜곡하고 있는 나라가 북한이다. 북한의 역사왜곡은 날조라 할 정도다. 폐쇄된 공간 북한은 우리 근대사를 온통 김일성 위주의 역사로 개악하였다. 철창 속에 갇힌 북한 인민민주주의 인민들은 독립운동을 김일성 혼자 한 것처럼 꾸민, 아니 날조한 연극을 보고 박수치라고 강요받고 있다. 1911년을 김일성이 태어난 해라하여 주체 원년으로 삼고 조금 있으면 대대적인 주체 100년 축제를 할 모양이니 이쯤 되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다. 북한에서는 3.1운동 때 여덟 살 난 김일성이 시위대를 이끌고 평양 대동문까지 갔다는 거짓말을 믿어야한다. 거기에 더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서울의 민족대표보다 먼저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믿어야한다. 북한에서는 이 거짓말을 믿지 않으면 강제수용소에 가야한다. 한편 남한에서도 3.1운동에 대한 역사인식이 불완전하다. 3.1운동은 학생들이 먼저 일으킨 학생들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만일 민족지도자들의 독립선언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학생과 군중들의 무질서한 시위운동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그야말로 일제가 바라고 바라던 폭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지도자들은 미리 못을 박고 당부하기를 질서를 지키고 비폭력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3.1운동은 훌륭한 독립운동으로 네루와 간디 그리고 타고르까지도 부러워했던 독립운동으로 기억된 것이다. 민족자결로 충분하였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당시의 연합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 이 같은 국제승인이 있건 없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단지 우리민족의 요구와 선언만으로 수립된 것이다. 굳이 연합국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독립이 미국의 독립선언만으로 가능했듯이 우리의 독립도 우리민족의 자결만으로 독립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자칫하면 이 같은 대원칙을 우리는 잊는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민족의 자율적인 의사결정으로 독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독립을 선언하고 1910년의 국권침탈조약을 무효화시킨 것이 3.1독립운동이었다. 우리는 1965년 한일양국 간에 기본조약을 맺어 오랫동안 끊어졌던 국교를 정상화 하였다. 만일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가 없었다면 기본조약 제 2조 “1910년 8월 22일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과 그 이전의 모든 조약은 무효”라는 조문을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국민은 그때 한일회담을 반대하였고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였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3.1독립정신에 입각하여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를 무효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외쳤던 독립만세의 함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을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명문화한 것이니 어찌 우리가 3.1운동을 잊었다 할 수 있는가.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20) "천도교의 결정적인 역할"『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제 5 장 3.1운동 관련 논문 1, 3.1운동과 천도교 (참고 표영삼 자료) 머리말 포덕 60년(1919) 3월 1일 일어났던 3.1운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나와 있다. 긍정적인 평가도 나와 있거니와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부정적인 평가이든 긍정적인 평가이든 제각기 보는 입장이 있어 일리가 있다. 역사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 교단으로서는 3.1운동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 3.1운동과 교단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 근년에 이르러 일부 진보적 사학자 중에는 천도교의 역할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동학혁명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눈으로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번 3.1절을 맞아 교단의 입장에서 몇 가지를 추려 그 의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천도교의 선도적 역할 누가 무어라고 해도 3.1운동의 역사적 규명은 천도교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특히 3.1운동의 초기단계에서의 천도교 역할은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준비단계에서는 천도교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운동방침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과 운동을 통일화, 대중화 시키는 일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 거의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첫째, 3.1운동의 기본 방침을 천도교에서 1월 하순경에 결정했다. 모든 사회운동에는 그 운동 원칙을 정하고 전개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기본원칙은 바로 운동주체가 정하게 마련이다. 당시 의암성사 밑에서 참모로 주역을 담당했던 여암(如菴 崔麟)의 수기에 의하면 기본원칙은 천도교에서 단독으로 결정했다. 여암이 의암성사를 찾아갔을 때 의암성사는 “장차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우리들이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무위무능하게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이미 정한바 있으니 제군은 십분 분발하여 대사를 그르침이 없이하라” 고 부탁했다 한다. 의암성사의 이 말씀은 3.1운동의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 때는 기미년 1월하순경인 듯 하여 대단히 고민한 끝에 다음과 같은 3대 운동 원칙을 세웠다. 1) 독립운동은 대중화하여야 할 것. 2) 독립운동은 일원화 하여야 할 것. 3) 독립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 이 3대 원칙의 결정은 물론 의암성사와 권동진·오세창과 같이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3.1운동은 천도교가 단독으로 정한 원칙에 의해 전개되었던 것이다. 둘째,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은 전체 천도교인 단독으로 마련했으며 또한 지출되었다. 3.1운동 1년 전인 포덕 59년(1918) 4월에 부구(部區) 총회를 열고 신 교당을 건축키로 경정하였다. 모금운동은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천도교인들은 단순히 대 교당을 짓는다하여 성금을 각출한 것이 아니라 성사께서 어떤 중대한 일을 거사하게 될 것이므로 앞장서서 자금을 마련해야겠다는 애국애교의 심정에서 각출했던 것이다. 천도교인들은 가난한 농민들이었으므로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논밭과 소를 팔았던 것이다. 즉 생활 수단을 팔아 나라위한 큰일에 바쳤던 것이다. 기미년 1월에 각출한 성금은 상당액에 이르렀다, 이 때 일제 총독부 당국이 이 사실을 알고 돌려주라는 압력이 있었다, 할 수 없이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방교구장들과 상의한 결과 각 교구는 되돌려 받은 것처럼 영수증만 쓰고 당초 목적한 대로 운동자금으로 사용키로 하였다. 이때 약 500만 원 가까이 모금되었는데 대교당 건축과 중앙총부 사무실 건축에 필요한 27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운동자금으로 쓰게 되었다. 은행에 약 6만 원 예치했다가 당국에 의해 동결되었고 그 나머지는 수시로 비밀히 사용할 수 있게끔 춘암상사에게 맡겨놓았다. 이 자금으로 준비단계의 각종 비용을 충당했으며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에 필요한 여비 등에도 사용했다. 심지어 기독교 측의 요청으로 5000원을 주었으며 독립선언서 인쇄 사실이 탄로 나자 종로경찰소 신형사의 입을 막기 위해 역시 5000원의 거금을 주기도 했다. 어떤 운동을 막론하고 운동자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천도교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금을 주도적으로 마련 차질 없이 진행하게 하였다. 이런 자금마련은 운동주체로서의 천도교가 해야 할일을 완수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즉 운동의 주체자로서 전체 교인이 참여하여 논밭팔고 소 팔고 심지어 여자들의 머리치장에 필요한 다리까지 팔아 마련한 것이다. 셋째,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시종 천도교에서 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쇄와 배포도 천도교가 주관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육당 최남선이 집필하였다. 그를 선정하였던 것이 바로 천도교였으며 2월 15일에 초안이 완성되어 가져왔던 것을 검토하고 보관 한 것도 천도교였다. 그리고 인쇄에 있어서도 천도교에서 전적으로 맡아 하였다, 조판기술 관계로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에서 판을 짜가지고 2월 27일에 넘겨받아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인쇄하였다. 인쇄 총책임자는 33인의 한 분이었던 천도교 간부(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었다. 독립선언서의 배포 책임도 천도교에서 전담하였는데 이종일의 책임하에 인쇄를 마친 후 신 교당 건축 장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가 배포했다. 서울지역의 배포는 학생들이 담당하였고 지방에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자기 종교 계통에 따라 배포하였다. 천도교는 독립선언서의 작성에서부터 인쇄 배포에 이르기 까지 준비단계에서 거의 단독으로 담당하였다. 운동의 일원화에 앞장서다 넷째, 3.1운동을 일원화 하는데 있어서도 천도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기독교 측의 노력도 높이 평가하지만 전민족의 운동이 되게 하기 위해 천도교 측의 노력이 대단했다. 여암 자서전의 일부를 보면 처음에는 윤용구·한규설·박영효 윤치호 등과 접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으로 기독교 측과 불교 측을 만나 공동으로 운동을 벌이자고 합의하였다. 윤용구·한규설·박영효·윤치호 등 4인이었다. 윤용구는 구한말 대신으로 국변 후에 일본의 작위를 고사하였고 그 성품이 고결한 사람이었으며 한규설은 을사늑약 때 참정대신 즉 총리대신으로 그 조약을 한사코 반대한 사람이었고 박영효는 소위 개화당 영수로서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여 일인의 침략을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귀양살이까지 한 저명한 귀족 혁명가이다. 윤치호는 과거 광무년 간에 독립협회장으로서 특히 미국인 간에 신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규설만이 일이 중대하니 심중히 고려해 보자는 약속이었고 그 밖에 박영효·윤용구·윤치호는 모두 회피하여 면회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미 노후한 인물들이다. 독립운동은 민족적 제전이다. 신성한 제수에는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좋다 차라리 깨끗한 우리가 제물이 되면 어떠냐, 구시대의 인물들과의 제휴가 실패되자 다음에는 기독교와 불교 유교 측에 교섭해 보기로 하였다. 이승훈은 그간 자기가 경과한 모든 사유를 말하고 다음에 작일 기독교 측 여러 사람이 회합한 내용을 “기독교 측에서 독자적으로 운동을 진행할 방침”이란 것을 말하였다. 도대체 일국의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대사업이다. 독립운동이 만일 분산적으로 된다면 그것은 독립운동에 대한 민족적 불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니 절대로 통일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승훈은 곧 이어서 말하기를 “작일 회의에서 가장 곤란한 문제는 비용에 관한 문제였는데 분담해서 변통해 보자고 하였으나 시기가 급박한즉 천도교에서 우선 5000원만 돌려주었으면 만사여의할 듯싶다. 만일 5000원이 못된다면 3000원가량이라도 우선 급한 비용이 될듯하니 기어이 돌려주기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동대문 밖 상춘원에 가서 의암성사를 뵙고 그동안 경과 사항을 보고하고 이승훈이 청구한 금액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선생님 말씀이 5000원 청구하였으니 그 액수대로 융통해주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다음날 22일에 5000원을 가지고 소격동 이승훈 숙소에 가서 직접 교부하였다. 결국 5000원을 마련해줌으로써 기독교 측과 제휴는 성공하였다. 다음은 불교 측과 제휴하는 일이 남았다. 24일 밤에 평소부터 친교가 있는 강원도 양양군 통천면 신흥사 승려 한용운(韓龍雲)을 생각하고 그의 주택 재동 43번지를 탐방하였다. 나는 그의 의사를 간파하고 그간의 경과 사실을 피력하였더니 불교 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널리 통지하지 못한 채 한용운 백용성 2인만 참가하였으나 그들은 족히 불교를 대표할만한 인물이었다. 결국 천도교 기독교(장로교, 감리교) 불교 등 세 종교 단체가 하나가 되었으며 또한 학생들이 가담되어 운동을 거족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유감스러운 점은 유교 측 대표와 천주교 대표가 빠졌다는 점이다. 끝으로 남은 일은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는 일이다. 2월 27일에 이승훈·이필주·함태영·한용운·최남선 등이 모여 의론한 결과 의암성사를 첫머리에 쓰고 감리교, 불교 순으로 대표자의 이름을 쓰고 나머지 29명은 가나다순으로 정했다. 육당이 중간에 서서 인물로 보나 거사동기로 보나 손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수위를 쓰는 것이 어떠냐고 기독교 측에 권고했다. 이승훈은 그러면 두 번째로 기독교를 대표하여 길선주 목사를 쓰자고 타협론을 제출했다. 그러나 길선주는 장로교파로서 기독교 전체를 대표할 수 없은즉 감리교를 대표하여 이필주 목사를 세 번째로 쓰자고 했다, 그 말에 따라 한용운은 제 4위는 백용성을 쓰는 것이 옳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의암성사를 첫머리에 쓴 것은 천도교대표자로 기명한 것이 아니라 육당이 “손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수위에 쓰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는 점과 이 육당의 제안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의암성사는 영도자로서 수위에 기록한 것이며 당시 일반 사회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대표 중에 대표가 된 것이다. 교단의 3.1운동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라도 역사를 보는 눈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면 그 이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3.1운동을 남다르게 보는 대표적인 사례는 북한의 3.1운동관이다. 그들은 첫째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 중에서 러시아 혁명을 개입시키고 있다. 러시아 혁명에 자극되어 3.1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둘째, 3.1운동의 주체는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33인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타협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관으로 보면 사회 구조는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체제로 바뀌게 마련이므로 그 동기는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에 뿌리를 대지 않을 수 없으며, 3.1운동의 주체는, 특히 선봉적 역할은 노동자로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데 자극받아 일어났다고 하면 그들의 이론에 맞지 않을뿐더러 사회사적으로 분수령을 형성하는 3.1운동에서 소외되게 될 것이다. 그들의 3.1운동관은 종교 단체의 역할을 철저히 배격하고 자기들의 역사관에 부합되는 이론으로 재해석하려는데 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정연한 설명이 가능하더라도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져서는 이론 자체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천도교에서는 다른 역사관이 어떻게 평가하든지 즉 부정적으로 평가하든지간에 우리 나름대로의 역사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3.1운동은 낡은 문화가 물러가고 새 문화가 다시 개벽되는 종교적 역사관에 입각한 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사에서 전 근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구별을 신분제도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듯이 낡은 문화와 새 문화의 차이는 인간의 존엄성에서 벗어나는 질서와 향상시키는 질서의 차이로 구분된다. 전근대적인 사회체제는 신분제도를 근간으로 한다면 근대적 사회체제는 신분제도가 타파되고 평등성을 확보하는 사회체제의 차이에 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낡은 문화 (병든 문화)는 인간존엄성을 무시한 문화라면 새 문화(다시 개벽)는 인간존엄성을 향상시키는 문화이다. 대신사는 그 분기점을 스스로의 세계관에 대한 해답의 체계(無極大道)를 얻은 포덕 원년(1860)을 분기점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우리의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향상시키는 역사로 흘러왔다는 것이다. 동학혁명운동도 3.1운동도 정치 경제제도의 현상들을 제거하면 이런 쪽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이 천도교의 종교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추상적일 수 있으나 종교적인 역사관이므로 그런 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존엄성의 실험을 위한 역사적 과제로 제기한 것이 다름 아닌 보국안민이다. 보국은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배제하고 국제간에 정의를 확립하고 민주적 완전자주독립을 확립하자는 것이요, 안민은 자유 평등 정의 민주 번영의 가치들이 실현되는 인간존엄성을 토대로 한 사회제도를 확립 물질적 정신적으로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3.1운동을 천도교의 역사관으로 볼 때 새 문화 창조 과정에서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국제적 모순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보다 나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보국안민운동의 하나였다라고 할 수 있다. 둘째 3.1운동은 천도교라는 이념집단이 선도하여 국제적 모순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도교는 교정일치(敎政一致)라는 설명체제로 역사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사회변동은 인간의 의식(敎)이 변해야 사회구조를 개혁할 수 있다. 동시에 사회구조는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상호 교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변동에는 그를 주도할 수 있는 이념체계와 집단이 중요하다. 아무리 사회적 모순이 성숙되었다하더라도 그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이념체제가 있어야 하고 그 이념체제를 실천하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자연발생적으로 폭발 저항할 수도 있으나 이념집단이 형성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저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이념집단이 형성되면 기층민중이 그 조직에 직결 저력을 발휘 사회적 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조직적으로 사회운동을 지속시킬 수 있다.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운동의 경우를 들어보면 동학이란 이념체제를 가진 집단이 없었으면 혁명운동은 불가능 했다. 농민문제가 아무리 모순관계를 가졌더라도 이를 이끌고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이 없으면 안 된다. 이념집단이 없어도 혁명운동이 가능하다고 하면 1894년에 동학 아닌 다른 집단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났어야 한다. 그 당시 실학 계통이나 그리스도 계통의 사상적 종교적 집단이 있었으나 그 곳에는 기층민중들이 모여들지 않았으며 혁명을 주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학에 대해서 기층민중은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었으며 그 힘으로 혁명을 집행했다. 이것은 동학이 갖는 이념체제가 기층민중의 이해와 일치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화할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운동은 동학이란 이념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학·천도교는 바로 새 문화 창조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이념집단이며 동학혁명과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3.1운동은 일시적으로 일본제국주의 통치에 항거한 운동이 아니라 자유 평등 민주 번영을 실현시키기 위한 이념운동이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19) "와전・왜곡・과장・날조 등으로 인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2.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잘못된 설(說)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하나는 3・1운동 당시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만해 한용운이 낭독하였다는 설이다. 그런데 이 역시 두 가지 설이 모두 와전된 것이며 진실이 아님을 밝혀둔다. 우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왜 모였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3・1운동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게 된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민족대표들은 결코 최후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러한 주장은 민족대표들의 심문조서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언급이 없는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맹점을 이용해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만해가 낭독하였다고 무책임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주장보다 한술 더 뜬 진실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왜곡 사실에 대한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묵암비망록(黙菴備忘錄)『에 확연히 그 진실이 드러나 있다. 『묵암비망록』은 천도교 측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묵암 이종일(黙菴 李鍾一)이 작성한 것이다. 묵암은 어느 누구보다 독립의지가 강하고 성격이 매우 강직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된 당일의 『묵암비망록』 내용을 여기에 소개한다. “12시 전까지 집에 남겨두었던 선언서는 거의 다 배포하였다. 식사도 거의 못하고 서둘러 태화관(泰和館)으로 갔다. 4명이 불참한 가운데 오후 2시경 긴장 속에 독립선언서를 다시 (민족대표들에게-필자 주) 배포해주었다. 의암(義菴)이 나에게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하였으니 크게 낭독하라기에 오자(誤字)를 고치고 그렇게 따랐다.”(묵암비망록, 1919년 3월 1일자) 이것이 위의 두 낭설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다. 민족대표들은 전날 독립선언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장소를 바꾼 것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면 흥분된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로 인해 일본경찰에게 무자비한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래서 태화관에서는 오후 2시 기독교 측 민족대표 4명이 불참한 가운데 묵암이 참석한 민족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의암성사의 지시에 따라 선언서를 낭독했던 것이다. 다만 그 자리에서 만해는 일동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하였다고 『묵암비망록』은 밝히고 있다. 사실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특정인물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불경(不敬)이 될 뿐 아니라 민족대표 전체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유관순과 3・1운동 3・1운동에서의 유관순의 활동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3・1운동 당시 유관순의 역할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논할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3・1운동이 마치 유관순의 주도로 이루진 것과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광경이지마는 청소년들에게 “3・1운동을 누가 했는가” 하고 물으면 열 사람에 7, 8명은 “유관순이 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청소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지성인라는 사람조차 맹목적으로 그렇게 추종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작년 3・1절에 MBC TV는 ‘아우내 장터의 3・1운동’ 재현행사를 중계하면서 “1919년 3월 1일 유관순 열사가 이끌며 전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운운하면서 마치 기미년 3・1운동이 유관순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처럼 방송했다. 그래서 올해 3・1절에도 이런 잘못된 방송이 나갈 우려가 있어서 지난 2월 9일 중앙총부의 종무원장과 교화관장, 그리고 33인유족회 라영의 회장이 MBC를 방문하여 작년의 왜곡보도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고 이에 대한 정정보도와 함께 재발방지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가장 정확하고 공정해야 할 방송에서조차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니 일반 민중들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물론 MBC가 고의로 그런 방송을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중계방송하는 아나운서조차도 유관순의 만세운동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얻어들은 풍월을 가지고 방송에 임한데서 이런 착오가 빚어졌다고 생각된다. 바로 여기에서 3・1운동에 대한 국민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유관순의 유관단체에서 의도적으로 과대 선전하는데도 하나의 원인이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참고적으로 3・1운동 당시 유관순의 역할에 대해 간략히 기술해보기로 하겠다. 유관순은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는데,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에 가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도 참여했다가 유관순과 학생들이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요구로 학생들은 풀려났다. 그 후 3월 10일을 기해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유관순은 병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니며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거사일 하루 전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리는 것을 신호로 인근 여러 산에서 불길이 솟아올랐고, 드디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쳐 총격을 가해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결국 유관순은 재판에 회부되어 3년 징역 언도를 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 된 후에도 계속 항거하자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악화되어 1920년 17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유관순이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4월 1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유관순이 처음부터 3・1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와전됨으로써 특히 청소년들에게 3・1운동의 진실이 왜곡 전파되어 잘못 인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청소년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한 객관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3・1운동과 관련하여 와전・왜곡・과장・날조 등으로 인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이 허다하다. 이러한 일은 3・1운동이 극비리에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도 일단의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자파이기주의에 치우쳐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곡필(曲筆)에 더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사초(史草)를 기술함에 있어서 선열과 후세에 부끄러움이 없는 집필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18) "독립선언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시위과정과 천도교 만세시위는 3월 11일에 영남 쪽 상업소도시 남시(南市)에서 최초로 일어났고 다음은 3월 18일에 영북 쪽 소도시시인 신시(新市)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1차 봉기라고 할 수 있으며 3백 명 정도의 소규모 운동이었다. 그러나 3월 31일과 4월 1일의 운동은 영남북이 같이 일어났으며 읍내와 신시에서는 4월 1일까지 연속적으로 과격한 시위를 벌였다. 이것은 2차 봉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1차 봉기는 3백 명 정도로 그치고 2차 봉기는 수천여명이 모여 시위를 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다. 필자는 1차 봉기의 주체는 기독교 계통이고 2차 봉기의 주체는 천도교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에는 ‘3월 11일 오후 2시경에 천도교 주동으로 남시에서 약 4백 명이 회합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이 운동은 천도교가 주동이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주동으로 보인다. 이 남시에는 교회당이 있었으며 기독교인이 어느 정도 있었다. 1919년 6월에 조선헌병대사령부가 경무부장 회의 석상에서 보고한 ‘조선소요사건상황’에 의하면 “구성에 있어서는 3월 31일 이전의 소요는 주로 기독교의 선동으로 배태되었고, 그 후는 천도교도의 선동에 의한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3월 18일에 신시의 시위운동은 분명 기독교가 주동이 되었다. 이 신시에도 선천과 가깝기 때문에 기독교가 일찍 들어와 있었다. 3월 11일의 남시 시위운동과 3월 18일의 신시 시위운동은 기독교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1차 시위운동은 기독교의 주도라 단정된다. 2차 시위운동은 물론 천도교가 주도했다. 3월 31일과 4월 1일의 시위운동은 연속적인 시위운동이다. 당시 천도교에서는 3월 3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구성면·서산면·동산면·노봉면 일부 등 4개면에서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 영북 신시에는 사기면·천마면·관서면 등 3개면 교도들이 모이게 했다. 일제 기록에 의하면 31일의 시위 때는 남시에 5천명이 모였고, 읍에는 3천 명이 모였으며 신시에는 8백 명이 모였다(3·1운동 재판기록). 이 두 곳의 시위운동에는 일본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많은 사람이 검거되었다. 우석 전의찬 선생이 1928년 기록에 의하면 천도교인으로서 이때 순도한 사람과 일반인의 순국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崔順瑞 張巖翰 吳尙涉 金贊株 全文行 許龍雲 朴聖瑞 高仲日 등 諸氏, 平人死者는 張德彬 宋行範 白洛水 許佃 尹洛斗 등 諸氏 또한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약사』에는 순국자가 다음과 같다. 許佃 金洛龜 高斗一 白義景 張鳳宙 張鳳奎 金燦斗 吳尙涉 宋連根 崔聖世 崔順世 朴監察 宋信興의 아들 등 10여명 이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 빠진 사람은 고두일·백의경·장봉주·장봉규·김찬두·박감찰·송신흥 등 7명이다. 결국 총순국자는 21명인 셈이다. 그리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분도 많았다.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옥고를 치룬 사람은 다음과 같다. 金景贊 朴元植 政贊祚 許堵 金應道 金應典 元利尙 朴永化 孫熙雲 獨孤雲 金仁國 元賢天 金洛勇 許尙玉 張海達 張萬永 張義壽 金泰用 金贊極 李時興 金有聲 등 21인 그리고 최덕화 등의 판결문(대정 8년 형상 제431호)에 의하면 신시에서 시위하다 체포되어 복역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최덕화(37세), 손희운(40), 원이상(58), 박문구(28), 허상옥(25), 강익홍((21), 박영화(47), 김응주(55), 독고실(40), 김응전(40), 이영근(28), 이시흥(66), 김군직(39) 등 13명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서 누락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최덕화·박문구·강익홍·김응주·독고실·이영근·김군직 등 7명 옥살이를 하다 나온 사람은 모두 28명인 셈이다.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에는 구성군내 총동원 연인원수를 6천 5백 명이라고 했다. 일본기록과 재판기록을 합치면 총동원 연인원은 무려 1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순국자가 21명이요, 옥살이를 치룬 사람이 28명에 이른다. 이밖에 부상자는 2~30명이 넘을 것이다. 이상으로 보아 구성군의 3·1만세운동은 매우 격렬했음을 말해준다. 맺음말 구성군의 대표적인 도회지라 할 수 있는 읍내와 남시, 신시에서 1만 명에 달하는 민중들이 함성을 올리자 이에 놀란 일제와 그 앞잡이들은 4월 1일에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보복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임시보고서에 의하면 구성에서 자경단을 조직하여 탄압 보복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성군내에서는 자경단을 조직하고 소요단 또는 만세를 고창하는 자에 대해서는 단원이 일제히 이를 저지하고 퇴를 협박함과 동시에 천도교도 등에 접근함을 혐기(嫌忌)하며 그 사이에 상호 소격(疏隔)을 생(生)케 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주로 천도교도들과 민중을 이간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총독부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평안북도 구성군 지방에서는 먼저 천도교도의 선동에 의하여 소요를 야기한 결과 귀중한 인명이 살상되고 산업 상에 있어서도 또한 다대한 손해를 입게 되었으므로 군민들이 천도교에 대한 반감을 품은 자가 점차 많아 군민은 천도교를 절멸하고 교도도 살해할 것이라고 칭하여 동교도와 교제하는 자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운운…” 이것으로 미루어 일제가 평화적인 시위자들에게 발포 살상하고 그것을 천도교에 뒤집어씌우려 얼마나 광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민중을 천도교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온갖 발악을 총동원했음을 입증해주기도 한다. 천도교도들이 얼마나 열렬했기에 이처럼 그들은 천도교를 말살하기 위해 광분했을까. 재판기록에도 천도교인들이 굽힐 줄 모르는 애국심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 대표적인 항변의 사례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919년 8월19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 판결문 중에서) * 김군직(관서면 대우동)·박영화(천마면 정관동) : “조선민족으로서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가 되며, 이번 사건에 조선 민족인 2천만을 모두 벌 줄 수 있을까. 또 이와 같이 일시적인 고역을 당한다 하여도 결코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반감만이 증가하고 장래 피차간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탄식이 생겨서 동양평화에 큰 불행을 초래할 것은 명백하므로 재판장은 통촉한 다음 타당하게 처결하여 장래 서청(筮晴)의 탄이 없게 하기를 바란다.” * 허상옥(천마면 신음동) : “궁곡에서 생활하는 우부우부와 어린 아이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른데 관해서 본인도 양심에 분발심이 생겨서 천여 명 군중 가운데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일 죄가 있다면 파리강화회의에 있다고 생각 키우며, 가령 보안법위반이라고 한다면 온 민족이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누구에게 죄가 있다고 한 것인가.…” 구성군 서산면 염잠동에 사는 뇌암 김태용도 일제에 대한 독립정신이 투철했다. 3월 31일 구성군 읍내에 들어가 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룬 분이다. 49세의 나이로 재판을 받을 때 “내 나라를 찾겠다는 만세운동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 일본사람은 우리들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항변했다. 이현면 원창동에 사는 진암 전경찬도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는데 재판장에서 당당히 항변했다. 신문과정에서 석방하면 다시 만세를 부르겠는가 라고 묻자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계속 만세를 부르겠다”고 하였다. 22세의 혈기로 항변하자 신문관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고 한다. 이 얼마나 정정당당하고 굽힐 줄 모르는 애국심인가. 산간에서 겨우 옥수수나 조농사를 지으며 사는 천도교인들이지만 보국안민 정신은 이처럼 투철하여 구성군의 3·1운동을 피 끓게 했다. 제4장 3·1운동에 대한 사회적 통념의 오류 … <참고 : 김응조 자료> 어느덧 3・1운동 90주년을 맞이했다. 3・1운동은 우리 국민이라면 예외 없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민족사의 정화(精華)요 청사에 빛나는 민족혼의 표상(表象)이라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랑스러운 3・1운동을 천도교가 주도했다는데 대해 교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한편 이 성스러운 3・1운동에 대해 우리 사회 일각에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사례가 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3・1운동 당시 국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며, 더욱이 후세들의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3・1운동에 대한 철저한 국민적 교육이 절실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3・1운동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 몇 가지를 들어 그 진위(眞僞)를 밝혀보려 한다. 1. 독립선언서 공약3장에 대한 진실 3・1운동 당시의 독립선언서 말미에는 공약3장이 명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公 約 三 章 ㅡ.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이니, 오직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ㅡ. 最後의 一人,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ㅡ.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여,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이 공약 3장에 대해서 사회 일각에서는 당시 불교 측 민족대표인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이 기초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그 진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만해의 기초설은 명백한 오류다. 이에 대해 지면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그 진실을 간략하게나마 밝혀보기로 한다. 만해의 공약3장 기초설(起草說) 내지 윤문설(潤文說)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만해의 제자인 김법린(金法麟)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신천지(新天地)」 1946년 3월호에 ‘3・1운동과 불교’라는 글을 게재하고 만해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이라면서 이렇게 썼다. “…宣言書의 作成에 관한 것인데 起草委員으로 崔麟, 崔南善 및 나 三人이었는데, 崔南善씨는 宣言書에 서명치 않고 草案만을 執筆하고 나는 그것을 수정키로 하고 崔麟씨는 起草責任者로 정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초위원’이란 용어와 만해가 독립선언서를 수정했다는 내용은 다른 자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위의 글이 나왔던 1946년은 해방 다음해로서 최남선처럼 친일행위를 한 변절자에게 혹독한 비판이 가해지던 시기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만해와 같은 지조 있는 독립투사에게는 역사적 진실과 관계없이 과장하거나 찬양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처럼 만해의 윤문설이 검증되지 않은 채 사실로 굳어져가는 상황에서 1960년 박노준(朴魯埻)・인권환(印權煥)의 공저(共著)로 저술된 『한용운연구(韓龍雲硏究)』(通文館 발행)에서 근거 없이 공약 3장을 만해가 수정하고 기초했다고 기술함으로써 결정적인 오류를 제공하는 단초가 되었다. 여기서 그 저술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일단 성안(成案)된 선언서를 보매 반드시 수정을 가하여야 될 곳이 몇 군데 있어서 그는 이를 고쳐서 인쇄에 부치기로 하였다는 사실은 아는 이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특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의 공약3장은 순전히 그가 창안 첨기(添記)하였던 것으로 이것도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숨은 사실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아무런 근거 제시도 없이 ‘아는 이만이 알고 있는 일’이라든가 ‘이것도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숨은 사실’이라는 소설 같은 표현을 함으로써 이를 와전(訛傳)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우선 이와 관련된 민족대표의 심문조서를 살펴보기로 한다. 만해는 공소공판에서 “그 서류를 보고 독립에 찬성하였나?”라는 판사의 질문에 “그것을 보고 찬성한 것이 아니라 다소 나의 의견과 다른 부분이 있어 내가 개정한 일까지 있소”라고 답했다. 아마도 이 부분이 만해가 수정했다는 윤문설의 근원이 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개정한 초고는 독립선언서의 초고가 아니라 그 이외의 초고임을 다음 최린의 심문조서(1919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확인된다. 판사가 최린에게 “한용운은 이제 보인 세통의 원고를 가지고 있었을 뿐 선언서의 원고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최린은 “그 선언서 초고는 인쇄하기 위하여 최남선에게 돌리고 한용운에게는 맡기지 않았다”고 하여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맡기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만해 자신도 3월 11일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의 검사 취조에서 이런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이때 검사가 압수한 증거물 6, 7, 8호를 보이면서 “이것은 피고가 가지고 있던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만해는 “그것 중 6호는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탄원서이고, 7호는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어 독립승인을 얻으려는 서면이며, 8호는 일본정부와 동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통고문의 안(案)이다. 또 그 외에 독립선언서의 안문(案文) 1통이 있는데 그것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여기서 만해가 갖고 있던 것이 독립선언서가 아닌 미국대통령, 각국 대표, 일본 정부와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초안이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당시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비롯해서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정부와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청원서를 초안 작성하였는데, 3・1운동 전날 최린은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제외한 다른 문건을 내어주면서 정서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해는 바빠서 정서하지 못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였다. 이상으로 만해가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접하지도 못하였을 뿐더러 더구나 개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독립선언서의 작성과정을 보면 의암성사가 3・1운동을 결심한 후 최린・권동진・오세창 3인을 참모로 하여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을 먼저 정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는 이종일이 쓰겠다고 자청했으나 그의 성격상 과격한 표현으로 선언서가 작성될 가능성이 있어 최남선에게 선언서 작성을 의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의암성사와 참모 3인이 독립선언서에 들어갈 대의(大義)를 협의한 후 이를 최남선이 최린의 부탁을 받고 그 대의에 준해서 독립선언서를 작성케 되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사회 일각에서 유포되고 있는 독립선언서에 대한 만해 한용운의 윤문설과 공약3장 기초설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거니와, 만해의 윤문설과 기초설 모두가 근거 없는 낭설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황당한 것은 박노준・인권환의 『한용운연구』에 의암성사를 직설적으로 모욕하는 근거 없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그 내용부터 보기로 한다. “최린의 소개로 천도교의 성사 손병희와 대면한 그는 사태의 중대함을 소상히 설명하고 우리 민족이 독립선언을 하고 자주민임을 전 세계에 공포하기에는 이때처럼 좋은 시기는 없다고 갈파, 천도교 측의 호응을 요구한즉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즉석에서 거부함에 만해는 재차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여전히 응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는 그 이상 간청하여보았자 별무신통할 것을 인지하고 의암을 향하여 ‘이미 사건의 비밀은 타인의 귀에 들어갔으니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운동이 사전에 탄로가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목숨이 살아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의암도 그의 열렬한 민족주의사상과 투철한 민족의식에 감탄하여 조건부로 응낙하니, 그 조건이라 함은 의암 자신이 독립운동의 대표자로 되고 또 선언서에도 두서(頭書)하여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논평할 가치조차 없지만, 경술국치 이후 조국독립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계속 준비해온 의암성사에 대해 이런 허무맹랑한 날조를 하는 것은 소위 대학 강단에 서 있는 지성인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몰지각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 만해의 협박에 못 이겨 의암성사가 3・1운동을 마지못해 그것도 조건부로 응낙하였다니 앙천대소(仰天大笑)를 금할 수 없다. 이 기사는 전후가 맞지도 않을 뿐더러 만해 자신이 최린의 권유로 민족대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것이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극치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날조로 인해서 3・1운동의 전개과정을 모르는 일반 대중들이 현혹되어 날조가 더욱 증폭되고, 심지어 3・1운동의 역사적 진실까지 왜곡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17) "1918년 12월 1일 경운동 현 교당 기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3·1운동의 준비 포덕 60년(1919) 당시의 교구장은 이종수(李種秀)였다. 구성교구는 태천교구와 합하여 구성대교구로 되어 있었다. 대교구장은 태천의 이정점 어른이었으나 구성교구장은 이종수 어른이 맡았다. 교구의 중요 직책은 전제원(典制員)에 백응구, 공선원(共宣員)에 전중록, 금융원(金融員)에 박응준, 서기에 원명준이었다. 각 전교실의 전교사는 모두 20명이었으며 다음과 같다.(포덕 60년) 구성면 김정상, 동산면 김관화, 오봉면 김상련, 방현면 임찬흡, 이현면 강만영, 노동면 배윤직, 운계동 허희경, 깅상동 이치언, 서산면 최봉호, 백운동 김낙용, 송수동 이천길, 대성동 최광한, 신음동 전학수, 관서면 이대화, 사기면 윤태화, 왕당동 김용연, 조악동 이시영, 이 밖에도 중방동·청용동 였다, 장동 전교실이 있었는데 전교사는 정기환·노인화 였다. 교회건물은 구성면 우부동에 4동(38間), 서산면 남평동에 2동(6間), 백운동에 1동(4間), 동산면 덕화동에 2동(9間), 방현면 하단동에 1동(5間), 청룡면에 2동(8間), 처나면 탑동에 2동(7間), 사기면 송백동에 1동(3間), 신시에 1동(5間)이 있었다. 연원은 이종수·백웅구 계통과 원치영·김정삼 계통이 주가 되었고 선천의 김상열(月鳳 金商悅) 계통이 약간 있었다. 3·1운동 준비는 연원계통으로부터 착수되었다. 제1차 준비사업은 자금조달이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3·1운동 거사자금으로 포덕 59년(1918) 11월부터 본격적인 모금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의 문헌인 ‘천도교일반’이란 글에 보면 “동년 12월 28일 이미 약 9만원의 건축비를 신도로부터 연사(捐捨)케 하고 그 중에는 전혀 신도의 임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므로 반환해주도록 명한 바…”라고 하였다. 총독부는 천도교가 교당건축비라는 명목으로 모종의 자금을 모은데 대해 의심을 갖고 강제로 반환조치토록 하였던 것이다. 각 교구는 11월 초부터 모금에 착수, 1인당 5원 내지 10원씩을 목표로 약 50만 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구성에서도 약 1천호 정도가 모금에 응했으므로 그 금액은 5천 원이 넘는다. 포덕 52년(1911) 1년간에 납부한 월성미 총액이 8백9십7원(포덕 52년도 금융관 금전출납표)이었으므로 6배에 가까운 자금을 모아 올렸던 것이다. 다른 군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상한 각오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다는 절실한 심정으로 논밭을 팔고 소도 팔아 바쳤던 것이다. 이 자금 각출을 간과하고 3·1운동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일제 총독이 강제로 돌려주라고 하여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돌려준 것처럼 영수증만 발행하였다. 이런 사실이 후일에 발각되어 강계교구에서는 간부들이 기소되어 처벌받은 사실도 있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1918년 12월 1일 경운동 현 교당 기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모금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어 1월 말에 목표 액수가 완료되었다. 한편 총부는 정신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즉 중앙총부는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에 걸쳐 매일 하오 9시에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염원하는 기도를 봉행토록 하였다. 중앙총부는 이 기도를 각별히 진행시키기 위해 경성·해주·의주·길주·원주·경주·서산·전주·평강 등 9개 처에 대표기도소를 특설하고 주요간부를 파견하여 지도하였다. 각군 교구에서도 주요 간부들이 날마다 교당에 모여 기도식을 봉행하면서 장차 어떤 큰 일을 치르기 위한 마음다짐을 굳혀나갔다. 3·1만세운동의 본격적인 준비는 선천의 김상열(勉菴 金商悅)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전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월봉 선생은 선천에서 사기면으로 독립선언서를 보냈으며 이것을 다시 구성군에 비밀히 송달했다”고 사기면 허철 )선생이 증언하고 있다. 구성군교구에서는 선언서를 등사기로 비밀리에 더 많이 복사하여 각 면에 배포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운동 전개 연원과 지역관계로 운동은 3개소에서 각각 추진되었다. 즉 영북지방(사기면·천마면·관서면)은 신시(사기면 소재지)에서, 영남지방은 구성읍과 남시(방현면 소재지)에서 추진되었다. 구성읍은 구성면·서산면·동산면 등 3개면이 합쳐 준비하였고, 남시에서는 방현면·노동면·이현면 일부, 오봉면 등 4개면이 합쳐 준비하였다. 일본 총독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3월 10일(확인 곤란함)과 3월 11일에 구성읍과 남시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있었다고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한국독립운동사 1』에는 다음과 같이 일제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五) 철산·구성군 : …다음 구성군내의 운동은 읍내와 신시에서 주목을 끌 운동이 일어났다. 읍내운동은 3월 11일에 발생하여 3월 20일과 4월 1일에 각기 1천명 내지 3천명의 군중이 회집, 일 군경의 발포제지를 무릅쓰고 몇 차례씩 시위를 전개하였다. 신시에서는 3월 31일과 4월 1일의 양일간에 걸쳐서 약 1천 명 내지 1천 5백 명의 군중이 회집, 시위를 벌였으며 양일 다 살상자가 적지 아니 발생하였다.” (360면) (3월 10일과 20일의 시위운동은 확인하기 어려움) 평북도 장관이 정무총감에게 3월 31일자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四) 구성군 관내 : 동군 방현면 남시에서는 3월 11일 오후 2시 폭민 약 3백명이 일단이 되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고창하여 특히 헌병주재소에 쇄도코자 하였으나 미리 경계중인 구성 분견 소장이 해산시키고 주모자 15명을 체포하였음.”(760면) 三. 구성군 관내 : “3월 18일 오후 2시 사기면 신시의 장날에 편승, 야소교도 등을 중심으로 하는 폭민 약 3백 명이 독립기를 날리며 만세를 고창하고 헌병주재소에 밀려왔으나 즉시 퇴산시켰으며 주모자 10명을 검거하였음.”(762면) “본일(3월 11일) 삭주군 읍내에서 약 2천명, 구성군 읍내에서 약 3백...의 군중이 소요하여...”(764면) “三, 구성군 관내 : 읍내에서 31일 약 3백 명이 폭동을 일으켜 일단 해산되었으나 재기하여 수(遂)히 사상(死傷) 3명을 내었으며 의하여 파병을 하였음. 동군 남시에서도 동일(3월 31일) 폭민 5천명 이상이 집합하고 주재소를 파괴하였음. 또한 동군 신시에서도 동일 폭동이 일어났으므로 선주수비대에서 15명의 파병을 하였음.”(766면) “二. 구성군 관내 : 4월 1일 약 3천명의 폭민이 읍내에 습래(襲來), 사방의 문에서 진입코자 함을 발포 해산시켰으나 계속 불응하여 평양에서 소위이하 병정 4명의 응원을 받아 엄중 경계중임.”(769면) 이상의 평북 도지사가 총독부 정무총감 앞으로 보고된 보고서에 의하면 구성군 읍내에서 두 번(31일, 4월 1일), 방현면 남시에서 두 번(3월 11일, 31일), 사기면 신시에서 세 번(3월 18일, 31일, 4월 1일)씩 모두 7차례의 시위가 있었다.(3월 10일의 만세시위는 확인이 안됨). 이밖에 자료로써 주목할 만한 것은 이병헌(李炳憲)의『3·1운동비사』가 있고, 이용락(李龍洛)의 『3·1운동실록』이 있으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3·1운동)』가 있다. 세 가지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 (十二) 구성군 의거 : 3월 11일 오후 2시 경에 천도교 주동으로 남시에서 약 4백명이 회합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헌병의 총칼에 사상자 3명을 내고 주모자 15명이 체포되었고, 그 후 3월 30일에는 읍내와 남시에서 다수의 군중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해산을 당하였는데, 적의 총칼에 사상자가 10명이나 되었다. (3월 30일은 31일의 잘못인 것 같음) 이용락의 『3·1운동실록』 구성 : 3월 11일 오후 2시경 남시에서 약 4백 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사상자 3인을 내고 해산을 당하였다.“3월 30일 읍내와 남시에 2만 여명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해산을 당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10여인이 총살을 당하였고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3월 30일은 31일의 오기인 것 같음) 『독립운동사』 제9절 구성군 : 3월 11일 하오 2시경 군내 남시에서 군중 4백여 명이 시위투쟁을 벌여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로 몰려들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피검자 15명을 내었다. 3월 30일(31일의 오기인 것 같음)에는 오전과 정오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3백 여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벌여 읍내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헌병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다. 여기서 군중은 경찰과 충돌, 사상자 수명을 내고 해산했다. 3월 31일은 남시 장날이었다. 이날 정오를 기하여 5천여 명의 군중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일본 기록에는 이날 군중은 낫과 도끼를 들고 헌병주재소를 포위, 헌병들에게 폭행하였다고 했으나 이는 자기네들 발포의 구실을 삼기 위한 과장 보고이려니와 이날의 투쟁이 심상치 않았던 양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 7명과 피검자 5명을 내었다. 같은 날 31일에 신시에서도 일어났다. 즉 이날 정오에 1천여 명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벌였다가 헌병주재소로 몰려드니 헌병이 발포하여 부상자 1명을 내었다. 4월 1일에는 읍내와 남시와 신시 세 곳에서 일어났다. 읍내에서는 이날 상오 10시경 9백 명 가량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일본측은 헌병과 군대가 연합하여 이를 제지 해산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들은 끈덕지게 투쟁을 계속, 하오 5시에 이르러서야 부상자 3명을 내고 해산하였다. 남시에서는 전날의 투쟁을 이날에 재개하였다가 강제 해산되었으며, 신시에서는 이날 상오 10시경에 전날보다도 더 많은 1천 5백명 이상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재개하였다가 경찰의 발포로 군중측에 부상자 5명, 피검자 30명과 일본 측 부상자 4명을 내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확실한 것만 추려보면 구성군에서의 3·1만세시위는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즉 3월 11일에는 남시에서, 3월 18일에는 신시에서, 3월 31일에는 읍내와 남시 및 신시 등 세 곳에서, 4월 1일은 읍내와 신시에서 시위운동이 벌어졌다고 여겨진다.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16) "천도교인들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분견대로 돌진"『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3월 5일의 독립만세 3월 5일 새벽 5시에 예정했던 대로 사방에서 군중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6시경에 이르자 약 5백여 명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8십리, 1백리 밖에서 밤새도록 걸어왔다. 모두들 지쳤으며 식사를 못했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그러나 준비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헌병대에 붙들려 갔으니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다. 상석리 소목다리는 작은 마을이므로 김치와 소주를 동원하여 식사를 대신할 수 있었다. 빈속에 아침술을 마신 관계로 다소 흥분하는 기분도 들었다. (곽훈의 증언) 이윽고 이영화 교구장의 큰 아들인 이학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하석리 구읍 헌병대가 있는 곳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달려갔다. 이 대목을 『3·1운동비사』와 『독립운동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1운동비사』 : “상오 5~6시경에 각 면, 각 리의 천도교인만이 수천명 양덕읍 부근에 집회하여 일변 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태산이 무너질 듯이 부르며 행진하였다.” 『독립운동사』 : “재 밤중부터 사방 길목에 잠복하여 밤을 새우며 각처에서 모여드는 교인들과 일반 장꾼들을 모으니 그 수가 수천 명을 넘게 되었다. 이들 대중은 상석리 천도교구당 앞에서 이학근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헌병대 우편국 등이 있는 하석리 방면으로 시위행진을 개시했다.” 교구가 있는 상석리 소목다리는 동양구읍에서 들어가자면 큰 다리를 둘이나 건너 산모롱이를 돌아 들어가야 한다. 읍내로 들어갈 때에는 장꾼들이 있었을 뿐 아무런 장애사항이 없었다. 시간은 오전 9시경이었다. 만세소리에 놀란 일본헌병과 한국인 헌병보조원들은 시위군중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밀려오는 기세에 눌려 후퇴하여 헌병대에 들어갔다. 노도와 같은 군중들은 헌병대의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러자 저들은 발포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앞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계속 전진했다. 순식간에 40여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이 살상되어 피바다가 되었다. 『독립운동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급보에 의하여 헌병대가 출동, 군중 측의 진격을 막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군중은 헌병대의 방어벽을 헤치고 조수와 같이 밀려들자 저들은 마침내 군중에게 실탄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물러서지 않고 앞사람이 넘어지면 뒷사람이 나가고 하여 사망자 20여 명, 중경상자 50여 명을 내었다.” 『동아일보』가 펴낸 3·1운동 관계 주요사적에 의하면 “3월 5일에는 낫·도끼 등을 지닌 시위대가 일본군경 연합대와 충돌, 40명 이상의 살상 희생자를 내고 일본 측도 1명이 사살되었다”고 했다. 낫과 도끼 등을 지니고 습격했다는 헌병대의 보고는 자신들의 발포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위증 보고이고 일본 측 1명이 사살되었다는 것은 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시계마쯔란 자가 군중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날뛰다가 일본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쏜 총에 맞아 죽은 것을 말한다. 일본 측 기록인 평남도장관(도지사)의 보고에 의하면 3월 8일에도 천도교인들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분견대로 돌진하는 시위운동이 있었다고 했다. 즉 “3월 8일 오전 11시경 근근 12명의 천도교도가 일단이 되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분견대로 향하여 돌진하여 왔으므로 경계 중인 헌병이 이를 저지하고 전부 분견대에 구속하여 일이 없었으나 촌락지방의 천도교도는 분견소 습격을 제거하려한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독립운동사』에는 “3월 8일에 시위운동은 재연. 당일 상오 11시부터 천도교인 1백여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대 앞을 통과하다가 또 다시 10여명이 피검되었다”고 했다. 맺음말 3월 4일과 5일, 그리고 8일에 걸쳐 천도교인들은 구읍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4일의 경우는 준비 중에 있다가 예비 검속을 당했고 5일에는 수천 명(필자는 약 5백명 정도로 추산함)이 피를 흘리며 시위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8일에도 용감하게 소수 천도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다시 시위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참으로 용감하고 대담한 3·1만세운동이었다. 산중에서 농사나 지어먹고 사는 천도교인들이 어디에서 그런 저력이 나타났을까. 이 3·1운동으로 인하여 순국한 사람은 모두 15명으로 밝혀졌다. 이학근·이승근·박만전·한봉조·조정각 등 5명과 기타 10명(실명)이다. 이학근과 이승근은 바로 이영화 교구장의 두 아들이다. 이들은 앞에 서서 총지휘하다가 맨 처음 총에 맞고 쓰러졌다. 특히 중상자도 많았으나 이름이 전해지지 못해 안타깝다. 그리고 피검자는 70여 명이었으나 그 중에서 핵심인물과 지식인을 뽑아 투옥하였다. 재판기록이 없어 몇명이 얼마동안 옥살이를 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3·1운동비사』에 의하면 “곽치현·김병술·이영화·최기창·조정화·윤인권·박응모” 등만 밝혀지고 있다. 이것은 6·25 이후 월남한 천도교인이며 옥살이를 직접 하였던 윤인권이 증언한 것이다. 이들은 평양감옥에서 최고 1년 6개월, 최하 6개월간의 옥살이를 치렀다. 일본 헌병은 3·1운동이 끝나자 곧 보복적으로 천도교구의 사무실을 불질렀다. ‘양덕군지’에 의하면 “종리원은 동양에 있었는데 3·1운동 때 일본 헌병대가 방화하여 복구를 못하고 있다가 군청이 이전함에 따라 1922년께 양덕읍에 대규모로 웅장하게 신축했다”고 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해 그 후 양덕군의 천도교 활동은 3년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중요간부가 학살당하거나 체포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헌병들의 탄압이 심하여 지하에서 활동하였다. 자경대를 조직하여 조직적으로 감시하여 탄압했던 것이다. 하루속히 순국자의 이름과 복역자의 이름, 그리고 중상자의 이름 석 자만이라도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7. 구성군교구의 3·1운동 머리말 3·1운동과 같이 거족적인 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민족주의적인 의식화를 가능케 하는 이념체계와 전국 규모의 든든하고 훈련된 조직체와 활동에 필수적인 자금동원력이 갖추어져 있음으로써 천도교는 3·1운동을 성공시키는데 기여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은 일제의 무단정치로 말미암아 숨도 제대로 못 쉬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훌륭한 재능과 능력을 가졌더라도 민중적인 조직을 갖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새로운 이념체계와 전국적인 민중조직과 자금동원력을 갖추고 있었던 천도교의 지도급 인사들의 활동은 그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일부 젊은 층에서 3.1운동사를 비판할 때 천도교의 이런 점은 도외시한 채 운동을 왜곡시키거나 호도하며 매도하는 일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우리로서 자성해야 할 점은 이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기준이 될 이론체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3·1운동이 이루어진 이후 오늘까지 70년이 넘도록 천도교도가 치룬 3·1운동에 대한 제대로 된 책자 하나 발간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이대로 간다면 미래에는 3·1운동과 천도교는 무관한 운동이 되어버리고 불교나 기독교의 주동적 역할에 따라가거나 노동자·농민의 궐기에 추종한 천도교로 전락할지 모른다. 필자는 작년에도 이 점을 안타깝게 여겨 지방에서 천도교도들이 얼마나 희생적으로 3·1운동을 전개했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몇 개 군 교구를 골라 기록으로 남긴 일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운동을 하였더라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면 후일 입증할 길이 없어진다. 말로 큰소리를 친다 해도 3·1운동을 경험한 세대는 거의 떠나갔으니 누가 우리들의 주장을 받아주겠는가. 지금부터라도 지방에서의 운동기록을 정리하는 것만이 선열들에 대한 보답이요 역사가들에게 정당한 평가를 촉구하는 유일의 방법이다. 금년에는 구성(龜城), 제암리(提岩理), 영산(靈山), 양덕(陽德)에서의 운동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성군의 천도교세 평안북도에서 비교적 격렬히 3·1운동을 전개했던 곳은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약사』에 의할 때 정주·의주·철산·용천·영변·구성·선천 등지였다. 이중에서 사상자가 많은 곳은 정주였다. 구성군에서도 순국자가 21명이며 투옥되어 옥고를 치룬 분이 28명이나 된다. 이들 중 거의가 천도교인이었다는 점에서 구성군 3·1만세시위는 천도교가 주동이 되어 격렬하게 추진했음을 말해준다. 어째서 천도교인들이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앞장섰을까. 죽음도 마다않고 나섰던 이념에는 천도교의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과 아울러 강한 교세와 훌륭한 지도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구성군에 동학이 최초로 전파된 것은 포덕 35년(1894) 경부터이다. 한 가닥은 정주(定州)쪽의 안처흠(安處欽)연원이었고, 한 가닥은 태천(泰川)쪽의 이정점(李貞漸)연원이었으며, 한 가닥은 구성 노동면 면덕동 태생인 문익현(文益賢)연원이었다. 이 세 가닥 연원이 구성군 각지에 동학을 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익현 어른은 포덕 35년에 일찍이 입도(정식 입도는 포덕 38년임)하여 처음엔 접주(接主)였으나 다음엔 수접주(首接主), 대접주(大接主), 그리고 의창대령(義昌大領)까지 역임했다. 의창대령이라면 1만호의 교인을 포덕 했을 때 수여되는 직책이다. 당시 구성을 중심으로 하여 태천·정주·곽산·선천·철산·의주·삭주·창성·벽동·강계·초산 등지까지 포덕이 이루어졌으므로 그 활동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구성에 교세가 급진적으로 확대된 것은 포덕 40년(1899)부터 42년(1901)까지 2~3년 사이였다. 그러나 포덕 45년(1904)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 해 8월에 갑진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심한 탄압을 받아 교세는 역전하여 줄기 시작했다. 특히 을사년(1905)에 일본과의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한국군이 해산되면서 의병활동이 치열해졌을 때 이용구(李容九)의 일진회 매국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교도들이 같은 부류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포덕 51년(1910)에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倂呑)함에 따라 보국안민을 표방한 천도교에 대한 기대가 높아져 교세는 약간 회복되어 2천 5백호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구성군에서 교인이 가장 많았던 면은 노동면(蘆洞面), 서산면(西山面), 천마면(天摩面)이었고 다음으로 오봉면(五峯面), 구성면(龜城面), 방현면(方峴面), 관서면(館西面)이었다. 나머지는 이현면(梨峴面), 사기면(沙器面). 동산면(東山面)의 순이었다. 포덕 53년(1912) 6월에 군 교구가 중앙총부에 납부한 월성미액은 109원 16전이었다. 1호당 5전씩으로 평균해보면 2천2백호 정도이다. 1945년 해방 당시의 군내 총인구가 1만3천1백8십호였으므로 당시의 총인구를 1만호로 추사나더라도 약 4분의 1에 해당된다. 이러한 교세는 포덕 60년(1919)에는 약간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2천호 정도는 되었다고 본다. 평안북도에서 구성군의 교세는 의주와 정주 다음으로 꼽혔다. 숫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의식면에서도 매우 높았다. 문익현 어른이 포덕 54년 9월 23일에 75세로 세상을 떠난 다음 그 뒤를 이어 원치영(元致英)을 비롯하여 장석항(長錫恒), 이정점(홍기조 연원), 연원에서는 이종수(李種秀), 백응구(白應구), 정중록(全中錄), 전학수(全學秀), 김정삼(金鼎參)과 같은 쟁쟁한 후계자가 뒤를 이었다. 동학은 관의 지목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활동에 있어서 항상 고난이 뒤따랐다. 첫째의 시련은 포덕 41년(1900)의 경자교난이다. 중앙정부로부터 전국에 걸친 동학탄압이 이루어져 의·구·송(義龜松) 삼암 중 구암과 송암이 체포되어 구암은 무기징역, 송암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평안도에서는 저 유명한 영변의 강성택(姜聖擇) 도인이 영변부사 이도재(李道宰 : 1848~1909, 동학혁명이 일어난 후 전라감사가 되어 동학군을 많이 학살한 자임)에게 체포되어 순도하였다. 이 때 수천 도인이 체포되어 많은 순도자를 내었다. 구성에서도 문익현 어른을 비롯하여 이종수. 전중록. 백응구 등 그 외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무수한 형장(刑杖)을 맞고 풀려났다. 그 후 갑진개혁운동(1904.8) 때도 매우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했다. 갑진개화운동은 8월 29일(음)에 개회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이 합세하여 해산시켰다. 이튿날인 9월 1일(음)에 구성읍 남문 밖에 다시 모여 단발을 하고 강연회도 열었다.『대한매일신보』 보도(1904. 10. 3)에 의하면 “…구성군에는 동학비도 6천여 명이라 하고...”라는 관찰사 이용관의 보고가 있었다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약 3천명 이상이 집회한 것이 틀림없다. 이 사건을 심상치 않게 여긴 일본군은 전위대를 동원, 문중승(文仲承)·박병천(朴炳天)·최봉상(崔鳳祥)·이종덕(李鍾德)을 비롯한 10여명의 젊은 동학군들을 체포, 심한 고문을 가했다. 문중승은 어깨뼈가, 최봉상은 정강이 뼈가 부러져 3~4개월간 고통을 당했다. 또한 상투를 자른 많은 동학군들은 산간지역으로 피신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생활난이 겹쳐 고통은 이중삼중으로 심했다. 동학이 들어오면서부터 구성의 동학교도들은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투철한 반제국주의. 반봉건적인 정신으로 더욱 무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구성군교구 지도자들은 포덕 46년(1905)에 접어들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문중승. 최신홍(崔信弘)·원치영(元致英)·전중신(全中信) 등 젊은 층이 주동이 되어 구성읍내에 유신학교(維新學校)를 여름에 설립하였다. 또한 교구나 전교실 등에 27개의 강습소를 설치하여 초등교육에 힘썼다. 특히 군 교구 강습소는 2년제로서 중등교육과정을 이수케 하여 김기전(小春 金起田)·전의찬(又石 全義贊)·김학서(金鶴瑞) 등 쟁쟁한 인사를 많이 배출하였다. 구성교구는 수적으로도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에서나 인물 면에서도 매우 뛰어났던 교구였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15) "교인들은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민족독립을 위한 모금에 참여했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고주리의 학살사건 고주리의 보복만행은 4월 15일 제암리 집단학살 후에 자행되었다. 이날 오후 수비대는 조희창을 선두로 6명의 수비병과 함께 팔탄면 고주리로 향했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부락이다. 이때 고주리 주민 대부분은 제암리의 참변을 목격하고 거의 모두 산속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김흥열(전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 가족만은 ‘그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죄없는 사람들을 저희 마음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하는 생각에서 온 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안에 있었다. 조희창은 수비대들을 이끌고 김흥열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조희창은 수비대를 시켜 김흥열을 비롯한 김성열·김세열·김주업·김주나·김흥복 등 한 가족 6명을 방에서 끌어내어 포박을 지어 집 뒤 언덕으로 끌고 올라갔다. 이때 김성열 · 김세열 · 김주남 · 김흥복 등은 고문의 여독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끌려갔다. 조희창은 칼을 뽑아들고 김흥열에게 백낙렬이 숨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으면 전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김흥열이 모른다고 하자 조희창은 이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동했으면서 모른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하면서 칼등으로 김흥열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나 김흥열은 “내가 안다 해도 네 놈에게 그 분이 계신 곳을 말할 수 없다. 조국과 민족을 파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네놈에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냐? 현상금 200원이 그리도 탐이 난단 말이냐! 삼괴지역과 발안 만세운동도 나와 이정근이 주동했다. 마음대로 하여라.” 하며 조희창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조희창은 군도를 뽑아들고 사정없이 김흥열의 목을 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수비대들이 일제히 군도를 휘둘러 차례차례 6인의 목을 치자 붉은 피를 뿜으며 목이 사방에서 펄펄 뛰었다. 그래도 모자랐던지 사방에 나딩구는 몸체에 난도질을 가해 여섯 토막을 냈다. 팔다리가 잘리어 사방에서 펄펄 뛰었고 언덕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수비대들은 6명의 시체를 걷어 모아놓고 짚가리의 짚을 날라다 쌓아 놓은 후 불을 질렀다. 당시 김주업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참살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때 김세열의 아들 김원기가 밖으로 뛰어나와 이 광경을 보고 “나만 살면 뭘 해, 같이 죽여라!”하며 수비대에게 덤벼들자 수비대들의 구둣발에 채여 울타리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김주업의 처 한씨는 이 집안이 유일한 혈손인 김원기를 끌어당겨 치마폭에 숨겨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한씨 부인은 너무나 잔인한 참살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그날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다가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하니 김흥열 일가는 한꺼번에 7명이 몰살되고 만 것이다.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남양교구 관내의 3·1운동은 서울보다 한 달 정도 늦은 4월에 일어났으나 관내 전 교인과 주민들, 그리고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가장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화수리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인해 일본군에 의해 가장 잔학한 보복만행을 당했다. 특히 수촌리와 제암리·고주리의 집단학살은 가장 비참했다. 제암리와 고주리가 다른 마을보다 더 혹독하게 보복을 받게 된 것은 이 마을 주민들의 항일 의식이 다른 마을보다 더 높았던데 원인이 있다. 이 마을에는 거의 전부가 천도교인과 감리교 신자들이 살았다. 아시다시피 천도교는 보국안민을 표방, 당시 3·1운동의 주도적 핵심세력이었다. 조선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내놓은 천도교개론 서문에 의하면 “일본은 천도교를 박멸하거나 조선을 내놓거나 그 어느 것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 하나만 보아도 당시 전국에서 성미실적 1등을 기록한 천도교 남양교구 산하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시각은 좋을 리가 없었다. 또한 천도교인과 함께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감리교 신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6. 양덕군교구의 3·1운동 머리말 양덕군은 평안남도 북동쪽 끝에 위치하여 함경남도 고원군·영흥군·문천군 등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군 남동쪽으로는 황해도 곡산군과 접경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산간지대로 1907년 이후 의병활동이 유명했던 곳이다. 다행히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는 국도가 군 중앙을 통과하여 비교적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군민의 문화수준은 매우 높다. 특히 온천이 유명하여 외래 방문객도 많아 사상면에서도 다른 산간지역보다 훨씬 높다. 의병활동의 근거지가 되다시피 하여 애국심이 강하고 민중들의 저항의식이 높음에 따라 어느 지역보다 민족의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로 말미암아 3·1독립운동도 격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은 일찍이 갑오동학혁명 후인 1895년부터 동학이 들어와 민중의식을 고취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진보회 운동을 통한 개혁운동이 있었고 뒤이어 의병운동을 거치면서 반제·반봉건적인 사상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격렬한 3·1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경무총감부와 헌병대사령관의 보고서(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인 ‘소요사건 경과 개람표’에 의하면 양덕군에서는 3월 5일 3백명이 3·1만세시위운동을 전개, 헌병대를 습격했으므로 일본군 16명이 출동하여 발포, 40명이 살상되었으며, 일본인도 1명 사망했다고 하였다. 양덕군민회가 펴낸 『양덕군지』에 의하면 사망자는 15명이었고 중경상자는 70여명이었으며 체포된 사람도 70여명이었으며 그 중 옥고를 치룬 분이 4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희생을 치룬 3·1운동 중의 하나였다. 이 운동은 누가 주도했으며 어떤 조직력이 동원되어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천도교도들이었으며 동학 이래 다져진 민중적인 조직력과 사상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양덕군의 천도교세 1938년 천도교의 총 교호 수는 8천 2백 5십 7호였다. 1919년 당시 양덕군의 천도교 호수는 약 7백호이다. 천도교가 양덕지방에 최초로 들어온 것은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포덕34년(1893)이었다. 당시는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포덕 37년부터 점점 퍼지기 시작하여 하나의 연원을 갖게 되었다. 대구면(지금은 성천군이지만 그때는 양덕군이었음) 천동리에 있는 윤효순(1862년생)을 비롯하여 구룡면 봉계리의 손태룡(1873년생, 처음에는 유주(流呪)로 동학을 하다가 포덕 38년에 정식 입도함)은 포덕 34년 11월 23일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수덕리의 김성호는 포덕 38년에, 온천면 상신리의 이상화는 포덕 38년에, 상국리의 심성원(1870년생)은 포덕 36년에, 화촌면 평암리의 박봉상은 포덕 34년에, 상웅면 중리의 김기섭은 포덕 39년에, 같은 마을의 정추언도 포덕 39년에, 대륜면 통동리의 이양순은 포덕 39년에, 사기리의 손병서는 포덕 38년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손태룡은 김영석(어디 분인지 미상)어른으로부터 입도하였으며 그 후 김병술·박봉각과 같은 우수한 지도자에게 포교하여 많은 포덕을 내었다. 그리하여 양덕군에서는 유일한 대접주가 되었다. 당시 대접주가 되려면 적어도 천여호의 교호수를 가져야 한다. 포덕 69년(1828)에 작성된『손태룡 연원록』에 의하면 양덕군뿐만 아니라 강동·성천·곡산군까지 포덕하였음을 볼 수 있으므로 1천호는 넘었을 것이다, 양덕군 동학교단이 최초로 사회운동을 전개한 것은 포덕 55년(1904)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 8월 그믐을 기해 진보회 운동을 한 것이 시초다. 갑진개화운동이라 하는 진보회운동은 러일전쟁으로 우리나라는 그 승전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 확실해지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정부가 승자의 편에 들어 발언권을 얻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 정부를 개혁하여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진보회란 명칭을 내세운 것은 일반적으로 동학이라면 관의 탄압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를 피해보자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손태룡 대접주는 당시 의암손병희 성사의 지시에 따라 수백 명의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운동에 나섰다. 양력 9월 28일자 『대한매일신문』 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진보회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순천군수 이승주 씨의 내부로 한 보고를 보면 동학당 천여 명이 둔취하여 기에는 보국안민 넉자로 쓰고 회장은 문관일이라 하는데 경도회(京都會)의 지휘위를 기다린다 하며 맹산, 양덕, 등지의 각 인민 7~8백인이 보국안민한다 칭하고 소요 막심하므로 효유하여도 듣지 아니한다 하더라.” 또한 『황성신문』 11월 3일자에 보면 평남관찰사가 “근일 관하 각 군에 민중을 선동하여 칭하기를 진보회라고 읍읍 취회하기에 백방 효유하나 종불청종(終不聽從)하고 일익 회집하는데...” 라는 보고가 있었다. 양덕에서도 동학교도들이 몇 백 명씩 모여 진보회를 개최하고 머리(상투)를 자르며 검은 옷을 물들여 입는 일대 정치적 시위가 있었다. 『천도교창건사』에 의하면 양덕에서 집회하는데 그치지 않고 삼등으로 가서 여러 군의 동학교도와 더불어 일대 시위를 벌이는 한편 평양으로까지 진출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 개혁운동을 통해서 양덕의 동학 교세는 더울 늘어났다. 그러나 이용구 일파가 앞잡이가 되어 을사늑약을 지지하는 매국행위가 자행되자 크게 실망했다. 포덕 46년(1905) 12월 1일 일본에 망명 중이던 의암성사는 사태가 다급함을 알고 동학을 천도교라 선포하고 이듬해인 포덕 47년 2월에 서울 상다동에 천도교중앙총부 간판을 걸면서 일진회와 완전히 구별하게 되었다. 양덕군에서도 상부지시대로 재빨리 탈퇴하였다. 일진회의 이용구도 1907년에 이르자 정치단체가 해산되게 되자 12월 13일에 시천교라는 종교단체로 떨어져 나갔다. 이때 많은 교인들이 교단을 떠나 시천교로 갔다. 1907년 의병활동이 치열해지자 천도교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거나 일제의 동태를 살펴 알려주는 등 간접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천도교로 새 출발한 후 포덕 51년에 이르러 일본제국주의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하자 한때 교단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들어 교세는 포덕 52년 현재 5백호가 넘었다. 포덕사업과 교육사업 양덕군에 천도교 교구를 세운 것은 포덕 48년(1907)이었으며 초대 교구장은 김처성(金處聲, 대구면 신장리)이었다. 이 당시 포덕사업이 활발하여 포덕 51년 10월에 이영화와 오인규가 중앙총부로부터 ‘신포덕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전교사를 임명하였다. 포덕 52년 3월부터 손용호(하룡면 창리)가 새로 교구장이 되고 초대 교구장이었던 김처성은 공선원이란 직책을 맡았다. 그리고 6명의 전교사를 임명하는 한편 교세가 늘어나 이영화를 금융원으로 임명하였다. 포덕 53년에 접어들면서 전교실마다 초등교육을 위한 1년간의 강습소를 개설하여 교육에 열을 올렸다. 14개 강습소가 운영되었는데 제일 활발했던 곳은 제 262 강습소였다. 소장은 이병모였고, 소감은 최기훈·조정화가 맡았으며, 건물은 이명환이 제공, 희사했다. 졸업자 중에는 이학근·최두옥·이은조와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포덕 53년 1월에는 교구장에 지기철·전제원에 박종기를 선출했으며 포덕 54년 1월에는 교구장에 손태룡·공선원에 한충흡, 금융원에 이하경으로 바뀌고, 포덕 55년 1월에는 교구장에 한충흡·전제원에 손용점, 공선원에 이봉화, 금융원에 이하경으로 경질되었다. 포덕 55년 7월 1일에는 대교 구제가 창설되어 양덕군은 순천군과 성천군이 합쳐 하나의 대교구를 만들어 <성천대교구>라 부르게 되었다. 대교구장에는 성천교구장인 이돈하가 겸임하였다. 양덕교구장은 손태룡으로 바꾸고 전제원은 박만관이 잠시 맡았다가 8월 19일에는 교구장에 김택서가, 금융원에는 이봉화, 9월에는 공선원을 최정항으로 바꾸었다. 아울러 이해 10월에는 강도원과 전교사를 많이 임명하여 포덕교화에 힘썼다. 당시 교직자는 다음과 같다. 강도원: 이봉화·한충흡(2명) 전교사 : 손기현·조이균·이춘화·조경운·김홍화·신태성·최운화·양달화·조열화·유기화. 손권화·오경화·민석화·김용화·서윤화·김병술·우영화·이춘성·김윤실·손양모·이경근·민치선·한충빈·노병헌·김기운·박명두(26명) 포덕 57년 2월에는 손태룡을 다시 교구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전제원에 정명옥, 공선원에 신용주를 선출했다. 포덕 58년 2월에는 총부에서 육도사(나용환·오영창·홍기억·홍기조·나인협·임예환)를 순회케 하여 양덕군에는 나용환과 나인협 도사가 내려와 강연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한바 있다. 이 강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교인들에게 사기를 높여주었다. 이후 강연회의 필요성을 느끼어 양덕군 교구 내 순회교사를 더욱 늘리게 되었다. 즉, 김태섭·박윤겸·김태주 등 3명의 순회교사를 새로 임명, 강도회에 힘쓰게 하였다. 이듬해인 포덕 59년 6월에는 서기에 김병술을 임명하여 교구진영을 강화하였다. 포덕 59년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힘쓴 한해였다. 중앙대교당 신축성금 조성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게 되어 교구업무도 폭주했다. 양덕군 교구의 교당신축성금은 약 3백호가 각출에 참가, 2천원 정도를 마련하여 상납하였다. 이때 일반교인들은 이번 모금은 민족독립을 위한 것임을 알고 참여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5원 내지 10원씩을 각출했다고 한다. 포덕 60년이 되자 중앙에서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소원하는 49일기도를 봉행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에 걸쳐 각 면 전교실에서는 지방 핵심지도자들이 모여 특별기도를 봉행하였다. 이번 기도는 신앙적으로 어떤 중대사를 대비하여 다짐을 하는 기도였다. 1월에 교구임원을 개편하여 교구장에 이영화를 선출하였으며 공선원은 박명두, 전제원은 정명옥, 금융원은 이봉화, 서기는 김병술을 선출하였다. 이때의 교세는 약 8백호였다. 3·1운동의 전개과정 앞으로 전개될 독립운동에 대비하여 1912년 4월부터 실시한 봉황각 수련에 양덕교구에서도 4기에 손대용, 5기에 김봉섭, 6기에 박명두·한기원·김진선, 7기에 공달빈·신용주 등 7명이 참가했다. 이 지역의 3·1운동은 3월 5일에 이루어졌는데, 그 준비는 3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독립선언서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서는 성천으로부터 보내졌다는 설과 평양에 교구장이 가서 직접 받아왔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병헌 편저 『3·1운동비사』에 의하면 “양덕군은 교통이 불편한 산간벽지인 관계로 당시 독립선언서가 양덕군 대구면에 거주하는 김병술 선생이 성천군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가지고 그때 천도교 교구장인 양덕군 온천면 이영화씨 댁에 3월 1일에야 도착하였다”고 했다. 또한 독립운동사편찬위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 제4장 제5절 양덕군란에는 “당시 천도교 양덕군 교구장이던 이영화는 온천면 상청리에 살고 있었는데, 1919년 2월 하순 평양에서 열린 대교구장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서울서 보내온 독립선언서 1백여 장을 받아가지고 3월 1일에 평양을 출발, 양덕군 대구면과 상룡면, 하룡면 등지에 들러 천도교 독신 교우들을 찾아 숙의했다”고 하였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볼 때 이병헌의 기록이 신빙성이 짙다. 왜냐하면 당시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배포되었으므로 회의를 통해 배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교구장회의는 지역별이나 도 별로 개최한 사실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당시 독립선언서는 김상열(선천)이 평안도를 책임지고 2천매를 할당받아 평양을 거쳐 선천으로 간 것은 사실이다. 김상열은 서울서 28일에 떠나 평양에 들렀다가 다음날 새벽 평양을 출발, 선천에 하오 1시에 도착했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가군으로 사람을 보내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는데 직접 보낼 인편이 없을 때에는 인근 교구로 보내 거기에서 다시 전달하도록 했다. 양덕군의 경우는 성천군교구로 보낸 독립선언서를 가장 가까운 대구면 광산리 김병술에게 보냈던 것이다. 깁병술은 다름 아닌 교구 서기를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병술은 곧 교구장이 살고 있던 온천면 상청리까지 가야 했으므로 빨라야 3월 2일 저녁에 도착했다고 보아야 한다. 독립선언서를 받은 이영화 교구장은 3월 3일 8십리 길을 달려가 양덕면 용계리에 있는 손태룡 어른을 찾아가 의논한 후 10여 명의 중진 교역자와 연락하여 협의한 결과 거사일을 3월 5일로 정하고 구읍인 동양 상석리 소목다리 교구실로 모이도록 했다. 한편 거사 방법과 전략을 짜기 위해 3월 4일 중진 간부들은 소목다리에 있는 교구에 모여 비밀회의를 진행하였고 여러 가지 인원 동원에 따르는 준비를 진행하였다. 태극기를 그린다든지, 식사 준비를 한다든지, 준비할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사전에 탐지되어 준비사업에 착수하기도 전에 헌병대가 출동하여 12시경에 10여 명을 예비 검속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검토하고 넘어갈 것은 거사일이 3월 4일이냐 아니면 3월 5일이냐 하는 점이다. 『3·1운동비사』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사『에는 분명 3월 4일 장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보고에 의하면 “양덕에서는 3월 5일과 6일 및 동 8일의 3일간 각기 당지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운동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록 중 어느 것을 취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조선총독부 보고가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현지 헌병대의 보고를 토대로 작성한 문헌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4일과 5일의 착각이 생겼는가. 증인들은 4일이라고 하며 그날이 장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양력 3월 5일은 바로 음력 2월 4일이며 장날이었다. 이 양력과 음력의 차이가 착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 3월 4일은 장날이며 양력으로 치면 3월 5일이 된다. 따라서 양력으로 3월 5일에 거사한 것이 맞는 것 같다. 또한 『3·1운동비사』에는 “10여인은 3월 3일(4일)에 동군 천도교구실에서 회의하기로 하였는데 그날 12시경에 헌병대로부터 예비검속을 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다른 회의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므로 식사준비와 같은 사전준비를 하기 위해 모였던 것 같고 이를 의심스럽게 여겨 예비 검속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14) "제암리(堤岩里)의 3·1운동... 만세시위의 봉화 올라"『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5. 제암리(堤岩里)의 3·1운동 <참고 : 성주현 자료> 머리말 포덕 60(1919)년 3월 1일의 만세시위는 천도교의 주도적 역할로 전개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3·1운동 당시 천도교인들은 땅, 소, 밭, 심지어 집까지 팔아 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 독립운동과 투쟁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남양반도를 중심으로 한 남양교구의 3·1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암리(堤岩里)학살사건으로 더 알려진 남양교구의 3·1운동 역시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일으켰으며 화수리 주재소 습격에 대해 화수리를 비롯하여 수촌리·한각리·조암리·제암리·고주리 등 1백여 채의 가옥 방화, 20여명의 사망, 40여 명의 투옥, 5백여 명의 고문 등 일본군의 철저한 보복을 받았다. 이 가운데 수촌리의 보복상과 제암리·고주리의 집단학살은 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다. 더욱이 제암리 집단학살의 희생자 대부분이 아직도 기독교인으로 왜곡되거나 잘못 기록되어지고 있다. 남양반도의 천도교 남양반도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동학혁명 이전이었으나 어느 때부터 포덕이 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다. 동학혁명 전에 수원을 중심으로 김내현(金乃鉉)·안성관(安聖寬) 두 동덕이 활동하였으며 이 지역에서도 이미 동학이 포교되어 고주리의 김흥렬(金興烈)을 중심으로 상당수가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지역의 동학군은 수촌리의 백낙렬(白樂烈)과 김흥렬(金興烈)의 인솔 하에 수원 김내현(金乃鉉)·고석주(高錫柱)접주 휘하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우는 등 혁명에 참여했다. 포덕 46년 갑진개화운동 때에는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흑의단발, 폐정개혁 등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포덕 51년에 우영규가 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포덕 53년 1월 김인태 교구장에 이어 조동술이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해 10월에 조동술 교구장에 이어 백낙온(白樂溫)이 교구장이 되었으며 포덕 55년 7월 한세교 교구장 때 수원 대교구에서 분립하였다. 3·1운동 전인 포덕 59년 4월 한세교 교구장에 이어 라천강이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3·1운동의 준비 포덕 53년 천도교 3세 교조 의암성사께서 우이동에 봉황각을 신축하고 3월부터 지방두목을 불러 49일간씩 7차에 걸쳐 연성강도를 시킬 때 남양교구에서도 이종석(1) 정도영(2) 한세교(2) 이규식(3) 이성구(3) 김정담(5) 이민도(6) 김흥열(7) 김창식(7) 등 9명이 우이동 연성강도회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준비를 갖추었다. 포덕 60년 서울에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전개하자 남양교구에서도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백낙렬·김성렬·안종후(기독교인) 등이 서울로 올라가 직접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당시 순회교사인 백낙렬은 장안면 거북골(마정리)전교실, 기림골전교실, 장안리전교실, 덕다리전교실, 사기말전교실, 고온리전교실, 덕목리전교실의 교역자들을 만나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고 이에 동의를 얻은 다음 우정면 주곡리의 차희식, 팔탄면 고주리의 김흥렬과도 만나 상의를 했다. 한편 김흥렬은 제암리·고주리 전교사인 안종환·안정옥과 기독교인 안종후를 찾아가 만세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확인받은 후 가재리의 이정근(유학자)과도 상의를 했다. 이렇게 만세운동의 조직이 점차 확대되어갈 무렵 백낙렬 순회교사는 중앙총부로부터 이병헌이 수원교구에 내려온다는 연락을 받고 김흥렬과 논의한 끝에 고주리·제암리의 전교사인 안종환·안종린을 3월 16일 아침 일찍 수원 복수리교구에 파견시켰다. 그러나 안종환과 안종린은 수원 복수리교구에서 비밀회의 도중 일본수비대의 습격을 받아 중경상을 입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서 김흥렬에게 천도교중앙총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김흥렬은 즉시 수촌리로 나아가 백낙렬을 만나고 중앙총부의 지시를 전했는데 그 내용은 각 교구의 만세운동은 자체부담으로 계속 전개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백낙렬 순회교사는 빚을 내서라도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고 김흥렬은 팔탄면과 향남면을, 백낙렬은 우정면과 장안면을 책임지기로 했다. 백낙렬과 김흥렬 두 동덕은 이튿날부터 동분서주하면서 자금을 모금하는 하편 만세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만세시위의 봉화 올라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춘 남양교구의 만세운동은 서울보다 한 달 늦은 4월 2일 저녁 9시경 장안면 수촌리 개죽산 봉화를 신호로 일제히 시작되었다. 장안면의 백낙렬은 4월 3일 새벽 3시경 이봉구·정순영·홍수관 등과 함께 청수상 앞에서 만세시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심고하고 백낙렬의 지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자 이봉구·정순영·홍수관은 집집마다 돌면서 교인과 주민들을 동원했다. 아침 9시가 되자 석포리 방면에서 주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수촌리 방면의 주민들은 머리에 흰 끈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다. 또한 우정면 주곡리에서도 차희식이 주민을 동원하여 수촌리 전교실로 모였다. 잠시 후 수촌리전교실에서는 이봉구가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고 쓴 깃발을 들고 홍수광·차인범은 비밀리에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태극기를 든 군중들은 백낙렬의 ‘대한독립만세’의 선창에 따라 함성을 지르면서 수촌리를 돌고 독정리로 향했다. 이때 독정리전교사 이종근이 교인 우종렬·우영규와 함께 교인과 주민을 동원하여 전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만세를 부르며 군중들과 합세했다. 또한 김창식은 덕다리 교인과 주민들을, 최건환 독정리구장은 전주민을 동원하여 신촌에 집결해 있었다. 한편 장안리에서는 전교사 조교순과 김인태·양순서 등이 주민을 이끌고 신촌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사방에서 몰려든 군중들은 그동안 억눌린 생활을 발산하듯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어서 군중들은 어은리 기림골로 향했다. 기림골에서는 김현조 순회교사와 김익배 전교사가 주민을 동원, 전교실에 대기하고 있다가 합류했다. 이때 백낙렬이 앞으로 나아가 장안면사무소로 가자고 외치자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질서정연하게 장안면사무소로 향했다. 군중들은 면사무소에 이르자 사무소에 난입하여 사무집기를 모두 파괴하고 서류 장부를 파손, 밖으로 내던졌다. 기세가 오른 군중들은 더욱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이때 도망하려다 붙잡힌 김현묵 면장도 따라서 만세를 불렀다. 이윽고 면사무소는 검은 연기가 치솟으면서 서 삽시간에 재로 변했다. 한편 조암리 쌍봉산에서도 이를 환영하는 듯 많은 군중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뿐만 아니라 어은리 주민들도 이에 합세했다. 장안면사무소를 습격한 군중들은 쌍봉산으로 이동했다. 쌍봉산은 해발 117미터로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우정면과 장안면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정상에서는 이미 우정면 덕우리, 장안면 금의리 등 주민들이 먼저 도착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이들을 환영했다. 삽시간에 쌍봉산은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중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산꼭대기에서 만세를 부른 군중들은 쌍봉산을 내려와 일부는 멱우리 쪽으로 하산하였고 나머지 일부는 조암리 낡은아실 쪽으로 하산, 조암리 주민들과 합세하여 우정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사기말로 향했다. 우정면사무소는 장안면사무소의 습격소식을 듣고 미리 도망하여 직원이 한명도 없었다. 군중들은 장안면과 마찬가지로 우정면사무소를 부수고 집기와 서류를 밖으로 끌어내 소각했다. 이날 만세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약 2천 5백 명으로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들 대부분이 참가했다. 화수리주재소 습격 이어 군중들은 백낙렬과 정영순의 지시에 따라 김현묵 장안 면장을 앞세우고 친일파인 우정 면장 최중환 집으로 몰려가 살해코자 했으나 마침 부재중이라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한각리로 향해 소산광장에 집결하였는데 이때 모인 군중은 약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여기서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하기로 모의를 하고 만세를 부른 후 주재소를 서서히 포위해 가면서 세 방면으로 공격을 가했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주재소 안에 있던 순사부장 가와바다와 순사들이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투석전을 벌였다. 당황한 순사들은 총을 버리고 도망쳤으나 이내 붙잡혀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가와바다 순사부장은 문 뒤에 숨어서 계속 총을 쏘아댔다. 이때 이봉구가 깃대를 들고 주재소를 향해 뛰어들다가 넘어졌으며 이 광경을 본 김정식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었으나 역시 총에 맞고 쓰러졌다. 뒤를 이어 이경백·김현모가 주재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으나 마찬가지로 희생되었다. 이를 틈타 장소진·장제덕이 주재소 뒤쪽에 있던 나무를 지고 주재소로 달려가 불을 질렀다. 불이 주재소로 옮겨 붙자 가와바다는 필사적으로 도망가면서 군중에게 계속 사격을 가했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던지면서 쫓아갔으며 마침내 김익경이 날쌔게 달려들어 가와바다를 내동댕이치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차희식·이봉구·정서성 등 군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가와바다를 때리기 시작했다. 가와바다는 마침내 참살 당했으며 그의 시체 위에는 군중들이 던진 돌로 무덤을 이루었다. 일단 시위가 끝나자 군중들은 만세를 계속 외치면서 각자 부락으로 해산했다. 이날 만세시위로 김정식은 다리를, 이경백은 복부를, 김현모는 심장을 관통당해 2명이 죽고 3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편 발안리 유학자 이정근은 제자들과 동지들을 모아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배양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는데 수촌리 전교사의 백낙렬과 제암리 전교사 안정옥과 자주 만나 정국에 대해 논의하는 한편 이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4월 3일 삼괴지역(우정면과 장안면)에서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하고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그리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정근은 대대적인 봉기를 위해 발안리 주재소의 동정을 살폈다. 당시 발안주재소에 주둔해 있던 수비대는 삼괴지역으로 들어가 주재소는 텅 비어 있었다. 4월 4일 이정근은 여러 제자들을 불러 발안 장날인 4월 5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하고 발안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이때 화수리에서 만세시위를 마친 백낙렬과 안정옥·김흥렬이 찾아와 발안 장날 만세시위에 전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4월 5일 장날에는 사방에서 장꾼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낮 12시가 되자 이를 신호로 이정근·안정옥·김흥렬 등이 주동이 되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발안리 주재소로 향했다. 이날 수촌리의 이봉구도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냇가에서 돌을 날랐으며 제암리와 고주리 주민들도 함께 행동했다. 시가지를 한바퀴 돈 군중들은 발안리 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몰려갔다. 한편 주재소는 사이다가 이미 사수들을 배치해 놓고 위협사격을 가했다. 군중들은 이에 대항하여 투석전을 벌이면서 주춤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군중들은 계속 돌을 던져 주재소 유리창을 모두 깨어버렸다. 이때 이정근·김흥렬·안정옥이 군중을 이끌고 합류하였고 이정근이 “물러서지 말고 주재소를 습격하라”고 큰소리 쳤다. 그러나 일경의 위협사격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투석전이 전개되는 동안 수비대 30명이 도착, 주재소를 둘러쌌으며 주재소 안에 있던 수비대들도 칼을 들고 지원 온 수비대와 함께 배치되었다. 군중들이 점차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만세를 부르자 수비대는 기다렸다가 군중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으며 맨 앞에서 만세를 부르던 이정근이 수비대장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어 김경태가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다가 달려들자 역시 사정없이 칼로 내리쳐 즉사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처참한 광경을 본 군중들은 더욱 세차게 투석전을 전개했으나 수비대의 위력에 밀려 부득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만세시위로 수촌리의 이봉구, 제암리의 안진순·안봉순·홍원식·안종후·김정헌·강태성, 고주리의 김성렬 등이 수비대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일본군의 보복만행 한편 만세시위를 마친 군중들은 일본군이 와서 보복을 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자 저녁 때 사랑리 남산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화수리 주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의 보복을 예견한 화수리 주민들은 비 오는 밤을 이용하여 가족을 이끌고 원안리와 호곡리 방면으로 미리 피신을 하였다. 4일 새벽이 되자 화수리 주재소 습격사건을 보고받은 발안리 주재소 아리다 중위가 이끄는 수비대 1개 소대 30여명이 화수리로 달려와 마을을 완전히 포위하고 몇몇 집에 불을 놓았다. 그리고 집집마다 수색을 했으며 주민들이 모두 피신가고 없자 집집마다 방화를 하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수비대는 원안리와 굴원리로 몰려가 송낙인 등 4명을 포박, 주재소로 끌고 와 주민의 행방을 알기 위해 갖은 고문을 가했다. 한편 발안리 주재소장 사이다는 사건 현장을 돌아본 후 아리다 중위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수비대를 이끌고 다시 호곡리와 원안리로 몰려가 주동자 색출을 위해 혈안이 되었다. 얼마 후 수비대는 주민 30여 명을 굴비처럼 포박하여 주재소로 끌고 와 온갖 고문과 폭행을 자행했다. 잠시 후 사이다와 아리다 중위는 다시 수비대를 이끌고 불에 타다 남은 화수리 주재소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주재소에서 좀 떨어진 소나무 숲에서 돌무덤을 발견하고 가와바다의 시체를 찾아낸 다음 사이다는 한각리로 갔으며, 아리다는 화수리 임시주재소로 돌아왔다. 한편 원안리와 호곡리에서 끌려온 주민들은 수비대의 고문에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비대는 고문을 하다가 기절하면 냇가에다 내다버리는 등 갖은 만행을 주저하지 않았다. 수비대의 보복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마을의 가축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먹고 화수리의 전가옥을 방화했다. 이처럼 화수리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보복만행은 수촌리·한각리·조암리·석포리·장안리·어은리·멱우리·사곡리·고온리·덕정리·독정리·사랑리·화산리·운평리·원안리·제암리·고주리·이화리 등 삼괴지역과 남양교구 산하 전부락에 걸쳐 자행, 1백여 채의 가옥 방화와 20여명의 사상, 40여명의 투옥, 5백여 명의 주민을 고문, 폭행했다. 이 가운데 가장 처참한 보복을 당한 수촌리와 제암리⦁고주리의 참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수촌리의 보복만행 수비대들이 네 차례에 걸쳐 가장 악랄하고 혹독하게 보복을 가한 곳이 바로 수촌리이다. 이것은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화수리주재소 습격 때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 쓴 깃발을 들고 항상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했기 때문이다. 이 깃발은 이봉구가 들고 다니다가 화수리주재소 습격 때 주재소로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깃발을 버리고 나왔다. 4일 오전, 사이다는 수비대와 함께 화수리주재소 현장을 조사하다가 이 깃발을 보고 수촌리 주민들이 사건을 선동했으리라고 단정했다. 발안에 돌아온 사이다는 밤에 아리다를 불러 다음날 새벽을 기해 수촌리를 급습하기로 계획했다. 이것이 제1차 보복이었다. 4월 5일 새벽 3시반경 아리다는 수비대 30여명과 함께 수촌리 큰말부락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을 마구 쏘아댔다. 뿐만 아니라 교회당을 불 지르고 집집마다 방화를 시작했다. 삽시간에 수촌리 큰말부락은 불바다로 변했다. 주민들은 집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가족을 이끌고 어두운 산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수비대는 피난하는 주민들을 향해 마구 총격을 가했다. 이날 보복으로 가옥 24채와 5명(김영조·홍병연·홍경식·차한주·김성좌)이 총상을 입었고 4명(백남학·백성오·김정희·김응칠)이 칼에 부상을 당했다. 일본 수비대는 이처럼 수촌리를 완전히 생지옥으로 만들고 마을을 떠났다. 제2차 보복은 이날 늦게 어은리를 거쳐 발안으로 나오던 수비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수비대는 수촌리에 다시 들려 불타고 남은 8채 가옥을 샅샅이 수색했다. 이때 이봉구가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부장을 죽일 때 가와바다의 피가 묻은 옷을 미처 버리지 못하고 다락에 감추었다가 수비대에 발견된 것이다. 또한 산속에 피신해 있던 주민 4명이 집이 궁금하여 잠깐 내려왔다가 수비대에 붙잡혀 장안리 주민들과 발안리 주재소로 끌려갔다. 발안주재소에 끌려온 수촌리 주민들에게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수비대는 이들을 창고로 끌고 가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리치자 몸이 터져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그 여독으로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제3차 보복은 4월 7일에 자행되었다. 이날 일본 수비대는 수촌리 가장 마을에 들이닥쳤다. 수비대는 가장 마을에 들어와 수촌리를 중심으로 이웃부락인 꽃밭에, 용담굴 주민들을 가가호호 돌아다니면서 모이라고 했다. 수촌리 주민들이 하는 수 없이 모이자 갑자기 주민들을 포위하고 결박을 지어 발안리주재소로 끌고 갔다. 수비대들은 밧줄에 묶여 들어오는 사람마다 몽둥이질을 가해 즐비하게 쓰러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뒹굴었다. 이때 끌려온 주민은 약 1백30여 명이나 되었다. 제4차 보복은 그 다음날 있었다. 수비대는 수촌리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 등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너무나 엄청난 보복을 당해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사이다는 이러한 주민들의 행동에 격분하여 수비대를 시켜 8채 남은 가옥을 돌아다니며 고문을 해 누워있는 환자를 4채의 가옥에 몰아넣고 나머지 4채마저 불을 질렀다. 4차례의 보복으로 수촌리 마을 42채 중 4채만 남기고 38채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이때에 천도교전교실 겸 강습소도 불타버렸고 이봉구의 집도 소각되었다. 또한 백낙렬의 집에도 불을 놓아 13간 행랑채가 소각되었으나 다행히 안채는 주민들이 불을 껐다. 소각된 행랑채는 3·1만세운동을 위해 많은 천도교 지도자들이 모여 의논했던 천도교인의 집회장소였다. 제암리의 집단학살 삼괴지역의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습격사건, 화수주재소 습격사건에 이어 발안 만세운동이 연이어 일어나자 발안주재소장 사이다는 4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 삼괴지역의 거의 모든 부락에 대해 보복을 감행한 후 드디어 제암리에도 보복의 손길을 뻗쳤다. 4월 15일 오후 2시반경 사이다는 조희창과 수원에 본부를 둔 일본군 제 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 다께오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30명의 수비대를 이끌고 제암리에 들어섰다. 수비대들은 제암리를 완전 포위하여 한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 조희창을 시켜 “사이다가 좋은 말을 한다고 하니 주민들은 교회당에 전원 다 모이라”고 하면서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강제로 모이게 했다. 이때 발안에서 수비대에게 잡혀 수원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 끝에 집에 돌아와 누워있던 6명도 끌고 왔다. 주민들이 이 마을에 있는 초가집으로 된 감리교 교회당에 모두 모이자 수비대들은 교회당을 완전 포위하고 돌연 출입구와 창문을 모두 큰 못으로 박아 도망가지 못하게 밀폐한 다음 사이다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하여 살육하기 시작했다. 교회당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했다. 갇혀 있는 주민들은 있는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수비대들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더욱이 천인공노할 사실은 천진난만한 어린이까지 무참히 참살했다는 사실이다. 천도교 전교사 안종환은 인간도살장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어린 아들을 안고 교회당으로 갔다가 죽게 되자 어린아들을 창밖으로 내보내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이 어린 것만은 제발 살려 달라”고 피맺힌 애원을 했으나 수비대들은 조금도 사정없이 이 어린 아이를 군도로 내리쳐서 참살하고 말았다. 진정 목불인견의 참사가 아닐 수 없다. 수비대들은 교회당 밖에서 죽은 시체까지 끌어다 모아놓고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시체를 분간할 수 없게 불을 질렀다. 불길은 제암리 주민들의 피맺힌 한을 뒤로 한 채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게다가 교회당이 초가집이었으니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런데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안종엽과 김정헌은 교회당 흙벽을 뚫고 사력을 다해 도망갔으나 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즉사하고 뒤이어 도망친 안경순 역시 총탄에 맞아 쓰러진 것을 수비대가 쫓아가 칼로 목을 쳐서 죽이고 말았다. 이러한 생지옥 속에서도 오직 한사람 노경태만이 실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성공,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수비대의 총격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는 데 마침 뒤쫓던 수비대가 각반 끈이 풀어져 다시 고쳐 매는 사이에 위기를 모면하여 산 속으로 숨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날 제암리의 교회당 안에서 참살당한 주민은 어린이까지 합쳐서 모두 24명인데, 그중 천도교 신자가 15명이고 김리교 신자 및 기타가 9명이었다. 이날 희생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천도교 신자> 안정옥·안종엽·안봉순·홍순진·안종환 및 그의 아들 안유순, 안무순·김정헌·안명순· 안관순·안종린·김덕용·안경순·안상용 <감리교 신자 및 기타> 안종락·안종후·안진순·안필순·조경칠·강태성·노경태(당시 유일한 생존자)·홍원식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13) "만세 일자와 규모"『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4. 맹산교구의 만세운동 포덕 50년 초의 교세 평남 맹산에 동학이 들어온 것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인지 알 수 없다. 천도교 『맹산군연원록』에 의하면 지덕면 오봉리에 사는 최정섭이 포덕 40년(1877) 11월 16일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정섭은 포덕 18년(1877) 9월 2일 생으로 23세 때 입교한 셈이다. 이듬해인 포덕 41년(1900)에는 입교하는 사람이 늘어나 오봉리의 최기언, 봉인면,팔봉리의 이양섭, 지덕면 소창리의 김석조, 애전면 함온리의 박윤조, 초평면의 방효준, 지덕면 효리의 방은준, 학천면 고하기의 박치홍 부자가 입교하였다. 다시 포덕 42년((1901)에는 더욱 늘어나 맹산면 원남면 옥천면 동면에 포교되었다. 포덕 45년(1904) 8월 30일에는 맹산에서도 진보회를 개최하여 상투도 자르고 검정색 의복도 입었다. 진보회 조직에 관한 천도교창건사의 기록에 의하면 맹산에서는 방기창이 주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어디서 몇 명이 모여 단발흑의의 시위와 개회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로부터 천도교세는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여 포덕 51년(1910)에 이르면 약 150호 정도가 된다. 역대 교구장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던 포덕 60년(1919)까지의 역대 교구장은 다음과 같다. 교구 창립일은 알 수 없으나 초대 교구장은 김창각이었다. 포덕 51년 9월에도 재선되어 52년 2월까지 역임하였다. 포덕 52년 3월부터는 김영율이 교구장으로 선임되었고, 그 해 9월에 김영율 교구장이 사정이 있어 교구장을 사임하게 되어 김창수가 임시로 그 후임이 되었다. 포덕 53년(1912) 11월에 조병칠이 교구장에 선임되었고, 포덕 55년(1914)에 이봉준이 새 교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해 7월에는 중앙총부의 직제개편에 따라 맹산교구는 덕천대교구에 소속되었다. 덕천대 교구장은 박왕식이었으며 맹산 교구장에는 방기창이 선임되었다. 방기창은 맹산 천도교의 연원대표로서 이때 교훈이었으며 후에 도정이 되었다. 포덕 59년까지 방기창이 교구장을 계속 역임하였다. 공선원은 김창각, 전제원은 임대규, 금융원은 박창도 였다. 포덕 59년(1918) 6월에 문병로가 교구장이 되었다. 한편 포덕 57년부터 각 면 전교사가 임명되었는데 정승주·임대규·박봉림·이승학·박명원·김천석·김대현·이기섭이었다. 3·1운동 준비 1912년부터 실시된 우이동 봉황각 수련에 맹산군에서도 2기에 연원대표인 방기창, 4기에 이관국, 5기에 박승민·방진원·유병순, 6기에 김치송, 7기에 박정간·궁상원 등 7명이 참가하였다. 포덕 60년(1919)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 간의 기도가 전국적으로 행해졌는데 맹산에서도 49일 간의 기도를 맹산면 수정동 교당에서 인근 교인들이 모여 봉행했다. 당시 소학교 2학년생이었던 김득홍(83세)의 증언에 의하면 어른들은 이번 기도는 예사 기도가 아니라 하시며 집에서 물을 데워 목욕재계하고 교당에 가서 기도를 봉행했다 한다. 맹산 교당은 마당이 넓었으며 토방이 높았고 앞에는 큰 강당이 있었으며 뒷방은 네 개로 나누어진 온돌방이 있었다 한다. 이 온돌방에서 기도를 봉행했다 한다. 김득홍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방기창 도정은 서울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직접 지령을 받아 가지고 내려와 급하니 각 전교실에 연락하여 3월 1일 12시에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맹산교구의 만세계획은 각 면 전교실에서 청년들만 동원하여 거행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소수인원을 동원하여 만세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박연수 어른이 전해 들었다는 증언에 의하면 독립선언서는 조기간이 가져왔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이었던 라인협·나용환 두 선생이 천도교 평양교구에 수천 매를 전달했다. 이중에서 교구 간부였던 조기간이 2월 24일 독립선언서 수십 장을 갖고 맹산 북창까지 와서 북창 교구장인 방은준이 맹산교구에 전달했다고 한다. 한편 『독립운동사 권2』에 의하면 맹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사람은 당시 덕천 천도교구 공선원 현성재였고, 거사를 지도한 이들은 당시 천도교 교구장이던 문병로를 비롯하여 길응철·방기창·정덕화·김치송·이관국·방진원 등 천도교 간부들 여럿이었다고 했다. 만세 일자와 규모 김득홍의 증언에 의하면 3월 1일 12시에 55명의 천도교도가 박창도를 앞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당시 소학교 2학년이었으며, 수업 중 시장 쪽에서 만세소리가 들려오면서 학교 앞을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튿날인 3월 2일 12시에도 역시 55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한다. 1일과 2일은 평일이었으므로 천도교 청년들만 만세를 불렀고 헌병과 경찰의 제지로 해산했다고 한다. 헌병 분대에는 헌병소위 사다께(佐竹) 외에 7~8명뿐이었고 헌병보조원은 15명 정도였다. 3·1동지회 간행 『3·1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2권』에는 만세를 부른 날짜가 3월 6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박연수 선생 증언에는 3월 9일이라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 김득홍 어른에게 확인하였더니 분명히 3월 1일부터 3일간 연속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만세를 부른 인원은 55명이라 하였다. 나이 많은 분들은 제외하고 청장년만 만세를 부르도록 계획했기 때문에 각 면 전교실에서 55명만 모였다고 한다. 박창도가 선두에서 지휘했으며 그의 나이는 당시 35세로서 키가 헌칠한데다 얼굴이 잘 생겼고 힘이 장사이며 카이젤 수염이었다고 한다. 박창도는 포덕 53년 8월에 맹산교구가 운영하는 제148강습소 제2회 종업생이다. 이 만세 참가자에 대해서는 『3·1독립운동사』에는 30명이, 『독립운동사』에는 50명 이, 박연수 선생은 400여 명이라고 했다. 김득홍 어른은 3일째 만세시위 때 헌병대로 몰려갔던 인원도 바로 55명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사격으로 48명이 현장에서 즉사한 사실을 보더라도 55명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3일째의 기억에 의하면 학교 선생이 아침 수업을 시작하려고 기립 경례를 마치자 책보를 싸라고 하면서 집에 돌아가 밖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서 만세 광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천도교 청장년 55명만이 참가했다는 것이다. 48명이 총살당해 3일째 만세시위는 헌병대로 향했다. 첫날처럼 12시부터 시작하였다. “헌병을 쫓아내야 한다”고 외치면서 현병대로 갔다. 김득용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집이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날 새벽 4시경에 덕천방면에서 60리를 걸어 20명에 달하는 완전무장한 군인이 헌병대에 도착했다 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덕천 헌병중대에 증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만세시위대는 헌병대로 몰려 들어가 물러가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사다께 헌병대장이 욕설을 퍼붓자 박창도는 의자로 헌병대장을 때리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또(佐騰) 상등병이 권총으로 박창도를 쏘았다. 박창도는 복부에 총탄을 맞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사또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억센 힘으로 거머쥐었다. 목이 졸린 사또도 총에 맞은 박창도도 같이 죽었다고 한다. 이때 군중들이 헌병대로 밀고 들어가자 헌병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해 48명이 즉사하고 1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6명은 몸을 피했다. 부상당한 사람은 한봉진으로 어머니 쪽 외사촌 오빠였다고 한다. 헌병들은 48명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들것을 만드느라고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때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한봉진은 재빨리 도망쳤다. 뒤따라 헌병들이 추격했는데 거리로 들어갔을 때 조짚을 지고 오는 사람의 지개를 바꾸어지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니 헌병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간신이 피신할 수 있었다 한다. 그는 군청 뒤에 있는 장덕화의 집에 가서 숨었다가 학무리 계중학의 집으로 옮겨 살아났다. 헌병들은 살인마와 같이 들것에 시체를 실어내면서 총검으로 일일이 찔러보며 확인했다고 한다. 순국한 이들의 시체는 2마정 가량 떨어진 골짜기에 버렸는데, 김득홍 어른은 어머니와 같이 밤중에 그곳에 가보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외사촌 오빠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리저리 돌아 현장에 갔더니 48명의 시체가 그냥 내버려져 있더라는 것이다. 박연수 선생의 유족들과 동향인들로부터 들어 밝혀진 순국 순도자는 다음과 같다. 朴昌道, 桂仲成, 吉成龍, 張龍宣, 安吉甫, 朴必永, 吉錫璉, 朴都官, 李承植, 趙秉七, 方應哲, 李正必, 弓尙元(7회) 朴春日, 金永律, 金鳳保, 禹光卨, 朴道乾, 盧錫璣, 金昌涉부친 韓基斗부친 金昌涉부친 李官俊부친 方士麟부친, 方洛道부친 朴瑞鳳부친 김득홍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맹산 수정리 거리에 살고 있던 박검수 형제도 순국순도했다고 한다. 3·1운동 때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7명이다. 형을 제일 많이 산 사람은 교구장이었던 文炳魯로서 1년 6개월간을 고생하였다. 그리고 1년씩 복욕한 사람은 5인인데 方殷俊 朴應俊 張峻化 朴明源 弓處官 朴準祺 등이다. 독립운동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에 의하면 3·1운동을 극대화하고 모의했던 사람으로 文炳魯 吉應哲 朴기창 鄭德化 金致松(6회) 李寬國(4회) 方鎭垣 등을 꼽고 있다. 이들 중 교구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체포되지 않았고 학살당하지도 않았다. 다만 김득홍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원로들은 3·1운동의 일선에 나서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한다. 끝으로 김득홍 어른의 몇 가지 증언을 부기해 둔다. 1) 맹산 천도교의 연원 관계는 원래 방기창 도정이 지도하였다. 그 후에 조처항에게 물려주었고 조처항은 문병로에게, 문병로는 길응철과 박용완에게 물려주었다 한다. 따라서 포덕 70년대에는 길응철 연원과 박용완 연원이 맹산연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2) 맹산교구는 3·1운동 직후 헌병대에 점령되어 1년간 빼앗겼다. 헌병들이 물러가면서 경찰에게 인계하여 수개월간 경찰이 점령했다 돌려주었다 한다.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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