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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무인독립운동’ 주도한 성암 김재계 선생 유고집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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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무인독립운동’ 주도한 성암 김재계 선생 유고집 출판

동학혁명, 3·1운동과 천도교 3대 독립운동
주선원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 등 참석

  • 편집부
  • 등록 2024.09.24 11:50
  • 조회수 5,625
  •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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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김재계 선생 유고집 출판기념회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여하고 있다.

 

지난 20일 전남 장흥군의 지원으로 고 성암 김재계 선생의 유고집이 출판되었다.

이번 유고집 출간은 위의환 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위 전 이사장은 <천도교회월보>에 실린 선생의 글 1100장 분량의 원고와 멸왜기도사건을 보도했던 신문 기사, 관련 연구자들의 논문을 모아 유고집을 출간하였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억을 담은 글(천도교회월보 1934년 8월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갑오년도 이제로부터 40년 전이다. 내가 일곱 살 먹던 그해다. (…) 어느 날 정착 기포가 되었는데 우리 아버지도 행군 중에 같이 가시게 되었고 삼촌도 가시게 되었다. (…) 식이 끝나자 나팔소리를 따라 대군은 움직인다. (…) 나는 어쩐지 한결같이 가고 싶었다. 오리만큼 따라갔다가 (…) 야단하는 바람에 (…) 집으로 다시 돌아올 적에 퍽 섭섭하였다.”

 

한편 장흥 회진면 덕도 출신인 성암 선생의 아버지도 ‘농민군’이었다. 부친 김규현은 동생 양현과 농민군으로 참전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당시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장흥 석대들에서 농민군 2천여명이 희생돼 탐진강이 붉게 흘렀다. 성암 선생이 1902년 4월 동학에 입교한 것도 부친의 영향이 컸다. 

 

장흥 천도교 교구장이었던 성암 선생은 1919년 3월15일 장흥 대덕면 장날 천도교 교인들과 만세운동을 했다. 동료 11명과 함께 나주헌병대에 구속됐던 그는 광주형무소(교도소)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보석으로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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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원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이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주선원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은 축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암 김재계 선생께서는 1919년 3·1운동 때 천도교 장흥 교구장으로 계실 때, 천도교 대도주이시자 민족대표이신 손병희 선생의 지시에 따라 독립운동자금 500원을 거둬 서울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3.1독립선언서’를 장흥 전 지역에 전달하시고 장흥의 각 면 단위로 「만세시위운동」을 조직하신 후, 1919년 3월 15일에 장흥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총지휘하셨습니다.

선생께서는 3·1운동 후에 천도교 중앙총본부의 금융관장으로 재임하셨으며,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이 국권회복의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하시고 천도교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 「멸왜기도」를 주도하셨습니다.

 『무인멸왜기도운동』 은 당시 300만 전국 천도교인들이 동학경전의 「안심가」의 한 구절인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소멸하고 전지무궁하여 놓고 대보단에 맹세하여 한(汗)의 원수 갚아보세.」라는 내용을 기도문으로 만들어서 아침 저녁 기도식 때마다 낭송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김재계 선생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1938년 2월 왜경에 피체되시어 잔혹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일제는 중일전쟁 수행상 이 사건을 더이상 확대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70일 만에 김재계 선생을 기소유예로 석방하였지만,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석방되신지 얼마되지 않아 순국하셨습니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근년에 친일반민족 부역자들의 후예인 뉴라이트 인사들에 의해 나라의 정체성이 훼손됨으로써 만백성이 울분을 금치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위의환’ 직전의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장』 께서 김재계 선생 항일투쟁의 일생을 청사에 길이 남기기 위해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피맺힌 이곳 장흥에서 지난 몇 년동안에 걸쳐 흩어진 자료들을 정리하고 집필하여서 오늘 이 출판기념식을 갖게되니 심심한 감사의 정을 금치 못하면서 축사에 가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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