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칼럼]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행적 조사(1)뜻깊었던 의암성사 행적 조사 뜬금없는 계엄 선포와 국회의 해제 의결 이후 국내 정치가 소란했던 지난해 12월 6일 총부 사회문화관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는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과 독립유적지 조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평소 의암성사에 관한 논문과 글을 발표하는 입장에서 늘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조사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번 답사에 동행한 조사단은 교단을 대표해서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이 참여했고, 답사의 진행은 사회문화관의 최인경 관장과 최진영 차장이 맡았다. 연구자로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박성현 큐레이터와 필자가 참여했고, 유적지 사진 기록으로 독립운동 유적 담기로 잘 알려진 김동우 작가와 민족운동 유적을 사진으로 알려주는 신춘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동영상 자료는 교단 동영상 자료를 정리하는 김정호 선도사가 맡았다. 원활한 답사를 위해 박동호 여행사 대표가 참여했다. 조사단은 12월 6일 아침 6시 인천국제공항에 집결하여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정을 시작했다. 고베(神戶)에서 이틀간 조사하고, 교토(京都)로 이동해 하루, 다시 오사카(大阪)로 이동해 이틀을 조사하고 12월 10일 오후 22시경에 인천국제공항으로 도착한 힘든 일정이었다. 돌아오면서 이번 조사단에 참가해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탐방하는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했지만, 이번 조사가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의 절반밖에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올해에 마무리 사업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이번 조사단의 활동을 간략하게 전한다. ‘외유’는 성사의 큰 그림 의암성사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월신사를 보필해 강원도에서 도피 생활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으로 괴멸된 교단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인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는 동학 교단을 이끌 후계자로 의암성사를 지명했다. 이듬해인 포덕 39년(1898) 4월 5일 해월신사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그해 6월 2일 순도하였다. 이후 의암성사는 김연국 등의 반발을 수습하고 포덕 41년(1900) ‘경자설법’을 통해 교단을 안정화의 기초를 마련했다. 교단은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교인이 체포되어 순도하거나 영어의 몸으로 고통받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손천민도 순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암성사의 처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의암성사는 위기에 처한 교단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 발상을 했다. 하나는 피난 방법의 변화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 대세의 파악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외유(外遊)’였다. 성사는 외유를 통해 교단의 개벽을 꿈꾸었다. 성사는 이전에도 외유의 의견을 내비쳤으나 교단 원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포덕 42년(1901)에 교단의 주요 간부를 모아 외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辛丑(신축, 1901년) 三月(삼월)에 聖師(성사)가 門弟(문제)와 相議(상의)하야 갈으되, “往年(왕년)에 내 孫天民(손천민) 金演局(김연국)으로 더부러 相議(상의)하고 美國(미국)을 遊覽(유람)코저하다가 金演局(김연국)이 쫓지 않음으로 未果(미과)하엿거니와 이제 다시금 생각하여 본즉 將來(장래) 吾道(오도)를 世界(세계)에 彰明(창명)코저 할진대 今日(금일) 文明(문명)의 大勢(대세)를 觀察(관찰)하지 않으면 不可(불가)하다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내 이제 十年(십년)을 限(한)하고 外遊(외유)하야 世界(세계)의 形便(형편)을 歷探(역탐)코저하노니 諸君(제군)의 뜻이 어떠하뇨.” -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제3편 제6장, 27쪽.- 위의 글을 보면 의암성사는 처음에는 미국으로 외유하고자 했다. 이는 동학에서 추구하는 시천주의 세상과 일맥상통하는 민주공화정 국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사는 미국을 돌아보고 민주공화정을 우리나라에 채택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포덕 37년(1896)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미국을 ‘문명개화를 이룩한 모범적인 선진국’으로 칭송한 매체였다. (오영섭, 「『독립신문』에 나타난 미국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67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6∼7쪽 참조) 이미 성사께서는 포덕 34년(1893) 보은교조신원운동에서 “민당(民黨)”과 “민회(民會)”를 경험하기도 했다. 시천주의 교의와 합치하는 정치체제가 민주공화정이었다는 점과 당시 미국을 모범국으로 소개한 사회적 분위기 등이 성사의 미국 외유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의암성사는 포덕 42년(1901) 3월에 원산을 거쳐 미국을 가려 했지만, 원산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부산으로 내려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일본에 경유하는 동안 미국행 배표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에게 피해를 당해 경비 부족으로 부득이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機密 제85호, 「李祥憲ノ身元及擧動ニ關シ回申」, 『要視察韓國人擧動』3, 1904년 9월 7일자. “李祥憲始ノ各李圭完(或ハ元孫時秉)京畿道陰竹ノ人三四年前始メテ日本ニ遊フ其目的ハ世界漫遊ニあアリテ先ツ釜山ニ出ツルヤ二三日本人ノ欺ク所ト成リ汽船買入ノ約ヲ為シ代価貳萬餘圓ト定メ先ツじ若干手付金ヲ交付シ大阪ニ於テ現物受授ノ約ヲ結ヒ大阪ニ赴キタルニ現汽船ノ所在ヲ認メス全ク詐偽ノ行為ニ出タルヲ知リ空シク滞留中.” 참조) 당시 성사의 최우선 목표는 교단의 재건이었고 이를 위한 방법은 문명개화된 외국을 직접 보고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를 교단에 접목시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성사께서 일본에 머무른 이유는 당시의 일본도 미국 못지않게 근대문명을 접하고 배우기에 적합한 나라였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1901년 3월부터 1906년 1월까지였다.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1901년 3월부터 1903년 6월까지의 2년 4개월간이고, 1기는 1903년 6월부터 1906년 1월까지의 2년 8개월간이다. 중간에 중국 상하이 등을 방문하고, 일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대략 5년이다. 성사는 원래 10년을 목표로 외유를 하고자 했으나 그 연한을 채우지 못했다. 그 원인으로 성사의 명을 받아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이끌었던 이용구가 친일파인 송병준과 합동해 진보회를 일진회로 고치고 친일에 앞장서 동학 교단을 친일화하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성사는 이용구의 일진회와 단절하고,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어 근대적 종단으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교단은 일신하여 국내 제일의 종단으로 성장했다. 첫 방문지는 고베(神戶)교구 답사단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고베교구’였다. 고베교구는 일본에 있는 유일한 천도교 교구이다. 교베교구의 연원은 1944년 해방 직전 귀국하지 못한 고베의 독실한 강영태(姜永泰), 성사경(成仕卿), 김성오(金聖五), 하재술(河在述) 등 천도교인 4명이 중심이 되어 70여 명의 교인을 규합해 현재 고베교구가 있는 고베시 나가타구(長田區 背蜜峰)에 “천도교고베종리원(天道敎神戶宗理院)”을 설립하고 종교법인 등록을 마친 것에서 시작한다. 연원은 ‘동원포’이고, 현 교구장은 김태환(金泰煥)이다. 같은 시기 ‘오사카교구’와 ‘교토교구’도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일본에는 고베교구만 남았다. 특히 교토교구는 눌암 황태익의 4남인 황용수가 세워 교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음에도 없어져 안타깝다. 고베교구에 도착하니 사전에 조사단의 방문을 인지하고 있던 김 교구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강건한 인상의 김 교구장은 7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건강했다. 인사를 나누고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의 집례로 방문 참례식을 가졌다. 윤석산 전 교령은 인사말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고베교구와 김태환 교구장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일본어 경전을 준비해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답사에서 “고베교구에는 매 시일 20명 이상이 시일식을 보고 있으나 어려움이 있으며, 경전과 자료의 일본어 번역, 일본어가 가능한 교인이 와서 생활하면서 지도해줄 인사를 요청한다.”라며 해외 신앙의 어려움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서 윤석산 교령은 선물로 준비해 간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메달’과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아 간행한 『읽기 쉬운 천도교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을 기증했다. 또 윤석산 전 교령은 자신의 저서와 시집 등도 선물하였다. 김 교구장과 아쉬운 작별의 정을 나누고 조사단은 포덕 136년(1995) 1월 17일 고베대지진 유적이 있는 ‘고베항지진메모리얼파크’를 찾아 보존된 지진 흔적을 둘러보았다. 김태환 교구장은 고베교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충분해 교인 자제 중에 유학생이 있으면 교구에서 지원할 수 있고, 또 유학생이 아니더라도 고베교구에서 신앙을 함께할 동덕이 있으면 숙식과 경비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은 12월 8일의 시일식에 다시 고베교구를 방문해 시일식을 봉행하며 30여 교인들과 함께 천도교 종교행사인 시일 의식을 봉행하고 고베 교인들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동귀일체의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후등승장(後藤勝藏) 여관 터 2월 7일 오전에는 성사께서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을 찾아 나섰다. 기록에 따르면 후등승장 여관이 위치했던 곳은 고베시 중앙구 해안통 3정목(中央區 海岸通 3丁目)이었다. 이곳은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가 손병흠, 민기호와 같이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현재 주소는 고베시 추오구 사케마치도리 3정목 2-8이다. 기존의 자료에는 여관 자리에 미쓰비시 게스트하우스라고 되어있어 주위에 이런 이름의 건물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주변에 미쓰비시 건물은 찾을 수 없었다. 해안통 3정목 일대의 가게를 돌아다니며 조사단이 확인한 결과 당시 성사가 흐등승장 여관은 현재 “더 레지던스 모코마치 카이간도리(The Residence Motomachi Kaigandori)”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사가 머물렀던 후등 여관은 고베항 바로 앞에 있는 숙박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유물로 옆 골목인 해안통 2정목에 있는 ‘고베항 평화의 탑’이 있었다.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고베항으로 들어왔고, 오자마자 이 여관에 투숙했다. 성사가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니시무라[西村]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은 1882년 8월 9일 박영효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여관이다. 박영효는 메이지마루(明治丸)을 타고 일본으로 오는 동안 배에서 태극기를 그렸고, 이를 게양한 곳이 니시무라 여관이다. 따라서 니시무라 여관은 해외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니시무라 여관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건축되었고 1층에 니시무라사진연구소가 있어 예전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시무라 여관의 주소는 고베시 중앙구 영정통 3정목(神戸市 中央区 栄町通 3丁目) 2-12이다.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노동자상 7일 오전의 후등승장 여관 답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고베의 유럽풍의 거리인 기타노이진칸을 둘러본 후 고베철도 부설 공사 중에 사망한 조선인노동자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조선인노동자상은 고베시 효고구 에게야마 공원 북쪽에 있다. 고베철도는 이곳 에게야먀[會下山] 공원 옆을 지나는데 고베 남쪽 바닷가와 그 반대쪽 아리마 온천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고베철도 공사는 산을 뚫어서 터널을 만드는 난공사였다. 포덕 68년(1927)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 중에 희생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손과 관련 단체, 그리고 뜻있는 일본인들이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희생자를 조사하고 추모하는 모임)을 만들어 포덕 137년(1996) 11월 노동자상을 건립했다. 노동자상은 곡괭이를 어깨에 진 깡마른 작은 체구의 모자를 눌러쓴 채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그렸다. 조사단은 소주를 한잔 따르고 성령출세의 심고를 올렸다. 노동자상에 붙은 안내판에는 포덕 68년(1927) 8월 1일부터 포덕 77년(1936) 11월 25일까지 13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터널 작업 중에 희생되었다고 희생자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이 공사에 참가한 조선인 노동자는 1,500명에 달했으며, 확인된 13명 이외에도 더 많은 조선인이 부상당하거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노동자상 아래에는 이들이 만든 터널을 오가는 철마가 쌩쌩 달리고 있다. (박현국, 「고베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을 기억하는 동상 –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노동자 동상」, 『오마이뉴스』, 2018.6.22. 참조) 윤동주와 정지용 8일 아침에 고베를 출발해 1시간 30분에 걸쳐 교토로 이동했다. 조사단은 교토로 와서 먼저 도시샤(同志社)대학을 찾았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와 정지상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있다. 필자가 포덕 134년(1993)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윤동주 시비만 있었는데 이후 포덕 146년(2005) 정지용의 시비도 건립되었다. 「서시」로 잘 알려진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국내로 들어와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연희 재학 중 『소년』에 시를 발표해 등단했다. 포덕 83년(1942)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으로 유학 왔으나 6개월 만에 중퇴하고 교토의 도시샤대학 문학부에 전학해 수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포덕 46년(1945)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7세로 옥사했다. 사후 정지용 등이 그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시비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향수」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해월신사의 외손주인 정순철도 옥천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거주해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보고를 거쳐 포덕 44년(1923)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휘문보고 시절부터 시를 발표했으며. 1929년 귀국 후 휘문보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영랑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을 문단에 등단시켰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시비에는 그가 일본에서 생활했던 지역을 그린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다. 시비는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정지용기념사업회에서 힘을 모아 걸립했다. 조사단은 찾은 시비 옆에는 작은 태극기가 꽂혀있어 뭉클했다. 식민지 시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뇌하던 청년 시인 윤동주와 향토색 짙은 조국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시를 쓰던 정지용을 기리며 일행은 심고를 했다. 고노에중학교(近衛中學校) 아침부터 흐린 날씨가 오후에 비를 뿌렸다. 비를 맞으며 조사단은 성사께서 유학생을 입학시켰던 고노에 중학교를 찾았다. 고노에 중학교는 지금은 시립중학교인데 메이지정부가 수립된 후 ‘교토부립제1중학교(京都府立第一中學校)’로 설립되었다. 이 중학교는 의암성사가 교단의 발전과 나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보낸 학교이다. 1차로 포덕 43년(1902) 3월 1차로 교인 자제 24명을 선발해 보냈고, 포덕 45년(1904) 3~4월의 2차로 4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입학시켰다. 이때에는 교인 자제뿐만 아니라 교인이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인재도 선발했다. 성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총 64명의 유학생을 파견한 곳이다. 이때 파견된 유학생으로는 제2세 교조 해월신사의 아들 최동희를 비롯해 정광조, 이인숙 등의 동학교인 자제와 춘원 이광수 등 전국에서 선발된 인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노에 중학교는 교토대학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유학생들은 교토대학을 드나들며 청운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둘러보고 정문 옆 화단에서 이 학교가 교토부립제1중학교이었음을 알려주는 2개의 흔적이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헤이안[平安] 건도(建都) 1200년을 기념해 “각목백선선정수목(名木百選選定壽木)” 안내판에 “本校(본교)의 前身(전신)이었던 旧制京都一中(구경도일중, 明治(명치) 30年~昭和(소화) 4年)”이라는 구절과 다른 하나는 “소화 49년 9월 경일중낙북고교동창회건지(京一中洛北高校同窓會建之)”라고 세운 기념석이었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한 바퀴 둘러보고 운동장도 살펴보면서 당시 유학생들의 심정에 느껴보고자 했다. 쇼고인마치(聖護院町) 8일 오후에는 교토에서 성사가 거주했던 쇼고인마치 일대를 찾아 나섰다. 쇼고인이 있는 쇼고인마치는 의암성사가 교토에서 거주했던 동네이다. 성사는 포덕 44년(1903) 6월에 이곳으로 이사했다. 교토시 사쿄구 쇼고인나카마치에 있는 쇼고인은 현재 본산수험종(本山修験宗)의 총본산(総本山) 사원이다. 쇼고인의 문적사원(門跡寺院)은 헤이안 시대에 창건된 사원으로 일왕과 황족이 거주하였던 사원이다. 일본 왕실에 큰불이 났던 1788년과 1854년에는 일왕이 임시로 거쳐한 ‘임시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쇼고인은 메이지왕이 궁궐을 나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쇼고인마치에서 성사가 어디에 거주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쇼고인마치 일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사는 이곳 쇼고인마치의 건물을 빌려 머무르면서 동시에 유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쇼고인마치에서 고노에중학교까지는 두세 블록 밖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사는 이곳에 거주지를 만들어 생활하면서 함께 유학생들이 지낼 수 있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사단은 쇼고인의 문적사원 앞에서 골목길을 따라 고노에중학교까지 걸어보니 시간은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필자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당시 수십명의 유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웃고 떠들면서 등하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조국과 교단의 앞날을 위해 준비하던 유학생들의 강렬한 눈빛이 떠올려 졌다. 당시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성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성사는 이곳에서 유학생들을 지원하다 포덕 45년(1904) 6월에 도쿄로 이주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天ケ瀨橋]와 윤동주 시비 9일 아침은 화창했다. 조사단은 교토의 우지시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의 유적을 찾았다. 조사단의 김동우 작가는 이곳을 꼭 가보아야 한다고 건의해 일정에 포함되었다. 윤동주는 귀국을 결심하고 도시샤 대학 친우들과 송별회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 윤동주는 이곳 강변에서 불을 지펴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당시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친구들이 찍은 사진이 친구의 앨범에서 발견되었다. 윤동주는 당시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자 ‘아리랑’을 불러 주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곳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포덕 84년(1943)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후쿠시마 형무소에서 포덕 86년(1945) 2월 16일 옥사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는 윤동주의 생의 마지막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다. 윤동주가 이곳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 ‘시인 윤동주의 기억과 화해의 비’이다. 이 비는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건너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약 5분 걸으면 왼쪽 길가에서 서 있다. 이 기억과 화해의 비는 2004년 유엔에서 5월 8~9일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추억과 화해의 時(시)”가 결의된 후, 일본에서 윤동주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시인 윤동주 기념비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포덕 158년(2017) 10월 18일에 결실을 맺었다. 이 비에는 “새로운 길”이 새겨져 있다. 새로운 길 - 尹東柱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유적을 보고 조사단은 마지막 조사를 위해 오사카로 향했다. (계속)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
포덕 166년 3월 30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믿음과 계명"설교 : 믿음과 계명(종무원장 오암 이범창) -
축시축 시 준암 박인준 교령님 취임식에 부쳐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타고 꽃비 뿌리며 내려온 선녀가 봄바람을 몰고 오니, 겨우내 얼어붙었던 용담물이 스르르 녹아내리네. 이에 잠자던 용이 기지개를 켜고 날을 준비를 하니, 학발노인[(鶴髮老人- 학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신선 )]이 용마에 오르려 하네! 하늘은 서광(瑞光)을 비추고 산천초목은 우쭐우쭐 춤추며 온갖 새들은 시천주 소리로 울어대니 천지가 진동하네! 용마에 오른 신선이여! 천지와 동서남북, 오대양 육대주를 날아다니며 한울님 말씀을 널리 알리소서! 마른나무에 새싹이 나며, 꽃이 피도록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고 심화기화로 창생을 살리소서! 시천주 조화정으로 각자의 마음과 몸을 살리게 하고, 영세불망 만사지로 세상을 건지고 만인을 살리게 하소서! 용마에 오른 신선이시여! 구름이 용을 따르듯[(雲從龍-운종용)]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 [(風從虎-풍종호)]성인의 덕화를 베푸소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운암 오제운(전북 신태인교구장) 作 -
천도교여성회본부 제22차 정기전국대의원 총회 및 전형위원회천도교여성회본부는 포덕 166년 3월 25일 오후 1시 30분 중앙대교당에서 제22차 정기 전국대의원 총회를 개최했다. 이번 총회에서는 포덕 163년부터 165년까지의 여성회본부 사업 경과를 보고하고, 차기 회장을 선출하는 중요한 절차를 진행했다. 개회의식에 이어 의안상정에 들어가기 전 임시의장에 박차귀(부산시지부 비례대표)고문이 선출 되었다 후보로는 본부 김명덕 부회장과 박혜정 총무가 올랐으며, 후보자들의 신상발언을 들은 후 비밀투표를 실시한 결과 수정당 김명덕 후보가 제43대 회장으로, 수경당 이미희, 인의당 박영화가 감사로 당선되었다. 이튿날인 3월 26일 오전 11시, 여성회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전형위원회의에서는 정심당 이정녀, 진경당 홍순억이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중앙위원 49인을 선출하고, 그중 21명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번 총회를 통해 새로운 여성회본부 임원이 구성되며,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된다. -
천도교 대학생단, 일본 성지순례 진행천도교 대학생단은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4박 5일 동안 일본 오사카, 교토, 고베 일대에서 성지순례를 진행했다. 이번 성지순례는 지난해 가을에 진행된 국내 성지순례에 이어, 국외 성지를 방문하며 천도교의 역사와 한국의 아픔을 되새기고, 과거를 잊지 않으며 미래를 이어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첫날, 오사카에서 천도교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다 성지순례의 첫날인 2월 13일, 참가자들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천도교의 중요한 유적들을 탐방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오사카 쓰루하시 역 부근에 있는 종리원 터였다. 종리원은 천도교의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한반도 외의 동포들에게 천도교의 뜻을 전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의암성사께서 일본에 거주하던 숙소를 찾아, 교토와 오사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당시의 흔적을 되새겼다. 오사카 우메다역도 방문지에 포함되어, 의암성사께서 독립운동을 위한 교통 거점으로 사용한 이 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둘째 날, 윤동주 시인 기념비와 이웃 종교와의 만남 둘째 날인 2월 14일, 성지순례 참가자들은 교토의 도시샤 대학을 찾아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를 방문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그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은 그를 기리기 위해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후 참가자들은 일본 성공회 유시경 신부님과 간담회를 통해 이웃 종교를 이해하고, 천도교와 성공회 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으로는 의암성사께서 일본 체류 초기 거주하셨던 곳의 대략적인 위치인 쇼고인몬제키에 방문하며, 일본에서의 천도교 역사를 돌아보았다. 교토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니시혼간지를 방문했다. 일본 정토진종 본산인 니시혼간지는 일본 불교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로, 일본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다. 참가자들은 사찰 내부를 둘러보며 일본 불교의 신앙과 전통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천도교와 불교 간의 역사적 연관성을 살펴보며 종교 간의 교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셋째 날, 일본 문화 체험과 자유시간 셋째 날인 2월 15일은 자유 일정으로, 참가자들은 각 팀으로 나누어 일본의 문화와 음식을 체험했다. 오사카성을 방문하거나 일본 전통 음식을 맛보는 등 일본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저녁에는 일정을 되돌아보며 간담회를 진행하고, 성지순례가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이 직접 자료를 준비하고 공부하며 이야기를 나누니 머리와 마음에 잘 새겨져, 일방적 강의식 순례보다 뜻깊게 다가온다는 만족감도 있었다. 마지막 날, 고베에서의 종교 체험과 지진 메모리얼 방문 마지막 공식 일정은 2월 16일 고베에서 진행되었다. 고베 교구는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자진 성금을 모아 설립한 천도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그곳에서 시일식을 봉행했다. 또한 고베항과 고베 지진 메모리얼 파크를 방문하여,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의 피해와 그 당시 한국인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겼다. 마지막 일정으로 이쿠타 신사를 방문하여 일본 전통 종교 체험을 통해 대학생단 간의 소중한 인연을 기원하며 성지순례를 마무리했다. 성지순례의 의미와 참가자들이 느낀 점 성지순례를 마친 참가자들은 이번 여행을 통해 천도교의 역사와 신앙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신앙 생활을 다짐했다. 참가자들는 성지순례 이후, "성지에 담긴 이야기와 정보를 듣고, 천도교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며, "이번 성지순례를 계기로 스스로 신앙하고, 탐구하며 전진해 나갈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이번 성지순례는 천도교의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며 신앙을 새롭게 다지기 위한 중요한 시간이었으며, 대학생단은 앞으로도 국내외 성지를 순례하며 천도교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 나갈 계획이다. -
일본 고베교구, 공연 같은 시일식으로 함께 하는 공간고베교구는 언제 방문해도 내 집처럼 느껴진다. 1986년 8월 처음으로 고베교구를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 20여 차례 정도 드나들었다. 그렇다 보니 고베교구는 내 집 같은 생각이 먼저 든다. 3월 2일 오전 9시 50분경 고베교구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아산교구에서 일본에 있는 유일한 고베교구를 방문하고 합동 시일식을 갖기로 하였다. 필자가 아산교구에서 일제강점기 중국, 일본, 미국, 쿠바 등 해외 교구와 관련해서 설교한 적이 있었고, 이때 일본의 유일한 천도교인 고베교구를 방문하고 의암성사 유적지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제안한 바 있었다. 아산교구에서는 이 제안에 대해 적극 찬성하고 지난해 말부터 준비하였다. 그 결과 8명이 동참하였고, 그 외 4명이 더 참가하여 모두 12명이 고베교구 합동 시일식에 참여하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른 시간, 고베교구는 고즈넉하였다. 오전 10시에 방문한다고 해서 그런지 문은 닫혀 있었다. 모두 처음인지라 가랑비를 맞으면서도 교구를 둘러 보고 사진도 찍고, 흥분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김태환 교구장에게 도착하였음을 알렸고, 잠시 후 자전거를 타고 교구장이 도착하였다. 교구장이 도착하기에 앞서 아산교구 참여자 일동은 교구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교구장과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교구실로 들어갔다. 시일식 시간이 다가오자, 고베교구 교인들도 한 분, 두 분 모였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이사는 나누는 시간은 함께 하는 동덕들이었다. 여성회원들은 따뜻한 오차를 준비해서 나누어주었다. 시일식에 앞서 필자는 고베교구를 방문한 아산교구 교인들을 한분 한분 소개하였다. 아산교구를 대표해서 차상근 경리부장은 고베교구의 따뜻한 환영에 감사한다는 인사를 전했다. 고베교구는 시일식에 앞서 모니터 영상에 따라 건강체조를 5분 정도 함께 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연로한 교인들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모두 건강하기를 기원하였다. 오전 11시 시일식을 알리는 작은 종소리가 교당 안을 그윽하게 울려퍼졌다. 시일 집례는 김청길(金淸吉) 동덕이 맡았다. 식순에 따라 청수봉전은 김용부(金勇夫) 동덕이 하였다. 일반적으로 청수봉전은 대부분이 여성 동덕이 하고 있는데, 고베교구는 이날 시일식에서는 남성이 하였다는 점에서 특이한 모습이었다. 앞으로 여성 동덕이 아닌 남성 동덕도 청수봉전에 참여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남녀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것도 동학, 천도교가 추구하는 평등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식 심고는 발성으로 하였다. 모니터의 심고문을 함께 낭독하면서 시일을 함께 하는 의미를 되새겼다. 반주 음악에 맞추어 주문3회병송을 한 후에는 김문자(金文子) 여성 동덕이 경전봉독을 하였다. 경전봉독은 『용담유사』 「도수사」 후반부를 하였는데, 먼저 한글로 이어 일본어로 따라 봉독하였다. 이 역시 이체로운 모습이었다. 아산교구에서는 우리말 즉 한글로 된 경전 구절을 읽으면 되었지만, 두 가지 언어로 경전봉독을 한다는 것은 경전의 원뜻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경전봉독을 하던 중 김문자 동덕은 두 가지 언어로 하다보니 쉽지 않았던지 “아이고 어렵다”다고 한마디 하였다. 모두들 웃음으로 화답했지만, 평소 일본어를 사용하는 현지에서는 한글로 경전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 천덕송합창은 「대신사환원기도가」를 반주에 따라 함께 불렀다. 8일 뒤인 3월 10일이 대신사환원기도일이기 때문에 미리 익히기 위함이었다. 설교는 김태환(金泰煥) 교구장이 맡았다. 맹암 정의맹 전 연원회 의장이 포덕 160년 5월에 설교한 바 있는 「오관 실행과 행복」이라는 글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함께 공유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중간중간 보완 설명을 하면서 설교를 마쳤다. 이어진 천덕송합창은 「위령송」을 한목소리로 불렀다. 마치는 심고는 발성이 아닌 묵성으로 하였다. 시일식을 마친 후에는 곧바로 고베교구와 아산교구 교인 등 시일식에 참석한 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고베교구는 시일식을 마친 후에는 교구에서 점심을 함께 하였다. 평소에는 시일식에 참석한 동덕들은 미리 주문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나누었는데, 이날은 아산교구 교인들이 참석하는 관계로 여성회원들이 직접 마련한 소고기국, 떡, 김치 등을 준비하였다. 보다 풍성한 점심이었다. 책상을 붙이고 의자를 옮기면서 책상은 바로 식탁으로 바뀌었다.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르고, 자리를 잡았다. 이날은 초밥 도시락이었다. 매월 첫째 주 시일은 초밥 도시락으로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도담을 나누고 있는데, 마침 3월 2일 첫째 주인지라 신선한 초밥으로 함께 정을 나누었다. 처음에는 좀 어색하였지만, 우리말을 잘하시는 동덕이 있어서 모두 유쾌한 식사 시간이었다. 고베교구를 방문한 아산교구는 파래김을 선물로 전달하였다. 합동시일식을 마친 아산교구 동덕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음 일정을 위해 오후 1시 고베교구를 떠났다. 고베교구 동덕들도 아쉬운 마음에 떠나는 아산교구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베교구는 해마다 한국을 찾아 수도원에서 연성을 하고 대교당에서 시일식을 함께 하고 있다. 다음에 한국에 오면 아산교구에서 함께 시일식을 봉행하고 정을 나누기로 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앞으로 한국에서 보다 많은 교인들이 고베교구를 방문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계기를 통해 한국에서도 교구 단위로 고베교구에서 합동시일이 봉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고베교구에는 교당 내에 그동안 활동하였던 사진을 게시해 놓고 있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하고 답사하였던 사진뿐만 아니라 금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대학생단이 오사카·교토·고베 일본 유적지 탐방할 때 고베교구를 방문하고 시일식을 마친 후 촬영한 기념 사진, 그리고 지난해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아 고베, 오사카, 교토 일대의 의암성사 유적지를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일행들의 사진도 함께 있었다. 이외에도 고베교구 교인들이 제106주년 3·1절을 맞는 3월 1일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효고현본부에서 개최한 3·1절 기념식에도 참석하였는데, 이때 촬영한 기념 사진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아산교구 일행은 이번 합동시일식 외에 의암성사가 머물렀던 교토(京都)의 쇼고인(聖護院) 일대와 의암성사가 포덕 44년경 천도교 청년을 유학시킨 고노에(近衛)중학교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현장이며 재일 한인의 역사와 삶을 기록하고 있는 교토 우지시(宇治市) 이세다쵸(伊勢田町) 우토로평화기념관(ウトロ平和祈念館)을 관람하고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등을 둘러보았다. 글, 희암 성주현(신인간 주필) -
대학생단 임기를 마치며모시고 안녕하십니까 포덕 165년 제44대 대학생단 천도교청년회 대학생단 단장이었던 조영은입니다. 단장직을 수행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청년회 활동을 하게 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2020년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천도교 대학생단 활동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천도교를 시작한 건 이미 천도교를 하고 계신 이모와 이모부의 영향으로 봉황각 어린이 캠프에 참여했던 계기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또래 동덕들과 함께 저희들의 눈 높이에 맞춰서 활동을 진행해 주셨던 기억이 아직까지 나는 것 같습니다. 이 계기를 시작으로 매년 여름, 겨울마다 한울 나눔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생단으로 편입된 것 같습니다. 신입생이 되고 대학생단 활동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 19의 여파로 학교는 물론 대학생단 활동도 무기한 연기되는 것을 느끼며 많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42대 단장이셨던 민경 동덕과의 연락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43대 대학생단의 부단장을 맡아 많은 선후배 동덕들과 자리를 가지며 천도교 대학생단만의 색깔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 계기로 44대 대학생단 단장이 되어 많이 부족하지만 1년간의 시간 동안 더 많은 청소년 동덕들이 대학생단이 될 수 있게,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덕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따스한 봄날 한강교구에서 진행한 정기모임부터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대학생단과 청년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치렀던 어린이날,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는 천도교 어린이 동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경기한울학교, 여러 종교 교류 캠프 등 다양한 경험들과 전국의 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작년은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기념해 많은 기념식과 기도식에 대학생단이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현도기념일과 인일기념일에 합창과 공연을 하고 사회문화관에서 진행했던 수운대신사 피체노정과 봉사활동에도 참여해 단순히 정기모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참여 활동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뜻깊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볼 수 있었던 대학생단 송년회와 청년회원들과 함께 진행한 부산에서의 개벽제까지 정말 쉼 없이 많은 활동들을 진행했던 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값지고 소중했습니다. 단장이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때로는 책임감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고, 생각처럼 되지 않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했던 동덕들과 선배, 후배 동덕들이 있었기에 이 모든 순간이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함께 웃고, 고민하고, 때로는 어려움을 나누며 보낸 시간들이 앞으로도 제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단장에서 물러나지만, 청년회원으로서, 대학생단을 졸업한 선배로서 후배분들이 성장하고 더 많은 교인들로 채워지는 대학생단을 기대하며 뒤에서 열심히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대학생단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 힘이 되어드릴 수 있는 선배가 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모든 동덕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포덕 166년 3월 27일 44대 대학생단 단장 조영은 심고 -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 100주년 기념 안내판 설치천도교중앙총부는 지난 3월 27일 시민과 방문객을 위해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 100주년 기념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안내판은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 설치되었으며 중앙대교당 건립 100년을 기념하며, 정보 제공을 넘어 점자 안내, 음성 안내 기능, 그리고 태양광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시스템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22년 건립된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종교·문화적 유산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이번 안내판 설치는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누구나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안내판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기가 포함되었으며, 음성 안내 기능을 추가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태양광을 활용한 음성 인식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천도교 관계자는 “이번 스마트 안내판이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역사적 문화유산을 더욱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
한 사람, 한 사람의 걸음이 역사가 되어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님, 천도교신문에서 찾아뵙습니다. 그동안 교단의 여러 행사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를 들려주셨습니다. 합창단 소개 부탁드릴게요. 우리 합창단은 역사가 깊습니다. 예전에 대교당 시일식을 중앙총부에서 직접 집례를 맡아서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일식 집례를 서울교구로 이관하면서, (그게 한 40년 정도 됐을 거예요.) 그때부터는 교구 내에서 시일식 합창단을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서 서울교구 합창단이 만들어졌습니다. 합창단 결성 초기에는 지금처럼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관심 있는 교인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정도였어요. 그때 서영모 교수님 등 몇몇 분들께서 지도를 해주시면서 명맥을 겨우겨우 유지해 왔지요. 그러다가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교단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단 밖에서도 활동하곤 합니다. 고양시에서 속해 있는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주관하는 <남북 평화 합창제>(현 평화합창제)에 참가하게 된 계기로 해마다 참가하고 있습니다. 평화합창제 때 많은 분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무대였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합창제에 참가하시게 되었나요? 평화합창제에는 저희 삼경합창단이 제2회 때부터 참가하게 됩니다. 주최 측인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함께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 주셔서 참가하게 되었는데, 다른 단체들은 모두 합창단 이름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때 우리도 합창단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단원들로부터 공모를 해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저희 합창단이 뜻하는 바는 해월 신사님의 ‘성, 경, 신’ 사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다짐을 해보자는 뜻으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해마다 평화합창제에 참가하셨다고 하시던데, 합창단의 연간 주요 사업으로는 어떤 일이 있나요? 저희가 제2회 평화합창제 때 처음 참가하게 되어 벌써 다섯 번이나 참가했네요. 저희의 활동은 교단 내의 행사와 시일식 등에 노래하는 것이 주요 활동입니다. 이를테면 기념 공연이 있는데, 서울교구 결성 기념일에 하는 경축 공연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외부 행사로써 평화합창제와 KCRP에서 주최하는 평화 음악제와 같은 종교축제에 초청 받아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좀 바빴습니다. 작년에는 특히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받아서 다녀오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연습을 또 별도로 더 해야 하니 바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합창단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지금 저희 삼경합창단에 등록된 단원은 한 30여 명 되고요. 공연에 참여하는 분들이 매번 나오지는 못하지만, 정기 연주회나 평화합창제 같은 때는 좀 더 모이곤 하지요. 각자 개인 생활들이 있어서 한 15명 내외가 나와 대교당 시일식에 함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열심히 활동해 주는 단원들이 있어서 고맙고 또 서로서로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단장님은 언제부터 합창단 활동을 하셨나요? 단원들과의 화합은 잘 이뤄지고 있나요? 제가 중앙총부에서 종무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중앙감사의 임기까지 마치고 나니까 포덕 160년이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합창단의 단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 5~6년 되었는데, 서로가 잘 맞춰가면서 활동하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모두가 좋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지지요. 가장 보람이 된다고 느끼실 때는 언제예요? 매주 시일식에 합창을 하고 요즘은 저희가 엔딩 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시일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저희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시고 박수를 쳐줄 때, 이분들이 이 노래를 함께 들어주고 계시는구나, 그 마음을 느낄 때 가장 보람 있고요. 대외적으로는 우리 삼경 합창단이 천도교를 대표해서 외부로 공연을 나갈 수 있다는 것에서 단원들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참 보람이 있죠. 다른 종단 합창단이나 일반인들이 삼경 합창단이 노래하시는 모습을 보고 반응은 어떻던가요? 노랫말이 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우리도 다른 종단의 노래를 들으면 또 마찬가지잖아요. 그 종단의 특성이 있고 노랫말이 와닿지 않을 때도 많지요. 작품집을 만들긴 하지만 공연장이 어둡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는 가사 전달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같은 경우에는 가사를 화면에 보여주면서 노래를 했는데, 그 부분을 참 좋게들 봐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방식이 합창단의 시각적인 효과를 분산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들이 좀 있었는데, 그 자리는 경쟁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각 종단 간 서로를 알게 되는 면에서는 도움이 됐다는 평이 있더라고요.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에게 가사를 보여줌으로써 노래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팔 절’이라는 대신사님의 말씀을 노래 중간에 낭독하는 형식을 가져보기도 했는데, 관객분들이 집중해서 듣고 또 관심도가 높았어요. 천도교라는 우리 종단이 참 생소한 것처럼 합창단도 마찬가지로 생소하다고들 해요. 그래서 저희가 합창하면 상당히 고무적으로 관심 있어 하고 천도교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점에서 저희가 느끼는 보람, 또 우리가 왜 이걸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기독교나 불교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대상이 내 안의 한울님이라는 점에서 좀 다르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음악에서도 그런 게 확연히 드러날 것 같아요. 저희가 평화합창제에 1회 때부터 참가한 것은 아닌데, 2회 때 참가하면서 분위기가 ‘천도교 합창단에서 이런 노래를 하는구나’하고 관심 있게 봐주시는 걸 느꼈어요. 선곡도 가곡을 선택해서 갔지요. 그런데 그다음 해에 다른 종단에서도 대중적인 노래로 자유곡을 선정해서 부르시더군요. <남북 평화 합창제>라는 주제에 맞게 남북 문제를 놓고 그 주제에 맞는 곡을 갖는다는 게 상당히 어렵잖아요. 정치적으로도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고요. 작년에는 우리가 ‘임진강’이라는 북한 가요를 불렀는데, 의미가 깊은 곡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아쉬운 건 다른 종단들은 그러한 것들을 매머드급 합창단을 구성하는데 우리는 한정된 인원이니까 거기에 다른 종단 합창단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인원이니까, 주최 측에 우리가 좀 더 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좀 아쉽지요. 다른 종단에는 청년합창단도 있지 않나요?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분들도 종단 별로 차이가 좀 있겠어요. 다른 종단의 경우는 청년들도 많은 데다가 단일 교회나 교구에서 나오지 않고 연합으로 나오니까 뭐 한 두세 개 교회만 모여도 한 5~60명이 되죠. 불교 같은 경우도 사찰 두 군데면 한 60명 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도 그 규모를 좀 키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합창제 공연을 했던 아람누리 극장이 1200석인데요. 그중 1층만 사용했는데, 한 7~800석 정도 되는 그 공간이 꽉 찰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또 우리 천도교는 일산에 교구가 없고 그러니까 교인분들이 관람하러 오시기도 어려워요. 올해는 11월 4일 날로 예정이 돼 있는데 많은 분들이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올해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올해도 마찬가지예요. 다음 달에 있을 교구 창립 기념일 날 공연을 앞두고 있고, 11월 4일에 있을 평화합창제 준비도 해야 하고 그 외에는 교단에서 기념일 날 요청이 있는 경우에 저희가 준비된 대로 응하는 것들이 예정돼 있고 지방 교구 행사에도 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합창단 단장으로 활동하시기 전에도 교단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학생회 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던 것 같아요. 학생회 때는 중고등부 부장을 맡았었고 청년회에 와서는 본부에서 부회장을 했고요. 1981년도에 서울교구 청년회를 재창립했어요. 그때 초대 부회장을 했고 지금은 환원한 정학현 동덕이 그때 초대 회장을 하고 그다음에 제가 청년회 서울시지부 회장을 했지요. 교단의 역사와 함께해오셨네요. 교회에 처음 나오던 날 기억하세요? 수운회관 낙성기념식이 있던 날이었어요. 그 옛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지요. 4월 5일 날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손을 잡고 나와서 지금까지 교회에 나오고 있으니까 그때부터 친구들은 여기서 만난 교회 친구들이 다 전부예요. 어릴 때 천도교 집안이라는 건 언제 아셨어요? 우리 집보다는 우리 외갓집이 천도교를 더 먼저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는 천도교라기보다도 천도교청우당 쪽에 계시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고, 신앙보다도 청우당 활동을 하시면서 근근이 경전만 혼자서 읽으셨던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외갓집은 적극적으로 천도교를 했던 집안이고요. 북에서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외숙이 우리 어머니의 오빠 되시는 분인데 어머니 살아생전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이 천도교에서 하는 야학 활동을 하셨고, 우리 어머니도 그 삼촌을 통해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그러더군요. 어머니는 천도교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데 천덕송 교훈가 노래를 알더라고. 그리고 당가를 아셨어요. 송가집에 있는 청우당가 ‘울려라 개벽 소리’ 하는 그 노래도 우리 어머니가 아시더라고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외숙이 청우당 쪽에 계시면서 영향을 준 것 같고 우리 외할머니한테도 나중에 물어보니 외숙이 공부도 잘했대요. 삼촌은 6·25 때 반공 쪽으로 가면서 구월산 유격대 쪽에 합류해서 문산 어디쯤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봤다는 얘기가 고향 분들이 전한 마지막 행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확인해 봤는데 더 나오질 않아요. 예전에 국방부에서 유전자 검사를 하고 등록했는데, 아직 못 찾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천도교에서 시일식을 하던 모습은 기억하세요? 생각이 나죠. 1970년쯤일 거야. 아버지하고 기념일에 나오면 그때는 빵을 줬어요. 근데 할아버지들, 아버지들이 빵 받아서는 당신들이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갑니다. 기념일 날은 이북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서로 얼굴 보는 날이었어요. 그러면 빵 받은 걸 다 나한테 준단 말이야. 내가 어린애였으니까. 그러니 빵을 이만큼 받아서 집으로 가면 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빵 가지고 온다고. 그때도 지금처럼 교회가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교인은 더 많았는데 성미가 지금처럼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돌아보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참 따뜻하고 재미있었어요. 중학교 1학년 소년이 처음 아버지하고 같이 여기 왔을 때의 첫 느낌이 혹시 기억나세요? 그때 우리 선배들이 처음 교회에 나온 친구들에게 일일이 주소를 받더라고요. 전화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죠. 그다음 주 토요일 날인가 집으로 엽서가 왔어요. 난생처음으로 내 앞으로 온 엽서예요. 그런 걸 처음 받아본 거야. 교회 학생회 집회를 알리는 통지문이었어요. 선배들이 전부 손으로 써서 보내준 거야. 그날 처음 온 친구들한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거 보고 나오게 된 거야. 중학교 1학년이 뭘 알았겠어요. 주문도 몰랐지요. 그때 나한테 주문을 가르쳐줬던 선배가 안상숙 선배인데, 지금도 가끔 나오세요. 그때는 시일날 아침에 중고등학생들이 청수를 모셨어요. 지금의 서울교구 여성회 실에서요. 그땐 거기가 다다미방이었어요. 10시부터 10시 50분까지 1시간 정도 주문을 한 105회 묵송을 하고, 경전 한 편을 한 사람이 다 읽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읽어 나가요. 그렇게 해서 용담유사 한 편을 읽고 나면 시일식 보러 들어가죠. 처음 나왔는데 주문을 모르잖아. 남들이 하는 거 마음속으로 따라 읽어요. 그렇게 주문을 배운 거죠. 그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선배들이 많았죠. 학생회가 일도 많았고 일을 참 잘했죠. 학생회 예술제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이끌림, 중학교 1학년이면 어리잖아요. 자기에 대한 존중 이런 것도 좀 느끼셨겠어요? 천도교 청년회의 일원으로, 학생회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람들하고 같이 뭔가를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더 컸겠어요. 그랬죠. 그리고 그때는 포크송이 유행했잖아. 천덕송보다도 선배들이 통기타 가지고 포크송 하니까 그 포크송 배우는 게 재밌잖아. 그래서 토요 집회를 하고 나면은 천덕송 부르지만, 집회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통기타를 중심으로 모여요.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 포크송을 불러요. 그땐 사람도 많았고 교회 나오는 게 참 즐거웠어요. 선생님의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마음에 자리 잡은 그 시기는 언제였나요? 자연스럽게 그런 신앙 생활을 해왔어요. 당시에는 예술제가 있었어요. 예술제가 12월 1일 현도 기념일을 즈음에 하는 행사였는데 그때는 중고등학생들이 예술제를 해요. 대학생 선배들이 도와줬지요. 조명이라든가 음향이라든가 선배들이 도와주는데 그 예술제 준비를 무려 3개월 이상을 하거든요. 그 과정 때문에 막이 내려 나간 다음에는 배우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연스럽게 인일 기념일까지는 그냥 교당에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청년회를 만들면서부터는 이제 그냥 학생하고는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이제 좀 들기 시작했다고 그럴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작은 천덕송 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거를 버스에서 잃어버렸어. 그때 우리 아버지가 아주 호되게 혼을 내셨어요. 정신을 어디에 갖다 팔아먹고 다니냐고. 교회 책을 들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런 걸 잃어버릴 수 있느냐고 혼을 내시는데 눈물이 쏙 빠지더라고. 당신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안 하면서 유독 나한테만 그렇게 강조하셨어요. 우리가 사형제인데도 나만 교회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내 동생들은 한 번도 안 데려왔어요. 동생들은 나 따라서 몇 번 나왔는데, 학생 때 잠깐 하다가 안 나오게 되고. 그런데 말로는 다 천도교인이래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1977년도에 내가 공무원 시험을 봤어요. 1978년도부터 공직 생활을 하다가 2개월 보름 만에 방위 근무를 소집 받아서 18개월을 복무하고 1979년도에 이제 다시 복직하고서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1981년도에 다시 서울로 왔어요. 그때 서울교구 청년회를 만들면서 청년회 활동을 하고 청년회장을 맡고 나니까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아이들도 낳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주말이면 교회 생활을 하니 자연스럽게 학교 동기 동창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제 유일한 친구들이 직장생활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되었고 한 40년 유지되고 있습니다. 교회 나오시면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마음이 편안해요. 어려서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날에 교회에 가면 빵도 나눠주고 그러잖아요. 얻어먹을 때는 좋은데 뭔가 마음이 공허하다고 할까, 사찰에 가도 그랬어요. 천도교는 첫인상이, 선배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각인돼서 그런지 몰라도 푸근해요. 또 가족 같은 분위기였어요. 청년회 때부터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우리 교당은 다른 교회나 절에 가면 있는 예수, 십자가, 부처와 같은 상이 없잖아요. 우리에겐 궁을기 하나밖에 없잖아요. 신앙의 대상도 다른 종교와 차이가 좀 있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 거기서 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한울님이 마음속에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학생회 활동하시면서 마음에 품었던 신앙심이 평생을 이어져 왔다는 말씀이시군요. 우리 학생회 때 어떤 선생님께서 궁을장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한울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하나.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그것이 하얀 바탕의 색이 한울님 마음이고 빨간 색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구도화시킨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옛날에는 대교당에 장식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그런 자료들이 사진조차도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좀 아쉬워요. 삶에서 천도교를 한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사람은 매일매일 잠을 자잖아요. 그냥 단순히 잠을 자는 것과 뭔가를 정리하고 잠을 자는 것은 새로 만난 아침이 다르잖아요. 그렇듯이 천도교 신앙을 하는 것은 일신우일신, 저는 그 뜻이 있다고 봐요. 뭔가 달라져야 해요. 어제처럼 생각하고 어제처럼 행동하고 어제처럼 움직이면서 뭔가 새로움을 기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나를 중심 잡게 해준 것은 경전의 말씀이에요. 해월신사님의 법설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천이 힘듭니다. 믿습니까? 이거는 쉬워요. 그런데 그 믿음을 무엇으로 입증합니까? 뭔가 행동이 있어야 하잖아요. 해월 신사님 법설에 언고행 행고언(言顧行 行顧言)'이라고 하잖아요. 말을 할 때 행할 것을 돌아보라고. 말을 하기에 앞서 내가 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돌아보고 말을 해야 해요. 또 내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해요. 지금 천도교 청년회나 대학생단 후배들 보고 계시면 어떠세요?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실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그런 당부를 할 수 있는 위치인지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열정으로 그리고 나를 닦는 마음으로 순일한 마음으로 활동하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은 우리 아들에게도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러면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리는 바가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요. 오늘은 처음부터 합창단 이야기를 시작으로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합창단 단원들에게 단장님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단장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심부름꾼이지, 좋은 리더가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려운 형편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합창단을 만들어 온 조각 조각들이 참 소중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조각들이 하나라도 없거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역할을 못 한다거나 그 조각이 없어진다면은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때문에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자세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밀알이 된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서로서로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게 진짜 따뜻한 동덕애를 느낄 수 있는 그런 합창단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가 된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교단을 지켜왔듯 합창단 단원들의 화음이 아름다운 선율로 흘러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한울님, 감응하시옵소서. -
천도교여성회 100년을 넘어 101주년 기념식천도교여성회가 창립 101주년을 맞아 포덕 166(2025)년 3월 25일 오전 11시 천도교 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에서 ‘천도교여성회 제101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여성의 권익 신장과 사회 공헌을 위한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지난 3월 25일 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이번 기념식에는 천도교 관계자, 여성회원, 시민단체 대표 등이 참석했다. 천도교여성회는 포덕 65(1924)년 4월 5일에 주옥경 종법사를 초대회장으로 모시고 ‘천도교내수단’이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다. 이후 포덕 72년(1931)에 ‘내성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포덕 81년(1940)에 ‘내수회’, 포덕 97년(1956)에 ‘천도교부인회’를 거쳐 포덕 109년(1968) 지금의 ‘천도교여성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95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 가입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게 해오고 있다. 이날 101주년 기념식은 진수당 박혜정 총무부장의 집례로 개식-청수봉전(정수당 한재신 포덕부장)-심고-주문3회병송-사계명 낭독(지성당 고온자 조직부장)-강령낭독(명진당 조순덕 교화부장)-기념사(성수당 박징재 본부회장)-격려사(현암 윤석산 교령)-상패 수여-장학금 수여-영상으로 보는 여성회-천덕송 합창(동학의 딸)-심고-폐식 등의 순서로 이어졌다. 박징재 여성회장은 기념사에서 “오늘 우리는 창립 100년을 넘어 101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해월 신사님께서는 ‘대저 도는 용시용활 하는데 있나니, 때와 짝하여 나아가지 못하면 이는 죽은 물건과 다름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천도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발전 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천도교 여성회본부는 쉬지 않고 노력하며 시대화 함께 성장하는 여성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격려사를 통해 “천도교여성회는 포덕 65년(1924)에 ‘천도교내수단’으로 창단 후,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여성회는 천도교단 내의 활동에 머물지 않고 많은 대외적인 활동도 수행해오며,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도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아 여성회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모든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천도교여성회는 천도교의 중요한 부문단체로서 우리 교회사에 크나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향해 당당하고 슬기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천도교여성회 창립 101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공로패와 장학금 수여식이 있었다. 남해지부 심해당 박삼순, 삼천포지부 효진당 박둘분, 영등포지부 은성당 명은숙, 울산시지부 천심당 지종미, 진주지부 예성당 장예성 동덕에게 공로패를 수여하고, 영등포교구 전지성, 시흥교구 최지성 학생에게 민족종교협의회가 후원하는 장학금을 수여하였다. 지난해 여성회의 활동영상을 6분간 시청하고 ‘천도교샘연합합창단’의 축하공연을 끝으로 100번째 다음의 시작, 101번째 창립기념식을 마무리하였다. 천도교샘연합합창단(단장 : 조보아, 지휘 : 김윤경, 반주: 정영주)은 <봄처녀>, <한강수타령>, <우리 모두 즐기세> 등의 무대로 천도교여성회 101주년 기념식의 의미를 더했다. 이번 101주년 기념식은 천도교 여성들이 과거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공유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