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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청년회 창립 106주년 기념식, 8월 31일 중앙대교당에서 개최천도교 청년회가 창립 106주년을 맞아 오는 2025년 8월 31일(일) 오전 11시,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기념식을 거행한다. 1919년 창립 이래 한울님의 진리를 바탕으로 시대 청년의 사명을 실천해온 천도교 청년회는, 올해 106번째 창립기념일을 맞아 그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함께 그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청년회는 “그동안 청년회를 사랑해주시고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과 기념의 자리를 나누고자 하오니, 바쁘시더라도 귀한 시간 내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부탁드린다”며 초청의 뜻을 전했다. 이번 기념식은 1부 공식행사에 이어 2부에서는 청년회원과 교인들이 함께하는 축하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이를 위해 청년회는 다양한 무대를 함께 꾸릴 축하공연 참가자를 모집 중이다. 노래, 댄스, 밴드, 악기, 퍼포먼스 등 형식에 제한 없이 누구나 지원 가능하며, 천도교 청년회와 대학생단 동문, 선후배, 현역 단우 모두 참여할 수 있다. 공연 신청 마감은 2025년 7월 31일(목)까지이며, 신청자는 이름, 나이, 소속 교구, 분야, 곡명, 무대 설명 등을 작성해 문자(010-7172-5660) 또는 이메일(chondoyouth@gmail.com)로 제출하면 된다. 한편, 청년회 창립 106주년을 기념하여 성금을 통한 후원도 받고 있다. 성금은 우리은행 513-240146-13-101 (예금주: 천도교청년회중앙본부)으로 접수받고 있으며, 모든 성금은 기념행사와 청년 활동 지원에 소중히 사용될 예정이다. 청년의 이상과 열정을 되새기며 한울세상을 향한 여정을 함께 걸어온 천도교 청년회의 106번째 생일에, 많은 교인들의 관심과 참여가 기대된다. -
천도교와 3 · 1운동(12) "직업은 대부분 농업이었고 종교는 모두 천도교라 했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이곳에서 희생된 교인은 10명이요, 부상자는 43명이었다. 그리고 체포된 사람이 무려 140여 명에 이르렀다. 순국 순도한 10명은 다음과 같다. 廉錫河 廉錫漢 朴弘善 李鍾煥 李永浩 徐鳳化 元俊善 黃斗律 黃熙鍾 金尙甲 그리고 왜경에게 체포되어 함흥감옥에서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다음 9명이다. 安昌憲 崔鳳天 薛雲龍 崔德福 廉元亨 崔錫崑 元秀弘 廉仁煥 李泰仁 『3·1독립운동실록(하)』에 실린 일인의 신문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월 10일 오전 11시경 단천읍 시장방면에서 약 600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라 쓴 국기 수십 장을 선두에 세우고 함성으로 만세를 부르면서 군청을 습격하였다. 이 급보를 받은 헌병분대에서는 만일을 대비하여 읍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남녀를 피난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재향 일본 군인과 일본인 장정이며 기타를 소집하여 경계대를 조직하고 진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쉽게 해산하지 아니하매 대충돌이 일어나 3시간 동안이나 수라장이 되었다. 이와 같이 격투를 한 끝에 군중 측에서 8명이 사상되고 주모자 143명이 검거되었는데 검거된 자는 공립소학교에 수용해 두고 취조한 후 겨우 12명을 제외해 놓고 그 나머지는 장태를 엄하게 하여 방면한바 군중은 대부분이 천도교인이었다.” 3월 22일에는 천도교인인 김성호, 황희청, 이태인, 이종근, 송문일, 황승오등이 주동이 되어 북두일면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독립유공자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군중 500여 명을 이끌고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투석하였다 그러자 헌병들은 군중을 향하여 총질을 하였다. 이 총격으로 8명의 군중이 현장에서 사살되고 2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헌병 1명도 부상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김성호를 비롯하여 5명이 체포되어 함흥 지방법원을 거처 고등법원에까지 올라갔으나 유죄판결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 당국은 천도교도가 많이 살고 있는 신만면에 헌병 1개 중대를 상주시킴으로써 공포 속에 평온을 유지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단천의 3·1운동은 3월 한 달 동안에 현장에서 총살자 또는 척살자 33명, 중경상자 24명, 피검자 290명을 내는 격렬성을 보였다. 단천 교인들의 3·1운동은 준비단계에서부터 헌신적이었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총부에서 대교당 신축 명목으로 성금을 모금할 때 단천 교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각출하였다. 어떤 분은 논과 밭과 소까지 팔아 성금을 내는 사례도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무릅쓰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3·1운동 이후의 교세 민족의식을 일깨워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앞장섰던 천도교인들은 직접 간접으로 많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주도 세력들은 조금도 굴함이 없이 교세를 재건하는 것이 곧 보국안민을 위한 길이라 믿고 일어섰다. 이들이 다름 아닌 3·1운동의 주도자들이었다. 김용문 선생은 3·1운동 당시 단천교구의 주역으로 다음과 같이 64명을 기록하고 있다. 최봉천, 안창헌, 치석곤, 최복덕, 벽운용, 염원형, 염인환, 원수홍, 이원수, 서봉화, 염석하, 염석한, 이영호, 김상갑, 벽관학, 김병갑, 황명옥, 김여수, 박한익, 박홍선, 김병무, 이종환, 염명준, 김덕율, 김상근, 황영순, 한성칠, 김윤택, 서기순, 서치현, 이재용, 이운범, 김학범, 이기준, 김덕희, 염석범, 봉덕업, 김진섭, 박영호, 이주팔, 황시린, 김창록, 김기종, 최봉익, 김병은, 정기선, 박계율, 박창운, 최흥두, 박홍인, 이성규, 박세향, 이재열, 박진후, 천인봉, 봉덕실, 조진관, 염호섭, 최병덕, 최병홍, 황희율, 황희종, 원준희, 김낙순 중요 간부들인 교구장을 비롯해서 교구직원, 그리고 연원대표들이 모두 체포되어 실형을 받게 되자 한 때 교구는 공백상태에 빠졌다. 이듬해인 포덕 61년(1920) 3월에 이르러 교구 직원과 순회교사, 각 면 전교사를 새로 선출하고 7월에는 다시 교구임원을 재구성하였다. 안창헌과 같이 연원대표로 있던 염인환을 교구장으로 선출하였고 공선원(총무)에 원수홍을, 전제원에 이종순을, 금융원에 김정현을, 서기에 김경하를 선출했다. 이후 단천교구는 사회적으로 대강연회를 개최하고 단기교육 강도회도 갖고 활동을 개시하여 더욱 많은 교인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3. 수안교구의 만세운동 머리말 수안군의 3·1만세운동은 황해도에서 가장 격렬했다. 천도교에서도 희생자를 많이 낸 시위운동중 하나이다. 천도교인 15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본헌병들이 쏜 총탄에 9명이 즉사하고 18명이 중상을 당했으며 70여 명이 체포되어 63명이 최저 6개월 이상, 최고 2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수안군 천도교인들의 만세시위는 읍내에서만 그치지 않고 수구면 석달리, 홀동 장터와 천곡면 두대리, 연암면 율리에서도 계속되었다. 단천교구에서는 우이동 봉황각 수련에 4기에 홍순걸, 5기에 안봉하·홍순걸 등 3명이 참가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한독립운동사(권2)』와 독립운동사편안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 이병헌 저 『3·1운동비사』, 그리고 『천도교연원록』, 수안군 『천민보록』,『 천도교창건록』 등의 기록을 더듬어 만세시위의 경위를 알아보기로 한다. 수안군의 당시 교세 수안군에 동학이 처음 들어온 것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천도교창건록』에 의하면 烈菴 金成根이 포덕 34년(1893)에 입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갑도동학혁명전에 동학이 수안군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김성근은 도동면 사람으로 추측된다. 동학혁병 당시 동학군이 한때 중화에도 나타났던 기록이 보이므로 동학혁명 이전에 동학이 이 지역에 들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포덕 45년(1904) 갑진개혁운동 당시에는 漳菴 吳榮昌 연원과 泓菴 羅仁協 연원의 지도 아래 대대적인 개회를 하였다. 『천도교창건사』에 의하면 황해도 열군에서 개회한 지도자를 17명이나 열거하고 있다. 安鳳河 金應河 李壽榮 李昌郁 李昌杰 洪碩貞 李憂선 李宗燁 金應幹 李鳳璘 李鎭禹 李邦郁 崔明伯 金澤英 李殷烈 崔榮九 李昶烈 수안군은 바로 오영창·나인협 연원이므로 인근각지 진보회 개회에 동원되었음은 분명하다. 수안에 천도교가 대대적으로 포교된 것은 포덕 43년부터 44년 사이다. 이때의 교 호수는 300호가 넘었다고 한다. 동학이 천도교로 바뀐 뒤인 포덕 50년(1909) 10월 현재의 교 호수는 234호이며 교인 수는 970명이었다. 이것은 포덕 49년에 이용구·김연국 일파가 시천교로 분파하는 영향을 받아 직접 관련되지 않았으나 교세가 후퇴했다. 다만 최영구가 시천교 쪽으로 가게 되어 후에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포덕 50년(1909)에 접어들면서 포제를 고쳐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교세는 약간 늘어났다. 포덕 60년대까지 수안교구 역대 교구장은 다음과 같다. 金相允 (50年) 洪淳杰 (51年) 金應河 (52年) 金益培 (53年) 金洞善 (54年) 洪碩貞 (55年) 金永萬 (56年) 安鳳河 (57年) 포덕 60년(1919) 3·1운동 당시의 교구장은 안봉하였다. 교세는 약 300호 정도였으며 교인 수는 1,500명 정도였다. 각 면 전교사를 역임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金處熙, 閔丙善, 韓淸一, 韓國英, 朴春益, 張聖道, 李東郁, 黃鼎五, 金顆熙, (여자 전교사) 田貞嬅, 宋秀嬅, 李道嬅 교인의 분포는 도동면 율계면 공동면 수구면 천곡면이 비교적 많았으며 나머지는 대포면 연암면 대천면 오동면 소내면 동부면 서부면 수안면 등에 몇 십 호씩 있었다. 만세운동의 준비 수안교구에 천도교 중앙총부로부터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에 관한 지시가 전달된 것은 3월 1일 저녁때였다. 독립선언서가 수안교구까지 전달된 경로에 대해 ‘황해도도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곡산 천도교인 이경섭이 2월 28일 서울 이종일에게서 독립선언서 일천 장을 받아가지고 기차로 3월 1일 황해도 신막에 내려 천도교 서흥교구장 박동주에게 750장을 주면서 서흥교구와 해주교구에 보내도록 하였고 자기는 곧 수안으로 갔다. 도중에 이종숙의 집에서 천도교 수안교구장 안봉하와 홍석정 김영만 홍순걸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하는 동시에 자기는 발이 아프니 나머지는 곡산에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경섭은 서울에서 기차로 신막까지 와서 도보로 신계를 거쳐 곧바로 수안 도동면 덕동에 있는 이종숙의 집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수안교구장을 비롯한 임원 및 간부를 비밀리에 불러 전달하였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안봉하는 수안면 석교리에 있었다. 3·1동지회 간행 『3·1독립운동실록』에는 이경섭이 3월 1일에 안봉하 수안교구장을 찾아가 전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안봉하 교구장을 비롯하여 김영만·이찬홍·최용식·이영철과 교도인 홍석정·한청일 등이 모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1919년 11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경섭은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중 수안교구에 150매 정도 건네주면서 독립만세시위를 빨리 거행하도록 하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교구장 이하 여러 간부들은 독립만세시위를 원칙적으로 빨리 하기로 하고 이튿날인 3월 2일 시일식을 마치고 다시 교구실에서 비밀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3월 3일 즉, 그 이튿날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런 계획을 눈치 챈 헌병 분대는 참석했던 몇 사람을 체포, 헌병대에 구금하였다. 『3·1독립운동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수안헌병분대가 탐지한 바가 되어 피고 이영철·홍석정·한청일 이하 전기 피고들은 그날로 동 헌병대에 구금되었었다. 이때 체포되지 아니한 이영철·홍석정·한청일 등은 다시 전기 독립운동계획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이영철·홍석정·한청일이 체포된 것이 아니라 일부 참석자 중에서 몇 사람이 체포된 것 같다. 전후의 기록에 나타난 이름들을 살펴보면 체포된 사람은 이봉하 교구장 등 교직자인 것 같다. 그러나 검속 당하지 않은 한청일·홍석정·이영철 등은 뜻을 굽히지 않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동원하는데 계속 힘썼으나 시간이 급하여 많은 교인을 동원하지 못했다. 3월 3일의 피의 항쟁 3월 3일 오전 6시경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북쪽 공포면·연안면·도소면·율계면, 동쪽 천곡면, 동북쪽 수구면, 남쪽 대성면, 그리고 수안면에서 중견 천도교인들이 ??군 교구에 달려왔다. 밤중에 수십 리씩 걸어서 들어온 것이다. 이때 康國甫,崔陽鳳,車濟南,金應河,韓眞錫,柳光善,金泰赫,朴利鳳,崔錫九,金應道,朴泰洙 등 130명이 모였다. 여러 기록에 게재된 내용들을 종합하여 보면 그 윤곽을 알 수 있는데 황해도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여기서 주도 인물 중의 이영철이 선두에 서고 한청일과 홍석정은 중앙에서 2개의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130여 명이 함께 뭉쳐 만세를 부르며 금융조합 앞 큰길을 지나 헌병 분경대쪽으로 향하였다. 행렬이 헌병 분견대 앞에 당도하여 이영철이 ‘우리들은 오늘부터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서 자유민이 되고 조선국의 독립도 된다’고 소리높이 외치고, 이영철·한청일·홍석정 등은 번갈아가며 ‘우리는 이미 조선독립을 선언하였으니 너희들은 속히 부대를 내어놓고 물러가라’고 함성을 질렀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대열은 점점 늘어나 고함소리 만세소리에 천지가 떠나갈 듯 당장 독립이 다 된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드디어 이영철·차제남·김응도·유광선·김태혁 등 여러 사람은 헌병대 사무실로 몰려들며 분대장 요시노(吉野匡) 중위에게 분대를 인도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일본헌병과 보조원들은 벌벌 떨며 어찌할 줄을 몰라 하다가 결국 서울 본부에서 연락이 있는 대로 곧 물러가겠다고 서약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환성을 올리며 시가지를 돌아 천도교교구로 모여서 승리의 개가를 올렸다.” 한편 각지에서 시위 행렬부대가 계속 교구로 몰려들었다. 교구로 돌아올 때 대천면 사리원 전교실에서 떠난 이동욱·이재관·김문상·김응수·용계홍 및 임창운·이두천·이시용 등 50명의 행렬은 돌아오던 중 3일 10시경 대천면 사창리에서 헌병들의 저지를 받기도 하였지만 이들을 밀어제치고 달려왔다. 읍내는 온통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흥분한 군중들은 헌병대를 쫓아내야 한다고 나서게 되었다. 이때가 11시경이었다. 이동욱·오관옥이 앞장섰으며 뒤따르는 교인들도 일백여명이나 되었다. 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 분견대에 도착한 이들은 마당으로 밀려들며 “조선은 이미 독립되었으니 너희들은 빨리 물러가라”고 했다. 당황하던 헌병들은 돌변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많은 교인들이 총탄을 맞아 쓰러졌다. 일부는 체포되었으며 대오는 무너졌다. 이 대목에 대해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6시에 교구로 모였던 군중들은 6시반경 헌병대에 도착하였다 한다. “독립의 선언을 하였으니 속히 이 분대 사무실을 내어놓고 물러가라. 만일 듣지 아니하면 계속하여 지방으로부터 몰려오는 천도교도가 더욱 증가하여 어디까지든지 이 요구를 하리라”고 강압하였다고 한다. 헌병대 앞에 도착한 이들은 헌병의 만행을 항의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헌병 분대로 돌입하였다. 이때 헌병들은 다시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여기서 몇 사람이 쓰러졌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헌병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하며 살육행위를 감행하였다. 1919년 미국상원 제66회 의사록에는 다음과 같이 서양 선교사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3월에 시위가 처음 일어났을 무렵에 2~3백 명의 군중이 황해도 수안 헌병 분견소를 찾아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니 당신들은 물러가라고 통고하였다. 헌병들은 물론 한국이 독립을 획득하였다면 물러가겠지만 그러나 그 전에 서울로부터 명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해답하였다. 군중은 이에 만족하고 돌아갔다. 약 2시간 후에 한 떼의 다른 군중이 와서 같은 요구를 하였다. 이번에는 헌병이 발포를 해서 5명을 죽였다. 다른 몇 사람인가는 상처를 입고 잡혀서 갇히었다.” 황해도 장관보고서(1919. 8. 18)에는 이날 발포로 즉사한 자는 9명, 중상자는 18명이었다고 한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게 된 헌병대는 평양주둔 보병부대를 증원, 엄중 감시하는 동시에 일일이 수색전을 벌여 많은 사람을 검속하였으며 한편 의용단, 야경단을 조직, 강제 진압에 나섰다. 그런데도 3월 7일 수구면 석달리 홀동에서 천도교 전교사 이승필·이달수·이재협 등이 주동이 되어 약 40명이 장날을 이용,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헌병주재소의 습격을 기도하면서 격렬하게 만세를 불렀다. 맺는 말 사망 9명, 중상 18명으로 피의 항쟁을 벌였던 수안군 천도교도들의 만세시위는 끝났으나 일제의 강제수색과 현장에서 주모자 색출로 70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일 년 반의 재판을 거친 끝에 최고 2년 최저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희끗 센 사람도 섞여 있었으며, 의복 한 벌도 차입할 수 없는 형편으로 보기 흉한 푸른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직업은 대부분 농업이었고 종교는 모두 천도교라 했다. 이들 중 홍두익과 최석규 등 2명은 병으로 출정하지 못하였다. 나머지 68명은 1920년 11월 2일부터 경성 복심법원 정동 특별 법정에서 재판을 개정 8일까지 마쳤는데 다음과 같이 형을 받았다. 징역 2년 : 安鳳河, 金永萬, 李永喆, 洪斗玉, 李東郁, 1년 6월 : 羅燦洪, 洪吉載, 李潤植, 金溶植, 金炯宣, 李應洙, 李達河, 張聖道, 羅龍日, 安昌浩, 鄭理彦, 李致濟, 金明白, 梁石斗, 康夢洛, 朴宗燮, 金炳領, 梁啓殷, 金麗鎭, 金河京, 金熙德, 柳光善, 金泰赫 ,金錫鳳, 朴泰道, 康國甫, 車濟南, 1년 : 洪斗益, 李在觀, 白受和, 金文祚, 李彩龍, 田昌五, 李鍾國, 金龍洙, 龍桂弘, 金元杰, 鄭達明, 柳良鎭, 鄭斗濱, 朴昌淳, 金健榮, 金啓淑, 金貞萬, 金榮弘, 鄭益淳, 李宗植, 李台仁, 朴鎭化, 金應基, 鄭鎭河, 韓眞錫, 朴利鳳, 金錫龜, 吳炳善, 8월 : 李義萬, 徐相麟, 6월 : 朴昌雲, 李時庸, 李斗闡, 병중에 있던 홍두익은 쾌차하였으나 최석구는 기관지염으로 오랫동안 감옥에서 고생하다 포덕 61년 (1920) 8월 4일 재판 판결이 나기 전에 순도순국하였다. 최석구는 수안군 서부면 지암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52세에 환원하였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국내 동포의 체계적·실용적 지원을 위한 동포체류지원센터 지정서 수여식 및 간담회 개최법무부는 국내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안정적 정착과 지원을 위해 지난달 공모와 심사를 거쳐 비영리단체(기관) 23곳을 “동포체류지원센터”로 지정하였으며, 오늘 “지정서”를 수여하고 센터 대표들과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이번에 지정된 동포체류지원센터는 국내 동포지원을 위해 출입국·체류·영주·국적·취업 상담과 사회통합 교육 등을 ’25년 7월 1일부터 2년 동안 담당하게 됩니다. 법무부는 이날 동포체류지원센터 지정서 수여식 직후 개최된 간담회에서 올해 추진하고 있는 동포 체류자격 통합 방안과 한국어와 정체성 교육 강화 방안 등 사회통합 교육 강화 방향을 설명하고 이와 관련한 다양한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날 간담회에서 센터 대표들은 “동포 체류자격인 방문취업(H-2)과 재외동포(F-4) 체류자격을 재외동포(F-4) 체류자격으로 통합하는 방안”의 조속한 시행과 더불어 재외동포(F-4) 체류자격으로 통합되더라도 그동안 방문취업(H-2) 자격자가 일해오던 단순노무 분야에서 계속해서 종사할 수 있도록 취업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또한 대표들은 후세대로 내려갈수록 동포와 그 자녀들이 한국어 구사 능력 부족으로 학업이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면서, 한국어 습득과 학습 동기 유발, 학습 과정 다양화의 필요성은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재외동포(F-4) 체류자격이나 비자를 받기 위해 한국어 능력 입증서류를 제출하는 방안의 도입은 신중하게 검토해 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번에 법무부가 추진하고 있는 동포 체류자격 통합에 대해 동포사회에서는 반기고 있지만, 동포의 배우자(비동포)는 국내에서 취업이 농·축산업·임업, 간병·가사 분야로 제한되어 있어 생계유지에 큰 어려움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도 마련해 줄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법무부는 동포체류지원센터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번 간담회에서 건의된 내용들을 포함하여 무국적동포 포용, 동포체류지원센터의 법제화, 동포 전담 부서 설치, 사회통합프로그램 운영과정과 방식의 다양화 등 동포와 그 가족들이 안정적으로 국내에 정착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동포지원정책을 추진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
시원하게 매일매일 과학체험, 이게 되네?국립과천과학관(관장 한형주)는 2025년 여름방학을 맞아 7월 29일부터 8월 17일까지 어린이와 가족들이 과학과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과학전시물 연계 체험, 곤충 주제의 자연놀이, 화성탐사차를 모사한 로봇 블록코딩, 천문관측, 창작체험 등으로 구성되어 과학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대표 상표(브랜드) 기획전 ‘미래동물: 대멸종 너머의 생명’과 연계하여, 곤충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체험 ‘미래에서 살아남기, 곤충’을 7월 29일부터 8월 9일까지 기간 중 6일 운영한다. 참가자는 대멸종 이후에 등장할 수 있는 미래 곤충에 대해 살펴보고 나뭇가지나 조각으로 곤충 형상을 상상하며 꾸며볼 수 있다. 또한, ‘과학전시물 연계 체험’에서는 우주로 보내는 구조물의 크기를 최소화할 때 활용하는 종이접기 기술을 배우는 ‘종이접기만 잘해도 미 항공우주국(NASA)에 갈 수 있다’로 과학을 재미있게 배울 수 있다. 이 외에도 ‘우리 위성, 세계를 보다’로 우리나라 인공위성을, ‘진화와 핀치새’로 진화에 관한 이야기도 알아볼 수 있다. 해당 프로그램은 7월 30일부터 8월 10일까지 기간 중 6일 운영한다. 7월 30일, 8월 1일, 8월 3일에 진행되는 ‘무더위에 살아남기’ 창작체험은 여름철 더위를 이겨낼 이동 수단, 나만의 개인형 이동장치(킥보드)를 직접 조립해보는 창작체험이다. 참가자는 전동드릴, 스패너, 육각렌치 등 공구를 사용해 목재 개인형 이동장치(킥보드)를 조립하고, 완성된 개인형 이동장치(킥보드)를 과학관 야외에서 직접 타보며 더위를 날리는 움직임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8월 2일 저녁 8시에는 ‘달과별 관측회’가 열린다. 참가자는 천체투영관에서 8월의 별자리 해설을 들은 후, 천문대에서 망원경으로 달 표면을 관측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8월 6일에는 자연사관 탐구교실에서 ‘지구에 사는 모든 지구인들에게’를 운영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지구 자원과 탄소 중립에 대하여 학습하고, 지구인의 역할을 성찰하는 체험활동을 운영한다. 8월 9일과 10일 천문우주관 스페이스아날로그에서는 ‘화성탐사 블록코딩’을 운영한다. 참가자는 화성 기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화성탐사차를 모사한 로봇을 블록코딩으로 조작하며 미래의 화성 탐사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창작체험 ‘내 안의 빛, 태극카드’, ‘빛 반사 무궁화 열쇠고리(키링)’, ‘반짝반짝 그림자 조명’ 등을 운영한다. 특히 구리테이프와 발광 다이오드(LED) 등으로 태극기를 품은 사람 형상을 종이전자회로 카드로 만들거나, 빛 반사 테이프로 무궁화 모양의 열쇠고리(키링)를 꾸며보면서 광복의 의미를 담아볼 수 있다. 한형주 국립과천과학관장은 “더위에 지친 여름, 시원한 과학관에서 매일매일 특별한 과학체험을 즐기며 가족 모두가 신나고 즐거운 여름 추억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각 프로그램마다 참여 대상과 방법이 다르며, 자세한 내용은 과천과학관 누리집(http://www.sciencecenter.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대한민국정책브리핑 -
청년의 미래를 여는 ‘도전과 성장’ 이야기를 찾습니다고용노동부(장관 김영훈)는 7월 29일(화)부터 8월 28(목)까지 청년도전지원사업, 청년성장프로젝트 및 직장적응 지원 우수사례 공모전을 개최한다. 응모 대상은 해당 사업에 참여한 청년 등으로 자세한 사항은 고용노동부 홈페이지(www.moel.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시상내역】 ▴청년도전지원사업: 최우수 3, 우수 6, 장려 7 ▴청년성장프로젝트: 최우수 1, 우수 3, 장려 6 ▴직장적응 지원: 최우수 2, 우수 2, 장려 6 이번 공모전은 취업 실패나 좌절을 겪은 청년들의 진솔한 도전·성장 이야기와 입사 초기 직장 적응 경험을 공유하여 비슷한 상황에 있는 청년들의 공감대와 정책 참여를 높이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청년도전지원사업을 통해 6개월 이상 장기실업 등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구직활동을 단념한 청년들이 다시 취업을 준비할 수 있는 자신감 회복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청년 누구나 이용 가능한 “청년카페(청년성장프로젝트)”를 통해 지역별 특성에 따른 다양한 취업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청년들의 사회 단절을 예방하고,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입직 초기 직장 적응과 직장내 괴롭힘 방지 등 청년 친화적 조직문화 조성에 힘쓰고 있다. 이정한 고용정책실장은 “이번 공모전이 청년 각자의 도전과 전환의 경험을 나누고, 더 많은 청년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며, “정부는 청년의 일자리 첫걸음이 법의 보호 아래 존중받고 더욱 성장하는있는 발판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겠다”라고 밝혔다. -
“따님과 어머님은 방정환의 하늘님”, 2025 한국·스웨덴 제3회 국제여름방정환학술대회지난 7월 23일,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 방정환 작고 94주기를 기념하는 ‘2025 한국·스웨덴 제3회 국제여름방정환학술대회’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책임교수 홍승진)와 사단법인 방정환연구소(이사장 장정희) 공동 주최로 서울대학교 신양인문학술정보관 국제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따님과 어머님은 방정환의 하늘님’이라는 주제 아래 국제학술대회는 개막식, 연구발표, 좌담이 마련되었다. 대회측은 본 행사에 앞서, 개막식에서 방정환 작고 94주기를 맞이하여 묵념, 추모 영상과 추모시 낭송으로 구성된 간단한 추모식도 거행했다. 먼저, 개막 사회를 맡은 서울대학교 홍승진 교수는 방정환의 글에 ‘겨울에 내리는 눈이 하느님의 따님이라는 생각이 나오고, 하늘에서 오는 눈이 어머님께서 보내시는 소식’이라는 표현이 나온다며, 곧 “방정환의 하늘님은 ‘따님과 어머님’과 같다”며 대회의 서문을 열었다. 방정환의 하늘님 사상은 곧 천도교의 동학사상과 연관된다는 내용이다. 이어 사단법인 방정환연구소 장정희 이사장은 개회사를 통해 최근 ‘여성주의자’가 쓴 방정환에 대한 여성관에 대한 조롱글로 오해가 많이 일어났다며, 여성운동에 관심이 적지 않았던 방정환이었던 만큼 그의 여성관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과 함께, “방정환의 여성관은 그의 어린이 사상 위에서 더불어 종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천도교 측을 대표한 축사에서 천도교여성회본부 김명덕 회장은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 속에 ‘따님과 어머님을 키워드로 앞세운 것은 혜안 있는 일로 경탄을 금치 못한다’며 “방정환을 새롭게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의 여성관, 나아가 생명존중과 다시개벽(후천개벽)의 실천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초청국가는 매년 주빈국 1개국과의 교류에 집중한다. 2022년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1회 독일을 초청한 데 이어, 제2회 때는 영국, 올해 제3회 대회는 스웨덴 교류를 기획하여, 스톡홀름대의 저명 아동문학 연구자인 ‘엘리나 드뤼케르’ 교수를 기조 강연자로 초청했다. 엘리나 드뤼케르 교수는 ‘복종에서 행위성으로’라는 반향 있는 주제로, 북유럽 페미니즘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아동문학에 대해 발표했다. 참가국의 면에서도 대회측은 주빈국 스웨덴 외에도 그 동안 교류해 온 해외 아동문학 연구 학자 중 한국어 소통이 가능한 학자를 온라인에 초대하여 함께 했다. 참가국은 스웨덴(주빈), 몽골, 일본, 인도네시아, 대만, 일본 (온라인 입장) 등이며, 참가인사: 엘리나 드뤼케르(스웨덴 스톡홀름대), 바트체첵(몽골 울란바토르대), 호링 주(대만, 다이통대 아동문학연구소), 오타케 키요미(일본, 동경쥰신대), 영미 리(인도네시아, 한인니문화원)이다. 논문 발표는 방정환과 여성주의에 관련한 천도교여성회 연구, 아동극, 현대 아동문학, 스웨덴 엘렌케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연구 등 각계 뛰어난 5편의 학술 논문이 제출되었다. 학술대회 제1주제로 ‘방정환의 여성관에 대한 검토’에서는 방정환 어린이 예술 세계에 나타나는 근본적 여성관, 가족관의 지향점과 한계를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동학사상과 아동문화예술의 미학 사이에 어떠한 구체적 연관성이 있는지를 논의했다. 성강현(동의대) 교수는 ‘동학의 관점으로 본 여성주의의 실천 방법 탐구-천도교 여성회 설립과 개벽사 ????신여성???? 창간’을 발표하고, 손증상(부경대) 교수는 방정환과 여성, 그리고 <한네레의 죽음>을 발표했다. 학술대회 제2주제로‘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 현대 아동문화예술’에서는 스웨덴 아동문학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시도와 함께 한국의 아동극 및 청소년 소설 등에 나타나는 여성 표상을 심도 있게 고찰했다. 최선경(한국외대) 교수의 ‘엘렌 케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그리고 어린이의 권리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장미영(숙명여대) 교수의 ‘신지식 소녀소설에 나타난 모성적 인물의 역할과 아동의 연대의식 형성 연구’, 강윤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아동극 <가믄장 아기>의 젠더에 관하여’ 발표가 차례로 이어졌다. 학술대회 제3주제로 좌담으로 마련된 ‘아동문학이 여성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 나갈 것인가’주제에서는 좌장 홍승진 교수의 사회로 5명의 발표자와 토론자로 나선 이정아(서울대), 장성희(서울예대), 지상선(성균관대), 최배은(숙명여대) 교수와 김민경(홍파초교) 교사가 모두 무대의 좌담석에 착석하여 심도 있는 고민과 활발한 토론을 전개했다. 대회측은 참석자들의 중론을 모아 앞으로 주제를 3년 정도 이어서 발전시켜 보기로 했다. 기사, 사진제공 방정환연구소 -
소파 방정환 선생 정신 잇는 ‘청소년 인성교육 방정환학교 – 금강학교’ 개최소파 방정환 선생의 인도주의적 정신과 아동 중심의 교육운동을 계승한 인성교육 프로그램 ‘청소년 인성교육 방정환학교 – 금강학교’가 지난 7월 19일부터 20일까지 경북 경주시 일대에서 열렸다. 이번 프로그램에는 금강학교 학생, 교사, 스태프 등 총 33명이 참가해 1박 2일간의 뜻깊은 체험 활동을 펼쳤다. 이번 교육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지역사회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참된 자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됐다. 특히 천도교의 핵심 사상인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의 정신을 바탕으로, 인성 함양과 공동체 의식 배양, 그리고 꿈과 희망을 품은 성장의 발판 마련을 위해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자연과 역사, 문화 체험 중심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포항과 경주 일대에서 펼쳐진 자연과 역사 체험을 통해 공동체 의식과 배려심을 몸소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바닷가 생태 체험, 신라 유적지 탐방, 도예 및 전통 공예 체험, 요리 실습 등 체험 중심의 교육활동은 참여자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다. 또한 신라역사과학관과 수운기념관 방문, 황리단길 산책 등 지역 문화와 연계한 프로그램도 포함되어 교육적 효과를 더했다. 특히 소파 방정환 선생의 생애와 정신을 담은 이야기와 영상 콘텐츠를 공유하는 시간을 통해, 참여자들은 그의 아동 사랑과 인도주의적 실천을 되새기며 긍정적 사고와 자긍심을 키우는 계기를 마련했다. 역할극, 협동 게임, 공동작품 만들기 등 공동체 중심 활동도 함께 진행되었다. 한편, 비로 인해 일부 일정이 변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자연과 역사, 문화 체험, 공동체 활동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며, 참여자들이 인성과 공동체 의식을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도예, 요리, 탐방 등 다양한 체험 활동과 역사 유적 답사를 통해, 꿈과 희망을 키우고 배려심을 기르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참가자들의 전반적인 만족도 또한 높게 평가되었다. 프로그램 종료 후 실시된 만족도 조사 및 소감 발표에서도 다수 학생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배웠다”, “역사 공부가 즐겁게 느껴졌다”고 응답해 교육적 효과와 정서적 성장을 동시에 이룬 사례로 평가된다. 방정환 정신 계승, 청소년 인성교육의 실천적 모델 이번 방정환학교는 단순한 체험학습을 넘어, 청소년 인성교육의 실천적 모델을 제시한 의미 있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금강학교 관계자는 “아이들이 몸과 마음을 쓰며 경험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장하는 시간이 되었다”며, “앞으로도 소파 방정환 선생의 정신을 되살리는 인성교육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
천도교와 3 · 1운동(11) "피로 물든 만세시위"『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피로 물든 만세시위 3월 31일(음 2월 30일) 아침부터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집회 예정부근 교인 집에 비밀히 운반했다. 그리고 행동대원들은 정주읍 웃장거리에 있는 천도교 교구에 집합하면 당국의 눈에 띄기 쉬우므로 개천거리의 주막이나 교인 집에 모였다. 이들은 여기서 각 면 교인들이 들어와 만세를 부르면 일제히 일어나 같이 만세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정오경이 되자 장꾼들이 모여들었고 이윽고 사방에서 만세꾼이 모여들면서 조선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우암 박창건 선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오경이 되자 남면과 해산면 쪽에서는 남산모루로, 서면에서는 서문쪽으로, 이언·덕달·아이포·마산면에서는 대진고개와 달천강 쪽으로, 동주면에서는 당째고개로 몰려들게 되었다. 동부면 쪽에서 몰려온 사람들은 봉면동 신두부락 천도교인들이었는데 이미 동주면 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오면서 고현면과 신안면 교도들과 합세하였다. 사방에서 수만 명이 정주 시가에 들어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북과 나팔을 불며 만세를 외치니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했다. 읍내에 대기하고 있던 결사대원들도 대오를 정비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들고 행진, 군중을 인도하였다. 남문거리를 지나 정주우편국 앞에 이르렀을 때 무장헌병들이 진을 치고 길을 막았다. 결사대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행진을 강행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일본 기마헌병이 칼을 뽑아들고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돌진하는 최제일 교구장의 오른팔을 내려쳤다. 오른팔이 잘려지면서 태극기가 땅에 떨어지자 왼팔을 내밀어 다시 태극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왼팔을 내려쳤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태극기를 입으로 물고 전진하자 목을 쳤다. 교구장이 선혈을 내뿜으며 쓰러지자 뒤에 있던 김사걸이 잽싸게 피로 물든 태극기를 거머쥐고 전진했다. 이번에는 김사걸을 내려치니 단번에 쓰러졌다. 이에 대해 김위제 선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최 교구장의 바로 뒤에 서서 행진하던 김사걸이 교구장이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어들고 만세를 부르며 계속 선두에서 나아갔다. 그러자 헌병보조원이 들개를 때려잡는데 쓰던 장창 같은 쇠갈고리로 그의 배를 쳐서 쓰러뜨린 다음 질질 끌고 가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때부터 발포가 시작되어 여기저기서 시위군중들이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게 되었다. 최제일 교구장은 포덕 40년(1899)에 입도, 봉훈·교훈·강도원을 거쳐 당시 6대 교구장으로 있을 때였다. 그리고 김사걸(金士傑)은 의암성사께서 포덕 53년부터 55년까지 7회에 걸쳐 전국 교구 중견지도자들을 모아 연성수련을 시행할 때 제7회째 지명을 받아 각지에서 모인 105인과 더불어 봉황각에서 특별수련을 마친 분이다. 정주의 만세운동은 우체국 앞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불종거리에서도 같은 시간에 피의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박창건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동주 고현 신안면의 천도교인들이 정주 당째고개를 넘어 선발대가 불종거리에 이르렀을 때 만세를 부르자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던 경찰이 총을 난사, 군중들이 쓰러졌다. 총만 난사한 것이 아니라 소방대원들을 동원하여 불을 끄는 갈고리로 닥치는 대로 쳐 죽이니 처참했다. 부상자이건 성한 사람이건 색출된 사람이건 잡히기만 하면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날 정주에서 만세 부르다 순국한 인원은 무려 92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튿날에 왜경은 웃장거리에 양옥 2층으로 잘 지어진 천도교 교당건물(24칸)에 불을 질러 완전히 태워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각 부락에서 산발적으로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곽산 방면은 따로 천도교 곽산교구장인 김경함을 중심으로 이국영 등 수천 명이 곽산역 부근에서부터 시가지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2권에는 3월 3일에 천도교의 김경함 교구장과 예수교가 제휴하여 1천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고 하였다. 이국영의 장남인 이태근의 증언에 의하면 정주군 소재지보다 앞서 곽산에서 3·1만세운동을 하게 된 것은 김상설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따로 가져오면서 총부의 지령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김상열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갖고 평안북도 의주까지 갔다가 거기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3월 31일 정주 만세시위 때 희생자 성명은 대부분 멸실되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교인은 다음과 같다. 崔晢一,金仕傑,白文京,承處達,毛信永,毛元奎,毛元鳳,桂洪成,金七星, 朴一擎,朴昌瑞,承應七,承吉龍,趙苦水,玄德昇,洪應根, 김위제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 헌병대장 기하라(木原) 대위는 시위가 끝나자 곧 바로 천도교 간부를 체포했는데, 徐仁和 白重彬 李國榮 李根培를 비롯하여 각 면 전교사와 기타 수많은 교도들이 검거되어 6개월 간의 옥살이를 했다. 일반인까지 합하면 70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체포당하면 심한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기도 하였는데, 천도교 간부들은 오랫동안 고문을 당하여 몇 사람은 업어냈다고 한다. 맺는 말 천도교 정주교구는 이겸수·홍기억·김창하·김진팔·김진영·최제일·김여경·최낙경·박찬수·박기호·박형석·임창열·홍종현·김공선·백중빈·김정섭·서인화·김장제·이국영·김경함 등 쟁쟁한 지도자에 의해 지켜져 왔으며 3·1운동 후 다시 일어섰다. 일본헌병이 불 질러 버리고 간부를 체포하자 그해 4월에 정주교구는 태천군에 접하고 있는 신안면 연봉동으로 이전했다가 9월에 정주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포덕 61년(1920) 3월에 타다 남은 창고를 수리하여 사무실을 차렸다. 그 다음해인 포덕 62년(1921) 1월에는 다시 짓기로 하고 새로 대지를 구입, 김진팔·박찬수·서인화·오찬수·전용운 등이 모금위원이 되어 2월에 착공하였다. 그리하여 벽돌 반양장으로 정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3동 15칸짜리 교당을 완공하였다. 그 후 교세는 더욱 늘어나 포덕 77년(1936) 3월에는 낡은 교당을 헐고 그 자리에 50평짜리 교당과 20평짜리 사무실을 붉은 벽돌 반양옥식으로 크게 새로 지었다. 백호산 기슭에 우뚝 솟은 천도교 교당은 불굴의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었다. 3·1운동의 주동자였으며 주관 도정이었던 재암 김진팔 선생의 훌륭한 지도력으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김진팔 도정은 정주군 아이포면 석산리에서 포덕 13년(1872) 12월 3일에 태어났으며, 3·1운동 때 영변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후 왜경에게 체포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포덕 85년(1944) 12월 25일 서울에서 8·15해방을 보지 못하고 향년 72세에 환원하였다. 2. 단천교구의 만세운동 머리말 함경남북도의 천도교 중 단천군 교인들만큼 3·1만세운동을 격렬히 벌인 곳도 드물 것이다. 3·1만세운동으로 피살자 33명, 중경상자 24명, 피검자 290명이 희생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 단천교구에서는 서울 우이동 봉황각 수련 3기에 신태천, 4기에 김순택, 6기에 최봉천·차낙준, 7기에 김봉순 등 5명이 참가하였다. 단천군 천도교인들의 3·1만세운동에 대하여 포덕 122년(1981) 3월호 『신인간』지의 김용문 선생 기록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1971년 12월에 펴낸 『독립운동사 제2권』, 그리고 3·1동지회 간행 『3·1독립운동실록(하)』 및 『천도교연원록』, 『창건록』 등을 참고로 살펴보고자 한다. 단천의 천도교세 김용문 선생에 의하면 맨 처음 동학을 받아 포교한 사람은 수하면 만덕리에 사는 최기주였다. 최기주는 함흥으로부터 동학을 받아 수하면·신만면·남두일면·북두일면에 포교했다. 그 후 포덕 43년(1902)부터 포교가 크게 일어나 전군에 동학교도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때 입교하여 포교에 힘쓴 교인은 파도면에 안창헌과 서만면 개평리의 염인환이었다. 그리고 신봉천,최봉천,염원형,염석하,설혁봉,원수홍 등이 널리 활동하였다. 포덕 45년(1904)경에 교세는 1천호가 넘었다. 그런데 포덕 47년(1906)에는 의병활동으로 친일파라는 오해를 받아 100여 명이 살해되는 교난을 당하면서 교세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침탈 후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여 교 호수는 약 3백 호에 이르렀다. 3·1운동의 준비 단천군교구에 3·1만세운동에 관한 밀사가 도착한 것은 3월 3일이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에 의하면 홍원군 교구의 박용회가 독립선언서를 단천에 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만세시위는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태극기를 들고 나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 필수요건이다. 따라서 독립선언서 배포가 매우 중요한 일이다. 3·1동지회 간행 ‘3.1독립운동실록’에 의하면 서울 팔판동에 사는 천도교인 안상덕은 강원도와 함경남북도에 선언서를 배포하는 밀령을 받았다. 이종일 보성사 사장은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강원도에 2천장, 함경도에 1300장을 보내기 위해 안상덕에게 넘겨주었다. 안상덕은 선언서를 강원도 평강교구장 이태윤에게 무사히 전달하고 곧바로 영흥교구로 갔다. 영흥교구장인 김용환에게 전달하고 다시 홍원교구로 갔다. 강인택은 박용회를 시켜 함경남도 북부지역과 함경북도 지역에 전달하였다. 이것이 3월 3일 단천교구에 도착하였다. 포덕 57년(1908) 현재의 연원직접안에 의하면 단천에는 안창헌과 염인환이 연원대표로 되어 있다. 안창현은 파도면 단천읍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가까운 교인들이 모여 계획을 의론했다. 단천교구장인 염원형은 안창헌 연원대표와 최석곤 공선원, 설운용 금융원과 상의하여 3월 10일로 만세운동을 정했다. 대개 다른 지방에서는 장날을 택하는 예가 많았으나 단천에서는 교인들을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이 강했기 때문에 대신사 순도일로 정한 것이다. 이에 교구장과 실무자 3인(공선원 최석곤, 전제원 이문구, 금융원 설운용)등 4명은 우선 밤중을 이용하여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800장가량 인쇄하였다. 천도교의 전국 교구에는 포덕 50년대 초에 중앙총부에서 등사기를 구입 비치토록 하여 이미 등사기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교구 임원들은 낮에 각 면 전교실 전교사나 연원 관계자를 은밀히 만나 동원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군 교구로부터 비밀지시를 받은 각 면 전교실 간부들은 밤중에 독실한 교인댁을 찾아가 동원 준비를 하는 등 계획대로 진행시켰다. 단천군의 지형은 해안에서부터 길게 북쪽 산악지에 이르는 골짜기형이다. 그래서 단천읍으로부터 북두일면은 60km가 넘었고, 서쪽에 있는 신만면과는 30km가 넘었다. 교통관계가 매우 불편하여 북두일면 교인들까지 동원하기는 어려워 북쪽의 수하면, 남두일면 동쪽의 광천면, 이중면 서쪽의 하다면·신만면, 그리고 남쪽 해안지대의 복귀면 등과 단천읍 등 8개 면의 중견 교인 약 300명을 동원토록 진행했다. 일반교인들에게는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어 대신사순도기념일인 3월 10일 오전 11시에 단천교구에 모여 기념식을 거행한다고 위장하였다. 기념식 후에 만세시위 3월 10일이었다. 각 면 교도들은 꼭두새벽에 출발하여 11시에 교당으로 모여들었다. 11시 정각에 대신사 순도기념식을 시작하여 약 30분간 진행하였는데, 300명이 넘는 교인들이 교당에 가득 찼다. 이윽고 염원형 교구장이 등단하여 의암성사께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체포된 경위와 각지에서 진행된 만세시위 상황이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독립을 위해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아울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자고 독려했다.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큰 태극기는 서봉화가 들고 앞장섰다. 목이 터져라 조선독립만세를 연거푸 외치며 교인들은 중심가인 하서리로 향했다. 시민들은 조선독립만세 소리에 뛰쳐나왔고 젊은 남녀들은 합세하였다. 사방에서 시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어느덧 일천여명이 되었다. 온 단천 시가가 떠나갈 듯 만세를 외쳐대니 참으로 장관이었으며 피가 끓었다. 헌병대 앞에 이르자 사태는 돌변하였다. 김용문 선생의 기록을 보자. 만세시위에 당황한 왜경과 헌병대는 즉시 기마대를 풀어 시위군중을 제지 해산시키려 갖은 위협을 다하였다. 시위군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만세를 부르며 저지선을 돌파했다. 이때 선두에서 나가던 서봉하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다까하시(高橋) 현병대장을 향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내 나라를 내 놓아라”하며 만세를 부르자 그는 말에서 내려 총 개머리로 그의 어깨를 내려쳤다. 이에 웃통을 헤치고 다가서며 고함을 지르자 살인마인 헌병대장은 일본도를 뽑아 사정없이 복부를 찔렀다. 붉은 피가 쏟아지며 창자가 빠져 나왔다.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쥔 서봉화는 계속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대를 향해 돌진하다 쓰러졌다. 피를 보게 된 교인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제히 헌병대로 돌격했다. 왜경과 헌병은 총을 난사하여 살육전을 벌였다. 이처럼 일진일퇴를 되풀이하기를 3시간 만에 해산당하였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 여성회본부, 포덕 166년 하계합동수련 개최천도교 여성회본부는 포덕 166년 하계합동수련을 오는 7월 24일(목)부터 30일(수)까지 의창수도원에서 봉행한다. 이번 수련은 “흐린 기운을 쓸어버리고, 맑은 기운을 어린 아기 기르듯 하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신앙과 생활의 조화를 통해 한울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신심과 정성으로 기획되었다. 여성회본부는 교인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다양한 수련비 지원도 마련하였다. 총부는 대학생까지 전액을 지원하며, 여성회는 5일 이상 수련 시 5만 원을 지원한다. 75세 이상 고령 교인 역시 동일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수련 기간 중에는 특별 부대행사로 ‘웃음왕 선발대회’도 열린다. 참가자들은 마음껏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제출하고, 수련 참가자들은 가장 환한 미소와 따뜻한 웃음을 지닌 이에게 투표하게 된다. 최종 선정된 Top 10 웃음왕에게는 특별 시상이 주어질 예정이다. 여성회본부는 “가장 밝게 웃는 오늘, 우리 모두가 웃음왕입니다”라는 슬로건 아래, 수련을 통해 교인 간 유대감과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참가자는 경전과 염주, 개인 물품을 준비해야 하며, 수련과 관련된 문의는 여성회사무실(02-6488-6839) 또는 사무국장(010-3109-0078)에게 하면 된다. -
[칼럼] 2차 동학농민혁명 독립유공자 서훈, 국회와 국가보훈부에 건의한다일제친일부역자들이 못박아놓은 동학서훈불가의 망국적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 관련단체 대표단과 국가보훈부 장관과 면담에,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 의장과 동학 독립유공자법개정안 대표발의한 강준현 민주당 정무위 간사, 윤준병 의원, 민형배 의원께서 함께 하기로 하였다. 권오을 국가보훈보 장관 인사청문회가 지난 7월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렸다. 권오을 보훈부 장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모두 발언에서 자신의 소신과 앞으로의 각오 등을 거침없이 발표했다. 그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두 가지 사항을 먼저 소개한다. 보훈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다 “···독립호국, 민주의 역사를 아우르는 보훈이야 말로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고 모두가 공감하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라 생각합니다.···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을 불식시키기 위해 독립유공자 및 유족에 대한 예우 강화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사항을 특별히 소개하는 이유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야 하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동학 1차 봉기는 반봉건 민주의 역사요, 동학 2차 봉기는 반외세 독립호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는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들 중에 일부를 빼고 대다수가 3대가 망한다는 삶을 살았다」는 것에 보훈부에서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립운동 하면 3대가 흥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독립운동의 기점이다 권오을 보훈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강준현 의원(더불어민주당 정무위간사, 세종특별자치시 세종을)은 권오을 후보자 정책검증에서 다음과 같은 질의를 하였다.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을 ‘동학농민운동’이라 명칭 한 것은 중고교 교과서에서의 명칭을 참고) 참여자가 서훈 대상이 아닌 것 알고 계시죠?, 2차 동학농민운동이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 권오을 보훈부 장관 후보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강준현 의원께서 사전에 서면 질의를 해서 여러 관계자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또 관련 학자들의 견해도 찬반이 있고, 그동안 서훈심사에서도 일치가 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관련 단체나 학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자문을 구할 것이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지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특별법(특별법에 2차 봉기는 항일무장투쟁이라고 분명하게 적시) 제정 때 동참한 사실이 있습니다.” 강준현 의원은 재차 질의에서, “1895년 을미의병은 서훈의 대상이 되고, 이보다 1년 앞선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은 서훈 대상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긴 시차도 아니지만 을미의병과 동학의병을 시기로만 보지 말고 일제의 국권침탈이라는 것에 항거한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은 항일무장투장에 있어 같은 명분 즉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권오을 장관 후보자께서 장관이 되시면 꼼꼼하게 살펴보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권오을 장관 후보자는 “꼼꼼하게 살펴보겠다.”고 약속하였다. 권오을 보훈부 장관 취임 후 면담 약속 권오을 장관은 필자와의 통화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과 같이 특별한 희생에는 그에 걸맞는 특별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에 정부와 학계의 그간 입장과 검토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향후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히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권오을 장관 후보자는 이재명 대통령이 국가보훈부 장관에 임명하면, 그 후 시간을 내어 필자(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는 물론 동학농민혁명 관련단체 대표단과 면담을 갖기로 하였다. 보훈부 장관과 면담예정 소식을 접한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 의장, 강준현 민주당 정무위 간사(동학법대표발의), 윤준병 의원(동학법대표발의) 민형배 의원(동학법대표발의) 등이 함께 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세 번에 걸쳐 동학 서훈을 신청 필자는 지난 2023년 5월 국가보훈부에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결과 "활동내역에 있어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의 사유로 포상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후 2024년 8월 동학농민혁명13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부에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선생 독립유공자 포상 즉 서훈을 신청했었으나 보류되었다. 이러한 두 차례의 보류판정을 받고 2024년 3번째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 즉 서훈신청 3심을 요청했으나 역시 보류되었다. 세 번에 걸친 재심 신청에 "전봉준 선생 등 독립운동 활동내용이 불분명해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제외"했다고,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의결과를 통보받았다. 전봉준 선생의 공적심사 결과는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으로 되어있다. 독립운동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국가 즉 일본에 종속된 우리나라의 식민지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1910년 8.29일 경술국치, 즉 한일병합에 의한 국권상실 이후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과정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 1945년 8.14일 해방 직전까지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어야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에 의하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했거나,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를 말한다.'로 명시하고 있다. 1894년 동학의병과 1895년 을미의병은 똑같이 서훈에 적용되어야 한다. 일제의 국권침탈은 1905년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乙巳勒約)부터라고 보고 있지만, 법률에서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해 그 시기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특히 1962년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내규에 독립운동의 기점을 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으로 정해놓았고, 현재까지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서훈에서 제외시키고 있다.이러한 차별적인 법률적용은 평등권을 침해하는 헌법위반이며,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1895년 을미의병은 되고,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은 안 된다는 것은 반 헌법적이며, 을미의병 서훈 145명도 자격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불평등한 법률적용을 시정하려면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서훈의 기점을 1895년에서 1894년으로 내규를 바꾸던지, 아니면 국회에서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에서,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를, 1894년 일제의 국권침탈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로 독립유공자 예우법을 일부 개정해야 된다. 그리고 현재 발의된 국회 정무위에서 독립유공자법 일부개정안 의결이 힘들면 국회 문체위에서「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일부 개정하여, 일제친일부역자들이 못박아놓은 동학서훈불가의 망국적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이제 130여년이 지난 지금 이재명 국민주권정부는 동학의병들에 대한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 희망의 역사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등 역사적 사실 적용해야 이와 같이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를 개정하고자하는 명분은, 지난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호에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이라고 명확히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1894년 동학혁명군총대장 전봉준이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의병 동참을 호소하는 '고시 경군여영병이교시민'과 일제의 경복궁 점령과 국권침탈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1895년 '전봉준 공초록과 사형 판결문'을 참고하면 될 일이다.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낭설 반박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간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 중에 하나인 동학유공자 예우에 관한 세금문제이다. 최근 분석한 유족이 있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대략 481명(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년 전에 자료제공)으로 집계됐다. 이는 일부에서 반대급부로 주장하는 엄청난 세금이 들어간다는 허위주장을 반박하는 참여자 숫자 통계이다. 또한 독립유공자 심사과정이 까다롭고 자격의 유무를 엄정하게 분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 서훈을 한꺼번에 확정하지 않고 연간별로 나눠 결정하기 때문에 국가예산규모도 큰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3.1독립운동 참여자 서훈도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연차별로 독립유공자 포상 즉 서훈이 이뤄지고 있다. 끝으로 오늘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과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그동안 윤석열 정부에서의 보훈부 장관들과는 다른 동학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한 입장을 알았다. 그래서 실망이 아닌 희망을 갖기로 하였다. 내가 존경했던 김근태 선생의 말씀과 우원식 현 국회의장이 즐겨 말하는 어록을 하나 소개하면서 마친다. "희망은 힘이 세다." 사진, 글 이윤영(천도교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공동대표)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