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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준 교령, 오는 9월 12일 주낙영 경주시장과 간담회, “경주에서 동학의 미래 밝힌다”중앙총부 박인준 교령이 오는 9월 12일(금) 오후 3시 경주시청 청사에서 주낙영 경주시장과 간담회를 갖는다. 이번 만남은 교단과 경주시가 함께 협력할 수 있는 다양한 현안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가 될 것으로 주목된다. 주요 안건으로는 동학교육수련원 수탁 운영 문제, 해월신사 생가 복원사업의 추진 상황, 대신사 태묘 입구 주차장 화장실 설치 여부가 포함되어 있으며, 지역사회와 교단의 실질적 협력이 필요한 현안들이 중심을 이룬다. 더불어 오는 9월 27일 개최될 경주동학문화제 기념식 지원과 협조,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사업, 경주 동학역사문화공원 조성 계획 등도 폭넓게 논의될 예정이다. 특히 동학역사문화공원 조성은 경주를 동학 발상지로써 재조명하고, 전국적 차원에서 동학 천도교의 역사적 의미를 확산하는 사업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박인준 교령은 이를 통해 지역 발전과 더불어 동학 천도교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구상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이번 면담은 천도교와 경주시가 동학의 역사와 정신을 공유하며, 문화유산 보존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구체적 협력 방안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
2025년 경주동학문화제, 9월 27일 경주에서 개최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9월 27일(토), 경주동학교육수련원과 용담정 일대에서 ‘2025년 경주동학문화제’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의 부제는 “동학정신 세계화의 비상”으로, 동학의 사상과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 세계 속에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이번 문화제는 식전공연, 기념식, 축하공연, 비전선포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식전공연에서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공연이 펼쳐지며, 이어 열리는 기념식에서는 동학정신을 기리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한다. 오후에는 축하공연과 함께 동학정신 세계화를 위한 비전선포식이 이어질 예정이다 경주, 동학의 성지를 배경으로 경주는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활동했던 성지로, 동학교육수련원과 용담정은 동학의 역사와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장소이다. 이번 행사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동학이 추구했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철학을 현재와 미래 세대에 전승하고 세계 시민과 함께 나누기 위한 의미 있는 자리로 마련된다. 천도교중앙총부는 “동학은 19세기 조선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가치와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며 “이번 경주동학문화제를 통해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이라는 비전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이번 2025년 경주동학문화제는 동학정신의 현대적 계승과 세계화를 목표로, 경주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시민과 종교계, 문화예술계가 함께 참여하는 뜻깊은 문화 축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서울에서 출발하는 차편은 9월 27일 당일 오전 7시 30분 수운회관에서 출발, 10시 30분부터 경주동학교육수련원 일대에서 행사 부스 운영을 시작하며 기념식은 오후 1시 30분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행사와 관련된 문의는 천도교중앙총부 사회문화관(☎ 02-6488-6831~2, chondosc@daum.net)으로 하면 된다. -
‘포덕’이란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펼치는 일'‘포덕’이란 한마디로 말해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펼치는 일’이다. 흔히 ‘포교(布敎)’와 혼동되지만, ‘포덕(布德)’은 그 뜻이 훨씬 깊고 넓다. 포교가 교리를 전하는 활동이라면, 포덕은 한울님의 덕을 내 삶 속에서 회복하고 그것을 세상에 실천적으로 드러내는 길이다. 천도교에서 말하는 덕(德)은 한울님의 덕을 가리키며, 이는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생명의 본원적 힘이다. 수운 대신사는 동학을 창명한 뒤 먼저 마음공부를 강조했다. “사람은 성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하지 못해 성현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포덕의 근본이 내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음을 밝혔다. 즉 한울님의 덕을 회복하는 일은 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마음의 공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해월신사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오랜 피신 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마음을 닦으며 한울님의 덕을 실천했다. “마음을 정하고 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한울님의 덕과 합일되는 경지를 뜻한다”고 설파하며, 본래의 덕을 회복한 뒤 이를 생활 속에서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가난한 농민과 민중 속에 들어가 함께 생활하며, 한울님의 덕을 실제 삶 속에서 펼쳐낸 해월신사의 행적은 ‘포덕이 곧 생활의 실천’임을 잘 보여준다. 포덕은 내적 성찰과 회복을 바탕으로 한 삶의 확산이다. 오늘날 천도교에서 말하는 포덕은 신앙의 확산을 넘어, 한울님의 덕을 내 안에서 되찾고 그것을 이웃과 사회, 나아가 세계 속에 드러내는 실천을 의미한다. 다시개벽을 향한 천도교의 비전은 바로 이러한 포덕의 정신 위에서 세워져 있다. ※ 참고자료: 윤석산 지음, 『일하는 한울님 해월 최시형의 삶과 사상』 -
포덕 166년 9월 7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K-사상, 동학의 이해와 우리의 할 일"포덕 166년 9월 7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에서 이암 정의필 남정포 도정은 K-동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동학 천도교 사상을 21세기 인류 공동체적 자각으로 확장하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설교에서 정의필 도정은 기존 동학의 핵심 가치인 인내천과 사인여천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여 생태 위기, 사회적 불평등, AI 시대의 인간성 문제 등 오늘날의 난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였다. 특히 K-팝, K-드라마와 같은 한류 콘텐츠에 K-동학의 정신을 접목하고, AI 윤리 원칙과 연계하는 등 실질적인 적용 방안을 제시하여, 전통 사상이 어떻게 현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공한다. 이번 설교를 통해 동학이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한국형 대문명 전환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10일○ 1910년, 매천 황현,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다. 매천 황현은 이건창, 김택영과 더불어 ‘한말삼재(韓末三才)’로 불렸던 인물로, 시(詩)·서(書)·화(畵)·문(文)·사(史)에 능해 오절(五絶)이라고도 불렸다. 낙향한 선비이자 위정척사파 계열의 유림으로 시골에 은거하면서도 현실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황성신문』을 통해 경술국치 소식을 접한 후 「절명시」 4수와 유서(遺書)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 1919년, 일제, 문화통치 기본 정책 공표. 일제는 경술국치 이후 조선인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의식하여 매우 강경한 무단통치 정책을 펼쳤다. 3.1운동 직후 제3대 조선 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무단통치의 한계를 절감하고 언론과 집회를 허가하고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는 문화통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폭력과 회유 양면 정책을 구사하며 경제 수탈을 강화하려는 음모가 자리 잡고 있었다. ○ 1919년, 연합국과 오스트리아, 생제르맹 조약 체결. 이 조약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공식 해체되고 향후 20년간 독일과의 합병 또한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현재의 오스트리아 국경이 이때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에도 영토가 할양되었다. ○ 1960년,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선수 아베베, 로마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 당시 28살이던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 선수가 로마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마의 벽’으로 불리던 2시간 20분대를 깨고 2시간 15분 16초를 기록해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7분 50초 앞당겼다. 아베베는 당시 42.195km를 맨발로 달리며 한때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조국 에티오피아에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
천도교중앙대교당, 9월 15일 화재감지기 설치공사 시작천도교중앙대교당이 9월 15일부터 화재감지기 설치를 포함한 보수공사에 들어간다. 이번 공사는 대교당의 안전성을 강화하고, 화재 예방을 위한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추진되는 것으로, 종로구청 문화유산과와의 협의를 거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지난 9월 3일 종로구청 회의실에서 열린 협의 자리에는 천도교 교무관장, 교무관차장, 교당관리실장을 비롯해 종로구청 관계자들이 참석해 공사의 범위와 일정, 세부 계획을 논의했다. 우선 9월 15일부터는 화재감지기 설치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어 9월 18일 오후 2시에는‘대교당 안전진단 작업공간 조성공사 소위원회’회의가 열린다. 이날 회의에는 서울시 국가유산위원회 건축분과 위원, 설계사무소, 구조기술사, 종로구청 담당자 등이 참석해 안전진단과 보수공사 방향을 심층적으로 검토할 계획이다. 공사 기간 중 대교당에서 진행되던 시일식 봉행은 임시로 천도교수운회관에서 이어간다. 9월 21일부터는수운회관 907호와 807호(유튜브시청)에서 시일식을 진행해 교인들의 시일식 봉행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할 방침이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이번 화재감지기 설치와 보수공사는 대교당의 안전성을 높이고,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라며 “공사 기간 동안 교인들의 이해와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
천도교와 3 · 1운동(18) "독립선언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시위과정과 천도교 만세시위는 3월 11일에 영남 쪽 상업소도시 남시(南市)에서 최초로 일어났고 다음은 3월 18일에 영북 쪽 소도시시인 신시(新市)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1차 봉기라고 할 수 있으며 3백 명 정도의 소규모 운동이었다. 그러나 3월 31일과 4월 1일의 운동은 영남북이 같이 일어났으며 읍내와 신시에서는 4월 1일까지 연속적으로 과격한 시위를 벌였다. 이것은 2차 봉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1차 봉기는 3백 명 정도로 그치고 2차 봉기는 수천여명이 모여 시위를 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다. 필자는 1차 봉기의 주체는 기독교 계통이고 2차 봉기의 주체는 천도교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에는 ‘3월 11일 오후 2시경에 천도교 주동으로 남시에서 약 4백 명이 회합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이 운동은 천도교가 주동이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주동으로 보인다. 이 남시에는 교회당이 있었으며 기독교인이 어느 정도 있었다. 1919년 6월에 조선헌병대사령부가 경무부장 회의 석상에서 보고한 ‘조선소요사건상황’에 의하면 “구성에 있어서는 3월 31일 이전의 소요는 주로 기독교의 선동으로 배태되었고, 그 후는 천도교도의 선동에 의한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3월 18일에 신시의 시위운동은 분명 기독교가 주동이 되었다. 이 신시에도 선천과 가깝기 때문에 기독교가 일찍 들어와 있었다. 3월 11일의 남시 시위운동과 3월 18일의 신시 시위운동은 기독교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1차 시위운동은 기독교의 주도라 단정된다. 2차 시위운동은 물론 천도교가 주도했다. 3월 31일과 4월 1일의 시위운동은 연속적인 시위운동이다. 당시 천도교에서는 3월 3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구성면·서산면·동산면·노봉면 일부 등 4개면에서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 영북 신시에는 사기면·천마면·관서면 등 3개면 교도들이 모이게 했다. 일제 기록에 의하면 31일의 시위 때는 남시에 5천명이 모였고, 읍에는 3천 명이 모였으며 신시에는 8백 명이 모였다(3·1운동 재판기록). 이 두 곳의 시위운동에는 일본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많은 사람이 검거되었다. 우석 전의찬 선생이 1928년 기록에 의하면 천도교인으로서 이때 순도한 사람과 일반인의 순국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崔順瑞 張巖翰 吳尙涉 金贊株 全文行 許龍雲 朴聖瑞 高仲日 등 諸氏, 平人死者는 張德彬 宋行範 白洛水 許佃 尹洛斗 등 諸氏 또한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약사』에는 순국자가 다음과 같다. 許佃 金洛龜 高斗一 白義景 張鳳宙 張鳳奎 金燦斗 吳尙涉 宋連根 崔聖世 崔順世 朴監察 宋信興의 아들 등 10여명 이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 빠진 사람은 고두일·백의경·장봉주·장봉규·김찬두·박감찰·송신흥 등 7명이다. 결국 총순국자는 21명인 셈이다. 그리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분도 많았다.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옥고를 치룬 사람은 다음과 같다. 金景贊 朴元植 政贊祚 許堵 金應道 金應典 元利尙 朴永化 孫熙雲 獨孤雲 金仁國 元賢天 金洛勇 許尙玉 張海達 張萬永 張義壽 金泰用 金贊極 李時興 金有聲 등 21인 그리고 최덕화 등의 판결문(대정 8년 형상 제431호)에 의하면 신시에서 시위하다 체포되어 복역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최덕화(37세), 손희운(40), 원이상(58), 박문구(28), 허상옥(25), 강익홍((21), 박영화(47), 김응주(55), 독고실(40), 김응전(40), 이영근(28), 이시흥(66), 김군직(39) 등 13명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서 누락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최덕화·박문구·강익홍·김응주·독고실·이영근·김군직 등 7명 옥살이를 하다 나온 사람은 모두 28명인 셈이다.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에는 구성군내 총동원 연인원수를 6천 5백 명이라고 했다. 일본기록과 재판기록을 합치면 총동원 연인원은 무려 1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순국자가 21명이요, 옥살이를 치룬 사람이 28명에 이른다. 이밖에 부상자는 2~30명이 넘을 것이다. 이상으로 보아 구성군의 3·1만세운동은 매우 격렬했음을 말해준다. 맺음말 구성군의 대표적인 도회지라 할 수 있는 읍내와 남시, 신시에서 1만 명에 달하는 민중들이 함성을 올리자 이에 놀란 일제와 그 앞잡이들은 4월 1일에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보복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임시보고서에 의하면 구성에서 자경단을 조직하여 탄압 보복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성군내에서는 자경단을 조직하고 소요단 또는 만세를 고창하는 자에 대해서는 단원이 일제히 이를 저지하고 퇴를 협박함과 동시에 천도교도 등에 접근함을 혐기(嫌忌)하며 그 사이에 상호 소격(疏隔)을 생(生)케 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주로 천도교도들과 민중을 이간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총독부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평안북도 구성군 지방에서는 먼저 천도교도의 선동에 의하여 소요를 야기한 결과 귀중한 인명이 살상되고 산업 상에 있어서도 또한 다대한 손해를 입게 되었으므로 군민들이 천도교에 대한 반감을 품은 자가 점차 많아 군민은 천도교를 절멸하고 교도도 살해할 것이라고 칭하여 동교도와 교제하는 자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운운…” 이것으로 미루어 일제가 평화적인 시위자들에게 발포 살상하고 그것을 천도교에 뒤집어씌우려 얼마나 광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민중을 천도교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온갖 발악을 총동원했음을 입증해주기도 한다. 천도교도들이 얼마나 열렬했기에 이처럼 그들은 천도교를 말살하기 위해 광분했을까. 재판기록에도 천도교인들이 굽힐 줄 모르는 애국심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 대표적인 항변의 사례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919년 8월19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 판결문 중에서) * 김군직(관서면 대우동)·박영화(천마면 정관동) : “조선민족으로서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가 되며, 이번 사건에 조선 민족인 2천만을 모두 벌 줄 수 있을까. 또 이와 같이 일시적인 고역을 당한다 하여도 결코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반감만이 증가하고 장래 피차간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탄식이 생겨서 동양평화에 큰 불행을 초래할 것은 명백하므로 재판장은 통촉한 다음 타당하게 처결하여 장래 서청(筮晴)의 탄이 없게 하기를 바란다.” * 허상옥(천마면 신음동) : “궁곡에서 생활하는 우부우부와 어린 아이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른데 관해서 본인도 양심에 분발심이 생겨서 천여 명 군중 가운데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일 죄가 있다면 파리강화회의에 있다고 생각 키우며, 가령 보안법위반이라고 한다면 온 민족이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누구에게 죄가 있다고 한 것인가.…” 구성군 서산면 염잠동에 사는 뇌암 김태용도 일제에 대한 독립정신이 투철했다. 3월 31일 구성군 읍내에 들어가 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룬 분이다. 49세의 나이로 재판을 받을 때 “내 나라를 찾겠다는 만세운동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 일본사람은 우리들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항변했다. 이현면 원창동에 사는 진암 전경찬도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는데 재판장에서 당당히 항변했다. 신문과정에서 석방하면 다시 만세를 부르겠는가 라고 묻자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계속 만세를 부르겠다”고 하였다. 22세의 혈기로 항변하자 신문관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고 한다. 이 얼마나 정정당당하고 굽힐 줄 모르는 애국심인가. 산간에서 겨우 옥수수나 조농사를 지으며 사는 천도교인들이지만 보국안민 정신은 이처럼 투철하여 구성군의 3·1운동을 피 끓게 했다. 제4장 3·1운동에 대한 사회적 통념의 오류 … <참고 : 김응조 자료> 어느덧 3・1운동 90주년을 맞이했다. 3・1운동은 우리 국민이라면 예외 없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민족사의 정화(精華)요 청사에 빛나는 민족혼의 표상(表象)이라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랑스러운 3・1운동을 천도교가 주도했다는데 대해 교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한편 이 성스러운 3・1운동에 대해 우리 사회 일각에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사례가 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3・1운동 당시 국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며, 더욱이 후세들의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3・1운동에 대한 철저한 국민적 교육이 절실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3・1운동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 몇 가지를 들어 그 진위(眞僞)를 밝혀보려 한다. 1. 독립선언서 공약3장에 대한 진실 3・1운동 당시의 독립선언서 말미에는 공약3장이 명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公 約 三 章 ㅡ.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이니, 오직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ㅡ. 最後의 一人,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ㅡ.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여,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이 공약 3장에 대해서 사회 일각에서는 당시 불교 측 민족대표인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이 기초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그 진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만해의 기초설은 명백한 오류다. 이에 대해 지면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그 진실을 간략하게나마 밝혀보기로 한다. 만해의 공약3장 기초설(起草說) 내지 윤문설(潤文說)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만해의 제자인 김법린(金法麟)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신천지(新天地)」 1946년 3월호에 ‘3・1운동과 불교’라는 글을 게재하고 만해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이라면서 이렇게 썼다. “…宣言書의 作成에 관한 것인데 起草委員으로 崔麟, 崔南善 및 나 三人이었는데, 崔南善씨는 宣言書에 서명치 않고 草案만을 執筆하고 나는 그것을 수정키로 하고 崔麟씨는 起草責任者로 정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초위원’이란 용어와 만해가 독립선언서를 수정했다는 내용은 다른 자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위의 글이 나왔던 1946년은 해방 다음해로서 최남선처럼 친일행위를 한 변절자에게 혹독한 비판이 가해지던 시기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만해와 같은 지조 있는 독립투사에게는 역사적 진실과 관계없이 과장하거나 찬양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처럼 만해의 윤문설이 검증되지 않은 채 사실로 굳어져가는 상황에서 1960년 박노준(朴魯埻)・인권환(印權煥)의 공저(共著)로 저술된 『한용운연구(韓龍雲硏究)』(通文館 발행)에서 근거 없이 공약 3장을 만해가 수정하고 기초했다고 기술함으로써 결정적인 오류를 제공하는 단초가 되었다. 여기서 그 저술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일단 성안(成案)된 선언서를 보매 반드시 수정을 가하여야 될 곳이 몇 군데 있어서 그는 이를 고쳐서 인쇄에 부치기로 하였다는 사실은 아는 이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특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의 공약3장은 순전히 그가 창안 첨기(添記)하였던 것으로 이것도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숨은 사실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아무런 근거 제시도 없이 ‘아는 이만이 알고 있는 일’이라든가 ‘이것도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숨은 사실’이라는 소설 같은 표현을 함으로써 이를 와전(訛傳)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우선 이와 관련된 민족대표의 심문조서를 살펴보기로 한다. 만해는 공소공판에서 “그 서류를 보고 독립에 찬성하였나?”라는 판사의 질문에 “그것을 보고 찬성한 것이 아니라 다소 나의 의견과 다른 부분이 있어 내가 개정한 일까지 있소”라고 답했다. 아마도 이 부분이 만해가 수정했다는 윤문설의 근원이 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개정한 초고는 독립선언서의 초고가 아니라 그 이외의 초고임을 다음 최린의 심문조서(1919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확인된다. 판사가 최린에게 “한용운은 이제 보인 세통의 원고를 가지고 있었을 뿐 선언서의 원고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최린은 “그 선언서 초고는 인쇄하기 위하여 최남선에게 돌리고 한용운에게는 맡기지 않았다”고 하여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맡기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만해 자신도 3월 11일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의 검사 취조에서 이런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이때 검사가 압수한 증거물 6, 7, 8호를 보이면서 “이것은 피고가 가지고 있던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만해는 “그것 중 6호는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탄원서이고, 7호는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어 독립승인을 얻으려는 서면이며, 8호는 일본정부와 동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통고문의 안(案)이다. 또 그 외에 독립선언서의 안문(案文) 1통이 있는데 그것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여기서 만해가 갖고 있던 것이 독립선언서가 아닌 미국대통령, 각국 대표, 일본 정부와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초안이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당시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비롯해서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정부와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청원서를 초안 작성하였는데, 3・1운동 전날 최린은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제외한 다른 문건을 내어주면서 정서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해는 바빠서 정서하지 못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였다. 이상으로 만해가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접하지도 못하였을 뿐더러 더구나 개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독립선언서의 작성과정을 보면 의암성사가 3・1운동을 결심한 후 최린・권동진・오세창 3인을 참모로 하여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을 먼저 정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는 이종일이 쓰겠다고 자청했으나 그의 성격상 과격한 표현으로 선언서가 작성될 가능성이 있어 최남선에게 선언서 작성을 의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의암성사와 참모 3인이 독립선언서에 들어갈 대의(大義)를 협의한 후 이를 최남선이 최린의 부탁을 받고 그 대의에 준해서 독립선언서를 작성케 되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사회 일각에서 유포되고 있는 독립선언서에 대한 만해 한용운의 윤문설과 공약3장 기초설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거니와, 만해의 윤문설과 기초설 모두가 근거 없는 낭설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황당한 것은 박노준・인권환의 『한용운연구』에 의암성사를 직설적으로 모욕하는 근거 없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그 내용부터 보기로 한다. “최린의 소개로 천도교의 성사 손병희와 대면한 그는 사태의 중대함을 소상히 설명하고 우리 민족이 독립선언을 하고 자주민임을 전 세계에 공포하기에는 이때처럼 좋은 시기는 없다고 갈파, 천도교 측의 호응을 요구한즉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즉석에서 거부함에 만해는 재차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여전히 응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는 그 이상 간청하여보았자 별무신통할 것을 인지하고 의암을 향하여 ‘이미 사건의 비밀은 타인의 귀에 들어갔으니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운동이 사전에 탄로가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목숨이 살아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의암도 그의 열렬한 민족주의사상과 투철한 민족의식에 감탄하여 조건부로 응낙하니, 그 조건이라 함은 의암 자신이 독립운동의 대표자로 되고 또 선언서에도 두서(頭書)하여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논평할 가치조차 없지만, 경술국치 이후 조국독립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계속 준비해온 의암성사에 대해 이런 허무맹랑한 날조를 하는 것은 소위 대학 강단에 서 있는 지성인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몰지각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 만해의 협박에 못 이겨 의암성사가 3・1운동을 마지못해 그것도 조건부로 응낙하였다니 앙천대소(仰天大笑)를 금할 수 없다. 이 기사는 전후가 맞지도 않을 뿐더러 만해 자신이 최린의 권유로 민족대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것이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극치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날조로 인해서 3・1운동의 전개과정을 모르는 일반 대중들이 현혹되어 날조가 더욱 증폭되고, 심지어 3・1운동의 역사적 진실까지 왜곡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9일○ 1828년,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1828~1910) 탄생.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러시아 남부 명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위선에 찬 귀족사회와 기성 종교에 회의를 느끼고 초기 기독교 사상에 몰두, ‘톨스토이주의’라고 불리는 자신만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 1920년, 민족운동가 정세권,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개발회사 세움. 일제강점기, 남촌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북촌을 넘보기 시작하자 정세권은 건양사를 세우고 익선동, 가회동, 삼청동 일대 땅을 사들여 이곳에 근대 도시형 한옥을 짓고 조선인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했다. ○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한반도 분단이 굳어진 것은 물론, 2년 뒤에는 6.25 전쟁이 터지며 군사적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 1969년, 3선 개헌안 국회 상정. 박정희 대통령의 연임을 위한 3선 개헌안이 민주공화당에 의해 국회에 상정되었다. 이는 박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두 번째 임기를 2년 반 남겨둔 시점에서 이뤄진 일로,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이 의사당 점검 농성을 벌였음에도 5일 뒤인 14일 새벽, 민주공화당은 이 같은 개헌안을 10분 만에 표결 처리함으로써 3선 개헌안이 통과된다. -
한울인성캠프, 청소년 인성 함양과 공동체 가치 확산의 장지난 9월 6일~7일까지 부산 금련산청소년수련원에서 천도교 청년회가 주관하는 ‘한울인성캠프’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1박 2일간 진행됐다. 이번 캠프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생명존중 사상과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인권 운동 정신을 계승해 미래세대가 건강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됐다. 시천주와 인내천 사상으로 배우는 공동체 정신 한울인성캠프는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고 자존감을 높이며,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배우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단순한 체험 활동을 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들이 꿈과 희망을 키우고 장차 지역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천도교청년회는 전국에서 참가자를 모집하고, 과거 캠프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는 대학생들이 스태프로 참여해 후배 세대를 돕는 ‘세대 잇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를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는 인성 교육의 장을 마련했다. 천도교 청년회는 “이번 캠프를 통해 참가자들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지역사회가 모두 함께 존중받아야 할 공동체임을 깨닫기를 바란다”며, “특히 학교폭력, 따돌림 등 현실적인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극복하는 힘을 기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청소년 성장의 무대, 자발적 참여와 체험 중심 운영 이번 캠프는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공동체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첫날은 아이스브레이킹 활동으로 서로의 어색함을 풀고 친밀감을 형성한 뒤, 본격적인 진로 특강으로 이어졌다. 진로특강 <하늘 같은 나, 하늘 같은 너> 진로특강은 저학년과 고학년 두 팀으로 나눠어 진행되었다. 첫 번째 시간은 ‘하늘 같은 나, 하늘 같은 너 – 나와 너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주제로 임우남 부산남부교구장이 강연을 진행했다. 임 교구장은 “나는 한울님”이라는 주제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주었다. 먼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유전자의 의미와 역사를 이야기하며, “나”라는 존재가 수많은 세대와 인류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우리는 직접 만나지 못한 조상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그 생명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곧 한울님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시각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종이를 찢고 태우는 활동을 통해, 비록 형태는 사라져도 그 흔적과 기운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 안에 무한한 가능성과 힘이 깃들어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또한 젖소 ‘로자’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전했으며, 꽃밭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이미 소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강의는 “내 속에는 수많은 한울님이 살아 계시며,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삶이 곧 한울님을 드러내는 길”이라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진로특강 <인내천 사상과 인간 존중의 삶> 고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는 김대석 동천교구장이 ‘인내천 사상 기반 인간존중 이야기 –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주제로 강연을 이어갔다. 김 교구장은 “우리 모두는 하늘과 같은 존귀한 존재”라며, 청소년들에게 인내천 사상의 핵심 가치를 소개하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스스로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며, 올바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인생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또한, 친구와 이웃, 사회를 존중하며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 속의 나’를 강조했다.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으로 배움 확장 강연 외에도 청소년들이 직접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천연염색 체험을 통해 자연과 환경의 소중함을 배우고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했으며, 실내 암벽등반과 피구 경기를 통해 도전정신과 협동심을 키웠다. 또한, 마술 공연으로 웃음과 감동을 함께 나누었으며, 마지막 날에는 참가자들이 직접 촬영·편집한 숏폼 영상 상영회가 열려 캠프의 추억을 함께 나눴다. 청소년들의 변화와 다짐 캠프를 마친 청소년들은 자신과 타인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며 공동체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은 “함께 웃고, 배우고, 도전하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느낄 수 있었다”며, “앞으로 친구와 가족,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천도교 청년회는 앞으로도 한울인성캠프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청소년들이 인내천 정신을 체득하고, 미래세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또한 청소년 인성 교육의 확산을 통해 건강한 사회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천도교대학생단 조화정 단장은 "이번 <한울나눔터-한울인성캠프>에서는 무엇보다 아이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습니다. 각 지역에서 부산까지 기차와 버스로 이동하느라 아이들에게는 조금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재미있고 알차게 뛰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한울인성캠프는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해가는 성장의 무대가 되었다. 한울인성캠프에 함께한 한울님들의 한마디 김민경 :이번 캠프에서 기도식 경전봉독을 해서 참 뿌듯했어요. 저는 이번에 마술 공연이 참 재미있었어요. 너무 신기했어요. 여기서 만난 언니들과 보낸 시간도 좋았어요. 또 이런 캠프가 있으면 좋겠어요. 박민성 : 천도교에서 하는 캠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서울로 3박 4일 하늘 캠프 할 때 가보았어요. 캠프에서는 형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봉황각에서 손병희 선생님이 3.1 운동을 계획하신 역사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랑스러웠어요. 이번 캠프에는 암벽등반 체험 프로그램이 있어서 너무너무 신나요 조우혁, 강기윤, 김상휘 : 동천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시일식이 낯설지 않았어요. 매주 시일식을 하거든요. 고등학교 진학을 동천고등학교로 하게 되면서 철학,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수련회에는 처음 와보았는데, 천도교 수련을 체험하면서 더 느껴보고 싶어요. 천도교가 주는 연대감과 소속감에서 위안을 얻기도 한 것 같아요. 참 신기하고 신비로워요. 천도교를 알게 되면서 천도교인들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보았는데,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어서 조금 더 가깝게 느껴져요. 저희 학교는 산 밑에 있어서 조용하고 공부하기에는 참 좋아요. 벌레도 많고 학교에 올라가는 길이 좀 힘들지만요(웃음) 이번 수련회에서 천도교가 어떤 종교인지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학교 안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경험하게 되었어요. 박김한울 : KTX타고 오는 길이 좀 멀어서 힘들었지만 친구들이 간다고 해서 함께하는 시간은 참 즐거워요. 천도교에 대해 친구들에게 알려주는 일은 약간 사주면 먹고, 안 사주면 안 먹는 민트초코 같은 느낌이에요. 물어보면 알려주는데, 안 물어보면 굳이 알려주지 않는 그런 느낌요. 그런데 천도교를 해서 좋은 점은 대교당에 나가면 짜장면을 자주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웃음) 그리고 저희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신 춘암 박인호 상사님이신데 정말 멋진 분이신 것 같아요. 정수민 : 제가 대교당에서 했던 어린이날 행사 때 한복을 입고 '양천주'를 읽었어요. 그리고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천도교인이신데요. 가끔 따라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친구들에게는 천도교를 설명하기가 좀 어려워요. 이번에 한울인성캠프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너무 좋아요. 여기서 알게 된 언니랑도 친해졌어요. 김교영 :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마술쇼도 재미있었어요. 어린이 시일식 할 때보다 훨씬 좋았어요.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놀았던 것도 너무 신났고요. 피자랑 치킨을 먹을 수 있어서도 좋았어요. 천연염색 수건 만들기 체험을 했는데 할머니 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아요. 신지아 : 저는 아기 때부터 천도교에 다녔어요. 엄마, 아빠, 할머니 따라서요. 오늘 이 캠프에 와서 친구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어서 너무 좋았어요. 이번 캠프를 마치고 돌아가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자랑할 거예요. 이지후 : 저는 부산에서 왔어요. 13살입니다. 부산시교구에 나가고 있어요. 천도교에 다니면서 천도교에서는 사람과 생물, 사물 모든 것을 한울님으로 모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번 캠프에서 친구들 만나서 좋고 이 친구들은 또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될 것 같아요. 김경진, 김하윤, 김지후 : 조금 멀어서 오는 게 힘들었지만 참 기대가 컸어요. 마술 공연도 그렇고 체험프로그램도 재미있었어요. 암벽등반 체험이랑 숏폼 만드는 것도요. 여기는 숙제도 없고 너무 좋아요. 피자랑 치킨을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친구들이 생긴 것도 좋고요. -
전성환 경청통합수석, 중앙총부 교령사 예방포덕 166(2025)년 9월 3일, 대통령실 전성환 경청통합수석이 천도교중앙총부 교령사를 예방해 박인준 교령을 비롯한 중앙총부 교역자들과 환담을 나누고 종교 정책의 형평성과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사업, 경주 용담 성지 육성 등 교단 현안을 폭넓게 논의했다. 이날 만남에는 강병로 종무원장, 전명운 교화관장, 서소연 교무관장, 최인경 사회문화관장, 이철호 경청통합수석실 행정관 등이 배석했다. 전성환 수석은 교령사를 예방한 자리에서 천도교의 역사적 공헌과 오늘의 과제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었고, 제기된 사안들에 대해 “살펴보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박인준 교령은 국가 지원사업의 자부담 규정이 규모가 작은 종단에 과도한 부담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10억 지원에 1억 자부담”과 같은 일률적 기준이 교단 현실과 맞지 않아 필수 사업이 추진되지 못하거나 회계 운영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박 교령은 “천도교는 3.1혁명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헌신을 한 전통을 지닌 종단”이라며, 종교 간 상생을 위해 실효성 있는 차등, 완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 수석은 “여러 시민, 종교 단체가 같은 조건 속에 있지만 제안을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박인준 교령은 포덕 168(2027)년 해월 최시형 신사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중앙총부에서 계획하고 있는 다큐 영화 제작, 국제학술심포지엄, 성지 정비 등 주요 사업을 제시했다.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은 해월신사 다큐 영화는 “한 종단 지도자의 전기”가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으로 기획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독립유공자 예우와도 연결되는 공적 기억 회복을 도모하겠다는 취지다. 박 교령은 국제학술심포지엄은 동학 사상의 보편가치를 세계 지성들과 함께 논의해 ‘K-동학’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고, 천도교인의 신앙과 실천이 오늘의 인류사회에 기여할 길을 모색하는 자리라고 설명하고, 해월신사가 참형 당한 단성사 앞 역사 현장에 기념 동상(좌상)을 조성해 시민들이 기억을 체험적으로 만나는 장으로 삼고자 한다는 제안을 밝혔다. 지하 구조 등 현실 조건을 고려해 안전한 좌상 형태로 검토 중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에 더해 경주 용담 성지와 경주동학수련원 일대를 국가 차원에서 동학역사문화공원으로 육성할 것을 건의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도를 받은 천도교 제1의 성지 용담을 체계적으로 정비해 신앙과 교육, 문화가 어우러진 시민 교육의 장으로 삼자는 구상이다. 천도교가 지닌 역사교육 자산을 공공과 협력해 확장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박 교령은 의암 손병희 성사가 우이동 봉황각에서 481명의 지도자를 길러냈고, 그 인재들이 3.1운동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3.1운동기념관 조성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또한 방정환 선생이 의암성사의 사위이며 ‘어린이날’의 창시자라는 역사성을 바탕으로, 국내외 아동 인권, 문화 행사를 연계한 프로그램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이날 전성환 경청통합수석과의 환담 자리에서 박인준 교령을 비롯한 중앙총부 교역자들은 동학 천도교 166년의 헌신과 희생이 국가 발전에 기여한 바를 분명히 하며, 정책 결정권자의 인식 개선과 종교정책의 공정성을 거듭 요청했다. 전 수석은 현장의 목소리를 대통령실에 충실히 전달하겠다고 하였고, 교단은 관련 자료를 추가로 정리해 정부 부처와의 협의도 병행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