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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전주와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이 글은 포덕 166(2025)년 9월 17일, 전주문인협회 초청(완산도서관) 특강 원고이다. 1. 종교사적 관점으로 본 역사관 우리는 흔히 서양의 역사는 기독교(가톨릭, 개신교)의 역사라고 말한다.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의 상징적인 역사는 무엇인가? 보통 동양은 불교 문명권이라고 말한다. 물론 유교[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공자가 체계화한 종교적·윤리적·정치적 사상 체계이다. 유교는 인간관계 속에서의 도덕적 실천, 사회 질서의 유지, 정치적 통치 이념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불교, 도교와 함께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이념 체계인 삼교(三敎 유교, 불교, 선교) 중 하나로 분류된다.], 힌두교[(힌두교(हिन्दू ध, Hinduism)는 인도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로, 인도, 네팔, 발리 등지에서 주요 종교이다. 2020년 기준으로 11.6억명(세계 인구의 15%) 이상이 믿으며, 신자 수는 기독교, 이슬람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이슬람교[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uslim)이라는 용어는 ‘절대 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알라(Allah)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기독교 등의 셈족계 제종교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크교(시크교는 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창시된 종교이다.), 자이나교[(자이나교(Jainism)는 인도지역에서 발원한 인도 계통의 종교로 명칭의 어원인 '지나'는 승리자라는 의미이며 '자이나'는 승리자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등 각 나라별로 민속종교까지 그 영향력은 과히 역사라 할 정도로 막대하다. 17세기 초 서양학문으로 이해되었던 서학(西學)은 18세기 후반 신앙으로 받아 들려지며 모진 탄압에서도 교세는 나날이 확장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유교 즉 성리학이 국교라 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에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종교사상이 창명되었고, 훗날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동학은 1860년 4월 5일(음력) 경주 용담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창명한 새로운 도(道)요, 종교철학사상이다. 동학의 명칭이 확정되기 전 처음에는 무극대도 (無極大道)라 칭하였고, 그 다음에는 천도(天道)로 칭하다가 결국 동학(東學)이라 반포하였다. 그런데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동학 명칭을 세상에 알릴 때 전라도 남원땅 은적암에서 동학론, 즉 논학문을 지어 반포함으로 훗날 전라도에서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사상적 계기가 된다. 당시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남원을 중심으로 전주 등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동학을 포덕하게 된다. 2. 동학이라는 명칭의 유래 동학의 동(東)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동의보감(東醫寶鑑)(조선 시대, 1596년에 임금의 명을 받아 1610년에 허준이 완성한 의학 서적),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東醫寶鑑)조선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동서와 남북의 이어보기에 초점을 맞춘 병풍식의 첩 형식을 채택하여 1861년에 간행한 지도집. 지도첩.]’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조선(朝鮮)의 국명(國名)에서도 동(東)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선의 어원이 ‘동방’과 ‘광명’이라는 뜻으로, ‘동쪽의 해 뜨는 곳, 또는 아침의 나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곳,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학은 ‘동방의 학문’이란 뜻으로,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어둠을 걷어내고 다시 밝음을 열어가는 새로운 세상의 학문이자 사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앞서 설명했듯이 무극대도, 천도, 동학이라는 여러 명칭을 사용하였다. 훗날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 뒤를 이어 동학 3세 교조가 된 의암 손병희 성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세상에 크게 선포하였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저술한 〈교훈가〉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 받아내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논학문(동학론)〉에 “내가 또한 동(東)에서 나서 동(東)에서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나 학(學)인 즉 동학(東學)이라.”라고,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일반적으로는 동학의 명칭에서 서학(西學)에 반대하고 대응하는 차원에서 생겨났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짧은 생각에 머무른다. 어느 사상이나 종교가 탄생할 때 무엇을 반대하고 대응하는 차원에서 나왔다고 정의하면 그 사상에 대한 정당성은 물론 바른 이해를 하는데 너무 협소해진다. 물론 당시 서학과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은 분명 존재했다. 동학이 창도되는 전후에 서학만이 문제가 되었던 게 아니다. 당시 시대 상황은 외부 세력 못지않게 조선의 내부문제도 심각하였다. 인간을 구별 짓는 신분차별과 탐관오리의 착취, 외세에 대응하지 못하는 조선조정,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깨어나는 민중, 나라의 주인이라 자각하는 백성들, 인권과 자주,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는 시대적 상황 등 수많은 원인들이 있었다. 3.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사상에 근거하여 일어난 우리 근대사의 반봉건·반외세 자주독립운동이다.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의 관계는 ‘근원 없는 물이 없고, 뿌리 없는 나무 없다’로 비유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생과 전개에서 동학사상이 빠질 수 없다는 의미다.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시천주(侍天主) 즉,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즉천(人卽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또한 수운 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의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하라’는 인내천(人乃天)·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펼쳤다. 4. 동학 집강소 설치와 민주자치시대 동학농민혁명은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무장기포와 황토현 승전, 그리고 장성 황룡에서 전라감영군과 경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또한 장성, 정읍, 태인, 원평, 독배재, 삼천동, 효자동, 용머리고개를 거쳐 1894년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조선 건국자의 본향이자 호남의 수부(首府) 수부(首府)(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도시, 한 도의 감영이 있던 곳)였던 전주성을 무혈입성(無血入城)으로 함락시켰다. 전주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의 수부였기 때문에 전주지명을 확장하여 호남, 즉 전라도까지 포함한다고 봐야 한다. 조선 역사에는 호남의 가치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말이 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어록에 나오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만약에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물론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전라도는 오늘날의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를 포함하였다. 그 행정구역의 중심지가 전주였다. 당시 전주성 안에는 전라감사가 근무하는 감영 즉 선화당이 있어 명실상부하게 전라도의 행정중심지이자 지방정치를 총괄하였다. 그래서 호남제일성, 호남제일문 등 역사적 건물에도 전라도 상징의 명칭이 따라 붙었다. 바로 그 전라도 행정의 중심이자 조선 왕조, 즉 이씨 조선의 본향인 전주성을 동학혁명군이 점령하고 전라도 일대를 호령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특히 조선 정부와 동학혁명군이 전주화약을 통해 집강소에 의한 민주자치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폐정개혁안 12개조>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짓게 한다.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 수부인 전주성 점령은 여느 지방도시를 점령한 사건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전라도 각 군현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더욱이 전주성 선화당에 집강소 총본부격의 자치, 통치기구가 있었다. 이는 동학혁명군의 일방적 자치행위가 아니라, 전봉준 총대장, 손화중 총관령 등 혁명군 대표와 조선왕조의 위임을 받은 홍계훈 초토사와 김학진 전라감사 간의 협약에 의해 폐정개혁을 수행한 국가적인 차원이었다. 5. 전주동학에서 꼭 기억해야 할 사람 전주동학농민혁명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서영도 장군과 이복용 장수 이야기다. 서영도 장군은 완산 접주 출신으로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전주성 밖 완산 집강소 책임자로서 폐정개혁을 혁명적으로 단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혁명 좌절 후 1895년 3월까지 최후 항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남문 밖 초록바위에서 ‘동학거괴 서영도’ 이름으로 공개 총살형을 당했다. 이는 그의 역할과 활동이 대단히 컸음을 보여준다. 이복용 장수는 소년접주 출신으로 완산전투 시기에 선두에서 큰 활약을 하다가 전사하였다. 이복용은 애기접주의 별칭으로, 혁명군의 사기진작은 물론 관군들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였다. 애기접주 즉 소년접주들의 활약은 전국적으로 용맹을 떨쳤는데, 대표적으로 해주접주 김구(김창수), 장흥접주 최동린, 전주접주 이복용 등이 상징적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전주성 점령 과정에서 여성 동학군들이 큰 몫을 해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여성 동학도들이 성안에 몰래 들어가 대포 총구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등 목숨을 건 일화들이 많다. 여성접주의 상징적 인물은 장흥 지역에서 활약한 이소사 여장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6. 2차 동학농민혁명과 항일무장투쟁 일본군의 침략에 맞선 2차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과 대규모로 항쟁한 우금티 전투 패배 후 각 지역으로 흩어지거나 보은, 장흥, 대둔산 최후항쟁처럼 집단적으로 저항한 여러 이야기가 있다. 전주지역도 마찬가지로 최후항쟁 후 쫓기고 죽임을 당한 참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주 초록바위 천변에서부터 다가산 천변에 이르는 지역에서 체포당한 동학의병들은 숱한 죽임을 당했다. 일본 국왕 메이지의 "동학당을 모조리 살육하라"는 특명을 받은 일본군과 그 지휘를 받았던 관군은 초멸작전을 펼쳐 총살형은 물론이고 참수형, 산 채로 불태우는 화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살하였다. 접주는 물론 무명 동학혁명군 수백, 수천 명이 처형을 당해 전주천의 물이 1개월 이상 핏물로 흘렀다는 말들이 전해오고 있다. 바로 이런 역사의 현장에 기념비는 물론 표지판을 세워 역사를 잊지 않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1차 기포, 반외세 2차 기포, 보국안민· 광제창생·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대의를 위해 기포하여 엄청난 피해로 풍비박산이 난 듯 했으나, 천도교로 거듭난 동학은 기미년 3‧1혁명을 통해 제2의 동학혁명으로 전개되었으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 근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고, 세계 혁명사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역사였다. 그 혁명 정신은 독립운동은 물론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5‧18민중항쟁, 6‧10민주항쟁, 최근에는 촛불혁명, 빛의 혁명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분단된 남북통일을 달성해야만 동학농민혁명은 성공한 혁명이 될 것이고 희생된 동학선열들의 후손된 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특히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동학농민혁명의 진정한 명예회복과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될 것이다. 7. 동학농민혁명과 문학의 향기 동학농민혁명을 시나 소설로 펴낸 대표작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동학혁명 1백주년(1994년) 즈음 우리들은 동학농민혁명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가를 말할 때 남한의 송기숙 교수(역사소설 『녹두장군』), 북한의 박태원 선생(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꼽았다. 송기숙 교수는 ‘녹두장군’ 개정판 후기를 통해 '민중이 자발적 합의에 이르면, 그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송기숙 교수께서 살아생전 나와 몇 번 만나 대하소설 『녹두장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작가가 글을 쓸 때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녹두장군』도 원래 10권으로 계획했지만 12권으로 늘어나면서 글이 중간 중간에 늘어졌다”고 고백하였다. 박태원 선생은 『갑오농민전쟁』 집필 과정에서 시력과 전신마비 등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부인 권영희의 도움으로 완성했다고 알려졌다. 박태원은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까지 방대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1894년 당시의 법제와 풍속, 역사적 사건들을 연구하고 고증하였다 한다. 동학과 관련한 수많은 문인들을 소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분 더 말씀드리자면 신동엽 시인의 대서사시 「금강」을 뺄 수가 없다. 나는 동학 관련 책 중에 「금강」을 가장 신명나게 읽었다. 읽고 또 읽고 한 열 번은 읽은 것으로 기억난다. 「금강」은 실존인물인 전봉준과 가공인물인 신하늬로 대표되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동학혁명을 형상화하였다. 「금강」은 동학혁명이 상징하는 민족적 수난과 고통의 과정이 이 땅 역사의 비극성을 새로이 인식하게 해주며, 새삼 이 땅의 주인이 한민족 스스로이며 민중 그 자체임을 소중하게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큰 의미를 남겼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그리고 우리 고장 이곳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 두 분을 소개한다. 하나는 동아일보 신춘당선작 안도현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이다. 안도현 시인은 한 때 나와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그리 길지 않은 시이다. 시 전문을 그대로 소개하고 각자 느낌을 알아서 평가해보기 바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문학동네, 1997년 1쇄, 2002년 4쇄) 중에서. 작가들을 소개할 때 빼먹으면 좀 서운해할 사람이 있다. 바로 이광재 소설가이다. 이광재 작가가 동학 관련 책자 전봉준 평전 『봉준이 온다』 등 여러 권을 출간했지만 최명희 선생기념 혼불문학상 수상작 『나라 없는 나라』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나라를 잃어가는 조선 말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동학농민군, 선비들, 정치가들,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들의 치열하고 진지한 삶을 담아냈다는 평가들이다. 이광재 작가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민주주의의 화신이라 불렸던 김근태 선생의 조직에 들어가 함께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동학 관련 유적지도 함께 도보로 탐방했던 기억들이 솔솔 난다. 이 작가는 최근에 장편소설 『청년 녹두』를 펴냈다. 끝으로 여기에 계시는 시인, 소설가 중에 한강 작가의 뒤를 이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분이 꼭 나왔으면 하는 말로 본 강연을 마칠까 한다. 글 송암 이윤영 전주동학혁명전시관 관장. 저서로는 수운 최제우 선생 일대기 『만고풍상 겪은 손』, 동학농민혁명장편소설 『혁명』, 전주역사문화의 자부심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출간 예정. 오마이뉴스 74화 연재작, 동학문화대상 수상작) 등이 있다. -
울산 여시바윗골 ... 을묘천서 받고 이적을 체험하다(2)대신사는 성동에서 조금 떨어진 유곡동 여시바윗골에 작은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공부를 했다. 여시바윗골은 그 지형이 마치 소쿠리같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가끔 사람들이 대신사를 찾아와 도담(道談)을 나누고는 했다. 이곳 여시바윗골에서 대신사는 어느 이인(異人)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해득하지 못한다는 책을 받고, 이 책의 내용대로 기천(祈天), 곧 하늘에 기도했다. 이를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한다. 을묘천서는 실제로 어떤 책을 받았다기보다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수운 대신사께서 체험하게 되는 종교체험의 한 현상이다. 즉 대신사는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이인을 만나 천서를 받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되고, 이 신비 체험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이란, 지금까지 자신의 밖에서 도(道)를 구하는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안에서 도를 구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을 말한다. 세상으로부터 도를 얻고자 했던 방식을 버리고 기도를 통해 하늘, 또는 한울님이라는 절대적 존재로부터 도를 얻고자 하는 방식을 택한것이라고 하겠다. 윤석산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을묘천서 이전까지는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에서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면, 이후부터는 유신론(有神論)의 입장에서 신으로부터 도(道)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운 대신사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상이라는 일상적 차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기존의 가르침을 만나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았지만, 을묘천서 이후 기천(祈天)을 통하여 하늘, 또는 한울님이라는 일상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없는 전혀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도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구도의 방법이나 대상 등 그 양상이 을묘천서를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을묘천서 이후의 변화는 수운 대신사로 하여금, 용담에서 경신년 4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하였고, 동학이라는 가르침을 세상에 내놓게 한 그 징검다리와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을묘천서는 바로 이와 같은 면에서 수운 대신사, 그리고 동학이라는 가르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울산광역시는 이곳 일대를 1997년 역사문화보존지구로 고시하고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2호로 지정하였다. 1997년 10월 9일 ‘전 수운 최제우 유허지’로 지정된 후, 1998년 최제우의 종현손녀인 천도교인 최말란의 기부채납으로 수운 최제우 유허비가 건립되었으며, 1999년에는 비각이 세워지고 2004년 초가·초당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울산광역시는 2005년 유허지 명칭에서 ‘전(伝)’자를 삭제해 달라는 교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심의를 거쳐 ‘수운 최제우 유허지(水雲崔濟愚遺墟地)’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2015년 국토부의 개발제한구역 내 생활공원 사업 공모에 울산광역시 중구청이 선정되어 최제우 유허지 생활공원이 조성되었다. 또한 최근에 이르러 대신사의 소유였다는 육두락(六斗落)의 논이 있던 자리에 동학관이 건립되었다. 동학관은 총 23억 원의 예산을 들였으며, 건축 면적은 859.46㎡(약 260평)이다. 건물 형태는 단층 콘크리트 한옥이다. 울산광역시와 울산 중구가 함께 추진한 ‘동학관’ 건립 사업은 울산이 동학의 모태가 된 곳임을 알리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2020년 3월에 건립 사업 첫 삽을 떠서, 2022년 3월 31일 개관식을 진행했다. 동학관 자료실은 수운 최제우 선생과 을묘천서, 울산과 동학, 민족종교 동학의 역사 등에 대한 전시물로 꾸며지고, 관리할 울산 중구는 향후 유허지 전체를 관리하면서 ‘최제우’, ‘동학’, ‘울산독립운동’ 등을 주제로 한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하게 된다. 여시바윗골 유허지는 2011년을 기준으로 학생, 관광객 등 단체 관람객은 물론 천도교인과 국내외 동학 천도교 연구자, 문화계 인사 등 연간 5천여 명 이상이 방문하는 곳이다. 앞으로도 동학 천도교는 물론 우리 정신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위상을 떨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다음 회 예고 : '<내원암과 적멸굴> : 대신사께서 득도 전에 수련을 하신 곳'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 (守菴 廉尙澈)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영등포교구, 재개발 속 교당 수호 위한 탄원서 운동 전개영등포교구 교당이 위치한 지역이 재개발 대상에 포함되면서, 오는 10월 재개발 방식이 확정될 예정이다. 이에 영등포교구 동암 조광걸 교구장은 전국 교구장들에게 영등포교구 교당의 존치를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본 교당은 서울 영등포역 인근에 위치한 교단의 중요한 거점 교당으로, 교화 활동의 중심지이자 교인들의 신앙 결집 공간으로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동암 조광걸 교구장은 공공 재개발이든 민간 재개발이든 교당 존치를 기본으로 대응해 나갈 방침임을 밝혔다. 영등포교구는 포덕 93(1932)년 한 교인 가정집에서 집회를 시작해 전세를 전전하다가, 24평 주택에서 교구 운영을 이어왔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포덕 136년(1996) 6월 18일,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의 교당을 봉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 교당에서 시일식을 봉행해온 지 30년을 넘어섰으며, 교구 개설 이후 73년의 역사를 쌓아왔다. 동암 조광걸 교구장은 “영등포교구 교당은 타 교당과 마찬가지로 특정 지역 교인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교단 전체가 지켜나가야 할 교당”이라며, “지금껏 각지의 교당이 재개발 문제가 발생할 때 각자도생 방식으로 대처하면서 토지 보상, 타지 신축은 물론, 현금 청산되어 신앙 공동체가 중심을 잃는 경우까지 있었다”면서 “이번에 영등포교구에서 전국 교인의 동참을 요청하는 사례는 향후 교단 내에서 유사한 재개발 문제에 공동대처해 나가는 전범(典範)이 되어 교단을 지켜나가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거주 지역과 관계없이 천도교 재산을 수호하는 일에 뜻을 모아 달라”고 호소했다. 동암 조광걸 교구장은 전국 교구와 교인들에게 탄원서 서명을 요청하며, 10월 중 탄원서를 취합해 관계 기관에 제출할 계획임을 밝혔다. 영등포교구는 전국 교인의 연대와 참여가 교당 존치의 힘이 될 것이라며,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동참 의사가 있는 교인이나 뜻을 같이하는 일반인은 아래의 번호로 연락하면 된다. 010-9613-0926 (조광걸 교구장), 010-9248-0859(배동호 교무부장), 02-843-0982(영등포교구). -
천도교와 3 · 1운동(19) "와전・왜곡・과장・날조 등으로 인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2.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잘못된 설(說)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하나는 3・1운동 당시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만해 한용운이 낭독하였다는 설이다. 그런데 이 역시 두 가지 설이 모두 와전된 것이며 진실이 아님을 밝혀둔다. 우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왜 모였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3・1운동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게 된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민족대표들은 결코 최후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러한 주장은 민족대표들의 심문조서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언급이 없는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맹점을 이용해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만해가 낭독하였다고 무책임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주장보다 한술 더 뜬 진실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왜곡 사실에 대한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묵암비망록(黙菴備忘錄)『에 확연히 그 진실이 드러나 있다. 『묵암비망록』은 천도교 측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묵암 이종일(黙菴 李鍾一)이 작성한 것이다. 묵암은 어느 누구보다 독립의지가 강하고 성격이 매우 강직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된 당일의 『묵암비망록』 내용을 여기에 소개한다. “12시 전까지 집에 남겨두었던 선언서는 거의 다 배포하였다. 식사도 거의 못하고 서둘러 태화관(泰和館)으로 갔다. 4명이 불참한 가운데 오후 2시경 긴장 속에 독립선언서를 다시 (민족대표들에게-필자 주) 배포해주었다. 의암(義菴)이 나에게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하였으니 크게 낭독하라기에 오자(誤字)를 고치고 그렇게 따랐다.”(묵암비망록, 1919년 3월 1일자) 이것이 위의 두 낭설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다. 민족대표들은 전날 독립선언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장소를 바꾼 것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면 흥분된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로 인해 일본경찰에게 무자비한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래서 태화관에서는 오후 2시 기독교 측 민족대표 4명이 불참한 가운데 묵암이 참석한 민족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의암성사의 지시에 따라 선언서를 낭독했던 것이다. 다만 그 자리에서 만해는 일동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하였다고 『묵암비망록』은 밝히고 있다. 사실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특정인물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불경(不敬)이 될 뿐 아니라 민족대표 전체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유관순과 3・1운동 3・1운동에서의 유관순의 활동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3・1운동 당시 유관순의 역할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논할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3・1운동이 마치 유관순의 주도로 이루진 것과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광경이지마는 청소년들에게 “3・1운동을 누가 했는가” 하고 물으면 열 사람에 7, 8명은 “유관순이 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청소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지성인라는 사람조차 맹목적으로 그렇게 추종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작년 3・1절에 MBC TV는 ‘아우내 장터의 3・1운동’ 재현행사를 중계하면서 “1919년 3월 1일 유관순 열사가 이끌며 전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운운하면서 마치 기미년 3・1운동이 유관순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처럼 방송했다. 그래서 올해 3・1절에도 이런 잘못된 방송이 나갈 우려가 있어서 지난 2월 9일 중앙총부의 종무원장과 교화관장, 그리고 33인유족회 라영의 회장이 MBC를 방문하여 작년의 왜곡보도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고 이에 대한 정정보도와 함께 재발방지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가장 정확하고 공정해야 할 방송에서조차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니 일반 민중들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물론 MBC가 고의로 그런 방송을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중계방송하는 아나운서조차도 유관순의 만세운동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얻어들은 풍월을 가지고 방송에 임한데서 이런 착오가 빚어졌다고 생각된다. 바로 여기에서 3・1운동에 대한 국민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유관순의 유관단체에서 의도적으로 과대 선전하는데도 하나의 원인이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참고적으로 3・1운동 당시 유관순의 역할에 대해 간략히 기술해보기로 하겠다. 유관순은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는데,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에 가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도 참여했다가 유관순과 학생들이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요구로 학생들은 풀려났다. 그 후 3월 10일을 기해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유관순은 병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니며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거사일 하루 전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리는 것을 신호로 인근 여러 산에서 불길이 솟아올랐고, 드디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쳐 총격을 가해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결국 유관순은 재판에 회부되어 3년 징역 언도를 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 된 후에도 계속 항거하자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악화되어 1920년 17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유관순이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4월 1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유관순이 처음부터 3・1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와전됨으로써 특히 청소년들에게 3・1운동의 진실이 왜곡 전파되어 잘못 인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청소년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한 객관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3・1운동과 관련하여 와전・왜곡・과장・날조 등으로 인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이 허다하다. 이러한 일은 3・1운동이 극비리에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도 일단의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자파이기주의에 치우쳐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곡필(曲筆)에 더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사초(史草)를 기술함에 있어서 선열과 후세에 부끄러움이 없는 집필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부산시교구 9월 월례수련 및 여성연합회 수련 강도회부산시교구(교구장 정신당 박차귀)는 9월 1일부터 7일까지 9월 월례수련 및 여성연합회 수련 강도회를 봉행하였다. 이번 수련은 무더위 속에서도 많은 교인들이 참석해 뜨거운 신앙심으로 공부에 전념하며 깊은 수행의 시간을 가졌다. 이번 월례수련은 부산시교구 수련실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되었으며, 주문 합송, 묵송 수련, 기도식, 강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특히 교인들은 한울을 모시는 마음으로 경전을 함께 합송하며 마음을 모으고, 묵송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통암 서종환 의창수도원장이 이번 수련에서 강의를 맡아 뜻깊은 수련의 깊이를 더했다. 폐강식은 9월 7일 시일식 후 마지막 수련에 이어 열렸으며,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고 그간의 수련 성과를 되새기며 신앙적 결의를 다졌다. 부산시교구는 “무더운 날씨에도 끝까지 함께해 주신 교인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며 “이번 수련을 통해 다져진 믿음이 일상에서 더욱 빛나길 바란다”고 전했다. -
‘진주소년회 105회 기념식’ 천도교 진주교구 후원으로 개최천도교 진주교구가 후원하고 ㈔동학소년회가 주최·주관한 진주소년회 105주년 기념식이 지난 2일 오전 진주시 중안동 진주교육지원청 앞마당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진주 지역의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 관계자, 천도교 교인, 일반 시민 등 40여 명이 참석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천도교 진주교구, 소년운동의 정신 되새겨 기념식은 ▲기념사 ▲동학소년회 선언문 낭독 ▲독립만세 퍼포먼스 등으로 진행됐다. 정의적 천도교 진주교구장은 기념사에서 “오늘날 우리 어린이와 청소년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된 나라에서 원하는 꿈을 펼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며, “그러나 이 자유는 평화를 열망한 선열들의 피와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잊지 말고, 감사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의적 교구장은 “천도교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가슴에 새기고, 어린이와 청소년이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며 세상을 밝히는 한울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진주소년회, 전국 소년운동의 뿌리 진주소년회는 1921년 5월 1일 진주에서 조직된 국내 최초의 소년운동 단체다. 이 단체는 전국 소년운동의 시작이자 어린이날 제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정신을 바탕으로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며, 교육과 계몽 활동을 전개해왔다. 현재 ㈔동학소년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역사의식과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진주시와 진주교육지원청 차원에서도 진주소년회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계승할 수 있는 행사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번 기념식은 천도교가 어린이와 청소년의 성장과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리였으며, 동학소년회가 걸어온 100년의 발자취가 새로운 세대에게 이어지는 뜻깊은 계기가 되었다. 사진제공 동학소년회 -
해월생태학교, 9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운영천도교 한울연대와 공익법인 동학소년회가 공동 주최하는 제5기 동소경주 해월생태학교가 오는 9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경북 경주시 원효로에서 열린다. 이번 프로그램은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라는 주제로 진행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 감수성을 키우고 지구살림의 가치를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양한 체험 중심의 프로그램 해월생태학교는 초등학교 1학년 이상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며, 텃밭 가꾸기, 마당 숲 체험 등 자연 친화적 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또한 ▲리사이클과 환경 실천 교육 ▲산행 및 숲 탐험 ▲벽화 그리기와 집 짓기 ▲시장에서 재료를 구해 직접 요리해 먹는 ‘생존 요리사’ 체험 등 다양한 지구살림 활동과 예술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참가 정원은 15~20명으로 소규모로 운영되며, 4주 과정 참가비는 4만원(재료비 포함)이다. 한 회차만 참가할 경우에는 1만 5천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농협 계좌(351-1307-0206-63, 사단법인 동학소년회)로 납부 가능하다. 어린이 중심의 생태교육 주최 측은 “모든 활동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스스로 주관하고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며, 자발적 학습과 실천을 강조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진행되며, 종료 시간은 당일 활동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조정될 수 있다. 자세한 문의는 담당자(사라쌤, ☎ 010-5635-8600)에게 연락하면 된다. 해월생태학교는 자연 속에서 아이들이 생명과 환경의 소중함을 체험하며, 공동체적 가치를 배우는 장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
포덕 166년 9월 14일 중앙대교당 시일설교 "개접과 파접"정암 주선원 동학민족통일회 의장은 해월 신사의 가르침을 토대로, 우주 만물에 내재한 한울님의 기운을 깨닫고,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참된 신앙임을 강조했다. 주선원 의장은 특히 ‘행시(行侍)’, 즉 능동적으로 한울님을 모시는 삶의 자세를 강조했다. “시천주는 단순한 예배나 형식적인 신앙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며, “내 안에 깃든 한울님의 기운을 일상에서 드러내는 행위야말로 시천주의 완성”이라고 설명했다. 주선원 의장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가치 혼란과 인간 소외의 문제를 언급하며, “과거의 낡은 삶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모든 인간을 존귀하게 바라보는 마음을 회복하고, 나와 이웃, 그리고 세상을 한울님처럼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이 설교가 자기 성찰을 통한 내적 혁신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모든 이들이 진정한 도운 사람, 즉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거듭나길 기대한다”고 설교를 마무리했다. 이번 설교는 전통 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되새기며, 천도교인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15일○ 1935년, 독일 뉘른베르크법 공포. 뉘른베르크법은 나치 독일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발표된 반유대주의법으로,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률」과 「국가시민법」의 총칭이다.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법은 유대인의 권리를 박탈한 법률로 악명이 높다. 같은 해 11월에는 로마니(Romani people, 유목 생활을 하는 인도-아리아족), 흑인 등에 대해서도 규정이 확대되었다. ○ 1950년,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우리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전선은 고착화했고 북한군은 길어진 보급로 등으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역공을 펼칠 기회를 엿보았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보급로를 차단당한 북한군은 완전히 사기가 꺾였고, 국군과 연합군은 9.28 서울수복을 통해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냈다. ○ 1959년,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yov, 1894~1971) 미국 방문. 스탈린 사후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된 흐루쇼프는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회 대회에서 스탈린을 강하게 비판했고, 이를 지켜본 서방 세계는 소련과의 평화 공존을 모색할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내 1959년 흐루쇼프는 소련의 최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군축 노선을 확정했다. 이로써 세계는 냉전에서 데탕트(Détente, 긴장 완화)의 시대로 돌아서게 된다. ○ 1977년, 고상돈(1950~1979),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복. 1977년 9월 15일 낮 12시 50분, 한국원정대 고상돈 대원은 “여기는 정상, 더 오를 데가 없다”며 해발 8,848m의 히말라야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본부로 무전을 쳤다. 오전 5시 30분 제5 캠프를 출발한 지 7시간 20분 만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8번째 에베레스트 등정국이 되었으며, 고상돈 대원은 세계에서 56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산악인이 되었다. -
진심불염(眞心不染)진심불염(眞心不染) 1. 나와 한울이 둘이 아니요 성품과 마음이 둘이 아니요 2. 성인과 범인이 둘이 아니요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요 참된 마음은 물들지 않으니 천체를 스스로 쓰며 나를 자유로 쓰느니라 노랫말: 『의암성사법설』 「진심불염」 편에서 발췌 / 작곡: 김정희 노래: 조의선 / 대금: 김대곤 / 가야금: 이서영 / 장구: 방지원 / 음원 녹음․편집: 조든든 “1998년 12월 15일 천도교에 입교한 이래, 우리 음악 어법에 바탕을 둔 새로운 천덕송을 만드는 것이 나의 과제라 생각하면서도, 내 공부가 일천하고 여건이 여의치 않아 미루어왔다. 2016년 8월 박사학위를 받은 후, 늘 염두에 두었던 작업을 시작하였다. 나의 전교인이자 은사이신 혜원당 김춘성 선생님의 환갑을 앞두고, 평생을 천도교에 헌신하며 살아오셨고, 지금도 그러하신 선생님께 가장 좋은 보답은 바로 새 천덕송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이었다. 그 한 달 동안 경전에서 노랫말을 발췌하고, 선율을 만들고, 반주를 붙이고, 연주자와 녹음 담당을 섭외하고, 몇 차례의 연습과 녹음, 믹싱, 마스터링까지 모두 해야 했다. 다행히 최고 수준의 연주자와 녹음 담당이 순조롭게 섭외되었고,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져서, 선생님의 환갑 생신날, 인사동에서 뵙고 들려드릴 수 있었다. 이 곡은 내가 여태껏 연구한,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음악의 어법을 바탕으로 작곡하였다. 특히 이 곡, 「진심불염」은 박사 논문에서도 다룬 전남 영광군 「논매는소리-풍장소리」의 메기는소리를 모티브로 쓴 곡이다. 토속민요는 그 민족의 음악적 모국어이다.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에 의해 거듭거듭 불리고 다듬어지며 전해 내려온, 집단지성이 이룩한 자생적 예술의 결정체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대표적 종교인 천도교의 천덕송이 이처럼 민요에 바탕을 두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_ 국악작곡가/민요연구가 김정희 김정희(영등포교구) 국악작곡가이자 민요연구가 부산예술대학 음악과 졸업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한국음악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전문사 졸업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박사 졸업 전(前)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 ※ 유튜브를 통해서 위 곡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NnOgOBHwk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