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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진성당 최말란 선도사 영결식 봉행고 진성당 최말란 선도사의 영결식이 시원포 장례위원회 주관으로 포덕 166(2025)년 8월 19일 오후 9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봉행되었다. 영결식은 천도교 의식에 따라 엄숙하게 봉행되었으며, 최말란 선도사의 약력 소개에 이어 박인준 교령의 조사, 최상락 용담수도원장의 조사가 진행됐다. 이후 위령송 합창과 분향, 마지막으로 유족을 대표하여 김성환 연원회 의장의 인사가 이어졌다. 영결식에는 강병로 종무원장을 비롯한 중앙총부 교역자와 많은 교인들이 자리를 함께하며 고인의 삶을 기렸다. 최말란 선도사는 포덕 64(1923)년 6월 경북 경주시 현곡면에서 태어나 포덕 101(1960)년 입교하였으며, 이후 평생을 천도교 신앙과 교단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포덕 124(1983)년 환갑을 맞아 용담정에서 100일 독공 후 영통을 얻었으며, 포덕 131(1990)년 대신사 태묘 묘비 제작에 애쓴 공로로 중앙총부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포덕 138(1997)년에는 대신사님 장남(세정)의 순도지인 옛 영양관아터 흙을 채취하여 부인 강릉김씨 묘와 합장으로 안장하였고, 포덕 139(1998)년에는 울산시 유곡동 여시바윗골 대신사님 유허비 제작을 위해 특성금을 헌납한 공로로 유허비 제막식에서 공로패를 받았다. 또한 여시바윗골을 사적지로 보존하는 성역화 사업에 앞장섰으며, 포덕 141(2000)년에는 시원포 선도사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에 용담정 내 대신사님 존영 우측의 향목 병풍을 기증하고 포덕 148(2007)년에는 여시바윗골 대신사 유허비 공사 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등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포덕 149(2008)년 12월 완공된 용담수도원 내 진성관은 전액 최말란 선도사의 특성금으로 건립됐다. 또한 포덕 154(2013)년에는 대신사 생가 복원 공사의 기초설계도를 작성해 경주시청 문화과에 제출함으로써 대신사 생가 복원에 일조하였다. 포덕 155(2014)년 3월 여성회 창립 90주년 행사에서 공로패를 받았으며, 이 밖에도 30여 회 이상의 헌정 사례를 남겼다. 이날 영결식은 평생을 시천주 신앙의 길에서 성실과 헌신으로 살아온 고인의 삶과 대신사 성역화 사업에서 남긴 빛나는 업적을 되새기는 자리였다. -
동학학회 제57회 추계학술대회, “동학과 현대”의 길을 묻다동학학회가 제57회 추계학술대회를 열고 ‘동학과 현대’를 주제로 철학·경제·문화·문학 전 영역에서 동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동학학회(회장 조극훈)는 8월 29일 수운회관 8층 천도교종학대학원 강의실에서 교단 안팎의 연구자와 교역자, 교인들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학술대회를 열고 동학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가 될 수 있는지를 성찰했다. 조극훈 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무더운 날씨에도 많은 분이 참석한 데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강병로 종무원장이 대독한 축사에서 박인준 교령은 “오늘 학술대회 준비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며, “동학 천도교를 흔히 ‘오래된 미래’라고 표현한다. 이는 동학 천도교가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가치를 담고 있으며, 미래를 향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또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학술대회 주제를 ‘동학과 현대’로 한 것은 많은 면에서 동학 연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며,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현대 동학에서 찾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오늘 학술대회에서 밝혀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동학학회 고문을 맡고 있는 이정희 전 교령은 "동학학회는 지난 30년간 많은 논문을 생산하고 지속해서 발표해왔다. 특히 오늘 학술대회의 주제인 '동학과 현대'에 거는 기대가 크다"며 "동학이 어떻게 우리 삶 속에서 구현되고 확산되는가에 대해 심층적인 내용이 오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동학과 현대, 오늘의 문제를 비추다 기조강연은 임상욱 교수(숙명여대)가 맡았다. 「동학의 오늘: 우리 삶을 관통하는 상생의 길」에서 임 교수는 인내천, 만물일체, 후천개벽 사상을 현대 사회의 위기와 연결했다. “기후위기와 불평등, 교육 위기의 뿌리에는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도구화한 문명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며 “동학의 상생 철학은 이를 치유할 수 있는 근본적 자원”이라고 말했다. 특히 교육 현실을 언급하며 “아이들은 놀이와 성장을 통해 배워야 하지만 경쟁 중심 사회는 아이들의 건강과 창의성을 해치고 있다”며, 동학의 눈으로 본 교육은 생명 존중의 실천임을 강조했다. 그는 “동학은 민중운동의 역사적 성격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의 시민운동과 세계 시민사상으로 이어져야 한다”며, 동학의 ‘오늘’을 곧 상생의 길로 규정했다. 제1주제인 경제 영역에서는 최배근 교수(건국대)가 「모두를 위한 경제: 경제민주주의의 실현 방안」을 발표했다. 최 교수는 한국 사회가 지난 세대 동안 겪어온 불평등 구조와 그로 인한 저출산, 노인 빈곤 문제를 지적하며, “경제민주주의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삶의 토대”라고 강조했다. 토론에 나선 김영진 교수(경희대)는 “경제민주화 개념의 역사적 맥락 설명이 부족하다”고 했고, 이관재 교수(공주대)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오늘에 적용하면 모든 국민이 경제적 권리의 동등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평가했다. 제2주제 문화 영역에서는 성지윤 교수(평택대)가 「동학농민혁명의 디지털 서사 콘텐츠화 가능성」을 제안했다. 그는 “역사와 게임 콘텐츠의 결합은 민중의 기억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일”이라며, 교조신원운동, 고부 봉기, 전주 화약, 우금치 전투 등을 게임 서사로 구현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토론자 우수영 연구원(경북대)은 “공공역사적 가치가 단순화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고, 정진화 교수(성신여대)는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캐릭터와 배경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두 토론자의 의견은 동학농민혁명 콘텐츠가 오락이라는 차원을 넘어 민주주의와 민중의 열망을 디지털로 구현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분명히 했다. 신동엽과 수운, 언어와 영웅 서사로 만나다 제3주제 문학 영역 발표자로 나선 김응교 교수(숙명여대)는 「게임 이후 읽는 신동엽 ‘좋은 언어’와 동학의 천어(天語)」에서 신동엽의 시와 동학 사상의 만남을 탐구했다. 김응교 교수는 “조용히, 당신의 자리를 아프게 눕지 않게 하라”는 시 구절을 통해 폭력적 언어가 아닌 낮은 자의 언어가 민주적 소통을 가능케 한다고 풀이하며, 해월 최시형의 천어 개념과 연결 지었다. 김춘옥 교수(고려대)는 ‘낮은 곳’의 의미 보강을 요구했고, 송봉구 교수(영산대)는 “개벽은 정신적 차원을 넘어 하늘과 땅의 실질적 변화까지 포함해야 한다”며 개벽 사상의 확장을 강조했다. 제4주제인 철학․사상 영역에서 최문형 교수(성균관대)는 「동학사상과 문화유전자 – 수운의 영웅 서사를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그는 수운 최제우의 생애를 영웅 서사 이론과 문화유전자(memetics) 개념으로 해석하며, 동학을 한국적 범주를 넘어 문명사적 대안으로 조명했다. 황묘희 교수(인천대)는 “문화유전자 개념의 설명과 구체적 맥락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했고, 정혜정 교수(동국대)는 “서구 영웅 패턴의 단순 적용은 한계가 있다”며, 수운을 순교자로서 바라보는 시각이 더 적절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학문적 소통, 교단과 사회를 잇다 종합토론에서 안외순 교수(한서대)는 이번 학술대회를 “새로운 소통의 학술회의”라고 규정했다. 안 교수는 “‘동학과 현대’라는 주제에 걸맞게 경제민주화, 디지털 게임, 신동엽의 시, 문화유전자론 등 새로운 주제를 통해 동학을 오늘과 연결하려 했다”며, 외부 전공자와 동학 연구자가 균형 있는 소통을 이룬 점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이번 대회가 경술국치일에 열린 것 또한 “동학을 통해 오늘을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유의미한 방식이자 시간”이었다고 강조했다. 참가자들의 소감도 이를 뒷받침했다. 동두천교구 황규만 동덕은 “교단 안에서 풀지 못한 고민에 외부 연구자들이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었다. 지금은 개선이 아니라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대동교구 성강현 교구장은 “경제, 문화, 문학, 철학을 아우른 이번 세미나는 동학이 과거가 아니라 오늘과 내일의 대안임을 확인시켜주었다”며 “토론자들의 날카로운 지적이 수준 높은 학술대회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이번 동학학회 제57회 추계학술대회는 동학이 여전히 ‘오래된 미래’로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동학학회는 앞으로도 교단과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 속에서, 동학의 현대적 의미와 미래적 비전을 더욱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
오늘의 소사(小史) ○ 8월 30일○ 1785년, 중국 청대의 정치가 임칙서(1785~1850) 탄생. 청의 고위 관료 가운데 드물게 청렴하고 유능했던 인물로, 청에 들어오는 영국의 아편 밀수를 강경하게 단속했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 1882년, 임오군란 후 조선-일본 간 제물포 조약 체결. 조약에 따라 공사관 수비라는 명목으로 일본은 1개 대대를 한성에 파견. 이에 이미 3천 명의 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해 있는 가운데 양국 간 무력충돌의 위험이 증대되었다. ○ 1918년, 러시아 블라디미르 레닌 피격. 범인으로 지목된 파니 카플란이라는 여성은 레닌을 반역자로 여겨 암살을 계획했다고 진술했다. 레닌은 그로부터 6년 뒤 발작 증세로 사망했으며, 이는 총상 후유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통설이다. ○ 1963년, 미국 워싱턴-소련 모스크바 간 핫라인 개통. 국방부 핵전쟁 정책 담당관이었던 토머스 셸링의 아이디어로, 미국에 방문한 흐루쇼프 총리가 이 제안을 수용하면서 성사.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핫라인 확보는 양측의 지상과제로 급부상 -
오늘의 소사(小史) ○ 8월 29일○ 1842년, 청과 영국 간 난징 조약 체결.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이 승리한 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청은 조약에 따라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었으며, 광저우, 상하이 등 5개의 항구를 개방했다. ○ 1910년, 국치일(國恥日).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부의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조인되고, 조인이 성립된 후에도 그 사실을 극비에 부쳤다가 8월 29일 공포하였다. 역사는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기록하고 있다. ○ 1949년, 소련, 미국에 이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 이날 소련은 최초의 핵폭탄 RDS-1의 실험에 성공하고 미국의 핵무기 독점에 종지부를 찍었다. -
인성당 정운벽 선도사 환원(향년 104세)인성당 정운벽 선도사가 향년 104세를 일기로 8월 29일(오늘) 아침 6시 30분에 환원하였다. 빈소는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4호(2층)이며 발인은 8월 31일(일)이다. 상주는 아들 박성기, 박형기 딸 박태자, 박영숙 자부 원영숙, 류홍 손주 박현구, 박우정, 박준구, 박보윤, 박지윤, 박혜윤, 민인기, 민순기 장례 일정은 다음과 같다. ㅁ 환원기도식: 8월 29일(금) 오후 9시 ㅁ 입관: 8월 30일(토) 오후 1시 30분 ㅁ 입관식: 8월 30일(토) 오후 3시(빈소) ㅁ 영결식: 8월 30일(토) 오후 8시 ㅁ 발인 : 8월 31일(일) 오전 7시 ㅁ 장지 : 서울추모공원(원지동) ㅁ 상주 연락처 : 박성기 010-5330-5440 -
광복 80주년 맞아 다시 무대에 오른 <한울사람 손병희>광복 80주년과 의암 손병희 성사 서거 103주기를 맞이하여 충북 청주에서 다시 무대에 오른 음악극 <한울사람 손병희>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번 공연은 8월 15일과 16일, 청주 한국공예관 5층에서 열렸으며 지역 시민들과 청소년들이 대거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독립운동가의 삶을 예술로 되살리다 <한울사람 손병희>는 의암 성사가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의 문”을 주제로 풀어낸 창작 음악극이다. 소년 시절부터 청년기, 그리고 3·1혁명 지도자로서의 삶까지를 7장에 걸쳐 서사적으로 펼쳐 보이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정신을 음악과 연극, 춤이 어우러진 무대를 통해 전했다. 지난해 초연 이후 이번 공연에서는 장면 전개와 음악, 안무, 영상 효과를 보강해 관객들에게 더욱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무대에는 신태희(손병희 역)를 비롯해 이상범, 홍정연, 이기복, 장재영, 진향래 등 배우들이 열연을 펼쳤으며, 특별출연으로 북이너울풍물단이 무대에 함께 올랐다. “역사를 기념하는 것을 넘어, 오늘의 질문으로” 공연을 공동 제작한 창작단체 온몸은 “이번 무대는 손병희 선생이 바친 일생을 단순히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를 다시 질문하는 자리였다”며 “광복 80주년을 맞은 오늘, 손병희 선생의 철학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시민들과 함께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지역 사회에 남긴 울림 이번 공연은 청주시와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이 주최하고, 청주민예총과 온몸이 주관하며 마련됐다. 전석 무료로 진행된 공연은 사전 신청 단계에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며, 가족 단위의 관람객도 눈에 띄어 청주 시민들의 자긍심과 문화적 연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광복 80주년이라는 역사적 의미 속에서 선보인 음악극 <한울사람 손병희>는 지역 문화예술계와 시민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기며,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오늘의 삶 속에서 되새기는 뜻깊은 무대가 되었다. -
[칼럼] 택배 기사 잘못으로 다 썩어버린 농작물 해결하기가끔 일어나는 택배 배달 사고. 누구나 한두 번은 겪었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겪은 택배 사고에서는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문제가 발생했고, 내 잘못은 없는 경우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사람의 다양한 견해도 재미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읽는 이의 이해가 쉽도록 조금 손질하여 쓴다. 정성껏 키워 보냈는데 다 썩어버렸다 내가 농사지은 자연재배 농작물(‘농산물’이 아니고 ‘농작물’이다. 농산물은 파는 것을 전제로 짓는 농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값을 정해서 꾸러미 농작물을 파는 것을 더 이상 안 하고 ‘선물경제’ 또는 ‘호혜경제’ 방식으로만 보낸다)을 보냈는데 며칠 뒤 당사자로부터 받은 사진은 모든 야채가 썩은 모습이었다. 자연재배 농작물은 포장 상태에서도 이삼일은 전혀 썩지 않는다. 당사자에게서 들은 자초지종은 이렇다. 우리 쪽 택배 기사는 수신자 전화번호를 잘못 적었다. 받는 쪽 택배 기사는 적힌 주소가 정확하고 잘 아는 집인데도 택배를 집에 갖다주지 않고 늘 하던 대로 근처 주유소에 갖다 놓았다. 택배가 왔다는 문자 고지가 수신자에게 가니까 늘 하던 대로 수신자가 주유소에 와서 택배를 가져갈 걸로 안 것이다. 그러나 문자 고지를 받을 수 없었던 수신자는 여러 날 지나서 주유소에 들렀다가 택배를 건네받은 것이다. 이러니 자연재배 아니라 뭣인들 이 더운 여름에 농작물이 썩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명상하는 모임에서 좋은 역할을 하는 수신자께 감사 뜻을 담아 내가 보낸 선물이었는데 이렇게 되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수련하는 천도교인으로 모심의 해법이 뭘까를 깊이 고심하게 되었다. 선물을 받게 되어 기뻤던 수신자에게서 의견이 왔다. 명백히 양쪽 택배 기사 잘못이니 책임을 묻고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쪽 택배 기사는 물론 택배 본사와 지사에 연락했는데 서로 발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울림이 컸다. 보상을 받으면 돈을 다 내게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그냥 받은 선물이었으니 그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그다음 말도 돋보였다. ‘우리가 윤석열 탄핵이나 제도 문제 등 큰일에는 잘 나서면서 소소한 개인 일상의 잘못은 귀찮아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사람의 피해를 미리 막는 뜻에서 문제를 제기하자’라는 취지였다. 시천주 해법을 발견하다 이때 나는 이것이 재미있는 놀이감이 되겠다고 여겨져서 온라인 모임 두 곳에 의견을 물었다. 하나는 상당히 진보적인 활동을 하는 모임이었는데 친절한 보상 절차와 썩은 농산물 사진 등의 준비물 목록을 올려주었다. 다른 곳은 명상하는 모임이었는데 자신이 겪은 여러 택배 사고와 처리 사례를 알려주었다. 내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는 글들이 많았다. 나는 명상 단체 카톡 방에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올렸다. 동학 이야기는 들어 보았겠지만 천도교는 잘 모르는 분들이다. 최근에 경주에서 열 다섯 명이 모여서 회비도 없고 프로그램도 없고 발제자도 없이 온전히 한울님 감응하심에 내맡긴 채 너무도 잘 놀았던 모임이다. 나랑 새벽 수련을 5년 여 계속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요 며칠 저는 한 가지 생각에 집중했습니다. 썩은 농작물 배달 사고인데요. 여러 조언을 듣고 용기를 내서 이렇게 처리했습니다. 1) 썩은 농작물을 받은 그분께 야채와 과일을 더 많이 담아서 오늘 다시 보냈습니다. 그분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편지도 써넣었습니다. 그분이 제 수고에 미안해하고 감사하는 걸 많이 느꼈거든요. 그래서 보상 얘기도 꺼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2) 우리 쪽 택배 기사께도 썩은 농작물 사진과 함께 기사님의 실수를 이해한다며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번에 다시 보내는 택배 상자 위에는 사과주스 하나를 올려놓았습니다. 고의가 아닌 단순한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과중한 업무가 이런 실수를 낳았을 겁니다. 3) 이렇게 하니 안타깝고 억울했던 내 마음이 다스려지고 평화롭습니다. 이 무더위에 그 누구도 긴장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봅니다. 택배 기사의 실수도 줄어들 걸로 확신합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내가 이 일을 당해서 나름대로 지혜롭게 처리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 쪽 택배 기사가 원래 부부가 일을 했는데 4년여 전에 배달 과정에서 아내가 택배 트럭에 깔려 죽었다는 사실이다. 운전하던 아저씨가 택배를 갖다주려고 사이드브레이크를 안 채우고 택배물을 들고 뛰어갔는데 약간 경사진 길이었는지 트럭이 움직였고 조수석 아내는 엉겁결에 내려서 트럭을 막아서다가 참변을 당했다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택배 하나 배달하면 300원에서 500원 수수료를 받는다는 것도 알았고 택배 기사는 택배사 직원이 아니고 계약을 맺은 자영업자여서 택배 사고가 나면 배상을 직접 해야 하며 배달 사고가 자주 나면 택배사에서 계약을 해지 당 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5,000원 달랑 내고는 ‘내일까지 내가 정한 그곳에 갖다줘’라는 계약상의 ‘갑’의 위치에 선다는 사실이다. 아미쉬 공동체의 큰 용서 사례 7월에만 택배 기사가 과로로 세 분이나 사망했다는 기사도 보게 되었고 그 원인 분석도 읽었다(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780.html), 로켓배송을 내세우는 ‘쿠팡’이라는 택배회사에서는 택배 분류작업 노동자가 끊임없이 사망한다는 기사는 여러 번 봤다. 사법적 처벌보다는 하워드 제어가 쓴 책 <회복적 정의>에 나오는 개념이 재범률도 낮추고 사회적 정의 실현의 바른길이라고 독서토론에서도 주장했고 내가 참여했던 대안학교 여러 사례에서 봐 왔지만 이를 제대로 실천한 적은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개인적인 일이라면 양보하고 참지. 그런데 사회적 파장이 큰 일은 다르다"라면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겠다라든가 개인 문제가 아니고 시스템이 문제다라는 말에 익숙해 있다. 이번에 나는 이런 공식을 깰 수 있었고 번잡했던 마음의 평화도 얻었고 사회의 정의나 공평도 실현했다고 자부한다. 특히 오래전에 알고 있았던 '아미쉬 공동체 내 총기 난사 사건 처리'를 다시 되짚어보며 큰 배움을 얻었다. 2006년 10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아미쉬의 원룸 학교에서 우유배달원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하여 5명이 사망하는 사건에 대해서다. 범인은 현장에서 자살하였는데 이 사건이 일어나자 아미쉬 공동체는 (뻔한) 진상규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범인이나 당국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키우지도 않았고 도리어 범인 가족을 위로하고 용서하였던 일이다. 충격에 빠져있는 범인의 아내를 직접 찾아 위로했으며, 범인 가족을 희생자 장례식에 초대하기도 했다. 아미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할 수 있도록 우리도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상 퍼플렉시티 ai 자료 참고) 참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 사실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의 억울함과 한탄과 슬픔, 분노를 없애는 신성한 제의라고 하겠다.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가장 합당하고 온전한 것이기도 하다.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겨지는 상대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나는 문제도 해결하고 마음의 평화도 얻었다. 농작물 택배를 다시 받았을 뿐 아니라 위와 같은 취지의 내가 써 보낸 짧은 손 편지까지 읽은 그분은 앞으로 자기도 그렇게 하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이번 택배 사고에 직·간접으로 관계된 모든 분이 상한 마음과 불안에서 온전히 회복되고 우리 사회에 ‘회복적 정의’가 실현되길 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윤석열 비상계엄과 탄핵 등에서 ‘회복적 정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모두가 치유 받는 해법은 쉽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우리의 과제다. 과도하게 분노와 조롱을 키우며 조회수가 많은 유튜버들은 경계하고자 한다. 상대의 잘못에 호통을 치고 비난을 자주 하다 보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 힘들며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어서다. 글 전희식(진주교구)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를 중심으로 본 천도교의 3·1운동 준비과정(2)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지난 호에 이어) 이상으로 대표적인 지역 일부의 사례를 통해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가한 인물들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이들은 각 해당 지역에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천도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군중, 나아가 기독교 등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이들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19년 3월 1일부터 전개된 3·1운동은 이해 6월까지 전국적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사례는 <표 2>와 같다. <표 2>에 의하면, 천도교인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사례는 136개 교구에 이른다. 그런데 이들 만세운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지역 교구에서 전달받았으며, 이를 관내 지역 교구에 다시 배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주대교구의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주교구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1일로, 비교적 일찍 전달되었다. 그렇다면 전주에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전주를 포함한 호남지역은 인종익이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인종익은 신문조서에서 호남지역 독립선언서 전달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월 28일 오전 7시경 보성사의 출판계장 이종일이 나에게 손병희 이하 33명의 조선민족을 대표한 독립선언서를 전주와 청주의 2개소에 가지고 가라고 말하고 (『인종익 및 신문조서』(1919년 3월 11일)) 2월 28일 오전 11시 남대문발 남행 혼합열차를 타고 대전에 이르러 그곳에서 호남선 연결상의 형편으로 1박하였으며, 다음 3월 1일 오전 6시 대전발 호남선 제1번 차에 탑승하여 이리에 이르러, 오전 11시 그 역에서 전주행 경편철도를 갈아타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였으며 (『인종익 신문조서(제1회)』(1919년 3월 4일)) 인종익은 2월 28일 오전 7시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전주교구에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립선언서 2천 매를 받은 인종익은 오전 11시 남대문을 출발하여 대전에서 하루를 묵은 후 3월 1일 새벽 6시 호남선을 열차를 타고 이리에서 오전 11시 경편철도를 이용하여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였다. 인종익은 전주 도착 즉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기 위해 전주역 앞 고사정(현 고사동)에 있는 천도교 전주대교구 인종익의 신문조서에 의하면, 천도교 전주교구는 당시 전주역으로부터 전주읍 입구에 있다고 진술하였다. 로 갔다. 사전에 연락을 받은 교구장 김봉년(2회 참가)이 자리를 비움에 따라 금융원 김진옥에게 독립선언서 1천 8백 매 인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진옥은 2천 매가 아닌 3천 매였다고 하였다.(『김진옥 신문조서』) 를 전달하였다.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김진옥은 신문조서에서 2월 27일 오후 3시경에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인종익은 독립선언서를 3월 2일까지 배포하고 3월 3일까지는 골고루 보급하라고 전달하였다. 『인종익 및 신문조서』(1919년 3월 11일); 『인종익 신문조서(제2회)』(1919년 3월 6일) 인종익이 손병희 외 32명 연명의 조선독립선언서 약 3천 매를 가지고 와서 3월 2일 밤까지 전주교구 관할 하 각 교구에 나누어 보내 3월 2일 밤에 사람 통행이 많은 거리에 살포하라고 하므로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이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전주대교구는 대교구 관할 구역인 임실을 비롯하여 진안, 장수, 김제, 고산 등지의 천도교 교구에 전달하였다. 교구장 김봉년은 인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기로 하였지만, 고종 국장 참가와 서울에서 전개되는 만세시위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 출타 중이었다. 이에 앞서 김봉년은 부득이 자리를 비웠지만 구창근(1차 참가), 김진옥과 독립선언서 배포와 관련한 사전 협의하였고, (「인종익 심문조서(제2회)」(1919년 3월 6일)) 김진옥은 이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관할 교구에 다시 배포하였다. 김진옥은 독립선언서 2백 매를 휴대하고 천도교 임실교구로 가서 교구장 한영태에게 전달하고, 3월 2일 밤중에 배포하라고 인종익의 지시 사항을 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측에도 전달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 삼일운동사 하편』,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494쪽.) 전주대교구가 관할하고 있는 각 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후 전주교구는 전주 시내와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받았던 김진옥은 민영진, 조성덕, 김성문, 김영홍 등에게 3월 2일 밤중까지는 배포할 것을 당부하였다.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전주교구는 시내뿐만 아니라 상관면, 소양면 등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계획을 세우고 지역별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민영진은 3월 2일 12시 서호순에게 독립선언서 4매를 주고 상관면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서호순은 진영섭에게 1매를 전달하고 구장 이경운, 최년태, 박인숙의 문가에 살포하였다. 『서호순 판결문』. 판결문 중 제2회 신문조서에는 “상관면 신리주재소 부근에 산포하였다”고 진술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서호순은 4매보다 많은 독립선언서를 받았다고 불 수 있다. 민영진으로부터 9매의 독립선언서를 받은 김태경은 우선 3월 2일 저녁 7시 유원에게 4매를 교부하였고, 나머지 5매는 김태경이 한광진, 정문명, 채춘만, 유선일 등에게 배포하고 “다수 공동으로 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선동하였다. (『김태경 판결문』.) 유원은 소양면 신교리의 이달수, 유명선, 양영화, 그리고 용진면 공덕리 이완옥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유원 판결문』.) 유선태 역시 민영진으로부터 독립선언서 5매를 받아 시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배포하였다. (『유선태 판결문』.) 이상에서 살펴본 천도교 전주교구에 전달된 독립선언서의 전주지역 배포 상황을 정리하면 하면 다음 <표 3>과 같다. 이처럼 독립선언서가 전주대교구에 전달되자, 전주대교구는 관할하는 관내 교구에 이를 전달하는 한편 전주 시내와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한편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 결과 3월 2일 늦은 밤을 이용하여 전주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일제 측에서 수집한 정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3월 3 일 오전 시중에서 독립선언서 1매를 발견하고 수사 중” (김정명,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原書房, 1967, 316쪽.)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지방의 3·1운동을 확산하는 데 있어서 우이동 봉황각 특별기도 참여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이상으로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이동 봉황각과 3․1운동과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이동 봉황각의 건립은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민족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천도교와 함께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의암 손병희는 삼각산의 정기가 살아있는 우이동 일대를 매입한 것은 ‘종교적 감화’를 위한 수련 도장을 건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장차 민족의 동량을 양성하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둘째, 우이동 봉황각은 천도교의 민족운동 지도자를 양성한 특별교육장이었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 강점 이후 독립이라는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종교적 수련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면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지방의 중요 교역자를 불러 49일 특별기도를 통해 민족의식을 강화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의암 손병희는 ‘이신환성’의 법설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셋째,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인물들이 지방의 3·1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일곱 차례에 걸쳐 특별수련에 483명이 참여한 이들은 3·1운동의 민족대표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는 비록 3·1운동 이전에 실시되었지만, 참여자들은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교구’라는 조직을 충실하게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이동 봉황각 49일 기도 중 의암 손병희의 ‘이신환성’이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끝> 글, 성주현(상주선도사) -
천도교와 3 · 1운동(16) "천도교인들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분견대로 돌진"『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3월 5일의 독립만세 3월 5일 새벽 5시에 예정했던 대로 사방에서 군중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6시경에 이르자 약 5백여 명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8십리, 1백리 밖에서 밤새도록 걸어왔다. 모두들 지쳤으며 식사를 못했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그러나 준비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헌병대에 붙들려 갔으니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다. 상석리 소목다리는 작은 마을이므로 김치와 소주를 동원하여 식사를 대신할 수 있었다. 빈속에 아침술을 마신 관계로 다소 흥분하는 기분도 들었다. (곽훈의 증언) 이윽고 이영화 교구장의 큰 아들인 이학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하석리 구읍 헌병대가 있는 곳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달려갔다. 이 대목을 『3·1운동비사』와 『독립운동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1운동비사』 : “상오 5~6시경에 각 면, 각 리의 천도교인만이 수천명 양덕읍 부근에 집회하여 일변 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태산이 무너질 듯이 부르며 행진하였다.” 『독립운동사』 : “재 밤중부터 사방 길목에 잠복하여 밤을 새우며 각처에서 모여드는 교인들과 일반 장꾼들을 모으니 그 수가 수천 명을 넘게 되었다. 이들 대중은 상석리 천도교구당 앞에서 이학근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헌병대 우편국 등이 있는 하석리 방면으로 시위행진을 개시했다.” 교구가 있는 상석리 소목다리는 동양구읍에서 들어가자면 큰 다리를 둘이나 건너 산모롱이를 돌아 들어가야 한다. 읍내로 들어갈 때에는 장꾼들이 있었을 뿐 아무런 장애사항이 없었다. 시간은 오전 9시경이었다. 만세소리에 놀란 일본헌병과 한국인 헌병보조원들은 시위군중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밀려오는 기세에 눌려 후퇴하여 헌병대에 들어갔다. 노도와 같은 군중들은 헌병대의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러자 저들은 발포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앞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계속 전진했다. 순식간에 40여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이 살상되어 피바다가 되었다. 『독립운동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급보에 의하여 헌병대가 출동, 군중 측의 진격을 막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군중은 헌병대의 방어벽을 헤치고 조수와 같이 밀려들자 저들은 마침내 군중에게 실탄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물러서지 않고 앞사람이 넘어지면 뒷사람이 나가고 하여 사망자 20여 명, 중경상자 50여 명을 내었다.” 『동아일보』가 펴낸 3·1운동 관계 주요사적에 의하면 “3월 5일에는 낫·도끼 등을 지닌 시위대가 일본군경 연합대와 충돌, 40명 이상의 살상 희생자를 내고 일본 측도 1명이 사살되었다”고 했다. 낫과 도끼 등을 지니고 습격했다는 헌병대의 보고는 자신들의 발포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위증 보고이고 일본 측 1명이 사살되었다는 것은 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시계마쯔란 자가 군중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날뛰다가 일본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쏜 총에 맞아 죽은 것을 말한다. 일본 측 기록인 평남도장관(도지사)의 보고에 의하면 3월 8일에도 천도교인들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분견대로 돌진하는 시위운동이 있었다고 했다. 즉 “3월 8일 오전 11시경 근근 12명의 천도교도가 일단이 되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분견대로 향하여 돌진하여 왔으므로 경계 중인 헌병이 이를 저지하고 전부 분견대에 구속하여 일이 없었으나 촌락지방의 천도교도는 분견소 습격을 제거하려한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독립운동사』에는 “3월 8일에 시위운동은 재연. 당일 상오 11시부터 천도교인 1백여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대 앞을 통과하다가 또 다시 10여명이 피검되었다”고 했다. 맺음말 3월 4일과 5일, 그리고 8일에 걸쳐 천도교인들은 구읍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4일의 경우는 준비 중에 있다가 예비 검속을 당했고 5일에는 수천 명(필자는 약 5백명 정도로 추산함)이 피를 흘리며 시위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8일에도 용감하게 소수 천도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다시 시위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참으로 용감하고 대담한 3·1만세운동이었다. 산중에서 농사나 지어먹고 사는 천도교인들이 어디에서 그런 저력이 나타났을까. 이 3·1운동으로 인하여 순국한 사람은 모두 15명으로 밝혀졌다. 이학근·이승근·박만전·한봉조·조정각 등 5명과 기타 10명(실명)이다. 이학근과 이승근은 바로 이영화 교구장의 두 아들이다. 이들은 앞에 서서 총지휘하다가 맨 처음 총에 맞고 쓰러졌다. 특히 중상자도 많았으나 이름이 전해지지 못해 안타깝다. 그리고 피검자는 70여 명이었으나 그 중에서 핵심인물과 지식인을 뽑아 투옥하였다. 재판기록이 없어 몇명이 얼마동안 옥살이를 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3·1운동비사』에 의하면 “곽치현·김병술·이영화·최기창·조정화·윤인권·박응모” 등만 밝혀지고 있다. 이것은 6·25 이후 월남한 천도교인이며 옥살이를 직접 하였던 윤인권이 증언한 것이다. 이들은 평양감옥에서 최고 1년 6개월, 최하 6개월간의 옥살이를 치렀다. 일본 헌병은 3·1운동이 끝나자 곧 보복적으로 천도교구의 사무실을 불질렀다. ‘양덕군지’에 의하면 “종리원은 동양에 있었는데 3·1운동 때 일본 헌병대가 방화하여 복구를 못하고 있다가 군청이 이전함에 따라 1922년께 양덕읍에 대규모로 웅장하게 신축했다”고 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해 그 후 양덕군의 천도교 활동은 3년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중요간부가 학살당하거나 체포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헌병들의 탄압이 심하여 지하에서 활동하였다. 자경대를 조직하여 조직적으로 감시하여 탄압했던 것이다. 하루속히 순국자의 이름과 복역자의 이름, 그리고 중상자의 이름 석 자만이라도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7. 구성군교구의 3·1운동 머리말 3·1운동과 같이 거족적인 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민족주의적인 의식화를 가능케 하는 이념체계와 전국 규모의 든든하고 훈련된 조직체와 활동에 필수적인 자금동원력이 갖추어져 있음으로써 천도교는 3·1운동을 성공시키는데 기여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은 일제의 무단정치로 말미암아 숨도 제대로 못 쉬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훌륭한 재능과 능력을 가졌더라도 민중적인 조직을 갖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새로운 이념체계와 전국적인 민중조직과 자금동원력을 갖추고 있었던 천도교의 지도급 인사들의 활동은 그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일부 젊은 층에서 3.1운동사를 비판할 때 천도교의 이런 점은 도외시한 채 운동을 왜곡시키거나 호도하며 매도하는 일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우리로서 자성해야 할 점은 이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기준이 될 이론체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3·1운동이 이루어진 이후 오늘까지 70년이 넘도록 천도교도가 치룬 3·1운동에 대한 제대로 된 책자 하나 발간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이대로 간다면 미래에는 3·1운동과 천도교는 무관한 운동이 되어버리고 불교나 기독교의 주동적 역할에 따라가거나 노동자·농민의 궐기에 추종한 천도교로 전락할지 모른다. 필자는 작년에도 이 점을 안타깝게 여겨 지방에서 천도교도들이 얼마나 희생적으로 3·1운동을 전개했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몇 개 군 교구를 골라 기록으로 남긴 일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운동을 하였더라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면 후일 입증할 길이 없어진다. 말로 큰소리를 친다 해도 3·1운동을 경험한 세대는 거의 떠나갔으니 누가 우리들의 주장을 받아주겠는가. 지금부터라도 지방에서의 운동기록을 정리하는 것만이 선열들에 대한 보답이요 역사가들에게 정당한 평가를 촉구하는 유일의 방법이다. 금년에는 구성(龜城), 제암리(提岩理), 영산(靈山), 양덕(陽德)에서의 운동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성군의 천도교세 평안북도에서 비교적 격렬히 3·1운동을 전개했던 곳은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약사』에 의할 때 정주·의주·철산·용천·영변·구성·선천 등지였다. 이중에서 사상자가 많은 곳은 정주였다. 구성군에서도 순국자가 21명이며 투옥되어 옥고를 치룬 분이 28명이나 된다. 이들 중 거의가 천도교인이었다는 점에서 구성군 3·1만세시위는 천도교가 주동이 되어 격렬하게 추진했음을 말해준다. 어째서 천도교인들이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앞장섰을까. 죽음도 마다않고 나섰던 이념에는 천도교의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과 아울러 강한 교세와 훌륭한 지도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구성군에 동학이 최초로 전파된 것은 포덕 35년(1894) 경부터이다. 한 가닥은 정주(定州)쪽의 안처흠(安處欽)연원이었고, 한 가닥은 태천(泰川)쪽의 이정점(李貞漸)연원이었으며, 한 가닥은 구성 노동면 면덕동 태생인 문익현(文益賢)연원이었다. 이 세 가닥 연원이 구성군 각지에 동학을 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익현 어른은 포덕 35년에 일찍이 입도(정식 입도는 포덕 38년임)하여 처음엔 접주(接主)였으나 다음엔 수접주(首接主), 대접주(大接主), 그리고 의창대령(義昌大領)까지 역임했다. 의창대령이라면 1만호의 교인을 포덕 했을 때 수여되는 직책이다. 당시 구성을 중심으로 하여 태천·정주·곽산·선천·철산·의주·삭주·창성·벽동·강계·초산 등지까지 포덕이 이루어졌으므로 그 활동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구성에 교세가 급진적으로 확대된 것은 포덕 40년(1899)부터 42년(1901)까지 2~3년 사이였다. 그러나 포덕 45년(1904)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 해 8월에 갑진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심한 탄압을 받아 교세는 역전하여 줄기 시작했다. 특히 을사년(1905)에 일본과의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한국군이 해산되면서 의병활동이 치열해졌을 때 이용구(李容九)의 일진회 매국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교도들이 같은 부류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포덕 51년(1910)에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倂呑)함에 따라 보국안민을 표방한 천도교에 대한 기대가 높아져 교세는 약간 회복되어 2천 5백호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구성군에서 교인이 가장 많았던 면은 노동면(蘆洞面), 서산면(西山面), 천마면(天摩面)이었고 다음으로 오봉면(五峯面), 구성면(龜城面), 방현면(方峴面), 관서면(館西面)이었다. 나머지는 이현면(梨峴面), 사기면(沙器面). 동산면(東山面)의 순이었다. 포덕 53년(1912) 6월에 군 교구가 중앙총부에 납부한 월성미액은 109원 16전이었다. 1호당 5전씩으로 평균해보면 2천2백호 정도이다. 1945년 해방 당시의 군내 총인구가 1만3천1백8십호였으므로 당시의 총인구를 1만호로 추사나더라도 약 4분의 1에 해당된다. 이러한 교세는 포덕 60년(1919)에는 약간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2천호 정도는 되었다고 본다. 평안북도에서 구성군의 교세는 의주와 정주 다음으로 꼽혔다. 숫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의식면에서도 매우 높았다. 문익현 어른이 포덕 54년 9월 23일에 75세로 세상을 떠난 다음 그 뒤를 이어 원치영(元致英)을 비롯하여 장석항(長錫恒), 이정점(홍기조 연원), 연원에서는 이종수(李種秀), 백응구(白應구), 정중록(全中錄), 전학수(全學秀), 김정삼(金鼎參)과 같은 쟁쟁한 후계자가 뒤를 이었다. 동학은 관의 지목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활동에 있어서 항상 고난이 뒤따랐다. 첫째의 시련은 포덕 41년(1900)의 경자교난이다. 중앙정부로부터 전국에 걸친 동학탄압이 이루어져 의·구·송(義龜松) 삼암 중 구암과 송암이 체포되어 구암은 무기징역, 송암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평안도에서는 저 유명한 영변의 강성택(姜聖擇) 도인이 영변부사 이도재(李道宰 : 1848~1909, 동학혁명이 일어난 후 전라감사가 되어 동학군을 많이 학살한 자임)에게 체포되어 순도하였다. 이 때 수천 도인이 체포되어 많은 순도자를 내었다. 구성에서도 문익현 어른을 비롯하여 이종수. 전중록. 백응구 등 그 외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무수한 형장(刑杖)을 맞고 풀려났다. 그 후 갑진개혁운동(1904.8) 때도 매우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했다. 갑진개화운동은 8월 29일(음)에 개회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이 합세하여 해산시켰다. 이튿날인 9월 1일(음)에 구성읍 남문 밖에 다시 모여 단발을 하고 강연회도 열었다.『대한매일신보』 보도(1904. 10. 3)에 의하면 “…구성군에는 동학비도 6천여 명이라 하고...”라는 관찰사 이용관의 보고가 있었다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약 3천명 이상이 집회한 것이 틀림없다. 이 사건을 심상치 않게 여긴 일본군은 전위대를 동원, 문중승(文仲承)·박병천(朴炳天)·최봉상(崔鳳祥)·이종덕(李鍾德)을 비롯한 10여명의 젊은 동학군들을 체포, 심한 고문을 가했다. 문중승은 어깨뼈가, 최봉상은 정강이 뼈가 부러져 3~4개월간 고통을 당했다. 또한 상투를 자른 많은 동학군들은 산간지역으로 피신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생활난이 겹쳐 고통은 이중삼중으로 심했다. 동학이 들어오면서부터 구성의 동학교도들은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투철한 반제국주의. 반봉건적인 정신으로 더욱 무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구성군교구 지도자들은 포덕 46년(1905)에 접어들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문중승. 최신홍(崔信弘)·원치영(元致英)·전중신(全中信) 등 젊은 층이 주동이 되어 구성읍내에 유신학교(維新學校)를 여름에 설립하였다. 또한 교구나 전교실 등에 27개의 강습소를 설치하여 초등교육에 힘썼다. 특히 군 교구 강습소는 2년제로서 중등교육과정을 이수케 하여 김기전(小春 金起田)·전의찬(又石 全義贊)·김학서(金鶴瑞) 등 쟁쟁한 인사를 많이 배출하였다. 구성교구는 수적으로도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에서나 인물 면에서도 매우 뛰어났던 교구였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포덕 166년 8월 24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기본으로 돌아가자"포덕 166년 8월 24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에서 정암 박정연 선도사는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성공과 실패의 본질을 새롭게 성찰하며,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핵심 메시지를 전했다. 박정연 선도사는 열심히 노력하는 차원을 넘어, ‘정성’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흔들림 없는 믿음과 꾸준한 실천으로 이어지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이어 수험생들의 학습법에서부터 종교적 수행에 이르기까지, 멀리 있는 특별한 비법이 아니라 가까운 곳의 원칙을 굳건히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성 어린 태도와 작은 습관의 지속이야말로 한울님의 감응을 불러오며,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진정한 힘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번 설교는 일상 속 작은 약속을 지켜내는 힘이 결국 큰 성취로 이어진다는 점을 일깨운다. 자포자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태도 속에서 개인의 성장뿐 아니라 신앙의 성숙이 가능하다는 통찰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신앙인들은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눈앞의 성과에 흔들리지 않고 기본과 원칙을 지켜내는 삶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