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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소사(小史) ○ 9월 22일○ 1906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인종 폭동 발생 미국 남부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백인과 흑인 간의 대규모 충돌로 2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인종차별의 실상을 드러낸 사건으로 기록된다. 사건 이후 흑인 사회는 언론과 교육을 통한 권익 신장 운동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민권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 1937년, 중국, 제2차 국공 합작 선언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항일전선 구축을 위해 ‘제2차 국공 합작’을 선언했다. 양대 세력은 내전을 중단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기로 합의하였으며, 이후 중일전쟁의 향방과 중국 현대사 전개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합작은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갈등으로 치달으며, 해방 후에는 국공내전으로 이어졌다. ○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배신한 친일 행위를 단죄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공포되었다. 해방 이후 정의와 역사적 청산을 향한 국민적 열망을 반영한 법이었으나, 냉전 구도와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아쉬운 역사를 남겼다. 그렇더라도 이 법은 훗날 역사 정의와 과거사 청산 논의가 이어지는 데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 1966년, 국회의원 김두한, 국무위원들에게 오물 투척 국회의원 김두한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특한 정치 행보로 유명했던 김두한의 행동은 당시 정치적 혼란상과 의회 민주주의의 미숙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이 사건은 국회 회의록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한국 정치사에서 이색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중동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가 시작되었다. 8년간 이어진 이 전쟁은 국경 분쟁과 종교, 민족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며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석유 자원의 이해관계까지 맞물리며 국제 정세에도 큰 파문을 불러왔다. 전쟁은 결국 양측 모두에게 뚜렷한 승리를 안겨주지 못한 채 휴전으로 끝나 ‘승자 없는 전쟁’으로 불린다. -
수운회관 포덕166년 9월 21일 시일설교 동귀일체 회장 원암 김창석 "올바른 신앙법"천도교 신앙의 핵심인 시천주(侍天主) 정신을 올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한울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 수운회관 907호에서 진행된 시일식 설교에서 원암 김창석 동귀일체 회장은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잘못된 신앙법을 짚으며 깊이 있는 통찰을 전했다. 김 회장은 설교에서 한울님을 마음 밖에서만 찾으려 하거나, 반대로 자신만을 절대시하며 믿는 태도가 모두 잘못된 신앙법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경전 구절과 실제 사례를 통해 이러한 오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진정한 시천주 신앙은 한울님을 모시되 자신의 마음 속에서 그 뜻을 바로 세우는 것임을 역설했다. 특히 한울님의 뜻을 해석할 때 과잉 해석과 과소 평가를 모두 경계해야 하며, 겸양과 삼감(三感)의 자세로 중도를 지키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일상 속에서 한울님을 섬기고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번 설교를 통해 참석한 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한울님과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또한 올바른 신앙법을 실천하고 참된 시천주 신앙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였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21일○ 1792년, 프랑스 국민 의회, 왕정을 폐지하다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국민 의회는 이날 공화정을 선포하며 절대왕정의 종말을 알렸다. 이는 유럽 전역에 민주주의와 시민 혁명의 불씨를 확산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루이 16세는 이로써 ‘국민의 적’으로 규정되어 단두대에 오르게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은 더욱 급진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 1938년, 최초의 합성 섬유 ‘나일론’ 등장 미국 듀폰사가 개발한 나일론은 실크를 대체할 혁신적 소재로, 양말과 의류, 전쟁 물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었다. 이후 인류 생활양식을 바꾼 20세기 과학기술의 상징으로 꼽힌다. 특히 나일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낙하산과 군수품으로 대량 사용되며 ‘전쟁의 섬유’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 1964년, 몰타, 영국으로부터 독립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 몰타는 이날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로 출범하였다. 이후 몰타는 EU 가입 등 국제사회에서 중립적 외교와 해상 교통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석회암 건축물과 기사단의 유산으로 유명한 몰타는 독립 후 문화와 관광 산업에서도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 1980년, 김시습의 『금오신화』 최고 판본, 중국에서 발견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집으로 꼽히는 『금오신화』의 가장 오래된 판본이 이날 중국에서 확인되었다. 이는 조선 초기 문학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한국 고전문학의 세계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애정, 윤리, 권선징악 등을 다룬 작품들은 조선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며, 동아시아 문학 교류의 실질적 흔적이기도 하다. ○ 1980년, 연좌제 폐지 군사정권 시절 국가보안법과 더불어 가족까지 처벌했던 연좌제는 이날 공식 폐지되었다. 개인의 죄를 가족에게까지 연대 책임으로 묻던 제도는 인권 침해의 상징이었으며, 폐지를 통해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원칙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이는 5공화국 출범 이후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적 여론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
[부고] 전태흘 전 화악산수도원장 환원천도교중앙총부 전명운 교화관장의 부친, 전태흘 전 화악산수도원장이 포덕 166(2025)년 9월 20일 환원하였다. 향년 91세의 전태흘 전 화악산수도원장은 수도원이 생겨난 이래 11년 6개월간 수도원장으로서 갖은 살림을 도맡아온 화악산수도원의 살아 있는 역사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이은수, 아들 전명운(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장), 전명성, 전명훈, 며느리 최경미, 양선영, 이상분, 딸 전수경, 손 전현주, 전여울, 전형준, 전서현, 전형우, 박정훈, 박정은, 손서 김재환이 있다. 빈소는 광명 중앙대병원장례식장 특실이며, 입관 2025년 09월 21일 (일) 15시, 발인 2025년 09월 22일 (월) 07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웡 - 천도교 무봉공원이다. 부고장은 아래와 같다. https://wooribugo.com/funeral/view?urlsincode=eyJpZHgiOiIyNzE2ODYiLCJuZ3QiOjEsIm5hYyI6MSwibW5faWR4IjoiMjIyOTI5MCIsImdfcGgiOiIifQ==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20일○ 1875년, 운요호(雲揚號) 사건 발생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의 개방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 연안에 불법으로 침입, 초지진(草芝鎭)과 영종진(永宗鎭)에서 조선 수비대와 교전을 벌였다. 이 사건은 조선의 주권을 침해한 무력 도발로, 이후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의 빌미가 되었으며, 일본의 침략적 대외정책을 드러낸 첫 사례로 기록된다. ○ 1978년, 고려대장경 초주본 59종 73권 발견 고려 초기 현종 재위 시기인 1011~1031년 사이에 제작된 두루마리 형태의 『대방광불화엄경경(大方廣佛華嚴經)』 주본으로,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한 초조대장경 일부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고려 초기의 불교적 역량과 목판인쇄 기술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1990년 국보로 지정되어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개막 서울에서 열린 제10회 하계 아시안게임이 10월 5일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였으며, 88서울올림픽의 리허설 성격이 짙었다. 대한민국은 금메달 93개로 종합 2위를 차지했고, 임춘애·양창훈 선수의 활약이 빛났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 중 유일하게 참가해 금메달 94개로 1위를 차지했으며, 아시아 체육사의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한 대회로 평가받는다. ○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 유튜브 기네스북 등재 가수 싸이의 뮤직비디오「강남스타일」이 유튜브에서 역대 최고 ‘좋아요’ 수를 기록하며 기네스북에 올랐다.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이 곡은 대중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고, 한국 대중문화(K-POP)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2018년, 남북정상 백두산 방문 제3차 남북정상회담 기간 중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을 함께 찾았다. 남북 정상이 함께 백두산 정상에 오른 장면은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전 세계에 전해졌다. 역사적 현장에 함께한 이 순간은 남북 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19일○ 1356년, 푸아티에 전투, 백년전쟁의 격전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 중 푸아티에 전투에서 맞붙었다.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가 지휘한 군대는 프랑스 왕 장 2세가 이끄는 대군을 격파하고, 프랑스 왕을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는 백년전쟁의 향방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며, 유럽 중세사의 중요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 1893년, 뉴질랜드,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 보장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였다. 당시 여성 참정권 운동은 민주주의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뉴질랜드는 이로써 성평등과 민주주의 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선구적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 1932년, 한중 연합군, 쌍성보 전투에서 항일 투쟁 전개 만주 일대에서 항일 무장 독립군과 중국군이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를 벌였다. 창춘과 하얼빈 사이에 위치한 쌍성보는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의 물산이 모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는 일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한중 연합전선을 구축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한 한중 연합군은 2시간에 걸친 총공세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쌍성보는 혼전을 거듭하다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에 넘어갔다. ○ 1976년, 신안 해저 유물 2,500여 점 인양 발표 문화재관리국은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 무역선의 해저 유물 2,500여 점을 인양했다고 발표하였다. 청자와 동전, 향료 등 다양한 유물이 포함된 이 발견은 당시 고려가 활발히 국제 교역을 벌였음을 입증하며, 한국 해양문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 1978년, 영해법 시행령 공포, 해양 주권 강화 대한민국 정부는 영해법 시행령을 공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국제 해양 질서 속에서 자국 영해를 명확히 규정하고 해양 주권을 강화한 조치였다. 이로써 어업권 보호와 해양 자원 관리에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
가을밤 물들일 ‘동학, 아름다운 사람들’ 콘서트 25일 열려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25일, ‘2025 인내천수운문화제’ 공연 행사로 ‘수운의 뜨락1-동학, 아름다운 사람들’(부제: 자유와 독립을 향한 동학혁명 이야기와 노래) 콘서트를 연다. ‘이등병의 편지’,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싱어송라이터 김현성의 새노래 ‘동학혁명의 노래’들을 처음 세상에 발표하는 공연 무대다. 김현성이 작사작곡한 노래들을 레퍼토리로 천도교중앙대교당 앞마당 특설무대에서 열리는 공연은 1부 ‘민족시인의 노래’와 ‘독립군의 노래’, 2부 ‘동학, 아름다운 사람들’을 주제로 진행된다. 1부에서 김현성은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등 민족시인들의 시에 노랫말을 붙인 ‘청포도’, ‘별 헤는 밤’, ‘ 나룻배와 행인’ 등에 이어 홍범도 장군의 활약상을 주제로 한 신곡 ‘나는 자랑스런 의병이에요’와 ‘홍범도의 묘비’ 등을 선보인다. 대표곡 ‘이등병의 편지’와 ‘술 한잔’(정호승 시, 김현성 곡)도 귀에 익은 멜로디로, 1부의 마무리를 장식한다. 2부 ‘동학 아름다운 사람들’ 공연은 모두 새로운 ‘동학의 노래’들로 채워진다. ‘아름드리 나무’, ‘해월 선생 내게 물으시네’, ‘탄 도유심급’(동경대전의 구절), ‘해월, 작별의 인사’, ‘세상에서 참 기쁜 일’, ‘주먹밥’(김남주 시, 김현성 곡) 등 여섯 곡 모두 김현성의 최신곡이다. 특별한 이야기 손님으로 초대된 최인경 천도교중앙총부 사회문화관 관장은 ‘동학과 해월 최시형 이야기’로 함께 한다. 최인경 관장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직계 현손이다. 2부에서는 배우 김진휘의 ‘일하는 한울님’ 낭독 공연도 곁들여지며, 다함께 부르는 ‘별 헤는 밤’(윤동주 시, 김현성 곡)에 이어 기미독립선언문 일부를 노랫말 삼아 곡을 붙인 김현성 곡 ‘기미독립선언을 노래함’으로 문을 닫는다. (기미독립선언문을 노랫말 삼아 곡을 붙인 작곡가는 김현성이 처음이다.) 이 공연을 기획한 박성현PD는 지난 2일,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했던 ‘we, The K-우리 안의 위대함을 밝히는 시간’ 전시를 기획한 데에 이어 이번 공연을 선보이며 “1894년의 ‘동학 혁명’과 130년 뒤 2024년 겨울, ‘빛의 혁명’이 민족사의 자장 안에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노래 공연”이라면서 “동학에 푹 빠져 노래를 만든 시노래 장인이자 독보적인 뮤지션 김현성을 재발견하는 공연은 11월 포항시 투어를 비롯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싱어송라이터 김현성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가르침이 깃든 동학에 대해 깊이 공부하면서 곡을 만드는 내내 ‘동학, 아름다운 사람들’ 공연이 지난 겨울 광장 시위의 불꽃을 꺼지지 않게 하는 기름이 되기를 소망했다.”고 말했다. 공연 일시는 2025년 9월 25일 목요일 19;00, 장소는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천도교중앙대교당 앞 특설무대이다. 공연 문의: 02-6488-6831, 010-9154-4112. 전석 무료. -
포덕 166(2025)년 7월 20일 부산시교구 박인준 교령 설교 "천도중흥 지금 이때"박인준 교령은 지난 7월 20일 부산시교구에서 열린 시일식 설교를 통해 천도교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과제를 깊이 성찰하며, 중흥의 비전을 제시했다. 박 교령은 설교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 해월 신사, 의암 손병희 선생에 이르는 세 교조의 순도와 수많은 교도의 희생을 생생하게 조명하며 “천도교의 역사는 곧 우리 민족의 역사였다”고 말하며, 일제 강점기의 탄압과 남북 분단, 그리고 정치적 박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이어온 천도교의 정신을 강조했다. 이어 박 교령은 오늘날 한국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K-컬처의 중심지가 된 데에는 이러한 천도교의 정신적 뿌리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고 밝히며 “한류와 K-컬처의 근원에는 하늘님을 모시는 마음, 그리고 개벽을 향한 열망이 흐르고 있다”며 “지금이야말로 천도교가 다시 일어나야 할 개벽의 때”라고 역설했다. 또한 교도들에게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교단의 사명과 신앙의 본질을 잊지 말고, 한울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당부했다. 이번 설교를 통해 참석자들은 천도교의 깊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날의 도전에 맞서 중흥의 길을 함께 걸어갈 강한 신앙적 동기를 얻는 자리가 되었다. -
관동대지진 속 천도교의 구호와 진상 규명, 민족운동의 한 축을 이루다(지난 호에 이어) 천도교 도쿄종리원 박사직이 귀국할 때 동료의 송사에서 “대지진! 대지진!! 일본 수도의 대지진 당시에 말도 모르는 백의동포가 좌로도 우로도 피할 곳이 없이 가진 발광을 다부림녀서 혀를 빼어 물고 눈알이 꿰어지는 뭇(衆) 죽음을 당할 때에 선생의 환장된 가슴에 쓸쓸한 암흑 속에서 희미한 등불을 손에 들고 동포의 뼈를 한 토막, 두 토막 주워 모으며 돌아가던 그때가 이제에 생각하면 눈물이시겠지요”라고 한 바 있다. 이는 당시 이재동포위문반에 참여한 바 있는 박사직의 반응이 아닐까 한다. - 동학지광 8호(1928.8)에 수록된 내용 (해설 성주현 상주선도사)- 동경당부는 포덕 68년 11월 1일에 기관지 「동학지광 (東學之光)」을 창간하여 포덕 74년 11월호까지 모두 18호를 발행하였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은 순식간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재난이었다. 그러나 이 재난은 자연재해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학살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청년들과 동포들은 극심한 공포 속에 흩어졌고, 이들을 지키고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천도교의 조직적 대응이 본격화되었다. 도쿄(東京)종리원의 보존과 위문반 임시 사무소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東京) 대부분의 건물이 붕괴와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천도교 도쿄(東京)종리원 건물은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했다. 이 건물은 이후 조선인 구호와 학살 피해 조사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재조선동포위문반(罹災朝鮮同胞慰問班)’의 임시 사무소로 사용되었다. 위문반은 이곳에서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구호 활동을 전개했으며, 희생자들의 장례와 위령 의식을 주관했다.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결성과 활동 지진 직후 일본 전역에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며, 조선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이에 맞서 천도교 도쿄(東京)종리원과 종리원장 박사직을 중심으로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이 결성되었다. 천도교 청년회원 이근무,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YMCA 등도 함께하며 범동포적 연대가 형성되었다. 1970년에 발간된 『극웅필경』에는 당시 YMCA 총무 최승만의 회고가 실려 있다. 그는 천도교 청년회 박사직 등과 함께 ‘이재동포위문반’을 조직하고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음을 기록했다. 이 조사는 1970년 3월 『신동아』에 「일본 관동진재시 우리 동포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이후 『극웅필경』에는 재수록되었다. 위문반은 일본 당국의 방해와 탄압 속에서도 두 달간 피해 조사를 진행하며 진상 규명에 매진했다. 1923년 12월 25일 열린 ‘재동경조선인대회’에서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으며, 보고에 따르면 학살 희생자는 총 6,661명에 달했다. 또한 해외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虐殺(학살)’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제작해 배포했다. 1924년 9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관동대지진 1주기 추도식을 개최하여 희생자들을 기렸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모 행사를 이어왔다. 2023년에는 100주기를 맞아 추모문화제를 열어 당시 사건과 천도교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조선 내 추모 활동과 일제의 통제 식민지 조선에서는 총독부의 언론 통제와 유학생에 대한 감시로 학살 소식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이는 4년 전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족운동이 재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대규모 운동이 어려웠지만,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구제활동과 추도회가 이어졌다. 특히 포덕 65년(1924) 9월 1일, 신흥청년동맹과 서울청년회가 주도하여 중앙대교당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주기 추도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공식적으로 열린 유일한 대규모 추도회였다. 한편, 도쿄청년회는 일본 내에서 해마다 추도회를 열어 학살의 기억을 이어갔다. 포덕 65년(1924) 9월 13일, 흑우회·기독교청년회·조선노동동맹회 등과 연합으로 1주기 추도회를 열었고, 포덕 66년(1925)에는 도쿄종리원에서 2주기 추도회를 개최하며 조난동포들을 기렸다.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계승 관동대지진 속에서 천도교가 보여준 활동은 단순한 구호를 넘어 민족운동의 한 축이었다. 천도교는 재난 속에서 조선인의 생명을 지키고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행동했으며, 일본 내 조선인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일본 내 조선인 인권운동과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천도교의 이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재난과 인권 문제에 대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천도교가 보여준 연대와 실천의 정신은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세대를 넘어 계승되어야 할 소중한 자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
[칼럼] 천도교의 사후관에 문제를 제기한다필자가 근무하는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에는 남모르는,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다. 올해가 동학혁명 131주년이니까 기념관이 건립된 시간이 3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당시 나는 공사 총책으로 수시로 현장에 오가 가는 신분이었다. 만약 밤에 비가 오기라도 하면 한밤중에 재빨리 와야 했는데, 건물 지붕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아 조심 조심 지붕에 올라가 안전한지 살펴보다가 그만 가파른 지붕 경사 2층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찔한 순간, 영락없이 중상 아니면 사망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울님’하고 소리쳐 불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뒤에서 미끄러지는 나를 꽉 잡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서는 천천히 기어 지붕 정상에 올라 한숨을 쉬고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아무도 없었다. 기념관 개관 후 나는 책자를 3권 출간하였다. 그 집필시간이 기념관 퇴근 시간부터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으니, 기념관 문 닫고 그곳에서 집필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새벽 1~2시경 전시관에 누군가 꼭 들어온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다. 나는 “스승님, 선열님 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여쭙곤 하였다. 물론 모습과 흔적은 볼 수가 없었다. 또 기념관 전시실 문이 자동문이라 누군가가 가까이 와야 열리고 닫힌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뒤 자동문 혼자 열리고 닫히는 상황이 가끔 발생한다. 나는 일어서 문 앞으로 나가 두 손을 합장하고 “한울님 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드린다. 물론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까 수운 대신사 경전에 한울님 하신 말씀 “귀신도 나이니라” 즉 귀신도 한울님 이라는 글귀가 머리를 스친다. 그럼 나는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를 속으로, 입으로 외운다. 천도교에서는 사후관 즉 개체영혼설을 부정한다. 그래서 일부 종교학자들은 천도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종교성립의 주요 내용 중에, 첫째 신의 존재, 둘째 교주의 존재, 셋째 경전의 존재, 넷째 교인의 존재, 다섯째 사후관의 존재 정도가 있어서 한다. 천도교는 사후관의 존재가 확실하지 않다. 물론 향아설위와 성령출세설이 있지만, 명확한 개체 영혼설이라 말할 수 없다. 천도교가 과거의 영광 즉 우리나라에서 신도수가 제일 많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순수 종교적 신앙에서 교인수가 많았던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운동 즉 혁명운동과 독립운동 등 대중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상황이었다. 현재 정당단체나 사회단체처럼 그 운동의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 동참하게 하는 교정일치의 선두에서 대중들을 이끌어갔던 것이다. 현재는 솔직히 말해 천도교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환원하는 사람들에 비해 새로 입교하는 사람들이 적으니 세월이 지남에 따라 현저히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천도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기독교나 불교 등과 같이 현상유지라도 할 것이다. 그 하나는 사후관을 확실히 정립해야 한다. 또 하나는 사회개혁 즉 통일운동, 환경운동 등 대중을 선도하는 최전선에 나서야 한다. 현재는 둘 다 미미하기 그지없다. 나는 오랜 동학 천도교 수행한 사람으로서 인간의 사후관을 인정한다. 천도교에서 말하는 성령출세라는 다소 철학적인 사후관이 아니라, 타 종교처럼 개체 사후관을 말한다. 그리고 만약 귀신이 내 앞에 나타나도 하나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 귀신(보이지 않는 한울님을 뜻함) 또한 한울님이라는 수운 대신사님 경전을 생각하면 귀신이 다가오더라도 “모시고 반갑습니다. 한울님..”하면 그 귀신들도 나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글 이윤영(천도교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공동대표)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