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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으로 치료해요"…'치유농업'으로 우울감 30% ↓텃밭을 만들고 식물을 키우는 등의 치유농업이 우울 증상 감소 등에 실제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농촌진흥청은 약물 중심인 기존 정신질환 치료를 보완할 수 있는 비약물적 심리 지원 기술로 치유농업에 주목하고 그 효과를 의료기관 현장 실증을 통해 입증했다. 농진청은 16일 농진청 연구진이 조현병 환자와 우울 고위험군을 위한 치유농업 프로그램 2종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치유농업은 농업, 농촌 자원을 활용해 신체적, 정서적 안정을 도모하는 활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2세 이상 인구의 9.7%가 최근 1년간 우울감을 경험(보건복지부 2023년)했고, 조현병은 인구 100명 중 1명이 겪는 것으로 보고(국립정신건강센터 2024년)됐다. 정신질환 유병률이 지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지역 사회에 기반한 비약물적 치료 수단으로 치유농업 활용이 부각되고 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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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3D 점자지구본·7개 국립공원 점자안내지도 제공다가오는 '세계 장애인의 날(4.20)'을 맞아 시각장애인을 위한 3D 점자 지구본, 점자 지도집, 국립공원 점자안내지도 등이 새롭게 제공된다. 국토교통부와 국토지리정보원은 3D 점자지구본, 대한민국 및 세계 점자 지도집, 부산광역시 도시철도 노선 및 7개 국립공원 점자안내지도를 제작해 오는 17일부터 순차 제공한다고 16일 밝혔다. 3D 점자지구본은 국내 최초로 3D 모델링을 통해 세계 대륙과 해안 경계, 날짜변경선, 경도·위도, 북극점·남극점 등 세계지리 교육에 필요한 주요 정보를 입체적으로 표현해 시각장애 학생이 촉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지구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교육 목적의 기본형(지름 30㎝)과 전시 목적의 대형(지름 100㎝) 등 두 가지 형태로 제작했다. 대한민국 및 세계 점자지도집은 2016년~2017년에 제작한 기존 지도에 최신 정보를 반영해 갱신했으며, 시각장애인의 접근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전체적인 지도집 설명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정보무늬(QR코드)를 삽입했다. 이와 함께, 지난해 제작한 부산광역시 도시철도 노선 점자안내도에 노선(부산역 1호선-3호선) 간 환승역 지도를 추가해 새롭게 제작했다. 해당 지도는 부산지역 시각장애 관련 기관뿐만 아니라 부산교통공사와 협업해 부산광역시 주요 도시철도 역에도 비치할 계획이다. 더불어, 국토지리정보원은 환경부 국립공원공단과 협업해 시각장애인이 일상에서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공간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국립공원 점자 안내 지도를 제작해 서비스한다. 이번에 배포하는 지도는 경주, 북한산, 설악산, 소백산, 치악산, 태백산, 팔공산 등 7개 국립공원을 대상으로 현장실사와 사용자·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제작했다. 공원의 위치, 편의시설, 탐방로 안내 및 난이도, 각 국립공원의 대표 생물자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지도는 7개 국립공원 탐방안내소에서 무료로 배포하며, 국립공원생태복지서비스 프로그램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예정이다. 3D 점자지구본과 대한민국 및 세계 점자지도집, 부산광역시 도시철도 노선 점자안내도 및 7개 국립공원 점자 안내 지도는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https://map.ngii.go.kr)에서 17일부터 누구나 무상으로 내려받아 활용할 수 있다. 조우석 국토부 국토지리정보원장은 "공간정보는 모두를 위한 공공 자산이며, 점자지도는 시각장애인의 자유로운 이동과 학습을 돕는 중요한 도구"라면서 "앞으로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공간정보 서비스를 확대해 나가고, 국토부 국토지리정보원이 앞장서 공존과 포용의 사회로 나아가는 연결망 역할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문의: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지리정보과(031-210-2731)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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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행복한 세상(4) - 새로운 가치관과 사상올바른 정치.경제체제 모색을 위해 앞서 현대 주요 정치.경제체제인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주의.통제경제를 살펴본데 이어, 동학.천도교의 시천주(侍天主), 천지부모(天地父母) 이치에 기반하여 새로운 가치관과 사상의 핵심 내용과 주요 특징을 깊이 있게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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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6년 4월 13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천도교의 봄을 이루자 (혜원당 김춘성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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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이 세상에 태어난 은적암에 다녀오다사람에게는 정말 연(緣)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천도교와 연을 맺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저 인사동과 안국동을 오가며 첨탑이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특이해 기억에 남아 있던 수운회관에, 오랜 지인이었던 천도교 동두천교구 연암 강정환 교구장의 초대로, 2024년 12월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주년 행사에 참석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나간 역사로만 알고 지내던 동학에 관해 공부해보자는 생각에, 포덕 166년에 천도교종학대학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4시간씩 동경대전과 주역을 배우며 동학과 천도교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경대전과 주역이 한자로 되어 있는 데다, 한자를 이해한다 해도,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참뜻을 이해하기는 정말 버거웠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수운 최제우 대신사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양반인데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반상의 구분이 엄격한 시대에 그는 크게 깨달은 뒤 먼저 자신의 여종 둘을 해방한다.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다른 사람은 며느리도 삼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링컨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대통령 신분으로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남부와 몇 년간 남북전쟁을 했다. 하지만 수운 최제우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반으로, 봉건적 착취와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서 동학을 창도했다.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서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수운 대신사의 동학에 동조하는 동학교도들이 늘어나자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유림의 질시와 관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졌다. 이를 피해 자신이 주장한 바를 글로써 남기고자 1861년 겨울에 남원의 은적암에 은거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동학을 밝히는 동학론(논학문)을 집필하고,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의 내용을 정리하여 ‘동학’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번에 대신사께서 천도교의 귀한 경전들을 집필하신 남원의 은적암으로 성주현 교수님과 수업을 같이 듣는 동덕들과 함께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선국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길을 오르니 은적암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서울교구가 세운 “은적암 터’ 안내판과 남원 문화원에서 세운 교룡산 산신단 유래비 그리고 “독립선언서 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대종사 첫 출가 성지”란 비목이 서 있었다. 은적암 터 안내판에는 “이곳은 제1세 교조인 대신사께서 관의 탄압을 피해 포덕 2년(신유년, 단기 4194년) 12월 그믐날에 오셔서 은거하시던 곳이다. 대신사께서는 이곳 덕밀암을 은적암이라 이름하시고 머무르시며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 등을 집필하셨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조금 안쪽으로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음각된 암벽만이 그곳이 은적암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은적암 터에 도착하자마자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주문 13자(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를 암송하며 걸었다. 수운 대신사님의 체취를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고, 한울님과 하나가 되는 나만의 의식을 치렀다. 은적암을 떠나면서 든 생각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6개월 이상을 은둔하며 처음으로 동학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을 집필하고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정리한 동학의 성지인 이곳이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곳 은적암 터에서 내 안에 모신 한울님께 진심으로 간청드렸다. 글, 황규만(종학대학원 수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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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학대학원, 남원 은적암으로 현장학습 진행지난 4월 12일(토요일), 종학대학원은 전북 남원에서 동학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는 현장학습을 실시했다. 이번 현장학습은 성주현 종학대학원 교수의 지도로 진행되었다. 광한루원 주차장에서 오후 1시에 집결하여 광한루 탐방, 은적암 터 답사, 검결비 등으로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인근에서 식사를 나눈 뒤, 2시부터 30분간 광한루원을 둘러보며 남원의 역사적 배경을 체험했다. 이후 오후 3시부터는 본격적인 답사 일정으로 은적암터를 찾았다. 은적암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직접 산문을 열고 도를 닦았던 동학의 성지로, 참가자들은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고요한 산세를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특히 은적암으로 오르는 길은 수운 대신사의 숨결을 몸소 느끼는 여정으로, 참가자 모두에게 깊은 의미와 울림을 주었다. 이 날 일정은 예기치 못한 교통 상황과 우천으로 인해 일부 지연되었으나, 전체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으며 오후 5시 30분 검결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종학대학원 관계자는 “은적암터와 같은 동학의 성지를 직접 밟으며 수운 대신사의 사상과 삶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며 “참가자 모두에게 뜻깊은 배움의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자료 및 사진 : 천도교종학대학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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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행적 조사(2)(지난 호에 이어) 오사카역(大阪驛) 오사카역은 성사가 오사카에서 고베, 나라, 교토 등지를 다닐 때 이용하던 역이었다. 성사는 오사카에서 도쿄로 이주할 때도 이 역을 이용했다. 일본의 자료를 살펴보니 최초의 오사카역은 포덕 25년(1884) 5월 11일 문을 열었다. 당시 오사카에서 고베로 향하는 노선이 개통되면서 역사가 만들어졌다. 초대 역사는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우메다 스텐쇼(梅田驛)”라는 애칭이 있었다. 이 일대에 매화밭이 있었던 것 같아 그렇게 불린 듯하다. 오사카역은 포덕 52년(1901) 7월 1일 제2세대 역사로 확장되었다. 제2세대 역사는 초기 역사에서 약 200m 동쪽으로 이동해 지어졌다. 역 앞에는 인력거꾼을 위한 광장이 조성되었고, 역 동쪽 끝에는 오사카우체국 우메다 지점과 전신국 등 공공시설이 함께 건설되었다. 제2세대 오사카역은 고딕 양식의 석조 건물이었으며, 당시 일본은행 오사카 지점, 센푸칸(泉布觀)과 함께 ‘오사카 3대 명소’로 불렸다. 성사가 일본에 왔을 때는 제2세대 역사가 지어진 직후였다. 이후 오사카역은 포덕 91년(1940) 제3세대 건축으로 확장되었고, 일본의 발전과 더불어 오사카역의 기능도 확장되어 포덕 120년(1979) 제4세대 오사카역이 건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오사카역은 제2세대 자리에 시대의 흐름에 맞게 현대적으로 확장된 것이다. 카미후쿠시마(上福島) 카미후쿠시마는 성사가 오사카에서 처음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당시 주소는 ‘오사카시(大阪市) 기타구(北區) 카미후쿠마치(上福町) 2정목(丁目) 733번지’였다. 성사는 포덕 45년(1904) 3월 19일 오사카에 도착해 이곳에 머물렀다. 성사가 머물렀던 여관이 있었던 이 일대는 현재 주택가로 변해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성사께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오사카역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답사 당시 일대를 돌아보며 ‘카미후쿠시마’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上福島” 우체국뿐이었다. 조사단이 우체국을 찾아가 직원에게 물었지만, 너무 오래된 지명이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조사단은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가능한 최대 범위까지 조사하기 위해 일대를 훑었다. 그 결과 카미후쿠마치(上福町) 2정목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으나, 733번지는 지번 자체가 없어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지역에서 오래된 “福島天滿宮”을 찾아 주지에게 물어보니, 그곳의 예전 주소가 카미후쿠시마 154번지였다는 것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한 지번 확인을 위해서는 일본 지적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느꼈다. 성사가 묵었던 733번지는 이번 답사로는 찾을 수 없어 추가 답사가 요망된다. 도지마우라마치(堂島裏町) 도지마우라마치는 성사가 포덕 45년(1904) 3월 말부터 6월 30일까지 약 3개월간 거주했던 곳이다. 당시 주소는 ‘오사카시(大阪市) 기타구(北區) 도지마우라마치(堂島裏町) 3정목(丁目) 11번지’였다. 성사는 이곳에 숙소를 정하고 인근에 사무실을 하나 더 구입해 사용했다. 성사는 이곳을 끝으로 오사카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도쿄로 이주했다. 이후 이곳은 천도교인들이 오사카를 방문했을 때 사용되었으며, 천도교 유학생들이 체류한 곳이기도 했다. 현재 이 일대는 일본의 통신회사 NTT(Nippon Telegraph and Telephone Corporation)의 도지마 지부가 자리 잡고 있다. 자료집에는 이곳이 NTT의 고베지부라고 되어 있었지만, 조사를 통해 도지마지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전 조사의 오류를 바로잡은 유의미한 성과였다. 자료집에는 도지마지부 건물 안에 테니스코트가 있고 그 자리가 11번지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건물 안내도에는 4개의 큰 건물이 있었고 중앙에는 주차장이 있었다. 처음에는 위치를 잘못 찾은 줄 알았지만, 한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 보니 주차장 지붕 위에 테니스코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성사가 기거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쁜 마음에 사진을 찍고 조사단을 불렀다. 이 위치에 대해 설명하는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위기에 처한 교단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성사의 힘겨운 외유 생활이 떠올랐고,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답사의 고단함과 정확한 위치를 찾은 안도감이 겹쳐 한참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 감옥 터 제4사단사령부 감옥 터는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를 성공시킨 윤봉길 의사가 갇혔던 곳이다. 이 감옥은 오사카성 안에 위치해 있었다. 필자는 여러 차례 오사카를 방문하고 오사카성을 찾았지만, 이 사실을 몰랐다. 이번에 김동우 사진작가의 안내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답사할 수 있었다. 오사카성에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풍국신사(豊國神社)가 보이고, 신사 조금 못 미친 왼편 정원 안에 ‘제4사단사령부 건물터’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 옆에는 일본 시인의 시비도 있다. 안내문에는 “동대번두소옥적(위수감옥적)(東大番頭小屋跡(衛戍監獄跡))”이라고 쓰여 있다. 윤봉길 의사는 포덕 73년(1932)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일본군 지도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제는 11월 18일 윤 의사를 우편 수송선에 태워 오사카로 보냈고, 11월 20일부터 약 한 달간 오사카 형무소, 즉 이 제4사단사령부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12월 18일 가나자와 구금소로 이송되어 다음 날인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에 총살되었다. 그의 마지막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는 주문을 낭랑하게 읊으며 순국한 것이었다. 조사단은 이 감옥 터에서 청수를 모시고, 윤 의사의 순국 정신이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횃불이 되리라는 믿음을 담아 같은 주문을 외쳤다. 텐노지(天王寺) 공원과 통국사(統國寺) 텐노지 공원은 포덕 60년(1919) 3월 19일, 3·1운동 이후 오사카 재일 유학생들이 만세를 외치기로 모였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로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 23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시위를 이끈 인물은 염상섭이었다. 현재 텐노지 공원은 일본인의 휴식처로 잘 조성되어 있다. 근처에는 통국사라는 사찰이 있다. 통국사는 ‘백제고념불사(百濟古念佛寺)’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들이 고향을 기리는 절이다. 해방 이후 오사카의 재일교포가 이 절을 매입하여 ‘원효종’이라는 종파로 운영하고 있다. 절 안에는 재일교포들의 묘와 함께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해가 봉안된 납골당이 있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유해 74구는 2019년(포덕 160년) 2월 27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국으로 송환되었으며, 지금은 미송환 유해 1구가 별도로 봉안되어 있다. 절에는 제주 4·3항쟁 희생자 비와 함께 각 마을의 돌로 조성된 공간도 있으며, 입구에는 베를린 장벽도 설치되어 있다. 오모리(大森) 정류장 오모리 정류장은 오사카 외곽의 사카이시 미나미구에 위치한다. 오사카 시내에서 약 4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다. 성사는 이 먼 곳까지 조희연 등 개화파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일본의 요시찰 문서에는 성사가 오모리 정류장까지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왜 이 한적한 곳을 택했는가? 조희연 등이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만나기 위한 장소로 선택했을 수도 있다. 성사의 작은 움직임조차도 일제는 요시찰 인물로 주목해 기록에 남겼다. 유적 조사의 기쁨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유적지를 답사하는 일은 책이나 문서로는 경험할 수 없는 깊은 감응을 준다. 필자는 스승님들의 유적지를 답사하며 잊지 못할 체험을 여러 차례 해왔다. 이번 성사의 일본 행적 답사도 그러한 경험 중 하나였다. 성사의 외유가 지닌 깊은 의미를 다시금 떠올렸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개벽의 정신,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기상이 느껴졌다. 찾은 장소도 있었고 찾지 못한 곳도 있었기에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아직 조사해야 할 행적도 남아 있으며, 이를 후속 조사에 반영할 예정이다. 조사에 함께해준 사회문화관과 동료 조사원들에게 감사드리며, 이 기록이 뒤를 잇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끝.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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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구, 목요청수회 시간 변경안내천도교서울교구는 이번 주부터 매주 목요일 5시에 목요청수회를 봉행한다고 밝혔다. 목요청수회는 매주 수련을 통해 신앙을 다지는 자리로 이어져 왔다. 청수회는 오후 5시 개식을 시작으로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참회문 봉독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후 ▲현송 ▲묵송 ▲신사주문 105회 합송을 하며 신앙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서울교구 인화당 이미애 교화부장은 “한 분이라도 더 참석하시기를 기대하며 시간을 변경했습니다. 조금 일찍 오셔서 간식으로 준비한 쌀떡국, 쌀국수, 야채 등을 함께 드시고 수련을 하셔도 좋겠습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주문 소리 울려 퍼지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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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주년 제주4‧3희생자 천도교 합동 위령식 봉행77년 전 제주 4‧3의 아픔과 희생을 기리는 자리가 마련됐다. 천도교는 4월 3일, ‘제77주년 제주4‧3희생자 천도교 합동 위령식’을 봉행하며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평화와 통합의 메시지를 되새겼다. 이번 위령식은 이재선 천도교청년회 전 회장의 집례로 진행되었으며, 경건하고 정제된 분위기 속에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다양한 의식이 엄숙하게 봉행되었다. 의식은 청수봉전, 분향으로 시작되었다. 이재선 천도교청년회 전 회장은 심고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참석자들은 마음을 모아 심고의 시간을 가졌다. 이어 주문 3회 병송, 천도교 서울교구 여성회 이종분 동덕이 ‘성령출세설’을 봉독하였다. 이후 동학민족통일회 임남희 공동의장이 위령문을 낭독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살아남은 이들의 다짐을 담았다. 이어 유족 및 참례인들이 분향하며 개개인의 추모의 뜻을 전했고, 이 순간 배경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며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 백경진 이사장은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도 많은 유족들이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밝히며 “제주도에는 ‘살민 살아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체념이 아닌 강인한 치유와 회복의 의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또, "제주의 역사적 비극은 단지 지역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기억하고 치유해야 할 대한민국의 아픔”이라고 강조하며, 연대와 화합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심고의 시간을 가진 뒤, 폐식을 통해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이날 위령식은 종교적 경건함 속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평화와 인권,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염원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로 자리매김했다. 아래는 심고문의 전문이다. < 심 고 문 > 한울님과 스승님 제주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의 성령이시여 감응하옵소서. 오늘 저희들은 삼가 옷깃을 여미고 제주4.3의 제77주년을 맞아 제주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을 추모하면서 합동으로 위령식을 봉행하옵니다. 저희는 당신들이 나라를 사랑하였으나 정의롭지 못했던 공권력과 거기에 기댄 불의한 총칼에 희생되셨음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주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이시여 생전에 꿈꾸셨으나 미처 이루지 못했던 그 많은 꿈과 남기신 뜻을 저희가 계승하여 우리나라가 더욱 행복하고 폭력에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한울님과 스승님 그리고 제주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의 성령이 저희들의 심령과 융합하여 장생하시면서 항상 앞길을 밝게 밝혀 주시기를 기원하옵니다. 스승님과 선열들의 성령이시여! 감응하옵소서. 아래는 위령문의 전문이다. <위 령 문> 제주 4.3 선열들의 성령이시여!오늘 우리들은 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제주 4·3 77주년을 맞아, 여러 종교인들이 함께 제주 4.3으로 희생되신 이들을 추모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에 우리는 제주 4·3으로 희생되신 분들을 추모하는 합동위령식을 봉행하오니 성령이시여 감응하옵소서! 수운대신사께서 고통받는 민초들이 사람답게 사는 후천개벽의 새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무극대도를 창명하신 후, 선열들께서는 수도와 포덕에 전념하시면서 온갖 고초를 감수하며 이 땅에 무극대도를 펴기 위해서 지극한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나 시운이 여의치 못하여 거룩한 뜻을 세상에 펴지 못한 채, 동학, 천도교인들은 참형, 교형, 전사, 옥사, 익사, 장사, 총살 등으로 참혹하게 순도하셨습니다. 제주 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의 고통 또한 얼마나 참담한지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만 한 몸과 한 집을 위하여 살다가 안방에서 편안하게 죽어도 슬퍼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거늘, 제주 4.3의 선열들께서는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았으나 나라가 분단되는 상황에서 소중한 생명을 바치셨으니 그 숭고한 뜻과 불멸의 공덕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동안 제주 4.3에서 희생되신 분들에 대한 제대로 된 추모가 이루어지지 못하던 중,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제는 제주 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을 추모하고자 함께하고 있습니다. 뒤늦은 일이지만 이제라도 선열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주 4.3의 정확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는지 밝혀지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이름도 갖지 못한 채 77년의 세월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실재했던 역사임에도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으니 후손된 우리는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늦추지 말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가야 할 것입니다. 한울님께서 사람을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한 자로서 만기만상의 이치를 모두 한 몸에 갖추어 화생시키신 것은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지상천국 세상을 실현하고자 함입니다. 제주 4.3 선열들의 성령이시여!이제 우리 후생들의 심령 가운데 영원히 함께하시면서 그 불굴의 정신을 받들어 후천의 새 세상을 이룩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들은 수도와 포덕에 힘쓰면서 대도의 목적인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건설의 대원을 달성하고 제주 4.3 선열들의 그 굳은 뜻을 이어가고자 선열들의 영전에 맹세하오니, 성령이시여 굽어살피시옵고 명우(冥祐)가 있어지이다. 포덕 166년 서기 2025년 4월 3일 천도교 임남희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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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암 박인준 교령, 조동원 종법사 예방지난 11일 준암 박인준 교령은 가리산 수도원을 찾아 조동원 종법사를 예방하였다. 조동원 종법사는 박인준 교령에게 “잘난 체하지 말고 있는 체하지 말고 아는 체하지 말고 항상 우·목·눌 세 글자를 항상 잊지 말고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일상 생활에 도가 있으니 항상 평상시의 삶 속에서 한울님 모심을 잊지 말고 주문을 염염불망하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제 새로운 교령이 되셨으니까 앞으로 우리 교단 발전과 포덕 교화를 위해서 많이 힘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고 당부하였다. 박인준 교령은 “이제 종법사님 뜻을 잘 받들어서, 좋은 말씀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우리 교단을 위해서 제가 열심히 우리 총부 직원들과 힘을 합쳐서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종법사께 다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