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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이기(p.24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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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동학 정신 계승과 문화관광 자원 활용에 대한 방안˝ 제안경주시의회 이강희 의원은 13일 제288회 경주시의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경주시 동학 정신 계승과 문화관광 자원 활용에 대한 방안’을 주제로 5분 자유발언을 실시했다. 먼저 이강희 의원은 동학이 1860년 외세의 침략 등으로 혼란한 시대적 위기 속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천주 사상을 바탕으로 등장했고, 후천개벽·보국안민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국가와 백성을 지킨다는 사명을 강조하며,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져 근대 민권운동의 초석이 되었음을 설명했다. 이처럼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사회개혁운동이자 자주정신의 표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므로, 그 정신을 보호·계승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최제우·최시영 선생 관련 유적지에 대한 복원 사업의 추진, 동학 역사교육 프로그램의 운영 및 학술 연구 지원, ‘동학문화제’ 개최 등을 제안했다. 특히 동학 관련 사료의 보존을 위한 자료관의 효율적 관리와 연구 지원금을 마련하는 규정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는 등, 동학 관련 정책 마련과 조례 제정을 통해 경주시가 동학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강희 의원은 동학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와 인권존중 등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고 강조하고, 경주가 동학의 발상지이자 성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경주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하며 5분 자유발언을 끝맺었다. 다음은 이강희 의원의 5분 발언 내용이다.(제공기관 : 경상북도 경주시의회) 존경하는 경주시민 여러분 그리고 이동협 의장님과 선배동료 의원 여러분! 그리고 주낙영 시장님과 관계공무원 여러분! 더불어민주당 이강희 의원입니다. 오늘 저는 경주시가 동학의 발상지이자 성지로서 그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경주를 생각하면 신라 천년의 수도이자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경주는 동학의 발상지이자 동학의 정신이 태동한 곳이기도 합니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과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 경주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은 물론 경주시민들조차도 경주와 동학을 연결 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주시가 동학의 성지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계승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동학은 1860년 경주에서 탄생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봉건적 신분제와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고 이러한 실제적 위기 속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은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라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내세우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였습니다. 최제우 선생이 창시한 동학은 후천개벽의 사상, 즉 억압받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국가와 백성을 지키는 것이 동학의 사명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운동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사람, 민중을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운동이자 자주정신의 표출이었습니다. 특히 해월 선생은 경주출신으로서 동학을 전국적인 사상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훗날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며 근대 민권운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동학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발상지인 경주는 동학의 성지로서 그 정신을 당연히 보호 계승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현재 동학의 역사적 가치를 기리는 일부 기념사업과 교육원 건립사업은 이루어져 있지만 이는 개별연구단체나 연구자의 노력에 의존되는 경우가 많아 체계적인 정책추진이 이루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경주시가 조례 등을 통하여 동학의 역사적 가치보존과 계승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요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제안드리겠습니다. 첫째, 경주시내 동학관련 유적지로 최제우 선생 탄생지, 해월 최시형 선생 생가터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유적지 보존을 위한 정기적인 조사 및 복원사업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경주시 차원의 동학역사교육프로그램 개설, 학생 및 시민을 대상으로 한 동학사상 및 역사강좌 운영, 동학 관련 학술연구 지원 및 세미나 등을 통하여 시민들의 동학 알기에 힘을 쓰는 일입니다. 셋째, 동학문화제 등을 개최하여 경주를 동학의 성지로 알리고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며 동학의 역사적 가치를 반영한 관광프로그램 개발 및 홍보를 제안합니다. 끝으로 동학 관련 사료 및 문헌수집, 보존을 위한 자료관의 효율적 관리와 동학연구활성화를 위한 연구지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규정도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조례 및 정책이 이루어진다면 경주시는 단순한 역사적 유산 보존을 넘어 동학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학이 추구했던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모든 인간이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 인권존중 그리고 사회정의 실현의 근본적인 철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동학은 단순한 이념적 운동 아니라 민중이 직접 참여한 사회개혁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동학의 정신을 오늘날 경주시가 되살린다면 시민참여형 정책 및 공동체 중심의 도시발전모델을 마련하는 데에도 중요한 방향성을 제공할 것입니다. 경주시는 신라 천년의 역사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와 근대사의 변혁을 이끈 동학의 성지로서도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존경하는 의장님과 동료의원 여러분! 그리고 경주시민 여러분! 동학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쉬며 우리가 지속적으로 계승해야 할 민주주의와 평등의 정신입니다. 이상으로 본 의원의 5분 발언을 마치겠습니다.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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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산하단체, 대전 초등학생 피살사건 성명서 발표지난 10일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 피살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천도교 산하단체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피해를 당한 초등학생은 대전 서구의 한 초등학교 본관 2층에 있는 돌봄교실에서 나와 학원 차를 타려고 나오다가 40대 여교사에 의해 이 학교 시청각실 자재실로 유인된 뒤 흉기에 찔려 숨졌다. 방정환어린이도서관,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천도교여성회본부, 천도교청년회, 동학소년회 등 이들 단체는 성명서를 통해 “정부와 관계 기관은 더 이상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을 즉시 마련할 것, 이에 더해 12일 정부가 밝힌 ‘정신질환 등으로 교직 수행이 곤란한 교원에게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 직권휴직 등 필요한 조치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은 실질적인 예방책이 될 수 있도록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성명서에는 정부 및 사법 기관에 대한 요구 사항이 포함되었으며, 재발 방지 대책 및 추가 요구 사항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천도교 산하 단체 관계자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천도교는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어린이 보호를 위한 사회적 연대와 지원 활동에 적극 동참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피해 아동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라고 밝혔다. 아래는 성명서 전문이다. 대전 초등학생 피살사건에 대한 성명서 대전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피살사건은 우리 사회가 어린이를 보호하는 데 있어 얼마나 부족한지 다시금 드러낸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부모님의 깊은 슬픔과 고통을 감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천도교인은 피해 아동의 성령출세를 심고합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범죄를 넘어, 우리 사회가 아이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구조를 얼마나 견고하게 마련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정부와 관계 기관은 더 이상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을 즉시 마련해야 합니다. 특히, 12일 정부가 밝힌 ‘정신질환 등으로 교직 수행이 곤란한 교원에게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 직권휴직 등 필요한 조치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은 실질적인 예방책이 될 수 있도록 반드시 실행되어야 합니다. 해월신사님은 “아이를 때리지 마라.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모든 생명이 귀하다 할 것이나 특히 어린이들은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기에 더욱 소중히 대하고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올해는 천도교에서 세계 최초로 어린이인권선언을 한 102년이 되는 해이고,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날을 제정한지 103년(천도교 어린이날 104년) 되는 해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운동이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났으나 우리 사회가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이 보호를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합니다. 정부는 ▲학교 및 지역 사회의 아동 보호망 강화 ▲위험 감지 및 즉각 대응 시스템 구축 ▲아동 대상 강력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 등의 실질적인 조치를 신속히 시행해야 합니다. 또한, 교육부는 ▲교사 대상[전문 심리 상담]프로그램 강화 및 의무화 ▲각급 학교에 학생 생활 책임 교감 별도 임명 ▲학교 내외에서 발생하는 범죄 예방을 위한 아동 안전 전담 인력 배치 확대 ▲학생 ‘안심 귀가 시스템’ 구축 등을 하여 학생 안전을 위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더불어, 근본적으로는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맡겨야 하는 현실 자체를 개선하는 사회적 논의를 해야 합니다. ▲노동시간 단축 ▲육아 휴직 제도 개선 ▲양육자와 양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 등의 노력을 통해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어린이 보호를 위한 사회적 연대와 지원 활동에 적극 동참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피해 아동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포덕 166(2025)년 2월 14일 방정환어린이도서관,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천도교여성회본부, 천도교청년회, 동학소년회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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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삼일절 기념식 열려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3월 1일 제 106주년 삼일절 기념식을 봉행한다. 삼일절을 맞아 1919년 민족의 독립을 위한 의지와 희생을 기억하고 모든 국민이 다시 한 번 나라의 독립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날 기념식은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교구에서 봉행된다. 개식-국민의례-청수봉전-심고-주문3회병송-독립선언서 낭독-천덕송 합창-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기념식 후 거리행진 및 의암성사 동상 참례(중앙대교당-탑골공원)가 이어진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삼일절 기념식을 앞두고 보도자료를 통해 “‘3·1대혁명’으로 순도순국(殉道殉國)하신 선열들의 영령 앞에 고개 숙여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선열들이 성령출세(性靈出世)하여 세계 평화와 국가 발전을 도와주시고, 교단의 앞길을 밝게 인도하여 주시기를 심고(心告)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3·1대혁명’의 위대한 정신을 올곧이 계승하여 분열과 혼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합과 상생발전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는 이번 삼일절 기념식을 통해 1919년 의암 손병희 성사님께서 이끄셨던 삼일운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기억하고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 엄혹한 일제탄압시기에 우리 민족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친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봉행하오니, 많은 분들이 참석하시어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교인 및 일반인들이 삼일절을 맞아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삼일절 기념식에 함께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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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구, 포덕 166년 동계특별기도서울교구에서는 2월 10일부터 16일까지 '생활 속의 수도'를 목적으로 동계특별기도를 봉행한다. 이번 특별기도는 온, 오프라인으로 봉행하며 '서울교구 삼경방'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2월 10일부터 16일까지 '생활 속의 수도'를 목적으로 동계특별기도를 봉행한다. 온라인 기도식과 함께 서울교구 성화실에서도 특별기도를 봉행한다. 2월 10일(월)-14일(금) 오후 7시-8시 50분, 9시 저녁 기도식을 봉행하며, 2월 15일(토)-16일(시일) 오후 3시-5시에도 특별기도를 봉행한다. 많은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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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6)(지난 호에 이어) 4. 후퇴 남접군과 북접군이 후퇴하여 집결한 곳은 논산이었다. 동학군은 우금치와 봉황산 전투에서 퇴각해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패인은 물론 무기의 열세였지만, 무리하게 고지 공격을 시도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수뇌부 회의 끝에 군사적 요충지가 될 만한 봉우리를 선점해 방어전을 펴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전략을 변경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공주 전투 이후 동학군의 약점을 파악한 관군과 일본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섰고,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가 논산으로 향했다는 첩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19대대는 오로지 동학군 궤멸만을 목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파견한 최정예부대로, 현역과 예비역 7년간의 병역을 마치고 다시 소집된 3개 중대 663명의 백전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식 소총에, 최신 군사정보와 작전지도는 물론, 군량과 탄환을 보급하는 병참대까지 대동하고 있었으며, 근대식 훈련과 숙련된 지휘관, 상명하복의 엄격한 군율로 다져진 부대였다. 이런 부대가 동학군을 섬멸하기 위해 3개 지대로 나누어 서울에서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학군이 19대대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건다는 건 자멸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다행히 공주 전투에서 다수의 양총과 탄환을 노획한 것이 있고, 군사 요충 고지를 선점해 양총 부대를 전면에 배치하여 방어한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동학군은 정예병 위주로 부대를 재편성해 연산평야와 논산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황산성(黃山城)에 진을 쳤다. 연산(連山)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져 있어 많은 수의 동학군이 포진하기 적당했고, 전방 개활지가 넓어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도 용이했다. 신식 양총으로 무장하고 고지를 선점한 동학군의 투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기와 군량의 부족에 더해 점점 추워지는 날씨였다. 두 달 넘게 외지로 다니며 전투를 벌여온 동학군의 입성은 처음 출진할 때 입었던 홑옷 차림 그대로였다. 두꺼운 방한복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겨울 날씨에 바람이 숭숭 새어드는 석새삼베 홑옷을 입고 전투를 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시련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천포는 한규석의 지휘 아래 화목을 장만하고, 대나무를 쪼개 엮은 발에 가랑잎과 마른 솔잎을 채워 넣은 장태를 만들었다. 화공(火攻)을 위한 준비였다. 장태 공격은 고지를 점령한 부대가 장태에 불을 붙여 산 아래로 굴리는 방식의 전통적 화공법이다. 투석전을 위해서도 바위를 깨뜨려 산더미처럼 돌멩이를 쌓았다. 진영도 백병전을 고려해 1열은 양총 부대, 2열은 화승총 부대, 3열은 장태와 투석전 부대로 재편성하고 기동훈련도 마쳤다. 드디어 관군과 일본군의 선공으로 연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창진 수접주는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데도 전날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가 왔다며 힘차게 독전기를 흔들었다. 본진의 신호가 떨어지자 이에 응답하는 깃발의 펄럭임과 함성이 연산 일대의 산과 들녘에 울려 퍼지며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쳤다. 적군은 동학군의 기세와 저지대의 불리함을 간파했는지 정면을 버리고 측면과 후사면으로 파고들었다. 뜻하지 않은 전선의 변경에 따라 접전 면적이 넓어졌으나 부족한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전선을 이동하지 않고 선점한 고지를 고수한 채 적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였다. 눈이 와서 미끄러우면 고지를 점령한 동학군에게는 문제가 없으나 산을 타고 올라야 하는 적군에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차츰 굵어지는 눈발 속에 양 진영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치를 이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눈이 그치지 않자 다급해진 쪽은 관군과 일본군이었다. 먼 거리를 우회해 돌아오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했고, 강설을 핑계로 총 한 방 못 쏴보고 후퇴한다는 것은 백전노장 후비보병 19대대의 위신을 깎는 일이었다. 이윽고 산정을 향해 올라오는 움직임이 보였다. 적병의 복장이 확연히 구별되는 거리까지 좁혀졌다. 자세히 보니 관군과 일본군이 별개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군 지휘관 뒤에 색동옷을 입은 관군 여럿이 따르는 형국이었다. 일본군이 지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조선 관군은 지휘권도 빼앗긴 채 일본군 꽁무니나 따르며 제 나라 백성인 동학군을 죽이러 다가오는 것이었다. 대열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1열 양총 부대의 사격을 시작으로 2열의 화승총 부대가 번갈아가며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동학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적군의 대열이 횡으로 움직이며 넓게 퍼지는 게 보였다. 대열이 흩어짐에 따라 화망도 넓어졌다. 동학군의 집중사격 효과를 반감시키고 허투루 쏘는 실탄의 사용량을 늘리려는 계략이었다. 적군이 굵은 나무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서서히 반격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인 적설이 유탄에 맞아 흩어지며 동학군을 향해 조여오기 시작했다. 똑같은 빈도의 사격이라도 동학군은 언 발에 오줌 누기였고, 한 번을 쏴도 연발로 긁어대는 적군의 총격은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맹렬했다. 실탄 보유량의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전황은 동학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열의 양총부대 사격이 끝나고 2열의 화승총 부대가 사격을 준비하는 동안 일본군 지휘관이 외치는 돌격 명령 소리는 총성 못지않게 매섭고 날카로웠다. 일본군은 화승총을 겁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날리는 눈발에 심지가 꺼지면서 격발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접전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고, 양측의 거리는 더욱 좁혀졌다. 동학군의 실탄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창진 수접주가 승부수를 띄웠다. “장태에 불을 붙여라.” 한규석이 지휘하는 장태꾼이 일제히 달려들어 불붙은 나무막대를 장태에 찔러넣었다. “장태를 굴려라.” 장태가 불살을 튕기며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때아닌 화공에 놀라 도망치는 적군을 향해 남은 총알 전부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장태는 한번 구르고 지나가면 그만이었고, 총알이 다한 총은 헌 나무막대기에 불과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돌멩이를 던지고 바위를 굴렸다. 그것도 곧 바닥이 드러났다. 무기가 동나자 관군과 일본군이 물밀듯 들이닥쳤다. 사생결단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낫과 창을 든 동학군과 소총과 기관총을 든 일본군과의 비대칭 전투가 연산 일대의 산봉우리에서 피를 튀겼다. 싸움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낳았다. 동학군은 살기 위해 싸웠고, 관군과 일본군은 죽이기 위해 싸웠다. 전장은 차츰 흰 눈과 붉은 피로 칠갑한 무간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장태로 불붙은 연꽃 산봉우리는 희고 붉은 반점을 뿌린 선계(仙界)처럼 영롱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총 맞아 죽어가는 동학군의 비명과 피눈물이 범벅된 연옥(煉獄)의 불구덩이였다. 연산의 산맥이 무너지고 피바다의 해일이 밀려왔다. 공수의 위치가 바뀌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동학군은 산 아래로 떠밀려 내려갔다. 무기가 동나서 고지를 지킬 수도 없었지만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한규석은 한사코 후퇴하지 않겠다는 이창진의 독전기를 빼앗아 짚고 그를 업은 채 산에서 내려왔다. 반 이상 줄어든 패잔의 대열은 피투성이 옷을 육단처럼 걸쳐 입고 눈보라 속 밤길을 걸어 논산으로 향했다. 연산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동학군은 논산에 재집결했으나 다시 기병치 못하고 추격을 피해 전라도 지경으로 후퇴해 내려갔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삼례를 지나 전주, 원평, 태인까지 내려갔다가 북접군은 정읍에서 남접군과 헤어져 장성, 담양, 순창을 지나 충청도로 방향을 틀었다. 낯선 전라도보다는 보은 대도소가 있는 충청도로 가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추위에 지치고 길은 험해도 타향에서 낙오되면 끝장이란 생각에 북접군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여 임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만났다. 해월은 청산 기포령 이후 북접군과 동행하지 않고 충청도에 남아 있다가 관군의 추적을 피해 전라도 임실에 은거하고 있었다. 동학교의 정신적 지주인 해월을 만나자 북접군은 사지에서 손오공을 만난 듯 기뻐했다. “내가 불민하여 통령을 이토록 고생시켰소.” 해월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북접군을 이끌고 나타난 손병희를 보자 칠순을 바라보는 노구임에도 눈물을 흩뿌렸다. “친명(親命)을 완수치 못하고 살아 있음이 수치일 따름입니다.” “솔병에 익숙한 영장(營將)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승전만을 바라겠소?” “스승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꿈만 같습니다. 한울님이 우릴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손병희 통령이 해월에게 청수를 봉전하고, 그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전한 후 곤궁한 상황을 고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의복이옵니다. 동장군의 횡포 앞에 동사하는 군사가 부지기수이옵니다.”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도 예사롭지 않다 들었소.” “다행히 일본 후비보병은 남접군을 뒤쫓아 광주와 나주로 내려갔고, 관군인 장위영 병대와 경리청군 역시 남원으로 직행해 들어가 우리가 임실로 향한 것은 모르는 듯하옵니다.” “앞으로의 방향은 어찌 정하였소?” “일본군은 물론이고, 당장 관군과 조우하게 되면 패전은 불 보듯 뻔합니다. 일단은 종적을 숨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허면?” “무진장(茂朱, 鎭安, 長水) 쪽으로 은밀히 움직여 영동으로 가려 하옵니다.” “그곳은 천하의 험지가 아니오?” “허를 찌르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런 험로를 택하리라곤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여기서 장수까지는 멀지 않으니 그곳 관아를 기습하고 장터를 점거하면 다소간 행렬을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민폐는 없어야 하오. 우리가 기포한 이유가 만백성을 한울님으로 모시고자 함이거늘 민가를 핍박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도인들을 단단히 타일러 스승님의 심려를 덜겠습니다.” “군사 중에 무뢰배 부랑자도 다수 끼어 있다 들었소. 그런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 장차 동학군 전부를 죽이는 화근이 될 것이오.” “난민(亂民)이 전혀 없지는 않사오나 군율로 엄히 다스려 낭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수도(修道)가 얕으면 정병(精兵)으로 거듭나기 어려운 법.”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북접군은 해월을 만나자 그동안 겪었던 풍찬노숙도 잊은 채 무진장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줄기를 넘어 장수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예상은 적중했다. 장수는 동학군의 위세가 강성했을 당시 남접의 김개남 군이 지나갔던 곳으로 이곳 관원들은 그때의 여얼(餘孼)을 다시 입을까 두려워 북접군이 나타나자 한두 합 만에 영관, 교졸 할 것 없이 무기를 팽개치고 줄행랑치기 바빴다. 영읍(營邑)이 크지 않아 물산이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향리와 포교로 조직된 민보군까지 패퇴시켜 얻은 무장과, 관아에 쌓아둔 대동목, 전세목(田稅木)을 수습해 추위로 얼어붙은 손발을 동여매고 다음 목적지인 무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충천했다. 교주인 해월이 앞장서니 동학의 부적만 몸에 지녀도 총알이 피해간다는 속설이 꼭 들어맞는다며 자청해 입도하는 농민들이 늘어나 군세는 배로 불어났다. 전투 경험이 쌓이자 행군 도중 길목을 막아서는 민보군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전진을 이어갔다. 북접군은 무주 초입의 설천(雪川)과 월전(月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전라도 땅을 벗어나 충청도 땅 영동으로 짓쳐 들어갔다. 충청도에 들어서자 고향에 돌아온 듯 마음이 푸근해졌다. 살을 에는 추위가 연일 엄습했어도 들리는 사투리가 익숙하고 정겨워 누구를 만나도 고향 친구인 듯 반가웠다. 더욱이 영동은 동학도가 태반인 곳으로 이들이 전해주는 첩보를 통해 일본군이나 관군과 조우하지 않고도 적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영동의 사정도 그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민보군이 조직되어 북접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민보군은 주로 양반 사족이나 향리, 지방 수령을 중심으로 지주나 마름, 소작인을 모아 조직한 민병대이다. 이들은 원래 지금은 동학군이 된 농민과 한 동리에 살던 이웃이었으나, 전래적으로 누려왔던 기득권을 빼앗길 거라는 위기감 때문에 동학군과 맞서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전에 동복 천 벌을 내놓은 영동의 이용직이었다. 그가 민보군을 조직해 전에 당했던 치욕을 갚으려 벼르고 있었다. 민보군의 전투력은 대단치 않았어도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위험의 소지는 충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어제의 이웃이 오늘은 원수가 되어 싸운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싸움의 결과는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이 나라 백성 모두가 공멸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뜻했다. 게다가 동학군이 상대해야 할 적이 일본군, 관군에 이어 민보군까지 가세해 셋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정녕 처음 기포할 당시 우려했던 일들이 미상불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북접군은 영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황간(黃澗) 관아를 기습해 무기와 광목, 공전(公錢)을 전취하고 용산(龍山) 장터에 진을 쳤다. 기포령 이후 처음으로 사람 냄새 풍기는 마을에서의 주둔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방에서 몰려드는 관군과 민보군의 도착 소식에 북접군은 장터 뒷산인 용산으로 들어가 산마루에 진을 쳤다. 용산은 두 마리 용이 맞대어 엎드려 물을 마시는 형상으로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골짜기가 깊어 수비하기에 용이한 지형이었다. 그간의 전투를 통해 산정을 점령하는 것이 승리의 첩경임을 잘 아는 북접군으로서는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능선 너머 천관산 밤재를 지나면 동학군의 은거지인 청산 문바위골이 자리하고 있어 용산은 고향마을 앞산처럼 포근하고 아늑했다. 북접군은 본진을 산정에 두고 산 아래로 매복을 보내 연산 전투에서의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었다. 만일 일본군이 관군과 합류해 있다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정면을 피해 측면이나 후방에서 공격해올 것이기에 사방의 경계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적군은 골안개가 자욱한 새벽, 북접군이 포진하고 있는 산정을 향해 정면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무리 북접군의 무장이 빈약하다 해도 지세가 불리한 정면을 치고 올라올 리는 없었다. 전략에 익숙한 일본군이 합세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확실했다. 북접군은 산 중턱에 매복병을 은신시켜 두었다가 골짜기 깊숙이 전진해 들어온 적군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고 쏘아대는 적군의 총소리가 어지러웠으나 북접군은 매복과 기습을 반복하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안개가 걷히자 과연 누런 옷의 일본군은 보이지 않았고, 청황색의 관복을 입은 관군과 구구 각색 복장의 민보군뿐이었다. 매복병의 공격이 뜸해지자 적군이 우세한 무기를 믿고 빠르게 전진해 들어왔다. 매복병이 골짜기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매복이 사라지자 적군은 진영을 남북으로 나누어 산정을 향해 협공해 들어왔다. 그러나 황간 전투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고 산정에서 내리쏘는 북접군의 반격 앞에 적군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른 북접군이 철성을 치며 청산 방향으로 패주하는 적군을 쫓아 북상을 서둘렀다. 북접군은 오랜만에 맛보는 승전의 통쾌함에 취해 천관산 밤재를 한달음에 치달아 올라 문바위골로 진격해 들어갔다. 밤재를 넘어 길게 내리뻗은 골짜기에 들어섰으나 적군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터럭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 굽이를 돌아서자 멀리 동학군이 은거하며 정병 훈련에 여념 없었던 훈련장이 나타났고, 맞은편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 만든 초막이 보였다. 북접군은 오랜 타향살이에서 돌아와 고향 들머리에 서서 살던 집을 내려다보는 감회에 젖었다. 기포령이 발한 지 실로 삼 개월여 만에 찾은 한겨울의 귀소였다. 마침내 훈련장에 당도했다. 눈 쌓인 훈련장에는 토끼와 고라니, 살쾡이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골바람이 해찰하는 학승(學僧)처럼 언 눈밭을 비질하고 있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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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환하고 맑은 의식 일깨우기오늘 <깨어남의 새벽> 수련 때였다. 늘 하듯이 ‘몸 깨우기’를 10여 분 동안 했다. 잠시 숨 명상을 하고 나서 마음 깨우기를 해 보자고 했다. 수련생 한 분께 마음 깨우는 말씀 한마디를 부탁했다. 그분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딱 한 줄의 명언을 소개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이는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가 한 말로 그의 대표작인 《대낮의 악마》에 나온다. 주체적인 삶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삶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운명을 창조해 나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좋은 말이지만 그렇게 살기가 쉽지는 않다. 번뇌의 실타래로 엉겨드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둘려 사는 때가 많다. 다른 수련생에게 물었다. “오늘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살아가시렵니까”라고. 그 수련생 역시 오래 걸리지 않고 대답했다. “밝고 맑고 향기 나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밝고 맑고 향기로운 생각.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산다는 건 아름답다. 우리의 생각과 의식은 환경과 존재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반대로 환경과 조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 과정은 개인의 습관이나 집단 내 관습에 따라 이뤄질 때가 많다. 습관과 관습의 엄청난 힘! 그래서다. 하루를 밝고, 맑고, 향기롭게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 역시 쉽지는 않다. 또 다른 수련생에게 의견을 구했다. “어떻게 하면 매 순간을 밝고 맑고 향기롭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알려 주세요”라고. 그분은 말했다. “모든 것에 대해 ‘고맙습니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한 적이 있는데 그랬더니 맑아지고 환해지는 걸 알았습니다.”라고. 우리는 모두 온라인 영상으로 명상 음악을 공유하며 오늘 하루 예정된 일정을 한 시간 단위로 나누어 가며 시간대별로 주변 환경과 대상을 떠올리며 “감사합니다”를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작은 소리로 합송하는 시간도 가졌다. 나뿐 아니라 소통하는 모든 대상과 밝고 맑고 향기로운 기운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 내가 10년 이상 모으고 있는 공공장소에서의 표어와 안내방송을 몇 개 살펴보자. 알게 모르게 사람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들이라 모아보는 중이다. 대전 어느 식당에서다. 들어서는 입구 신발장에 “신발 분실 시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붉은 글씨가 큰 아크릴판에 새겨져 있었다. 당신 신발은 당신이 책임지라는 것으로 읽힌다. 그 글씨를 보니 신발을 신발장에 넣는 거로는 안심할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신발을 벗어들고 들어가라는 것인지 판단이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밥을 다 먹고 나오면서 주인께 말했다. “신발은 신발장에 잘 챙겨두세요” 정도로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주인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쓴 거 아니다. 업체에서 갖다주는 거 붙였다”라고. 경북 구미 근처 철도 건널목에서 본 표어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당신도 언젠가는 건널목 사고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였다. 군부대 철망에서나 보는 “접근하면 발포한다” 수준이다. 작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포고문 5항에 ‘의료 현장을 이탈하는 전공의를 처단한다’라는 위협에 버금간다. 서울 지하철을 탈 때는 다른 지역 지하철과 달리 노인 우대 무료 표를 받으려면 신분증을 넣고 보증금 500원을 넣어야 한다. 지하철을 나올 때는 반환기에 표를 넣어 500원을 돌려받는다. 다른 지역은 모두 신분만 확인하면 보증금 수납 없이 탈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고 서울 지하철 무료 표 발급기의 안내말에 대해서다. 노인 우대 화면을 누르면 “신분증을 투입해 주세요”, “확인되었으니 수거해 주세요” 등의 안내말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에 굳어진 관용어들이다. 한자어와 지시어에 익숙한 관료사회의 오랜 관습이 묻어난다. 서울 시내버스 안에서 본 ‘안전사고 예방 수칙’은 이렇다. <1. 버스가 완전히 정차하기 전에는 자리에 착석 해 있거나 이동하지 말 것. 2. 버스 안에서 서 있거나 버스 승·하차 시 휴대전화 사용 중지>. 명령 분위기의 안내문이다. 맞춤법도 많이 틀렸다. 외래어를 함부로 쓰는 것에 대해 다시 말하기는 부질없어 보인다. 공공언론에서 심하고 전파력이 높다. 노록 악수(딴청 악수-엉뚱한데 보면서 악수를 건성으로 하기), 리질리언스(회복력), 플로티 건물(다리발 건물), 블랙 컨슈머(악성 고객) 등 사전을 뒤져야 겨우 아는 신종 외래어가 판을 친다. 알게 모르게 사대주의와 외국(미국) 숭배 의식을 부추긴다. 코로나 시대에는 “마스크 착용 후 승차 요망”이라는 표어가 버스 타는 곳 입구에 붙어 있기도 했다. “마스크 쓰고 타세요”라고 하면 좋았을 것이다. 역시 코로나 때 식당에서 본 안내문이었다. “식사 전후 마스크 착용. 식사 시 대화 자제”였는데 “말을 조심하시고 밥 안 드실 때는 마스크를 써 주세요”라고 하면 밥맛도 좋지 않겠는가. 유명한 전기밥솥 안내말도 “취사가 종료되었습니다”로 하기보다 “밥이 다 됐네요. 맛있게 드세요”라고 하면 어떨까? 시외버스나 고속버스가 출발할 때 안내말도 그렇다.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세요”라 아니라 “안전띠를 매 주세요”라고 말이다. 나는 틈틈이 해당 기관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거나 전화로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반응은 대부분 “내 소관이 아니다”라거나 “검토하겠다”라는 자동응답기 같은 답이 대부분이다. 봄에 산 입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표어가 있다. “불법 입목벌채 임산물의 굴취·채취는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74조 제1호 규정에 의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함”이라는 경고문이다. 작년에 어느 산 입구에서 반가운 표어를 보았다. “주인의 동의 없이는 산나물이나 산 약초를 캐 가면 안 됩니다. 허락 없이 산채, 약초, 녹비, 나무 열매, 버섯, 덩굴류 등을 따거나 캐서 가져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였다. 아래 표어는 호남고속도로 상행선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봤다. “깨끗해서 참 좋죠? 쓰레기 되가져 가니까”였다. 생각은 느낌과 감정에서 싹을 틔운다. 생각은 행동의 뿌리다. 서울 지하철 어느 역에서였다. 대부분 “우측보행”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오른쪽 걷기”라고 되어 있었다. 반가웠다. 고마웠다. 기분이 밝고 환해졌다. 밝고 맑고 향기 나는 느낌이었다. <깨어남의 새벽>수련을 마치면서 “아이구우 좋아라....하하하하”라고 했다. 오늘 하루를 꾸려가는 환하고 밝은 느낌을 듬뿍 만들었다. 글 목암 전희식('마음치유 농장’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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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 수련의 최종 목적마음공부 즉, 수련의 최종 목적을 각 개인이 모신 한울님과 하나되어 영원한 행복을 얻는 개인적 목적과, 이를 기반으로 모든 사람이 서로 한울님으로 대하면서, 한울님 이치와 본성에 맞는 정치.경제 제도를 마련하여 다함께 행복한 세상을 실현하는 사회적 목적의 2가지로 구분하여 차분히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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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6년 2월 9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동귀일체 회장 원암 김창석 "물의 덕"설교 : 물의 덕(동귀일체 회장 원암 김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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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구, 새해 첫 시일에 입교식 봉행포덕 166년 1월 5일 한강교구(교구장 주용수)에서는 시일식 후 단암 이문상 사회문화부장의 집례로 신입교인 임완영, 조진학 동덕의 입교식을 봉행하였다. 임완영 동덕은 오랜 교직 생활을 후 은퇴하였고, 조진학 동덕은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평소 천도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정암 주선원 선도사의 포덕으로 입교하였다. 신입교인들은 한울님의 뜻과 스승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참된 교인이 되기로 다짐하였고, 한강교구 교인들은 새해 첫 시일을 맞이하며 입교한 동덕을 축하하며 교구와 교단 발전의 밝은 앞날을 기대하였다. (글,사진 한강교구 주영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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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6)(지난 호에 이어) 4. 후퇴 남접군과 북접군이 후퇴하여 집결한 곳은 논산이었다. 동학군은 우금치와 봉황산 전투에서 퇴각해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패인은 물론 무기의 열세였지만, 무리하게 고지 공격을 시도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수뇌부 회의 끝에 군사적 요충지가 될 만한 봉우리를 선점해 방어전을 펴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전략을 변경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공주 전투 이후 동학군의 약점을 파악한 관군과 일본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섰고,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가 논산으로 향했다는 첩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19대대는 오로지 동학군 궤멸만을 목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파견한 최정예부대로, 현역과 예비역 7년간의 병역을 마치고 다시 소집된 3개 중대 663명의 백전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식 소총에, 최신 군사정보와 작전지도는 물론, 군량과 탄환을 보급하는 병참대까지 대동하고 있었으며, 근대식 훈련과 숙련된 지휘관, 상명하복의 엄격한 군율로 다져진 부대였다. 이런 부대가 동학군을 섬멸하기 위해 3개 지대로 나누어 서울에서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학군이 19대대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건다는 건 자멸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다행히 공주 전투에서 다수의 양총과 탄환을 노획한 것이 있고, 군사 요충 고지를 선점해 양총 부대를 전면에 배치하여 방어한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동학군은 정예병 위주로 부대를 재편성해 연산평야와 논산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황산성(黃山城)에 진을 쳤다. 연산(連山)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져 있어 많은 수의 동학군이 포진하기 적당했고, 전방 개활지가 넓어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도 용이했다. 신식 양총으로 무장하고 고지를 선점한 동학군의 투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기와 군량의 부족에 더해 점점 추워지는 날씨였다. 두 달 넘게 외지로 다니며 전투를 벌여온 동학군의 입성은 처음 출진할 때 입었던 홑옷 차림 그대로였다. 두꺼운 방한복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겨울 날씨에 바람이 숭숭 새어드는 석새삼베 홑옷을 입고 전투를 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시련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천포는 한규석의 지휘 아래 화목을 장만하고, 대나무를 쪼개 엮은 발에 가랑잎과 마른 솔잎을 채워 넣은 장태를 만들었다. 화공(火攻)을 위한 준비였다. 장태 공격은 고지를 점령한 부대가 장태에 불을 붙여 산 아래로 굴리는 방식의 전통적 화공법이다. 투석전을 위해서도 바위를 깨뜨려 산더미처럼 돌멩이를 쌓았다. 진영도 백병전을 고려해 1열은 양총 부대, 2열은 화승총 부대, 3열은 장태와 투석전 부대로 재편성하고 기동훈련도 마쳤다. 드디어 관군과 일본군의 선공으로 연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창진 수접주는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데도 전날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가 왔다며 힘차게 독전기를 흔들었다. 본진의 신호가 떨어지자 이에 응답하는 깃발의 펄럭임과 함성이 연산 일대의 산과 들녘에 울려 퍼지며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쳤다. 적군은 동학군의 기세와 저지대의 불리함을 간파했는지 정면을 버리고 측면과 후사면으로 파고들었다. 뜻하지 않은 전선의 변경에 따라 접전 면적이 넓어졌으나 부족한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전선을 이동하지 않고 선점한 고지를 고수한 채 적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였다. 눈이 와서 미끄러우면 고지를 점령한 동학군에게는 문제가 없으나 산을 타고 올라야 하는 적군에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차츰 굵어지는 눈발 속에 양 진영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치를 이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눈이 그치지 않자 다급해진 쪽은 관군과 일본군이었다. 먼 거리를 우회해 돌아오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했고, 강설을 핑계로 총 한 방 못 쏴보고 후퇴한다는 것은 백전노장 후비보병 19대대의 위신을 깎는 일이었다. 이윽고 산정을 향해 올라오는 움직임이 보였다. 적병의 복장이 확연히 구별되는 거리까지 좁혀졌다. 자세히 보니 관군과 일본군이 별개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군 지휘관 뒤에 색동옷을 입은 관군 여럿이 따르는 형국이었다. 일본군이 지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조선 관군은 지휘권도 빼앗긴 채 일본군 꽁무니나 따르며 제 나라 백성인 동학군을 죽이러 다가오는 것이었다. 대열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1열 양총 부대의 사격을 시작으로 2열의 화승총 부대가 번갈아가며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동학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적군의 대열이 횡으로 움직이며 넓게 퍼지는 게 보였다. 대열이 흩어짐에 따라 화망도 넓어졌다. 동학군의 집중사격 효과를 반감시키고 허투루 쏘는 실탄의 사용량을 늘리려는 계략이었다. 적군이 굵은 나무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서서히 반격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인 적설이 유탄에 맞아 흩어지며 동학군을 향해 조여오기 시작했다. 똑같은 빈도의 사격이라도 동학군은 언 발에 오줌 누기였고, 한 번을 쏴도 연발로 긁어대는 적군의 총격은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맹렬했다. 실탄 보유량의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전황은 동학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열의 양총부대 사격이 끝나고 2열의 화승총 부대가 사격을 준비하는 동안 일본군 지휘관이 외치는 돌격 명령 소리는 총성 못지않게 매섭고 날카로웠다. 일본군은 화승총을 겁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날리는 눈발에 심지가 꺼지면서 격발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접전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고, 양측의 거리는 더욱 좁혀졌다. 동학군의 실탄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창진 수접주가 승부수를 띄웠다. “장태에 불을 붙여라.” 한규석이 지휘하는 장태꾼이 일제히 달려들어 불붙은 나무막대를 장태에 찔러넣었다. “장태를 굴려라.” 장태가 불살을 튕기며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때아닌 화공에 놀라 도망치는 적군을 향해 남은 총알 전부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장태는 한번 구르고 지나가면 그만이었고, 총알이 다한 총은 헌 나무막대기에 불과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돌멩이를 던지고 바위를 굴렸다. 그것도 곧 바닥이 드러났다. 무기가 동나자 관군과 일본군이 물밀듯 들이닥쳤다. 사생결단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낫과 창을 든 동학군과 소총과 기관총을 든 일본군과의 비대칭 전투가 연산 일대의 산봉우리에서 피를 튀겼다. 싸움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낳았다. 동학군은 살기 위해 싸웠고, 관군과 일본군은 죽이기 위해 싸웠다. 전장은 차츰 흰 눈과 붉은 피로 칠갑한 무간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장태로 불붙은 연꽃 산봉우리는 희고 붉은 반점을 뿌린 선계(仙界)처럼 영롱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총 맞아 죽어가는 동학군의 비명과 피눈물이 범벅된 연옥(煉獄)의 불구덩이였다. 연산의 산맥이 무너지고 피바다의 해일이 밀려왔다. 공수의 위치가 바뀌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동학군은 산 아래로 떠밀려 내려갔다. 무기가 동나서 고지를 지킬 수도 없었지만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한규석은 한사코 후퇴하지 않겠다는 이창진의 독전기를 빼앗아 짚고 그를 업은 채 산에서 내려왔다. 반 이상 줄어든 패잔의 대열은 피투성이 옷을 육단처럼 걸쳐 입고 눈보라 속 밤길을 걸어 논산으로 향했다. 연산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동학군은 논산에 재집결했으나 다시 기병치 못하고 추격을 피해 전라도 지경으로 후퇴해 내려갔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삼례를 지나 전주, 원평, 태인까지 내려갔다가 북접군은 정읍에서 남접군과 헤어져 장성, 담양, 순창을 지나 충청도로 방향을 틀었다. 낯선 전라도보다는 보은 대도소가 있는 충청도로 가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추위에 지치고 길은 험해도 타향에서 낙오되면 끝장이란 생각에 북접군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여 임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만났다. 해월은 청산 기포령 이후 북접군과 동행하지 않고 충청도에 남아 있다가 관군의 추적을 피해 전라도 임실에 은거하고 있었다. 동학교의 정신적 지주인 해월을 만나자 북접군은 사지에서 손오공을 만난 듯 기뻐했다. “내가 불민하여 통령을 이토록 고생시켰소.” 해월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북접군을 이끌고 나타난 손병희를 보자 칠순을 바라보는 노구임에도 눈물을 흩뿌렸다. “친명(親命)을 완수치 못하고 살아 있음이 수치일 따름입니다.” “솔병에 익숙한 영장(營將)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승전만을 바라겠소?” “스승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꿈만 같습니다. 한울님이 우릴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손병희 통령이 해월에게 청수를 봉전하고, 그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전한 후 곤궁한 상황을 고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의복이옵니다. 동장군의 횡포 앞에 동사하는 군사가 부지기수이옵니다.”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도 예사롭지 않다 들었소.” “다행히 일본 후비보병은 남접군을 뒤쫓아 광주와 나주로 내려갔고, 관군인 장위영 병대와 경리청군 역시 남원으로 직행해 들어가 우리가 임실로 향한 것은 모르는 듯하옵니다.” “앞으로의 방향은 어찌 정하였소?” “일본군은 물론이고, 당장 관군과 조우하게 되면 패전은 불 보듯 뻔합니다. 일단은 종적을 숨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허면?” “무진장(茂朱, 鎭安, 長水) 쪽으로 은밀히 움직여 영동으로 가려 하옵니다.” “그곳은 천하의 험지가 아니오?” “허를 찌르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런 험로를 택하리라곤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여기서 장수까지는 멀지 않으니 그곳 관아를 기습하고 장터를 점거하면 다소간 행렬을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민폐는 없어야 하오. 우리가 기포한 이유가 만백성을 한울님으로 모시고자 함이거늘 민가를 핍박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도인들을 단단히 타일러 스승님의 심려를 덜겠습니다.” “군사 중에 무뢰배 부랑자도 다수 끼어 있다 들었소. 그런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 장차 동학군 전부를 죽이는 화근이 될 것이오.” “난민(亂民)이 전혀 없지는 않사오나 군율로 엄히 다스려 낭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수도(修道)가 얕으면 정병(精兵)으로 거듭나기 어려운 법.”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북접군은 해월을 만나자 그동안 겪었던 풍찬노숙도 잊은 채 무진장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줄기를 넘어 장수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예상은 적중했다. 장수는 동학군의 위세가 강성했을 당시 남접의 김개남 군이 지나갔던 곳으로 이곳 관원들은 그때의 여얼(餘孼)을 다시 입을까 두려워 북접군이 나타나자 한두 합 만에 영관, 교졸 할 것 없이 무기를 팽개치고 줄행랑치기 바빴다. 영읍(營邑)이 크지 않아 물산이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향리와 포교로 조직된 민보군까지 패퇴시켜 얻은 무장과, 관아에 쌓아둔 대동목, 전세목(田稅木)을 수습해 추위로 얼어붙은 손발을 동여매고 다음 목적지인 무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충천했다. 교주인 해월이 앞장서니 동학의 부적만 몸에 지녀도 총알이 피해간다는 속설이 꼭 들어맞는다며 자청해 입도하는 농민들이 늘어나 군세는 배로 불어났다. 전투 경험이 쌓이자 행군 도중 길목을 막아서는 민보군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전진을 이어갔다. 북접군은 무주 초입의 설천(雪川)과 월전(月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전라도 땅을 벗어나 충청도 땅 영동으로 짓쳐 들어갔다. 충청도에 들어서자 고향에 돌아온 듯 마음이 푸근해졌다. 살을 에는 추위가 연일 엄습했어도 들리는 사투리가 익숙하고 정겨워 누구를 만나도 고향 친구인 듯 반가웠다. 더욱이 영동은 동학도가 태반인 곳으로 이들이 전해주는 첩보를 통해 일본군이나 관군과 조우하지 않고도 적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영동의 사정도 그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민보군이 조직되어 북접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민보군은 주로 양반 사족이나 향리, 지방 수령을 중심으로 지주나 마름, 소작인을 모아 조직한 민병대이다. 이들은 원래 지금은 동학군이 된 농민과 한 동리에 살던 이웃이었으나, 전래적으로 누려왔던 기득권을 빼앗길 거라는 위기감 때문에 동학군과 맞서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전에 동복 천 벌을 내놓은 영동의 이용직이었다. 그가 민보군을 조직해 전에 당했던 치욕을 갚으려 벼르고 있었다. 민보군의 전투력은 대단치 않았어도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위험의 소지는 충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어제의 이웃이 오늘은 원수가 되어 싸운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싸움의 결과는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이 나라 백성 모두가 공멸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뜻했다. 게다가 동학군이 상대해야 할 적이 일본군, 관군에 이어 민보군까지 가세해 셋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정녕 처음 기포할 당시 우려했던 일들이 미상불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북접군은 영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황간(黃澗) 관아를 기습해 무기와 광목, 공전(公錢)을 전취하고 용산(龍山) 장터에 진을 쳤다. 기포령 이후 처음으로 사람 냄새 풍기는 마을에서의 주둔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방에서 몰려드는 관군과 민보군의 도착 소식에 북접군은 장터 뒷산인 용산으로 들어가 산마루에 진을 쳤다. 용산은 두 마리 용이 맞대어 엎드려 물을 마시는 형상으로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골짜기가 깊어 수비하기에 용이한 지형이었다. 그간의 전투를 통해 산정을 점령하는 것이 승리의 첩경임을 잘 아는 북접군으로서는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능선 너머 천관산 밤재를 지나면 동학군의 은거지인 청산 문바위골이 자리하고 있어 용산은 고향마을 앞산처럼 포근하고 아늑했다. 북접군은 본진을 산정에 두고 산 아래로 매복을 보내 연산 전투에서의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었다. 만일 일본군이 관군과 합류해 있다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정면을 피해 측면이나 후방에서 공격해올 것이기에 사방의 경계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적군은 골안개가 자욱한 새벽, 북접군이 포진하고 있는 산정을 향해 정면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무리 북접군의 무장이 빈약하다 해도 지세가 불리한 정면을 치고 올라올 리는 없었다. 전략에 익숙한 일본군이 합세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확실했다. 북접군은 산 중턱에 매복병을 은신시켜 두었다가 골짜기 깊숙이 전진해 들어온 적군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고 쏘아대는 적군의 총소리가 어지러웠으나 북접군은 매복과 기습을 반복하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안개가 걷히자 과연 누런 옷의 일본군은 보이지 않았고, 청황색의 관복을 입은 관군과 구구 각색 복장의 민보군뿐이었다. 매복병의 공격이 뜸해지자 적군이 우세한 무기를 믿고 빠르게 전진해 들어왔다. 매복병이 골짜기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매복이 사라지자 적군은 진영을 남북으로 나누어 산정을 향해 협공해 들어왔다. 그러나 황간 전투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고 산정에서 내리쏘는 북접군의 반격 앞에 적군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른 북접군이 철성을 치며 청산 방향으로 패주하는 적군을 쫓아 북상을 서둘렀다. 북접군은 오랜만에 맛보는 승전의 통쾌함에 취해 천관산 밤재를 한달음에 치달아 올라 문바위골로 진격해 들어갔다. 밤재를 넘어 길게 내리뻗은 골짜기에 들어섰으나 적군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터럭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 굽이를 돌아서자 멀리 동학군이 은거하며 정병 훈련에 여념 없었던 훈련장이 나타났고, 맞은편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 만든 초막이 보였다. 북접군은 오랜 타향살이에서 돌아와 고향 들머리에 서서 살던 집을 내려다보는 감회에 젖었다. 기포령이 발한 지 실로 삼 개월여 만에 찾은 한겨울의 귀소였다. 마침내 훈련장에 당도했다. 눈 쌓인 훈련장에는 토끼와 고라니, 살쾡이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골바람이 해찰하는 학승(學僧)처럼 언 눈밭을 비질하고 있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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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5)(지난 호에 이어) 전투가 일단락되었다. 급선무는 시신을 묻는 일이었다. 벌써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땅은 곡괭이로 내리찍고 삽날로 후벼도 쉽사리 파지지 않았다. 애먹는 와중에 진동하는 피비린내는 머리를 돌게 만들었다. 시신은 온전한 것 하나 없이 뭉개지고 구멍이 뚫려 팔다리를 잡아당기면 헛소매 관절이 쑥 빠져나왔다. 어쩔 수 없이 땅을 얕게 파 토감(土坎)한 자리에 시신을 눕히고 흙을 덮었다. 혈해(血海)의 전장은 이곳만이 아니었다. 이인의 북접군이 채 토감을 마치기도 전에 영동과 옥천포 군의 피습 소식이 들려왔다. 대교에 진을 쳤던 북접군 역시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참살을 면치 못했다는 전갈이었다. 북접군의 중구난방과 달리 적들의 군사 지휘 체계는 일사불란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로써 공주를 삼면에서 포위 공격하기로 한 애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헛되이 땅을 치는 소리가 이인 들판을 울음바다로 적셨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망자가 속출했다. 가뜩이나 병력 손실이 많아 애기손, 조막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에 군량미 자루를 짊어지고 베잠방이 휘날리며 달아나는 도망병의 모습이 부지기수였다. 쫓아가 붙잡을 수도 없어 그저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출진에 부화뇌동하여 함부로 따라나선 부랑자나 도적, 협잡꾼이 사라지고, 새롭게 전의를 불태우는 젊은이들과 정식으로 입도한 도인들 상당수가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골이 깊으면 산도 높은 법. 병력이 반으로 줄긴 했어도 사기는 오히려 충천했다. 병장기와 전량, 가축을 추슬러 진군에 나선 것은 만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아침.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능선과 고지를 철저히 수색하고, 수시로 정탐을 보내 매복과 기습 공격에 대비했다. 그래서인지 공주가 한달음에 건너다보이는 봉황산 자락 하고개 초입에 당도하는 동안 아무런 적정(敵情)을 만나지 못했다. 이인 전투에서 얻은 교훈은 유리한 지형지물의 선점과 접근전의 중요성이었다. 동학군의 주 무기인 화승총은 사거리가 짧은 탓에 높은 고지를 점령하여 매복과 기습으로 접근전을 펴지 않고서는 승산이 없었다. 이를 위해 몸이 날래고 양총으로 무장한 선봉대를 앞세웠고, 그 뒤로 화승총 부대를 포진해 전진케 했다. 마침내 우금치와 효포 쪽 남접군으로부터 전투 개시를 알리는 파발이 당도했다. 바야흐로 공주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공격에 있어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회선포를 앞세우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인벌 전투에서 허투루 탄환을 낭비한 탓에 회선포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탄환 없는 화포는 우마차꾼을 괴롭히는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과감히 회선포를 버렸다. 크나큰 화력의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공격은 세 방향으로 나누어 북접군이 진을 친 봉황산 자락 하고개, 남접군이 치고 올라오는 우금치 고개와 효포 방면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남접군이 먼저 교전을 시작했는지 우금치 쪽에서 포성과 총성이 들려왔다. 북접군도 철성 소리를 신호로 포접기의 뒤를 따라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봉황산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멀리서 보면 정수리는 붉고 몸은 눈처럼 흰 단정학(丹頂鶴) 떼가 군무를 추며 날아드는 형상이었고, 가까이서 보면 풍성한 서설(瑞雪)을 맞으며 분합문 밀고 우당탕 뛰어드는 함진아비의 혼례청 마당놀이 같았다. 순식간에 봉황산 밑자락이 북접군의 흰옷에 휘감기며 하옇게 뒤덮였다. 그러나 북접군이 채 능선에 다다르기도 전에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관군과 일본군으로부터 집중사격이 쏟아졌다. 철성 소리는 일시에 사라지고 빗발치는 총성만이 산야에 울려 퍼졌다. 소리 위에 소리가 겹치면서 한 소리는 쇠하고 다른 한 소리는 시퍼런 작두날 위에서 흔들어대는 박수무당의 무령(巫鈴)처럼 맹위를 떨치며 날아들었다. 양총을 든 북접군 선봉대가 즉각 반격에 나섰다. 공방이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하고개 일대는 바람을 가르는 총소리로 귀청이 찢어졌고, 군마라도 몰려와 달린 듯 양쪽 진영에 뽀얀 먼지가 일었다. 초전의 어수선함이 사라진 뒤 주변을 살펴보았다. 양측 모두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으나 적군은 여전히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고, 북접군은 아직 능선을 타지 못했다. 이대로 전선이 고착된다면 북접군의 피해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방어전이 아닌 공격전이었기에 이인에서의 전투 경험도 소용이 없었다. 방어전이라면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가 아래를 향해 내려 쏠 수 있지만 지금은 공격전이라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당장 전세를 역전시킬 묘안을 찾아야만 했다. 적과의 거리를 좁혀 접근전을 펼치는 수밖에 없었다. 공격이 뜸해진 틈을 타 북접군이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방이 노출되어 큰 나무 뒤에 숨어도 쉴새 없이 날아드는 총탄에 줄기가 터져 나갔고, 마른 풀포기조차 설맞은 돼지처럼 허옇게 뒤집혀 잔뿌리를 털어댔다. 그대로 있다가는 벌집이 되기 십상이었다. 가장자리에 엎드려 있던 몇이 용기를 내어 갈지자로 뛰어나갔으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북접군의 움직임이 멈추자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이번에는 북접군 머리 위로 대완포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는 총과 달리 바닥에 엎드려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포까지 동원해 공격해올 줄은 몰랐다. 포탄은 제철 만난 망둥이처럼 사방에 쿵쿵 떨어지며 파편을 튀겼다. 그대로 있다간 비명 한번 못 지르고 곤죽이 될 판이었다. 답은 하나였다. 엎어져서 포 맞아 죽으나, 뛰어가다 총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였다. 누구의 명령이랄 것도 없이 북접군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고지를 향해 달려 나갔다. 북접군이 다가가자 이번에는 회선포 공격이 잇따랐다. 여러 대의 기관총에서 연발로 쏟아지는 총탄 앞에 선봉대는 전진을 멈추었고, 총알 세례를 받은 병사들의 무릎이 턱턱 꺾이며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선두에 선 자가 총 맞아 쓰러지면 뒤따르는 병사가 피 묻은 총을 주워들고 사격하며 공격해 올라갔다. 이창진 수접주와 신재길 접주를 비롯한 지휘부가 선두에 서서 독전을 다그쳤다. “흩어져서 고지를 점령하라. 고지를 향해 뛰어라.” 북접군은 전방의 봉황산 대신 길 양편에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나 늦가을 산비탈은 돌돌 말린 가랑잎과 마른 솔잎이 수북해 세 걸음 올라가면 여섯 걸음 미끄러졌고, 풀로 삼은 짚신 끈은 맥없이 끊어져 발목에서 덜렁거렸다. 차라리 맨발이 나았다. 짚신을 벗어 던지고 각개 전투로 흩어져 고지를 향해 뛰었다. 대열이 흩어지자 회선포 소리가 잦아들고 이번에는 소총 소리가 뒤를 이었다. 북접군이 양쪽 산봉우리를 점령하면서 전투는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산마루에 도착한 북접군은 찬 바닥에 엎어진 채 참았던 숨을 뱉으며 휴식을 취했다. 겹친 피로감이 삼년상 여막(廬幕)에 누운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한규석은 화승총의 무게감과는 전혀 다른 피묻은 양총을 가슴에 얹고 누워서 밭은 숨을 골랐다. 그것은 여러 군데 가슴이 뚫려 피 칠갑으로 나뒹굴던 병사가 숨이 끊어지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양총이었다. 총신의 열기가 남아서인지, 흘린 피가 식지 않아서인지 총 잡은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누운 채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얼기설기 뭉쳐진 소소한 구름밭이 흐르고 있었고, 음영이 겹쳐진 곳에서 빛줄기가 쏟아져 내려왔다. 구름의 무늬였고 흩어지는 바람 소리였다. 전투가 아니었다면 마냥 한가롭게 보였을 빛내림이었다. 쉬는 동안 부산해진 건 관군과 일본군 쪽이었다. 전투가 일단락되기 무섭게 적진에서는 보급품이라도 나르는지 소란스러웠고, 밥을 배식하는 듯 그릇 부딪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소강상태를 이용해 보급과 배식이 이루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북접군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누어 먹을 음식도 없고, 운반할 보급품도 없었다. 거리가 멀어 총을 쏠 수도 없었고, 일어설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할 일이라곤 고작 찬 바닥에 깔 가랑잎을 긁어모으는 게 전부였다. 오후가 지나 해거름이 되자 눈구름이 몰려들고 바람이 거세지더니 급기야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입성이 허술한 북접군에게 때 이른 북풍한설이 찾아든 것이었다. 바람벽 하나 없는 산마루에서 맨발로 엎드려 밀려드는 추위와 배고픔, 졸음을 참는다는 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차라리 전투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골짜기 하나도 건너지 못하는 화승총으로 선제공격을 한다는 건 맨발로 옹기전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접주들이 모인 지휘부 회의에서 정예병을 뽑아 기습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시야가 확 트인 개활지에서 무슨 수로 은밀히 접근하느냐는 퉁이 나오자 모두들 입을 닫았다. 선제공격을 할 수도 없고,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할 수도 없다면 방법은 하나, 퇴각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지휘부가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산에서 밤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은 일단 철수했다가 다른 경로를 통해 다시 공격하기로 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북접군이 전열을 정비하면서 작전회의를 거듭했지만, 진영과 무장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기를 잡을 수 있는 묘안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간부들이 모인 도소 회의에서 이창진 수접주가 한 가지 의견을 냈다. “적군이 고지를 선점하고 있고 무기도 우세한 상황이라 이대로 전방을 뚫기는 곤란합니다. 공격 방향을 둘로 나누어 양동작전을 펴보는 것이 어떨까요? 하나는 측면에서, 다른 하나는 정면에서 말입니다. 측면군이 먼저 금강 변을 따라 접근하면서 공격을 개시하면 적은 공격 방향이 바뀐 줄 알고 측면으로 방향을 돌릴 것이며, 그러면 전선이 길어져서 정면에 빈틈이 생길 것입니다. 제가 우마와 총 없는 병사를 주력군으로 위장해 측면을 교란할 터이니 이때를 노려 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정면에서 치고 올라간다면 승산이 있을 듯합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는지요?” 이창진의 말이 끝나자 마땅한 공격 방법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참이어서인지 재청이 빗발쳤다. 이창진이 위장군의 전권을 위임받아 준비에 나섰다. 전량도감인 한규석이 주동이 되어 사격이 가능한 무기를 주력군에게 전달했고, 주력군으로 위장하기 위한 방책을 서둘렀다. 우마차는 검불 짚단을 높이 쌓아 군량미로 위장했고, 형형색색의 포접기도 만들어 군사의 숫자가 많아 보이게 했다. 총을 든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목총도 깎았다. 위장군의 숫자는 북접군의 반 이상이 총 없는 병사라 인원은 차고 넘쳤다. 전선에 뛰어들고 싶어도 총이 없어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로 삼천 명 대군이 꾸려졌다. 대군이라고 해봤자 목총을 든 농민이 태반이었지만 언뜻 보아서는 여지없는 정예부대였다. 전의(戰意) 하나만큼은 관운장 못지않았다. 손재주 있는 몇이 목책을 만들자는 의견을 냈다. 통나무를 반으로 켜서 나무 방책을 만들면 포탄은 못 막아도 총알은 막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때아닌 목공작업이 벌어졌다. 산판을 뒤져 끌어온 통나무를 반으로 켜고 칡넝쿨로 엮으니 훌륭한 방책이 완성되었다. 시험 사격을 해본 결과 효과가 입증되었다. 우마차를 징발해 방책을 포개 쌓으니 그것만으로도 또 다른 군량 위장 마차가 된 셈이었다. 출진 준비를 마친 위장군이 신명 좋은 징잡이를 앞세워 진군을 시작했다. 지축을 흔드는 철성 소리에 맞추어 삼천 대군이 보무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출정 소리에 놀라 이른 겨울잠에 빠진 산짐승이 깨어나 울부짖었고, 빈 들판에서 이삭을 뒤지던 멧새 떼도 논두렁, 밭 언덕으로 몰려나와 부리를 씻으며 대군을 전송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금강 변을 따라 측면에서 다가오는 대군이 보이자 산마루를 지키던 방어군의 동요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타난 동학군을 막기 위해 허둥대는 모양새가 산 아래에서도 훤히 보였다. 천기(天氣)가 아군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대군은 더욱 힘차게 진군해 들어가 부엉산 어름에서 방향을 틀어 봉황산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방어군 쪽에서 다급히 쏜 총알이 대군의 전면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튕겨 올랐다. 얼떨결에 위장군 대열이 멈추었다. 이창진 수접주가 독전기를 흔들며 소리쳤다. “겁내지 마라. 총알이 예까지는 닿지 않는다. 오십 보 더 전진한 후 멈추어라.” 이창진의 대갈일성에 대군은 오십 보를 더 전진한 후 진군을 멈추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목책을 앞으로 날라라.” 목책을 실은 우마차가 위장군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목책을 일렬로 곧추세우자 나무로 쌓은 성벽의 모양새가 갖춰졌다. “구령에 맞춰 전진하라.” 병사들이 목책을 방패처럼 들고 구령에 맞추어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무게가 무거워 속도가 느리긴 해도 목책은 훌륭한 방패막이가 돼주었다. 목책을 겨냥해 총알이 날아들었으나 두꺼운 통나무를 뚫지 못했다. 목책 부대가 한발 한발 접근해 가까이 다가섰다. 복색을 달리 입은 영장(營將)과 교졸(校卒)의 관군 모습과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군이 확연히 구분되어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다시금 이창진의 외침이 있었다. “전진을 멈춰라. 정면 주력군의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 명심하라.” 목책의 움직임이 멈추자 날아오던 총격도 멈추었다. 방어군은 동학군의 엄청난 숫자에 눌려 산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목책 뒤에 숨은 동학군이 언제 돌격해 올라올지 몰라 정세를 살피고 있음이 분명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정면 공격에 대비해 배치되었던 적군의 상당수가 측면으로 이동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주력군이 공격을 시작하면 위장군은 목책을 남겨두고 몰래 빠져나오면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위장군이 움직이지 않으니 방어군의 발도 묶일 것이고, 주력군의 공격이 시작되더라도 언제 위장군이 공격을 시작할지 몰라 병력을 빼지 못할 것이다. 칼은 칼집에 들어 있을 때가 무서운 법이다. 위장군은 목책을 옮기느라 땀에 젖은 홑적삼과 베잠방이를 비설거지 하듯 쓸어내리며 작전의 성공에 대한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방어군 쪽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보였다. 위장군의 전진이 멈춘 것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정찰병 몇이 산 아래로 내려오는 게 보였다. 소총 사정거리까지 접근해놓고도 공격을 주저하는 건 충분히 의심할 만한 일이었다. 당장 정면 주력군의 공격이 시작되지 않으면 정체가 노출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정찰병은 일본군 하나에 관군 셋이었다. 그들이 총을 겨눈 채 횡으로 늘어서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위장군은 목책 뒤에 숨어 갈피에 꽂아둔 낫을 뽑아 들고 숨을 죽였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일촉즉발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선두에 선 일본군이 총구를 겨냥한 채 목책 옆을 돌아서는 순간, 멀리서 포성과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주력군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총격이 들리자 일본군이 몸을 돌려 돌아가려다 말고 목책 뒤에 숨은 위장군을 발견하고 말았다. 이를 본 위장군 하나가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해 뛸 듯이 날아올라 낫을 내리찍었다. 낫의 쇠 무늬가 햇살에 흩뿌려졌고,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이 손가락에 걸었던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한 방의 총소리와 한 차례의 낫의 번뜩임이 있은 후 짧은 정적이 흘렀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둘 다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음 순간 위장군의 횡격막을 뚫은 총알구멍에서 울컥울컥 번지는 핏물이 베적삼을 적시는 게 보였고, 일본군 역시 자신의 목울대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가 사방으로 튀는 걸 보았다. 이를 본 나머지 정찰병이 혼비백산 꿩총을 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나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위장군이 우세했다. 정찰병이 산으로 도망치고 낫과 죽창을 든 위장군이 뒤를 쫓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공세는 순식간에 역전되고 말았다. 동학군에게 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정찰병이 맨 앞에서 달려드는 위장군을 쏘아 넘어뜨리자 나머지 정찰병도 방향을 돌려 사격을 개시했다. 정찰병 몇 명의 공격으로 위장군 전열이 무너지자, 산마루를 지키던 관군과 일본군이 속았다는 걸 깨닫고 총을 쏘며 일제히 뛰어 내려왔다. 낫과 죽창을 든 북접군과 총을 든 적군 사이에 백병전이 벌어졌다. 귀를 찢는 총소리와 함께 북접군의 사지에 구멍이 뚫렸고, 낫 날에 베인 적군의 팔다리가 핏물에 범벅되어 사방으로 떨어져 나갔다. 솔가지와 쌓인 낙엽에 검붉은 피 얼룩이 두텁게 덧칠되어갔다. 위장군은 죽을 때까지 싸웠고, 적군은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웠다. 위장군은 쓰러지면 다시는 못 일어났지만, 적군은 총알이 떨어지면 다시 장전해 쏴댔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요, 도살이며, 천살(擅殺)이었다. 위장군은 수백 구의 시신을 산야에 남겨둔 채 철수해야만 했다. 성한 사람은 몇 없었고, 나머지는 피칠갑을 한 인두겁이었다. 이창진 수접주는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말았다. 한규석이 이창진을 들쳐업고 목총을 거꾸로 짚어 사력을 다해 사지에서 빠져나왔다. 정면에서 치고 올라갔던 주력군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길게 늘어난 전선 덕에 초반에는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고지 점령을 목전에 두고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역시 열세한 무기 탓이었다. 구식 화승총으로는 신식 양총을 당해낼 수 없었다. 총기를 다룰 줄 아는 신재길 접주가 이번 전투에서 죽은 것도 북접군에게 큰 타격이었다. 전봉준의 남접군 역시 우금치 전투에서 패했다는 파발이 당도했다. 이로써 남북접 연합군의 공주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패전의 원인은 단 하나. 무기의 열세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였다. 신식 무기가 없는 한 동학군은 승리할 수 없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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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4)(지난 호에 이어) 보은 충경포 수접주 윤경신은 눈자위와 상체가 헌헌한 중년의 남자였다. 청수잔을 올려 한울님께 심고하는 것으로 상견례를 대신한 후, 신재길은 구해온 총을 더 살펴보겠다며 일행을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윤경신이 두루마기를 벗어 횃대에 걸고는 나달나달해진 짚신을 잔솔가지로 털어 한쪽에 밀어놓았다. 사려 깊음이 몸에 밴 사람처럼 보였다. “경기도에서 예까지 오시느라 여독도 안 풀리셨을 텐데 이리 찾아주심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작년 보은 취회 이래 전국 각지에서 솔병해 모여드는 도인들을 치르시느라 되레 노고가 많으실 듯하옵니다. 이곳 보은 사정은 어떠하온지요?” “동학군을 돕는데 너나가 따로 없지요. 보은 땅에서 동학군에 반대하는 민보군이 조직되었다는 말은 아직 들은 바 없습니다.” “과연 보은이야말로 대도소가 들어서기에 손색이 없는 고장이로군요.” “하지만 워낙 농촌이다 보니 전량과 무기를 마련하는 데 애로가 많습니다. 곧 겨울이 닥칠 것이기에 월동 준비만으로도 벅찹니다. 이번에 나갔다 온 연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지요.” “성과는 있었는지요?” “삼 년 가뭄 뒤끝이라 몇몇 부농과 지주들의 성의만으로는 신통치가 않습니다.” “하오면?” 셋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향리 도처를 뒤져보면 고부 민란을 초래케 한 조병갑 같은 탐관이나, 납속(納粟)하여 얻은 관직으로 늑봉(勒捧)을 일삼는 무리가 상당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옥천포, 영동포의 접주와 함께 영동에 행차하여 이용직을 만나고 왔습니다.” “이용직이라 하오면?” “백만 냥을 상납하고 경상감사를 제수받았던 인물인데 지금은 파직되어 영동에 살고 있습지요. 그자를 닦달해 겨울옷 일천 벌을 받기로 약속했습니다.” “큰일을 하셨군요. 순순히 내놓지는 않았겠지요?” “목숨은 하나인지라 면전에서야 협조했지만 돌아서서는 우릴 화적 취급했을 겁니다.” 보은 수접주가 이 말을 하고는 망나니 칼처럼 손날을 넓게 펴서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이천 수접주가 모처럼 피어난 웃음기를 만면에 가득 담으며 말했다. “허허, 수접주님의 배포가 참으로 호협하십니다그려. 그나저나 해월선생의 기포령이 너무 늦은 건 아닌지요? 하루가 다르게 날이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기포령을 내리시던 날도 그런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가을걷이를 마친 후에 일어나자는 것이 중론이었습지요.” “기포령을 내리던 날 수접주께서도 그 자리에 함께 계셨단 말씀입니까?” “그러하옵니다.” “그날의 얘기를 듣기 청합니다. 해월선생께서 뭐라 하셨는지요?” 이창진과 한규석이 입을 모아 간청했다. “어허, 낭패로고. 내 어찌 한울님의 천어(天語)를 들으신 해월의 말씀을 감히 옮긴단 말이오. 당치 않소.” “해월선생께서 기포령을 발하실 때는 다 그만한 연유가 있었을 것이고, 신교(神敎)도 함께 전하셨을 터, 간곡히 듣기를 청합니다.” 이번에는 수접주까지 나서서 간청하자 보은 수접주가 더는 물리치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제 부족한 언변을 탓하지 않는다면 몇 말씀 사뢰어보리다. 해월선생께서 청산에 모인 접주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보은 수접주가 옷에 풀 먹이듯 적삼 깃을 정갈히 훑어내려 반듯이 펴고는 헛기침으로 목을 고른 후 그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토머리에 얼음 풀리듯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난달 보름에서 하루가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해월선생으로부터 접주들만 은밀히 청산 대도소로 모이라는 전갈이 당도했습니다. 당시는 해월께서 관군의 눈을 피해 그곳에 계시던 때였지요. 각 고을 접주에게 황급히 연통을 넣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나섰습니다. 가는 도중에 보니 큰 고을은 물론이고, 작은 마을도 출진을 준비하는 동학군으로 가득했고, 군량과 무기를 실은 우마차가 길을 막아 동학군 세상이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민초들 모두 가만히 팔 개고 있다가는 왜놈의 손에 나라가 넘어가겠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청산에 도착해 안내된 곳은 허름하게 위장한 초가였습니다. 거기서 하루를 유하고 이튿날 문바위골로 향했지요. 문바위골은 계곡이 깊어 사람이 은거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고, 청산 평야는 바다처럼 넓어 대군을 먹이기에 충분한 터전이었습니다. 게다가 앞은 탁 트이고 뒤는 막혀 있어 인마의 움직임은 물론, 작은 기척도 울림통 속처럼 크게 들려 외적의 방비가 능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보은 수접주가 음성을 낮추어 깔았어도 기실은 말주변이 상당해 당시의 정황을 그림 그리듯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문바위는 형상이 마치 사람이 드나드는 문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로 가보면 대단한 영험이 깃들어 있다 느끼실 겁니다. 그 문을 들어서면 속세와는 다른 신령스러운 땅에 들어섰다는 느낌, 지금껏 품어왔던 생각을 온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다가설 수 없는 다시 개벽의 세상, 천 년의 웅지를 펼 도량에 들어섰다는 감동이 절로 솟아날 것입니다. 문바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또한 속리 정이품이 환생한 듯 자태가 엽엽하고, 길가에 늘어선 빨간 남천 열매에 눈을 빼앗겨 한 마장쯤 걷다 보면 이번에는 수령이 족히 오백 년은 됨직한 느티나무가 나옵니다. 나무가 어찌나 실하고 울창한지 초열(焦熱)의 폭염에도 가을의 너와집 같고, 세 가지로 나눠 뻗은 줄기 한가운데는 장정 서넛이 둘러앉을 만하고, 나무 아래의 너럭바위 또한 선방 서너 개는 꾸밀 만큼 넓습니다. 이 너럭바위에 누워 하늘을 보면 온 세상이 평평해지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고도 합니다. 동학이 꿈꾸는 세상처럼 말이지요.” 수접주가 없는 정경을 부러 꾸며 말할 리는 없겠으나 곧이듣기에는 너무도 출중한 지세인지라 셋은 언젠가 문바위골에 꼭 가봐야겠다며 속마음을 다졌다. 듣는 이의 수굿한 귀 기울임에 신명이 났던지 수접주가 연달아 말을 이었다. “삼면에 휘장을 친 너럭바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레방석처럼 너른 훈련장에는 무예를 다듬느라 여념 없는 군사들이 그득했고, 산비탈을 다듬어 지은 초막에서는 숯불 태워 밥 짓는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잠시 있자니 흰 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해월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접주들이 일제히 일어나 복배(伏拜)로 예를 갖추자 해월은 우리보다 더 깊숙이 허리를 숙여 답례하고는 좌정하셨지요. 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접주의 말투가 일순 해월의 목소리인 양 중저음으로 깔리면서 너른 호수처럼 벙벙해졌다. 수접주는 그날의 해월을 상기하려는 듯 청산 쪽으로 머리를 돌려 버성긴 수염을 한 차례 쓸어내린 후 해월선생의 말씀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았소이다. 접주들을 뵈러 내가 직접 보은으로 가야 마땅하나 그곳은 이미 관군이 우리 동학군의 주둔 사실을 아는 고로 거사를 앞두고 혹여 일을 그르칠까 싶어 이리로 모신 것이니 크게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운대선생님께서 무극대도를 받아 동학을 창도하신 이래 올해로 꼭 삼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나는 이 나라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 그 본성에 인내천(人乃天) 한울님이 있음을 알게 하였고, 만민 모두가 골고루 평등하다는 시천주의 가르침, 사람을 한울님같이 대하고 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을 실천하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오늘 접주님들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이런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하고자 함입니다. 무릇 모든 생명은 스스로 존귀한 가치를 지니며, 우주 만물과 더불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시 개벽의 세상, 즉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주 만상이 다 한울님이고, 어린이나 아녀자, 관노나 사노, 하다못해 들판에 나는 새 한 마리, 풀 한 포기조차 한울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오나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일본이나 청 제국이 서로 취당(聚黨)하여 조선을 겁박하고, 탐학한 관리나 토호들이 반상, 적서, 남녀의 차별에, 토색질, 분탕질까지 저질러 선한 백성 한울님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소외와 핍박을 천형(天刑)으로 알고 사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며, 그릇됨을 알고도 모른 채 묵과하고 굴종하는 건 다시 개벽의 뚜껑을 닫는 일입니다. 묵묵히 참기만 하고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 건 자기 안에 갇힌 기망(欺罔)일 뿐이며,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묘책이 없다고 자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혁명이란 무엇입니까? 원악(元惡)에게 머리 조아리지 않고, 내 믿음을 철석같이 믿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모든 혁명은 분노에서 비롯하며, 인내가 끝나는 곳에서 열리는 새로운 개벽 하늘입니다. 백성의 궁핍과 치욕이 하늘을 찌르고, 외적의 침탈로 나라가 쇠멸하는 이 마당에 마냥 팔 괴고 앉아 상제님의 강림만을 기다린다면 어찌 우리가 축원하는 세상, 혁명의 하늘이 열리겠습니까? 자고로 민심은 천심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창의하는 것은 곧 온 나라 백성이 창의하는 것이며, 한울님이 도모하는 천운의 기회가 도래함이니, 오늘의 기포를 통해 수운 스승님의 무고함을 바로잡고, 외군(外軍)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 조선의 대원(大願)을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생명은 한울님이 주신 것이고 죽어도 한울님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니 성령으로 장생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호랑이가 들어오면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싸워야 하는 것처럼, 이제 나는 우리 동학도 모두가 함께 떨쳐 일어나 죽기를 다해 싸우자는 창의(倡義)의 기포령(起包令)을 발하는 바입니다. 이를 계기로 풍전등화처럼 스러져가는 조선을 되살리고, 한울님의 목숨을 호기롭게 일으켜 세우는 단초가 되기를 앙축(仰祝)하옵니다. 이것으로 내 말은 줄이고 여러 접주님 모두에게 천지신명의 보살피심과 한울님의 가호가 창대하기를 축수하옵니다. 충경포 수접주 윤경신, 한울님의 천어(天語)에 기대어 해월선생의 말씀 대신 전해 드렸습니다.” 보은 수접주가 밭은 숨을 다독여 해월선생의 기포령을 전하고 말문을 닫았다. 수접주가 들려준 해월의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생생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특히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혁명이며, 스스로 분노하여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의 시작이라는 말에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일본군이 쏘아대는 총소리 앞에 썩 나서며 울려대는 동학군의 철성 소리였으며, 그들의 화력에 기죽어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한울님이 목소리이기도 했다. 셋은 숙연한 심정으로 해월선생이 창의하며 품었던 늠연한 기상과 기포령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장내리 대도소를 나섰다. 보청천 강물에 드리워진 윤슬이 길게 이어졌다. 일행은 이천접이 야영하고 있는 숙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단정학, 왜가리 들의 귀소가 강을 따라 잔잔히 너울져 함께 흘렀다. 3. 전투 이틀 후, 보은 장내리 대도소에서 출정을 위한 치성식이 열렸다. 전날 밤 은밀히 당도한 해월선생이 의암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전수하는 것으로 치성식이 끝나고 출정이 시작되었다. 통령으로 임명된 의암 대접주가 각 포를 사열한 뒤 3만 대군을 원정군과 수비군으로 나누어 2만의 원정군은 논산으로 이동해 전봉준의 호남동학군과 합류토록 하고, 1만의 수비군은 장내리 대도소, 문바위골 대도소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을 방비케 했다. 이동 편의성을 위해 원정군을 다시 둘로 나누어 1대인 영동과 옥천포는 회덕을 거쳐 공주 장기의 대교(大橋)로 이동했고, 2대는 경기포를 주축으로, 강원, 충청, 경상포와 연합해 심천과 진산을 거쳐 논산으로 향했다. 2대의 주력은 괴산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이천포가 맡았다. 황색기를 든 손병희 통령의 중군을 중심으로 청색기의 선봉, 백색기의 좌익, 흑색기의 우익, 홍색기의 후군이 논산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색 깃발을 치켜든 2만 대군이 진군해 나가자 연도의 산과 들녘은 온통 흰옷 입은 동학군으로 넘쳐났고, 군량과 무기를 실은 우마차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수접주로 승진한 이창진과 전량도감이 된 한규석은 충경포의 신재길 접주와 함께 후군에 편성되어 보무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행군 도중 간혹 만나는 소읍의 관군은 대군의 이동에 혼비백산해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일쑤였고, 그 덕에 적으나마 신무기와 탄약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중 회선포 두 대를 노획한 것은 동학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총신이 돌아가면서 총알이 나가도록 고안된 회선포는 기왕에 가지고 있던 한 대와 합쳐져 대열의 선두를 이끌었다. 논산에서 2만의 호남동학군과 만난 경기동학군은 도합 4만의 대군으로 진용을 갖춰 공주를 향해 짓쳐나가기 시작했다. 노성을 지나면서부터는 공주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둘로 나누었다. 손병희 통령이 지휘하는 경기동학군은 좌측의 이인(利仁) 쪽으로 향했고, 전봉준 장군이 지휘하는 호남동학군은 우측으로 돌아 경천을 지나 우금치와 효포(孝浦) 방면으로 이동했다. 한편, 공주의 동쪽으로 진군해 들어간 영동과 옥천포는 금강의 북쪽 강안인 대교에 진을 치고 주력인 호남동학군의 공주 공격 개시 파발이 당도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세 방면에서의 일제 공격을 위해 무장의 고삐를 바짝 틀어쥐었다. 이인에 당도한 경기동학군은 회선포 3대를 돌출된 형태로 앞세운 뒤 논배미를 두둑하게 쌓아 총안을 만들었고, 너른 이인 평야에 볏짚을 깔아 진지를 구축했다. 호남동학군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만든 임시 전진기지인 셈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날은 점점 추워지는데 전봉준의 호남동학군으로부터 개전을 알리는 파발이 나흘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인의 평야 진지는 금방 이동할 것으로 예상해 임시방편으로 구축한 것이라 허허벌판의 추위와 칼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화톳불을 피웠다. 그 탓으로 낮에는 매캐한 연기가 종일 진지를 맴돌았고, 밤에는 멀리서 보아도 대군이 주둔해 있는 게 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불빛 속에 환했다. 손병희 통령은 출진이 미뤄지는 것에 조바심이 일어 접주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통문을 돌렸다. 갑주(甲冑)를 떨쳐입은 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전이 임박했습니다. 공주는 천혜의 군사 요충지인바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승리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직 호남동학군으로부터 개전 파발이 당도치 않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으나, 언제 공격이 시작될지 모르니 무기와 군량을 세세히 점검하고 출진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조만간 있을 공격을 앞두고 접주들의 의견을 수렴코자 하니 기탄없이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통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맨 앞줄의 젊은 접주 하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호남동학군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가 먼저 쳐들어가 성문을 깨부숩시다.” 여기저기서 ‘그럽시다’라는 호기로운 목소리가 울흥하게 일었다. 신중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독불장군이 나서면 백전필패란 걸 모르시오? 원래의 계획대로 동, 서, 남 삼면에서 동시에 공격하면 수성군이 도망칠 곳은 금강뿐이라 독 안에 든 쥐 격입니다. 서둘러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 다른 의견도 나왔다. “우리는 타지에서 이동해 왔기에 이인이나 공주의 지세를 잘 알지 못합니다. 무릇 병서에 이르길 지장(智將)은 지세와 산세, 수세를 우선 살핀다 했습니다. 먼저 동리 사람을 불러 지세를 소상히 들어본 후 움직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근동의 지리를 잘 아는 접주가 있어 그가 자진해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도스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보다시피 이인은 땅이 넓어 사방이 트여 있습니다만, 이인부터 공주까지는 산과 능선만이 즐비합니다. 비록 산은 높지 않으나 봉우리가 무수히 많고 산록은 가파르며, 반대로 골이 깊어 대군이 지나가기 쉽지 않습니다. 우마가 다닐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며, 고개를 대여섯 개 연이어 넘어야 공주성에 당도하는 오르막 험로입니다.” 접주의 이 말에 앞으로의 전투가 쉽지 않을 거라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돌멩이 하나를 굴려도 아래보다는 위가 나을 텐데 공주성 공격은 아래에서 위로 치받는 방식이라 쉽지 않겠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의견도 나왔다. 말한 이는 충경포의 신재길 접주였다. “지금 당장 진지를 옮겨야 합니다. 보다시피 우리 진지는 평야에 포진하여 사방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가진 화승총은 사정거리가 짧아 멀리 있는 적을 맞추기 어렵고, 바람막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인 까닭에 화승에 불을 붙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속히 산봉우리로 진지를 옮기고 몸을 숨겨야 합니다.” 다들 동의했지만 금방이라도 호남동학군의 파발이 당도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당장 애써 만든 진지를 버리고 새로운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 눈치들이었다. 신재길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나이 지긋한 접주 하나가 허리부터 세우고 일어나 추임새를 넣었다. “무릇 정병(精兵)이라 함은 전투를 잘하는 병사가 아니라 방비를 잘하는 병사를 말합니다. 오늘의 수고가 내일의 승리를 약속한다는데 무얼 주저합니까? 군사의 숫자만 믿고 지세가 불리한 평지에 머물렀다가는 화를 키우는 꼴이 될 것입니다. 속히 서둘러야 합니다.”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깨고 또 한 사람이 일어나 조심스레 말했다. “어제 해 질 녘, 좌측방의 초봉리 산마루에서 원조경(遠眺鏡)으로 주위를 살피는 자가 있었습니다. 멀어서 확실하진 않았으나 그 시간에 산야를 누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필시 관군이나 일본군이 우리를 염탐하러 보낸 세작이 아닐는지요?” 이 말이 떨어지자 좌중에 술렁임이 일었다. 당장 진지를 옮기자는 의견과 어차피 하루 이틀 후면 진격할 터이니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할 필요가 뭐 있겠냐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손병희 통령이 양측의 의견을 다 듣고 난 후 무겁게 입을 뗐다. “진퇴양난이란 필시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합니다.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기병하여 하루를 진군한 뒤 적당한 봉우리를 물색해 진을 치도록 합시다. 오늘은 급한 대로 선봉군인 안성포에서 전방에 보이는 옥녀봉에 척후를 보내 경계초소를 마련하고 적병의 기습을 살피는 것이 어떻겠소?” 타협안이 그럴듯했다. 진지를 옮기자는 의견과 산봉우리에 진을 치자는 의견 모두를 수렴했을뿐더러 옥녀봉은 이인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충인지라 통령의 중재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참에 이창진과 한규석, 신재길은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포로 총총걸음을 옮겼다. “동학군의 수가 많다 하나 병법을 아는 이가 드무니 걱정이오. 당장 오늘 밤에 야습이 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백수의 왕 호랑이도 여우에게 꽁무니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소. 적이 허를 찌르고 달려든다면 낭패가 될 터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불침번을 갑절로 세워 방비를 튼튼히 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밤이 무사히 지나길 바랄 뿐입니다.” 걱정을 여러 겹 쌓는다고 하여 행운이 찾아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고작 하루를 더 넘기지 못하고 그날 밤 평야에 주둔해 있던 경기동학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었다. 야습은 엉뚱하게도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비롯되었다. 서둘러 옥녀봉에 경계초소를 마련한 안성포 군이 전방과 측방의 방비는 튼튼히 했지만, 후방에서 접근하는 적을 예상치 못했다. 인근 야산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적병이 동학군이 피운 시초(柴草) 더미 불기운이 사그라드는 새벽 시간을 노려 일시에 총을 쏘며 달려든 것이었다. 선잠에서 깨어난 동학군 진영은 화승에 불붙일 새도 없이 혼비백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포진해둔 회선포의 방향을 돌려 응사하기도 전에 진지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불침번을 선 경비병이 화승총으로 응사했지만, 벌판을 건너온 새벽 된바람에 총은 불땀을 잃고 헛방을 놓기 일쑤였다. 전방에 나가 있던 안성포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적병이 후방 근거리에 매복해 있다가 일시에 달려드는 통에 병장기를 추슬러 구원하러 달려올 틈도 없이 한 식경 가량 이어진 전투에서 동학군은 궤산(潰散)에 궤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날이 희뿌옇게 밝아 주변 형상이 드러나면서부터 논바닥에 엎드려 있던 동학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섰다. 전방에 나가 있던 안성포 군이 도착하는 발소리가 요란해지자 적병은 홀연히 미명의 운무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매복과 기습으로 동학군을 타격하고는 귀신병처럼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날이 밝아 전장을 살펴본 결과 심대한 타격을 입은 전투였음이 드러났다. 관군과 일본군의 시체는 별로 없고, 무더기로 쓰러져 죽은 동학군 시신 사이로 부상자의 비명만이 낭자할 뿐이었다. 인원과 무기, 전량을 점고한 결과는 더욱 참담했다. 시신의 숫자는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였고, 함부로 쏘아댄 회선포 탄환은 초반에 동나버렸으며, 쌓아두었던 군량미에 불기운이 옮겨붙어 홧홧한 열기와 연기가 자욱하게 맴돌았다. 한순간의 방심이 부른 패전치고는 육단(肉袒)으로 옷을 벗고 땅을 칠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적군은 인근 야산으로 퇴각했다가 총탄을 보충해 재차 공격해 들어왔다. 반면에 동학군은 불땀이 일지 않는 화승총을 붙잡고 엎드려 헛헛한 입김만을 부싯깃에 불어넣고 있었다. 완벽한 무기의 열세였다. 적군의 공격은 해그림자가 짧아질 때가 되어서야 칠점사의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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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3)(지난 호에 이어) 2. 혁명 괴산전투가 끝난 후, 동학군은 큰물 들어오듯 척양척왜의 깃발과 지역별 포접을 알리는 깃발을 앞세워 보은을 향해 진군해 나아갔다. 워낙 많은 숫자의 이동이라 정해진 길은 따로 없었다. 이천포는 청안, 미원을 지나 보은의 지경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행군 도중 여장을 푼 숙영지마다 흰옷 입은 동학군이 밀려들어 수천 마리 백로가 날아든 듯 가을 들판을 뒤덮었고, 밥때를 알리는 호군장(犒軍將)의 징소리가 가마솥이 풍기는 밥 냄새와 어우러져 산야로 퍼져나갔다. 보은 장내리 대도소에 도착하기 하루 전, 이천포는 마지막 숙영지로 보은군 산외면과 내북면 사잇길로 접어들어 학림리(鶴林里)라는 작은 마을에 당도했다. 학림이라는 이름처럼 마을 뒤편 소나무 군락지에는 보청천을 먹이터 삼아 둥지를 튼 백학과 왜가리 떼가 평화롭게 새끼를 키우고 있었다. 여기서 장내리까지는 반나절 거리였다. 이천포 대열이 마을에 당도하자 동네사람들이 밥 짓던 연기를 부지깽이로 다스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대군의 기세에 눌려 썩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 집이나 헛기침 없이 들어간다 해도 막아설 사람은 없겠으나 이창진과 한규석은 민폐를 염려해 촌장 집을 물어 찾았다. 마을 안쪽 솟을지붕으로 대문을 얹은 기와집이었다. 탕건을 쓴 주인이 나왔다. 초면이었으나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합장의 예를 갖추어 인사하자 주인이 손님을 사랑채로 안내했다. “우리는 경기도 이천에서 기포한 동학군이오. 마침 길이 저물어 이 마을에서 하룻밤 유숙을 청하오니 무례를 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창진이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여 유숙을 청하자 주인이 같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무례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몇 날을 유하여도 하등 신세 될 것 없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떠한 민폐도 끼치지 않을 것임을 약속드리옵니다.” “그것도 너무 괘념치 마시오. 사람이 살다보면 피차 신세를 지기도 하고 갚기도 하는 것, 더욱이 침식(寢食)의 신세는 항차 큰 인연으로 이어진다고도 하더이다.” 주인의 손님맞이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만일 유숙을 거절하면 억지로라도 밀어붙일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이창진의 낯빛이 무뎌졌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생은 경기도 이천에 사는 이창진이라 하옵고, 이녁은 한규석이라 하옵니다.” “경주김가 김교무라 부릅니다. 가난한 유생의 처지라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한규석의 눈에 안쪽 벽에 걸린 족자가 들어왔다. 예서체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족자의 글귀와 말미에 찍힌 낙관을 눈여겨보면서 물었다. “이 마을이 경주김씨 세거지인 듯하오만?” “그렇습니다. 보은에는 본시 경주김가 터전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마을 역시 경주김가의 오랜 세거지로 속리산 한 자락을 늘여 펴서 누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지요. 타성바지는 스무 집 남짓합니다. 보은을 잘 아시는지요?” “주인장 얼굴을 뵈니 초면이 아닌 듯하여 묻습니다.” “대처에 나가본 바가 드물어 경기도 이천은 낯선 곳입니다.” 이창진도 주인의 얼굴이 낯익은 듯 미간을 좁혀 말했다. “하오면 우리가 보은에 왔을 때 뵈었다는 것일 터.” “보은에 온 적이 있다는 말입니까?” “작년 3월 보은 취회 때 장내리에서 한 달을 유하다 간 적이 있습니다.” “옳거니. 그렇다면 거기서 만났을 겝니다. 소생도 거기에 간 적이 있으니까요.” 김교무가 작년에 있었던 기억을 냉큼 끌어와 화답했다. “어쩐지 낯이 익는다 싶었는데 내 눈이 틀림없군요. 입도는 하셨는지요?” “동학도를 말씀하시는 게지요?” “그러하오.” “입도는 하지 않았으나 만민은 평등하고 사람을 하늘같이 여기라는 시천주, 사인여천의 동학도 교리는 익히 들은 바 있습니다.” “입도하지 않았다면 우리 취회에 오실 일이 없었을 터인데?” “외월(猥越)스럽지만 제 집안에서 누대로 살아온 가솔 서넛을 면천(免賤)해 주었다 하여 동학 교주 해월선생께 초빙되어 문안드린 바 있습니다.” 이창진과 한규석은 그제야 주인의 얼굴이 기억났다. 이 댁의 주인인 김교무가 솔선해 양반 가문인 경주김씨 집안에서 대대로 종살이하던 노비들의 면천에 앞장섰기에 해월선생이 광제창생의 모범이라 하여 그를 취회에 모셔온 적이 있었다. 그의 진력으로 노비문서가 소각되고 면천된 자가 부지기수였던바 교주의 칭송이 자자했던 일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런 인연이 있었습니다그려. 다시 한번 면천을 베풀어주심에 감읍하옵니다.” “부끄럽습니다.” 둘이 한사코 만류하는데도 김교무가 안채에 기별을 넣어 저녁상을 보도록 일렀다. “누옥(陋屋)에 소찬(素饌)이라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불청객을 이리도 환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직 보은 땅에 민보군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은 없으니 야습 걱정은 않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하룻밤이라도 편안히 객고를 푸시기 바랍니다.” “거듭 감읍할 따름입니다. 기왕 말씀 나온 김에 한 가지 묻습니다. 우리는 보은이 객지인지라 이곳 사정에 밝지 못합니다. 혹여 꼭 알아두어야 할 인물이나 관군의 동태에 대해 알고 계신 바가 있으면 듣기를 청합니다.” “제 말씀보다는 보은에서 기포한 충경포(忠慶包)의 도인 한 사람을 알고 있으니 그를 만나 물으심이 빠를 듯합니다. 장내리에 당도하여 대도소에 연통을 넣으시면 쉬 만나실 수 있을 겝니다. 호협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름은 신재길이라 합니다.” 때마침 밥상이 들어왔다. 기름 찬 없는 푸성귀 밥상이었으나 방짜 며느리가 지은 듯 찰지고 오달진 저녁상이었다. 둘은 주인이 일러주는 이름을 새기며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삐뚜름하게 뜬 상현달이 조족등(照足燈) 되어 밤길을 비춰주었다. 사흘 후면 보름이다. 군사들은 벌써 객지에서의 곤궁함도 잊은 채 서둘러 저녁을 마친 후 탈곡한 볏단을 보료 삼아 논바닥에 펴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이천포 군은 보은 읍내를 멀리 돌아 장내리로 향했다. 장내리에는 동학군의 총 지휘소 역할을 하는 대도소가 마을 뒤 옥녀봉을 배경으로 서 있었고, 그 앞의 너른 공터에는 초막 사백여 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무리 터전이 넓다 해도 그곳에는 이미 충청, 경상, 강원도에서 온 동학군들로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천포는 급한 대로 청산 쪽으로 향하는 보천강 변의 논배미 몇 군데를 정해 야영지를 마련하는 한편, 그길로 이창진과 한규석은 수접주를 모시고 해월선생을 만나기 위해 대도소를 찾았다. 그러나 해월은 거기에 없었고, 접사나 서기, 집사 등의 직분을 맡은 교도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규석이 바쁜 일손을 막아 세워 신재길의 거동을 묻자 떠꺼머리 도동(道童) 하나가 길 안내를 자청하고 나섰다. “접주님을 만나시려면 저를 따라오시어요.” “신재길이라는 사람이 접주이신가?” “그렇사옵니다.” 아이를 따라간 곳은 대도소 뒤꼍의 싸리나무 사립문을 단 야트막한 초막이었다. 삼베적삼에 청색 전대(戰帶)를 두른 남자가 손에 쥔 총을 기름종이로 닦다 말고 일행이 들어서자 돌아섰다. 못 보던 총이었다. “소생이 신재길이오만 뉘신지요?” “초면에 실례가 많소이다. 이분은 경기도 이천의 수접주 어른이시고, 저희는 이천접의 접주와 접사의 직분을 맡고 있는 도인입니다.” 한규석이 같이 온 일행을 소개했다. 신재길이 황망히 총을 치우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 길 오셨습니다. 인사 여쭙니다. 보은 사는 신재길이라 하옵니다. 괴산에서 이천접의 전공이 눈부셨다 들었습니다.” “한울님이 도우셨지요.” “하온데 소생의 이름은 어찌 아셨는지요?” “오던 길에 학림리에서 유숙하였던 바 김교무라는 선비에게서 접주님의 고명을 들었습니다.” “고명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김교무 어르신이라면 제가 잘 압지요. 덕망이 높아 보은 땅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저를 면천해주신 분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한규석은 신재길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비를 면천해준 김교무도 대단하지만, 그런 신분의 사람을 접주로 임명한 해월선생의 파격적 인사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신분제를 타파하고 평등한 세상을 열고자 하는 그의 ‘다시 개벽’ 정신을 일깨워주는 산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예전에 노비였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재길 바로 이 사람이었다. 제 입으로 면천되었다고 밝히기 쉽지 않을 텐데 그는 거침없이 자기 신분을 말했다. 놀라기는 수접주도 마찬가지였는지 기름을 만져 손이 더럽다며 한사코 물러나는 신재길의 손을 붙잡고 마냥 흔들어댔다. 수접주가 신재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해월도 대단하고, 김교무도 대단하고, 신접주 당신도 대단하오.” 수접주의 칭송에 신재길이 눈 둘 곳을 몰라 뚜렷거리며 말했다. “혹여 제가 무슨 도울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초면에 너무 경황이 없었구려. 우선 해월선생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자 하는데 어디 가면 뵈올 수 있을까요?” 수접주의 말에 신접주가 잠시 대꾸를 미루다가 입을 뗐다. “저희도 선생님 종적은 모릅니다. 워낙 조심성이 많은 분이라 행차 말씀을 하지 않으시지요. 하오나 모레 이곳에서 출정을 위한 치성식(致誠式)이 열릴 예정이오니 아마 그때 뵈올 수 있을 겝니다.” “이틀이야 못 기다리겠소. 하오면 충경포의 수접주 어른은 뵈올 수 있는지요?” “마침 출타 중인데 곧 오신다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오시면 뵈올 수 있도록 말해놓겠습니다.” “감사하기 이를 데 없군요. 그런데 아까부터 손에 든 그것은 무엇이오?” 신접주가 기름종이에 싼 물건을 풀어 보여줬다. “이건 일본군이 메고 다니는 스나이더 소총입니다. 제가 소싯적부터 방포 놓는 것을 좋아해 화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속리산에 들어가 포수 노릇도 좀 했었구요. 이 총도 그래서 구한 것입니다. 그간 모아둔 병장기가 좀 있는데 구경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신접주가 몸을 돌려 초막 안을 가리켰다. 셋이 흔쾌히 그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에는 여러 겹 단을 쌓은 선반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많은 화포가 진열되어 있었다. 신접주가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주었다. “이것은 포의 일종으로 극려백포(克慮伯砲), 회선포(回旋砲), 불낭기포(佛狼機砲,) 대완기(大碗器), 천황포(天黃砲)라 부르는 대포이며, 저쪽은 궁시(弓矢)와 시석(矢石) 같은 활이나 화살, 죽창, 마름쇠입니다. 이 앞에 모아둔 것은 화승총이라 부르는 천보총과 조총입니다.” 셋은 생전 처음 보는 화포에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이만한 무기라면 천하라도 얻을 수 있겠습니다그려.” 수접주의 말에 수집품을 자랑할 겸 수긍할 법도 한데 신접주의 대답은 의외였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겉보기엔 대단해 보여도 대포는 무게가 무거워 기동이 불편하고, 화승총 역시 신식 양총에 비한다면 목총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동학군이 갖춘 무장이라고 해봐야 화승총이나 활과 창이 고작인데, 관군이나 일본군이 가진 총은 독일제 모젤 총, 영국에서 만든 스나이더 총, 최근에 일본에서 개발한 무라다 총입니다. 화승총과는 성능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차이가 나길래 그리 말씀하십니까?” 이창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한마디로 하늘과 땅 차이입지요. 토총(土銃)인 화승총은 유효사거리가 고작 일백 보 남짓인데 이런 양총(洋銃)은 일천 보가 넘고, 화승총은 비바람이 불면 심지에 불이 붙지 않아 쏠 수 없지만, 이 총은 총알을 뒤에서 집어넣어 쏘는 후장식(後裝式)이라 하등 날씨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파괴력도 출중해 황소의 대퇴골도 흔적 없이 부숴버릴 수 있다 하옵니다. 한마디로 토총 백으로 양총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다 합니다.” 수접주가 기가 막혀 물었다. “지금 들고 있는 총이 바로 그 양총이란 말이지요?” “저도 양총의 성능이 믿기지 않아 어렵게 한 자루를 구해 살펴보는 중입니다. 다른 것은 대충 알겠는데 이것 한 가지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습니다.” 신접주가 들고 있던 총을 세워 총구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수접주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재우쳐 물었다. “뭐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이 총구 안을 자세히 보십시오. 나선형으로 홈이 파인 것이 보이지요? 도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화승총은 전혀 이런 모양이 아닌데 말입니다.” 셋이 돌아가며 총구 안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총구 안에는 나선형의 줄이 여러 겹 새겨져 있어 오래 보고 있자니 눈알이 뱅글뱅글 돌았다. 아무리 궁리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신접주가 총을 선반에 얹으며 말했다. “나선형 줄을 새겼다는 것은 총알이 돌아나가도록 만들었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했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 총에 맞는 탄환이 있다면 한번 쏴보고 싶지만 그게 없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넷은 무거운 마음으로 초막을 나섰다. “접주의 말이 정 그렇다면 지난번 괴산전투에서는 어찌하여 우리 이천포가 양총을 든 일본군과 관군을 이겼다 생각하시오?” 이창진이 은근히 치밀어 올라오는 부아를 눅이며 묻자 신접주가 진작부터 속에 쟁여둔 생각인 듯 쉽게 대답했다. “일본군의 숫자에 비해 동학군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는 게 첫째 이유일 것이고, 둘째는 꽹과리와 징을 치며 달려드는 소리에 겁먹은 비루한 관군이 황급히 성을 비운 탓이겠지요.” 신접주는 속리산을 누비던 포수답게 앞서 말했던 이천포 군의 괴산전투 승리가 말치레 공치사였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창진이 괴산전투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던 동학군을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어찌 총을 당할 수 있겠소? 그렇다면 정녕 일본군을 이길 수 있는 방도는 없는 것이오?” “물론 방도야 있겠지요. 기습이나 매복으로 양총을 탈취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겠고, 산세를 이용해 불붙은 장태를 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오. 동학군은 지역 실정을 잘 아니까 천문지리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고. 하지만 문제는 총이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설령 총을 구한다 해도 탄환까지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이오. 화승총에 들어가는 납탄이야 저 같은 포수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이런 후장식 총의 탄환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셋은 신접주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막힌 속이 더욱 답답해짐을 느꼈다. 무기의 열세를 절감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도동이 달려와 보은 수접주의 도착 소식을 알렸다. 신접주가 뒤따르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레 있을 치성식에 오시는 해월선생께서 큰 비방을 내놓으실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천지신명이 돕고 한울님이 보살필 것입니다.” 넷은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보은 수접주를 만나기 위해 대도소로 향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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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서에 나타난 동학혁명기 일본군의 인식조선후기 성리학의 통치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변혁을 시도한 동학은 35년이 지난 1894년 동학혁명을 전개함으로써 조선사회 변화의 큰 물줄기로서 역할을 하였다. 양반과 상민, 그리고 천민의 철저한 신분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서와 남녀의 차별을 해소하고자 한 동학은 조선 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1894년 사회변혁을 주도하였지만 그 과정에 조선 정부 뿐만 아니라 일분군으로부터 적지 않은 탄압을 받고 피해를 받은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동학혁명 초기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에서는 동학군의 전과가 훨씬 컸다. 동학군과 관군이 고부 황토현에서 전개된 첫 전투에서는 동학군이 대승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 호남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마침내 全州를 점령함으로써 조선 정부와 화약을 맺고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첫 民政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조선 정부에서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도 조선에 출병하였다. 동학군과 정부의 화약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게 철병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을 지배하고자 한 일본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청국과 일본의 전쟁터로 변하였고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조선은 점차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동학군이 다시 기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동학군은 일본군의 점령을 조선 침략의 전초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동학군은 전국적으로 다시 재무장하고 본격적으로 관군을 지휘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결과 동학군은 참담하게 학살을 당하였고,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적으로 감시와 억압, 나아가 회유의 대상이 되었다. 본글은 동학교단에서 서술한 역사서를 중심으로 일본군의 인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자료는 이돈화의 『천도교창건사』, 오지영의 『동학사』, 그리고 천도교단에서 발행한 『천도교백년약사』와 『천도교약사』를 활용하였다. 다만 『천도교창건사』와 『동학사』는 일제강점기에 간행되었던 자료인 관계로 일본군에 대한 인식이 한계가 적지 않았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일본군의 개입에 대한 인식 1894년 3월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군이 승리하자 조선정부에는 청국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고자 하는 흐름이 이미 존재하였고,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함에 따라 청국의 파병 요청은 본격화되었다. 즉 전주성 함락으로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4월 30일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일본은 조선정부가 청국에 원군파병을 요청할 것으로 관측됨으로 일본도 출병할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였다.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에 따라 청군은 동학군은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출병하였으며, 일본은 거류민을 보호하고 텐진조약에 따라 군대는 서울로 들어왔다. 이로써 청군과 일본군은 결국 조선에서 무력적 충돌 즉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조선에 진출한 것을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이때-각도 열읍 도중이 聞風蜂起하여 각기 군수를 참수하고 來附함에 조정에서 도저히 관군의 힘으로 抵當치 못함을 알고 駐京淸國總里事 袁世凱와 상의한 후에 駐津直隸總督 李鴻章에게 電請하여 구원병을 청하니, 이에 淸將 葉志超와 葉士成이 1,500여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6월 6일에 아산포에 도착하였다. 청국은 이와 같이 조선에 출병하는 동시에 그 旨를 동월 7일부 공문으로 일본에 知照한 바 일본에서는 天津條約(천진조약은 을유년에 日淸 양국이 天津에서 모여 조약한 것을 이름이니, 조약 當者는 伊藤博文과 李鴻章 양인이오, 조약의 내용은 일, 조인일로부터 4개월 이내에 일청 양국은 한 가지로 조선에서 철병할 것 2, 조선국왕에게 권하여 병사를 교련하여 스스로 치안을 유지케 하고 일청 양국은 누구나 敎師를 보내지 못할 것 3, 장래 조선에 변란 중대의 사건이 있어 일청 양국이 혹은 파병하게 될 시는 먼저 조지하고 일이 끝나면 곧 철병할 것)에 예선 知照하는 약속에 위반한 것을 책잡는 동시에 거류민 보호의 이름 아래서 또한 출병하여 마침 귀국하였던 大鳥 公使는 水兵 4백을 거느리고 10일에 경성에 귀임하고 후 13일에는 일본군 3천 인이 또한 경성에 입하였는데 이에 한일청 삼국병과 동학군이 접전이 되게 되는 동시에 불원하여 일청 양국이 선전포고가 되면서 동양풍운이 一飜하게 되었었다.( 『천도교창건사』) 나) 淸國兵은 大將 葉志超, 葉士成의 영솔하에 6천의 육군과 5함의 해군이 충청도 아산만에 내주하였다. 이것을 본 일본에서는 왕년 일청간에 천진조약(만약 조선에 출병할 事가 有할 時는 양국이 相互照會하여 양해를 得한 후에 출병하기로 함)이라는 것을 증거로 하여 爾淸國이 출병하는 시는 我日本도 또한 출병하겠다 하여 일본공사 大鳥圭介는 병함 7척을 거느리고 인천 해안으로 상륙하고 또 육군 1,400여 명과 대포 2문을 앞세우고 바로 아산으로 달려들어 (중략) 先是 일본공사 大鳥圭介가 병을 거느리고 경성에 들어와서 주재할 시에 왕궁에 폐견하고 奏曰 이제 조선 남방 백성들이 蠢動跳梁하여 정부에서 西으로 청국에 구원병을 청한 사실이 있음으로 我 일본 정부에서는 이 말을 듣고 써하되 이는 사태가 가장 중대한 지라. 우리 국왕 폐하께서 臣을 命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나가 우리의 商民을 보호하고 또는 귀국에서 만일 우리에게 청구하는 事가 있으면 一臂之力이라도 도와 드릴까 하고 왔노라 하며, 또 부강자치책으로써 말이 많았었다.(『동학사』) 가)에 의하면 일본군의 출병은 ‘천진조약’에 따른 것과 ‘일본 거류민 보호’를 위한 것이었으며, 나)에 의하면 ‘일청 간의 천진조약’을 명분으로 하고 ‘일본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하였다고 하였다. 이 두 기록으로 볼 때 ‘천진조약’ 및 ‘거류민 보호’ 때문에 일본군이 조선에 출병하게 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여기에 『동학사』는 조선에서 ‘청구하는 事’라는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의 부강자치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인식으로 볼 때 두 기록은 조선의 입장보다는 가능한 한 일본 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이와 같은 인식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에 비해 해방 이후에 간행된 글에서는 일본군의 출병을 보다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천도교백년약사』에 의하면, “일본 외무대신의 훈령으로 제물포조약에 의해 군사를 파견한다”고 하여, 천진조약보다는 제물포조약에 무게를 다 두고 있다. 그리고 제물포조약의 내용으로 “서울에 있는 공사관이 소실되고 재류일본인이 학살을 당한 후 한일 양측은 제물포에서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키 위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는 주해로 부연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전주화약 이후 일본군의 파병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大鳥 일본공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출병하였다고 하는 한편 나아가 이러한 상황을 ‘일본의 침략’이라고 인식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우리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대군을 진주시켜 무력으로 국권을 유린하며 정권을 농단하는 등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자행”하였다고 하여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때문에 일본군을 침략군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에 비해 『천도교약사』에서는 “청국에 대해 동학군 토벌을 위한 원병을 요청하게 되었다. (중략)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조선 정부가 요청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의대로 6천여 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무방비 상태인 서울로 진입케 함으로써”라고 하여, 일방적으로 일본군이 출병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분군 출병의 원인이었던 천진조약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하였던 또 하나의 원인이었던 ‘거류민 보호’에 대해서도 전혀 기술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은 일제강점기 간행된 『천도교창건사』나 『동학사』보다 오히려 느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속) 희암 성주현(신인간 주필,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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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호모 사피엔스’ 탈퇴 선언탄핵 집회를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한 친구가 그랬다. “사람이 술을 과하게 먹으면 실수도 하는 법인데 윤석열이 한번 봐 주자”고. 다들 농담인 줄 알지만, 옆자리 친구는 “한두 번도 아니고 안 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예수가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마태복음에 있다. 그때 예수가 ‘윤석열이 말고’라는 말을 안 했으니 용서하자”라고 거들었다. 여기까지는 탄핵 집회의 뜨거운 열기가 뒤풀이 자리까지 이어진 농담 섞인 대화였다. 한 친구가 옆 의자에 놓아둔 손팻말을 집어 들었다. ‘국민의 명령이다. 윤석열 퇴진’과 ‘내란 수괴 윤석열 탄핵’이라는 손팻말이었다. 그 친구가 진지한 표정으로 수괴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했다. 수괴(首魁)는 국어사전에 보면 못된 짓을 한 집단의 우두머리라고 나온다면서 그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지도자를 그렇게 부른 게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나 전두환 군사 독재 때도 그랬다.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 지도자에게 보안법을 걸어 감옥에 가두면서 수괴라고 했다. 이런 어두운 역사를 가진 폭력과 지배의 용어보다 그냥 ‘우두머리’라고 하자는 제안이었다. 수괴라는 표현의 대상이 된 적이 있는 나는 치 떨리는 기억이 스쳤다. 길고 긴 수배 생활. 납치되어 고문실을 견뎌야 했던 시간들. 안기부와 기무사에서 당한 치욕의 순간들. 사뭇 달라진 분위기는 탄핵이라는 역사 반동이 왜 되풀이되는지, 김대중과 노무현과 문재인 정부의 한계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대한민국 대통령 개개인 인간성과 인격의 문제인지, 우리나라 국민성 문제인지, 현대 문명은 어디로 흘러가는지까지 얘기가 번졌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내 책임이다’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이 현상. 대한민국 국민을 들먹이면서 그걸 윤석열 단죄의 지표로 삼는 현실. 자기 자신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규탄과 비난과 요구를 먼저 앞세우는 이 거리와 이 함성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진중해졌다. 지금 줄을 잇는 종교인과 대학교수들의 탄핵 지지 성명과 기자회견들. 길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 대한민국 모든 사람을 윤석열 탄핵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로 갈라 세우는 이 흐름. 윤석열과 국민의 힘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자신의 과오는 면책되는 이 현상. 탄핵 뒤가 더 중요하다면서 ‘사회 대개혁’을 내세우는 사람들. 국민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면서 윤석열의 퇴진을 요구하는 종교인들. 풍자와 해학으로 윤석열을 비판하는 예술인들. 죄수처럼 국회 소위원회 증언대에 선 국무위원들과 군 장성과 경찰 고위층. 집회장에서 만나는 어린 여학생들의 순박한 열망. 갈채와 비난과 함성. 나는 그들 모두에게서 내 모습을 본다. 나는 겁이 많고 비열하고 때론 용감하다. 당장 한순간을 넘기려고 뻔한 거짓말을 한다. 곧 후회할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해서는 안 될 짓도 한다. 그리고 탄핵 집회에도 간다. 나는 오늘의 윤석열을 만들었다고 지적되는 극우 유튜버들이 주장하는 부정선거와 계엄령의 논거가 궁금해서 유튜브에서 찾아봤다. 찾을 수가 없었다. 검색어로 ‘비상계엄’과 ‘부정선거’를 입력하면 나와 견해가 같은 사람들의 영상만 주르륵 뜬다. ‘극우’라고 검색해도 안 나온다. 구글은 나 좋아하는 것만 보여 준다. 그래서 나는 온 세상이 내 편인 줄 안다. 이미 나는 정보의 편식, 사고의 편향이 심각하다는 결론이다. 인간이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구조다. 사회가 두 동강 나는 원리다. 우리는 물질(돈)의 종이 되어 넘치고 넘치는 물질에 묻혀서 신성을 잃고 소박함과 청빈을 내버렸다. 반면에 외로움과 불안과 긴장과 공격성으로 나를 채웠다. 작은 비판에도 내 인격 전체가 부정당했다고 피해의식을 뻥튀기해서 공격한다. 편을 짜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한다. 윤석열이 국회와 야당과 비판적인 시민들을 반국가세력, 척결해야 할 종북세력으로 봤기에 법률도 헌법도 국민도 다 팽개쳤다. 자기 목숨까지 팽개쳤다. 윤석열을 치매라고도 하고 신경쇠약 환자라고도 한다. 진단과 단죄는 쉽다. 현대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 질병에 걸려있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미친 짓을 우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한다. 돈 써 가며 제 무덤을 판다. 현대인들의 질병이다. 혐오와 차별을 금하고 언어폭력과 시선 폭력마저 못하게 벌을 주면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전쟁터에서의 대량 살육은 이제 만성이 되어 그냥 넘긴다. 이게 오늘날의 인간 실상이다. 나는 정보중독자다. 한쪽 주장의 과식 상태다. 우리 사회가 그렇다고 여겨진다. 어느 편에 설 건지 늘 기웃거린다. 상반되는 선택을 하면서 스스로를 변호한다. 현대 문명을 이루게 한 이성과 논리와 지성과 합리성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윤석열이가 비상계엄으로 제 무덤을 팠다면 현대 인류는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군림하면서 이들에게 사시사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제 무덤 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의 비극이다. 나는 탈퇴서를 쓴다. 호모사피엔스 동네에서 벗어나는 탈퇴서다. 비가 새면 우선 양동이를 가져와서 빗물을 받아내야 하지만, 비가 그치면 지붕을 고쳐야 한다. 안 그러면 비 올 때 또 샌다. 되풀이되는 탄핵과 길거리 외침. 어떻게 잘라 낼 것인가? 그래서 호모사피엔스 탈퇴서를 쓴다. 새로운 나를 위한 첫걸음이다. 신성을 회복하고 낮아지고 낮아지기 위한 첫 단추다. 목암 전희식(진주교구, 한울연대 공동대표/ 마음치유 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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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2)<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벼린 무기가 미흡하고 쌓인 전량이 부족하다 하여 천심을 회복하려는 한울님의 뜻을 저버리고 출진을 망설여서 되겠습니까? 철성(鐵聲) 소리만 듣고서도 떨쳐 일어서는 기백이 있어야 천지가 돕고 신명이 동할 것입니다. 이미 호남의 전봉준 장군이 일어섰다 하고, 해월선생께서도 기포를 명하셨는데 무얼 더 주저한단 말입니까? 내 안에 한울님이 모셔져 있음을 아직도 믿지 못한단 말입니까?” 이창진 접주의 절명(絶命)이라도 불사할 만한 토로가 있자 의기소침해 있던 좌중에 일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규석은 평소 이창진의 척왜양에 대한 소회를 잘 알고 있었기에 성심을 다해 동의했고, 다른 접주들도 우레 같은 박수로 격려를 보냈다. 특히나 호남동학군이 기포했다는 소식에 경기동학군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당위성이 더해져 회의장 분위기가 일변 출진하는 쪽으로 울흥하게 일었다. 수접주가 다시 나섰다. “이창진 접주의 고변(高辯)을 듣자니 묵우(默祐)의 기운이 출중하여 후천개벽이 멀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 우리 이천포도 기포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이제부터는 도소의 육임(六任)을 중심으로 서로 뜻이 맞는 접주들끼리 모여 출진을 위한 세부 사항을 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도소 회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일동 심고. 한울님 감사하옵니다. 한울님의 은덕으로 오늘 이천포 동덕이 일심으로 기포를 결의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안위보다는 한울님의 섬김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오며, 광제창생한 나라에서 평등한 백성 되기를 간구하오니, 척왜양의 기치가 한울님께 닿아 사해 만민이 한울사람과 더불어 살게 해주시기 바라옵나이다. 이천포 접주들 모두 엎드려 기도드렸사옵니다.” 수접주의 심고가 끝나자 각 고을의 접주와 도소의 육임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향후의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무기와 전량의 확보였다. 이미 황산의 강용구 접주가 음죽과 안성의 관아를 깨뜨릴 방도를 제시하고 나선 터라 젊은 접주들은 자연스레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강용구 접주가 먼저 말머리를 잡았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음죽과 안성은 저의 세거지(世居地)인 황산과 지척이라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두 관아는 방비도 허술하고 제가 익히 알고 지내는 별감과 좌수가 여럿 있어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습니다. 더하여 향청(鄕廳)의 담이 높지 않아 월장(越墻)하기로 친다면 여반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군사의 숫자도 몇 안 되고 기강도 무뎌 동학군의 철성 소리만 들어도 삼십육계 줄행랑칠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안성은 신임군수가 부임하기 전이어서 가히 최적의 기회라 할 만합니다. 화승총이나 활을 든 인원 200인이면 능히 성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강용구의 말에 용기를 얻은 접주들이 자기 접에서 힘을 보탤 만한 인원수를 어림해 숫자를 내놓았다. 삽시간에 400인이 모여졌다. 강용구는 화선지를 꺼내 접별로 제시된 인원수를 적고 물건 실어 나를 달구지 숫자도 추렴해 함께 적었다. 화선지 가득 숫자가 적혀나가자 젊은 접주들은 일본군과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벌써 승리를 쟁취한 듯 흐뭇하게 양팔을 겹쳐 겨드랑이 밑에 고였다. 출진에 앞서 비축할 물건의 목록을 만들어두자는 건의가 나와 즉석에서 현물 없는 오일장이 열리기도 했다. 화선지를 따로 꺼내 쌀이나 콩, 동아줄, 푸른 대나무, 삼 줄기, 볏짚, 소금, 석유, 화약, 대동목(大同木) 등 비축해야 할 물품의 목록과 수량을 세세히 적어나갔다. 드디어 거사 날짜가 정해졌다. 정확히 닷새 후인 9월 25일, 오포가 울리는 정오. 민정(民丁)을 200인씩 둘로 나누어 음죽과 안성의 두 관아를 동시에 공격하며, 탈취한 무기와 전량은 즉각 광혜원으로 옮겨 본격적인 출진에 대비키로 했다. 공격은 의외로 쉽게 진행되었다. 어디서 비밀이 누설되었는지 막상 당일이 되자 동학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곡괭이와 쇠스랑, 거릿대를 든 농민들이 관아 앞에 구름처럼 몰려와 꽹과리를 치고 고함을 지르자 혼비백산한 관군들이 무기를 집어 던지고 삼십육계 줄행랑치기 바빴다. 동학군은 죽창 한번 휘두르지 않고 쉽사리 관아를 점령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마을 축제 같았다. 그만큼 동학군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방증이기도 했고,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일이라면 농민들이 쌍수를 들어 소매를 걷고 나선 결과였다. 탈취한 물건은 달구지에 싣지 못할 만큼 많았다. 화승총이나 창, 장검 같은 무기류도 많았고, 곡식이나 피륙은 몰려든 백성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도 넘쳐났으며, 노비문서나 채무문서 등을 샅샅이 찾아내 불살라버림으로써 애초에 동학이 기치로 내걸었던 폐정 개혁안 12조를 실천했다. 이 정도 무기와 군량이면, 특히나 이렇게 들끓는 민심이면 출진을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관아 공격을 성공적으로 마친 각 접은 접주를 중심으로 바삐 움직여 무기와 전량을 싣고 애초에 모이기로 했던 광혜원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허연 옷을 입고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를 보자 이천 수접주는 일이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모일 사람은 관군이나 일본군을 상대로 싸울 젊은이들이어야 하거늘 막상 인원을 점고해보니 어린애까지 동반한 식솔 전체가 떨쳐나섰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는 유랑민 차림의 농부가 부지기수였다. 이런 무리를 이끌고 싸움을 벌인다는 건 숫자만 요란했지 오히려 방해꾼이 더 많다는 사실에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급히 몇몇 접주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가속(家屬)을 대동하고 나서면 어찌 총 든 일본군과 대적한단 말이오?” 수접주가 물고 있던 장죽을 뽑아 놋재떨이를 탕탕 치며 힐난하자 접주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답했다. “가장이 떠나고 나면 남은 식솔이 받을 핍박이 극심한지라 함께 나선 것이지요.” “작년 보은 취회 때도 온 식구가 따라나선 바 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하니 막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연초(年初)에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 이후 안핵사가 지역 인민을 동학패당이라 지칭하고 겁박하기를 부지기수, 당사자가 없으면 처자를 붙잡아 대살(代殺)까지 행하였다 들었습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누가 남고자 하겠습니까?” “전장에 나가더라도 밥은 먹어야 할 터, 불 때고 밥 짓는 일을 어찌 허투루 보냐며 아녀자들이 팔 걷고 나서는 통에 떼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보니 접주들의 말이 구구절절 옳은지라 수접주는 장죽에 담긴 담뱃가루가 줄줄 새는 것도 모르고 생각에 잠겼다.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은 다시 없었다. 유탄이 날고 포환이 떨어지는 전쟁터에 사패지(賜牌地) 경작하러 떠나는 작인들처럼 가속을 대동하고 나섰으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무리를 이끌고는 전투는커녕 보은까지 행군해 갈 자신이 없었다. 가는 도중에 맞닥뜨리게 될 일본군과 관군과의 교전을 생각하면 머리칼이 쭈뼛 섰다. 동학군을 보면 굶주린 담비처럼 덤벼들 게 분명한데 이런 오합지졸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흘리게 될 피의 강이 눈앞에서 벙벙하게 흘렀다. “아무래도 아니 되겠소. 전장에 나가는 사람이 식솔을 대동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 한 가지 제안하리다. 무기 없는 사람은 인원에서 제외합시다. 화승총이나 장창, 최소한 궁시를 든 자 이상만 추리자 이 말이오. 어떻소?” “그 말씀이 장히 타당합니다. 그렇게 합시다.” 즉석에서 동의가 나왔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는 접주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사코 고집을 꺾지 않는 자가 있을 것인즉.” 중구난방이 이어졌다. 더 듣자 해도 뻔한 말들이라 수접주가 단호하게 오금을 박았다. “군율로 그리 정했다 하면 필시 마음을 돌릴 것이오. 엄중한 군율로 말이오.” 손사래 치며 나서려던 자들이 세웠던 무릎을 도로 개고 주저앉았다. 수접주가 윽박지르던 기세를 몰아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일단 그 일은 그렇게 하십시다. 그보다 먼저, 이번에 관아에서 탈취한 병장기를 다룰 훈련이 필요할 텐데 말이오?” 수접주가 어디서 들은 말이 있었던 듯 군사 훈련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 일이라면 각 접에 포수 노릇하는 도인이 상당수 있을 것이니 이들에게 포술을 가르치게 함이 어떻겠소?” “좋소. 당장 내일부터 훈련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포수를 모이라 연통을 넣으시오.” 얘기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더 뭉개고 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회의를 마친 접주들이 본거지로 돌아가 결과를 알렸다. 무수한 반대가 일었으나 결사코 참여하겠다는 사람에 한해 죽창이라도 가졌다면 끼워주는 선에서 무마하고 포수 교관을 선발하여 화승총 사격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나 말이 훈련이지 심지에 불을 붙이다가 손가락을 태워 먹기 일쑤였고, 화약 쟁이는 손놀림이 허술해 쏟는 게 태반이었으며, 총알 튀어나가는 시간을 가늠하지 못해 헛방을 놓기 일쑤였다. 한나절 씨름한 끝에 겨우 탄환 장전 기술은 익혔으나 과녁 맞추는 일은 또 다른 연찬이 필요한지라 능숙해지기까지는 하세월이었다. 사격훈련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그것은 군사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총기 탓이었다. 총이 많으면 한꺼번에 여러 명을 훈련시킬 수 있지만, 워낙에 숫자가 부족한지라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게다가 화승총은 명중률이 떨어져 조준 사격이 쉽지 않았고, 재장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일제사격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총은 칼이나 창과 달리 직접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아니어서 관아나 적병에게 탈취하지 않고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기왕에 지니고 있던 것과 음죽과 안성에서 빼앗은 화승총을 합친다 해도 일본군이나 경군(京軍)이 지닌 신식무기를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게 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있는 다른 관아를 습격하여 탈취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창진 접주가 진천(鎭川) 관아를 기습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사격훈련을 마친 동학도를 중심으로 특공부대를 편성해 야습하자는 계획이었다. 그의 계획에 찬동하는 도인이 대거 몰려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많은 인원이었다. 엄선을 거친 후 1개의 주공 부대와 2개의 협공 부대를 편성해 맹훈련에 돌입했다. 습격 계획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무기는 빈약할지라도 워낙 많은 숫자가 야음을 틈타 일시에 달려드니 진천 관아의 관군은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줄행랑치고 말았으며, 현감과 아전을 포박해 꿇리고, 군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다수의 무기와 탄환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음죽과 안성에 이어 진천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자 동학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제는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을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천포가 진천 관아 습격에 성공한 직후 경기포 본진으로부터 광혜원에서 황산으로 이동하라는 군령이 내려왔다. 이천 수접주의 지휘 아래 큰 짐은 소달구지에 싣고, 멜 수 있는 짐은 등에 지고 길을 나섰다. 만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다. 황산에 도착하니 원주, 횡성, 홍천 지역의 강원도 군과 충청도 북부에서 기포한 동학군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족히 1만은 넘어 보였다. 의암 손병희 대접주가 경기동학군의 수장으로 나선 것도 큰 힘이 되었다. 한울님의 옹위와 보살피심이 황산에 모인 동학도의 신심을 부추겨 주문 외우는 소리가 낭자하게 울려 퍼졌다. 다시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황산은 지세가 협소해 사소한 움직임에도 목화송이 휩쓸리는 형국이라 인근의 무극 장터까지 주둔지를 확장하여 북새통을 이룬 후 드디어 동학군은 보은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연도에 구경 나왔다가 빗겨 깎은 죽창이나마 꼬나들고 끼어드는 인원이 늘어나는 통에 대열은 열두 발 상모 끈처럼 장사진을 이루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열은 크게 선봉군과 중앙군, 후위군의 셋으로 나누고, 중앙군은 다시 손병희 대접주가 이끄는 중군과 좌, 우군의 셋으로 공격대형을 갖추었다. 진천 관아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천포는 후위군의 주력으로 편성되었다. 경기동학군은 소걸음으로 꾸준히 움직여 증평을 거쳐 괴산을 향해 짓쳐 나아갔다. 괴산은 동학군이 섬멸해야 할 1차 목표 지점이기도 했다. 괴산을 공격 목표로 삼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부족한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괴산 관아에서 이 지역의 동학 접주 2명을 붙잡아 처형한 것을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괴산 일대는 삽시간에 몰려드는 동학군으로 북적였고, 공격 정보를 입수한 관아의 수성군(守城軍) 역시 횃불을 치켜들고 여장(女牆)을 두텁게 덧쌓아 방비하고 있었다. 한편 괴산은 일본군이 동학군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는 지역이기도 했다. 일주일 전, 경기동학군 선발대의 습격으로 괴산과 지척에 있는 안보(安堡) 병참부가 공격을 당해 군용전신이 끊기는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군용전신은 일본군이 보호 1순위에 놓는 군사 장비로서, 만약 괴산이 점령되면 인근에 위치한 가흥(可興) 병참부 역시 위협받을 처지에 놓이기에 일본군은 이미 이 일대에 정찰병까지 내보내 첩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전투는 뜻밖에도 일본군의 기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경기동학군의 선봉이 괴산 못미처의 작은 고개를 넘기 위해 접근하는 도중 이곳에서 정찰 활동을 벌이던 일본군 정찰병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 2개 분대 30명의 정찰대가 2개 조로 나뉘어 1개 조는 선봉군의 정면을 파고들었고, 다른 1개 조는 측면으로 우회하여 중앙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과의 첫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습 공격을 받은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고, 고작 2개 분대의 공격으로 선봉군과 중앙군이 속수무책 당하고 만 것이었다. 이번에도 전세를 유리하게 이끈 이는 이창진 접주였다. 일본군 숫자가 많지 않은 걸 알아차린 그가 후위군 화승총 부대를 지휘해 일제사격을 가한 결과 실탄이 바닥난 일본군이 퇴각하기 시작했고,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용품까지 버린 채 충주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이렇게 괴산 초입에서 치른 일본군과의 첫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동학군은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기쁨에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경기동학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청산에서 북상하여 올라온 동학군과 세를 합쳐 괴산 관아로 쳐들어갔다. 동학군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성벽에 운제(雲梯)를 걸치고 불화살을 날리며 통나무수레로 성문을 깨뜨렸다. 이를 본 관군이 대군의 숫자에 놀라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 내고 도망쳐버렸고, 관군과 함께 저항하던 부락민 삼십여 명을 붙잡아 도륙 내자 괴산 일대는 일순간 걷잡을 수 없는 화염과 함성으로 뒤덮여 동학군 세상이 되고 말았다. 중앙군 손병희 대접주의 행렬이 성문을 지나 관아에 도착하는 것을 끝으로 괴산전투는 막을 내렸다. 한규석은 이창진과 함께 관아로 들어가 손병희 대접주에게 승리 축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대접주께서 무척 기뻐하셨어. 이번 전투에서 자네의 공로가 지대하다는 걸 잘 알고 계시더군.” 한규석은 이창진의 무공을 추켜세우며 진중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 칭찬이나 듣자고 한 일이겠나?” “아무튼 장한 일을 했어. 그런데 말일세. 우리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죽거나 다친 자가 무수하다 들었네. 그 수가 얼마나 된다던가?” “아직 다 수습된 건 아니지만 죽은 자가 족히 백 명은 넘는다 들었네. 자세한 것은 곧 알게 되겠지.” “관군과 일본군은 몇이나 죽었다던가?” “관군의 숫자는 지금 파악 중이고, 일본군은 한 명이 죽고 네 명이 부상당했다 들었네.” “어허, 낭패로고.” “낭패라니?” “관군의 사상자는 빼더라도 일본군 한 명을 죽이는 동안 동학군 백 명이 죽었다면 이 어찌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진 무기가 열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네. 이 어찌 제대로 된 전투라 할 수 있겠나? 그리고 앞으로가 더 문젤세. 고작 일본군 정찰병 삼십 명이 우리 동학군 일만 명을 업신여기고 달려들 정도인데 장차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파견했다는 후비보병(後備步兵) 19대대를 만나면 어찌 되겠나? 게다가 죽산 부사 이두황(李斗璜)의 장위영(壯衛營) 군과 안성 군수 성하영(成夏泳)의 경리청(經理廳) 군이 지난번 우리가 지나왔던 광혜원과 안성에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나? 일본군과 관군이 우리 동학군만 보면 진멸하러 달려들 것이 불 보듯 뻔한데 항차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래서 괴산 관아를 공격한 게 아니었나? 노획한 무기도 상당하고 환곡 사백 석에 공전(公錢)도 팔천 금이나 확보했다네.” “앞으로 날은 더 추워질 테니 입성도 두툼히 갖추어야 하고, 많은 인원에 먹성 대기도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걱정이 하나 더 생겼네. 자네도 괴산 읍내 불타는 것 보지 않았는가? 탐관오리들이 끼친 패악을 참지 못해 당장 개벽 세상을 만들 것처럼 날뛰는 사람들 말일세. 이들이 관가나 민가 지붕에 불쏘시개를 찔러 넣어 소실된 가옥만도 오백 채가 넘는다네.” “나도 기실은 그게 걱정일세.” 둘은 전화(戰火)의 참상이 채 가시지 않은 읍내를 둘러보며 품었던 소회를 풀어냈다. 외적의 침탈과 모리배의 악행을 징치하기 위해 기포한 동학군이건만 이 중에는 시정잡배, 협잡꾼까지 묻어 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이가 있으나 이들을 추려낼 방도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로 인해 화란(禍亂)이 더욱 극심해질 게 염려스러웠다. 이창진은 가던 길을 멈추고 행전을 조여 매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이제부터라도 군율로 더욱 엄히 다스리고 전량을 철저히 단속함은 물론, 무리 중에서 동학교에 입도하지 않은 자들을 솎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화적 떼와 다를 것이 무언가? 우리 이천접이 먼저 솔선하여 경기포의 모범을 보이세.” 한규석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전투 결과를 세밀히 분석하고 기록해 차기 전투에 대비하는 일도 생각해봐야겠어. 허투루 병력을 낭비하여 1대 100으로 동학군이 죽어서야 쓰겠는가? 전황의 유불리와 진퇴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전투상보(戰鬪詳報)를 꼼꼼히 기록하는 것도 엄중한 일일 걸세. 내가 이 일을 자청해서 맡아 할 터이니 그리 알게나.” 한규석은 이천접 진중으로 돌아오는 즉시 한지 두루마리를 한 채 사서 마름질하여 지니고 다니며 난중 세사(亂中細事)를 꼼꼼히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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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1)중편소설 <하얀 혁명>(1) 1. 출진 “이보게, 규석이. 소식 들었는가?” 이창진은 접소 안을 민틋하게 정리한 후 청수상(淸水床)을 닦아 선반 위에 올리며 물었다. “무슨 소식?” “해월선생께서 드디어 기포령을 내리셨다네.” “전봉준의 호남동학군이 기포했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우리 경기동학군에서도 기포를 했단 말인가?” “그렇다네.” “경거망동하지 말라 하신 게 칠월 아니었던가?” “그랬었지.” “그런데 왜 이리 경황이 없으신 게야?” “오늘은 접주(接主)와 접사(接司)들만 은밀히 모이라 했으니 도소(都所)에 가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을 걸세. 어서 서두르세나.” 이천포의 이창진 접주와 한규석 접사는 교인들이 빠져나간 접소의 문을 꼼꼼히 닫아걸고 길을 나섰다. 들판 가득 누렇게 일렁이던 벼가 아름 단으로 묶여 누워 있는 논두렁길로 접어들었다. 늦장마가 길어진 탓에 개울물이 벙벙하게 흐르고 있었다. 논바닥이 쩍쩍 갈라질 때는 코빼기도 뵈지 않던 비가 사흘돌이로 쏟아지는 바람에 베어둔 낟가리에서 싹이 틀 지경이었다. 이천의 도소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거리. 둘은 마음이 바빠져 볏단 거둬들일 생각 대신 동학의 주문을 소리 내어 외우며 걸음을 재촉했다.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 이천의 도소에 당도하니 평소에 보이지 않던 도인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인근의 여주와 안성, 지평, 양근 쪽에서 온 사람도 보였다. 그들의 눈에 묘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불안감의 원인은 아무래도 경기동학군에 내려진 기포령 때문으로 짐작되었고, 기대감은 작년 보은 취회(聚會) 이후 늘어난 동학 입도자의 증가세에 힘입은 것으로 보였다. 특히나 지난 4월, 전봉준 장군의 전주성 입성과 전라도 각지에서의 집강소(執綱所) 개소 소식은 오랜 세월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려왔던 경기도 지역 농민들에게도 칠년대한(七年大旱)에 쏟아진 단비였고, 지주나 마름들까지 동학도 되기를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아직 가을걷이가 끝나지 않은 농번기였지만 각 접에서 모여든 도인들로 도소 안이 그득했다. 좌중이 갈라지며 이천포 수접주가 도소의 임원을 대동하고 접소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모시고, 강녕들 하셨는지요? 추수하느라 분주하실 텐데 왕림하신 동덕님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오늘 오전에 각 접소에서 제례를 올리셨을 터이니 지금은 청수를 모시는 것으로 식전 의식에 갈음하겠습니다.” 수접주가 인사의 서두를 떼자 도인 하나가 청수상을 모셔왔다. 수접주가 잔을 높이 들어 절하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각설하고, 작년 봄, 서울 광화문에서의 수운대선생 신원(伸冤)을 위한 복합 상소(伏閤上疏)와, 보은 취회에서 기치로 내걸었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 당시 서울에 모인 동학도의 통곡이 백악(白岳)과 인왕(仁旺)을 흔들었고, 보은 장내리에 모인 동학도의 숫자가 무려 3만 명 이상. 그런데 조정에서 약속한 서정쇄신(庶政刷新)의 언약은 어찌 되었습니까? “무리를 풀고 집에 돌아가 그 업을 편안히 하면 소원에 의하여 실시하리라.” 하던 임금의 칙교(勅敎)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그 일이 있은 후 제읍(諸邑)의 수령과 토호들은 우리 동학도를 죄없이 붙잡아 가두고, 가솔들까지 화적의 패당으로 몰아 함부로 능멸하고 있으니 그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다행히 전봉준 장군의 전주성 입성을 계기로 다시금 서정(庶政)을 쇄신하겠다는 언약을 하였기에 이제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할 기회가 왔다 싶었는데, 그러나 이 또한 어찌 되었습니까? 조정의 탐학한 무리들이 동학도와 맺은 맹약을 깨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조선은 어찌 되었습니까? 청군과 왜군이 전쟁을 벌여 청국은 쫓겨나고, 날카롭게 벼려진 일본의 독수(毒手)가 조선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지 않습니까? 본시 조선과 일본은 빙탄(氷炭)의 관계라 과거 임진(壬辰)과 정유(丁酉)의 묵은 원한을 모르는 이 없건마는, 근간 들어 일본은 조선의 개화와 내정개혁을 구실삼아 더욱 오만방자하게 굴고, 야밤에도 경복궁을 침탈하여 주상(主上) 능멸하기를 공깃돌 굴리듯 한다 하니, 우리가 애초에 혁명의 기치로 내걸었던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보다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티인 왜군(倭軍)을 몰아내는 일에 골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초 복술(福述)께서 무극대도(無極大道)를 깨달아 동학을 창도하시고 한울님을 모시게 된 것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천하여 만민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었건만, 그가 순도하신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조 신원(敎祖伸冤)은커녕 풍전등화 조선의 국운처럼 우리 동학도 역시 광대한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지난 구월 열여드렛날 최시형 법헌(法軒)께서 햇곡 갈무리를 마치는 즉시 작년에 모였던 보은 대도소로 출정하라는 기포령(起包令)을 발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이천포에서도 전량(錢糧)과 무장(武裝)을 갖추어 광혜원(廣惠院)에 모이기로 하였으니 촌각을 다투어 기병하시기 바랍니다. 곧 엄동설한이 닥칠 것이니 출진을 서둘러야 합니다. 생(生)의 말은 이상으로 줄이고, 다수의 논의가 있을 듯하니 각자 품은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바랍니다.” 유학자 출신인 수접주의 진서(眞書) 풍 언변에 평생을 농투성이로 살아온 사람 중에 더러 못 알아듣는 이도 있었으나 어조의 비장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말이 끝나자 곳곳에서 분분함이 일었다. 수접주가 유건(儒巾)을 고쳐 쓰고 좌정하는 사이 나이 지긋한 지평(砥平) 고을의 이재현 접주가 좌중을 살피며 입을 뗐다. “자고로 기포라 함은 무장을 갖추어 일어남을 뜻하거늘, 한갓 농촌에서 들고 나설 것이라곤 쇠스랑이나 낫, 삽자루가 고작일 터인데 과연 무슨 강단으로 총 든 일본군을 대적한단 말이오?” 지당한 말이었다. 신식 총은 고사하고 구식 화승총 하나 변변히 없는데 무슨 수로 싸움을 하겠다는 것인가? 수접주의 연설을 듣는 동안 다들 말은 안 했어도 미구에 곧 닥칠 일인지라 질문이 끝나자마자 옳거니 소리가 절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수접주의 대답보다 빨리 황산의 강용구 접주가 냉큼 나섰다. 입도(入道)한 지는 오래되었어도 나이는 제법 젊은 접주였다. “작년 보은 취회 당시 해월선생께서 마음이 굳고 뜻이 독실하면 능히 대업을 성취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무장이 없다 하나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이가 기호(畿湖)와 호중(湖中)만 하여도 수백, 수천이라 인(人)으로 무장한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듣건대 음죽과 안성 관아의 방비가 허술하고 병기가 많다 하니 야음을 틈타 불시에 짓쳐 들어가면 능히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할 방도가 나설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황산접에 천보조총(千步鳥銃) 가진 날랜 포수가 다수 있으니 제가 이들과 도모해 두 곳 관아를 깨뜨려서 병기 부족의 근심을 덜어볼까 하옵니다.” 황산 접주의 말에 여기저기서 우리 접에서도 십시일반 나설 테니 힘을 모으자는 의견이 빗발쳤다. 지평 접주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관아의 군기고(軍器庫)에는 어떤 것들이 있다 하오?” “화승총(火繩銃)과 궁전(弓箭), 창, 죽창이 무수하다 들었소.” “화승총이라 함은 노끈에 불을 붙여 화약을 터뜨리는 총을 말하오?” “그렇소이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갖고 있는 총은 무엇이오?” “주력은 스나이더 소총이라 들었소. 무라타 소총을 가진 자도 있고.” “명중시킬 수 있는 거리는 몇 보(步)나 된답디까?” “자세히는 모르오나 삼백 보는 장히 난다 하오.” “그렇담, 화승총은?” “오십 보쯤 되겠지요.” “삼백 보에 오십 보라? 어허, 오십보백보도 아니고…… 이래서야 어찌 싸움이 되겠소? 화승총, 활, 창이 아무리 많다 한들 스나이더 한 자루만도 못할 터인즉.” “대신에 우리는 수효가 많소이다. 일시에 달려들면 중과부적이라 능히 대적할 자신이 있습니다.” “아무리 수가 많아도 멀리서 날아오는 탄환을 어찌 피한단 말이오. 활이나 창이 가당키나 하오?” “접주께서는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질 궁리부터 한단 말입니까?” 황산 접주 강용구가 젊은 기운을 다스리지 못해 말꼬리를 가파르게 올렸다. 분위기가 초장부터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수접주가 말막음을 하고 나섰다. “두 접주의 말씀이 모두 옳소. 왜군은 무장이 우량하고, 우리는 인재(人才)가 우량하오.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의견이 있으면 개진들 해보시오.” 이때 양지(陽智) 마을의 오세당 접주가 빈 장죽을 목깃에 꽂으며 일어섰다. “무릇 전장에서 이기려면 군사를 부리고 먹일 금전과 군량이 있어야 하오. 이에 대한 방도는 어찌 갖추려 하시오?” 이에 대해 즉답을 하고 나서는 이가 있었다. 익히 보았던 인물이 아니었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각 고을 접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소생의 자는 일섭이라 하오며, 미력하나마 도소에서 전량도감(錢糧都監)의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연전에 작청(作廳)에서 아전(衙前) 일을 보았던 바 있어 감히 사뢰옵니다. 전량의 중요함은 비단 전장뿐 아니라 관가나 민가의 살림살이에서 가히 으뜸이라 할 만합니다. 지금은 햇곡이 그득하여 연중 가장 풍요한 때인지라 거사를 도모하기에 적기로 사료되옵니다. 또한 각 관아의 곳간에는 환곡(還穀)이 즐비하게 쌓여 있고, 백성에게 늑탈한 전엽(錢葉)이 가득 들어차 있어 관아 한두 군데만 탈취해도 능히 천 리를 운행할 만하옵니다.” 그러자 양지마을 접주의 질문이 이어졌다. “우리가 관아를 공성(攻城)하려 들면 관군들이 수어(守禦)에 진력할 것은 불 보듯 뻔할 터, 동학도의 기포 연유가 장차 왜군과 대적하려 함이거늘 되레 우리끼리 접전하는 꼴이 되는 게 아니겠소?” “우리가 갖춘 무장이 없으니 별도리가 없을 듯하옵니다.” 일섭이 쓴 입맛을 다시며 곰삭은 말을 입속에서 우물거렸다. 오세당 접주가 답답한 듯 목깃에 꽂았던 장죽을 칼처럼 빼 들고 일섭의 눈자위를 겨누었다. “내 말의 진의는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 일본군에서 관군을 더해 곱절로 늘어난다는 것이오. 하나도 감당키 어려운데 둘은 말해 뭣 하겠소? 게다가 기포에 동참한 우리 동학도가 아무리 심성수련의 내공이 깊다 한들 군율이 엄중한 군대가 아닌 바에야 이들과 대적하기 난감하고, 이에 더해 양반이나 유생 또한 우리 동학도를 사교(邪敎)로 보고 있어 필시 민보군(民補軍)을 조직해 싸우려 나설 것인즉, 우리가 대적할 상대가 도합 셋으로 늘어날 것이오. 하나도 당키 어려운데 셋을 어찌 감당하겠소?” 생각지도 않았던 민보군 얘기까지 나오는 통에 전량도감의 소임을 맡은 일섭이 할 말을 잃고 머뭇거리자 다시 수접주가 갈라서며 나섰다. “그 말도 장히 옳소. 허나 양반이나 유생들 역시 조선 백성이 분명한 터, 열에 칠팔은 우릴 돕지 않겠소? 어찌들 생각하시오?” 수접주의 간곡한 되물음에 초치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접주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일본군이나 관군, 민보군을 이겨낼 자신이 없음에서 기인한 침묵이었다. 투지 하나만 믿고 기포하기에는 너무 지난한 싸움이 되리라는 고심의 결과였다. 접주들의 속이 타들어갔다. 심기를 일전할 획기적인 방책이 나서길 고대하며 침만 꼴깍거리고 있을 즈음 이창진 접주가 한 걸음 썩 나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동학에 입도하여 한울님을 모시게 되었다함은 곧 한울님의 뜻에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살기로 맹약했다는 것입니다. 곧 나와 한울님이 동화(同化)를 이루어 하나가 되었음을 깨닫고,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를 실천하여 천심(天心)을 회복하기로 언명했다는 뜻입니다. 천심이란 무엇입니까?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 하여 사인여천의 세상을 만드는 것, 나라의 잘못을 바로잡고 빈부 귀천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 임금을 핍박하고 국권을 유린하는 왜양(倭洋)을 몰아내어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나라, 후천개벽(後天開闢)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 이 작품은 김현종 작가의 창작 작품이며,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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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사 출세 200년 맞이 도보 성지순례 성료용담수류사해원 길 걷기 도보 성지순례로 용담정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을 기념하여 도보 성지순례 행사를 지난 10월 24일 개최하였습니다. 이번 행사는 천도교부산교구연합회에서 주최ㆍ주관하고 천도교중앙총부에서 후원하는 행사였습니다. 평일이고 도보순례라 참석율 저조를 걱정했으나 공지한지 3일만에 당초 계획한 모집인원 35명이 모두 마감되었습니다. 이번 도보순례에는 그 취지에 맞게 비교인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결과, 비교인 2명 휴면교인 1명도 참가하였습니다. 이 순례길을 '용담수류사해원龍潭水流四海源길 걷기'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용담정에서부터 황성공원에 세워져 있는 해월신사동상까지는 10km 정도입니다. 당초 계획은 용담정에서 참례식을 하고 용담계곡 약수터에서 모셔온 청수로 해월신사동상 앞에서 참례식을 할려고 했습니다만, 태묘 정비 준공 봉고식 참여 관계로 계획을 변경하여 해월신사동상에서 출발하여 용담정까지 걸었습니다. 수운 대신사 태묘 앞에서 태묘 정비 준공 봉고식 후에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날 도보순례는 해월신사동상에서 출발하여 용담정까지 진행하였다. 지난 10월 24일,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이하여 도보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 용담정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은 마룡골로 흐른 뒤, 남사저수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과 합쳐집니다. 그 물길은 소현마을과 오류마을 앞 하천으로 해서 형산강으로 합쳐진 후 포항 앞바다로 흘러갑니다. 대신사께서는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요, 구미산에 봄이 오니 온 세상이 꽃이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함께 그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고,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길을 걸었습니다. 태묘 봉고식에 참여한 후 저녁에는 경동제 전야제 '용담 가는길'도 관람했습니다. 한울님의 감응과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의미 있고 뜻깊은 행사를 잘 마무리 하게되었습니다. 도보순례길 위에서 길을 찾고,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나'임을 깨닫는 소중한 성찰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심으로 하나되는 행복한 마음이 가득한 즐겁고 보람된 도보 성지순례길이었습니다. 글 수암 정의수(부산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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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수운대신사 탄신 200주년, 득도 및 순도의 순간들용담성지 포덕문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는 인류가 살아가는 방법을 세세히 교훈으로 후학들에게 알려 주시고 대구장대에서 순도하신 것이다. 수운선생의 탄신과 득도 및 순도의 순간순간 들이 모두 신비에 쌓여 있다. 신인임을 말해 주는 위대하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요한 순간들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수운 선생의 200주년 탄신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먼저 수운선생의 탄신에 대해 살펴보자. 갑신년 1824년(순조24년)10월 28일(양력 12월 18일) 새벽 먼동이 틀 무렵 경주 현곡면 가정리 안쪽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63세의 근암공(수운 선생의 부친)은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태어날 때 하늘이 아주 맑았으며, 해와 달이 밝은 빛을 발했다. 상서러운 기운이 집 주위에 둘러졌다. 또한, 태어나자마자 구미산 봉우리가 3일간이나 기이한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최씨 가문에 유명 인사가 탄생하면 구미산이 울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7대조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탄생했을 때도 구미산이 3번 울었다고 한다. 수운대신사 탄신일에 구미산이 3일이나 울었다는 것은 수운이 위대한 인물, 즉 신인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용담가에서도 “기장하다 기장하다 구미산기 기장하다 거룩한 가암 최씨 복덕산 아닐런가”하여 구미산과 최씨 가문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였다. 득도의 순간을 보자. 1860년 경신년 4월 5일(양력 5월 25일) 오전 11시에 한울님으로부터 후천 오만년 무극대도를 받으셨다. 포덕 5년 전, 1855년 3월 울산여시바윗골에서 을묘천서를 받고 수련을 거듭한 후 1859년 10월, 용담으로 돌아온 지 7개월만이다. 그로부터 4월말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수없이 많은 천사문답이 계속되었다. 득도 당시의 심정과 상황을 친히 저술하신 하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8편에 기술하셨다. 간단히 살펴보면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뜻 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거늘 깜짝 놀라 캐어물은 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한울님)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로 시작해서 천사문답이 이어 졌다. 나중에는 수운 선생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씀과 천사문답이 이어졌다. 드디어 시천주의 진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순도의 순간을 살펴보자. 조정으로부터 사형 집행 명령이 대구 감영에 하달되어 포덕 5년 갑자년 3월 10일(양력 4월 15일)에 대구 감영에서 수운대신사를 참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형졸이 수 삼차 대신사의 목을 베어도 되지 않았다. 모든 관속들이 창황실색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이때 대신사께서 형졸에게 명하여“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열 두자를 써서 펼쳐 놓고 청수 한 그릇을 모셔다가 그 위에 놓으라고 하신 후 청수를 향하여 한참동안 기도하신 다음 형졸을 향하여“이제는 안심하고 베라”하시고는 형장에 나아가시니 당년 41세였다. 이때 갑자기 천지가 어둑하여 지고, 광풍이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지고 실로 천지신명이 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크게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마침내 수운대신사는 순도하시었는데 금년은 순도 1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모든 탄신, 득도 및 순도의 과정이 신비에 쌓여 그 영적들을 쉽게 일반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종교는 영적의 순간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 천도교인들은 선배 동덕님들로부터 이러한 내용들을 무수히 많이 들어 왔고, 교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수운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설적으로 한국의 근대사를 장식하는 빛나는 삼일독립운동, 동학혁명 등이 과연 수운대신사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가능했겠는가를 자문해 본다.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사에 매이지 말고 이를 기반으로 앞으로 200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미래 지향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현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탄생한 인공지능 시대에 온 사회가 초지능과 초연결사회로 가고 있다. 이에 부합하는 교단 운영과 교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미래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지 등 막중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에 대한 교단 차원의 현명한 지혜와 교인들의 사명이 눈앞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정의필(울산교구, 울산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