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5.04.10 13:44
TODAY : 포덕166년 2025.04.10 (목)
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님, 천도교신문에서 찾아뵙습니다. 그동안 교단의 여러 행사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를 들려주셨습니다. 합창단 소개 부탁드릴게요.
우리 합창단은 역사가 깊습니다. 예전에 대교당 시일식을 중앙총부에서 직접 집례를 맡아서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일식 집례를 서울교구로 이관하면서, (그게 한 40년 정도 됐을 거예요.) 그때부터는 교구 내에서 시일식 합창단을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서 서울교구 합창단이 만들어졌습니다. 합창단 결성 초기에는 지금처럼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관심 있는 교인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정도였어요. 그때 서영모 교수님 등 몇몇 분들께서 지도를 해주시면서 명맥을 겨우겨우 유지해 왔지요. 그러다가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교단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단 밖에서도 활동하곤 합니다. 고양시에서 속해 있는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주관하는 <남북 평화 합창제>(현 평화합창제)에 참가하게 된 계기로 해마다 참가하고 있습니다.
평화합창제 때 많은 분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무대였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합창제에 참가하시게 되었나요?
평화합창제에는 저희 삼경합창단이 제2회 때부터 참가하게 됩니다. 주최 측인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함께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 주셔서 참가하게 되었는데, 다른 단체들은 모두 합창단 이름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때 우리도 합창단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단원들로부터 공모를 해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저희 합창단이 뜻하는 바는 해월 신사님의 ‘성, 경, 신’ 사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다짐을 해보자는 뜻으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해마다 평화합창제에 참가하셨다고 하시던데, 합창단의 연간 주요 사업으로는 어떤 일이 있나요?
저희가 제2회 평화합창제 때 처음 참가하게 되어 벌써 다섯 번이나 참가했네요. 저희의 활동은 교단 내의 행사와 시일식 등에 노래하는 것이 주요 활동입니다. 이를테면 기념 공연이 있는데, 서울교구 결성 기념일에 하는 경축 공연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외부 행사로써 평화합창제와 KCRP에서 주최하는 평화 음악제와 같은 종교축제에 초청 받아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좀 바빴습니다. 작년에는 특히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받아서 다녀오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연습을 또 별도로 더 해야 하니 바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합창단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지금 저희 삼경합창단에 등록된 단원은 한 30여 명 되고요. 공연에 참여하는 분들이 매번 나오지는 못하지만, 정기 연주회나 평화합창제 같은 때는 좀 더 모이곤 하지요. 각자 개인 생활들이 있어서 한 15명 내외가 나와 대교당 시일식에 함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열심히 활동해 주는 단원들이 있어서 고맙고 또 서로서로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단장님은 언제부터 합창단 활동을 하셨나요? 단원들과의 화합은 잘 이뤄지고 있나요?
제가 중앙총부에서 종무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중앙감사의 임기까지 마치고 나니까 포덕 160년이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합창단의 단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 5~6년 되었는데, 서로가 잘 맞춰가면서 활동하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모두가 좋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지지요.
가장 보람이 된다고 느끼실 때는 언제예요?
매주 시일식에 합창을 하고 요즘은 저희가 엔딩 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시일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저희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시고 박수를 쳐줄 때, 이분들이 이 노래를 함께 들어주고 계시는구나, 그 마음을 느낄 때 가장 보람 있고요. 대외적으로는 우리 삼경 합창단이 천도교를 대표해서 외부로 공연을 나갈 수 있다는 것에서 단원들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참 보람이 있죠.
다른 종단 합창단이나 일반인들이 삼경 합창단이 노래하시는 모습을 보고 반응은 어떻던가요? 노랫말이 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우리도 다른 종단의 노래를 들으면 또 마찬가지잖아요. 그 종단의 특성이 있고 노랫말이 와닿지 않을 때도 많지요.
작품집을 만들긴 하지만 공연장이 어둡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는 가사 전달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같은 경우에는 가사를 화면에 보여주면서 노래를 했는데, 그 부분을 참 좋게들 봐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방식이 합창단의 시각적인 효과를 분산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들이 좀 있었는데, 그 자리는 경쟁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각 종단 간 서로를 알게 되는 면에서는 도움이 됐다는 평이 있더라고요.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에게 가사를 보여줌으로써 노래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팔 절’이라는 대신사님의 말씀을 노래 중간에 낭독하는 형식을 가져보기도 했는데, 관객분들이 집중해서 듣고 또 관심도가 높았어요. 천도교라는 우리 종단이 참 생소한 것처럼 합창단도 마찬가지로 생소하다고들 해요.
그래서 저희가 합창하면 상당히 고무적으로 관심 있어 하고 천도교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점에서 저희가 느끼는 보람, 또 우리가 왜 이걸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기독교나 불교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대상이 내 안의 한울님이라는 점에서 좀 다르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음악에서도 그런 게 확연히 드러날 것 같아요.
저희가 평화합창제에 1회 때부터 참가한 것은 아닌데, 2회 때 참가하면서 분위기가 ‘천도교 합창단에서 이런 노래를 하는구나’하고 관심 있게 봐주시는 걸 느꼈어요.
선곡도 가곡을 선택해서 갔지요. 그런데 그다음 해에 다른 종단에서도 대중적인 노래로 자유곡을 선정해서 부르시더군요. <남북 평화 합창제>라는 주제에 맞게 남북 문제를 놓고 그 주제에 맞는 곡을 갖는다는 게 상당히 어렵잖아요. 정치적으로도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고요. 작년에는 우리가 ‘임진강’이라는 북한 가요를 불렀는데, 의미가 깊은 곡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아쉬운 건 다른 종단들은 그러한 것들을 매머드급 합창단을 구성하는데 우리는 한정된 인원이니까 거기에 다른 종단 합창단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인원이니까, 주최 측에 우리가 좀 더 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좀 아쉽지요.
다른 종단에는 청년합창단도 있지 않나요?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분들도 종단 별로 차이가 좀 있겠어요.
다른 종단의 경우는 청년들도 많은 데다가 단일 교회나 교구에서 나오지 않고 연합으로 나오니까 뭐 한 두세 개 교회만 모여도 한 5~60명이 되죠. 불교 같은 경우도 사찰 두 군데면 한 60명 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도 그 규모를 좀 키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합창제 공연을 했던 아람누리 극장이 1200석인데요. 그중 1층만 사용했는데, 한 7~800석 정도 되는 그 공간이 꽉 찰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또 우리 천도교는 일산에 교구가 없고 그러니까 교인분들이 관람하러 오시기도 어려워요. 올해는 11월 4일 날로 예정이 돼 있는데 많은 분들이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올해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올해도 마찬가지예요. 다음 달에 있을 교구 창립 기념일 날 공연을 앞두고 있고, 11월 4일에 있을 평화합창제 준비도 해야 하고 그 외에는 교단에서 기념일 날 요청이 있는 경우에 저희가 준비된 대로 응하는 것들이 예정돼 있고 지방 교구 행사에도 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합창단 단장으로 활동하시기 전에도 교단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학생회 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던 것 같아요. 학생회 때는 중고등부 부장을 맡았었고 청년회에 와서는 본부에서 부회장을 했고요. 1981년도에 서울교구 청년회를 재창립했어요. 그때 초대 부회장을 했고 지금은 환원한 정학현 동덕이 그때 초대 회장을 하고 그다음에 제가 청년회 서울시지부 회장을 했지요.
교단의 역사와 함께해오셨네요. 교회에 처음 나오던 날 기억하세요?
수운회관 낙성기념식이 있던 날이었어요. 그 옛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지요. 4월 5일 날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손을 잡고 나와서 지금까지 교회에 나오고 있으니까 그때부터 친구들은 여기서 만난 교회 친구들이 다 전부예요.
어릴 때 천도교 집안이라는 건 언제 아셨어요?
우리 집보다는 우리 외갓집이 천도교를 더 먼저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는 천도교라기보다도 천도교청우당 쪽에 계시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고, 신앙보다도 청우당 활동을 하시면서 근근이 경전만 혼자서 읽으셨던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외갓집은 적극적으로 천도교를 했던 집안이고요. 북에서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외숙이 우리 어머니의 오빠 되시는 분인데 어머니 살아생전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이 천도교에서 하는 야학 활동을 하셨고, 우리 어머니도 그 삼촌을 통해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그러더군요.
어머니는 천도교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데 천덕송 교훈가 노래를 알더라고. 그리고 당가를 아셨어요. 송가집에 있는 청우당가 ‘울려라 개벽 소리’ 하는 그 노래도 우리 어머니가 아시더라고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외숙이 청우당 쪽에 계시면서 영향을 준 것 같고 우리 외할머니한테도 나중에 물어보니 외숙이 공부도 잘했대요. 삼촌은 6·25 때 반공 쪽으로 가면서 구월산 유격대 쪽에 합류해서 문산 어디쯤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봤다는 얘기가 고향 분들이 전한 마지막 행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확인해 봤는데 더 나오질 않아요. 예전에 국방부에서 유전자 검사를 하고 등록했는데, 아직 못 찾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천도교에서 시일식을 하던 모습은 기억하세요?
생각이 나죠. 1970년쯤일 거야. 아버지하고 기념일에 나오면 그때는 빵을 줬어요. 근데 할아버지들, 아버지들이 빵 받아서는 당신들이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갑니다. 기념일 날은 이북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서로 얼굴 보는 날이었어요. 그러면 빵 받은 걸 다 나한테 준단 말이야. 내가 어린애였으니까. 그러니 빵을 이만큼 받아서 집으로 가면 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빵 가지고 온다고. 그때도 지금처럼 교회가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교인은 더 많았는데 성미가 지금처럼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돌아보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참 따뜻하고 재미있었어요.
중학교 1학년 소년이 처음 아버지하고 같이 여기 왔을 때의 첫 느낌이 혹시 기억나세요?
그때 우리 선배들이 처음 교회에 나온 친구들에게 일일이 주소를 받더라고요.
전화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죠. 그다음 주 토요일 날인가 집으로 엽서가 왔어요. 난생처음으로 내 앞으로 온 엽서예요. 그런 걸 처음 받아본 거야. 교회 학생회 집회를 알리는 통지문이었어요. 선배들이 전부 손으로 써서 보내준 거야. 그날 처음 온 친구들한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거 보고 나오게 된 거야. 중학교 1학년이 뭘 알았겠어요. 주문도 몰랐지요. 그때 나한테 주문을 가르쳐줬던 선배가 안상숙 선배인데, 지금도 가끔 나오세요.
그때는 시일날 아침에 중고등학생들이 청수를 모셨어요. 지금의 서울교구 여성회 실에서요. 그땐 거기가 다다미방이었어요. 10시부터 10시 50분까지 1시간 정도 주문을 한 105회 묵송을 하고, 경전 한 편을 한 사람이 다 읽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읽어 나가요.
그렇게 해서 용담유사 한 편을 읽고 나면 시일식 보러 들어가죠. 처음 나왔는데 주문을 모르잖아. 남들이 하는 거 마음속으로 따라 읽어요. 그렇게 주문을 배운 거죠. 그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선배들이 많았죠. 학생회가 일도 많았고 일을 참 잘했죠. 학생회 예술제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이끌림, 중학교 1학년이면 어리잖아요. 자기에 대한 존중 이런 것도 좀 느끼셨겠어요? 천도교 청년회의 일원으로, 학생회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람들하고 같이 뭔가를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더 컸겠어요.
그랬죠. 그리고 그때는 포크송이 유행했잖아. 천덕송보다도 선배들이 통기타 가지고 포크송 하니까 그 포크송 배우는 게 재밌잖아. 그래서 토요 집회를 하고 나면은 천덕송 부르지만, 집회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통기타를 중심으로 모여요.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 포크송을 불러요. 그땐 사람도 많았고 교회 나오는 게 참 즐거웠어요.
선생님의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마음에 자리 잡은 그 시기는 언제였나요?
자연스럽게 그런 신앙 생활을 해왔어요. 당시에는 예술제가 있었어요. 예술제가 12월 1일 현도 기념일을 즈음에 하는 행사였는데 그때는 중고등학생들이 예술제를 해요. 대학생 선배들이 도와줬지요. 조명이라든가 음향이라든가 선배들이 도와주는데 그 예술제 준비를 무려 3개월 이상을 하거든요. 그 과정 때문에 막이 내려 나간 다음에는 배우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연스럽게 인일 기념일까지는 그냥 교당에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청년회를 만들면서부터는 이제 그냥 학생하고는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이제 좀 들기 시작했다고 그럴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작은 천덕송 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거를 버스에서 잃어버렸어. 그때 우리 아버지가 아주 호되게 혼을 내셨어요. 정신을 어디에 갖다 팔아먹고 다니냐고. 교회 책을 들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런 걸 잃어버릴 수 있느냐고 혼을 내시는데 눈물이 쏙 빠지더라고.
당신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안 하면서 유독 나한테만 그렇게 강조하셨어요. 우리가 사형제인데도 나만 교회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내 동생들은 한 번도 안 데려왔어요. 동생들은 나 따라서 몇 번 나왔는데, 학생 때 잠깐 하다가 안 나오게 되고. 그런데 말로는 다 천도교인이래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1977년도에 내가 공무원 시험을 봤어요. 1978년도부터 공직 생활을 하다가 2개월 보름 만에 방위 근무를 소집 받아서 18개월을 복무하고 1979년도에 이제 다시 복직하고서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1981년도에 다시 서울로 왔어요.
그때 서울교구 청년회를 만들면서 청년회 활동을 하고 청년회장을 맡고 나니까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아이들도 낳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주말이면 교회 생활을 하니 자연스럽게 학교 동기 동창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제 유일한 친구들이 직장생활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되었고 한 40년 유지되고 있습니다.
교회 나오시면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마음이 편안해요. 어려서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날에 교회에 가면 빵도 나눠주고 그러잖아요. 얻어먹을 때는 좋은데 뭔가 마음이 공허하다고 할까, 사찰에 가도 그랬어요. 천도교는 첫인상이, 선배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각인돼서 그런지 몰라도 푸근해요. 또 가족 같은 분위기였어요. 청년회 때부터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우리 교당은 다른 교회나 절에 가면 있는 예수, 십자가, 부처와 같은 상이 없잖아요.
우리에겐 궁을기 하나밖에 없잖아요. 신앙의 대상도 다른 종교와 차이가 좀 있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 거기서 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한울님이 마음속에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학생회 활동하시면서 마음에 품었던 신앙심이 평생을 이어져 왔다는 말씀이시군요.
우리 학생회 때 어떤 선생님께서 궁을장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한울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하나.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그것이 하얀 바탕의 색이 한울님 마음이고 빨간 색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구도화시킨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옛날에는 대교당에 장식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그런 자료들이 사진조차도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좀 아쉬워요.
삶에서 천도교를 한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사람은 매일매일 잠을 자잖아요. 그냥 단순히 잠을 자는 것과 뭔가를 정리하고 잠을 자는 것은 새로 만난 아침이 다르잖아요. 그렇듯이 천도교 신앙을 하는 것은 일신우일신, 저는 그 뜻이 있다고 봐요. 뭔가 달라져야 해요.
어제처럼 생각하고 어제처럼 행동하고 어제처럼 움직이면서 뭔가 새로움을 기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나를 중심 잡게 해준 것은 경전의 말씀이에요.
해월신사님의 법설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천이 힘듭니다. 믿습니까? 이거는 쉬워요. 그런데 그 믿음을 무엇으로 입증합니까? 뭔가 행동이 있어야 하잖아요. 해월 신사님 법설에 언고행 행고언(言顧行 行顧言)'이라고 하잖아요. 말을 할 때 행할 것을 돌아보라고. 말을 하기에 앞서 내가 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돌아보고 말을 해야 해요. 또 내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해요.
지금 천도교 청년회나 대학생단 후배들 보고 계시면 어떠세요?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실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그런 당부를 할 수 있는 위치인지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열정으로 그리고 나를 닦는 마음으로 순일한 마음으로 활동하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은 우리 아들에게도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러면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리는 바가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요.
오늘은 처음부터 합창단 이야기를 시작으로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합창단 단원들에게 단장님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단장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심부름꾼이지, 좋은 리더가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려운 형편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합창단을 만들어 온 조각 조각들이 참 소중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조각들이 하나라도 없거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역할을 못 한다거나 그 조각이 없어진다면은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때문에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자세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밀알이 된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서로서로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게 진짜 따뜻한 동덕애를 느낄 수 있는 그런 합창단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가 된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교단을 지켜왔듯 합창단 단원들의 화음이 아름다운 선율로 흘러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한울님, 감응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