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5.04.09 16:34
TODAY : 포덕166년 2025.04.10 (목)
올해도 어김없이 106년 전의 3·1절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정부 행사는 비록 작년 12.3 비상계엄을 발효하면서 벌어진 국헌 문란으로 수괴가 체포되어 단죄될 지경에 처해서 약소하게 기념식을 거행하였지만, 전국적으로는 다른 해 못지않게 많은 지자체와 수많은 시민단체가 나서서 106년 전의 함성을 재현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날 가장 기뻐하고 가장 기념할 곳은 우리 천도교단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오전 11시 중앙대교당에서는 엄숙한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기념식 뒤에는 참석한 교인 모두가 함께 손에 손에 태극기와 궁을기를 들고 인사동을 거쳐서 탑골공원까지 행진했다.
인사동 거리를 지나면서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주변 시민들의 박수와 특히 신기한 듯 쳐다보는 외국 관광객의 카메라 셔터가 연신 터져나갔다. 탑골공원에서는 의암 성사님의 동상 앞에서 다시금 3·1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은 심고를 드림으로써 행사가 종결되었다. 3·1대혁명은 우리 천도교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모든 교인을 하나가 되게 하는 날임을 확인한다.
3·1대혁명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 교단이 들인 노력은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혁명의 최후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 성사님은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1900년대 초의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성사님은 언론과 교육, 출판 운동 등으로 민도를 높이는 개혁을 전개하다가 1910년 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당하자 “내 앞으로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를 되찾으리라” 다짐하셨다. 우선 성사님은 1913년부터 전국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을 차례로 불러 우이동 봉황각에서 특별 연성수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장차 국가를 위해서 쓰일 인재를 미리 양성해 놓고자 한 지도자의 혜안이었다. 세계 제 1차대전이 종결되고 민족자결의 운동이 세계적으로 유행하자 성사님은 우리의 독립을 선언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직감하고 1918년 4월부터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중앙대교당 신축을 결의해 신도들의 헌금을 받기 시작했다. 독립자금 마련을 위한 위장술이었다.
드디어 1919년 천도교는 전체 인구 1,600여만 명에 300만 명의 신도수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단이 되었다. 천도교는 일제의 압제에 대항할 충분한 인원과 조직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학도들만이 참여했던 동학혁명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성사님은 3·1혁명을 단독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3·1혁명은 제2의 동학혁명이 되어야 했고 더 이상의 실패가 아닌 성공하는 혁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도교는 모든 종단과 정관계 모두에 연락하였다. 민족운동에 동참을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도급 인사들은 거절하고 있을 때 마침 개신교단에서도 비밀리에 독립청원이 추진되고 있었다. 접촉을 시도한 여암 최린 선생의 노력으로 천도교와 개신교는 함께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이웃 종단의 참여를 모색하였다. 이에 불교계가 동참하니 비로소 종교계의 연합적 성격으로서의 독립혁명이 전개될 수 있었다.
3·1일 한반도는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진동했다. 1910년 일본의 강압에 의한 국토 병탄으로부터 10여 년을 인고하던 전 민족이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함성의 무리에서는 신분, 연령, 남녀 차이도 없었고, 이념과 종교도 통합되어 있었다. 선두에는 우리 천도교인들이 앞장섰고 수많은 민중이 동참하였다. 그만큼 희생도 컸음은 당연하였다. 교단의 모든 조직과 인원 그리고 재정적 뒷받침까지 그야말로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3·1 대혁명은 상해 임시정부의 설립으로 이어져 우리 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고 전세계에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단합성을 과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3·1혁명의 3대 원칙인 운동의 대중화, 일원화(대동단결) 그리고 비폭력은 지금까지도 3·1운동의 최대 정신으로 남아 인류의 위대한 가치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평가이다. 과연 국민들에게 3·1혁명을 물어보면 누가 먼저 떠오를까? 단연코 유관순일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역할이 중심이었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통계치로도 당시 참여한 종교계 인물과 구금 희생된 인명의 수에서도 기독교가 훨씬 많다고 한다. 심지어는 100주년이었던 2019년에 남북합동 기념식을 위한 평양대회에서는 천도교는 아예 정부 초청에서도 빠져버려 있었다. 물론 우리 교단이 타 종단이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것에 대하여 폄훼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치하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올바른 3·1혁명의 평가일까?
천도교단이 나서서 한 준비는 물론 민족대표 33인을 모을 때 개신교단 측에 참여의 조건으로 지급한 거금 5천 원은 대부분이 모른다. 특히 이종일 선생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인쇄와 운송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그 극적임에도 불구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 경전 말씀에 “남의 적은 허물을 내 마음에 논란하지 말고, 나의 적은 지혜를 사람에게 베풀라”고 했다. 그렇다. 진정한 천도교인이라면 아무러면 어떠냐 3·1혁명 이후 우리 민족이 단합되고 독립운동의 전선이 강화되어 끈질긴 독립전쟁을 이어 나갈 수 있으면 됐지.
다 맞는 말이다. 설마 성사님과 3·1혁명을 준비한 선배들이 누가 알아달라고 하신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주인이 아닌 객이 되어버린 듯한 우리의 왜소한 모습은 모두를 쓸쓸하게 한다.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이제부터라도 누가 알아달라는 측면이 아니라 교인들의 가슴에 더욱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었으면 한다. 중앙총부의 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학문적 연구는 더욱 절실하다. 결국 남는 것은 학자들의 연구 축적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교과서 수록과 언론의 대국민 홍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성사님이 양성한 483명은 3·1혁명을 위해서 고향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가? 보성사 팀의 끊임없는 독립선언 제의는 어떤 의미였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던 성사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3·1혁명이 시작된 그 순간의 천도교 지방 교구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정말로 기독교인보다도 천도교인이 참여 숫자가 적은 것일까?… 3·1 혁명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 연구할 주제는 너무나 많다.
나아가 천도교인이 3·1혁명의 진정한 주인이고자 한다면 3·1정신을 제대로 계승한 행동을 해야 한다. 3·1혁명의 가장 위대한 정신은 자주와 단합이다. 과연 우리는 대외적으로 얼마나 자주적인가를 고민해 봐야하고, 무엇보다도 국민화합에 앞장서야 한다. 마침 오늘의 한국사회만큼 갈등이 심화된 나라도 없다고 한다. 우리가 각자위심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동귀일체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모범적인 모습을 솔선해야 한다. 대화합의 정신이 3·1정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3·1혁명의 주인은 천도교이기 때문이다.
글 년암 임형진(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