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5.04.18 15:03
TODAY : 포덕166년 2025.04.20 (일)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머리말
3·1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 5000년 역사를 통하여 민족의 정기를 대내외에 천명한 가장 고귀한 역사적 유산이다. 3·1 운동으로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법통을 이어받아 오늘의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에도 3·1 운동의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거나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1 독립운동은 일제에 맞서 7,500여 명이 학살되고 16,000여 명의 부상자와 47,000여 명이 구속·수감되는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6월 말까지 끈질기게 투쟁했던 운동이었다. 그런데도 3·1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우리의 선열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준비 과정은 생략한 채, 아직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운동처럼 폄훼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되면 자괴감을 감출 수 없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기 10년 전인 1910년 8월,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이 발표되자 천도교 중앙총부 조회 석상에서 “오늘 왜놈에게 빼앗긴 주권 회복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독립운동의 선두에 나설 것을 천명하였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교회의 조직을 강화하고 정신적으로 무장된 독립투사를 양성하여 후일에 대비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부터 우이동에 수련도장인 봉황각을 마련하고, 장차 독립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교역자를 소집하여 종교적 수련을 통하여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는 한편, 독립운동에 소요되는 막대한 운동 자금을 조성하였다.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이듬해인 1919년 1월 불란서 파리에서 세계 정상들이 모여 대독 강화조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접한 의암 손병희 선생께서는 이를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즉시 전국 교구에 1919년 1월 5일부터 보국안민을 위한 49일 특별수련을 지시하는 한편,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3인을 불러 독립운동의 3대 원칙을 제시하고 독립운동에 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천도교는 지역 조직인 교구제와 동학 시대부터 유래된 인맥을 중심으로 한 연원제의 2중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에 37개의 대교구와 산하에 190여 개 교구, 그리고 300만의 교인을 가진 우리나라 최대의 종단이었다. 특히 의암 손병희 선생의 명령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거대한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3·1 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과 포용력, 그리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대교당 건축을 추진한 것도, 기독교와의 연합을 위해 운동 자금 지원을 결단한 것도,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유지해 온 것도 의암 손병희 선생이었다.
제1장 3·1 운동의 준비
1. 경술국치
1904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탈취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우리나라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 3월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했다.
1907년 7월 20일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병약한 순종 황제를 새로 즉위시킨 후, 8월 24일에는 입법·사법권에 관리 임용권까지 모든 분야에 통감의 승인을 받도록 한 7개 항목의 굴욕적인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고 8월 1일에는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1904년부터 1905년에 걸쳐 진행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일본도 20개월의 전쟁 기간 중 동원 병력이 100만을 넘었고 전사상자도 30만에 달했으며, 전쟁 비용도 국가 세입의 3배 반이나 되는 17억 2천만 원이라는 거액이 투입되었다. 더욱이 이 중 14억이 영국·미국 금융시장에서 공채로 빌려온 외채였다.
비록 전쟁에는 승리했으나 전쟁 수행 능력이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일본 정부는 그해 8월 서둘러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일본 국민들의 여론은 전쟁 배상금으로 30억 원의 거액을 러시아로부터 받기를 원했으나, 강화 회의 결과는 만주와 한반도의 독점 지배권과 사할린섬의 남반부를 할양받았을 뿐, 배상금은 단 1불도 받지 못하였다.
이 소식이 일본 국내에 알려지자 9월 5일, 흥분한 시민이 폭동을 일으켜 수상 이하 장관들의 관저와 경찰서·파출소·전차 등 닥치는 대로 투석, 파괴, 방화하여 그 결과 시민 측의 사상자 558명, 경찰 사상자 471명, 경찰서·파출소 등 364개소가 파괴 혹은 소각당하여 동경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여기에 일본 정부는 과열 발광 상태인 시민을 진정시키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반도에서 약탈·착취해 낼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여 서두른 끝에 1905년 11월 17일 보호라는 미명 아래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했다. 그리고 1907년 6월, 한국이 을사조약의 무효를 세계 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병약한 순종 황제를 새로 즉위시킨 후, 동년 8월 22일에는 입법·사법권에 관리 임용권까지 통감의 승인을 받도록 한 7개 항목의 굴욕적인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고, 8월 1일에는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공포된 7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휘를 받을 것.
2)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3) 한국의 사법 사무는 보통 행정 사무와 이를 구별할 것.
4) 한국의 고등 관리의 임명·면직은 통감의 동의를 얻을 것.
5)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것.
6)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관리로 등용하지 못함.
7) 1904년 8월 22일에 조인한 한일 외국인 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은 폐지할 것.
조약에 명시된 조항은 실제로 이미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정무 일체를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명문화하고 권한을 다소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
1909년 10월 26일, 북만 하얼빈 역 앞에서 안중근 의사가 국권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2월 2일에는 매국노 이완용이 애국청년 이재명에게 단도로 저격당하여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편, 일진회의 계속된 친일 행위로 의암 성사로부터 출교 처분을 당한 이용구는 시천교를 별립하고 일본군의 비호 아래 1909년 12월 4일 일진회 명의로 일본 정부와 총독부에 국권 침탈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결국 일제는 1910년 6월 먼저 경찰을 해산하고 대신 헌병이 치안 경찰 임무까지 겸직하도록 하는 한편, 동년 7월에 현역 육군 대장인 사내정의(寺內正毅)가 제3대 주한 통감으로 부임하여 8월에 국권 침탈을 단행하고 초대 조선 총독으로 눌러앉았다.
(계속)
저자소개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