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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서에 나타난 동학혁명기 일본군의 인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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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서에 나타난 동학혁명기 일본군의 인식(2)

3.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과 그에 대한 인식


일본군의 개입과 경복궁 점령으로 재기포한 2차 동학혁명은 관군과 일본군으로 구성된 조일 연합군과 동학군의 직접적인 전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일본군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후비보병 제19대대의 3개 중대를 중심으로 후비보병 제18대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의 제4중대와 제7중대의 일부 병력, 그리고 부산수비대의 1개 중대, 해군 츠쿠바함(筑波艦)과 죠코함(操江艦)이었다. 동학군 진압의 주력부대인 후비보병은 만 20세에 상비병으로 3년간 군복무를 하고 예비역으로 4년을 보낸 후 다시 5년의 복무를 한 군 경험이 많고 노련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동학군 진압의 주력부대라고 할 수 있는 후비보병 제19대대는 일본 에히메(愛媛) 지역 출신들이었다.


후비보병 제19대대는 11월 12일(음 10월 15일) 용산을 출발하였다. 출발에 앞서 전달된 훈령에 의하면, 첫째는 동학군의 근거지를 찾아내어 이를 초절(剿絶)할 것, 둘째 동학군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초멸(剿滅)함으로써 동학군이 재흥하는 후환을 남기지 말 것, 셋째 조선군의 진퇴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지휘 명령을 받을 것, 넷째 보병 1중대는 서로(수원-천안-공주-전주), 보병 1중대는 중로(용인-죽산-청주-성주), 보병 1중대는 동로(가흥-충주-문경-낙동-대구)로 행진할 것, 다섯째 동학군을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내몰도록 하며 가능하면 러시아 국경으로 향하지 않게 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이후 동학군은 조일연합군(朝日聯合軍)에 의해 철저하게 진압당하였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천도교창건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학군이 일본군과의 첫 교전은 괴산이었다. 


이에 괴산에 당도하니 괴산군수, 충주군 주차 일병을 청하여 영전함에 포환(砲丸)이 여우(如雨)라. 도중(道衆)이 사(死)를 서(誓)하고 교전하여 피차 살상이 상당하더니, 마침 일모(日暮)한지라. 다수 교도 일제히 눌함(吶喊) 전진하여 일군(日軍)을 습살(襲殺)하였다.(『천도교창건사』)


동학군과 일본군은 괴산에서 첫 교전이 있었는데, 이 괴산전투에서는 동학군이 비록 승리하였지만 많은 희생을 해야만 했다. 당시 동학군은 2만여 명에 달하였으며, 일본군은 2개 분대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하라다(原田) 소위 등 부상 4명, 병사 1명 즉사에 불과하였지만, 동학군은 2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외에 일본군과의 전투는 공주 우금치전투를 비롯하여 태인전투, 용산전투, 광양과 섬진강전투 등에 관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전략)  때에 마침 관군의 원병인 일군이 대거 합류한지라. 동군(東軍)이 공주 효포에서 혈전 7일에 전세 불리함을 보고 퇴각하여 태인에서 일군과 교전하고(『천도교창건사』)

동군(東軍)이 용산에 이름에 뒤로 일군의 추격이 심하고 앞으로는 관군이 영격포위(迎擊包圍)하여 진퇴유곡이 된 지라.(『천도교창건사』)


퇴각 중의 도인 수만은 광양 섬진강 안에 둔하였다가 관군과 일군의 피습한 바 되어 강수(江水)에 빠져 진멸(盡滅)하고(『천도교창건사』)


이라고 하여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교전을 한두 줄로 언급만 하였다. 하지만 이들 전투는 동학혁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금치전투는 동학혁명 기간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으며 동학군 역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동학군 전사자가 37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비해 『동학사』에서는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 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병은 세를 합하여 동학군의 앞을 막아들어 온다”라고 하여 일본군의 진압과정에 대해 축소하였다. 


이후 동학군의 퇴로과정에서 적지 않은 일분군과의 교전이 있었지만,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부 지역 교정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수원부를 점령하고 남군(南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바, 관병과 일병을 만나 여러 날을 두고 싸우다가 (동학군이) 마침내 패하였고, (중략) 황해 일도의 동학군 수만을 일으켜 장차 남군과 세를 합하여 경성을 치고자 해주감영을 점령하고 있었던 바, 또한 관병과 일병을 만나 수십 일 동안을 두고 서로 싸워 양방의 많은 사상을 내었고, 마침내 동학군은 관일병에게 패한 바 되었다”(『동학사』)라고 하여, 수원전투와 해주전투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각지의 교전에서 “관병과 일병도 많이 죽고”라고 하여 일본군도 적지 않은 피해자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동학혁명이 끝나가는 1894년 12월 이후부터는 “조선의 남쪽은 관병과 일본군의 천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일본군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일본군을 포함한 관군, 수성군, 민보군 등의 동학군을 참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경이었으며, 그 결과 3, 40만 명의 동학군이 피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천도교창건사』도 20만 이상의 동학군이 죽임을 당하는 대참(大慘)이었다고 하였다.


그럼 해방 후에는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먼저 『천도교백년약사』를 살펴보자.


우선 동학군이 재기포한 배경은 “범궐(犯闕)한 일군들이 국왕을 핍박하고 국권을 유린”과 일군이 각지에서 동학군을 마구 참살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반봉건에서 반침략으로 전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동학군이 재기포하자 일본군은 관군과 연합하여 동학군 진압할 것을 제안하고 관군을 지휘하여 작전계획에 따라 동학군을 초멸코자 하였다. 동학군과 일본군은 안동을 비롯하여 괴산, 세성산, 홍성, 이인, 공주, 해주, 원평과 태인, 은률, 서흥, 홍천, 하동 등지에서 치열하게 교전을 하였으며, 수백 명의 동학군이 살해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전봉준의 피체와 재판과정에 일본군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천도교백년약사』는 앞서 살펴본 『천도교창건사』와 『동학사』보다는 구체적으로 폭넓게 일본군의 동향을 다루고 있다. 특히 동학혁명이 끝날 무렵에는 “일본군의 수색이 극심해지자 전국적으로 전토(田土)가 황폐해지고 도시와 농촌이 모두 일군의 왕래를 꺼리어 수확을 포기하고 촌민(村民)들이 도망하여 마을이 모두 비었다”할 정도로 일본군의 폐해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천도교약사』에서도 여전히 보이고 있다. 즉 세성산전투에서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전멸당하였다”거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는 “일본군 연합군이 최신무기로 무장한 채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우금치전투 이후 “일본군과 정부 연합군은 계속 동학군을 추격 공격하였다”하고 하여, 동학군을 섬멸하고자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인전투와 종곡전투에서도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전하였음도 아울러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동학혁명 개입에 대해 “아시아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최초 대량학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간행된 교서에서는 동학군과 일분군과의 전투과정 뿐만 아니라 그 실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판단된다. 


이로 볼 때 일본군에 대한 인식은 초기 동학교서에서는 가급적이면 필요 이상으로 학살 등에 대해 표현하지 않고 있지만 후기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동학혁명에 관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연구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제에 대한 책임을 보다 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희암 성주현(신인간 주필,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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