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5.04.18 10:06
TODAY : 포덕166년 2025.04.18 (금)
(지난 호에 이어) 이상한 일이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초막이 보이지 않았다. 경사진 언덕을 삼단으로 깎아 지은 초막 자리엔 갯바람에 흩어진 사구처럼 헐리고 쓸린 집터만이 추비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고향 집에서의 따뜻한 하룻밤을 생각했던 북접군은 폐허로 변해버린 터전 앞에서 망연자실 투레질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눈길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너럭바위 옆에서 오백 년을 견딘 느티나무였다. 고목은 거지꼴로 돌아온 북접군을 나무라듯 잎을 모두 지운 채 된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너럭바위 위에 올라 사방을 ...
(지난 호에 이어) 4. 후퇴 남접군과 북접군이 후퇴하여 집결한 곳은 논산이었다. 동학군은 우금치와 봉황산 전투에서 퇴각해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패인은 물론 무기의 열세였지만, 무리하게 고지 공격을 시도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수뇌부 회의 끝에 군사적 요충지가 될 만한 봉우리를 선점해 방어전을 펴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전략을 변경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공주 전투 이후 동학군의 약점을 파악한 관군과 일본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섰고,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가 논산으로 향했다는 첩보를 접했기 때문이...
(지난 호에 이어) 전투가 일단락되었다. 급선무는 시신을 묻는 일이었다. 벌써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땅은 곡괭이로 내리찍고 삽날로 후벼도 쉽사리 파지지 않았다. 애먹는 와중에 진동하는 피비린내는 머리를 돌게 만들었다. 시신은 온전한 것 하나 없이 뭉개지고 구멍이 뚫려 팔다리를 잡아당기면 헛소매 관절이 쑥 빠져나왔다. 어쩔 수 없이 땅을 얕게 파 토감(土坎)한 자리에 시신을 눕히고 흙을 덮었다. 혈해(血海)의 전장은 이곳만이 아니었다. 이인의 북접군이 채 토감을 마치기도 전에 영동과 옥천포 군의 피습 소식이 들려왔다. 대교에 진을...
(지난 호에 이어) 보은 충경포 수접주 윤경신은 눈자위와 상체가 헌헌한 중년의 남자였다. 청수잔을 올려 한울님께 심고하는 것으로 상견례를 대신한 후, 신재길은 구해온 총을 더 살펴보겠다며 일행을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윤경신이 두루마기를 벗어 횃대에 걸고는 나달나달해진 짚신을 잔솔가지로 털어 한쪽에 밀어놓았다. 사려 깊음이 몸에 밴 사람처럼 보였다. “경기도에서 예까지 오시느라 여독도 안 풀리셨을 텐데 이리 찾아주심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작년 보은 취회 이래 전국 각지에서 솔병해 모여드는 도인들을 치르시느라 되레 노고가 ...
(지난 호에 이어) 2. 혁명 괴산전투가 끝난 후, 동학군은 큰물 들어오듯 척양척왜의 깃발과 지역별 포접을 알리는 깃발을 앞세워 보은을 향해 진군해 나아갔다. 워낙 많은 숫자의 이동이라 정해진 길은 따로 없었다. 이천포는 청안, 미원을 지나 보은의 지경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행군 도중 여장을 푼 숙영지마다 흰옷 입은 동학군이 밀려들어 수천 마리 백로가 날아든 듯 가을 들판을 뒤덮었고, 밥때를 알리는 호군장(犒軍將)의 징소리가 가마솥이 풍기는 밥 냄새와 어우러져 산야로 퍼져나갔다. 보은 장내리 대도소에 도착하기 하루 전, 이...
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벼린 무기가 미흡하고 쌓인 전량이 부족하다 하여 천심을 회복하려는 한울님의 뜻을 저버리고 출진을 망설여서 되겠습니까? 철성(鐵聲) 소리만 듣고서도 떨쳐 일어서는 기백이 있어야 천지가 돕고 신명이 동할 것입니다. 이미 호남의 전봉준 장군이 일어섰다 하고, 해월선생께서도 기포를 명하셨는데 무얼 더 주저한단 말입니까? 내 안에 한울님이 모셔져 있음을 아직도 믿지 못한단 말입니까?” 이창진 접주의 절명(絶命)이라도 불사할 만한 토로가 있자 의기소침해 있던 좌중에 일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규석은 평소 이창...
중편소설 하얀 혁명(1) 1. 출진 “이보게, 규석이. 소식 들었는가?” 이창진은 접소 안을 민틋하게 정리한 후 청수상(淸水床)을 닦아 선반 위에 올리며 물었다. “무슨 소식?” “해월선생께서 드디어 기포령을 내리셨다네.” “전봉준의 호남동학군이 기포했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우리 경기동학군에서도 기포를 했단 말인가?” “그렇다네.” “경거망동하지 말라 하신 게 칠월 아니었던가?” “그랬었지.” “그런데 왜 이리 경황이 없으신 게야?” “오늘은 접주(接主)와 접사(接司)들만 은밀히 모이라 했으니 도소(都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