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에게 듣다(3)
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님을 만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쳐 우리 역사가 흘러온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시절을 건너 온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야말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구십 살이 넘은 생을 넘나드는 기억들을 풀어내며 선생의 생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선생의 말씀 속에 선생이 경험한 모든 것을 표현할 때 ‘감사한 마음’이었다. 주어진 삶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지난 호에 이어)
판문점 수용소로 가서는 생활이 어땠습니까?
수용소에서는 병원에 입원 환자를 만들어 입원을 시키면서 간호원을 통해 중앙정보부에다 연락을 하고 그랬어요. 거기 있는 동안에는 아무 작업도 없이 편했어요. 가서 설득만 한 번 받으면 끝나니까. 그런데 그것도 거부를 한 거예요. 안 하겠다고 들어가서 인민군 장교 멱살 잡고 막 두들겨 패고 그때 그랬는데, 그 당시 인도군들은 우리가 볼 때 군인 같지 않았어요. 그때 미군들 상대하다가 인도군 상대하니까 말 안 들었어요. 거기에서는 설득을 안 받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때 계속 설득을 시키려고 애를 써도 북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있어야지. 안 간다고 욕들만 하고 인민군 장교한테 막 대들고 설득을 거부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여기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어가서 지금 설득을 방해하고 있다고 그거 다 잡아내라. 그래야 설득하겠다. 그러다가 설득 기간이 끝난 거예요. 끝나면 1개월 동안 여유기간이 있어요. 6개월 동안 정치회담을 통해 포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할 거냐 하는 걸 회담에서 결정을 하게 됐는데 설득이 안 되었습니다.
미군은 무조건 1월 23일 날 휴전에서 규정된 그 날짜에 석방시키라고 하고, 북한은 설득이 안 됐으니까 서로 옥신각신하는 거예요.
우린 가운데 끼어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 만약에 설득이 안 될것 같으면 탈출하려고 그랬어요. 거기서 휴전선까지, 북한군 진지까지가 얼마 안 멀어요. 한 500m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포로 한 사람당 한 사람씩 교환하자 이렇게 또 했잖아요.
1대 1 교환 원칙이요. 원래는 그게 아니에요. 제네바 협정에서는 무조건 본국으로 송환시키게 된 거예요. 100% 다 송환시키게 돼 있는데 한국전쟁에서는 이게 참 특이하게 사상 문제가 나오기 시작을 한 거예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같은 한민족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정서나 언어가 통하는 거예요. 2차대전 때도 독일하고 소련하고 그랬는데, 많은 독일 포로가 소련으로 갔거든요. 이 사람들은 다 돌아오는 거예요. 그때는 서로가 송환을 거부하거나 그런 게 없었어요. 그런데 이게 한국전쟁만은 그런 게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1월 23일 날 석방이 되는데 그때 마지막에 북한에서 방송으로 계속 방송을 해요. 지금이 탈출의 시기라고. 지금 탈출을 못 하면 당신들은 일생 동안 후회할 거라고 막 공갈을 치면서 방송이 들어오는데, 거기는 휴전선 안쪽이잖아요. 북한에서는 방송이 맞바로 들어와요. 삐라도 막 보내고요. 그때 남쪽에서도 삐라 보내고 그랬어요. 우리도 북한에 풍선을 만들어서 밑에다가 불을 피워놓으면 그게 떠요. 거기다 삐라를 북으로 보내고 그런 적도 있었어요 그때.
그 삐라 내용은 뭐였어요?
‘김일성이 타도하자’, 이런 것들이죠. 저쪽에서 오는 거는 우리한테 오질 않아요. 그때 마지막 그 한 달 동안에 우리는 탈출할 걸로 생각을 해서 배낭 다 꾸려놓고 밤에 잘 때도 신발을 신고 잤어요. 만약에 탈출하게 되면 여기서 거리가 멀지 않으니까, 한국군 진지가 빤히 보이니까. 지뢰가 있어서 그렇지. 그때 궁을기를 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 궁을기, 태극기 그려서 다 그거 들고 갔어요. 태극기, 궁을기를 그때 들고 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여기 사진이 말씀하신 용산역에 도착한 사진인데 한쪽에는 궁을기, 한쪽에는 태극기가 보이네요.
1954년 1월에 우리가 석방되잖아. 석방돼 가지고 문산에서부터 차를 타고 가는데 우리는 객차가 아니라 화차거든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용산에 도착을 했어요. 도착하니까 중앙총부에서도 우리를 환영하러 나왔더라고요. 중앙총부 직원들이 저쪽에 있는데 우리 차가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직접 상봉을 하진 못했어요. 도착하자마자 김밥도 주고 선물들을 막 주고 그래요. 그래서 그거 먹으면서 내려갔는데 그때 선물 참 많이 받았어요.
그때 판문점에서 차에 올라타니까 미군들이 씨레이션을 주는 거예요. 씨레이션은 미군 야전 식량이죠. 그걸 한 박스씩 이렇게 주는 거예요.
그때 중국 중공군이 대만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통조림 같은 걸 가지고 왔더라고요.
그걸 또 나눠주더라고요. 인도군들도 설탕 같은 걸 한 봉지씩 주고 한국군은 포 같은 거, 그때 차 안에서 잘 수 있게끔 그걸 주고 이러는데 하여간 선물을 한 보따리씩 받았어요. 역에 도착할 때마다 환영하는 사람들이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받아서 가는데 한국군 보충대가 군산에 있어서 우리는 군산으로 간 거예요. 보충대까지 행군을 하는데 시민들이 나와서 환영을 하고 그러더라고요.
큰 배낭에 내 옷이며 책을 꽉 채워서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어요. 수용소 차 안에서 선물 받은 게 한 보따리였지.
태극기 배낭마다 꽂았지. 근데 그 한 1키로 되는 데를 가는데, 거기에서 방송으로 하는 말이 여러분들을 빨리 수용소로 가서 쉬게끔 하고 싶지만, 군산 시민들이 여러분에게 환영인사를 한다는 거야. 아침부터 나와서 환영을 받는데, 아이고 내가 그때 보따리 가지고 태극기 들고 압박과 설움에서..(벗어나는 구나) 아이고 그때 고생한 생각을 하면..
보충대에 들어가니까 그때부터는 위문단이 들어오더라고요.
그 와중에 천도교 부산종리원, 대전교구에 성금을 내셨다고 들었어요.
여기 월남한 천도교인들이 51년 1월 1.4후퇴 때 부산에 있는 종리원에 모이신 적이 있어요. 부산시교구 자리에 천도교인들이 모이기 시작을 한 거예요. 난 수용소 안에 있어서 거기는 못 갔고 그때 내가 가야수용소에 있을 때인데, 부산종리원이 어려우니까 거기를 돕자고 해가지고 사지스봉을 벗어서 보낸 적이 있었어요.
그때 돈들이 그쪽으로 많이 나갔을 거예요. 대전교구도 그랬죠. 거기 모금 운동을 하잖아요. 그 사지스봉 같은 거 팔아요. 미군들이 내주는 수용소 옷들 전부 사지스봉들이거든요. 그때 그것들 내다 팔아서 도와주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팔 수가 없으니까 못 팔고 보내는 거예요. 그걸 거기서 팔았겠죠.
계속 말씀해주세요. 그 안에서는 그럼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이가 스무 살도 안 된 사람이 여기서 나가서 갈 수 있는 길은 딱 군대밖에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거기에 며칠 있으면서 가만히 보니까 도저히 뭐 딴 길이 없어. 그래, 군대 가자 이렇게 생각했지. 그리고 자꾸 군대를 권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원을 해서 군대에 들어간 건데, 우리 수용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조직에 그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때 수용소 안에서는 바로 소대, 분대 편성까지 다 돼 있었거든. 거의 그대로 들어갔어.
군인이 되는 길을 선택하셨군요. 인민군 생활이랑은 많이 달랐지요?
논산훈련소 25연대 10중대에 들어갔는데 참 실망스러운 게 누비옷, 중공군 같은 옷, 몇 번이나 입었는지 때가 반질반질하게 새까만 옷을 주더라고요.
게다가 밥은 요만큼씩 주죠. 그때 실망이라는 건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이 새끼, 저 새끼 소리가 막 나오는 거야. 수용소 안에서 반장하던 사람, 분대장 하던 사람이 여기 들어 와서 또 분대장을 하는 거예요.
수용소 안에서도 훈련장 갈 때 국군보다도 더 질서정연하게 노래 부르면서 군가 부르면서 갈 수 있었어 우리는.
사격장에 가서 사격을 하는데 이 사람들 대부분이 전쟁터를 겪었던 사람들이잖아. 그러니까 사격 명중률이 아주 높아서 논산훈련소 창설 이래 처음 이런 성적 났다고 소장이 와 가지고 막 칭찬을 하더라고. 전쟁터에 나갔던 사람들인데, 신병, 농사꾼들 데려다 놓고 교육 시킨 것하고 다르잖아.
군가를 누가 배워주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배웠거든.
조교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거예요. 이 새끼, 저 새끼 소리를 못해. 그렇게 단결이 돼서 논산훈련소에서 훈련하는데 내가 그때 소대장 노릇을 했어요.
그런데 대장을 했던 현역 육군 소위가 와서는 나보고 자꾸 장교로 가라는 거예요. 간부 장교로 가라고. 언제 시험이 있다고 알려주면서 그 사람이 권하는 바람에 지원서를 냈죠.
간부 장교 시험 때, 시험장에 가서 내가 수학은 100점 맞을 수가 있었고, 영어도 내가 수용소에 있으면서 좀 배웠으니까 괜찮은데 국어나 역사 같은 거는 전혀 못 했어요. 그때 내가 보기에도 성적이 간들간들할 정도로 내가 겨우 합격 됐을 것 같아요.
면접을 보러 면접장에 딱 들어가니까 대위급들이 한 4~5명이 쭉 앉아 있는데 한 사람씩 불려서 들어갔어.
그렇게 면접을 보고 다시 군인이 되었지.
선생님 그리고 또 월남전도 갔다 오신 거죠? 전쟁도 겪으시고 시대의 비극을 차례로 지켜보셨네요.
군대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다 보니까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아무 데 끌고 다녀도 괜찮았어요. 어디 가도 초등학교 다닐 수가 있었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집사람하고 애들은 남고 나만 따로 왔다 갔다 해야 되는데 서로 불편한 거예요. 그때부터는 제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대하려면 20년 만기를 채워야 연금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월남에 가게 되면 2년이 가산이 돼요. 그래서 월남 지원을 한 거예요. 그때도 운이 좋았어요. 그것도 내가 월남 가기 전에 화학학교에서 본부 중대장을 했어요. 화학학교에서 내가 핵무기 원리 강의를 했어요. 강의를 하다가 본부 중대장을 하라고 해서 중대장을 맡았죠. 그리고 월남에 갔다 와서 바로 제대를 했어요. 참 어려운 시절을 지나왔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요.
선생님, 이제 제대 이후의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천도교 교단에서 아주 오래 직책을 맡아 일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교단 안에서 일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처음 교단에 들어와서는, 재단 일을 했어요. 76년 9월 달에 천도교 유지재단의 관리과장으로 들어온 거예요. 교단에 들어오게 된 동기가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하고 같이 천도교 활동을 했던 사람이 여기 감사원장으로 계셨던 이재순 선생이라고 그분이 감사원장을 했어요.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내가 중학교 때 선생으로 있던 신덕순 씨가 감사원장이 된 거예요. 아버지하고 친구였던 이재순 선생이 처음 날 만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자네 아버지가 무척 교회를 위했었네. 근데 자기네 아버지는 이 경운당 88번지 근처에도 못 와 봤어. 자네가 여기에 들어와서 일을 한다면 자네 아버지가 중앙총부에 우리 아들이 근무한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겠나.”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들어오라는 거야.
그런데 그때 천도교에 들어올 생각은 안 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그때 군대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받던 봉급이 18만 원인가 했는데 총부 월급이 5만 2천 원이야. 그런데 그분이 몇 번 권하시는 바람에 그때 들어온 거예요.
선생님 여기 재직하기 시작했을 때 수운회관만큼 이렇게 높은 건물이 있었나요?
없었어요.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 이 수운회관 1층, 2층이 유정회가 들어왔어요. 그다음에 3, 4층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있었어요. 그다음으로 5층에서부터 11층까지에 수협이 들어왔어요.
다 국가기관들이니까 아주 싼 전세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다른 곳에 비해서 전세금 부담도 3분의 1 정도의 값으로서 들어오게끔 그렇게 된 거예요.
들여다 보니까 전세금 받은 게 6억 정도가 되는데 월세 수입 들어올 데는 절반층 밖에 없어요. 그러니 그 적자가 계속 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때 수운회관이 영국제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었는데, 서울 시내에서 유일했어요. 수세식 변소 설치가 되어 있었고요. 그리고 이 마당이 얼마나 넓어요. 주차장도 잘 돼 있죠. 중앙청도 가깝죠. 그러니까 여기가 최고의 인기 건물이 돼서 정부기관이 다 차지한 거예요. 그래서 나는 사무국장으로 들어와가지고 이 사람들하고 싸워서 내보내려고 그러는 거예요. 통일주체국민회의 같은 곳을 내보내면 3배 정도 임대료를 높이 받을 수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계속 싸워서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정회를 내보냈고 수협도 나갔어요.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 손실이 1년에 4천만 원 정도가 나고 그랬는데 내가 들어와서 흑자로 변해서 수협이 마지막 나갈 때 전세금 21억원을 받았던 걸 거의 다 갚았어요. 나 있을 때는 임대 안 된 평수가 없었어요. 감사하게도 100% 임대할 정도로 그렇게 했지요.
선생님 지금까지 교단의 일도 그렇지만 선생님이 살아오신 삶을 통틀어서 보면 정말 파란만장하게 살아오셨어요.
그렇죠. 저는 진짜 파란만장한 생활을 했거든요. 진짜 소설 같은 삶을 산 거예요. 사실 난 이북에서 고등학교도 채 졸업 못했잖아요. 남한의 아무 근거가 없는데 내가 이 사회에서 와 가지고 그래도 참 무난하게 살았어.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가 할 정도로 그렇게 순조롭게 살아갔어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 군대 생활하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리고 수운회관에 들어와서 천도교에 다시 들어오게 된 것도 우연찮게 들어오게 됐고 그러고 나서 지금 내 가정생활도 그래요. 아들 형제 둘 뒀거든요.
둘이 다 나보다는 다 훨씬 잘 됐어. 다 사장들하고 그래.
그러고 거기에 나온 손녀 손자들이 5명인데 다 괜찮아요.
제 앞길 다 잘 할 수 있는 애들이야. 그렇게 나는 내 가정생활에도 축복받았어요. 제일 불행한 세대로 태어났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살았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늘 감사한 생각이에요. 9시 기도식 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요.
다른 건 뭐 없어 진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됐어요.
마지막으로 선생님 하시고 싶은 말씀 그리고 다음 세대들에게 천도교가 어떻게 나아갔으면 좋겠는지 한 말씀부탁드려요.
제일 중요한 게 수련이에요. 우리는 내게 모신 한울님을 내가 진짜 모시고 있다는 걸 깨닫는 거예요. 기독교 같은 데는 성경 말씀대로 내세가 있다고 하니까 있는 걸 믿는 거 잖아요. 우리는 달라요. 우리는 실천을 해야 해요. 내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걸, 그걸 못 느끼면 인내천이 안 돼요.
모든 어린이도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서 존경해야 한다고, 그게 내가 모신 한울님을 내가 느끼기 전에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수련부터 해야 해요. 지금 일반 사람들한테 생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으면 종교가 필요하다고 답하는 사람이 6%밖에 안 된대요.
그다음 제일 중요한 게 건강이라는 게 건강이 50 몇 프로예요.
그다음 세 번째가 중요한 게 가정 행복이에요.
그러니까 수련을 하게 되면 건강해지고 가정이 행복하다고 하는 교리로써, 수련을 해야 해요.
난 그래서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보다는 체험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직접 한울님 모시고 있다는 강령 체험하게 되면 그걸 느껴요.
내 안에 나 아닌 다른 게 뭐 있는 거예요. 모든 게 내 임의로 하는 게 아니에요. 막 발광하다시피 하는 게 내가 임의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몸으로 느끼는 것, 그걸 한 사람이라면 거의 신앙인이 다 돼요.
선생님은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 언제 느끼세요?
우리는 달라요. 우리는 사람을 상대로 그분을 한울님으로 모셔야 하고 자연을 또 한울님으로 모셔야 하는 거예요. 자연까지도요.
그래서 난 앞으로 우리 천도교는 지금 기상이변 같은 게 일어나는 걸 보면서 앞으로 천도교의 시대가 될 거라고 난 그렇게 봐요.
지금 우리 사회는 환경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천도교의 교리는 한울님을 존경하고 사람을 존경하고 자연을 존경하는 데 있는데 그렇게 돼야 한다고 봐요. 풀 한 포기도 다 한울님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사람 몸에 오장 육부라고 하는 게 심장이라든가 폐라든가 간이라든가 이게 다 죽고 나면 살덩어리예요.
근데 어떻게 거기에서 영양분을 섭취해서 뇌로 보내고 위장으로 보내고 이걸 보내고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해주고 그다음에 호흡도 해주고 맥박 뛰는 것도 일정하게 해주는 거 그건 누가 해주느냐, 한울님이에요. 한울님이 계시니까 그게 가능한 거예요. 우리가 밥을 떠서 입에 넣어서 씹어서 삼키는 것까지는 내가 하지만, 그러나 안에 들어가서 영양분으로서 소화시키고 배포하는 건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한울님이 하는 거예요. 그 안에서 그걸 느끼는데, 하는 그래서 틀림없이 한울님이 같이 계시다는 거예요.
끝.